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구본준 기자 이정용 기자  



이시대 최고의 미술 이야기꾼이 이주헌(46)씨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어보인다. 대중들에게 쉽고 편안하게 미술을 만나게 안내해주는 필자로 이씨만큼 유명한 이는 아직 없다. 일찌감치 이 분야에 뛰어들어 가장 먼저 이름을 얻은 ‘개척자’다.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신문사에서 미술담당 기자를 지낸 이력을 보면, 그가 미술 저술가가 된 것은 어찌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변신같아 보인다. 그런데 이씨가 기자를 그만 두고 최고의 미술저술가가 되는 과정이 과연 그렇게 순조로왔던 것일까?

<한겨레>에서 미술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이씨는 93년 5년 넘게 몸담았던 신문사에 사표를 낸다. 미술 글쟁이로만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열달 남짓 미술잡지 편집장을 지낸 뒤 이씨는 아예 전업 저술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94년 봄, 이씨는 무작정 화랑 겸 출판사인 학고재의 우찬규 사장을 찾아갔다. 이씨는 우 사장에게 유럽 주요 미술관을 가족과 함께 답사해 기행문처럼 들려주는 대중적 미술책을 펴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취재비용으로 1000만원을 먼저 달라고 요청했다. 선인세로 받아 책이 나온 뒤 팔리는만큼 갚는 것인데, 한가지 조건을 더 달았다. “책이 안팔려 절판되도 갚을 돈이 없다”고 미리 못박은 것이다. 지금 보면 거의 ‘배째라’ 수준이지만, 당시 이씨의 형편으로선 솔직하게 밝힐 수밖에 없었다.

이씨가 특별한 교분이 없었던 우 사장을 찾아간 것은 학고재의 성격이 책의 성격에 맞아보였고, 그런 지원을 해줄 인식을 지닌 출판사가 학고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 사장은 놀랍게도 그자리에서 흔쾌히 이씨의 조건대로 책을 펴내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1100만원을 지원받은 이씨는 저금한 돈 400여만원에서 100만원만 남기고 모두 인출해 여행비에 보탰다. 그해 8월 말, 이씨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유럽으로 출발했다. 이씨 나이 서른세살, 아이들은 겨우 세돌과 한돌이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도착지에서 바로 답사기를 <한겨레>에 송고하기 시작했다. 53일간의 미술관 답사기는 <한겨레> 연재를 거쳐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기행>이란 제목으로 학고재에서 출간됐다.

출판사에 “천만원 먼저 달라”

“제 인생의 승부를 건 것이죠. 이게 되면 이걸 통해 살아갈 길이 나올 것이고, 안되면 미술 글쓰기를 접기로 하고 이 책에 제 전부를 던진 겁니다.” <50일간의~>는 미술과 여행 두가지 재미를 함께 지녔다는 평을 들으며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최초의 대중적인 미술 저술가’ 이주헌은 이처럼 더이상 물러날 곳 없는 배수의 진을 친 도전으로 탄생했던 것이다. 신문기자를 그만 두고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직업인 ‘미술 저술가’에 승부를 건 것 역시 당시로선 아무도 하지 않았던 모험이었다. 이후 이씨는 <미술로 보는 20세기>, <신화 그림으로 읽기> 등 내는 책마다 호평을 받았고 당대 최고의 미술 저술가로 자리를 굳혔다.

이씨의 강점으로는 잘난척하는 법 없이 차분하고 편하게 미술을 설명하는 글솜씨가 맨 먼저 꼽힌다. 이씨 이전에도 미술 글쟁이들은 있었다. 그러나 대중들로 하여금 오히려 미술과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관심사를 논할 뿐이었다. 저술가로서 가져야 할 문장 구사력, 그리고 작품의 배경과 여러 의미를 읽어내는 인문적 소양을 갖춘 필자도 드물었다. 이런 모든 단점을 한꺼번에 극복하고 등장한 저술가가 이씨였다. 신문기자를 하면서 늘 미술을 쉽게 설명하는 훈련을 쌓았던 것이 이씨의 자산이었다. 미술과 대중과의 거리를 좁힌 최초의 저술가가 이씨이고, 대중들에게 감상의 동반자로 나선 저술가도 이씨가 처음이었다.

이씨의 글은 철저하게 저널리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씨가 생각하는 저널리즘은 결국 ‘소통’의 문제다. 정보나 지식 등 필요한 것을 전하는 과정에서 일상인의 언어로 길을 터주는 것이다. 이씨 스스로도 항상 ‘나 자신이 미디어다’라는 생각을 갖고 글을 쓴다. 그래서 이씨의 글은 가장 편하게 읽으면서 정보와 감상을 얻을 수 있다는 평을 듣는다. 이씨 이후 이씨보다 더 학문적 배경을 갖췄거나 이씨처럼 쉽게 글쓰는 이들이 등장했지만 누구도 이씨처럼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 이유가 바로 ‘저널리즘적 글쓰기’ 감각 때문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씨가 10년 넘게 최고의 미술 저술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데에는 글솜씨 이상으로 탁월한 책 기획력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씨는 자신이 책의 모든 부분을 기획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철저한 프로의식이 깔려 있다.

이씨의 출세작인 <50일간의~>을 보면 이씨가 얼마나 철두철미한 ‘프로’인지를 알 수 있다. 이씨는 처음부터 아이들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미술책이므로 가족여행 이야기가 들어 있어야 독자들이 편하게 책을 접할 수 있고, 또한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글을 쓸 에피소드들이 나올 것으로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부부는 힘들어도 책에 재미를 넣어 보다 폭넓은 대상들을 독자로 끌어들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런 기획은 기막히게 맞아떨어졌다. 당시만해도 이런 식의 미술책은 거의 없었다. 가족들에게 미술이 뭔지 쉽게 설명해주는 이씨의 고군분투 여행기를 읽다보면 유럽 풍광을 엿보는 동시에 옆에서 설명듣듯 미술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 책만의 새로운 재미였다. “당시 여행자유화가 되면서 유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였어요. 그런데 유럽에 가면 미술관을 가봐야 하고, 미술관에 가면 뭔가를 좀 알아야 그림을 볼 수 있으니, 이제는 이런 책이 나올 때가 됐다고 본거죠. 개인적으로는 ‘될 수밖에 없는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콘셉트·문체·구성, 책마다 달라

이런 기획력으로 이씨는 지금까지 낸 10여종의 책을 단 한권도 절판되지 않은 스테디셀러로 만들어냈다. 이씨의 책들은 모두 제각기 컨셉과 문체, 구성이 다르다. 이씨처럼 계속 책에 변화를 주는 필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씨는 언제나 책의 소재와 주제를 그 시점의 미술책 트렌드에서 벗어나지 않되 새로운 것으로 골라 철저하게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다. 자신의 취향보다는 독자들이 관심가질 만한 것들을 고르는 것이 원칙이다. 한동안 그가 집중적으로 소개한 라파엘 전파가 대표적인 사례다. 때로는 철저하게 타깃 독자들에게만 맞추기도 한다. ‘가정주부’들만을 대상으로 한 미술책 <그림속 여인처럼 살고 싶을 때>가 대표적이다.

이씨의 프로기질에는 미술 관련 글이 아니면 절대 쓰지 않는 자기 분야에 대한 순결주의와 자기관리도 빼놓을 수 없다. 파주 헤이리 자택에 틀어박혀 오로지 미술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만을 쓸 뿐이다. 요즘에는 러시아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을 집풀중이다. 트레챠코프 미술관과 에르미타주 등 러시아가 자랑하는 미술관들과 그 소장품을 소개하는 책이 조만간 이씨의 책목록에 이름을 올릴 예정이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한겨레)

오철우 기자 

권선희(35)씨는 책 만드는 일엔 빠끔한 출판사 편집기획자다. 아침 9시쯤 서울 동교동 서너평짜리 오피스텔에 출근하는 그는 늘 팩스부터 살피며 일을 시작한다. 인터넷서점과 대형서점에서 온 책 주문을 모아 오전 중에 창고·배본회사에 연락해 책을 서점에 발송하게 한다. “책 주문량을 확인할 때 가장 즐겁고 비로소 내가 출판사 경영자임을 느낀다”고 한다. 다른 동료·직원이 없는 그는 ‘사이’ 출판사의 1인 출판인이다. 그가 곧 출판사다. 출판계의 뚜렷한 현상이 된 ‘1인 출판’ 확산의 명암을 권씨의 사례를 통해 짚어봤다.

30대 중반, 홀로서다

권선희씨는 지난해까지 10년 동안 출판사에서 일한 편집자였다. 한때 수백만권이 팔린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편집기획자였던 그가 느닷없이 독립선언을 하고서 외롭고 위태로운 창업의 길에 들어선 건 지난해 가을. “10년차 경력에다 30대 중반 나이에 이르니, 박수칠 때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더 깊어졌어요. 꼭 성공할 기약은 없더라도, 평생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을 내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출판 경영·영업엔 경험이 없는 편집자인 그가 출판사를 차릴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출판사 창업을 하는 이는 주로 영업부장들이었습니다.(예,넥서스 前사장-고려원 영업부장출신) 전국 서점의 복잡한 유통망과 인맥을 쌓은 영업자가 뛰어난 출판인이었죠. 전국 유통망에 책을 깔고 수금하는 데 능력을 발휘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서점과 대형서점 중심체제가 된 지금은 ‘책만 제대로 만들면 팔린다’는 새로운 기회가 열리게 된 셈이죠.” 한국출판아카데미에서 강의하는 휴머니스트 출판사 김학원 대표의 말이다.

권씨는 어떻게 창업했나.

권씨는 지난해 11월 출판사를 차렸다. 씨앗 자본은 2000만원. 그렇지만 그가 하는 일은 여전히 편집기획이 대부분이다. 외국서적을 번역할 때 필요한 저작권 대행, 표지 디자인, 조판과 편집·교열까지, 그리고 책을 출간한 뒤엔 유통회사 한 곳에 전국 서점 유통을 통째로 맡겼다. 책은 물류창고 회사에 맡기고 권씨가 직접 관리하는 인터넷서점과 대형서점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책을 내보내게 한다.

”최근엔 자잘한 영수증 처리 같은 회계 업무도 회계사에 맡기는 1인 출판도 많아요. 전체 흐름을 기획·관리하고, 인터넷이나 도서관에서 책 정보들을 얻거나 예비 저자들을 만나 새 책을 구상하는 게 나의 주된 업무죠.“

1인 출판을 지원하는 여러 작은 회사들이 생겨났다. “꽤 규모 있는 출판사들은 홍익대 부근에 많이 몰려 있습니다. 그 주변인 동교동엔 디자인·조판·편집을 대행하는 프리랜서 사무실들이 꽤 늘고 있어요. 이곳을 중심으로 1인 출판 사무실들이 여럿 들어서 공생하고 있죠.”

도전…두려움…

권선희씨는 자유롭다. 젊기에 야무진 열정도 넘쳐난다. 다른 회삿일에 얽매일 일도 없으니 맘 편한 것 같다. 그렇지만 그는 “정체 모를 막연한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장 두려운 순간은 어떤 책을 출판하기로 결정할 때, 제목과 표지디자인을 최종 결정할 때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불안감은 막연합니다. 내가 홀로 내린 결정이 맞는지 가장 두렵죠(->해결책은?

사람이 재산이다. 표본 30명=충성도 및 애정있는 독자집단->편집자와 독자가 직통하는 핫라인 개설). 아는 사람들이 사무실을 찾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여러 의견을 묻고 듣고 있지만, 창업 1년이 다 됐는데도 아직 불면증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진 못한 것 같아요.” 얼굴만은 밝다.

그는 아침 9, 10시쯤 출근해 보통 밤 10, 11시쯤 퇴근한다. 토요일은 물론이고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일이 잦다. 아니. 거의 항상 출근하고 있다.

권씨가 지난 7월 낸 첫번째 작품 <갈리아 전쟁기>는 그에게 작은 희망이었다. 많이 팔리진 않았지만 “로마 고전에 정통한 고정 독자층이 국내에 이처럼 꽤 있는 줄은 몰랐어요. 많진 않았지만 번역이나 편집에 대해서도 의견을 보내주고 분명한 반응이 일어났어요. 편집기획을 평가하는 고급 독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건 희망입니다.” ‘책의 품질만 높다면 독자는 있다’는 믿음, 거꾸로 ‘이젠 책의 품질이 높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는 믿음이 창업의 경험을 통해 더욱 굳어졌다고 한다. 그는 1인 출판인을 일러 “대형출판사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틈새의 고급 독자를 위해 활동하는 게릴라 편집자”라고 말한다.

성공보다 더 많은 좌절

1인 출판은 앞으로도 더욱 늘 것이라고 대부분 출판인들은 내다봤다. 권씨도 그렇다. “기존 출판사에서 나이 들도록 편집 전문가로 성장할 길은 우리나라에선 현재 없어요. 난처한 처지가 되기 전에 빨리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은 대부분 편집자들이 지닌 생각일 겁니다. 출판사의 낮은 임금도 한몫하고요.” 그는 “10년차 정도 경력을 지닌 주변의 여러 친구들도 1인 출판을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그렇지만 1인 출판이 다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권씨도 그게 불안하다. 서적유통 회사는 그 성공과 실패가 확연히 드러나는 현장이다. 서적유통사 송인서적의 윤성기(46) 관리이사는 “책 한 권 내고는 더 내질 못해 좌절하는 1인 출판들도 꽤 많아졌다”며 “1인 출판이 계속 책을 내는 확률은 30%도 되지 않는데 요즘 성공 사례들만 너무 부각되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1인 출판인들이 새 책을 들고 유통회사를 찾는 일은 성수기인 여름을 앞둔 봄철에 크게 늘었다가, 가을엔 크게 주춤해진 상태라고 그는 전했다.

권씨는 요즘 “1인 출판의 한계도 분명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출판사가 생명을 유지하려면 새 책을 꾸준히 펴내야 하지만 쉽잖은 일이다. 또 꽤 큰 비용이 들어가는 출판 기획은 지금으로선 꿈도 꾸지 못한다. 틈새 시장만을 겨냥해야 한다. 그는 “소수의 고급 독자를 위해 책을 내는 일은 즐겁지만 언제까지 1인 출판에 머물러야 할지 아직 확신이 없다”고 말했다. 올해 초에 창업한 1인 출판 에코의서재 대표 조영희씨도 “책을 꾸준히 내어 생존하기 위해선 1인 출판 규모로는 한계가 뚜렷하다”라며 “여력이 갖춰지는 대로 동업자 또는 직원을 늘릴 생각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60대 편집자가 없는 출판계”

1인 출판을 깊게 바라보면 출판계의 시각은 다소 엇갈린다. ‘고용된 편집자’에서 ‘자기 브랜드를 키우는 편집자’의 시대로 넘어가며, 이제 자본이 아니라 편집기획으로도 성공을 예감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는 전망은 무수한 편집자들한테 기회와 가능성을 던져주고 있다.

하지만 1인 출판이 활성화하는 배경에 대해서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1인 출판이 늘어나는 데엔 전문 편집기획자을 길러내지 못하는 국내 출판사들의 영세적 출판 구조가 한몫하고 있다는 것이다.

편집기획자들은 무엇보다 ‘단명하는 편집자 문화’를 꼽는다. 20대에 출판사에 첫 발을 내디딘 편집자는 10년, 20년의 경력을 쌓으며 30·40대로 성장하면, 이내 퇴출의 압력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편집기획자를 자주 물갈이 해야 신선한 기획력이 산다’는 일부 출판 경영철학도 이런 분위기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만일 가족 중심 경영 때문에 불거지는 갈등까지 겪게 되면 창업은 불가피한 선택이 되고 만다. 한 편집기획자는 “편집기획자들이 1인 창업에 나서는 근본 배경을 짚어보면, 그 본질엔 가족경영을 벗지 못하는 출판사가 전문 편집자 양성에 제대로 투자를 하지 않는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나이’는 1인 출판인들이 말하는 주요한 창업 동기다. “솔직히 말해 40대가 되면 편집기획자의 생산성도 떨어지고 회사 처지에선 고액봉급자 직원에 대해 부담을 느끼게 되겠죠. 40대에 관리자가 될 수 없다면 결국 출판사를 떠나야 합니다. 달리 갈 데가 없어요. 30대 중반만 돼도 그런 압박은 현실이 됩니다.” 다른 편집기획자의 말이다. 이 때문에 50·60대 나이에도 편집 현장에서 전문가로 일하는 편집자는 국내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대형출판사 ‘편집자 모시기’

바닥에서 편집자들의 1인 출판 바람이 불고 있다면, 꼭대기에선 대형출판사들의 편집자 모시기 바람이 불고 있다. 유능한 전문 편집자를 영입해 자금을 지원하고 마음대로 책을 내게 하면서, 동시에 대형출판사들의 브랜드를 확장하고 매출과 수익도 늘리자는 포석이 이런 움직임에 깔려 있다. 이른바 ‘임프린트’(imprint)로 불리는 일종의 소사장 제도는 출판계의 새로운 화젯거리다.

본래 영·미 출판계에서 정착해 출판사 인수합병(M&A)의 토대가 된 이 제도는 최근 2~3년 새 국내 대형출판사인 랜덤하우스중앙과 웅진씽크빅이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편집자들이 자금 지원을 좇아 이동하고 기존 출판사들의 경영 구조에도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다.

국내 처음으로 임프린트를 도입한 랜덤하우스중앙은 두앤비컨텐츠, 북박스, 드림하우스, 울프, 키즈랜덤 등 아홉가지 브랜드를 전문화해 운영하고 있다. 웅진씽크빅은 웅진지식하우스와 웅진주니어에 더해 외부 편집자를 영입한 리더스북, 노블마인 등 두가지 브랜드를 더 내고 있다. 모두 3년 계약이며, 출판 기획·편집은 임프린트 대표의 독자적 결정에 맡긴다고 한다.

웅진씽크빅 임태주(39) 출판신사업팀장은 “책의 미래는 이제 유능한 편집기획자의 손에 달려 있다”며 “1인 출판을 꿈꾸는 편집기획자는 자금을 지원받아 좋은 책을 많이 낼 수 있고 대형출판사는 유능한 여러 편집인재들을 모아 브랜드를 다양화할 수 있다”며 임프린트 제도의 가능성을 강조했다. 랜덤하우스중앙의 최봉수(44) 사업운영실장은 “임프린트가 정착한다면 출판계에 편집기획 인재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구조도 마련되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임프린트를 도입한 출판사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이를 경계하는 출판계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다. 대형출판사들이 브랜드를 확장하며 출판시장 잠식을 가속화할 것이며, 매출·수익 성과로 평가하는 편집의 경쟁체제를 극대화해 결국 출판문화를 해칠 수 있다는 우려는 해소되지 않고 있다.

창업 직후에 여러 차례 임프린트 참여 권유를 받았다는 권선희씨는 “아직은 내가 만들고 싶은 나의 책을 출판하고 싶어 거절했다”고 말했다.

한 시대의 작가와 독자는 편집기획자를 통해 창조된다. 그래서 편집자는 종종 “지식 사냥꾼” “지식의 조직가”로 불린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나타난 1인 출판과 임프린트의 바람은, 이런 편집기획자들이 차지하는 몫이 점차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또 편집기획 자체가 ‘브랜드 가치’로 평가받기 시작하는 사례들이다.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는 “국내 독서인구가 이젠 해방 이후 2, 3세대를 맞으며 수준 높은 책을 찾는 고급독자들도 생겨나고 있다”며 “책 한 종이 수백만권씩 팔리는 ‘대중출판’ 시대가 물러나고 ‘전문출판’ 시대가 오는 이 때에 1인 출판이든 임프린트이든 단기적 성장·성과에 매달리기보다 독자·작가와 함께 오래도록 성장하는 편집기획 체제를 갖추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늘바람 2006-08-09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보다 더 많은 좌절이 뼈에 와닿네요

sb 2006-08-09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인출판에 소사장제까지. 출판산업도 소위 '3D'가 되어가는군요.
 

(출처: 이홍|리더스북 주간 wizard-hong@hanmail.net)

뻔할 것 같은 질문 하나, 출판기획이란 무엇인가

최근에 발행된 모 주간지에 ‘베스트셀러를 만든 7가지 노하우’란 제목을 붙인 기사가 있었다. 베스트셀러를 만든 노하우가 마법의 주술처럼 몇 가지 정도로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다는 놀라움에 흥분지수가 극에 달하려는 즈음, 혀를 날름거리며 기어가는 한 문장 때문에 눈앞이 아찔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개에 필요하기에 그대로 인용한다.

“대박을 터뜨린 출판기획자들은 ‘베스트셀러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구나! 베스트셀러란 하늘에 기원해서 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구나. 그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고 세상은 그들을 ‘스타급 출판기획자’ 또는 ‘대박 기획자’라고 부르는구나. 대박은 고사하고 어떻게든 병살타라도 면해서 한순간에 ‘스리 아웃’으로 ‘게임 오버’ 되는 참사만은 면해야겠다고 발버둥치는 대다수의 이웃들에 비하면 그들은 참으로 부러운 존재들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만들어낼 수 있다고 장담하는 대박은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잡다하고 구구한 잡설 필요 없이 한 큐에 끝내버리는 방법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정이 그렇다면 제발이지 부탁이니 그 비법을 가르쳐만 주소서. 이 은혜 백골이 진토가 되어 넋이 사라진 다음에라도 잊지 않으리다.

하지만 “대박을 터뜨린 출판기획자들은 ‘베스트셀러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에 이어진 기사의 내용은 무슨 출판강좌나 문화센터 같은 데서 들었던 이야기들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면서 예의 낯간지러운 몇몇 출판사의 성공담을 등장시키고 있었다. 출판동네에 사는 선수들은 다 안다. 책이 성공하면 “독자의 요구에 구체적으로 답을 해주었느니” “방법론을 제시했느니”하면서 그럴듯한 ‘론’을 만들어내지만 좀더 정확한 뒷담화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위에서 언급한 내용이 한 기자의 수고로운 취재를 가볍게 폄하하거나 출판사의 명예를 훼손하는 게 아니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그럴 의도는 없다. 다만, ‘베스트셀러’란 단어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출판기획의 본질과 그 과정에 대한 역겨울 정도의 왜곡 현상을 바라보면서 책을 기획하고 만드는 일이 무슨 ‘정치’처럼 여겨지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만큼은 지울 수 없다.

서론이 길어졌다. 이 시점에서는 ‘출판기획이 무엇이냐’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견을 말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인 인터넷이 무엇인가로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 난 출판기획이 ‘무형의 계획을 유형의 숫자로 전환시키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상품인 책에 무슨 숫자냐고 말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너무 결과만을 추종하는 게 아니냐고 질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교과서적인 도식 나열이나 관념적인 미사여구 남발은 출판기획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독자를 자기 손에서 갖고 놀 수 있다는 자만심이나 언론과 친분으로 여론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기만성 따위도 마찬가지다.

출판의 과정이 과학이어야 한다면 근거 분명한 ‘숫자’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베스트셀러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그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사기다. 하지만 크거나 작거나 숫자가 분명한 책을 만들 수는 있다. 그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건 ‘진실’이다.

뻔할 것 같은 질문 둘, 인터넷과 출판기획은 어떻게 만날 수 있나

콘텐츠 관리가 기획의 핵심이던 시대를 편의상 제1세대라고 한다면 제2세대에서는 인적 관리가 그 중심을 차지한다. 시기적으로 보면 대략 2000년 전후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종합적인 네트워크 관리의 시대이고 토털 마케팅의 시대다. 여기에는 앞에서 언급한 콘텐츠 관리와 인적 관리가 모두 포함된다.

네트워크의 핵심은 종과 횡이라는 기본을 넘어 입체적인 ‘파워’로 완성되어야 한다. 종적, 즉 수직성이 강한 네트워크는 집중성은 있으나 탄력성이 떨어진다. 다양성 추구에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횡적 네트워크는 그 반대다. 그렇다고 둘 중 하나라도 만만한 것은 없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처럼 네트워크라는 게 중요하다보니 “기획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발로 하는 것”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출판계 ‘스타’로 군림하고 있는 정은숙 사장은 소문난 마당발이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구효서, 인생은 지나간다』에 관한 에피소드를 소개한 바 있다. 주제는 틈새를 노려라, 뭐 이런 것이었겠지만 결론은 역시 네트워크다. 아무리 틈새를 노려 제안을 했어도 네트워크, 즉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면 제안인들 가능했으랴. 이런 일부 마당발 출판사 사장은 출판계 후배들에게는 연구대상이다. 

스타들이 수십 년 내공으로 만든 네트워크를 후배들이 단숨에 따라가는 것은 겸손하게 표현하지 않아도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후배들의 능력이 무조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배경에는 ‘아날로그’ 방식만의 독특한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방식의 네트워크에는 계량화될 수 있는 ‘숫자’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 이 그 무엇이 바로 노하우, 즉 실력이다. 이게 어디 배워서 훔쳐지는 것인가?

출판기획에서 인터넷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차원적인 네트워크 형성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실로 오랜 꿈이었다. 혼자서 은밀하게 깨알같이 메모해두지 않아도 검색만 하면 수천 배의 정보가 출력된다. 내가 알고 싶은 사람에 대해서는 사진까지 뽑아서 이력서를 제공해주니 첩보영화가 따로 없다. 아날로그 방식이 제공해주었던 인간적인 정서와 노하우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정보에 대한 접근성에 있어서는 질과 양 모두 풍부해진 것이 사실이다.

앞서 출판기획이란 ‘무형의 계획을 유형의 숫자로 전환시키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출판기획이 인터넷과 만나야 하는 중요한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하나의 문화상품으로서 존재하는 책에 대한 기획자의 책임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구체적이란 문화가치성과 상품가치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콘텐츠의 소재나 인적 동향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 독자의 욕구를 통해 시장에서 판매 예측, 그리고 이를 촉진하기 위한 체계적인 홍보전략 등을 총괄하는 것이다.

판매 사이즈를 수립할 수 없는 기획은 무의미하다. 특히 실용적 컨셉트의 책에서는 선택을 넘어 필수의 조건이다. 10만 부를 팔아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책이 그만한 함량을 가졌다면, 엉성하고 관념적인 ‘베스트셀러 이론’을 들먹이거나 기자들과 술판을 벌이는 것으로 일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5천 부에서 10만 부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로드맵이 필수적이며 그 모든 프로세스를 가능하게 만드는 다차원적인 네트워크를 점검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인터넷이 가진 놀라운 인터페이스가 탐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출판기획에서 인터넷을 활용한다고 하면 지식검색을 통한 아이디어 제공이나 필자 소재 파악 등을 먼저 생각한다. 이는 고성능 계산기로 덧셈이나 뺄셈만 반복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진정한 인터넷의 활용은 이런 1차원적인 수준을 넘어선다. 무형의 계획이 숫자로 전환되는 과정은 간단하게 표현할 수 없는 변수의 연속이다. 이런 변수들을 넘어 안정적인 상수를 만들어내는 데 인터넷이란 도구가 유용하게 사용된다. 살과 땀이 교차하는 직접성은 부족하지만 다양한 가상적 실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디지털 네트워크가 가지는 중요한 자원이다.

본론1_ 출판기획에서 블로그는 어떤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인터넷의 활용, 그 가운데서도 블로그는 단연 최고의 기대주로 등장하고 있다. 블로그란 ‘web+log’의 합성어이다. 인터넷 항해일지라고 불리지만 쉽게 말해서 웹상에 올리는 개인일기라고 보면 된다. 1997년 미국의 데이브 와이너가 만든 ‘스크립팅 뉴스’가 최초의 블로그였다는 다수의 지지가 있지만 블로그의 기원에 대해서는 장충동 족발집만큼이나 ‘원조’가 많아 그 소개가 무의미하다. 한국에서 처음 시작된 것은 대략 2002년 상업 블로그 사이트www.blog.co.kr가 열리면서부터라고 하는데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이라크 건축가인 사람 팍스가 만든 블로그가 소개되면서부터다.

블로그의 등장은 각 포털의 위상을 뒤흔든 원인이 되었다. 국내에서 부동의 1위를 자랑하던 다음을 밀어낸 것은 네이버이고 네이버 최고의 주력종목은 현재 단연 블로그다. ‘구글의 폭격’이라는 말이 있는데 라이코스, 야후 등의 선발 주자들을 단숨에 KO 시킨 구글의 주 종목 역시 블로그다. 구글은 지금도 야후 등에 비해 블로그에 엄청난 지원을 쏟아 붓고 있다. 구글의 툴바는 공개적인 방식으로 개인이 좋아하거나 자주 들르는 사이트와 콘텐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도록 되어있고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간단하게 분석되어 타깃마케팅의 효율성을 높이는 수단이 되고 있다. 2005년 현재, 각 포털에 널려 있는 블로그를 방문한 네티즌의 숫자는 이미 130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고 한다.

블로그는 ‘개인의 기록’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1인 미디어’라는 강점을 갖고 있다. 거대 미디어에 의해 지배받는 개인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인터넷을 통해 이를 다수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블로그가 시시콜콜한 개인사를 담고 있는 쓰레기라는 혹평에도 불구하고 거칠 것 없이 확산되는 원인은 지배당하는 문화에서 지배하는 문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학습에 연결시킨다면??????)

이처럼 개인적 차원에서 시작된 블로그는 이제 비즈니스 차원에서 그 활용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 특히 블로그를 이용한 마케팅 전략은 더 이상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2004년 <뉴욕타임스>는 “기업 간부들이 블로그 사이트를 기업 홍보와 마케팅 등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고객과 직원들에 대한 비공식 대화 채널로도 이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기업들에서 블로그 활용은 이미 개인의 차원을 벗어난 것이다.

인터넷 강국답게 한국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이 있다. 외국계 보험 회사인 푸르덴셜이 한국형 블로그인 미니홈피를 자사 홈페이지에 도입한데 이어 삼성생명도 관련 사이트 오픈을 준비하고 있다. 인터넷 영업에 관심을 보여 온 보험사들이 역시 선도적으로 블로그 도입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온라인 교육, 온라인게임, 온라인서점 분야의 기업들도 블로그 사이트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블로그를 개설할 경우 고객들의 홈페이지 접속 빈도와 체류 시간이 늘어나 손쉽게 마케팅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출판기획에서 블로그는 어떤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현재 수준에서도 블로그는 출판기획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하고 있다. 첫째, 다양한 영역에서 전문성을 가진 개인이 만든 블로그는 전문 사이트의 정보량을 충분히 능가한다. 방대한 콘텐츠를 무한정으로 제공해주는 주유소의 기능이 가능하다. 둘째, 전문성과 콘텐츠를 가진 개인이나 집단이라는 인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필자 발굴에 있어 이전과 다른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 셋째, 요즘의 블로그는 고립된 개인에서 벗어나 관련 블로그끼리 네트워크화 하는 경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단순한 댓글 기능에서 벗어나 관심사를 공유하고 오프 공간으로 이를 확대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넷째, 역시 개인 블로그와 다수가 모인 카페가 네트워크화 되고 카페는 역시 유사한 카페와 동맹 관계를 맺음으로써 현란한 종과 횡의 입체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다섯째, 이런 네트워크 작업을 통해 불확실한 변수를 예측 가능한 상수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마케팅을 가능하게 한다.

본론2_ 블로그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첫째, 가장 중요한 핵심이며 결론에 해당하는데, 다른 사람의 블로그를 염탐하기 전에 ‘나 자신의 블로그’를 만들어야 한다. 즉 스스로 ‘블로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당신이 아직 미니홈피나 개인 블로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출판기획자라면 ‘상당히 치명적인 상황’에 처해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물론 블로그를 이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첨단 네트워크에서 소외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인터넷을 훌륭하게 이용하고 있다면 평균의 수준은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난 블로거가 되지 않겠어”라고 고집하는 게 블로거가 되는 것에 비해 어떤 이로운 점이 있는지 사례를 나열하며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런 무관심이나 고집이 출판기획의 질과 양을 풍성하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 블로그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거의 모든 해답은 스스로 블로거가 되었을 때 발견할 수 있다.

둘째, 많은 블로그는 글자 그대로 시시콜콜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 블로그를 시시콜콜하게 만들지 말자고 계몽한다면 그 사람은 당장 미친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을 것이다. 하지만 출판기획자의 블로그가 이처럼 시시콜콜해서는 곤란하다. 지인 관계에 있는 몇몇 편집자의 블로그를 방문하면서 놀랐던 것은 ‘프로 정신’의 과감한 실종이었다. 출판기획자에게 주어진 천형 같은 운명 중 하나는 심지어 자는 중에도 산신령을 만나서 좋은 아이디어를 얻어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출판기획자가 만들었다는 블로그가 개인적 배설에 치중하고 있다면 이미 게임 오버다.

출판기획자 스스로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진 블로거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블로그 세계가 펼치는 본질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다. 눈팅만으로는 곤란하다. 우연히 관심 있는 블로그를 발견하고 방명록에다 만남을 구걸하거나 책을 내자고 조르는 글을 갈기는 수준으로는 입체적인 기획을 기대하기 어렵다.  

셋째, 블로그가 가진 마케팅 기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블로그의 진정한 가치는 콘텐츠의 발견이나 저자 섭외의 용이성보다 마케팅의 확대에 있다.

출간 두 달 만에 12쇄를 출고한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은 저자의 블로그에 연재 중이던 글이었다. 증권가와 케이블 방송 등에 ‘시골의사’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저자의 블로그에는 하루 평균 2000명이 넘는 네티즌이 방문하고 있으며 2005년 6월 현재 누적 방문자가 48만 명을 기록하고 있다. 시골의사와 이웃 블로그를 맺은 숫자만도 2000명이 넘는다. 저자의 책이 출간된다는 소식이 블로그에 올라가자 엄청난 댓글이 붙기 시작했다. 초반의 선전을 충분히 예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더군다나 이 책의 출간과 관련된 각종 기사를 자신의 블로그에 옮겨간 블로거가 수백 명에 달했다. 그 블로그에 방문해 기사를 확인한 네티즌까지 합친다면 블로그를 통해 노출된 인원은 간단하게 수십만에 달한다는 계산이 나오며 그 숫자는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다소의 지명도를 확보하고 있었다지만 출간한 책은 코어 타깃이 다른 에세이집이었다. 예산 문제로 일간지에 광고 한 번 싣지 못했고, 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주요 신문사 서평에서도 철저하게 외면 받았다. 역시 인기 저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인터넷 서점에서의 노출도 ‘특별하지’ 못했다. 쟁쟁한 필자들이 널려 있는 문학 분야에서 유명한 문인도 아닌 의사가 쓴 첫 에세이집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면서 선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라는 조롱도 있었다.

하지만 저자에게는 하루에도 수천 명씩 자신의 블로그를 방문해주는 충성스런 우군이 있었다. 눈물을 쏟아내게 하는 감동적인 내용은 입에서 입으로, 다시 블로그에서 블로그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열린 저자 사인회에서는 연예인이 아님에도 밀려든 독자들로 인해 인원을 제한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골의사와 그의 블로그가 계획되지 않은 순수한 1인 미디어의 전형이라고 한다면, 징기스칸이 운영하는 ‘인맥을 만드는 CEO 파티cafe.naver.com/ceoparty.cafe’는 1인 미디어의 범주를 넘어선 기업형 네트워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최대의 인맥 만들기’를 꿈꾸는 징기스칸의 블로그에는 430여 개의 이웃 블로그가 유형별로 잘 정리되어 있다. 비즈니스에 목적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수고스럽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징기스칸의 블로그에서 진입로를 발견할 수 있다.

징기스칸은 블로그뿐만 아니라 같은 이름의 카페도 운영하고 있는데 역시 유사한 성격의 카페들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들 카페 역시 각기 다른 카페들과 동맹관계를 형성하고 있어 한 카페를 통해 연결되는 네트워크가 수십 개에 달하며 그 인원만 해도 5만 명을 넘어선다. 징기스칸은 블로그와 카페 운영뿐만 아니라 ‘인맥코디네이터’ 교육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오프라인 공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미 몇몇 출판사와 협력관계를 통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있다. 세미나 개최는 물론 책 홍보 및 이벤트 행사 등을 공동으로 진행하는데, 초기 코어 타깃에 접근해 집중적인 홍보를 꾀해야 하는 출판사 입장에서는 큰 힘이 아닐 수 없다. 광범위하게 가지를 뻗고 있는 충성스러운 네트워크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책의 성공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할 것이다.

넷째, 이러한 블로그 역시 진화의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무한대로 늘어날 것만 같았던 이메일은 다양한 기능을 장착한 매신저 때문에 절대 강자의 위치에서 밀려났다. 하이텔이나 천리안 같은 인터넷 통신 이야기가 지금은 옛날이야기처럼 회자된다. 블로그 역시 마찬가지다. 블로그가 급속도로 보급되고 인기가 높아진 것은 제작과 운영의 편리성 때문이다. HTML 언어를 몰라도 되고 특별한 웹 에디터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아도 평균 정도의 페이지 제작이 가능하다. 한마디로 워드프로세스를 다룰 수 있는 정도라면 눈 감고도 만들고 운영할 수 있는 게 블로그다. 하지만 차별성과 심플한 고기능을 추구하는 욕구의 팽창은 블로그의 운명이 결코 안정적이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블로그를 적극적으로 운영하되 고정적인 도그마에 빠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블로그 역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오늘날 블로그를 애써 외면하는 것이 생뚱맞은 태도라면 블로그가 무슨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되는 것처럼 맹신하는 건 오지랖 없는 사고다. 블로그가 무한한 가능성과 절대적 필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활용의 폭과 깊이를 결정하는 건 출판기획자 몫이다. 책은 사람이 읽고 편집은 신이 한다고 했던가?

블로그의 진정한 가치를 이용하라

마무리하자. 난 이 글을 쓰면서 ‘기술적 분석’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분석의 함정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던 것 같다. 들쑥날쑥한 글 솜씨 때문이니 어려운 주제로 날 골탕 먹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탓할 일은 아니다.

누구나 대박을 내는 출판기획자가 될 수는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만들고 있는 책의 정확한 포지션을 확인하고 가능한 그 높이를 끌어올릴 수 있는 전략을 꾸려내는 일이다. 그게 바로 ‘숫자가 분명한 기획’이다. 특히 실용서를 만드는 출판기획자라면 최소한 손익분기점을 찍을 수 있는 사전 판매계획은 필수다. 대박은 그 다음의 일이다.  
     
우리가 블로그에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힘보다는 잠재된 가능성 때문이다. 잠재성이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의 인식과 노력에 따라 달라진다. 블로그는 스스로가 힘을 가진 이상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의 능력이 도구의 힘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도구가 만든 함정에 빠져 눈이 멀게 될지도 모른다.

혹시 출판기획자의 블로그 활용술이 블로그를 이용한 대박상품 만들기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면 글을 쓴 나는 삽질을 한 것이요, 이 글을 끝까지 읽은 여러분은 삽질을 구경한 어처구니가 된다. 진실은 그게 아니다. 출판기획자에게 필요한 진정한 블로그 활용술의 핵심은 출판기획자 스스로 최고의 블로거가 되라는 것이다. 주변인의 위치에서는 콘텐츠 발굴도, 인적 관계의 형성도, 마케팅도 모두 형식적이고 1회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다.

주변인의 위치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블로거가 된다면 자신이 원하는 많은 것을 획득할 수 있다. 블로그에 관한 한 이게 최고의 답이 될 수밖에 없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늘바람 2006-08-09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갑니다
 


(출처: 한겨레)
 
지난 화요일부터, 성인오락실에 대한 연재기사가 나갔습니다. 저는 16일부터, 부산에서 도원, 용주오빠가 쌓은 취재 노하우를 전수받아, 수도권의 성인오락실 실태를 취재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특별취재반에 합류했습니다. 기사에 그닥 큰 도움은 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며칠간 취재하면서 배우고 느낀 것들이 어느 때보다도 많았기 때문에, ‘특별취재반’의 이름으로 나왔던 첫 기사가, 제 이름이 쌩으로 나갔던 이전의 어떤 기사들보다도 더욱 의미 있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 의미를 다른 인턴과도 공유하고자, 그동안 취재하면서 겪은바, 느낀 바를 뒷담화로 올려봅니다. :D

#1.  “아빠 찾으러 왔는데요.”

수도권 취재 첫날, 비가 주륵주륵 내리던 날, 나와 도원오빠는 서울 동쪽에 성인오락실이 집중돼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미 부산에서 여러 오락실을 다녀봤던 도원오빠와 달리, 난생 처음 성인오락실이라는 곳에 가보는 터였던 나는, 지하철에서는 애써 웃고 있었지만, 긴장과 걱정으로 가득 찬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더랬다. 거기에다, 부산의 오락실들이 무슨 파 무슨 파 조폭과 연계가 됐니 어쨌니의 얘기를 잔뜩 들은 후인지라, 티는 안냈지만 사실 살짝 쫄았던게 사실이었다. 어쨌든 지하철은 한 정거장을 2분만에, 그렇게도 빨리 달려, 우리를 목적지에 내려주었다.

먼저 도원오빠가 임무(?)를 마친 후, 내가 오락실에 들어갈 차례가 됐다. 나는 처음이라 좀 작은 데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나와 함께 오락실을 물색하던 도원오빠는, 무심하게도 지하에 있는 대빵 커보이는 오락실을 보며 ‘저기 있다, 있다 연락해’하며 떠나버렸다. 밖에서만 봐도 오락기 100대는 있어 보이는 큰 오락실, 온통 가려져 있어 안을 들여다 볼 순 없었지만, 들려오는 기계소리만으로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떨리는 마음으로 당차게 오락실 문을 와락! 열었다.

헉. 근데 이게 왠 일. 오락실이 내부수리중인지 뭔지, 암튼 그 큰 오락실에는 손님이 단 한명도 없었던 것이다. 순간, 그때따라 ‘쾅’ 하고 문을 열어 재낀 나에게로, 5명의 직원들의 눈길에 쏠렸다. 한 5초간 우린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 침묵을 깬 건, 그 중 가장 무서워 보이는 직원.

“아니, 뭔 일이십니까?”

순간 당황한 나.

“아.. 네.. 아.. 아빠 찾으러 왔는데요.”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직원들 킥킥 웃기 시작하며,

“아, 그래. 아빠 이름이 뭐니?”

아니, 반말은 왜 반말이야. 나보다 끽해야 10살이나 많을까 말까해 보이는데. 그래도 꾹 참고.

“아, 김.. 이.. 뭐, 암튼 다른데 계시나봐요. 딴 데로 가볼께요. 안녕히 계세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난 아빠 이름을 묻는 질문에, 순간 우리 일진 선배인 “임인택이요.”라는 말이 진심으로 목구멍까지 올라왔었다. 내가 선배를 아빠처럼 생각하고 있었나? 뭐, 한 두 번 정도, 선배한테 취재내용을 보고하고 보고하는 과정에서, 내가 ‘지지배배’ 우는 아기 제비고, 선배가 늠름한 아빠 제비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사실 선배께서, 제비를 좀 닮으시기도 했다) 암튼, 나 살겠다고 선배의 신분을 노출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퍼뜩! 떠올라, 임기응변으로 대충 얼버무리고 나왔다. 그 날 집에 가자마자, 전주에 계신 아빠한테 오랫만에 안부전화를 드렸다.

#2.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내가 쪽팔려서, 같이 취재 갔던 도원오빠에게도 아직까지 말 못했던 일. 나는 바다이야기에서 무참하게 쫓겨난(?) 적이 있다. 사실, 성인오락실에 내 또래 애들, 특히 여자애들은 직원들 말고는 찾기 힘든 일이거니와, 내가 또 나이보다 더 어려보이는 취재 상 단점!이 작용해, 처음에는 취재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난 곧 요령을 파악하고, 이 점을 장점!으로 활용했다. 이 건 뒤에 계속...)

일단 내가 오락실에 들어가면, 순간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나에게 쏠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리 버리해 보이는 내 모습과, 속으로 잔뜩 긴장했지만 애써 아닌척하는 나의 어색한 표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더 많이 눈에 띄게 했을 것이다. 암튼 그 날 나는 긴장도 늦추고, 최대한 껄렁껄렁하게 보이기 위해, 풍선껌을 구입하여 최대한 오버스러운 동작으로 쫙쫙 껌을 씹고 풍선을 불며, 당당하게 오락실에 들어갔다.

들어가자 마자, 그 곳의 수석직원인듯한 사내의 눈길에 나에게 꽂히더니, 들어간 후 5분 동안 졸졸졸졸 나를 쫓아다니는 것이다. 사실, 나 또래 애들이 많지도 않거니와, 직원 눈에, 나같이 돈없어 보이는 인간이 5분간 단돈 만원도 안 쓰고, 게임만 구경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꼬왔을 터였다. 나는 애써 자연스러운 척, 화려한 물고기들의 몸짓에 정신을 빼앗긴 척하며, 불법 행위를 잡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를 쫓아다니던 수석직원,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기, 애들은 출입 안됩니다.”

헉. 애들? 내 참 ‘청소년’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고, ‘애들’이라니. 순간 나는 취재고 뭐고 열이 받아 맞받아 치기를.

“애들이라뇨? 저 애기 아니예요...........”

“아무튼 안됩니다. 나가세요. 여기, 여기 내보내!”

순간 너무 열이 받은 나는, 내 본분을 잊고................

“뭔 소리예요. 저 19살 넘었어요. 저 게임할 돈도 많아요! 민증 까 민증까!”

하며 내 이름 송경화 석자와 주민등록 번호가 또렷이 박혀 있는 민증을 까고 말았다. 아뿔싸. 그 싸가지없는 직원 손에 내 민증이 들려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 순간, 난 그때서야 제 정신이 들었다. 미쳤지. 우리는 기자임을 숨기고, 불법행위 여부를 관찰한 후, 적발시 경찰에 신고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제 정신이 든 나는, 손에 있던 민증을 확 빼앗은 후,

“딴데 가면 되잖아!” 라고 외치고 뒤도 안돌아보고,  뛰어 나왔다.

#3. 카지노에 가보다!

다음날 도원오빠와 나는, 동네를 바꿔 다른 지역의 성인오락실 밀집지를 찾았다. 그날도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다. 이제 취재에 좀 익숙해진 나는, 더 이상 첫날처럼 ‘크게’는 긴장하지 않고, 좀 자연스럽게 오락실을 활보할 수 있었다. 저녁때쯤 찾은 한 오락실, 배에 찬 두둑한 복대 주머니가 인상적인 아주머니에게 접근해 물었다.

“여기, 좀 잘 돼요? 이 동네 오락실이 꽤 있던데...”

“여기? 여기 별로야. 이거 한 시간째 돈만 먹잖아.”

“그래요? 그럼 나도 딴 데로 가야겠네. 어디 좋은데 있어요?”

“좋은데? 데려다 줄까? 내 딸같아서 그런데.”

내 손목을 잡은 아주머니는 우산도 쓰지 않고, 5분정도 쉬지 않고 걸었다. 그리고 왠 간판도 없는 건물에 들어서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려서야 내 손목을 놓았다. 헉. 그런데 여기는 뭐야. 양복 입은 잘생긴 오빠들 4~5명이 서 있던 입구 안쪽에는 빨간 카페트가 깔린 카지노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는 간판도 없이 운영해,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곳인 모양이었다.

성인오락실과는 달리, 이곳의 분위기는 꽤 ‘젊었다!’ 오락실에서 보기 힘들었던 내 또래 애들, 30대 초반 여성들이 여럿 앉아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주머니 나에게 묻기를,

“얼마 있어? 같이 해서 한 판 할래?”

나, 얼마 있다고 해야 할지 감 못잡고, 고민하다가...

“저, 20만원 있습니다. 한 판 할까요?”

사실 내 지갑에는 6천원이 있었다. 오락실 취재 갈 때 돈을 좀 두둑히 뽑아놨어야 하는데, 깜빡 하고 돌아다니던 터였다. 그래도 목에 힘 주고, 20만원이나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아줌마의 답변.

“뭐? 야. 집에 가라 집에 가. 집에 가서 밥이나 먹어.”

헉. 뭐야. 난 나름 큰 돈 있다고 뻥친거였는데, 여기 판에서는 이 돈으로는 택도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2백만원 있다고 했어야 했나?’ 고개를 갸우뚱 하며, 난생 처음 가본 그 빨간 카지노장에서 빠져나왔다. 근데 생각해보니, 20만원 있다고 해서, 한 판 하게 됐으면 어쩔뻔 했어. 지갑에는 6천원 있는데!

#4. 이성 잃고 경찰과 싸우다.

그 다음날 우리는, 경기도의 또 다른 동네로 발길을 옮겼다. 취재가 길어져서, 밤 10시까지도 계속됐는데, 이쯤 되면 마무리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됐을 터였다. 10시쯤, 오락실에 들어간지 5분도 안돼서, 나는 오락실의 불법행위를 포착할 수 있었다. 아, 이제 말하자면, 나는 나의 ‘어려보임’과 ‘어리버리해보임’을 단점에서 장점으로 발전(?)시켜, 취재에 활용했다. 기계에서 막 나오는 상품권을 그 순간 잡고, 일련번호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그 기계 손님과 친해져야 하는데, 대부분 손님들이 40~50대 아저씨인지라, 어리버리한 여학생이 와서 “이게 뭐예요? 오와 상품권이다!!!!! 한 번 봐도 돼요?” 식으로 물어보면 친절하게도 각종 설명을 서로! 해주시기 위해 나서는 것이었다. 또 자기 딸 또래 되는 애가 와서 게임 하겠다고 있으니까, 사뭇 진지하게, 자기가 여기서 돈 잃은 과정, 오락에서 이길 수 없지만 여기 있는 모습에 대한 후회 등을 얘기해 주시며, ‘넌 나처럼 빠지지 말고, 집에 돌아가’ 라고 충고해주는 분들도 많았다.

아무튼, 그 날도, 기프트 수치가 20000에 가까워진 기계에 접근, 손님과 미리 친해진 후에, 막 나오는 상품권들을 ‘제가 받을께요!’하고 쥔 후, 일련번호를 확인하고, 두 번 연속으로 나오는 상품권 8장의 일련번호가 엉망이어서,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런데 경찰차는 내가 있던 공중전화에 한 번 와서 둘러보더니, 오락실에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신고를 했다. 그런데 경찰 왈.

“신고자가 확인되지 않으면 단속을 나갈 수 없습니다.”

“왜요?”

“신고자가 자기 신분 안 밝히는 것은, 경찰을 믿을 수 없다는 건데, 그런 사람 말을 경찰이 어떻게 믿고, 가서 단속까지 합니까.”

순간 머릿속이 뜨거워짐을 느낀 나는, 또 다시........... 취재의 본분을 잃고, 열에 받쳐 그 경찰과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나와야 된다 안된다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화로 싸우기를 30여분.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경찰관 얘기 잘 들었다. 내 그럼 그게 맞는지 확인해볼테니, 당신 말에 확신이 있으면 네 이름 알려줘라.”

“내 이름 알려줄 수 없다.”

“뭐냐. 넌 내 이름 안 알려줘서 나올 수 없다매. 역으로 적용해봐. 니가 니 성명 안알려주면, 난 네가 지금까지 한 말이 진짜라고 어떻게 확인하고 믿으라는 거지?”

“아가씨가 경찰을 믿든 말든 난 상관없다. 여기는 아가씨 논리 듣는 곳이 아니다. 어찌고 저찌고. 그럼 문광부나 정통부에 신고하든가.”

두둥. 전화를 끊고, 순간 오락실 안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을 도원오빠의 후들거리는 다리가 떠올라 정신을 차리고 오빠에게 나오라고 전화를 했다. 근데 괜히 눈물이 쏟아지고, 열이 가라앉혀지지 않았다. 아무튼 신고 후 30분 기다리고, 30분 경찰과 싸우고 해서 벌써 1시간이 지나있었다. 오후 11시. 그런데 그렇게 안보낸다고 싸워놓고서, 경찰차가 오락실 앞에 나타난 것이다. ‘뭐여, 그 아저씨...’ 하면서 다시 긴장을 잡고, 경찰들을 예의주시했다. 전화기로 친구와 전화하는 척 하면서, 경찰에 접근했는데, 경찰 둘은 10분 가량 자기들끼리 계속 대화하고 웃으며 있다가, 오락실에 들어간지 40여 초도 안돼서 나와버렸다. 답답하고 허탈한 하루였다.

나의 무모한 ‘이성 잃음’으로 시간이 지체 되어, 우리는 그 날 서울로 가는 막차를 놓치고 말았다. 피씨방에서 밤을 세고, 첫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는데, 그래도 전국의 일선현장에서 애쓰고 있는 수많은 경찰들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들도 답답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과, 그들의 현재 모습 및 태도 하에서는, 그 답답함이 해소될 길은 요원해 보인다.

#5. 미친 척 하다!

다음 주가 되어, 나는 혼자 서울 북쪽의 또 다른 오락실 밀집지로 가게 됐다. 이곳은 다른 곳에 비하면 밀집지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서민들의 삶 속까지 파고든 성인오락실의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곳이었다. 동네 성인피씨방과 오락실 개수와 위치를 지도에 그린 후,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오락실에 들어갔다. 근데, 그 전전날 나온 성인오락실 기사에 메인 사진이 흔들렸음이 못내 아쉬웠던 나는, ‘오늘은 내가 한 번 사진을 찍어볼까?’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사실, 오락실도 이제 수군데 들락날락한 후라, 여유도 생긴 후였다.

그런데, 대놓고 찍기에는 한계가 있는 상황. 고민하던 나는 무늬가 혼란스러운 쇼핑백을 사서, 카메라 렌즈 만하게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거기에 렌즈를 꽂고는, 한 손은 쇼핑백을 들고, 한 손은 백안에 넣어 촬영 버튼을 누르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쉽지가 않았다. 각도도 엉망이고, 기계 머리만 찍히거나, 손님들 발만 찍히거나 하는 것이었다. 여러 번 시도 와중에, 깝깝질이 난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찰칵 착칵! 그때! 직원 중 한 명이 나를 발견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왜 찍어요????”

헉. 너무 놀란 나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얼굴이 빨개졌으나, 이내 대답하기를.

“아.. 그.. 이게.. 너무 알록달록 예뻐서요. 헤헤. 제가 그림을 좋아해요. 헤헤.....

어? 저게 문어야 오징어야? 헤헤....”

하면서 상황을 넘겼다. 하지만 그 뒤로도 직원들의 눈은 나에게 쏠려 있었다. 나는 애써 자연스러운 척 하면서, 아까참에 친해졌던 60대 아저씨와 매실 음료수를 ‘원샷 해요 원샷!’ 하면서 벌컥벌컥 마시며, 계속해서 정신없는 척 ‘헤헤’ ‘흐흐’ 웃어댔다. 애써 웃고는 있었지만, 그때 내 가슴은 정말 쿵쾅쿵쾅 뛰어댔다. 그 뒤 얼굴에 경련이 일어남을 느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락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뒤도 안돌아보고, 정말 미친듯이 지하철역으로 뛰어들어갔다. 근데 그렇게 찍은 사진들, 역시 다 별로여서, 기사에 별 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 성인오락실 취재가 내게 남긴 것은..

며칠간 성인오락실을 취재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특히, 같은 주제를 다룬 기사여도, 그 방법이나 깊이에 따라 기사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었던 점이 인상 깊었다. (이미 성인오락실에 대한 기사는, 식상해지리만큼 많이 나온 후였기 때문)  또 현장에서 취재를 할 때, 특히 이번처럼 잠복취재(?)를 할 때 가져야 할 각종 노하우에 대해서도 터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취재가 내게 남긴 가장 큰 것은 ‘사람’이다.

오락기 앞에 하루고 이틀이고 쉬지 않고 계속 앉아 있는 아저씨, 아줌마들은, 그냥 ‘게임중독자’들이 아니다. 다들 가족이 있고, 생각이 있고, 삶의 애환이 있는 옆 집 아저씨, 친척 이모이다. 나는 취재 중에 몇 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 사람들의 기대, 아쉬움, 괴로움, 손짓, 한숨 등을 지켜보면서, 이 취재의 중심에 ‘사람’이 있음을 취재 내내 느꼈다. 그 사람들이 왜 거기에 삶을 꼬라박고 있을까. 좀 더 ‘잘’ 살아보고 싶다는 희망, 기대가 왜곡돼, 오락실 안에 갖혀 있는것 아닌가. 또 심지어 오락실을 운영하는 업주들 역시, ‘사람’이다. 계중에는 조폭과 사채업자와 연계돼 대규모로 사업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되는 사업도 없고, 먹고 살 길도 없고 한데, 요즘 이게 뜬다고 하니까, 있는 돈 다 부어 오락실을 차린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창신동에서 봉제공장을 하다, 팔고 동네에 성인피씨방을 차린 사람도 있었다. 요컨대, 내가 취재한 성인오락실 안에는 상품권과 바다이야기 오락기 외에도, ‘사람’이 있었다.

정부가 상품권 제도를 합법화 시키는 등, 각종 도박 사업의 진흥정책을 펼친 이후, 그것들은 나비효과를 일으켜, 실제 곳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나비가 아니라 커다란 새의 날개짓이 되었다. 어떤 아줌마는 이혼을 했고, 어떤 아저씨는 3억원 전재산을 날렸다. 또 어떤 분은 사채까지 끌어다 써 빚더미에 앉아 막막해 하고, 어떤 분은 예전부터 자신의 꿈이었던 봉제공장을 내놓았다. 엊그제, 정부에서 상품권 제도를 없애고, 성인오락실을 규제할 수 있는 각종 정책들을 발표했다. 이것이 또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지, 아직 알 수는 없다. 다만, 이미 뿌리깊게 박힌 사람들의 상처가, 이번 정책으로 말끔히 치유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해 보인다. 예전의 나비효과가 ‘커다란 새’의 날개짓으로 확장돼, 큰 상처를 남긴 만큼, 이번의 나비효과는 ‘작은 파리’의 날개짓에 불과할 것 같다.

나는 여기서, 이번 취재의 의미를 찾았다. 그리고 한겨레가 하고 있고 할 수 있는 일,  기자의 역할, 기사의 힘에 대해서, 예전보다 뚜렷한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결국, ‘사람’인것 같다. 오늘 하루 종일, 이 ‘사람’이라는 두 글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오늘은 커피도 안마셨는데, 잠이 안 온다. 그래도 내일을 위해, 이제 잠을 청해봐야겠다.

 에효. 쓰다보니 글이 억수록 길어졌다;; 24시팀 인턴들 외에는, 서로 겪은 바를 얘기하고 나눌 기회가 많지 않아 아쉬움이 컸었나 봅니다. :) 아무쪼록, 우리 모두 다음주부터 새로운 부서에서 또 다른 경험들을 하게 될텐데! 이번 달의 수많은 ‘어리버리함’, 그리고 그것에 의한 수많은 ‘어믄 짓’들을, 지난 한 달간의 ‘경험’으로 잘 메꿔, 다음 달에는 좀 더 빡시게! 멋지게! 활동했으면 참참참 좋겠어요. 헤헤헤 고롬 안녕!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마천 2006-08-01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 있군요. 인턴 기자분 취재 경험 톡톡히 했네요. ^^

sb 2006-08-02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
 

(출처: 한겨레)

‘가화만사성’이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같은 가치질서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작금의 출판시장 분위기를 보면 그런 가족 이데올로기가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는 듯 보인다. 그 가치질서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했던 여성들이 이기적이고 현실적으로 변하면서 가족이라는 개념이 급격하게 해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결혼했다> (박현욱, 문이당)는 일처다부제를, 드라마 <안녕, 프란체스카>나 영화 <가족의 탄생>은 새로운 대안가족의 유형을 제시한다. 아예 결혼을 포기하는 여성의 수는 급증하고, 이미 이룬 가정마저 쪼개지는 일이 허다해 이혼율 세계 1위를 넘보고 있다. 외국 여성을 데려와 억지로 가정을 이루다 보니 단일민족임을 자랑스러워하는 민족성에도 불구하고 혼혈가족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향후 30년이면 없어질 대표적인 품목이 가정”이라는 예측이 나오기도 하고 “결혼 4년 중임제를 도입하자”는 농담도 진담처럼 등장한다. 아니 머지않아 그런 일이 현실화될 듯한 분위기다. ‘쇼킹 패밀리’는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인간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외투’ 격인 가정마저 해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에 대중은 지친 것일까? 지난해 하반기부터 삶과 죽음, 뇌와 마음을 다룬 책들의 출간이 폭증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행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들이 한 흐름을 이루고 있다.

36만 부를 넘어선 공지영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푸른숲)과 25만 부를 넘어선 법정 스님의 잠언집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조화로운삶)는 인기가 ‘검증’된 저자의 책이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갈수록 증가하는 개인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에 대한 편견을 해소시키려는 <행복한 이기주의자>가 두 달 반 만에 13만 부나 판매된 것은 놀랍다. 게다가 최근에는 아예 <행복>이라는 제목의 책이 두 권이나 출간돼 바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선물> 등의 저자인 스펜서 존슨의 <행복>은 초판을 10만 부나 발행했으며 BBC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펴낸 <행복>(리즈 호가드, 예담)도 한 달 만에 3만 부나 팔렸다.

그렇다면 최근의 책들이 말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길 때에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고, 성공은 행복에 뒤이어 찾아오는 것이며, 내가 행복해야만 온 세상이 행복해진다”는 스펜서 존슨의 메시지가 명확하게 말해준다. ‘행복’이란 결국 ‘성공’의 대체물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성공을 꿈꾸던 대중은 수입도 확실하지 않은 미래와 일상적인 해고의 위협에 시달려야 하는, 희망을 포기할 정도로 고달픈 현실을 겪으며 결국 ‘나만의 행복’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차지 않거나 모자라는 것이 없어 기쁘고 넉넉하고 푸근함, 또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최근의 ‘행복’은 모자라는 것이 많아도 나만이 즐거우면 그만이라는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인 차원의 메시지이다. 철저한 이기주의자는 남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다. 때문에 개인의 행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을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세태가 우리 모두 인생의 ‘막장’에 이르렀음을 말하는 듯해서 허무한 느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