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와 「아리랑」. 한국 근대시기를 다룬 두 작품에서 다른 느낌을 받는다. 「아리랑」에서는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면, 「토지」에서는 등장인물에 주름살처럼 세월이 새겨진다. 마치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를 보는 듯 다른 관점의 두 작품을 통해 민족의 아픈 시기를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은 아픔과는 결이 다른 축복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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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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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더는 다양한 행위가 일어나는 작인의 장소나 안정된 정체성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양식화된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시간 속에 희미하게 구성되고, 외부공간에 제도화되는 어떤 정체성이다. 젠더 효과는 몸의 양식화를 통해 생산되고, 따라서 이 효과는 몸의 제스처, 동작,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양식들이 안정된 젠더 자아라는 환영을 구성하는 일상적 방법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정형화된 젠더 개념은 본질적 정체성의 모델이라는 토대에서 빠져나와, 구성된 사회적 일시성으로서의 젠더 개념을 요구하는 토대로 이동하게 된다. 의미심장하게도, 만일 젠더가 내부적으로 불연속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제도화되는 것이라면, 본질의 외관은 바로 그 구성된 정체성, 즉 수행적 성과물이 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349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는 <젠더 트러블 Gender Trouble>에서 젠더를 불연속적이며, 수행적 성과물로 정의한다. '남성'여성'의 안정적 이분법 체계를 기존 권력 구조의 산물로 규정하고, 그의 결과물인 '이성애'를 거부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젠더 트러블>. 우리는 책을 통해 안정적이고 연속적인 체계를 거부하고, 불안정적이고 불연속적인 새로운 질서를 만난다.  버틀러가 본문에서 던지는 첫 질문은 과연 '섹스와 젠더는 구분될 수 있는가?'이다. 이에 대한 버틀러의 답은 '섹스는 젠더다' 이며 구분될 수 없다고 단언하지만, 엄밀하게는 '구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이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기존 권력 구조의 정치적 조작이기 때문에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섹스를 담론 이전의 것으로 생산하는 것은, 젠더라 지칭되는 문화적 구성장치의 결과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담론 이전의(pre-discursive) 섹스'라는 결과를 생산하면서, 바로 그 담론적 생산 작용은 은폐시키는 권력관계를 포과하기 위해 젠더의 공식은 어떻게 수정되어야 할까?(p98)... 따라서 섹스는 담론 이전의 해부학적 사실성으로 볼 수 없다. 사실, 섹스는 그 정의상, 지금까지 줄곧 젠더였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99


 '주체'의 문제는 정치학, 특히 페미니즘 정치학에서 중대한 문제다. 왜냐하면 사법적 주체라는 것은 정치학의 사법적 체계가 굳어지면 필경 '보이지 않는' 어떤 배타적 관행을 통해 생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체의 정치적 구조화는 특정한 합법화의 목표, 배타적 목표를 갖고 진행되는 것이며, 이 정치적 조작(操作)은 사법 권력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는 정치적 해석이 있기에 효과적으로 은폐되어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사법적 권력은 자신이 그저 재현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생산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87


 버틀러는 이분법 대신 '젠더'안에서 통합된 관념을 제시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섹스가 젠더라고 말하지만, 젠더가 섹스인 것은 아니다.(섹스는 젠더의 충분조건이다.)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는 구별/구분을 벗어나 통합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젠더 트러블>에서 저자는 우리 몸의 소화기관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몸은 하나가 아니다. 가늘고 긴 소화관이 입으로부터 항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구분짓는다. 평소 우리는 이러한 점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음식을 먹을 때 우리 몸은 '윗턱-아래턱'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느낀다. '음식'이라는 타자를 통해 우리 내면 안에 위치한 외면이 인식되는 것처럼 이분법 체계가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우리 내면과 외면을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이처럼, 우리의 세상은 불안정하고 모호하다.


 내부와 외부의 구분도 그렇지만, 몸의 경계도 원래 정체성의 일부였던 것을 더러운 타자로 방출하거나 전환하면서 확립된다... 주체의 '내부'와 '외부' 세계의 분리를 통해 구성되는 것은, 사회적 규제와 통제라는 목적을 위해 희미하게 유지되는 구분선이고 경계선이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사실상 내부가 외부로 되어버리는 배설경로 때문에 혼란에 휩싸인다. 그리고 이런 배설 작용은 다른 정체성-변별화 형식이 획득되는 모델이 된다. 사실상 이것은 타자들이 배설물이 되는 양상이다.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가 완전히 구분되려면 몸의 전체 표면이, 있을 수 없는 침투 불가능성을 이뤄내야 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337


 그럼에도 우리가 '외면'과 '내면' 또는 '남성'과 '여성'으로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앞서 말한 사법적 권력 구조의 산물이다. 우리의 인식이 이처럼 권력 구조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러한 상식은 필연적 결과가 아닌 우연적 산물에 불과하다. 때문에,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onflies Benjamin, 1892~1940)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진품이 갖는 아우라(Aura)에 대해 강조한 것과는 달리, 버틀러는 '젠더 패러디'라는 용어를 통해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근본적 우연성은 규제에 의해서 자연스럽거나 필연적이라고 추측되는 인과론적 통일성의 문화적 배치에 직면한 섹스와 젠더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성애적으로 일관된 법 대신 연기에 의해 탈자연화된 섹스와 젠더를 보게 된다. 이 연기는 섹스와 젠더의 구분을 선언하고 조작된 통일성의 문화적 기제를 극화하는 것이다... 젠더 패러디는 젠더가 그 양식에 따라 스스로 형태를 갖추는, 원래의 정체성 자체가 원본 없는 모방본이라는 것을 폭로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344


 안정적이고 연속적인 '남성-여성'의 이분법적 체제에서 필요로 하는 '이성애' 를 부정하는 버틀러가 '이성애'를 부정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드래그'로 대표되는 일종의 가로지르기 행위다. 그리고 그 행위는 '수행적'이라는 동사(verb)로 활성화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이로부터 기존 질서를 '명사(noun)'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차별점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섹스가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자아를 지칭하는 장소에서의) 젠더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때만, 또 섹스가 (이성애적이어서 자신이 욕망하는 다른 젠더와의 대립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변별화하는 장소에서의) 욕망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때만 젠더는 섹스, 젠더, 그리고 욕망에 관한 경험의 통일성을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남성이나 여성, 양 젠더의 내적 일관성이나 통일성은 안정되고 대립적인 이성애를 필요로 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126


 영속적 본질이라는 개념이 허구적인 구성물, 즉 강제적인 속성의 정렬을 통해 일관된 젠더 연쇄로 생산된 구성물이라면, 본질인 젠더나 명사인 남성, 여성의 존속 가능성이 의심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영속적 본질이나 젠더화된 자아의 외관, 즉 정신과 의사 로버트 스톨러가 '젠더 핵심(gender core)'이라고 부른 것은 문화적으로 설정된 일관된 선을 따라 속성들에 대한 규제가 생산해낸 것이다... 젠더는 명사가 아니며, 자유롭게 떠도는 일군의 속성도 아니다. 우리는 이제 젠더의 본질적 효과가 젠더 일관성의 규제적 관행 때문에 수행적으로 생산되고 강제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본질의 형이상학이라는 물려받은 담론 안에서 젠더는 수행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여기서 수행적이라는 의미는 목적한 정체성을 스스로 구성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젠더는 언제나 행위이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131


 이와 같이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을 통해서 규범에 의해 영향을 받는 '젠더'에 대해 말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권력의 재배치'에 대해 말한다. 재배치되는 권력은 '문화/규범' 등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규범들은 다시 '젠더'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만, '젠더' 역시 '규범'을 만드는 또다른 변인(變因)임을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규범에 의해 결정지워지는 젠더가 아니라, 규범에 영향을 미치는 젠더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젠더'가 '규범'을 만들고, 다시 '젠더'를 만드는 일종의 순환구조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렇게 끊임없이 새롭게 결정되는 '젠더'. 마치 <주역 周易> <계사전 繫辭傳>에 나오는 '생생지위역 生生之謂易'이라는 표현처럼 새롭게 변화하는 젠더를 버틀러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젠더 트러블>의 논의를  통해 버틀러는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얻었을까. 아마도 잃은 것은 '젠더 정체성'이고, 얻은 것은 '정치성'이 아닐까. <젠더 트러블>을 통해 '~이 아닌'으로 정의되었던 기존 도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기존 질서에 '명사성'을 부여하고 스스로의 체제에 '동사성'을 가져오고, '젠더'안에 동성애를 가져오면서, 기존 질서를 정(靜)으로 새로운 질서를 동(動)의 구분지으며 거대 담론을 만들어 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안의  제갈량((諸葛亮, 181~234)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젠더 트러블>에서 받는다. 다만, 이렇게 거대 담론이 되면서. 페미니즘의 정체성이 약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인상을 받는데, 이 부분은 행동주의자인 주디스 버틀러의 성향과도 연결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젠더 트러블>에 표현된 저자의 생각이 <젠더 허물기>에서는 어떻게 확대될지와 <안티고네의 주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현될지 중에서 선택하는 문제는 다음으로 넘기도록 하자...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이 표명되는 관점 자체를 정치적인 것으로 확립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363


젠더의 속성이 표현적인 것이 아니라 수행적이라면, 이런 속성들은 자신이 표현하거나 드러낸다고 하는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구성할 것이다. 표현과 수행의 차이는 결정적이다. 젠더의 속성과 행위둘, 몸이 자신의 문화적 의미를 보여주고 생산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수행적인 것이라면, 어떤 행위나 속성이 재단될 수 있는 선험적 정체성이란 없다. 그리고 진정하거나 거짓된 젠더 행위, 사실적이거나 왜곡된 젠더 행위 또한 없다. 결국 진정한 젠더 정체성이라는 규정은 규제가 만든 허구임이 드러날 것이다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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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4-21 15: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앞에 서문 몇 쪽 겨우 읽다 어려워서 포기할까...하는 중입니다 ㅋㅋㅋ

겨울호랑이 2021-04-21 15:44   좋아요 2 | URL
아... 처음 서문에 전체 주체가 압축되다보니 엄청 높아보이는데, 우선 본문을 부담없이 읽어보시고 서문을 다시 보시면 어떨까 생각을 해봅니다... 버틀러의 용어가 다소 낯설게 다가오긴 합니다만, 그냥 끝까지 가보니 조금은 알 것도 같긴 합니다... 제가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겠지만요...

황금모자 2021-04-21 16: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주디스 버틀러는 헤겔 철학 수용사로 박사를 받아서 헤겔 철학이랑 연관지어서 생각하면 좀 더 와닿습니다. ‘Identity‘의 번역어 ‘정체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기서 ‘정‘자가 ‘올바를 정‘입니다. 옳다고 여겨지는 기준을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세우기 위해서 기존의 페미니즘/퀴어 이론은 그 반대의 기준을 제시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 방법은 결국 정-반-합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변증법의 순환에 갇히게 됩니다. 버틀러는 이 순환을 벗어나기 위해 ‘~이 아닌‘으로 설정되는 방식을 버리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수행성을 택한 것이지요. 버틀러가 제시한 가면의 비유, 드래그가 수행성의 일환입니다. 수행성 연구로 어빙 고프먼 - <자아 연출의 사회학>도 추천드려요~

겨울호랑이 2021-04-21 17:01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황금모자님 설명을 들으니 더 명확해지네요. 고프먼의 책 추천도 감사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뒤집히는 혼란에 빠졌다. 그까짓 사탕을 얻어먹기 위해서 말 노릇을 하는 아이들의 비굴을 미워했고, 얻어맞고도 아무런 대항을 하지 못하는 비겁을 쥐어박고 싶었었다. 그러나 그런 행위가 모두 소작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은 너무나 단순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끼어든 것이 아이들을 도운 게 아니라 오히려 나쁘게 만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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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재난을 묻다 - 반복된 참사 꺼내온 기억, 대한민국 재난연대기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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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고가 발생하기 일 년 전인 2013년에 일어난 태안해병대캠프 참사. 모든 것을 덮기에만 급급했기에 결국 일년 뒤 대재난을 맞이했음을 확인한다. 기출문제도 풀지 못한다면, 새로운 문제도 풀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원한다면, 세월호를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 7주기에...

태안해병대캠프 참사의 고을 새기기 위해 7월 18일로 지정해정부가 추진해모던 학생안전의 날‘은 슬그머니 폐기됐고 4월 15일이 국민안전의 날‘로 지정했다. 유족들은 청소년 대상 체험활동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는 탐욕과 자본에 대한 엄정한 수사를 요청했다. 재판이 중요했던 건 우리 아이 목슴값에 대한 복수가 아닌 재발방지를위한 일벌백계였다. 사고현장에서 대규모 모래채취가 이뤄져 바다 밑바닥이 고르지 않고 갯골(웅덩이)이 이 형성돼 참사가 났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자연적인 갯골이라면 사고를 예측하기 어렵고 불가항력적인 면이 많지만, 인위적인 것이고 캠프 관계자가 모래채취를 인지하고 있었다면 사건은 정반대로 진행될 공산이 컸다. 또한 캠프 참가비가 전년 대비 50퍼센트나 인상돼 학교 관계자와 캠프 간 거래에 대한 의혹도 제기됐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는확대되지 않았다. 경기도의 한 섬유업체가 사고업체의 실질적 소유주라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수사대상에도 모르지 않았다. 해병대캠프에 공유수면 사용허가를 내주고 1년간 점검조차 하지 않은 태안군과, 수상 안전시설인 보트 계류장이 필요 없다며 철거를 용인한 태만해경 담당자들은 형사처분 대상에서 제회됐다. 감사와 관련해 책임을 진 공무원은 단 한 명도없었다. 관리감독기관인 태안군과 해경이 책임을 회피하는 사이 사고업체는 직접적인 책임성을 부인하며 사업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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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 대책의 특단의 카드로 시작한 동토차수벽에 대해 2016년 여름 완전히 동결시키는 것은 어렵다고 발표했다. 전국지는 그다지 크게 다루지 않았지만 후쿠시마민보(7월 20일)는 1면 톱으로 도쿄전력의 배신을 보도했다. 그리고 녹아내린 핵연료의 상태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완전히 '속수무책'인 것이다._야마모토 요시타카, <일본 과학 기술 총력전>, p387


  지난 13일 일본은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류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충격적인 결정이기는 하지만, 사실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降)의 글에서 보듯 오염수의 완전 동결이 어렵다면, 다음 수순이 방류가 될 것이기에 이는 몇 년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대책이 세워질 수 없었던 것은 원자력이 갖는 타고난 '통제불능'의 위험이기 때문이리라. 


 본래 원전은 민생용 상품으로는 치명적인 중대 결함을 몇 가지나 갖고 있다. 경수로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연료인 우라늄 채굴에서 정기 점검에 이르는 과정에서 노동자 피폭이 불가피하다는 점, 운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오염과 방사선오염이 지구환경에 미치는 영향, 사용 후 리사이클은 커녕 사람이 접근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폐로가 남고, 수십만 년에 걸쳐 위험한 방사선을 방출하는 사용 후 핵연료의 처분방법 미해결이 그것이다. 보통의 상품이라면 이 중 어느 것 하나만 있어도 시장에 내놓을 수 없다._야마모토 요시타카, <일본 과학 기술 총력전>, p379


  원자력 발전이 가져오는 위험은 이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1986),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2011)를 통해서 입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자력이 계속 사용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군사력 때문이다. 이는 일본이 원전 사고 이후에도 핵탄두 6,000개를 만들 수 있을만큼의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단순한 천재지변으로 볼 수 없다. 여기에 더해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들의 무책임한 모습을 보노라면,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을 말하는 그들의 모습과 다른 이중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일본식 다테마에(建前)와 혼네(本音)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과학 기술 총력전>에는 후쿠시마와 관련된 이야기가 간단하게 다루어지지만, <후쿠시마, 일본 핵발전의 진실>은 이 주제에 대해 상세하게 다룬다. 이와 관련해서도 내용 정리를 해야겠다...


 원자력의 '군사 이용'과 '평화 이용'이라는 이분법은 전후 널리 언급돼왔다. 그러나 본래 군사기술과 비군사기술의 경계는 애매한 것이고, 전후 세계에서 최첨단 기술이 군산복합체에서 다뤄지고 있는 한 양자를 말끔히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나카소네의 발언은 핵기술이 원폭 제조로 시작했고, 비군사적/산업적 이용이라고 해도 기술 보유 자체가 대국주의 내셔널리즘을 불러일으키고 국제 사회에서 발언력 강화를 가져온다는 극히 정치적인 의미를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_야마모토 요시타카, <일본 과학 기술 총력전>, p363


 1988년에 체결돼 2017년까지 유효한 신미일원자력협정에는 지정된 시설에서의 재처리 실시를 사전에 승인하는 '포괄적 사전 합의'가 삽입됐다. 미국의 양해가 사실상 불필요해진 것으로, 그 결과 플루토늄 사용 규제가 대폭 완화되면서 일본의 재처리와 증식로 건설 노선이 연명됐다. 이는 비핵 보유국에서는 일본에만 허용된 '특권'이다. 도카이무라의 시설과 해외 위탁으로 생성된 일본의 플루토늄 보유량은 이미 48t에 달한다. 국자원자력기구(IAEA) 지침에서는 핵무기 1개 만들 수 있는 플로토늄의 양은  8kg으로 돼 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무려 6,000발의 플루토늄 폭탄을 만들 수 있을 만큼의 재료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 된다._야마모토 요시타카, <일본 과학 기술 총력전>,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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