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따르면, 세 가지 방식 중의 하나로 - 자연발생적으로 부모 중 한쪽으로부터, 부모 양쪽으로부터 - 가능하다. 그가 자연발생을 믿었다는 것은 그의 수중에 있었던 관찰 방식들로 보건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부모 중 한쪽에 의한 무성생식은 식물들에서, 그리고 식물들처럼 고착된 동물들에서 발생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방식이 부모 중 수컷의 기여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암컷이 제공한 물질에 일정한 형상을 각인하는 것이라는 결론 쪽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_ W.D. 로스, <아리스토텔레스>, p160


 자연발생설은 고대는 물론 중세 말기까지도 널리 신봉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건조를 시켜도 습해지는 것이나 습하게 해도 건조해지는 것은 모두 동물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잘못된 학설은 16 ~ 17세기에 유럽을 풍미한 탐구 정신에 밀려 그다지 오래 버티지 못했다. _ 파스퇴르, <자연발생설 비판>, p15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 ~ 1895)는 실험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5 ~ BC 322)의 자연발생설을 비판한다. 근대 과학의 합리주의 영향으로 실험조건을 통제하고, 조건하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는 실험은 논리적으로 가설을 뒷받침할 수 있었다. 파스퇴르의 실험 또한 과학적 합리성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랜 이론을 폐기시키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지구상의 어떤 장소에서 채취하든 소량의 공기는 임의의 침출액 속에서 미생물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우선 완전히 투명한 유기물의 침출액을 선택합니다. 이 침출액은 온도가 15 ~ 25도로 유지되면 그 다음날에 완전히 흐려질 만큼 변질되기 쉬운 것입니다. 이 대단히 변질되기 쉬운 침출액을 플라스크에 일정량 담고 플라스크의 목을 길게 늘여뜨린 다음 액체를 끓입니다.... 지금 이 플라스크의 목을 깨뜨립니다. '슈'하는 소리를 들으셨겠지요. 공기가 세차게 들어가고 있는 소리입니다. 플라스크 안이 진공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 플라스크를 봉합니다. _ 파스퇴르, <자연발생설 비판>, p168


 만약 자연발생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액체는 변질할 것이고, 변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변질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결과를 말씀드리면 이 플라스크들 가운데 몇 개에서는 미세동물이나 곰팡이가 결코 발생하지 않았으며, 완전히 본래 상태를 유지하였습니다. 따라서 여러분, 자연발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_ 파스퇴르, <자연발생설 비판>, p169


 도대체 어떤 경우에 변질하지 않은 플라스크가 제일 많이 나옵니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먼지가 많은 플라스크가 제일 많이 나옵니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먼지가 많은 거주지역이나 습기가 많은 저지대를 떠나 산으로 올라가든지, 또는 지하 깊숙이 내려가는 경우 입니다._ 파스퇴르, <자연발생설 비판>, p170


 그렇지만, 단순히 과학적 합리성 또는 실험이라는 방법만으로 성과를 이룰 수 있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당대 학자들의 기준에서는 누구보다도 관찰과 사례를 중시했던 학자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를 과학적 합리주의라는 사상의 성과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파스퇴르에게 프라스크와 가열시킬 수 있는 도구, 미생물을 발견할 수 있는 현미경 등이 없었다면, 그는 자연발생설을 과연 그처럼 비판할 수 있었을까? 반면, 같은 도구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주어졌더라도 그는 같은 주장을 했을까? 그런 면에서 우리는 역사의 발전 단계에서 강조되어온 사상의 변화 만큼 도구의 변화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도구의 발전이 가져온 적절한 때(時)와 사상이 만났을 때 비로소 역사가 이루어짐을 파스퇴르의 <자연발생설 비판>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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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북조선 :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를 써서 출판한 것은 1998년 3월이었다. 김일성 사망 후 4년이 지나 김정일 체제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나는 그 새로운 체제, 즉 김일성 사후의 체제변화를 포착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책에는 ‘유격대국가‘가 계승되었다고 썼지만, 그것은 이미 북한에서 사라진 상태였다...몇달 뒤 나는 김정일의 새로운 체제를 ‘정규군국가‘로 본다고 보고했다.(p7)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는 김일성의 항일무징투쟁이 있었던 1932년부터 김정일 이 사망한 2012년까지를 개설한 역사책이다. 제3자인 일본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 책은 여러 면에서 거시적 관점에서 러일전쟁을 조망한 「러일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개별 사건에 매몰되지 않고 상황과 당사자들의 관계에 집중한 저자의 서술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본질에 보다 가까이 다가간다.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의 장점은 인과관계로 개별사건을 묶어 알기쉽게 독자에게 소개한다는 점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저자의 안내로 우리는 유격대국가 시기의 북한에서 갑산계, 소련계, 연안계 등의 치열한 권력 투쟁이 1950년대 공산주의 국가들의 갈등과 분열이라는 국제정세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1960년대 무장공비의 남침이 당시의 베트남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과 1978년 신상옥, 최은희 납치사건이 김정일 체제 구축과 연관된다는 것 등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단편적인 사건으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북한의 행위가 사실은 치밀한 정치, 외교 행위였음이 보여진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강대국을 상대로 대등하게 맞서는 북한 외교의 실력이 어디에서 나왔는가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는 가까우면서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북한역사에 대한 좋은 개론서라 여겨진다. 여기에 서동만 교수의 책을 더하면 보다 북한 역사 지식에 깊이를 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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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철저히 서양 중심적인 시각으로 쓰인 책이다. 오시만 제국의 몰락과정을 설명하다 보니 당연히 가장 큰 대외 요인이었던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중점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자 참고한 여러 문헌들과 본문 곳곳에 인용된 당대 정치인들의 일기 및 서신들에서는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오스만인들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보니 오스만 제국의 초상은 마치 유럽 열강들의 선심 덕에 간간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환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_ 앨런 파머, <오스만 제국은 왜 몰락했는가>, p456, 역자후가 中 


 앨런 파머(Alan Palmer)의 <오스만 제국은 왜 몰락했는가>는 옮긴이의 말처럼 철저하게 유럽의 시각에서 바라본 제국의 몰락사다. 20세기 초반 제1차 세계대전으로 공식적으로 해제된 오스만 제국. 제국이 이와 같이 붕괴하게 된 원인을 저자는 성(聖)과 속(俗)의 대립으로 바라본다. 

 

 많은 도전들을 극복하며 살아남았던 오스만 제국이 종국에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술탄제와 이슬람교 사이의 관계가 더 중요한 논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스만 제국의 근저에 깔려 있던 종교적인 성격은 제국의 장점이자 약점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서유럽의 혁명기 동안 중앙집권정부라는 새로운 개념이 오스만 제국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그 후 세속 정치가들은 종교 성직자들이 집요하게 고집하고 있던 특권들을 점점 잠식해 갔고 징병제나 의회와 같은 서구적인 제도들이 오스만 제국에서도 실행가능한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술탄들은, 유럽과 아시아 영토 모두를 보존하고 싶어 했던 것처럼, 속세와 종교계 모두의 수장이기를 원했다.  _ 앨런 파머, <오스만 제국은 왜 몰락했는가>, p449


  종교계와 세속계의 대립이라는 구조적 문제에서 16세기 대항해시대와 함께 밀려드는 신대륙에서의 은 유입이 제국의 경제구조를 흔들었고, 이미 구조적 모순을 갖고 있는 제국은 붕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렇지만, 20세기 초반 대한제국의 강제병합이라는 아픈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저자의 이러한 논리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현대 학계에서 하렘 정치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역사가들일지라도 17세기 중반 제국이 쇠퇴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들은 인정하고 있다. 그들은 이 당시 적어도 여섯 가지의 만성적인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제노바와 라구사(두브로브니크) 출신의 상인들이 페루에서 가져온 싸구려 은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은 더욱 악화되었고 그 결과 기초 식량가는 3배로 인상되었다. 피라미드식 구조의 티마르 조세 징수제도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으며 아나톨리아에서는 인구폭발로 인해 산적이 횡행하였고 초만원이 된 여러 도시들에서는 파괴적인 화재가 발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쟁 수행 방법과 정복지 통치 방식을 옛 것 그대로 고수하려는 완고함과 1536년부터 유럽 국가들과 체결하기 시작한 '특권협정 Capitulations'도 위의 현상들과 함께 당시의 문제점들로 지적된다.... 힘없이 무너지고 있는 제국의 이러한 징조들을 당대의 술탄의 신민들이나 외국의 관찰자들은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_ 앨런 파머, <오스만 제국은 왜 몰락했는가>, p21 


 성(聖)과 속(俗)이라는 서양 중세의 정치 구도 형태를 그대로 대입해서 분석하는 관점은 이슬람 문화만의 고유성을 무시하고, 역사의 도식에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강제로 끼워 넣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뒤에 은폐된 제국주의 시대의 중동을 향한 유럽 열강들의 침탈이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이 책은 역사의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소 그 뜻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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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생각만 해도 소스라치고 전율이 내 몸을 사로잡는다네.

 어째서 악인들은 오래 살며 늙어서조차 힘이 더하는가?

 자식들은 그들 앞에서, 후손들은 그들 눈앞에서 든든히 자리를 잡지.

 그들의 집은 평안하여 무서워할 일이 없고 하느님의 회초리는 그들 위에 내리지도 않아 그들의 수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그들의 암소는 유산하는 일 없이 새끼를 낳지. <욥 21 : 6 ~ 10>


 정녕 악인들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타오르지 않네. 

 그 천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를 비추던 등불은 꺼져 버리지. 

 그의 힘찬 걸음걸이는 좁아지고 그는 자기 꾀에 넘어간다네. <욥 18 : 5 ~ 7>


 <성경>의 여러 편들 중에서 <욥 기>가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감동을 준다면, 그것은 선한 이가 상을 받는다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주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자신의 죄(罪)로 인해 벌(罰)을 받는다는 뿌리깊은 인식에서 벗어나 선한 이들이 어렵게 사는 반면, 악한 이들이 잘 사는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욥 기>에는 담겨있다.


 빌닷의 발언 두 번째 부분에서 교부들은 욥에 대한 그의 질책과 비난이 왜 잘못됐고 근거 없는지 지적한다. 동시에 빌닷의 발언에서 부분적 진실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그 진실은 인간적 영광의 일시적 특성에 대해 그리고 불경한 이들과 교만한 자들의 절망적 삶과 피할 수 없는 형벌에 대해 윤리적 성찰을 할 수 있게 한다. _ 만리오 시모네티 등, <교부들의 성경 주해 구약성경 6 : 욥기>, p173


 동시에, 욥과 세 친구들의 이야기는 명확히 선(善)과 악(惡)을 구별할 수 없게 한다. 

 자신의 불행을 탓하며 운명을 저주하는 욥의 모습에서 의(義)인의 전형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처럼, 독자들은 오히려 욥과 대립하는 세 친구와 엘리후의 대화 속에서 의로움을 발견한다. 아마도 이것은 교부들이 말한 바처럼 <욥 기>의 인물들 성격이 입체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욥 기>에서 논쟁이 이루어지는 문제들은 사회공동체의 파괴와도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쉽게 답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이처럼 복합적인 인물들과 현실적인 문제들은 날선 공방을 펼친다. 선한 이가 받는 벌과 악인들이 누리는 영화, 저주하는 의인과 회개를 권유하는 친구들. 그렇지만, 이들의 공방은 쉽게 정리되지 않고, 끝없는 논쟁만 이어질 뿐이다. <욥 기>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자네의 시작은 보잘것 없엇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이 사실은 욥을 책망하는 친구의 말 <욥 8 : 7>임을 생각해본다면, <욥 기>는 여러 면에서 우리를 혼돈의 카오스(Chaos)로 내모는 어려운 책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책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욥의 문제가 우리 자신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리라. <욥 기>는 논쟁을 이어가면서 결국 평행선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 지점은 인간 이성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갈등이 해소되는 지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보아라, 주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며 악을 피함이 슬기다. <욥 28 : 28>


 인간은 창조된 이후에는 이성의 안내를 받아 각 요소들에서 얻을 수 있는 유용함이 무엇인지 파악했습니다. 땅은 파종에 적합했고, 파종은 농업을 위한 것이었으며, 농업은 특별한 작물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나무는 배를 만들고 건물을 짓는 데 유익했습니다. _ 만리오 시모네티 등, <교부들의 성경 주해 구약성경 6 : 욥기>, p229


 지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리오? 슬기의 자리는 어디리오?

 사람은 그것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하고 생물들의 땅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네.

 대양도 "나에게는 그것이 없어." 하고 바다도 "그것은 내 곁에 없어." 한다네. 

 금덩어리로도 얻을 수 없고 그 값은 은으로도 잴 수 없으며

 오피르의 순금으로도 살 수 없고 값진 마노나 청옥으로도 안 되네...

 비의 법칙과 뇌성 번개의 길을 정하실 때

 그분께서 지혜를 보고 헤아리셨으며 그를 세우고 살피셨다네. <욥 28 : 12 ~ 28>


 <욥 기>에서 극적인 갈등의 해소와 화해는 욥이 이성(理性)의 한계를 인정하고, 지혜를 받아들이면서 이루어진다. 태초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어디있었는가에 대한 물음과 갈고리로 레비아탄을 낚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욥이 자신의 무지(無知)와 무능(無能)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통해 욥은 자신을 내려놓는다.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욥 42 : 1 ~ 6>


 교부들에 따르면, 욥은 하느님의 전지 全知와 하느님께서 인간 삶의 모든 사건을 통제하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때 하느님에게 의로움을 인정받는다. 욥은 진실한 겸손과 온전한 참회를 보여 준다. _ 만리오 시모네티 등, <교부들의 성경 주해 구약성경 6 : 욥기>, p318


 <욥 기>의 끝에 이르러서도 욥이 제기한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한 답(答)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욥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한계를 일깨우며 삶의 뜻을 헤아리고 판단하기에는 부족하므로, 겸손되이 받아들이라는 열린 결말이 제시되며 <욥 기>는 마무리된다.


 <욥 기>에서는 고난을 받는 선한 이가 고통을 당하는 현실 문제에 대해, 신상필벌(信賞必罰)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대신, 그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지혜 안에서 살아갈 것을 강조한다. 또한, 섣부르게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답을 주는 대신 인간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그 의미를 찾을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지혜 문학의 정수가 담겼다는 평가에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욥 기>의 마지막은 화해를 이룬 욥이 더 큰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이야기로 끝나지만, 이는 <마르코 복음> 16장 9절 이후 추가된 내용이 <마르코 복음>의 전체 내용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듯, <욥 기>의 대주제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 삶의 지향점에 복(福)이 주어질 필요는 없을 것이기에. 

 

 내 조국 테바이 주민들이여, 보시오. 저분이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는 더없이 권세가 컸던 오이디푸스요.

 어느 시민이 그의 행운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았던가!

 보시오, 그런 그가 얼마나 무서운 불운의 풍파에 휩쓸렸는지!

 그러니 항상 생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기를 지켜보며 기다리되,

 필멸의 인간이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마시오.

 그가 드디어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는. _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1524 ~ 1530


  다른 한편, 인간의 유한성과 삶에 대한 순응은 소포클레스(Sophokles, BC 497 ~ BC 406)의 <오이디푸스왕>에 나타난 휘브리스(hybris)에 대한 경고와도 통하는 바를 발견하지만, 조금은 결이 다름을 느낀다. 그것은 아마도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의 차이의 일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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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0-15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욥의 고난과 역경을 확실히 기존의
권선징악적 개념으로 해석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
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가 닿을 지
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현재를 사는 우리 인간이 어
떻게 만세에 이르는 신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인가...

기독교가 바울에 의해 재정립되고
세계 종교로 도약하게 되면서 기존의
헤브라이즘 사고에서 벗어나게 되긴
했지만, 그 영향력은 배제할 수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겨울호랑이 2020-10-15 09:47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욥의 고난과 제기되는 물음은 인간의 무력함으로 알 수 없기에, 신의 뜻으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는 이와 같은 신의 뜻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여겨집니다. <교부주해 구약성경>에서 교부들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면서 의미를 확장시켜 나가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기독교는 헤브라이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와같다면 2020-10-18 0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절실한 필요에 하나님이 왜 응답하지 않는지, 우리의 헌신과 진심에 마땅한 보상과 만족을 왜 허락하시지 않는지 몰라서 우리는 놀라고 자책하며 숨죽여 살아갑니다

나와같다면 2020-10-18 0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욥기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성경의 답이요, 위로입니다. 고통과 환란은 형통과 안심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의 욥기 설교 [JOB] 중 교우들에게 하신 글입니다

흠.. 저는 뭔가 마음 깊은 의문이 들거나, 위로가 필요할 때면 욥기서를 찾게되는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 2020-10-18 05:45   좋아요 1 | URL
저 역시 「욥기」는 인간이 풀 수 없는 문제를 마음에 안고 살아가야할 때 큰 힘을 주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안식을 주는 책. 여기에 「욥기」의 뜻이 담겨 있다 생각해 봅니다...
 

 

1노동일이 6시간의 필요노동과 6시간의 잉여노동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한 사람의 자유로운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매주 6 * 6, 즉 36시간의 잉여노동을 제공한다. 이것은 그가 1주 중 3일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노동하고, 3일간은 자본가를 위해 공짜로 노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직접 눈으로 알아차릴 수 없다. 잉여노동과 필요노동이 서로 하나로 합쳐져 있기 때문이다... 1주일 중 3일간의 잉여노동은, 그것이 부역노동이든 임금노동이든, 여전히 노동자 자신에게는 아무런 등가물도 주지 않는 노동이다. 그러나 잉여노동에 대한 탐욕은 자본가의 경우에는 노동일을 무제한으로 연장하려는 충동으로 나타난다. _ 마르크스, <자본론 1-(상)>, p315


 지난 주에 간병인을 급히 채용해야할 일이 생겨 이와 관련한 협의를 했다. 어느 경우에나 가장 민감한 부분은 급여 수준과 조건. 임금은 1주일에 *만원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큰 무리는 없었지만, 휴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간병인은 일주일 이상 간병을 할 경우 유급 휴일이 1일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면서, 만약 안된다고 하면 쉬지 않고 해도 된다는 말씀을 덧붙였기 때문이었다. 법적으로도 일주일 노동을 제공하게 된다면 휴일은 보장되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노동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노동자는 노동과정의 일부 기간에서는 오직 자기 노동력의 가치[즉 자기에게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를 생산할 뿐이다. 그의 노동은 사회적 분업체계의 일부를 구성하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생활수단을 직접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상품의 형태로 자기 생활수단의 가치와 동등한 가치, 또는 그가 생활수단을 구매하는 데 필요한 화폐와 동등한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다.(p287)... 나는 1노동일 중 이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부분을 필요노동시간이라고 부르며, 이 시간 중에 수행하는 노동을 필요노동이라고 부른다. _ 마르크스, <자본론 1-(상)>, p288


  간병인이 내게 이런 말씀을 먼저 꺼낸 것은 이전에 휴일없이 계속 근무하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또는 휴일이 있다면 무급으로 해야한다는 요청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을 해본다. 그렇지만, 일반 기업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는 경우에도 유급 휴일제도가 적용되는 현실에서 단기계약직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차별이 아닐까. 휴일없이 근무하거나, 무급휴일을 강요한다면 이는 재생산 비용을 노동자에게 강요하는 19세기 산업자본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맑스의 사회는 한편에서는 노동을 동력으로 생산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교환과 화폐를 통한 추상과정을 매개로 생산되는 결과물이다.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는 노동력의 가치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나타난다. 맑스는 잉여가치의 사회적 창조가, 중상주의자들이 말하는 유통이나, 중농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연적 노동이나, 고전 정치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기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회적 노동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_ 조정환, <인지자본주의>, p490


 만약, 노동가치설(勞動價値說, Theories of Labour Value)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노동의 가치는 노동자의 휴식에서 나올 것이다. 휴식을 통해 노동의 재생산이 가능하다고 본다면, 오히려 생산과정은 노동의 가치이전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사용한 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대가는 사용자가 지불해야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으려는 생각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 결과 나이키의 아웃소싱(Out sourcing)이 성공적인 기업 혁신 사례로 인정받고, 위험의 외주화가 보편적인 현상이 되버리게 되었다.


 우리는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 정규직 문제를 말하며 이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지만, 정작 우리들 자신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르디외가 <구별짓기>에서 지적한 '아비투스'의 말처럼 개인의 이기적인 태도가 오늘날 우리사회의 문제점을 만들어낸 것이라면, 우리는 이 모든 잘못을 글로벌 대기업이라는 모호한 대상이 만들어낸 적폐(積弊)로 모든 문제를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아비투스 habitus는 아리스토텔레스의 'hexis' 개념에서 발전된 것으로, 원래는 '교육 같은 것에 의해 영향받을 수 있는 심리적 성향'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부르디외는 사회구조(즉 장)와 개인의 행위(즉 실천) 사이의 인식론적 단절을 극복하는 매개적 매커니즘으로서 개념화한다. 즉 아비투스는 일정방식의 행동과 인지(認知), 감지(感知)와 판단의 성향체계로서 개인의 역사 속에서 개인들에 의해서 내면화(구조화)되고 육화(肉化)되며 또한 일상적 실천들을 구조화하는 양면적 매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습관'은 반복적이며, 기계적이고, 자동적이며, 재생산적인데 반해서, 아비투스는 고도로 '생성적 generateur'이어서 스스로 변동을 겪으면서 조건화의 객관적 논리를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_부르디외, <구별짓기> , p30 해제 中


 간병인을 구하면서 너무 많은 생각을 했지만, 결론은 간병인 분은 지난 주말에 쉬셨고, 내가 주말 하루를 대신 간호를 했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에 대해서는 지식인 마을 시리즈의 <부르디외 & 기든스 : 세계화의 두 얼굴>에서 정리하는 것으로 하고 이만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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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10-13 2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법에 주휴일 의미를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10-13 23:11   좋아요 0 | URL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유휴수당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막상 지급하는 입장에 서면 이를 외면하게 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속성임을 다시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상황이겠지요...

페크pek0501 2020-10-14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친정어머니가 몇 년 전에 입원하셨을 때 제가 항상 곁에 있을 수 없어 간병인을 두었었어요.
그 간병인의 말씀이 잘 부탁한다며 덤으로 돈을 더 주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약속한 돈보다 적게 주는 사람도 있다더군요. 인간은 참 다양한 것 같았어요.

겨울호랑이 2020-10-14 22:02   좋아요 1 | URL
제 경우에도 간병인께서도 근무조건과 급여 수준이 경우에 따라 다르다고 하시더군요. 사람들마다 요구조건이 달라서 대체로 수용하시는 편이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표준 근로조건과 표준 임금 등이 정해지지 않은 업종이 아직도 많이 있음을 실감합니다. 대체로 정해지지 않은 업종에 종사하는 분들의 처우가 열락하기에 이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함께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