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멩이가 날아왔다. 그것이 신호인 양 두 번째 세 번째 돌멩이가 날아왔다... 바로 대놓고 때릴 수 없는 젊은 사람, 아낙들에게 돌은 참 편리한 것이다. 누가 던졌는지 알 수 없는 돌멩이는 그 수가 많을수록 군중의 심리를 폭력으로 이끄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삽시간에 돌멩이는 우박이 되어 봉기한테 쏟아진다. _ 박경리, <토지 11> , p149/560


 <토지 11>에서는 삼수에게 겁탈당한 딸 두리를 위해 복동네가 삼수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봉기 이야기가 나온다. 봉기는 석이의 설득으로 동네 사람들 앞에서  사실을 털어놓지만, 그는 자신의 고백으로 인해 주변의 수많은 군중으로부터 무수한 돌멩이 세례를 받으며 피범벅이 되고 만다. 개인으로서 주변인들은 죄를 저질렀다고는 하나 나이 많은 어른인 봉기를 직접적으로 단죄하기는 어려웠으리라. 그렇지만, 자신의 익명성이 보장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집단의 익명성 뒤에 숨어서 날아든 돌 하나. 그것이 신호가 되어 수많은 개인들은 자신의 감정을 과감하게 표현하는 장면이 작품 속에 표현된다. 그리고, 작가는 이 장의 제목을 '군중심리'라 이름짓는다. 이에 대해, 귀스타브 르 봉 (Gustave Le Bon,1841 ~ 1931)의  <군중심리 Psychologie des Foules>를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껏이다. 여기서 르 봉이 바라본 군중의 속성을 살펴보자.


 '군중'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국적과 직업, 성별을 불문하고, 또한 그들이 어떤 우연한 계기로 모였든지 상관없이 어떤 개인들의 집합을 의미한다.(p42)... 군중이 드러내는 감정의 과격함은 책임감의 부재로 한층 더 과장되며, 이질적인 군중은 특히 그렇다. 군중은 고립된 개인은 할 수 없는 감정 표현과 행동을 할 수 있다. 군중은 숫자가 많으므로 무사하리라는 확신과 인원이 많으니 일시적이나마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는 생각 덕분이다. 어리석고 무지하고 시기심 많은 개인이 군중을 이루면 자신이 무가치하고 무기력하다는 감정에서 해방되어 일시적이지만 엄청난 힘을 갑작스레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_ 귀스타브 르 봉, <군중심리>, p91/472


 르 봉이 바라보는 '군중'은 비합리적인 집단이다. 외적 충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매우 불안정한 존재로서 과잉된 감정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집단. 이 안의 구성원들은 맹목적으로 휩쓸려가기 쉬우며, 이러한 개인이 모여 매우 단순하면서도 극단적인 집단의 성격이 표출된다는 것을 르 봉이 <군중심리>에서 설명한다. 르 봉의 이러한 주장을 학인한 후 <토지 11>의 상황을 돌아가보면, 봉기의 거짓말에 대한 군중의 분노가 돌팔매로 표현되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와 비슷한 장면을 <토지 10>에서 이미 본 적이 있었고, 이와 다른 대중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두 청년이 달려든다. 간부(姦夫)와 간부(姦婦)를 치는 것은 누구에게도 거리낄 것이 없는 불문율이다. 홍이와 장이는 비참하게 맞았다. 그러나 육신의 아픔이 무엇인가. 반죽음이 될 만큼 코피가 쏟아져서 낭자한데 중늙은 여자는 또다시 명령을 내렸다. "징거가 있어야 한다. 야아들아! 그 쪽문 열고오, 이웃 사람들 들어와 구겡하라 캐라! 간통한 연놈들 얼굴을 똑똑히 구겡하라 캐라!" 문이 열렸다. 우르르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제각기 한마디씩 했다... 낄낄낄 웃는 소리... 사내들의 음탕한 웃음소리... 동정의 소리도 있다. __ 박경리, <토지 10> , p622/682


 <토지 10>에서 홍이와 장이의 불륜을 바라보는 군중(구경꾼)의 대응은 봉기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봉기는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거의 반죽음을 당할 뻔하였지만, 간통현장을 들킨 홍이와 장이는 장이의 친척들의 폭력에 노출되었을 뿐 군중의 폭력으로부터는 안전할 수 있었다. 비웃음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했지만. 이들 두 사건에 대한 군중의 대응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설명 또한 르 봉의 <군중심리>에서 찾아본다.


 배심원들은 언젠가는 자신들도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는 범죄들[특히 사회에 위협적인 범죄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했지만 치정범죄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범죄들이 사회를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기 때문이다._ 귀스타브 르 봉, <군중심리>, p285/466


 르 봉은 배심원(군중)들이 갖는 심리를 분석하며, 배심원들이 자신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범죄는 보다 감정적인 반응을 보인 반면, 치정 사건에는 보다 객관적인 입장을 보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자신과 주변세계의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군중의 반응. 홍이와 장이의 간통사건과 같은 일은 자신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기에 군중은 제3자의 입장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었던 반면, 봉기의 거짓말은 식민상태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위협이었기에 군중은 분노했던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군중의 반응은 우리가 <사랑과 전쟁>은 막장 드라마로 가볍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그것이 알고 싶다>의 살인 사건은 국민청원의 대상이 되는 차이로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바라본다면, 우리 역시 군중의 일원임을 씁쓸하게 자인할 수 밖에 없을 듯하다.


 다른 한 편으로 이번 주 <토지 11>에서 죽음을 다시 발견한다. <토지> 작품 전반에 수많은 인물들의 죽음이 나오지만, 이번 죽음이 각별한 것은 토지 1세대의 인물들 중에서도 비중있는 이들인 김 환(구천)과 임이네의 죽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환이의 죽음은 환이의 시각에서, 임이네의 죽음은 남편 용이와 아들 홍이의 관점에서 보여주면서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독자들이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에 대해서는  죽어가는 사람과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 1897 ~ 1990)가 생각하는 죽음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자.

 죽음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기나긴 꿈 속으로 떠나가고 세상은 사라진다. 두려운 것은 죽어가는 고통이며, 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산 자의 상실감이다. 죽음을 둘러싼 집합적이거나 개인적인 환상은 종종 사람들을 섬뜩하게 한다. 그 공포의 독성을 완화하고 유한한 삶이라는 소박한 현실을 그에 맞세우는 것은 아직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죽음은 숨겨야 할 어떤 비밀도 없다. 어떤 문도 열어 보이지 않는다. 죽음은 한 인간의 종말이다. 남는 것은 그 혹은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 즉 산 자가 가진 기억들이다. _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죽어가는 자의 고독>, p74 


 지삼만의 밀고로 붙잡혀 고문을 받으며 동료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김 환은 자신의 죽음 역시 예감한다. 죽음 앞의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삶을 마무리한다. 별당 아씨와의 인연, 자신 삶의 의미 등을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삶을 정리하며 환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혼자 남겨진 이의 죽음.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다.


 '더 늙으면 추해진다.' 눈을 뜨고 노을이 타는 철창문을 또 바라본다. 생애를 통하여 철창문에 비치는 저 노을만큼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다시 눈을 감는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환이는 자신의 생애가 성인의 길이 아니었음을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투쟁과 방랑과 애증(愛憎)과 원한의 가파로운 고개를 넘은, 평지가 오히려 발끝에 설었던 오십 평생은 마음과 몸이 피로 물들었던 것처럼 격렬했었다. 환이는 무엇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인지 그것을 생각한다. _ 박경리, <토지 11> , p200/560 


 다른 한 편, 임이네의 죽음은 남겨진 이들의 기억으로 표현된다. 남편 용이에게 임이네의 죽음은 절망이었다면, 아들 홍이에게 임이네의 죽음은 투쟁이었고, 자리바꿈이었다. 그리고, 임이네의 죽음을 통해 홍이에게 월선과 임이네는 대립되지만 공존(共存)하는 어머니였음을 알게 된다. 적대적 공생관계가 있다면 이들의 관계였을까. '선(善)- 악(惡)'처럼 월선에 대한 그리움이 임이네의 죽음으로 인해 사라졌다는 사실을 통해서 홍이에게 월선이나 임이네가 '키워준 어머니' 와 '낳아준 어머니'로 구분된 존재가 아니라 '월선-임이네'로 함께 자리잡았음을 깨닫게 된다. 이와 함께. 홍이가 첫 사랑 장이에게 끌렸던 이유가 장이가 월선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리면서 임이네가 홍이 인생에 남긴 그림자가 얼마나 짙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그림자가 짙었지만, 그림자와 함께 한 시간이 너무도 길었기에 그림자가 사라진 이후 홍이의 삶이 행복할 것인가는 이후 지켜볼 부분일 것이다. 죽어가는 자에게 두렵지 않은 죽음과 죽음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남겨진 기억의 의미를 우리는 <토지 11>의 두 죽음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가슴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속으로 고개를 저어댔지만 임이네 죽음이 되살아난 것이다. 한 번도 따뜻하게 대해준 일이 없는 여자, 죽음은 살아남은 사람에게 회한을 남기게 마련이다. 좋지 않은 추억들을 다 떠내려 보내기 위해선 임이네 생각을 말아야 하고, 그 고독하고 처참한 죽음에 대한, 불쌍한 망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절이다. 임이네의 죽음은 슬픔이나 애통보다 용이에게는 충격이었다. 죽음과의 처절한 싸움, 밑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절망, 죽음은 모두 그럴 것이지만 뼛골까지 스며드는 외로운 죽음을 용이는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연민이었으나 임이네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절망이었고, 그 절망감은 죄의식을 몰고 오는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1> , p64/670


 견딜 수 없는 죄책감, 죽은 어미를 생각한다는 것은 가장 고통스런 일이다. 어쩌면 일본으로 간 이유 중에는 모친에 대한 기억에서 도망치고 싶은 심사가 있었는지 모른다. 비참한 죽음을 잊고 싶었는지 모른다. 병석에서 병으로 갔지만 임이네의 죽음은 월선의 죽음과는 달랐다. 이 두 죽음에서 비로소 홍이는 월선에 대한 그리움으로부터 놓여났으며, 월선이 점령했던 자리에 생모의 죽은 모습이 낙인과 같이 찍혀버렸던 것이다. 임이네의 죽음은 죽음과의 무참한 투쟁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체념 못한 죽음과의 투쟁이었다.(p266)... 그것은 자기 자신의 죽음과 모든 사람의 운명으로 확대되어간 허무의 깊이 모를 심연이었다. 월선이 축복받은 죽음이라면 임이네는 저주받은 죽음이요, 근원적으론 죽음이란 저주받은 것일 거라는 공포는 홍이 마음을 깊이 지배하였다. _ 박경리, <토지 11> , p267/560


 이번 주 읽은 <토지 11>의 내용을 통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중심리와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번 페이퍼는 빌헬름 라이히 (Wilhelm Reich, 1897 ~ 1957)의 <파시즘의 대중심리 Die Massenpsychologie des Faschismus>에 대한 내용을 마지막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대중들의 심리와 지도자의 성격이 일체성이 가져온 비극이 히틀러의 독일 지배임을 밝히는 라이히의 저서 속에서, 선천적으로 지도자의 성격 구조와 대중(군중)의 성격 구조가 동일했을 때만 파시즘 집권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묵돌 선우(冒頓單于, ? ~ BC174)의 경우처럼 강압에 의해서도 강제 동화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묵돌의 명적 또는 봉기에게 가해진 첫 번째 돌팔매가 갖는 의미를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번 주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묵돌은 명적 鳴鏑(소리나는 화살)을 만들어 부하들에게 나누어 준 뒤 그것으로 기사 훈련을 시켰다. 그는 이런 명을 내렸다. "내가 명적을 쏘면 다 같이 그곳을 쏘도록 하라. 쏘지 않는 자는 참한다." 얼마 후 사냥을 나간 뒤 명적을 쏜 곳에 화살을 날리지 않은 자는 가차 없이 참했다... 얼마 후 묵돌이 사냥에 참가한 뒤 부친인 두만 선우가 타고 있는 말을 향해 명적을 날렸다. 부하들이 모두 일제히 활을 쏘았다. 묵돌은 비로소 좌우 모두 자신의 명을 따른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_ 사마천, <사기열전 2> <흉노열전>,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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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호실 환자는 임이네였다. 천년을 살 것 같았던 그 무성한 생명력은 어디로 간 것일까. 참혹한 몰골이다. 복막염 수수을 한 지 열흘이 지난 것이다.(p557)... "선상님요, 나 나이가 이자 겨우 쉰다섯입니다. 나는 못 죽십니다. 참말로 못 죽십니다. 무신 남 못할 짓 했다고 멩대로 못 살겄십니까. 디건이(두견이)목에 피 내묵고 살덧기 살았는데 한이 첩첩산이오, 선상님, 살리주시이소!" 울음을 터뜨린다.(p559)... "영악한 아낙이야. 자기 죽음을 예감하는 것 같다." "환자치고 저런 환잔 처음 봤습니다. 어떤 때는 반미치광이같이 날뜁니다. 사는 것이 저리 추악한 것이라면 살아서 뭘 합니까." "젊은 사람들은 다 그렇게들 말하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천당이든 지옥이든 내세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_ 박경리, <토지 10> , p560/682


 토지 독서챌린지 20주차. 이번 주 미션은 '3부 2권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 소개'를 포함한 감상평이다. <토지> 3부 2권에서는 결핵성 복막염으로 죽어가는 임이네의 모습이 그려진다. 돈을 밝히다가 자식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임이네. 병들어 죽은 월선과 늙어 시들어가는 남편 용이와는 달리 천년 만년 살 것같은 그 역시 생로병사(生老病死)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임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이 장면이 가장 인상깊은 것은 현실에서 있었던 다른 죽음때문일 것이다. 못된 임이네지만,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전두환의 죽음. 한동안 백담사에 머물며 독경소리를 들으며, 내세에 대한 생각도 해봤을 법한데 반성없이 떠난 그의 죽음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죽음은 절대적인 승리자요, 거대한 암벽에 모래알을 던지는 환자는 눈물나게 측은한 것이기 때문이다._ 박경리, <토지 10> , p565/682


 그토록 억척스러웠던 임이네는 박의사에게 매달리며 살려 달라고 애걸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종착역이지만, 많은 이들에게 미루고 싶은 순간이기도 하다.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에 대해 답을 주는 종교(宗敎)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초기 역사부터 함께 해 온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투는 신들과 다양한 종교들의 형식들은 사실 서로 상극이지만, 종교들 모두가 충족할 통일된 구원책이 있다. 1. 어떤 불안감. 2. 그것의 해소책. 첫째, 불안감은 가장 단순한 말로 줄여보면, 우리가 자연적 상태에 있을 때 우리 주위에 잘못된 것이 있다는 느낌이다. 둘째, 해소책은 고차적 힘과 적절히 연계시킴으로써 우리가 그 잘못된 것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느낌이다....자신의 잘못을 괴로워하고 그것을 비판하는 개인은 의식적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고차적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보다 고차적인 것과 가급적 교통할 것이다. _ 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 p596


 <토지 10>에서는 종교의 역할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진다. 종교의 역할은 개인의 구원에 머물러야 하는가, 사회 참여까지 확장되어야 하는가. 기독교 선교사 미스 헤이워드와 여옥과의 대화는 이에 대한 논쟁이다. 종교의 사회 참여에 대해 미스 헤이워드는 부정적인 입장을 펼친다. 정확하게는 외국 선교사의 제한된 입장을 대변한다.


 약소국이나 식민지에서 우리 선교사업 매우 곤란합네다. 고충 많습네다. 우리도 독립전쟁 겪었고 남북전쟁 상처 아직 남아 있습네다. 나라 잃은 백성들 슬픔 우리 충분히 이해합네다. 그러나 우리 미국에서도 선교는 개인의 영혼을 그리스도로 이끄는 일이며 그리스도의 진실 알게 되고 복종하면 사회개혁 저절로 되는 거라 해왔습네다. 그렇다면 사회개혁 무관심했다 할 수 없습네다... 그러나 이곳은 내 나라 아닙네다. 우리는 손님입네다. 이해하고 동정할 뿐입네다. _ 박경리, <토지 10> , p656/682


 미스 헤이워드의 말대로 그들은 이방인이었고 자신들의 나라가 아니었기에, 지배권력이었던 일본총독부와 대립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선교사업'이었지 고통에 신음하는 형제자매들의 모습이 아니었음을 선교사의 말을 통해 깨닫게 된다. 이에 반해, 여옥에게 식민지 상황은 자신의 상황이었기에, 현실 참여적인 기독교 정신을 말하며 미스 헤이워드의 말을 반박한다.


 산간벽촌에 있어서 기독교란 아주 생소하고 서양사람 종교라는 의식이 강합니다. 그리고 미신적으로 믿어지는 불교며 무당들, 점쟁이를 통한 귀신신앙도 뿌리깊은 것입니다. 유교에서 오는 조상숭배도 그렇고요. 그러나 아무리 몽매무지한 사람에게도 내 나라를 잃었다, 내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말은 대단한 호소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설령 그들이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일지라도 심정적으로 불이 붙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조선에 있어서 독립사상과 기독교 정신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순수한 전도정신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_ 박경리, <토지 10> , p657/682


 이들의 대화에서 여옥과 미스 헤이워드의 말은 각자 자신의 처지에서 나오는 말이기에 옳고 그름을 말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자신의 문제를 남이 풀어줄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는 1919년 3.1운동에서 기대했던 '민족자결주의'가 결코 우리에게 독립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 인식의 또다른 표현으로도 느껴진다. 이로 인해 1920년대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후 1930년대 새롭게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에서 사회주의 계열이 더 힘을 얻게 된 여러 요인 중 하나로 종교에 대한 실망감 또한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3.1 운동을 준비하고 주도한 세력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를 비롯한 종교계 인사들과 애국적인 교원들과 학생들로서 주로 민족주의운동세력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었다.(p22)... 3.1운동의 교훈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상층은 더 이상 항일민족해당운동의 지도세력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계급적 제한성은 일본의 식민지지배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1> , p25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계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하겠다. _ <마태 28:20> <신약성경>  


 개인적으로 내가 여옥이라면, 긴 말을 하지 않고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심정을 대신하지 않았을까 싶다. 형제의 아픔에 동감한다면, 성경의 말씀처럼 세상 끝 날까지 형제와 함께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조직으로서 교단(敎團)과 종교의 가르침 사이에는 현실적인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음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토지 10>에는 이에 앞서 명희와 여옥의 대화가 소개된다. 부인과 이혼하고 명희와 결혼한 남편 조용하 이야기가 이들 사이에 오가지만, 다음 구절은 대화 이전에 앞서 있었던 홍이와 장이의 불륜을 떠올리게 한다.


 별안간 들린 것처럼 여옥의 음성은 강렬하였다. 눈은 더욱 어둡게 타는 것 같았다.

 "그렇담 나도 간음한 여자가 아니겠니?"

 "누구든지 간음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 _ 박경리, <토지 10> , p639/682


 멀고도 가까운 것이 남녀의 사이라던가. 아무도 없는, 외부와 단절된 차고가 유죄였는지 모른다. 불이 붙으면 태워야 하는 것이 이치였었는지 모른다. 사랑은 여하한 경우에도 아름다운 것인지 모른다. 치욕과 멸망의 결과가 크면 클수록 더욱 치열하게 타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예감하면서, 강하게 예감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깊어지고 말았다. 사랑의 환희는 슬픔이었다. _ 박경리, <토지 10> , p617/682


 어머니에게 상처를 입고, 장이에게 상처를 준 홍이. 장이에게 대한 과거의 죄책감으로 현재의 부인 보연에게 다른 상처를 만든 홍이의 모습에서 안타까움, 연민을 느끼게 된다.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이들의 사랑이야기. 그리고 이를 자연스럽게 신여성(新女性) 여옥의 등장으로 연결하는 작품의 매끄러움에 감탄을 하게 된다. 홍이의 개인적인 불안의 감정으로부터 여옥의 종교의 역할까지 개인의 감정선과 시대의 흐름을 오가며, 인물과 시대를 하나로 연결하는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면서 <토지> 3부 2권을 마무리한다... 


 어미에 대한 의사의 선고는 충격이었다. 까맣게 잊었던 장이의 귀향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어미 때문에 받은 충격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놀라움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장이에 대해서는 몹쓸 짓을 했다는 회한이 홍이로 하여 잠들지 못하게 하였다. 장이에게도 물론 메울 수 없는 상처였겠으나 홍이는 자신에게도 얼마나 깊은 상처였는가를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젊음의 실수, 시기가 청춘이며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기 때문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을 홍이는 깨달은 것이다. 보고 싶고 그립고, 그렇지 않았다. 내가 몹쓸 짓을 하였구나, 다만 아픔이었다. _ 박경리, <토지 10> , p605/682


 육신의 고통이 무엇이랴! 시궁창과 같은 오욕, 홍이는 혀를 물어끊고 죽을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홍이는 어디든 도망을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징역이 무서워서도 아니요, 죽음이 무서워서도 아니요, 보연이와 장인, 장모, 처제들, 기름집의 오타며 미야코며 일주며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의 눈길이 무서웠다. 그러나 도망갈 곳이 없었다. 아비의 깊고 깊은 눈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그리고 장이를 두고 갈 수 없다. _ 박경리, <토지 10> , p623/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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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11-27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문열의 ‘불멸‘에도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 안중근 일가가 독실한 가톨릭교도임에도 불구하고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고 나와요. 그토록 힘들게 이 땅에서 일군 가톨릭 전파를 안중근 의사의 행동으로 일본에게 금지 당하지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에요. 같은 신, 같은 말씀이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 된다는게 속상했어요.
언제 읽어도 빛나는 겨울호랑이님의 명품 페이퍼 입니다^^

겨울호랑이 2021-11-28 07:56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사이비 종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큰 틀에서 같은 방향을 지향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종교 갈등이 신앙 자체보다 이면에 깔려있는 교단의 이해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부딪혀서 생긴 문제가 대부분임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신자 또는 신도들이 신앙공동체 안에 소속되어 있지만, 때로는 공동체와 자신을 객관적으로 봐야할 이유 중 하나도 이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페넬로페님 항상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야무네(오복이 할매) 평사리의 과부로 5부까지 등장하는 몇 안 되는 평사리의 이야기꾼. 남편은 폐병으로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 아낙들과 어울려 성실히 일하며, 말이 많고 가난하나 욕심 없으며 정이 많아 사람들의 인심을 얻는다... 같은 과부 처지이던 복동네의 억울한 죽음에 충격을 받고 천일네와 함께 나서서 봉기를 혼내주기도 하고 석이네를 구박하는 귀남네에게 야단을 치기도 하는 경위 바른 사람이다. _ 이상진, <토지인물사전> , p120/214


 <토지>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때문에, 별도의 인물사전이 필요할 정도지만 이들 중 서희가 주인공임은 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구한 말부터 일제시대를 관통하는 이 시대의 아픔을 최서희는 알지 못한다. 어린 시절 개인적인 아픔을 겪기는하지만, 할머니 윤씨 부인으로부터 얻은 재산을 기반으로 더 큰 부(富)를 이루며 권력을 얻은 서희는 분명 어두운 시대의 아픔과는 거리를 둔 인물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1975)가 바라본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onflies Benjamin, 1892~1940)와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면에서 작품에서 비중은 작지만, <토지> 전반에 걸쳐 여러 아픔을 겪으며 살아간 야무네는 고단한 민중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시대에 영향을 가장 덜 받고 시대와 먼 거리를 두고 있어서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흔히 있다. 시대는 이들에게 이 특징을 아주 명료하게 각인시킨다. 프루스트, 카프카, 크라우스(Karl Krauss) 그리고 벤냐민(이 그런 사람들이다. 벤냐민의 경우 몸짓, 말하고 들을 때 머리를 세우는 습관, 예의범절, 특히 용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구성하는 것을 포함한 표현방식, 대단히 독특한 취향 등은 고풍스러워 보였다.(p490)... 그는 망명자로  파리에 살게 된 이후에 천성적인 고결함 때문에 가벼운 만남을 친분관계로 발전시키기 못했으며, 사람들을 새롭게 접촉하지 못했다. _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 p491/886


 여러 곳에서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야무네지만, 이번 주 <토지 10>에서 보여진 야무네의 마음은 고통스럽다. 낯선 섬으로 시집 가결핵에 걸려 아픈 딸 푸건과 딸을 만나고 돌아오는 야무의 모습 속에서 죽어가는 딸을 보면서도 가난과 시집간 이는 출가외인(出家外人)이기에 차마 말을 못 건네는 모습 속에서 속으로 흘리는 아픔을 느끼게 된다.


 "이 무상한 것아, 니 몸이 성함사. 죽물이라도 에미가 끓이주는 것 묵으믄 맴이라도 안 편하겄나. 굶으나 묵으나 나랑 함께 가자."  "한 분 데리고 왔이믄 그만이제, 벵들었다고 내치는 법은 없소. 아예 시어무니 앞에서는 말도 내지 마소." 가고 싶지 않아서 그러겠는가. 찢어지게 가난한 친정에 책임을 지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야무네는 안다. (p155)... 다음 푸건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루에도 몇 번 있는 일이다. 그러고 나면 목이 꽉 메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딸이 죽을 것이란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거니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 가슴 아픈 것은 아니다. 헛간 같은 방이며 시어머니, 동서의 쌀쌀맞은 눈빛이며 무엇을 먹고 온종일을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는가, 그 생각 때문에 목이 메이는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0> , p160/682


 야무네가 어머니로서 겪어야 하는 아픔이 죽어가는 딸을 바라보며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한 심리적 고통이라면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에서 팡띤느가 딸 꼬제뜨의 양육을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은 육체적인 것이었다. 죽어가는 딸을 지켜보며 마음 아파하는 야무네와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머리를 자르고, 이를 뽑고, 심지어 몸까지 팔아야 했던 팡띤느. 비참한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이들 어머니들 마음은 자식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고, 이들의 마음은 피에타(Pieta) 그 자체였다.


[사진] 피에타 (미켈란젤로) Pieta, Michelangelo [출처 : https://www.mentalfloss.com/article/63602/15-things-you-should-know-about-michelangelos-pieta]


 아이(꼬제뜨)는 그 나이에만 볼 수 있는 완벽한 신뢰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모든 엄마들의 팔은 자애로움으로 형성된지라, 아이들이 팔에 안겨 깊이 잠들 수 있는 것이다.(p493)... 한겨울에, 아직 나이 여섯도 채 아니 된 그 가엾은 아이가, 구멍투성이 낡은 누더기를 입고 오들오들 떨면서, 커다란 두 눈 속에 고인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빨갛게 언 작은 손으로 커다란 비를 들고, 해가 뜨기 전부터 집 앞길을 쓸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가슴이 찢어질 듯 비통한 일이다. _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1> , p526/1084


  팡띤느는 뜨개질하여 지은 치마 하나를 사서 떼나르디에 내외에게로 보냈다. 치마를 받고 떼나르디에 내외는 미친 듯이 화를 냈다. 그들이 원하던 것은 돈이었다. 그들은 치마를 에뽀닌느에게 주었다. 가엾은 '종달새'는 여전히 추위에 떨었다. 팡띤느는 홀로 생각에 잠기었다. '내 아이가 이제는 춥지 않을 거야. 나의 머리채로 감싸 주었으니까.'(p607)... 아이에게로 향한 그녀의 사랑은 더욱 열렬해졌다. 추락하면 할수록, 그리하여 주위의 모든 것이 음침해질수록, 그 다정한 어린 천사가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서 더욱 광채를 발산하였다. 그녀가 홀로 중얼거리곤 하였다. "부자가 되면 꼬제뜨와 함께 살 수 있을 거야." _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1> , p609/1084


 야무네와 팡띤느의 자식사랑이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면, <토지>에는 이와 다른  모성(母性)도 공존한다. 홍이를 대하는 임이네의 모습은 자신에게도, 용이에게도, 홍이에게도 모두 어려운 짐이었고, 상처가 되버렸다. 특히, 홍이에게 생모(生母)와 양모(養母) 사이에서 겪었던 마음의 갈등이 후에 첫사랑 장이와 부인 보연 사이에 방황하는 형태로 발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때문일까. 보연과  홍이의 혼인날 내린 장대비가 예사롭게 느껴지질 않는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홍이는 죄의식 때문에 진주로 왔다. 장이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순순하게 느낄 수 있는 죄의식이지만 다른 또 하나의 죄의식, 밟아 뭉개고 싶지만 훨씬 더 쓰라리고 괴로운 감정, 때문에 진주로 왔다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것은 어미에 대한 것이다. 설령 어미가 바위 같은 강자요 자신은 모래알 같은 약자일지라도 자신이 거부하는 쪽이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상대로부터 어떤 고통을 받든 피해를 받든 가해자는 거부하는 쪽이다. 깊은 관계일수록 특히 혈육관계일수록 거부에는 죄의식이 따르게 마련이다. _ 박경리, <토지 10> , p212/682


 이번 주 <토지>를 읽으며 비참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두 모녀를 떠올린다. 야무네와 팡띤느. 서로 다른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생각하는 두 인물을 보면서 부모의 마음을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모성(母性)을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구속이라고 설명하고, 다른 이는 능동적인 대처가로, 또 다른 누군가는 이를 유전자의 작용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자기 중심적'인 다른 행동과 다른 '자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설명하려는 여러 이론들이 저마다의 근거를 가지고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이러한 논리에 한편으로 수긍하면서도, 야무네와 팡띤느의 행동을 마음깊이 받아들이는 것은 '부모' 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같은 길을 선택했으리라는 공감대가 있어서가 아닐까.


 우리가 '유전자'가 아닌 '개체' 단위에서 사고를 하며, '개체' 단위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공동체'에서 만들어 낸 '문화' 안에서 살아가기에 '부모의 자기 희생'이라는 예외적으로 보이는 현상의 제1원인이 무엇인가 보다 우리 모두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이런 감정 안에서 야무네와 팡띤느의 사랑에 마음 아파하고, 임이네에 분노를 느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팡띤느의 그 이야기는 무엇인가? 사회가 여자 노예 하나를 매입하는 이야기이다. 누구로부터?  비참함으로부터. 배고픔과 추위와 고립과 저버림과 궁핍으로부터. 비통한 거래이다. 영혼 하나를 빵 한 조각과 바꾸다니. 비참함이 공급하고 사회가 인수한다._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1> , p622/1084


 결국 이상적인 어머니는 공감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적인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도 개인적인 야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상적인 어머니는 자녀의 틀을 형성할 때,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역사가 일깨워주듯이, 훌륭한 어머니라는 개념은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_ 섀리 엘 서러, <어머니의 신화>, p400


 부모는 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극진히 자식을 돌본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부모 쪽이 나이도 많고 매사에 더 능숙해서 자식을 도울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는 형제 관계에는 해당되지 않는 또 다른 비대칭성이 있다. 자식은 항상 부모보다 젊다. 이것은 항상은 아니더라도 대개의 경우 자식의 기대 수명이 길다는 것을 의미한다._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 p327/996 


PS. 리처드 도킨스의 표현에 따르면, 임이의 행동도 홍이를 위해서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고,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결과적으로 자신보다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월선에게 홍이를 밀어넣은 임이의 행동은 '뻐꾸기의 사랑'의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감동적으로 보일지라도 입양하는 행동은 대부분의 경우 어떤 정해진 규칙이 잘못 사용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암컷은 자기의 친족, 특히 장래의 자기 새끼들을 살리는 데 투자할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다.(p314)... 고의적으로 모성 본능을 악용하는 예는 다른 새의 둥지에 산란하는 뻐꾸기 같은 '탁란조 托卵鳥'에서 볼 수 있다. 뻐꾸기는 부모 새에게 내장된 "자기 둥지 속에 있는 새끼 모두에게 친절하라"라는 규칙을 악용한다. _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 p315/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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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소는 아주 간단한 원자다. 양성자가 하나뿐인 핵과 전자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수소는 빅뱅 이후 가장 먼저 만들어진 원소로 우주에 가장 많이 남아 있다. 비록 아주 많은 항성에서 연소되어 헬륨으로 융화되었지만 여전히 수소는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75%를 차지하고 있다.(p33)...  우주에서 수소를 제외하고 나면 남는 것은 거의 모두 헬륨이다.  다른 원소들은 가장 가볍고 간단한 원소인 수소와 헬륨보다도 훨씬 무거운데도 겨우 우주 질량의 약2%만을 차지할 뿐이다. _ 제임스 M.러셀, <원소 주기율표> , p39/352


 제임스 M. 러셀 (James M. Russell)의 <원소 주기율표 Elementary>를 읽으며, 시어도어 그레이 (Theodore Gray)의 <세상의 모든 원소 The Elements: A Visual Exploration of Every Known Atom in the Universe>와 비교하게 된다. 118개 원소들이 구체적으로 어느 분야, 제품으로 사용되는가를 컬러 도판으로 만든 <세상의 모든 원소 118>을 예전에 읽었던터라, 사진 설명 없이 원소에 대한 배경 설명으로 구성된 <원소 주기율표>는 직관적인 이해를 주는 부분에서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원소 주기율표>만이 갖는 장점 또한 분명해 보인다. <세상의 모든 원소 118>이 화려한 도판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경이로운 원자들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원자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여유를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면, <원소 주기율표>는 우리에게 한숨 돌릴 여유를 준다. TV 시대에도 라디오만이 주는 감성이 존재하듯이.



 <원소 주기율표>를 읽으며 우주 전체 물질의 75%와 25%를 차지하는 수소와 헬륨 대신, 채 1%도 안되는 116개 원소 중 하나에 불과한 탄소, 산소를 기반으로 하는 생명체. 생명체가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 이 중에서 극히 소수의 원소 인 칼슘 Calcium, 소듐 Sodium, 마그네슘 Magnesium 등을 섭취하고, 철 Iron, 니켈 Nickel, 구리 Copper, 아연 Zinc 등을 이용해 문명(文明)을 유지해 온 것이 우리의 과거였음을 허락된 여유 중에 떠올린다. 풍부한 자원을 대상으로 한정된 원소에서 생겨난 것이 생명이라면, 어쩌면 생명을 영위한다는 행위 자체가 수탈이고, 착취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 생겨난 탄소 문명.


 이러한 탄소 문명 대신 보다 우주에 풍부하게 존재하는 수소를 활용한 에너지원의 확보는 한계비용제로에 가까운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우리의 선택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 때마침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회의(COP26)와 맞물려 118개의 원소를 통해 우리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지구 온도 상승 폭을 1.5°C 미만으로 억제하려면 2010년부터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매년 3.3% 감축했어야 했다. 그런데 배출량은 오히려 증가했다. 따라서 이제 매년 7% 감축해야 한다. 7%는 봉쇄조치로 2020년 한 해 동안 감소한 배출량과 비슷한 규모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이 사실에서 교훈을 얻는 대신 성장과 소비 재개만 거론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에너지의 3/4은 연소 과정에서 주요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화석에너지(석탄, 석유, 가스)다. 에너지 생산자들은 대부분 교묘하게 손실을 피해간다. 에너지에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국가들은 더더욱 그렇다(프랑스의 에너지 과세는 3번째로 중요한 국가 수입원이다). 에너지 효율성 제고와 진정한 재생가능에너지 장려 노력이 여전히 제한적인 이유다. _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1.11> <글래스고 회의, 해빙을 막을 마지막 기회? >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탄소를 기반으로 한다. 탄소화합물로 이루어지지 않은 또 다른 생명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탄소의 원자가는 4이다. 이는 다른 원자 4개와 단번에 결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2천만 개나 되는 다양한 화합물을 만들 수 있으며, 다양한 길이의 사슬을 형성한다.(p57)... 탄소와 더불어 산소는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소다. 우리는 숨을 들이마시며 산소를 흡수하고 내쉬며 이산화탄소를 방출한다. 우리의 뇌, DNA, 세포, 수많은 체내 분자들은 산소가 필요하고, 산소는 대부분 물, 즉 H2O의 형태로 우리 체중의 약 60%를 차지한다. _ 제임스 M.러셀, <원소 주기율표> , p67/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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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11-16 21: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내가 편안만큼‘ 지구의 생명은 더 빠르게 멸종에 다가가고 있단 생각을 하게되는 요즘입니다. ㅜㅜ

겨울호랑이 2021-11-16 21:39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다... 사실 환경오염으로 지구 생태계 자체가 위기에 몰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30억 년의 지구 역사에서 수많은 멸종 중 하나가 추가될 것이고, 이후 다른 생명이 번성하겠지요... 다만, 인류가 거기에 함께 할 수 없을 것입니다...이 점을 생각해 본다면, 온난화를 방지하려는 것을 ‘자연보호/환경보호‘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어폐가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얄라알라 2021-11-17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염병 관련 책을 읽다보면 바이러스에 대해 다른 관점(˝more than a human˝)을 배우게 되었는데, 인류문명과 원소에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는 걸 겨울호랑이님 리뷰 통해 역으로 깨닫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2021-11-17 05:50   좋아요 0 | URL
우리 몸과 주변의 환경이 수많은 원소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의 교환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을 의식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듯 합니다. 다만, 이를 받아들인다면, 보다 주변을 관심있는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예상을 뒤엎고 최서희는 평사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나타나질 않았다. 사람들은 조준구 소유로 되어 있는 집이어서 그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을 지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두 아들을 앞세우고 사당 문을 열 것이며 대대적인 집수리가 시작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서희는 여전히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에설까. _ 박경리, <토지 9> , p508/700


 매주말마다 작성하는 <토지> 독서챌린지 미션. 그동안 여러 제시어의 삼행시가 미션 주제였지만, 오늘 미션 주제는 새롭다. 즉흥적으로는 '내가 (거복이)라면, (독립운동)했을텐데', '내가 (길상이)라면, (부인따라 갔을)텐데', '내가 (서희)라면, (조준구에게 오천 원 안 줬을)텐데' 등등이 떠오르지만, 독서 내용과 연결시키는 것이 쉽지 않아 접는다. 이번 미션 역시 삼행시 때처럼 글 말미에 슬그머니 올려놓는 것으로 해야겠다...


 SNS 미션  : '내가 (   )라면, (   )했을텐데' 를 포함한 감상평을 아래의 조건을 충족하여신청서에 적어주셨던 개인 SNS에 남겨주세요.


 이번 주 독서에서는 평사리의 고택을 조준구로부터 사들인 서희와 평사리로 돌아간 용이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오천 원을 푼돈처럼 조준구에게 던져주며 호쾌한 복수를 한 서희지만, 정작 자신은 오랫만에 다시 찾은 자신의 근거지에 모습을 보이질 않는다. 대신, 용이를 평사리 집으로 보내며 관리를 부탁하는 서희. 평사리의 최참판 댁에 대한 이들의 기억은 다른 것이었다. 마치 베르사유(Versailles)를 바라보는 프랑스인들의 기억처럼.


 베르사유는 오랫동안 고유한 특성을 유지해 왔으며 그것은 지금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러한 특성은 물론 궁정도시로서의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간접적인 이유이다. 사회적으로 위축된 소심한 보수주의자들을 베르사유로 끌어들인 것은 그보다는 차라리 왕실기구가 그곳을 떠남으로써 우아한 빈껍데기가 되어버린 거주지들이 텅 비어 싼 값으로도 입주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베르사유'라는 용어에는 완전히 다른 의미들도 함축되어 있다.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진행된 재판절차, 온실에서 임종을 맞이한 코뮌파 국민군들, 사토리에서의 총살 등. 이 사건들은 모두 베르사유의 프로방스 로와 루아 대로에서 이루어진 티에르와 쥘 파브르, 그리고 비스마르크 세 사람의 회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_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2 : 민족> , p215


 루이 14세( Louis XIV, 1638 ~ 1715)와 마담 퐁파두르(Madame de Pompadour, 1721 ~ 1764),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 1755 ~ 1793)의 궁(宮)으로 널리 알려진 베르사유 궁이 프랑스의 절대왕정의 상징이자, 1871년 독일 황제의 대관식이 행해진 치욕의 장소라는 이면의 의미를 가지듯, 서희와 용이에게 평사리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 공간이었다.


 십육 년 동안 나서 자란 그 집에 대한 기억은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행복하기는커녕 고독하고 비참한 기억뿐이었다.(p509)... 등뿌리도 기왓장도 모조리 들린 것처럼 불행의 연속이던 그 집을 떠난 후, 최서희는 권위 위에 웅크린 고독과 풍요 뒤에서 한숨 쉬던 허기와의 싸움에서 허기지고 고독한 승리를 안고 오로지 목표였던 가문의 존속과 영광을 위해 돌아왔지만 막상 돌아와 보니 서희에게는 사당 문을 열고 조상에게 고할 말이 없다. 성씨조차 알 길 없는 사내 김길상은 지금 이곳 민적에는 최길상으로 기재되었으며, 따라서 아들 둘은 최환국, 최윤국이다. 최서희는 김서희로. 이 기막힌 사연을 조상에게 무슨 말로 고하라는가. _ 박경리, <토지 9> , p510/700


 좋은 시절,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었던 그 마을은 용이에게는 근원적인 것이다. 서러운 사연들이 묻혀 있지만 더럽혀지지 않은 자신의 존엄을 심었던 곳, 사랑을 심었던 곳, 고뇌를 심었던 곳, 용이는 새삼스럽게 고향을 떠난 기간이 얼마나 이지러진 세월이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임이네로부터 떠난다는 것은 용이에게 별 의미가 없다. 주변에서는 임이네와 떼어놓기 위한 방편으로 서둘렀겠지만 용이는 평사리로 간다는 다만 그 사실 하나에만 뜻이 있었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9> , p510/700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진주에서의 서희는 승리자고 용이는 상실자다. 서희는 조준구에 대한 복수를 하고 금의 환향을 했지만, 용이는 사랑하는 월선을 잃어버리고 쓸쓸히 귀향할 수 밖에 없는 처지. 물론, 큰 기쁨 뒤에 작은 슬픔이 있는 것처럼, 서희도 남편과 잠시 이별(아직까지는)을, 용이도 홍이와 조금은 더 가까워지는 반대급부가 있지만, 흐름 상 분위기를 바꿀 정도까지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의 승리자와 상실자는 ' 과거 평사리'라는 공간에서 그 위치가 뒤틀린다. '평사리'라는 공간을 떠올렸을 때, 이들은 모두 '과거'를 함께 소환해낸다. 소환한 과거 속에서 서희는 다시 핍박받으며 겪었던 슬픔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반면, 용이는 사랑하는 월선과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며 인생의 황금기에 미소짓는다. 이처럼 '평사리'에 얽힌 시공간이 주는 의미는 둘에게 분명 상반된 것이었다.


 서희는 유아적(幼兒的)인 원망과 슬픔에 빠지곤 했었다. '왜 나만 혼자 남겨두셨소. 모두 다 어깨의 짐을 풀어놓고 나한테만 떠맡겨놓고 가시지 않았습니까? 형식이지만 최씨네 가문...... 이제 뼈대는 세우지 않았소? 그러나 내가 받은 수모, 상처, 설움, 아아 나는 지치고 피곤하고 더이상은 부대끼고 싶지가 않소. 그 부끄럽고 끔찍스럽고 저주스런 일을 지우고 싶소! 지워주시오! 지워주시오!' _ 박경리, <토지 9> , p511/700


 과거를 추억하는 것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는 순간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이와 고통스럽게 여기는 이. 이들의 모습이 <토지 9>의 마지막에 짧게 담긴다. 그 짧은 순간 이들의 아픔 또는 그리움들은 기든스(Anthony Giddens, 1938 ~ )이 말한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중간역' 또는 '정거장'처럼 교차한다. 이제 평사리에서의 서희의 시공간과 용이의 시공간은 새롭게 교차한다. 자신의 아픔을 소유한 서희는 용이에게 아름다움으로 내주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와 함께 <토지9>에서는 '심금녀'가 퇴장하고, 새롭게 '임명희'가 등장한다. 평탄치 않았던 삶을 살았던 금녀가 가슴아픈 죽음으로 삶을 마감했다면, 뒤를 이어 신여성으로 등장하는 임명희 역시 만만치 않은 삶을 살것이기에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반가움보다는 긴장감을 갖게 되며 <토지 9>를 마무리한다...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간다는 뜻이지. 꿈이랄까? 희망같은 거 말야. 힘겹지만 아름다운 일이란다. _ 안도현, <연어> 中


 공간과 시간은 개인적인 행위 가능성을 지배하는 주변조건을 만든다. 공간-시간-경로를 거쳐갈 때 어떤 개인이건 그들의 행동, 행위 그리고 그들의 결정의 기능들을 제한하는 이 '견제(constraints)'와 강제, 그리고 제약에 예속된다. 시간과 공간을 통한 개인의 움직임을 추적하면 다양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길들이 서로 교차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개인들은 이른바 "중간역"(Giddens 1992 : 164)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중간역은 만남이 일어나고 사회적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시간-장소를 의미한다. 기든스가 "정거장"(Giddens 1992 : 171)이라고 부르는 이 장소는 일상 내지 인생을 통과하는 개인들의 운동을 잠시 동안 정지하게 하는 운동정지체의 역할을 한다. _ 마르쿠스 슈뢰르, <공간, 장소, 경계>, p126


 이제, SNS 미션을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평사리 최참판댁에 용이가 들어간 것이 서희와 용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은 수긍되지만, 어쩐지 서희가 조금 손해본 듯한 느낌은 지우기 힘들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내가 (서희)라면, (용이에게 전세를) 놓았을텐데... 아니면, 월세라도...' mission cl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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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14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막 진지하게 읽다가 , 전세나 월세라니 빵 터졌습니다 호랑이님 *^^*

겨울호랑이 2021-11-14 17:44   좋아요 1 | URL
미니님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가는 현찰 속에 단단해지는 우정을 떠올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