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5일 광복절 밤에 의미있는 행사가 있었다. 독립투쟁의 장군 홍범도(洪範圖, 1868 ~ 1943)의 유해 봉환식이 바로 그것이다. 1920년대 무장독립투쟁의 상징으로 봉오동 전투(1920)와 청산리 전투(1920)년에 참전하여 공훈을 세운 인물, 그렇지만 1921년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이후 잊혀져간 장군. 쓸쓸하게 중앙아시아에서 말년을 보내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 <홍범도>가 상영되는 고려극장에서 경비를 서다 괴한과의 격투 후 며칠 뒤 사망한 인물. 이 정도가 일반에게 알려진 홍범도에 대한 대강이 아닐까 싶다.


 1920년대 일본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부대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좌진(金佐鎭, 1889 ~ 1930)과 '북로군정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줄곧 일본군의 가장 중요한 추적 목표가 되었던 인물은 홍범도였고 독립군 부대의 통일과 단결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선 인물도 그였지 않은가? 후일 북로군정서의 활약이 널리 알려졌던 것은 군정서가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던 배경이 있다. 반면에 홍범도 부대는 러시아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지원을 받았고 대한국민의회가 1920년 2월 중순 이후 상하이 임정과 불편한 관계가 되자 아무래도 홍범도는 임정과는 그리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_ 장세윤, <홍범도> , p242/348 


 홍범도와 상해임시정부와의 껄끄러운 관계에 더해 그가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사실은 그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일 수 없는 주요한 이유가 된다. 유해봉환식에 사용된 사진 속의 권총 역시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 ~ 1924)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일정부분 레닌,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 ~ 1940)과 사상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레닌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고생을 많이 한다고 위로했으며, 범도에게 혁명정권에 협조해줘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였다. 그러면서 홍범도에게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로 주었다. 범도는 매우 기뻤다. 그는 레닌에게 합리적 한인정책을 펴달라고 했다. 면담이 끝난 뒤 범도는 레닌, 트로츠키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p278)... 1927년 10월 범도는 소련공산당에 당원으로 가입하였다. 당증번호는 578492번. 사회주의 사상이나 이론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 취지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_ 장세윤, <홍범도> , p282/348 


 다만,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8 ~ 1953)과 대척점에 있던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를 보면 민족주의에 대한 레닌의 생각은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스탈린과 달랐던 듯 하다. 일본의 중국 침략을 비난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의 입장을 인정한 레닌에 대해 홍범도가 우호적인 마음을 가졌던 것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미국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영국으로 그레이트 게임의 파트너로 일본에 우호적인 상황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사회주의/공산주의'는 분명 하나의 선택지였을 것이다. 



 차르 러시아와 전세계 피억압 민족들의 발전에 내재하는 혁명 역량을 레닌은 경탄할 만한 깊이로 평가했다. 일본은 노예화를 목적으로 중국을 침략했다. 중국은 해방을 목적으로 일본에 대항했다. 이 두 현상을 똑같은 정도로 '비난하는' 위선적인 '평화주의'는 레닌의 경멸을 샀을 뿐이었다. 제국주의 억압 전쟁과 대조되는 민족해방 전쟁은 레닌에게 일국 혁명의 다른 형태에 불과했다.... 레닌의 아류들, 특히 스탈린은 피억압 민족 투쟁의 진보적, 역사적 의의에 대한 레닌의 가르침으로부터 식민지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적 임무를 도출했다. 이것이 이들의 치명적 오류다.(p756)... 이 모든 오류를 통해 스탈린은 민주주의나 '민주주의 독재'를 저속하게 이상화시켰다... 스탈린 일당은 이 오류의 방향으로 서서히 나아가면서 민족 문제에 대한 레닌의 입장과 완전히 결별한 채 중국 혁명을 재앙으로 몰고 갔다. _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 p757


 <홍범도>에서 저자 역시 '홍범도'라는 인물을 바라볼 때 지나친 영웅주의가 아닌 사회적 인물로 평가하길 당부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를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라는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의 신념, 행동으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과거 독립투쟁가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 


31 착한 스승(베르길리우스)은 내게 "너 지금 보는

이 영혼들이 누군지를 넌 묻지 않느뇨?

그럼 너 더 나아가기 전에 내 알리고 싶노라.


34 저들이 죄를 짓지 않았고 공이 있다 해도 

그것은 너 믿는 믿음의 한 몫인

성세 聖洗를 못 받았기에 넉넉치 못하니라.


37 그리고 그리스도교 이전에 있었던 만큼

맞갖게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였나니

나 역시 이들 중의 한 사람이로다.


40 다른 죄 때문이 아니라 다만 이 탓으로

우리는 버림을 받고 오직 이 흠집 까닭에

가망도 없이 뜬 소망 속에 사느니라."


133 그를 우러러 모든 이가 그에게 영광을 드릴 때

누구보다도 먼저 그이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거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보았노라. _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편> 제4곡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 ~ 1321)의 <신곡 La Divina Commedia>에서는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 ~ BC 399), 플라톤(Platon, BC 424 ~ BC 347) 과 같은 인물들도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벌을 받는다. 그나마 림보(Limbo)에 머물러 최소한의 벌을 받는 것으로 설정되지만, 예수 탄생 이전에 태어나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없었던 이들도 믿음이 없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는 설정은 오늘날 관점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중세의 이러한 구원관과 일제 하 독립투쟁가들의 사상을 문제삼는 것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최근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1886 ~ 1947),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 1898 ~ 1958) 등에 대한 재평가도 분명 이뤄져야할 것이다. 늦은감이 있지만 이들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쟁가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 변화는 다행이라 여겨진다.


 다만 우리가 주의할 점은 홍범도의 투철한 생애와 민족운동을 개인적 관점이나 '영웅사관'에 빠질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즉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그가 살던 시기의 사회와 민족, 국가가 요구하던 시대적 과제와 모순을 척결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홍범도라는 뛰어난 인물을 사회와 고립된 한 개인의 입장이 아닌, 민족과 사회 등 여러 분야와 관련을 맺으며 존재하는 '사회적 인물'로서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_ 장세윤, <홍범도> , p323/348


 민족을 사랑하고, 일본에 적극 저항한 인물. 1920년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대파했지만, 바로 뒤이어 일어난 간도참변(경신참변 庚申慘變, 1920)으로 간도 지역 조선인 마을에 큰 피해가 생기자 자유시로 건너간 그의 행적 속에서 위엄있지만 자애로운 외강내유(外剛內柔)의 인물의 모습을 발견한다.


 농부로서 홈범도 대장은 시넬(러시아식 군복)과 또는 기다란 가죽끈을 어깨에 걸쳐 멘 야전가방은 벗지 않았다. 가방 속에는 나간 권총이 있었다. 레닌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란다.  아, 선생님. 어찌 그렇게 일하십니까? 시넬을 입고 가방을 멘 채...... 이 홍범도는 시넬과 가방을 벗어놓고는 밥도 못먹는다오 하는 그는 조선 낫으로 그냥 가을을 하였다. 선생님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도와?...... 왜놈들을 벨 때 돕자는 사람이 있으면 눈물나게 반가웠지만 조를 벨 때 돕자는 건 그리 반갑지 않어. _ 장세윤, <홍범도> , p288/348


 나(홍범도)는 요즈음 중국과 러시아령 사이를 여행하면서 각처를 두루 돌아보고 동포들을 방문하여 보았다. 그들은 산에서 사슴을 쏘고 시장에서 땔나무를 팔며, 감자를 심어 양식으로 삼고 엿을 팔아먹고 살았으니 이들은 모두 지난날의 의병 장령이었다. 그들은 쓰러져 가는 집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고, 오로지 노래하고 읊조리는 것은 조국뿐이며 자나깨나 조국이었다. 술을 마신 후에는 비분강개하여 서로 노래 부르고 통곡했다. 세속의 소위 명예나 공리 따위는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겼다. 오직 몸 속 가득한 끓는 피는 충의와 비분에서 터져 나왔고 (그들의 투쟁은) 죽은 후에라야 끝날 결심이었으니 이 어찌 참된 의사 義士가 아니겠는가? 나는 심히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_ 장세윤, <홍범도> , p161/348


 이제 18일이면 한 시대를 호령했던 장군은 대전 현충원에 안치될 것이다. 편히 쉬시라 말씀드리고 싶지만, 같은 곳에 위치한 간도특설대의 백선엽(白善燁, 1920 ~ 2020)과 같은 이들이 이웃이라 선뜻 그런 말이 나오지는 않는다. 장군 그리고 독립유공자들이 편히 쉬실 수 있을 때가 오도록 우리가 항상 잠들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사진] 장군의 귀환https://www.mpva.go.kr/hongbeomdo/selectBbsNttList.do?bbsNo=325&key=1651)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쉽게 말하기 어렵겠지만,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시리즈를 출판한 출판사 역사공간에서는 <홍범도> 개정판에서 아래의 문장 다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21년 8월 15일 광복절에 그의 유해가 크즐오르다에서 고국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인 1962년 3워 1일 한국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1959년부터 1965년까지 크즐오르다에서 발행되는 재소 한인들의 한글신문 <레닌기치> (1991년부터 <고려일보>로 제호가 바뀜)에 소설 <홍범도>가 연재되었다. 그리고 1984년 11월 초에는 크즐오르다의 묘지에 반신동상이 세워졌으며, 1989년 5월 26일에는 크즐오르다에 '홍범도 거리'가 명명되었다. _ 장세윤, <홍범도> , p299/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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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8-16 16: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명문에 감동받았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8-17 10:18   좋아요 3 | URL
독립을 위해 애쓰신 모든 분들의 삶에 비할 데 없이 부족한 글이지만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mini74 2021-08-16 19: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해봉환식을 보는데 훌쩍거리게 되더라고요. 자유시참변과 그 후의 고된 삶들. 현충원의 잘못된 이웃들은 빨리 이사가길 바라며~ 이렇게 글 남겨주셔서 참 좋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8-16 22:14   좋아요 1 | URL
저 역시 눈물이 나더군요... 너무도 뒤늦게 모셔온 것에 대한 죄송함, 감사함 그리고 다행이라는 안도감 등 여러 마음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은 비록 누추한 곳에 모셨지만, 현충원 자리가 과분한 이들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줘야 겠지요... mini님 감사합니다.^^:)

초란공 2021-08-16 19: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유해를 모시는데도 결정되기 전까지 북한과 물밑 신경전을 벌였더군요.

겨울호랑이 2021-08-16 22:18   좋아요 2 | URL
초란공님 말씀처럼 직전까지 북한과 치열한 외교전이 있었다지요. 국력에서 앞서서 장군의 유해를 남쪽으로 모셨지만, 장군의 고향이 평양인 점과 카자흐스탄이 과거 소련의 일부였던 점을 생각해보면 북측의 주장도 이해할만하다 여겨집니다. 장군을 모셨으니 잘 모셨다는 평가를 받도록 이후 처리를 잘 해야겠습니다...
 

** 2021.08.09 ~ 08.13 SNS 미션 (8월 15일 자정까지)

'토지박경리' 5행시로 감상평을 아래의 조건을 충족하여

신청서에 적어주셨던 개인 SNS에 남겨주세요.


 이번 주 토지독서챌린지 미션은 5행시다. 여태까지 미션이 한 주동안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이 주제였다면, 이번 미션은 연휴를 맞아 쉬어가자는 운영자님의 배려로 읽혀진다. 그렇지만, 뜻하지 않은(?) 이 미션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시(詩) 감각이 없는 내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온다.... ㅜㅜ  결국 어찌어찌 만들었지만,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어서 참 공개하기가 꺼려진다. 부족한 5행시는 페이퍼 끝에서 확인하는 것으로 하고, 한 주 독서를 페이퍼로 간단하게 마무리 짓는다.

 

 콜레라는 인간이 유일한 숙주이지만, 동물 숙주 없이도 인간의 몸 밖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바실루스에 감염될 때 발생한다. 오염된 식수를 통해 전염되며 내장 기관에 문제를 일으키고 탈수 증세를 초래한다. 초기의 콜레라는 건강한 성인의 치사율이 50퍼센트 정도였는데, 어린이와 노인은 더 높았다. 이 질병은 갠지스강의 하류 지역에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고, 19세기 초에 전 세계로 퍼졌다. _ 클라이브 폰팅, <클라이브 폰팅의 녹색세계사> , p274/534


 "그 뱅은 걸리기만 하믄 죽는다!" 빙 둘러싸고 있던 사람의 울타리는 무너진다. 불거져 나온 두 눈, 관골과 코만 댕그랗게 솟아오른 해골, 김서방의 그런 모습은 순간 이들에게 다른 뜻으로 비쳤다. 암담하고 침울하고 슬펐던 눈빛은 일제히 공포로 변했다... 집안의 일상은 무너졌다. 마을의 일상은 무너졌다. 불안과 공포는 시시각각 검은 구름같이 마을을, 최참판댁을 엄습해오고 있었다. _ 박경리, <토지 3>, p260/518


 <토지 3>에서 갑작스럽게 닥친 호열자(콜레라)는 평산리를 덮치고 여러 사람이 죽어나가면서 사신(死神)의 불길한 기운이 온 마을에 퍼져 나갔다. 성별, 나이, 신분고하에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호열자의 파도에 쓸려가면서 마을의 분위기는 바뀌게 된다. 파국이 시작되었다.


 병이 그런 방어를 겁낼 리는 없다. 보이지 않는 무서운 형상으로 들리지 않는 함성을 지르면서 골목을 점령하고 마을을 점령하고 방방곡곡을 바람같이 휩쓸며 지나가는 병균. 그들의 습격대상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없었다. 부자와 빈자의 구별이 없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도 않았다. 인심은 흉년의 유가 아니었다. 난리가 났다면 피난이나 가지 하고 사람들은 절망했으며 희망을 미신에 걸어보는 것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참으로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3>, p296/518 


 질병으로 인해 생기는 절망, 그리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뀌려는 노력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 ~ 1960)의 <페스트 La Peste>에도 잘 표현된다. 천형(天刑)과도 같은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시련에 좌절 후 희망을 품어보지만, 결국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모습. 마치 죽음을 선고받은 환자의 모습처럼 페스트가 퍼져가는 오랑의 시민들은 변해간다.


 그때에 그들의 용기와 의지, 그리고 인내의 붕괴는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그들 스스로 영원히 그 수렁에서 다시 기어 나올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가 자유로워질 시기를 결코 생각지 않고, 이제는 더는 미래를 바라보지도 않으며, 말하자면 늘 두 눈을 내리깔려고 무척 애쓰고 있었다.(p134)... 이와 같이 그들은 아무 소용도 없는 기억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모든 유형수의 깊은 고통을 맛보고 있었다. 그들이 끊임없이 되새기곤 하는 그 과거조차도 후회의 쓴맛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_ 알베르 카뮈, <페스트> , p135/574


 그들은 까닭 없이 괴로워하기도 하고 희망을 품기도 했다. 그러한 극도의 고독 속에서 결국 아무도 이웃의 도움은 바랄 수 없어서 각자가 혼자서 근심해야만 했다. 만약 우리 중 누군가가 우연히 자기 속내를 털어놓거나 모종의 감정을 말해도,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대답은 어떤 종류건 대개 불쾌감을 주는 것이었다. _ 알베르 카뮈, <페스트> , p140/574


 <페스트>의 오랑 시민들은 외부로부터 차단된 고립된 곳에서 죽음의 공포를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 ~ 1375)의 <데카메론 Decameron> 속 주인공들은 사뭇 다른 처지에 있다. 피렌체에 흑사병이 닥쳤을 때 이들은 질병을 피해 멀리 시골로 떠나 다른 세계에서 죽음의 위협을 피할 수 있었다. 마치 영화 <엘리시움 Elysium> 속의 피난처와 같은 곳으로 떠난 7명의 귀부인과 3명의 청년은 올림푸스 산에서 인간세계를 내려다보는 불멸의 신과 같이 필멸의 인간들의 사회를 마음껏 비웃으며 즐겁게 그들만의 왕국을 만들어갔다.


 집착인지 오만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원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앞서 그랬고 그러듯이 이 지역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p23)... 그곳에서 이성의 경계를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 쾌락을 맛보자는 것이지요. _ 조반니 보카치오, <데카메론 1> , p24/335


 유쾌한 10일간의 이야기와 함께 하면서 그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은 그들을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여유를 주었지만, 이러한 여유의 끝이 어땠는가는 분명치 않다. 개인적으로 <페스트>와 같은 지옥도와 같은 현실이 눈 앞에 펼쳐진다면, 10일간의 천상생활이 가져다 준 여유는 하룻만에 날라가지 않았을까. 그들의 여유는 언제까지나 죽음의 파도로부터 자유로운 곳에서 나온 것이었을테니까.


 인간의 지혜란 단순히 지나간 것들을 기억하거나 현재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지혜로 평가되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앎으로써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라고 현자들은 말합니다. 아시다시피 그 무서운 흑사병의 계절이 시작된 뒤로 우리는 음울하고 고통과 불안으로 가득 찬 거리를 피해 피렌체에서 도망쳐 나왔고, 우리의 건강과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피난처를 구해야 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이에서 정숙함과 화합 그리고 친밀함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저는 보고 또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여러분과 저의 참으로 소중한 명예이자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_ 조반니 보카치오, <데카메론 3> , p280/318


 카뮈의 <페스트>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페스트(흑사병)이 가져다 준 공포와 이로 인해 고립된 인간이 느껴야 하는 절망과 실낱같은 희망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희망의 끈을 잡으려 하지만, 계속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암울한 상황을 잊을 때 뿐이고, 이를 정면으로 맞아야할 때 인간과 공동체는 과거와는 다르게 변화할 수 밖에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점을 생각해본다면, 어머니와의 이별로부터 연속적으로 닥친 불행에 고스란히 몸을 맡겨야 했던 <토지>의 어린 서희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슬픔과 함께 자신 또한 느꼈을 호열자에 대한 공포, 그리고 자신을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등  복잡한 감정을 어린 서희가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마음 깊이 자리잡은 이러한 마음이 이후 최씨 문중의 증흥을 위해 친일(親日)까지도 꺼리지 않았던 그의 행보를 이끌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몇 해 동안 연이어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바우 내외만은 명대로 살다 갔다 할 수 있었으나 최치수의 죽음, 귀녀의 죽음, 집안 식구는 아니었지만 불에 타죽은 또출네 하며, 죽음치고도 비참한 그들 비명을 보았건만 새로이 직면하는 죽음은 여전히 하인들 가슴에 전율을 일게 한다. _ 박경리, <토지 3>, p260/518


앞서 말한 독서챌린지 미션을 마지막으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 <토지>를 읽으며

: 지나간 우리네 삶과 수난을 씁쓸하게 맛본다

: 박경리 작가는 작품 안에 이들을 잘 녹여냈구나

: 경건한 마음으로 책을 다시 꺼내든다

: 리해(이해)를 하려면  아직 멀었지. 가다보면 가까워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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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8-14 22: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행시 훌륭하십니다 ㅎㅎ 데카메론. 짠돌이 오빠가 돈 주고 사와서 몰래 읽던 책이 데카메론과 즐거운 사라? 였지요 ~ 민음사에서 데카메론이 나왔군요. 휴일 즐겁게 보내세요 *^^*

겨울호랑이 2021-08-14 22:5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mini님. 그런데 정말 미션 아니었으면 공개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다른 분들 삼행시 등을 보면 바로 잘도 짓던데... 저도 예전에 동서문화사 판으로 읽었는데, 민음사에서 나온 것으로 읽으니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mini님께서도 즐거운 연휴 되세요! ^^:)

붕붕툐툐 2021-08-14 22: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행시 정말 너무 좋은데요?😍
저도 페스트 읽어서 리뷰 남기려고 했는데 괜히 너무 반가워요~헤헤~
(데카메론은 넘사벽!ㅋ)
저도 토지에서 호열자로 사람들 죽어나갈 때 너무 안타까웠어용~~ 그걸 또 이렇게 엮어 읽으시다니~👍
한 수 배워갑니다~

겨울호랑이 2021-08-14 23:0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붕붕툐툐님. 이번 미션은 저도 5행시만으로 넘기려 했는데, 읽은 부분이 또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주인공 서희에게 매우 결정적인 장면인지라 페이퍼를 쓸 수밖에 없었네요. 또 전염병하면 빠질 수 없는 두 작품을 함께 펼쳐봤습니다. 이런 기회 아니면 또 언제 해볼까 싶기도 합니다. 붕붕툐툐님께서도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

잠자냥 2021-08-14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해가 아주 잘 되는 5행시였습니다! ㅋㅋㅋ

겨울호랑이 2021-08-15 00:16   좋아요 1 | URL
제가 봐도 마지막 글자는 상당히 억지스러웠습니다... 두음법칙 피해서 ‘리본으로 책을 잘 묶어야지‘ 도 생각했습니다만 더 이상하더라구요... ㅜㅜ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은 담화를 발표하여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하에 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준 문제이다"라고 인정했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역사연구, 역사교육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같은 잘못을 결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금 표명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1994년 무렵부터 군'위안부'는 자유 의지로 매춘을 한 '공창 公娼'이라는 의견이 각료들 사이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 후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는 군'위안부'에 대한 기술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10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1946 ~ )의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은 위안부(慰安婦) 문제를 둘러싸고 극우세력들이 제기하는 주장에 대한 답이 간결하지만 잘 정리되어 있는 책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의 <제국의 위안부>, <반일종족주의>에서도 인용되는 극우 논리는 무엇이고, 사실(fact)는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일본 극우 세력들의 논리를 요약하면 군 위안부의 주체는 군(軍)이 아닌 민간업체 중심이었으며, 모집된 이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모집된 이들로 일체의 강제성이 없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일본(군)은 오히려 모집된 위안부들에게 행해진 폭력 등에 대해 엄중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다로 수렴한다. 반면, 자발적으로 모집된 이들 위안부들은 이러한 일본의 처사에 대해 배은망덕하게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문제는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에게 있다. 조선에서의 모집은 조선인에 의해 주도된 것이기 때문에 조선 내부 문제이며,  구체적으로 미개한 조선 시대의 가부장제의 문제라는 것이 주된 논지다. 이러한 일본과 한국 극우들의 논란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에서는 어떻게 답하고 있을까.


 일본 정부에게 책임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좁은 의미의 강제'만이 문제인 것처럼 말합니다... 군이나 관헌이 현장에서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면 책임이 없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군이 모집을 지시했다면, 바로 군이 최고책임자인 것입니다.(p29)... 업자 및 여성의 도항과 전지, 점령지에서의 이동에는 군이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군 위안소로 사용할 건물은 군이 접수해서 업자에게 이용하도록 했으며, 건물의 개조도 군이 했습니다. 또한 군위안소 이용규칙, 이용요금 등도 군이 결정했습니다. 여성들의 식료품, 의복, 침구, 식기 등을 군이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위안부'의 성병 검사는 군의 軍醫가 했으며, 각 부대는 군위안소를 감독, 통제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일본군과 정부의 공문서가 공개되어 있으므로, 간행된 자료집을 통해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업자가 아니라 군이 주역이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36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에서는 모집 주체가 민간업체가 아닌 군에 있음을 명확하게 지적한다. 모집 주체로서 '군'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민간에 의한 모집이라는 근거가 되지만, 모집된 이들이 군의 허가 없이 동남아시아 최전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휴전 시에도 민간인 통제선 바깥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엄격하게 처벌되는 상황에 과연 군의 묵인 또는 참여가 없이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 그런 면에서 일본군의 책임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주보란 군대 내에 있는 물품 판매소인데, 규정이 개정되면서 "야전 주보에서는 전항 前項 외에 필요한 위안시설을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추가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필요한 위안시설'의 주요시설로 위안소가 설치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군'위안부'제도는 군의 부속 병참시설로서 설치되었다고 하는 사실이 한층 더 확실해진다고 생각합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37


 이와 함께, 위안부들의 자발성 문제가 제기된다. 일본 극우의 논지는 이에 대해 공창(公娼) 제도는 당시 세계적인 추세였으며, 일본 역시 이에 이러한 추세와 함께 있었을 뿐이며, 모집된 이들에 대한 강제성은 없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에서는 국제조약에 따르려는 움직임은 일본 본토에 한정된 것이었으며, 실제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나마 조선, 대만 등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는 규정이었음을 말한다. 실제로, 중국에서 감염된 일본군 성병 환자를 역학 조사한 결과 위안부 비율은 대략 조선 : 중국 : 일본 = 52: 36 : 12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데(p93), 90%에 달하는 다수의 위안부들이 식민지 또는 점령지에서 살던 이들이라 점을 감안해본다면, 위안부 모집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뒤집기에 부족 할 것이다.


 현지 부대가 업자를 이용하여 내지內地(일본 본국)에서 군'위안부'를 모집하고 있다고 하는, 내지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사실이 표면화되지 않도록 군과 경찰이 긴밀하게 연락을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내지에서는 위법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통제했지만, 식민지에서는 그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식민지에서는 군이나 경찰이 선정한 업자의 경우에는 위법적인 수단으로 군'위안부'를 모집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56


  내무성 통첩 제77호(1938년 2월 18일)라는 것도 부정확한 인용입니다. 이 통첩은 '위안부' 모집은 부녀 매매에 관한 국제조약, 즉 '추업을 위한 부녀 매매 금지에 관한 국제조약'과 '부인 및 아동의 매매 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이라는 취지에 위배될 우려가 있으니, 이것에 저촉되지 않도록 지시합니다. 또 군의 양해와 연락이 있었다고 공공공연하게 말하는 업자는 엄중하게 단속할 것,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군의 강력한 요구 때문에 군'위안부'의 도항 渡航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하나, 군이 이러한 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숨기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지시가 확실하게 지켜졌다면 일본 내지에서 강제로 보내졌던 여성은 이미 유곽 遊廓 등에 인신매매된 여성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통첩이 조선, 대만에도 적용되었을까요? 일본 정부는 부녀 매매에 관한 국제조약을 조선, 대만 등의 식민지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정책은 일본 내지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57


 공창제도가 노예제도라는 것을 숨겨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하려고 한 일본 정부가 '창기 단속 규칙'을 만들어 창기와 매춘하는 자가 대좌부 貸座敷, 즉 성매매 시설을 빌려서 자유의지로 성매매를 하고 있는 것처럼 꾸몄기 때문입니다. 일본 내지의 경우뿐입니다만, 창기는 싫으면 언제든지 폐업할 수 있는 '자유 폐업' 규정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법률상의 규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규정이 있다는 것을 창기 자신은 모르고 있었고, 가령 알았다 해고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기 때문인데, 업자 등의 방해로 신고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원자의 도움을 받아 운 좋게 경찰에 신고해서 수리되었다고 해도, 이번에는 업자가 재판을 걸어 선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합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77


 대체적으로 일본 극우들의 논리는 일본(군)이 주도 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이러한 실증사관(實證史觀)에 입각한 논리 전개는 언뜻 과학적인 방법으로 보이지만, 사료(史料)에 없는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좋은 예를 우리는 이영훈(李榮薰, 1951 ~ )의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페이퍼의 흐름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이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서두에서 소개한 대로 근년의 수량경제사 연구는 조선의 경제가 19세기에 들어와 정체를 거듭하다가 끝내는 심각한 위기 국면에 봉착하였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1860년대부터 본격화한 위기의 와중(渦中)에서 사회는 분열하고 정치는 통합력을 상실하였다. 보기에 따라 위기는 1905년 조선왕조의 멸망이 어떤 강력한 외세(外勢)의 작용에 의해서라기보다 그 모든 체력이 소진된 나머지 스스로 해체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19세기의 역사상은 1950년대 이래 그들의 전통사회가 정상적인 경로로 발전해왔으며, 그들의 역사가 왜곡된 것은 제국주의의 침입 때문이라고 굳게 믿어온 한국의 많은 역사학자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있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382


 근대 시기 조선을 내재적 모순에 의해 망할 수 밖에 없는 사회로, 대안 없는 사회에서 일본이 근대화를 통해 근대 한국으로 만들었다는 논리 전개가 <반일종족주의>로 이어지는 것을 최근 저자의 행보를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것은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리뷰에서 다루겠지만, 개략적으로 책의 주장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점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19세기의 생산성 저하 문제가 과연 조선만의 문제였는가? 그리고 이러한 위기에 대해 대처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는가? 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그렇지 않다'고 답하고 싶다. 


 먼저 대략 클라이브 폰팅(Clive Ponting)의 <녹색 세계사 A New Green History of the World: The Environment and the Collapse of Great Civilisations>에서는 19세기에 인구 증가로 인한 대기근, 전염병의 창궐, 대규모 산림 벌채로 인한 자원 고갈 등의 문제가 세계적으로 발생했음이 지적된다. 이처럼 문제의 세계적 규모를 생각한다면 19세기 생산성의 저하 문제는 조선만의 문제로 한정지을 수는 없다. 마치 2015년 메르스 유행때와 2020년 코로나 19 유행이 다르지만, 유행병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방역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과 논리 전개에서 무엇이 다를 것인가. 2015년 메르스는 오직 한국에서만 유행한 반면, 2020년 코로나 19는 범세계적인 질병임을 생각한다면, 19세기 생산성 저하 문제를 상관분석에 투입된 몇 개의 변수를 통해서 조선 내부의 문제로 결론짓는 것은 성급해 보인다. 또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동학(東學)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이를 계기로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일으켜 조선을 삼키려 한 일본에서 찾는 저자의 의도 또한 지극히 의심스럽다 하겠다. 이러한 의심은 결과론적이지만, 후에 <반일종족주의>에서 실현된다.


 잉글랜드도 네덜란드에서 발전한 농업 방법을 들여와서 18세기 중엽에 이르자 인구가 증가하는 속도보다 식량 생산이 증가하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하지만 이것은 잠시였고, 1780년 무렵부터 19세기 말까지 전례 없이 인구가 증가하자 다시 인구가 농업 생산성을 위협하게 되었다. 인구는 1년에 1퍼센트씩 늘어나는데, 아무리 잉글랜드의 농업 체계가 개선되었다고 하더라도 곧 식량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_ 클라이브 폰팅, <녹색 세계사> , p137/534


 1817년에 벵골에서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고, 영국군과 인도군의 유행과 함꼐 봄베이 등 이전에는 콜레라를 겪지 않았던 인도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 갔다. 그 후 100년 동안 3,800만 명의 인도인이 콜레라로 죽었다. 콜레라는 인도로부터 배와 전쟁을 통해 전파되었다.... 19세기 초 이래 여러 차례 콜레라가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갔다._ 클라이브 폰팅, <녹색 세계사> , p272/534


 또한, 문헌자료는 쓰는 이들의 입장이 담긴 주관적인 자료라는 한계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뒤 모든 자료가 불타고 조선일보 신문 자료만 기적적으로 남았다고 해서 100년 후 사람들이 우리를 모두 조선일보 기사와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았다고 해석한다면 억울하지 않겠는가.(억울해 하지 않는 소수도 물론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실증사관에 따르면 우리는 할 말이 없어진다. 어쨌든 조선일보는 현재 우리나라 발행부수 1위의 영향력있는 신문이니까.


 일본 정부와 군의 공문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강제가 없었다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강제가 있었다고 해도 강제하라던가, 강제했다고 군과 정부가 공문서에 기재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과 범죄 행위를 일부러 공문서에 남겨두겠습니까?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41


 이러한 문헌자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생존자들의 증언(證言)이다. 자신들의 몸으로 과거의 참상을 낱낱히 고발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이 소중한 이유는 바로 이때문이다. 1991년 8월 14일.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30년 전. 고(故) 김학순(金學順, 1924 ~ 1997) 할머니의 용기있는 증언으로 일본군의 만행이 세상이 널리 알려졌지만, 일본은 30년 동안 이를 부정하고 있다. 


 군위안소에서 여성들이 어떠한 상태에 놓여있었는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서만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각 증언에 대한 사료 비판은 필요하지만, 사료 비판을 거친 여성들의 증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73


 일본군 '위안부(종군위안부)'였던 김학순 씨가 처음 공개적으로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던 것이 1991년입니다. 당시 군 '위안부'였던 여성들은 고령으로 별세 소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명예와 존엄은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9


 30년 동안 위안부 할머니들의 진실 규명에 대한 요구에 대해 이들은 모집 주체, 자발성 등의 문제로 본질을 피해가려 하고, 때론 우리들도 여기에 흔들릴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바라볼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기본적인 사실이 아닐까? 언제나 기본적인 사실을 기억하고 한 걸음씩 나아갈 때 진실에 가까워질 것이다.


 부시 정권에서 국가안전보장회 아시아 선임부장을 역임한 마이클 그린 씨는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군'위안부'였던 여성들이) 강제로 당했는지 어떤지는 관계없다. 일본 이외에는 누구도 그 점에 대해 관심이 없다. 문제는 위안부들이 비참한 일을 당했다는 것으로, 일본의 정치가들은 이 기본적인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13


 8월 14일 '위안부 기림의 날'이 8월 15일 '광복절' 앞에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겠지만, 이 안에서 우리가 진정한 광복을 맞이하기 전에 풀어야 할 과제가 '위안부' 문제라는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이와 함께 성폭력 피해 여중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안타까운 사고가 어제 발생했다. 일본에 대한 책임있는 자세를 요구함과 동시에 더이상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모두 돌아봐야 함을 '위안부 기림의 날'을 통해 생각해 본다...



위안이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는 스포츠, 영화, 연극 또는 책을 제공하는 등의 건전한 오락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일본군 지휘부가 처음부터 생각했던 것은 여성을 물건 취급하여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24 - P24

군인마저도 움추러들게 하는 군위안소에서 컨베이어 벨트식으로 밀려오는 병사를 상대해야만 했던 여성들의 대우가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요?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89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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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08-14 17:2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네요.
기림엔, 기억하자는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너무 많이 잊고 살고 있습니다.
위안부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8-14 15:16   좋아요 6 | URL
정말 그렇습니다... 많은 이들과 일들이 우리에게 잊을 것을 강요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잊지 않아야할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위안부 문제, 세월호 문제 등이 여기에 속한다 생각합니다. 기억의 소거에 저항하는 것이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페넬로페님 짧지 않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8-14 15:3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실증주의 사관은 이미 불합리성을 증명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나라 주류 식민사관 역사학자들이 붙들고 있을 뿐.
자료가 다 있다고 한들, 골라담는 좌판이 되는...

시오노 나나미가 위안부 얼마나 상냥한 말이냐고 했다는 기사를 보고 익히 그녀의 사상은 알고 있었으나 여성인 그녀가 그런 말을 했다는데 분개.
책들을 다 버릴까 했습니다.
지식인들의 필력이 무서울때가 있습니다.ㅠ
이영훈도 그렇고 복거일도 그렇고....

겨울호랑이 2021-08-14 17:45   좋아요 4 | URL
데이터에 근거한 실증주의 과학의 한계를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알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 여겨집니다. 세부 데이터보다는 기본 가정에 전제되어 있는 문제점 등에 대한 비판과 공유가 필요한데 이러한 점이 잘 되지 않고 자신의 입맛대로 재단되는 것 같습니다... 그레이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반박하기 어려운 전문가들의 주장이 이때문에 무서운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붕붕툐툐 2021-08-14 23:2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늘 위안부 기림의 날에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해요!!

겨울호랑이 2021-08-15 00:05   좋아요 3 | URL
붕붕툐툐님께서 함께 읽어주셔서 저 역시 감사드립니다 ^^:)

바람돌이 2021-08-15 02: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중학생들하고 수업시간에 일제강점기 통계 자료 2개 내놓고 토론시키면요. 정말 놀라울정도로 본질을 꿰뚫어보는 아이들이 많아요. 실증적 자료라는 것이 사실은 어떻게 취사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정말 조작되기 쉬운 자료인데 일방적으로 취사선택한 자료만 가지고 자신들의 관점을 객관적인양 내세우는 인간들은 최소한의 학자적 양심조차 없다고 생각되어져요.

겨울호랑이 2021-08-15 08:14   좋아요 4 | URL
그렇습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데이터를 취시선택하고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이들이 주류 지식인층에 적지 않다는 것은 분명 문제라 여겨집니다. 그래도 바람돌이님 말씀을 들으니 다음 세대는 한층 나은 모습이라 다행입니다^^:)

scott 2021-09-10 15: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 호랑이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금요일 가족 모두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ㅅ^

겨울호랑이 2021-09-10 16:39   좋아요 1 | URL
scott 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

mini74 2021-09-10 16: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축하드려요 *^^*

겨울호랑이 2021-09-10 16:40   좋아요 1 | URL
미니님 감사합니다. 평안한 주말 되세요! ^^:)

독서괭 2021-09-10 16: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호랑이님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 2021-09-10 16:40   좋아요 2 | URL
독서괭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금요일 밤 되세요!

그레이스 2021-09-10 16: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1-09-10 16:40   좋아요 3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

모나리자 2021-09-10 16: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겨울호랑이님~^^

겨울호랑이 2021-09-10 17:05   좋아요 1 | URL
모나리자님 감사합니다! 여유로운 주말 되세요^^:)

서니데이 2021-09-10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1-09-10 18:43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선선한 가을밤 되세요!^^:)

이하라 2021-09-10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 2021-09-10 22:25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기분 좋은 금요일밤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1-09-11 1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진심 축하드립니다. ^*^

겨울호랑이 2021-09-11 13:52   좋아요 0 | URL
페크님 감사합니다. 선선한 가을 주말 되세요! ^^:)

초딩 2021-09-11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페이퍼 당선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겨울호랑이 2021-09-11 13: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초딩님 행복한 토요일 되세요! ^^:)

2021-09-11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9-11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촉매는 화학반응을 일으킬 때 아무렇게나 하지 않고 규칙성을 띠기 때문에 생명 탄생의 이전 단계에서 중요하다. 촉매와 그들의 촉진 반응에 의해 더욱 많은 종류의 화합물들이 점차 생겨났다... "하이퍼사이클 hypercycle"이라는 강력한 촉매 작용을 통해 분자들은 화학적 보전 chemical survival을 위한 투쟁에서 서로 서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가조직할 수 있는 있는 화합물들이 서로 보완 작용하여 마치 생명체 같은, 궁극적으로 복제 가능한 구조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이클의 진행은 최초의 세포를 탄생시키는 기초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뒤를 이어서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발전하는 기반을 만들었다. 하이퍼사이클 과정은 생물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_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마이크로 코스모스>, p65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 1938 ~ 2011)와 아들 도리언 세이건(Dorion Sagan, 1959 ~ )의 <마이크로코스모스 Microcosmos: Four Billion Years of Microbial Evolution>는 지구 역사에서 오랜 기간 주인공이었던 미생물과 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마치 '오파비니아' 시리즈의 요약본과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입문서(入門書)를 통해 저자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논리는 협동보다는 경쟁을 크게 강조했다. 그러나 피상적으로 매우 연약해 보이는 생물이 집합체의 한 부분으로서 오랜 기간 생존했던 반면, 소위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생물이 협동 기술을 익히지 않은 나머지 결국은 멸망한 사례를 우리는 진화 역사에서 꽤 자주 보아왔다. 만약 공생이 생물 역사에서 그렇게 보편적이며 주요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생물학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_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마이크로 코스모스>, p165


 진화 과정을 거쳤던 모든 종이 결국 공진화를 한 것이라는 논리는 추론적이기는 하지만 명백한 사실이다. 이 논리는 미생물우주뿐만 아니라 거대생물우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곰팡이는 식물 질병의 주 원인이면서도 식물체 생장에 필수적이다.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의 험악한 관계는 때떄로 좀 더 대규모 공생관계의 한 부분으로 간주할 수 있다. _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마이크로 코스모스>, p263


 <마이크로 코스모스>에서 생명의 출현으로부터 현생 인류에 이르기까지 수십 억년에 걸친 지구 역사에서 진화(進化, evolution)은 결국 '공생(symbiosis)'의 문제임을 저자들은 강조한다. 그런 면에서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 ~ 1903)에 의해 왜곡된 '사회적 진화론'의 관점에서 벗어나 '함께 살아가는' 진정한 진화의 의미를 되찾자는 것이 이 책의 한 주제라 여겨진다.


 생물의 역사에서 80퍼센트는 미생물의 역사이다. 우리는 약 20억 년 전 대기 중에 산소가 축적될 때 출현했던, 산소를 사용해서 물질대사를 할 수 있었던 박테리아와 기타 여러 박테리아들로 구성된 재조합에 불과하다.(p271)... 우리는 진화의 사다리에서 가장 윗계단을 차지하는, 모든 생물의 지배자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생물계의 지혜를 받은 존재에 불과하다. 우리가 유전공학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인간은 자신을 박테리아 생활사에 은근히 맡겨서 오랫동안 그들의 방법으로 유전자를 교환하고 복사하게 했다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_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마이크로 코스모스>, p272


 저자들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토인비(Arnold Toynbee·1889~1975)에 의해 문명(文明)에 주어진 '도전과 응전'이라는 과정도 새롭게 보여질 수 있을 것이다. 도전에 성공적인 응전이 문명을 이끈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실현된다는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고대 그리스에서 도리아인의 침입, 고대 인도에서 아리안 족의 침입도 문명의 파괴가 아닌 새로운 문명의 탄생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진화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아닌 어울림이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진화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조금 누그러지는 느낌을 받는다.


 미토콘드리아의 선조는 분명, 현대의 포식성 박테리아 중에서 특히 델로비브리오 Bdelovibrio나 답토박터 Daptobacter와 비슷한 종류였을 것이다(p174)... 우리 몸 세포에 있는 미토콘드리아의 선조도 맹렬한 공격자였는데, 주위에 산소가 풍부해지면 산소를 호흡하고 또 필요한 경우에는 산소 없이도 생존할 수 있는 그런 박테리아였을 것이다. 미토콘드리아의 선조는 우리 몸의 다른 박테리아 조상에게 침입해 그 속에서 번식했다. 그들에게 침입당한 숙주세포는 처음에는 거의 생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숙주세포가 사멸하면 침입자들도 역시 죽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결국에는 협력자들만 살아남았다. _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마이크로 코스모스>, p175


 이와 함께 <마이크로 모스모스>는 오랜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이 겸손할 필요가 있음도 말한다. 이런 겸손함을 잃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는 살아남을 수 없음이 이 책의 또다른 주제다. 개인적으로는 다소 직설적으로 말하는 저자의 화법에서 저자의 전(前) 남편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 ~ 1996)의 <코스모스 Cosmos>와는 같은 메세지, 다른 어조를 느끼게 된다. 두 책에서 다루는 코스모스는 <10의 제곱수>에서 보여주는 세계만큼 크기에서 차이가 있지만, 메세지의 크기는 결코 다르지 않다.


 매번 대재난이 있을 때마다 생물권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두 발짝 앞으로 전진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으로의 두 발짝은 본래의 문제 영역을 뛰어넘어서 새로운 진화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그 도전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은 생물권이 특출한 불굴의 능력이 있어서 대재난을 딛고 일어서서 새로이 시작할 수 있음을 확신시켜 준다. _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마이크로 코스모스>, p330


 우주에서 벌어졌던 진화의 단계를 차근차근 이해하노라면, 거대한 [수소 산업]의 최종 산물로서 태어난 생물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존재임을 확실히 알게 된다. 지구 이외의 다른 곳에서도 우리와 같이 놀랄 만한 돌연변이를 이룩한 존재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 먼 곳 어디에선가 우리에게 들려줄 그들의 흥얼거림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_ 칼 세이건, <코스모스>, p674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대기 중 높아지는 이산화탄소의 농도(PPM)에 의해 유발되는 지구온난화문제, 핵발전 문제 등은 분명 우리의 위기다. 그렇지만, 그것을 지구의 위기라 볼 수 있을까? <마이크로 코스모스>는 지구 역사 속에서 이미 여러 차례의 위기와 종(種)의 대멸종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대멸종 후에도 '바이러스'라는 뿌리가 존재하는 한 생물은 다시 번성할 수 밖에 없음도 함께 보여준다. 다소 냉정하지만 문제는 인류의 미래가 여기에 포함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일 뿐이다. 저자(린 마굴리스)가 좋아하는 가이아 이론(Gaia Theory)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생물이 자신을 변화시킨다면 그것은 공간, 탄소, 에너지, 물 등을 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한 것이며, 이는 다시 새로운 부산물을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새로운 부산물 축적이 점차 증가하면 부산물을 생산했던 바로 그 생물이 부산물 때문에 시험에 놓이게 된다._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마이크로 코스모스>, p339


 이것은 또한 환경 문제에만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마이크로 코스모스<안의 문장 안에 묘사된 새로운 부산물 축적이 생물을 번성하게 하는 한편, 위기에 놓이게 하는 상황을 통해 19세기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를 떠올리게 된다. 그가 눈 앞에서 지켜봤던 자본주의에 내재한 역설이 표면화 되는 상황 속에서 혁명을 통한 변화를 주장했다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거의 정점에 이른 지금 시점에서 이에 대한 해법으로 무엇을 제시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지만, 차근히 답을 찾아가도록 하자.

 

 내가 '모순'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역설'입니다. 앞서 이율배반, 즉 '대립하는 두 개의 주장이 모두 옳은' 상황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주장이 상반된 옳음을 동시에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역설(paradox)'입니다. 하나의 견해(doxa)에서 반대 방향 내지 다른 방향(para -)이 생겨나는 것이죠. 모순적 대립, 즉 논변과 항변의 대립 속에서는 한쪽 힘이 커지면 다른 쪽 힘은 작아집니다. 대립이라는 말이 그런 뜻이니까요. 그런데 역설의 상황에서는 한쪽이 커지면 다른 쪽도 커집니다. 나는 마르크스에게 모순의 변증법 이상으로 역설의 변증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_ 고병권, <다시 자본을 읽자>, p168/220


 <마이크로 코스모스>는 오랜 지구의 역사를 요약하면서 바이러스(virus)로부터 시작된 진화의 역사 속에서 우리 인간도 결국은 '변이화합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 과정에서 지구와 생명의 역사의 핵심을 알기 쉽지만 분명하게 알려주고 저자들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좋은 생명과학 입문서라 생각된다. 그리고, 다른 여러 분야와도 연계해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에세이이기도 하다.


PS. <마이크로 코스모스>안의 자세한 내용은 '오파비니아' 시리즈의 리뷰를 통해 살펴보는 것으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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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구지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길상은 생각에 빠져서 자신이 달구지를 타고 있다는 것을, 읍에 심부름 가고 있는 길이라는 것을 거의 잊었다. 꾸불꾸불 밀려오는 물굽이가 바닷가의 방죽을 치고 또 치는 것처럼 잇닿아 밀려오는 공상은 그에게 다시없이 감미로운 것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수많은 생각들은 마치 만화경같이 찬란하고 다양했다. 갖가지 빛깔이 있는가 하면 갖가지 소리가 들려오고 과거에서 미래까지 추억과 꿈은 마음대로 끝도 시작도 없이 그의 생각 속 넓은 공간을 비상하는 것이다. 추억의 창문에서는 어느 길모퉁이에서 들었던 소슬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고 장님이 불고 가던 피리 소리가 들려왔고 범패(梵唄)소리, 새벽 산사에 울리던 장엄한 인경 소리가 들려왔고 강물을 건너오는 뱃사공의 노랫소리, 추억의 창문에서 명주 수건으로 감싼 월선아지매의 얼굴이 보였다. 월선아지매의 모습은 별당아씨의 뒷모습으로 변해갔고 산을 바라보던 슬픈 그 구천이의 옆얼굴이 나타났다. (p114/518) _ 박경리, <토지 3>


 어느새 토지 독서챌린지에서 <토지 3>를 읽고 있다. 아버지 치수의 죽음과 조준구 일가의 등장으로 긴장감이 서서히 생기는 도중에 달구지를 타고 가는 길상의 상상에 눈이 멎는다. 수많은 생각들이 이어지면서 만들어 내는 시각(視覺), 청각(聽覺)의 이미지. 절에서 자란 길상의 과거와 현재 최참판 댁 몰락의 전조인 별당아씨와 구천의 도피까지 현재에 이르는 이미지들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 ~ 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쪽으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Du cote de chez Swann>의 유명한 마들렌 과자를 먹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그 추억이 왜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 이유를 알아내는 일은 훨씬 후로 미루어야 했다.) 아주머니의 방이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집과 더불어 온갖 날씨의,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마을 모습이 떠올랐다. 점심 식사 전에 나를 보내던 광장이며, 심부름 하러 가던 거리며, 날씨가 좋은 날이면 지나가곤 하던 오솔길들이 떠올랐다. 일본사람들의 놀이에서처럼 물을 가득 담은 도자기 그릇에 작은 종잇조각들을 적시면, 그때까지 형체가 없던 종이들이 물속에 잠기자마자 곧 펴지고 뒤틀리고 채색되고 구별되면서 꽃이 되고, 집이 되고, 단단하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이제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들과 스완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 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마을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_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p54/226


 마들렌 과자의 미각(味覺)이 불러온 수많은 추억과 이미지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 1995)는  이 장면을 '기호'로 받아들인다.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기호'안에 숨겨진 의미(진리)를 찾는 과정으로 인식하는데, 미래를 향한 '찾기'의 과정에서 이러한 기호들은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이 장면들은 아름다운 몽환적 이미지의 표현이 아닌 작품 전체에 대한 과제 부여의 성격이 강하다.


 세번 째 세계는 인상 혹은 감각적 성질 qualites sensibles의 세계이다. 어떤 감각적 성질은 우리에게 야릇한 기쁨을 주는 동시에 일종의 <명령>을 전해 준다. 이런 식으로 체험된 성질은 더 이상 그 성질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대상의 속성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가 해독하려고 시도해야만 하는 <완전히 다른> 대상의 기호로 나타난다.(p34)... 우리는 이 성질, 이 감각적 인상을 마치 물 속에 넣으면 열려져서 갇혀 있던 형태가 드러나는 일본 종이처럼 펼쳐 낸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전개 과정을 보여준다. 우선 특별한 기쁨이 찾아오고, 그 결과 이 기호들은 그 직접적인 효과로 인해 이전 상태[기쁨을 주기 이전의 사물들'과 구별된다. 다른 한편 이 기호의 의미를 찾기 위한 사유 작업이 필요하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느껴진다.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숨겨진 대상을 건네주면서 기호의 의미가 나타난다 (마들렌이 콩브레를, 종탑들이 소녀들을, 포석들이 베니스를 건네 주는 식으로 말이다.) _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 p36


 그렇지만, 이에 대한 온전한 해석은 작품 끝에 <되찾은 시간> 전까지 미뤄진다. 그 전까지 독자들은 마들렌 과자로부터 시작된 기호들의 의미를 '사교계', '사랑의 그룹', '기호의 세계' 라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잃어버리는 시간', '잃어버린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이라는 다른 시간선들의 교차에서 끊임없는 미로를 헤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이 모든 여행의 끝은 '되찾은 시간'에서 비로소 풀려나간다.

 


 마들렌 과자의 도취 상태가 마지막의 현시를 미리 암시하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적어도 그것은 추억의 문을 열어준다는 장점, 그리고 콩브레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되찾은 시간>의 첫 밑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되찾은 시간>을 모르고 이 작품을 읽어가는 독자의 눈에는, 콩브레 이야기로 옮겨가는  것은, 인위적으로 수사학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가장 단순한 서술적 관례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번째 독서에 이르러 내용을 보다 잘 알게 되면, 서재에서의 사색이 마침내 깨닫게 된 소명을 검증하는 시기의 되찾은 시간을 열어주는 것처럼, 마들렌 과자의 도취 상태는 유년기의 되찾은 시간을 열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작과 끝의 이러한 균형은 작품 구성을 주도하는 원칙임이 드러난다. _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2>, p284 


 해석자는 마들렌이나 종탑의 경우에서 자신의 이해가 미치지 못했었던 것에 대해 "찾기"의 끝 부분에 와서 비로소 이해한다. 즉 물질적 의미는 그것이 구현하는 관념적 본질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_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 p37


 이렇게만 놓고 본다면, <토지 3>의 길상의 생각 장면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큰 관련이 없어 보인다. 사실, 별 관련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논의를 진행시켰으니 조금 더 나가보자. 이어지는 생각 속에서 길상은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다. 그는 과거 절에 있었던 시기를 생각하면서 부처님도 자신을 공포로부터 구원하지 못했음을 두려워하며 달구지 위에서 잠을 깨어난다.

 

 이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영상을 내버려두고 길상의 생각은 별안간 달음박질쳐서 엉뚱한 곳으로 간다. 어느 한낮에 꾼 꿈으로 날아갔다. 다시 뛰어서 우뚝 멈춘 곳은 숲 속이며 개울가였다. 쭈그리고 앉아서 물맴이가 도는 것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무서워졌다.... 길상은 자신이 달구지 위에 있음을 깨달았다.(p115/518) _ 박경리, <토지 3>


 그리고,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길상은 평사리가 아닌 간도에서 자신의 생각 속에서 스쳐갔던 인물 김환(구천)을 다시 만난다. 그 전에 자신이 알지 못했던 구천 출생의 비밀과 서희와의 관계가 이 만남을 통해 밝혀지게 되고, 이를 통해 과거 구천에 대한 경외(敬畏)감이 재생되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진리 찾기'와 '되찾은 시간'이 완성되었다고 본다면 무리가 있을까. 구천은 달구지 위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통해 '별당아씨 - 구천'의 관계라는 '기호'를 무의식 중에 부여받았다면, 객줏집에서 만남을 통해 '되찾은 시간' 속에서 출생의 비밀이라는 진리와 '기호'에 대한 해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십 년 세월만 무서운가? 이 무서운 인연들. 목구멍으로 술이 타고 내려가는데, 뜨거운 빼주가 넘어가는데 머릿속이 차츰 맑아온다. 선명하게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지난 일들이 새롭게 눈앞을 지나가고 있다. 소년 길상이는 구천이를 두려워했다. 쥐어박히며 탱화 그리기를 가르치는 혜관보다 남몰래 손짓하여 데려가서는 글을 가르쳐주던, 말이 적고 엄격해 보이던 사람.(p447)...  "별당아씨가 어떤 여자던고? 어떤 여자였던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었던, 현세와 하늘에 순명할 수 없었던 사람, 땅을 끊을 수 없었던 초나라의 굴원(屈原)은, 그 굴원은 돌을 안고 멱라(汨羅)에 빠졌건만, 그 기나긴 방류(放流)도 끝이 났건만 어찌 나는 살아 있는가." 한 사나이가 어둠 속에서 통곡하고 있었다.(p360/518)... 꿈도 멀어져갔다. 빛깔과 빛깔이 난무했다. 우관스님이 거기 서 있는 듯했으나 그 모습도 사라졌다. 길상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객줏집 안방에 누워 있는 것을 알았다._ 박경리, <토지 8>, p457/656 


 구천과의 만남을 통해 '기호'의 의미로부터 해방된 길상의 모습은 이후 길서상회를 정리하고 간도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서희와의 이별 장면에서 잘 표현된다.  구천과의 만남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별당아씨 - 구천'의 사랑을 인정하는 길상과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서희. 서희는 남편 길상과 함께 돌아가려 하지만, 길상은 이런 서희 곁을 떠나고 만다. 마치, <갇힌 여인>의 알베르틴이 화자의 곁을 떠나듯. 상처입은 아름다운 나비 서희의 여행은 그래서 <토지>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보복을 하기 위해서...... 별당의 그 여자를 유인해 갔다 그 말씀이시오?" 목에 잠겨 몸부림치듯 서희는 말을 밀어내었다. "그것은 사랑이었소." 서희는 절을 향해 갈 때마다 그 일을 생각한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길상은 떠났고,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으며 용정촌에는 풍문이 돌았다. 법당으로 들어가는 모시옷의 최서희, 그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상처입은 나비같이, 그래도 그는 아름다웠다._ 박경리, <토지 8>, p618/656


 사실 갇힌 사람은 알베르틴이 아니라, 자신의 질투와 의혹에 갇힌 화자이다. "질투는 상상력의 실패이며(......) 질투를 이야기로 구성하는 것은 사랑의 아픔에 맞서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라는 크리스테바의 말처럼, 어쩌면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 싶은 그 미친 듯한 욕망인 질투를 통해, 비록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관계되는 지극히 내밀한 몸짓과 시선이라 할지라도 끝도 한계도 없는 탐색 작업을 통해 그 미세한 내면의 사건을 이야기로 재구성하려는 고통스러운 여행을 감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_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p279/336 작품 해설 中


ps. 스스로 생각해도 논리 전개가 상당히 무리하고 관련없는 두 작품을 끌어다가 페이퍼를 작성한 듯 하지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재미로라도 두 대작(大作)과 거리를 좁히는 계기가 되었다면,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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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8-07 1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토지>와 <일.시.찾>의 콜라보라닛~ 생각도 못한 조합에 그저 입이 쩍벌어집니다.
아니 내가 떠올랐음 그런거죠~ 논리 따윈 필요 없습니다.(논리가 부족하단 말은 절대 아님~ㅋ)
토지문화재단에서 겨울호랑이님이 챌린지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할 듯하네요~👍

겨울호랑이 2021-08-07 13:1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붕붕툐툐님 덕분에 좋은 프로그램 알게 되었고, 쏟아지는 과제(?)를 하다보니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되어 좋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바람돌이 2021-08-08 0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지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리고 들뢰즈까지...
우와 대단한 연결입니다. ^^

겨울호랑이 2021-08-08 06:55   좋아요 0 | URL
사실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에서두 작품의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연결이 기발했다면 공은 들뢰즈 몫이고, 무리했다면 제 부족함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