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참세상)

비정규개악안은 '수정'의 대상이 아닌 '폐기'의 대상이다 
[철폐연대 연속기고] 다시 비정규개악안 '폐기'투쟁을 촉구하며① 

최하은(철폐연대)
 
다시 비정규개악안'폐기'투쟁을 촉구하는 연속기고를 시작하며

2004년 9월 정부가 '비정규보호법안'이라는 알량한 이름으로 남한사회의 원칙적 노동자체를 '비정규직'으로 규정하려는 극도의 유연화 전략을 들고 나온 이후, 지난 3년간 적어도 우리는 표면상으로는 누구도 이 법안이 '수정'이나 '협의'의 대상이 아닌 '저지와 폐기'의 대상임을 공언하며 투쟁해왔다. 이른바 비정규개악안 폐기 투쟁이 실제로 얼마나 위력적으로 혹은 목적의식적으로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후술한다 해도 적어도 우리는 이 명제를 공통의 과제로 지난 3년간 투쟁해왔다.

그런데, 최근 '비정규개악안 재수정'이니 이것의 전제로 '노동계 단일안 마련'이니라는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너무나 '공공연하게' 언급되고 있다. 아니 언급이 아니라 어느 순간 그것이 기정사실인양 용인되어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전무 아니면 전부를 주장하다 그나마 비정규노동자들을 최소한이라도 보호할 수 있는 법안의 성안을 가로 막고 있다'느니, '실제로 투쟁할 힘도 투쟁할 의지도 없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눈치보기만 지난 2년간 진행되어 왔다'느니 류의 말들도 공공연히 제출되고 있다. 철폐연대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에 대한 이러한 왜곡들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느낀다.

'실질임금을 보장하라'고 '임금삭감 없는 주 5일제를 실시하라'고 너무나 정당한 투쟁에 나섰던 건설비정규노동자들이 '폭도'로 내몰리며, 무자비한 공권력의 폭력에 의해 생때같은 귀한 목숨을 빼앗긴 2006년 8월 현재. 여전히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는 비정규직 동지들을 위해 혹은 이 땅 85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척박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비정규 '보호'법안을 다소라도 유리하게 수정해야 한다는 논리들에 대해, 철폐연대는 마찬가지의 이유로 단호한 반대를 표명한다. 철폐연대는 수면 밑에서 진행 중인 이 '비정규법안 재수정'기조에 대한 우리 내부의 입장과 평가를 명확히 하고, 다시 한 번 비정규개악안폐기투쟁의 원칙과 의미를 확인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3회에 걸친 연속기고를 시작한다.

기고는 ①'비정규개악안 저지 투쟁의 의미 확인 ②그간 비정규개악안저지투쟁에 대한 평가 ③매일노동뉴스기사 반박 ④현재 진행 중인 논의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 순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 글들에 대한 활발한 논쟁과 소통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허울뿐인 '보호'와 '전계급의 고용', 덧셈·뺄셈이 가능한 항목인가?

정부법안이 입법 예고되던 2004년 당시로 기억을 거슬러 가보자.

IMF이후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된 비정규노동은 이미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선 상황이었고, 최소한 삶의 조건자체들을 송두리째 짓밟는 야만적 착취에 맞선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 또한 어느 때보다 격화되고 있었다. 입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든 '비정규노동자들에 대한 '보호'의 필요성을 운운하던 시기일 만큼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던 상태였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비정규직권리보장입법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황이기도 했다. 법안은 2000년 청원안을 바탕으로 그간 투쟁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을 추가한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정부가 비정규보호법안이라는 이름의 기만적인 법안을 들고 나왔다. 정부가 추진하는 기간제법은 그간 기업차원에서 이루어진 기간제 사용을 법제화해서 승인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씌워진 2년 사용기간 제한은 2년마다의 주기적인 해고와 장기계약자들에 대한 대량해고를 의미할 뿐이다. 파견법개정 역시 현행 파견법을 다양한 경로로 확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뿐이다. 이것은 결국 비정규직을 일반적 고용형태로 법제화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즉 남한사회 노동의 일반 형태자체를 비정규직으로 바꾸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기 존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영구히 비정규직으로 안착시키며 새로이 노동시장에 진출할 모든 노동자들과 현재 정규직으로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모조리 '비정규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근거들을 마련해 주는 최악의 법안이었다.

비정규'보호'법안은 그간 진행되어 온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를 종결짓는 최종적 선전포고였다. 이미 여러차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밝혔지만, 이 법안 안에 존재하는 '보호'라는 기제자체가 허구일 뿐 아니라, 설사 일정 '보호'라는 기제가 존재했다 해도 그것을 '콩고물'로 저들이 노동계급에게 요구한 것은 '전체노동계급의 비정규직화 수단 용인'이었다. 도대체 덧셈 뺄셈이 가능한 항목인가?

이 법안 자체가 폐기되지 않는 한, 이 법안을 근거로 이 법안을 중심으로 한 어떤 논의도 이미 그 '논리 자체'를 승인한 형태에서 출발하는 '조절'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안'과 저들의 '안'을 두고 타협선을 찾을 수 있는 법안의 충돌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96년 이후 면밀히 준비되어 온 '노동법개악', 비정규'보호'법안은 '유연화의 제도적 완성'이다

이번 노동법 개악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왔다.

김영삼 정권은 '노사관계개혁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내놓고 날치기 통과를 시켰다. 이에 맞서서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벌였고, 그것이 역사적인 96·97 총파업이다. 그러나 결국 유연화를 위한 최초의 법 개정은 정부와 자본의 의도대로 관철되었다. 그들은 몇 가지의 제한조치들을 수용했지만 결국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쟁취'했다. 그 이후 우리사회는 김대중 정권 이후 급격한 구조조정에 휘둘렸고, 결국 반수 이상의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이 되었다.

2000년, 이렇게 비정규직이 된 노동자들의 폭발적 투쟁이 불거지자, 정부는 두 가지 점에서 제도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는 96년에 제한된 근로자파견제의 허용대상을 대폭 확장하는 등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제도의 완성이 필요하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법률적으로 쟁점이 되는 부분들을 명확하게 하면서 투쟁을 통제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2000년 10월에 '비전형근로자 보호대책'을 만들겠다고 선언하면서 제도적 완성을 위한 첫발을 디딘 것이다. 그리고 이미 97년 총파업을 경험한 정부로서는 이러한 제도화를 위해 노동운동을 일부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노사정위원회 비정규특위'와 같은 형태로 노동계가 이 제도화에 동의하도록 만들 의사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비정규노동자들이 계속 투쟁을 통해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고, 비정규직이라는 존재 조건이 얼마나 심각한 노동권의 침해를 낳는지가 계속 사회화되면서 민주노조운동은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거부하였다. 어쩔 수없이 자본과 정권은 이러한 시도를 일정하게 뒤로 미루면서 2004년 9월에 노동부 안으로 노동법 개악안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아직 '특수고용'을 제도화하여 특정한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박탈하려는 시도가 남아있는 하지만,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비정규‘보호’법안을 통과시킨다면 어쨌든 비정규직을 확대하기 위한 기본 조치들은 완성하는 셈이다. 즉 그들이 추진해왔던 유연화의 제도적 완성으로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조치의 1라운드가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이것은 뒤이어 정규직 노동운동을 순치시키고 길들이기 위해 만들어낸 '노사관계 로드맵'을 통해 사실상 유연화를 위한 2라운드와 바로 연동될 것이다. 비정규직 관련 노동법 개악이나 노사관계 로드맵 전체가, 우리 노동자 전체를 비정규직을 만들어서 소모품 취급을 하려는 정권과 자본의 의도 하에 배치되는 것이다.

때문에 비정규개악안저지투쟁은 단순히 어떠한 하나의 악'법'을 막는 투쟁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의 완성'이라는 정권과 자본의 정면 도발을 응대하는 투쟁, 전체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한복판에 존재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쟁점을 차별로 전환시키고, 조직된 노동운동을 고립시키려는 시도

그런데 불행하게도 문제는 이 법안의 통과, 즉 노동유연화의 완결된 법제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저임금과 고용불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들의 노동권을 행사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비정규직이 항상적인 고용불안을 겪고 있고, 또 한편 이들의 노동이 파견직·간접고용 혹은 특수고용 등으로 은폐되고 왜곡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용의 불안정성이 해소되지 않는 한 정당한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 없고, 기간제를 용인하고 파견제를 합법화하는 정부의 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고용의 불안정은 해소되지 않는다. 이미 상위 자본 원청에 스스로도 얽매여 있는 허울뿐인 파견 혹은 하청자본은 더 주려해도 더 내어 줄 잉여가 없다. 그런데, 이 간접고용이라는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한 원청에 제대로 된 싸움한번 걸어볼 수가 없다. 결국 간접고용을 용인하는 정부와 원청사용자를 상대로 한 정치적 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득바득 '사용자'라고 우기는 정부의 논리를 쳐내지 않는 한 특수고용노동자들은 그 흔한 교섭한번 해낼 수가 없다.

결국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 자체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문제들의 근본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인 것이다. 차별은 그로 인해 불거진 현상의 한부분이다. 그런데 정부는 정작 차별시정의 효과조차 미미한 조치들을 들고 나와서는 비정규직 문제의 쟁점을 차별의 문제로 전환시키려 하고 있다. 영구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시혜의 대상인 불완전한 존재로 남겨둔 채, 자신들이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보호자'임을 자처하려 하고 있다.

왜일까. 이미 전체 노동자의 과반수를 넘긴 비정규직의 요구는 임금이나 노동조건의 개선에서 시작할 테지만, 비정규직의 임금이나 노동조건에 대한 개선요구는 그 자체가 이미 한국사회 산업구조의 문제·정부의 노동정책을 치고 들어가는 정치적 요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끊임없이 "당신들은 힘없는 불쌍한 존재이니, 우리가 대신 나서 당신들을 보호하겠다"는 주장을 유포하는 것이다.

"소수의 대기업정규직 노동자들, 대기업비정규직들이 다수의 비정규직이 보호되면 자신들의 노동조건이 양보될까봐 법안의 통과를 반대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비정규개안안 통과저지를 걸고 총파업을 선언할 때마다 정부여당과 노동부 경총이 입을 모아 주장한 말이다. 실로 무서운 언설이 아닐 수 없다. 정부와 자본은 자신들은 대다수 미조직 불안정노동자들의 대리자를 자처하며, 조직된 노동자들에게 "우리가 이렇게 비정규직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사이 너희 조직된 노동자들은 무엇을 했는가"라고 몰아붙이며 노동운동진영을 소수의 이기집단으로 고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양극화라는 그럴싸한 말을 들이대며, 민중의 빈곤화에 대한 책임을 정규직조직노동자들의 고임금(?)에 돌리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절반도 안 되는 정규직 노동자들을 비정규직화하겠다는 의지를 넘어, 철저히 조직노동운동을 소수로 고립시켜 향후 전방위에서 진행될 신자유주의 유연화 개방정책의 주도권을 틀어쥐고 가겠다는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진영은 더 이상 노동자들의 대변자가 아니며, 더 이상 노동운동이 진보의 변혁의 담지체가 아니라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기정사실화하려고 하고 있다, 정부와 자본은.

그래서 정부는 굵직한 비정규투쟁사안마다 지역시민단체를 끌어 들인 중재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종용하고, 노조도 그 속에 사회적 합의자의 일부로 들어오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노동쟁의는 이제 노사당사자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집단의 합의의 대상이 되고, 노사관계는 투쟁과 힘의 대결이 아니라 얼마나 사회적 동의를 끌어낼 수 있는지 다른 의미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그 속에서 조직된 노동자들은 사회적 일주체로서 양극화의 책임을 함께 통감하며, 끊임없는 양보의 제스처를 보일 것을 강요받을 것이다.

최근 다시 등장한 "노사정위원회를 7주체회의로 바꾸자"는 주장은, 이러한 시도가 매우 구체적으로 저들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것이다.

비정규개악안폐기 투쟁은 비정규직문제를 차별의 문제·시혜의 문제로 둔갑시키려는 정권과 자본의 얄팍한 수를 파탄내고, 노동운동을 순치시키려는 저들의 시도를 막아내는 투쟁인 것이다.
 
다시 노동법 개악 재수정안 논의가 불거지고 
[철폐연대 연속기고](2) - 노동법개악 저지 투쟁의 경과와 과제 
 
정지현(철폐연대)
 
1. 들어가며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역사란 정사(正史)와 야사(野史)가 있기 마련이고 때로는 집필자의 주관에 따라 달라 질 수밖에 없는데, 기록된 권력자의 정사(正史)만이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의 투쟁의 역사도 언제부터인가 협상위주의 사실을 적어놓은, 권력자들만의 기록들이 진실인양 받아들여지는 것을 목도하며 참으로 안타까움을 느낀다. 노동자들의 민중들의 투쟁의 역사가 기록되지 못하는 까닭일까. 이러한 기우(杞憂)로 이 글을 시작한다. 근 3년간 노동법개악 저지를 위해 투쟁했던 우리의 기억들이 왜곡된 시선으로 기록되어 우리의 기억을 다시 구성하지 않아야 하기에 말이다.

2. 투쟁의 경과

노동법 개악을 둘러싼 투쟁의 경과에서 중요한 시점은 크게 다음과 같다. 04년 12월 총파업 철회 상황, 05년 4월 인권위안의 발표, 05년 12월 민주노동당의 수정안 발의, 06년 5월 이후의 법안 재수정 논의, 이렇게 4번의 국면이다. 이 국면마다 입장과 투쟁 전술이 다르게 나타나게 되는 계급적 역관계와 상황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며 우리의 기억을 다시 조망해 볼 필요가 있겠다.

(1) 비정규 주체들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시작된 개악저지 투쟁 (04년 7월부터 05년 3월까지)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점은 앞서 얘기한 정부의 유연화 공세의 완성으로 제기된 비정규 관련 노동법이 제도화하였다는데 있다. 그리고 이 의도가 바로 비정규노동자 주체들에 의해 적나라하게 폭로되며 투쟁의 대립이 만들어 졌다는데 있다.

2004년 9월 발표된 정부안은 2000년부터 진행된 정부의 비정규직 관련한 논의 속에서 가장 후퇴한 입장을 담았을 뿐 아니라, 비정규직을 정상적 고용형태로 간주하여 이에 맞춰 법제도를 정비하겠다는 구상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기간제와 파견제를 무제한적으로 허용하여 비정규직의 양산뿐 아니라 정규직 일자리의 비정규직 고용으로의 대체를 정당화시키는 것이었다. 파견법을 제정할 때도 그랬지만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비정규직 관련한 법안이 필요하다는 끊임없는 이데올로기를 유포한 가운데 만들어 낸 결정체였다. 그래서 이 법안의 의미는 법안 자체가 아니라 그야말로 이데올로기이고, 신자유주의 유연화의 완성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열린우리당 점거 농성은 선도투로 운동진영에 개악저지 투쟁에 나서게 한 공헌도 컸지만, 비정규직 당사자가 스스로 정부의 노동법 개악안이 그야말로 개악안이요 허구임을 드러내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한다.

○ 정부의 개악안 발표와 열린우리당 점거 농성 (04년 7월부터 04년 9월까지)

- 7개 단체와 민주노동당과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 마련

2004년 7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함께 마련한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이 마련되었고, 그해 8월 입법안은 단병호 의원 발의로 국회에 제출되었다. 이 입법안의 기초는 2000년에 민주노총과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마련한 입법청원안으로 2000년 청원안을 바탕으로 하면서 지난 6년간의 비정규직 투쟁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을 추가한 것이다. 매일노동뉴스의 오보처럼 그 당시 한 달 만에 뚝딱 만들어진 법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근로기준법 개정안, 노동조합법 개정안, 직업안정법 개정안과 함께 근로자파견법 폐지안이 제출되어 기간제 노동자, 간접고용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의 권리보장을 위한 노동운동진영의 권리보장 입법안이 마련된 것이다. 노동운동진영의 권리입법안의 핵심은 비정규직의 사용사유를 제한하고 간접고용을 금지함으로써 상시고용·직접고용의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상시적으로 사용된 기간제 노동자를 정규직화하고, 불법적 간접고용 노동자에 대한 직접고용 책임을 사용사업주에게 명확히 지우는 것이었다. 또한 노동법상 '근로자' 및 '사용자'의 개념을 현실에 맞게 확장하여 노동기본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자는 것이었다.

- 정부의 개악안 발표와 열린우리당 점거

그러나 2004년 9월, 마침내 노동부가 비정규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비정규 노동자를 양산하는 노동법 개악안을 입법 예고했다. 2004년 발표된 정부안은 이제까지 논의과정에서 가장 후퇴한 입장이었을 뿐 아니라 그동안 분출해온 비정규직 조직화·투쟁의 성과들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9월 16일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의 열린우리당 점거농성이 있었다. 이 점거 농성으로 상황이 역전되었다. 정부가 비정규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안이라며 당당하게 호언하던 비정규노동법이 실제 비정규노동자들에 의해 거짓말이라는 사실로 드러났다. 또한 정부의 개악안에 맞서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노동운동 진영의 여타 단위들이 정부의 안이 개악안임을 명확히 선을 긋게 하는 동시에,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던 제 운동진영에게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투쟁에 나서야 함을 일깨웠다.

이런 사실은 대의원대회에서의 총파업 결의안 통과와 시민사회 단체를 중심으로 한 공대위 구성에서 드러났고,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열린 21일에는 전북, 천안, 대구, 부산, 광주, 전남, 경기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린우리당 점거 농성 혹은 열린우리당 앞 1인 시위나 집회에 들어가면서 제 운동 진영이 이 문제에 대해 함께 목소리를 내었다.

- 9월 21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총파업 결의안 통과

실제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의 열린우리당 점거라는 선도투는 의미가 있었고, 선도투로서의 의미를 충분히 발휘했다. 그 결과로 9월 21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는 총파업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실제 이 당시 민주노총은 그다지 많은 고민이 없었다. 당시 민주노총 3차 대의원대회에서는 하반기 투쟁방침으로 “11월 24일 전조합원 오후 4시간 파업”을 예고해왔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농성, 열린우리당 앞에서 매일의 집회, 대의원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견법 개악 저지 및 비정규권리입법 쟁취를 위한 총파업’ 촉구 선전전 진행, 대의원인 비정규노조 대표자의 강력한 호소는 하반기 투쟁지침을 바꾸었다. 그 결과 대의원대회에서는 민주노총 총력투쟁의 날을 ‘강력한’ 총파업 돌입으로 수정하고 총파업 돌입 시점은 ‘비정규개악안 해당 상임위(환노위) 상정시’로 하여 만장일치 박수로 통과되었다. 물론 대의원대회 총파업 결의안은 ‘정부 개악안 강행통과시 총파업’ 이라는 한계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만, 열린우리당 농성을 계기로 노동계가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투쟁의 지침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결의를 이끌어 내고, 농성은 그 다음날인 9월 22일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과의 면담에서 형식적인 반응이기는 하지만 정부입법안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노동계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확답을 받고 해산했다.

- 9월 22일 '비정규직 노동법 개악저지와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공대위' 발족

9월 22일 참여연대 느티나무 까페에서 101개 사회단체가 함께하는 '비정규직 노동법 개악저지와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공대위(이하‘비정규직 개악저지 공대위’)'가 발족하여 노동법개악에 맞선 광범위한 전선을 형성했다. 이는 열린우리당 농성이 시작되자 비정규노조들의 뜻을 받아 노동법 개악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내고 이들의 투쟁에 지원, 연대하지는 취지로 시작된 14일의 노동사회단체 비상연석회의와 20일의 '비정규노동법 개악 저지와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 구성을 위한 간담회 등 공동 전선을 확보하고 확대하기 위한 지난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렇지만 노동계 내부에서도 입장의 차이들이 존재했는데, 노동계 내부의 견해 차이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중요한 관점 차이를 내포한 것이었으나 민주노총 주도로 그때그때마다 봉합되었고, 2004년 정부안이 발표되면서부터는 '노동법 개악안 저지'의 공동전선 속에 수면 아래로 잠복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꾸려진 ‘비정규직 개악저지 공대위’는 애초부터 그러한 불안함을 갖고 출범했고 이후에도 드러나게 되지만, 당시로는 노동운동 진영이 공동의 전선을 가진다는 것에서 큰 의미를 지녔다.

○ 국회 타워크레인 농성과 총파업 철회 (04년 11월부터 12월까지)

- 국회 타워크레인 농성

11월 24일에 비정규노조 간부파업이 있었다. 이 날은 대표자들의 삭발도 있었고 투쟁의 결의도 다지는 날이었다. 간부파업이기는 했지만 당장 해고로 이어지는 현실 때문에 일하는 동안에는 파업조차 힘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의미 있는 날이었고, 주체들이 꿋꿋하게 투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틀 후 11월 26일에 11월 총파업을 앞두고 4인의 비정규 노동자들의 국회 타워크레인 고공 농성이 있었고, ‘비정규 노동법 개악 저지’와 ‘권리보장 입법 쟁취’를 걸고 투쟁을 만들어 나갔다. 이는 정부가 내놓은 비정규 개악안은 반대하고, 7월에 제기했던 권리보장 입법안을 반드시 쟁취하겠다는 의미였다.

이 두 가지는 비정규직 주체들이 투쟁의 전선을 유지하고, 주체들의 지치지 않는 투쟁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 총파업 철회

그러나 2004년 11월 26일 총파업은 그다지 힘이 없었다. 4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국회 안 타워크레인을 점거했어도 무관심했다. 이러한 현실은 2004년 11월이 되면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를 거쳐 결의된 총파업의 실상을 보여준 것이다.

2004년 총파업의 철회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96, 97년 총파업을 떠올렸다. 기간제와 파견제 법안을 다룬다는데 정리해고제와 파견제를 날치기 통과시켰던 96, 97년처럼 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바람으로 총파업은 더욱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달랐다. 96, 97년 총파업은 노동유연화와 제도화에 맞섰지만, 04년 총파업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2004년 11월 2일, 총파업이 철회되었다. 노동법 개악저지와 권리보장 입법 쟁취라는 기조로 총파업을 조직했지만 결국 당시 이수호 위원장의 “이제 권리보장 입법 쟁취를 향해 나아갑시다!” 라는 마지막 선언으로 마무리 되고 말았다. 총파업이 꺾인 것에 모두 힘이 빠졌지만, 그래도 이 마지막 말을 듣고 비정규직노조 대표자들은 드디어 우리가 그렇게 주장하던 바가 선언되었다는 데에 희망을 품었고, 그렇게 2004년 총파업은 끝났다.

그런데 이 선언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처음부터 비정규노동자들이 단병호의원의 이름으로 발의한 ‘권리보장입법안’을 원칙으로 내세웠던 그 의미를 모두 다르게 해석하며 갈등과 논란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잠복해 있던 각자의 동상이몽은 이때부터 시작한다. 비정규노동자들은 이 의미를 수세적 요구가 아닌 공세적 요구이자 투쟁을 통한 노동기본권을 쟁취할 원칙으로 여겼다. 그러나 어떤 이는 투쟁이 아니라 노사정교섭을 하자는 의미로 생각했고, 어떤 이는 국회 안에서 조금이라도 얻어서 입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묘하게 ‘정부의 개악안’ 과 단병호의원이 발의한 ‘권리보장입법안’이 분리되지 않은 채 권리보장을 하자는 말이 과연 누구의 안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지 쟁점이 섞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당시는 사회적 합의주의 관련한 논란이 한 축으로 등장하고 있었기에 이런 쟁점이 섞이기 시작한 것은 이후에 상당한 문제로 발전한다.

그리고 12월 9일 정기국회 일정은 끝났다. 그러나 투쟁이 끝난 것도 아니었고, 비정규 관련 노동법 개악의 공격이 멈춘 것도 아니었다. 결국 다음 해로 넘어가 2월, 4월 등등의 임시국회 일정 속에서 긴장과 대치의 상황은 계속 되고 만다.

○ 계속되는 투쟁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05년 1월부터 3월까지)

- 2월 투쟁을 예비하는 시기 (05년 1월)

2월 임시국회 일정을 앞두고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에 대해 1월부터 각 단위에서의 논의가 있었다. 전비연(준)은 1월 18일 수련회와 대표자회의를 통해 2월 16일에 ‘권리입법쟁취 하루 총파업’을 결의했고, 민주노총은 1월 20일 대의원대회 안건으로 2월 총파업을 다뤘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20일 속리산에서 있었던 33차 대의원대회에서 제출된 안은 총파업이 아닌 ‘2월 총력투쟁’이었다. 이 안이 상정되자마자 빗발치게 공세적인 발언들이 쏟아졌다. 지난 12월 법안이 유예된 것을 가지고 총파업을 철회하고 권리보장 쟁취를 하겠다는 민주노총이 총파업이라는 강력한 투쟁이 아니라 총력투쟁으로 수위를 낮춘 것은 무슨 의미냐, 공세적 교섭요청이라는 말과 함께 총력투쟁이 제출된 것은 결국 교섭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냐며 반발이 쏟아졌다. 결국 논쟁 끝에 ‘2월 총력투쟁’은 ‘2월 총파업’으로 바뀌고 만다. 그러나 여전히 ‘강행 처리 시’ 총파업이라는 단서는 빠지지 않은 채 였다.

- 2월 임시국회로 인한 긴장의 연속 (05년 2월)

16일 오후 3시 전국비정규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 소속 비정규노조는 일제히 간부파업에 돌입하였다. 전비연(준)은 이 날 집회 이후 17일부터 매일 국회 앞에서 촛불 집회를 진행했다. 민주노총 역시 2월 20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 "비정규 권리보장입법 쟁취 및 불법파견 분쇄 결의대회"를 열었다.

2월 임시국회에서는 18일에 환노위 법안심사소위를 열어 상정된 법안을 논의하고 23일에는 환노위 전체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23일 국회에서 법안 강행처리 입장 발표로 긴장의 연속이 된다. 초비상이 걸려 23, 24일 양 일간 국회 앞에서의 연이은 집중 투쟁도 있었지만, 당시 눈여겨 볼 것은 23일 있었던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태도였다. 한국노총은 “오늘 오전 열린우리당이 강행처리 입장을 제출하고 법안 처리를 시도하고 있는데 2월 임시국회에서 강행처리 할 경우 한국노총은 노사정위를 탈퇴한다”고 잘라 말했다. 민주노총은 11시 기자회견에서 이수봉 대변인은 기자회견을 마친 후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정부가 비정규법안을 강행처리할 경우 사회적 교섭은 폐기될 수밖에 없고, 우리는 총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밝혔고, 4시 환노위 위원장실 입구에서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은 “23일 법안심사소위 강행시 24일 08시 부로 민주노총은 전면 총파업에 즉각 돌입할 것을 결정했다” 고 투본회의 결과를 설명하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처럼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강경한 발언을 보인데 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비정규 개악안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투쟁이 여전히 존재했고, 투쟁 주체들의 투쟁의 의지도 꺾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주노총이 비정규법안 저지를 위해서 교섭을 해야한다는 것으로 이미 사회적 교섭과 비정규개악안이 하나의 덩어리로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폭력사태라 언론에 집중 공격된 2월 1일 영등포 구민회관에서의 대의원대회 등 교섭이 아니라 투쟁으로 돌파하자며 민주노총의 교섭 방침에 대한 내부의 투쟁이 존재했던 상황이었다. 실제로 2월 임시국회에서도 사회적 교섭과 노동법 개악과 관련된 문제는 관련이 있었는데, 대의원대회 사태로 보인 이 당시의 중요 쟁점은 극좌 맹동주의 폭력성에 있지도 단순하게 사회적 합의에 대해 찬성이냐 반대냐에 있지도 않았다. 과연 비정규 노동자의 삶의 문제를 가져올 비정규 노동법 개악 안에 대해 어떻게 고민할 것인가에 있다. 이러한 직후 일어난 임시국회이기 때문에 민주노총에서도 강경한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한편, 이 당시 일각에서 2월 임시국회를 앞두고 다음과 같은 우려를 보이기도 했다. 그 우려는 22일 대의원 대회를 앞두고 사회적 교섭의 재개 안의 통과와 23일 국회에서 비정규 개악안의 통과라는 시나리오였다. 그렇기 때문에 노사정위원회이든 노사정대표자교섭이든 교섭기구에 참가하기로 한 약속을 져 버리고 열린 우리당이 법안을 강행한 것은 모종의 약속을 깨버린 것이어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23일 환노위 강행처리라는 상황에서 분노의 표출을 내비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 이러한 정황을 뒷받침하듯 "여당으로서는 민주노총이 22일 교섭기구 참여를 결정했는데도, 이를 무시한 채 23일 법안을 처리하는 것은 너무 야속한 것 아닌가 하는 점에서 고려하는 것”이라는 이목희 발언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대의원대회는 3월로 연기되고 23일과 24일 양 이틀을 걸쳐 긴장으로 몰아넣던 강행처리 방침도 결국 4월 논의로 넘어간다.

(2) 국가인권위 의견 발표와 비정규 노동법 수정안의 등장 (05년 4월부터 05년 9월까지)

○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의 문제점 (05년 4월)

- 4월 12일 국가인권위 노동법 개악에 대한 의견 표명

2월 임시국회 일정도 끝나고 다시 법안의 문제가 불거진 것은 05년 4월부터였다. 4월 12일에 국가인권위에서 비정규직 법안 관련 의견을 내놓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정부의 비정규개악안에 대해 △기간제 남용방지를 위해 사용사유를 제한할 것△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을 명기할 것 △파견근로 허용대상 업종을 제한하고 있는 현행 포지티브 방식을 유지할 것 등과 함께 국회에 계류 중인 비정규 개악안이 “노동인권보호와 비정규직차별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충분하지 못하다”는 의견을 제출한 바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정부의 개악안에 대한 문제점을 의견으로 내놓으면서 정부의 입지는 좁아졌었지만, 정부의 강경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린우리당의 이목희 의원이나 김대환 노동부장관 등은 인권위의 의견이 월권이라며 “이 문제는 정책의 문제이지 인권의 문제는 아니” 라고 주장했고, 재계에서도 난색을 표했다. 민교협과 학단협 등 11개 단체에서도 김대환 노동부 장관의 제명까지 거론하며 망언과 무지함에 질타를 가했다.

- 이에 대한 각 단위 반응

인권위 의견이 나오자 민주노동당은 “인권위 의견 표명을 환영한다”며 “미흡하지만 인권위 의견 수준 정도로 입법해야 한다”고 했다. 민주노총은 정부 입법에 대한 수정안을 내놓으며 인권위 의견에 환영을 비추었다. 민주노총은 4월 21일 중집에서 ‘개악안 저지’에서 ‘인권위안 존중, 권리보장 입법 쟁취’ 로 교섭방침을 전환하고 ‘4월 국회 인권위 입법’ 의 현실화를 최대목표로 전향적인 안을 끌어내 이후 입법과정에서 가이드라인이 상향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을 논의했다. 한국노총도 “인권위안으로 4월 처리한다”는 기조에 동의한다며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단식과 함께 공조의 의사를 보였다.

그러나 전국비정규대표자연대회의(준)은 성명을 통해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서는 비정규권리보장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선일 뿐이며 비정규노조들과 노동계의 요구에 비하면 파견법 철폐 및 특수고용 노동3권 보장이 누락되어 있는 내용”이라 비판했고, 철폐연대도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다.

인권위 의견이 전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인권위 의견 자체도 문제는 있었다. 인권위 의견에서는 명백히 파견법 폐지가 아니라 파견법 허용의 메시지가 있었다. 그러나 더 문제는 인권위 의견을 빌미로 본격적으로 수정안이 등장했다는데 있다. 수정안의 등장이라는 말은 정부의 개악안을 인정한다는 연장선상에 있다. 다시 말해 비정규노동자의 삶을 권리보장입법안이 아니라 정부의 노동법 개악안을 바탕으로 구성한다는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 노사정대표자교섭과 민주노총의 수정안 (05년 4월부터 5월까지)

- 민주노총의 수정안 등장

이때 여기서 다시 살펴볼 것은 ‘노사정대표자교섭’이다. 인권위가 의견을 내기 전인 4월 5일 8개월 만에 ‘노사정대표자교섭’이 재개된다. ‘노사정대표자교섭’의 주요 문제는 노사관계로드맵이고 비정규 노동법 개악안에 대해서는 별도의 틀로 논의하겠다고는 했지만, 이미 2월 환노위 처리 공방 당시와 3월 대의원대회 무산이후 위원장 직권으로 추진된 ‘노사정대표자교섭’ 은 비정규직 법안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었다. 즉, ‘노사정대표자교섭’은 비정규노동법 개악안과 분리되었다고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4월에 열린 '노사정대표자교섭'에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수정안을 제출하면서부터 노동계의 동요는 본격화되었다. 기간제 고용에서 사유제한원칙을 포기하고, 파견법 철폐가 아닌 현행 파견법 유지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노동계 단일안’이 교섭석상에서 제안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에 4월 30일 전비연(준)은 민주노총 비정규실장과의 간담회를 통해 분명한 문제제기를 하였고, 5월 2일 노사정대표자교섭이 열리는 과정에서 비공식으로 긴급 제안된 민주노총 투본 대표자회의에서 전비연 등 비정규노조의 문제제기 역시 있었다. 그러나 5월 2일 노사정대표자교섭 과정에서 노동계가 제출한 ‘최종안’은 04년 7월 제기한 권리보장 입법안과는 다소 다른 후퇴한 입장이었다. 그 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간제와 관련하여 교섭석상에서 노동계 최종안으로 제출하였다는 이른바 ‘1년+1년’안은 사실상 2년까지 기간제고용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안으로서, 기간제를 사용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의 제한’ 이라는 권리입법요구안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파견제와 관련하여 ‘파견법 철폐-직업안정법 등 강화를 통한 직접고용 원칙의 확립’ 이라는 권리입법요구는 제대로 주장되지 않았고, 현행 파견법 유지에 급급하였다. 게다가 ‘파견허용업종 열거’(포지티브 방식)라는 현행 파견법의 틀을 유지하더라도 허용업종을 노사합의 및 의견수렴에 따라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여지마저 주었다. 다음으로 원청 ? 사용사업주 등 사실상 사용자로서의 위치에 있는 자본에게 노동법 상 사용자책임을 확대하려는 권리입법요구는 노조법 상 부당노동행위 책임을 지는 사용자로 제한되었다. 마지막으로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에 관해서는 노사정위원회에서 논의 중이므로 교섭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정부 입장을 뛰어넘지 못했다.

결국 이른바 ‘4월 교섭’ 은 5월 2일 노사정교섭 결렬이 되면서 마무리 된다. 경총의 견해 번복 및 정부의 강경입장으로 4월 교섭 자체가 파탄나면서 이 문제는 분명한 매듭을 짓지 못한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잠복된 ‘4월 교섭 내용’은 이후 11월에 와서 노사대표자교섭이 재개되면서 떠오른다.

○ 투쟁의 공백기? 그래도 쉬지 않는 투쟁들 (05년 6월부터 10월까지)

- 계속되는 투쟁들

인권위 권고안으로 수정안이 제기되고, 노사정대표자교섭이 결렬된 이후 다시 정기국회가 열려 쟁점이 부각되던 11월이 될 때까지 투쟁은 소강되고 만다. 그러나 이 시기 투쟁을 이어 나가기 위한 흐름은 여전히 존재했다.

전비연(준)은 6월 노동청 항의방문을 통해 다시금 노동법 개악의 문제점을 드러냈으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등 30여개 현장조직과 사회단체는 다시 투쟁을 정비하고 계속하기 위해 중간평가 토론회를 개최한다. 6월에 열린 노동법 개악 저지 평가 토론회에서는 이후 어떻게 노동법 개악에 맞서 투쟁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토론이 있었다.

또한 10월에는 류기혁 열사의 자결 등 현대자동차 원청사용자성 쟁취와 노동법 개악 문제 등을 문제제기하며 여러 노동 사회단체 및 학생운동 단위에서 노동법 개악 저지에 맞선 릴레이 1인 시위를 노동청 앞에서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작지만 끊임없는 투쟁의 흐름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투쟁의 흐름은 계속 될 수 있었는데, 이 당시 상황에서 또 한 번 눈여겨 볼 것은 ‘비정규노동법 개악 저지 공대위’의 해소였다.

- 비정규노동법 개악 저지 공대위 해소 (9월)

04년 12월 민주노총의 총파업 철회부터 나오기 시작한 공대위의 분열은 결국 9월에 해소로 그 수명을 다 하였다. 05년 6월부터 나온 공대위 해소 안은 9월에 와서 매듭을 짓게 되는데, “양극화해소를 위한 대책기구가 만들어질 예정이므로 이 대책기구를 통해 비정규노동법 문제도 대응하도록 하고 공대위는 해산하자” 는 다소 황당한 해소 근거가 나오기도 했다. 결국 몇 몇 단위의 문제제기로 공대위가 ‘사회양극화 국민연대’ 등으로 포괄되는 것은 일련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그 자자체로 해소를 결정하지만, 해소에서 공대위 활동의 문제점 역시 별달리 짚어지지 못하고 마무리 된다. 그러나 이 해소 과정에서 나온 해프닝은 단순한 해프닝만은 아니었다. 노동시민사회단체가 함께 공동대책위라는 것을 왜 만들었는지, 그 목적과 위상에 대해 심각한 의견차이가 있음을 보여줬다.

이러한 운동진영 내부의 입장 차이의 핵심은 비정규직 철폐냐 차별철폐냐의 문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비정규직 노동기본권이냐 차별철폐냐의 문제인 것이다. 누구는 케케묵은 구분법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 문제는 비정규 문제의 근본적인 입장을 달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기 시기 마다 등장한다. 더구나 정부가 노동법 개악을 발표한 상황이기에 ‘비정규직 철폐’는 단지 원론적인 구호가 아니라 정부의 개악안을 막아서야 한다는 현실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정세적 구호였다. 이처럼 운동진영 내부는 비정규직화 하는 제도에 반대하느냐, 일정정도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에서 문제의 해법을 가지느냐의 차이를 가졌다. 일례로 2000년에 만든 ‘비정규노동자 기본권보장과 차별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이하 ‘비정규 공대위’)에서는 파견법 철폐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였던 한국노총과 전국여성노조는 ‘유사근로자 특별법’ 안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런 까닭에 공대위의 분열과 해소는 당연한 귀결이었고 이는 이후 11월에 와서 더욱 노골화 된다.

그동안의 활동을 살펴보면 ‘비정규직 개악저지 공대위’는 매 시기마다 국회 앞 농성, 선전전, 각 부문단위 기자회견, 토론회 등을 가졌다. 표면적으로는 104개 단체가 가입되어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10여개 조직 정도가 회의 등에 참여했고, 민중운동 진영과 시민운동 진영을 함께 참여하면서 개악 저지를 넘어서는 방향성에 있어서는 합의되지 않았고 매 국면에서 각자 독자적인 행보를 하게 되었다. 특히 시민운동 진영의 경우 사회적 대화를 강조하거나 여성운동 쪽은 개악 저지 방향 자체에 일정 부분 이견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한계들은 현실적으로 취약한 활동력으로 드러났고, 활동 역시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성명서 발표, 토론회, 기자회견, 선전전 등이 주된 활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작부터 잠복해있던 이러한 입장 차이는 공대위의 해소로 이후 표면에 바로 드러나게 되는데, 11월 한국노총의 최종안 발표가 그 차이를 작동케 하는데 불을 당긴다.

(3) 민주노동당의 수정안 발표 환경노동위 법안 통과 (05년 11월부터 06년 4월까지)

○ 국회 앞 농성투쟁 돌입 (05년 11월)

작지만 지속되는 노동법 개악 저지의 흐름이 있었기에 11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국회 앞 농성이 이루어 졌다. 특수고용 대책회의 중심으로 10월에 농성과 단식에 들어간 이후 11월이 되면서 각 단위에서 농성에 들어갔고 노동법개악 저지를 위한 실천들을 벌였다.

민주노총 서울본부, 전비연 등을 중심으로 ‘비정규권리입법 쟁취와 투쟁사업장 승리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이후 ‘공투본’)가 꾸려졌고 실천단 중심으로 활동을 만들어 갔다. 지역과 현장조직 중심으로 ‘비정규직 철폐 현장투쟁단’ (이후 ‘현투단’)이 꾸려져 이 역시 단식 등과 함께 국회 앞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국회 앞 농성에 대해 국회 일정 중심의 투쟁 배치가 과연 옳은 것인지, 우리의 투쟁의 의미를 너무 좁히는 것은 아닌지 논란과 쟁점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의 비리 사건으로 민주노총에 비대위가 구성되고, 두 차례 무산된 대의원대회 직후 첨예한 쟁점마저 직권으로 처리하면서 대중운동이 무력해지던 상황이라 그나마 국회 앞 농성이라도 하는 것이 투쟁의 의미를 지속하는 것이라는 데에 의미를 두며 투쟁을 지속했다.

○ 민주노동당의 수정안 등장 (05년 11월 29일부터 12월 9일까지)

지난 4월에 해결되지 못한 쟁점은 11월 노사대표자교섭이 재개되면서 다시 떠오르게 되었는데, 민주노총이 이른바 ‘4월 교섭내용’에 기초하여 교섭할 것을 주장하면서이다. 4월 교섭당시 제기하였다가 교섭결렬로 사라졌다던 수정안이 노동계의 공식요구로 재등장하였던 것이다.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 및 공두본, 현투단 등 국회 앞에서 농성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단위들이 이러저러한 통로를 통해 민주노총(비대위)에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역시 분명한 해결을 보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11월 29일 한국노총이 ‘최종안’ (기간제 2년 사용 후 정규직화, 불법파견 고용의무, 특수고용 관련 내년 상반기 중 논의)을 발표한다. 열린우리당은 연내 조속한 처리를 통해 비정규노동법개악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는 와중에 한국노총이 노동계 최종안이라며 정부 여당의 개악안에 손들어 주었는데, 이를 녹색연합 ? 민언련 ? 참여연대 ? 환경운동연합 ? YMCA ? 여성단체연합 ? 함께하는 시민행동 등 7개 시민단체가 지지했다.

이 당시 11월 교섭은 파국에 이르고 있었는데, 이처럼 한국노총이 일방적인 양보안을 발표하면서야 비로소 민주노총은 ‘4월 교섭내용’의 내용이 아니라 원래의 권리입법요구가 민주노총의 입장임을 선언하였다. 여기에 민주노동당의 권리보장 입법안을 촉구하며 민주노총과 50여개의 노동사회정치단체가 12월 2일 권리보장 입법안에 대해 지지 의사를 밝혔다.

12월 6일 한나라당은 재계안과 유사한 입장을 발표했고, 이로써 비정규 관련 법안을 둘러싸고 정부 ? 여당 ? 한국노총 ? 7개 시민단체가 같은 입장을, 민주노동당 ? 민주노총 ? 50개 노동사회정치단체가 또 하나의 입장을, 나머지는 한나라당과 재계가 한 축을 차지하는 3개의 구도로 나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12월 6일 민주노동당이 차별시정을 중심으로 단계적 분리처리를 제안했고, 환경노동위 법안심사소위가 열리던 8일에 민주노동당은 기간제 사유제한 관련 수정안을 제시했다. 기간제 법안에서 핵심은 기간을 얼마로 하느냐보다는 ‘사유제한’에 있다. 그러나 기간제와 관련하여 6가지 사유가 더 추가되어 10개가 된 민주노동당의 사유제한 수정안은 ‘사유제한’ 을 도입하려는 취지를 무색하게 하고 사실상 기간제를 폭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문제는 각 항목의 내용이 상시적 업무에도 기간제를 확대할 수 있는 여지를 준 것에 있다. 애초 권리보장 입법안의 ‘사유제한’은 일상적으로 필요하고 정규직으로 쓸 수 있는 업무까지 비정규직으로 쓰는 것에 대한 반대의 의미이며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절대 비정규직을 쓰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수정안은 그런 취지를 무색하게 했다.

국회 앞에서 농성을 하던 전비연(공투본), 현투단 등은 민주노동당에 항의 간담회를, 그 외 단위들도 각종 성명서 등을 통해 문제제기를 계속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2월 8일 법안심사소위 논의까지를 거치면서 정부·여당의 법안은 ‘몇 가지 쟁점’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통과되었다.

○ 노동법 개악안의 국회 환노위 통과 (06년 2월부터 06년 4월까지)

06년 2월 27일 국회 환노위에서 질서유지권까지 발동하며 노동법 개악안이 통과된다. 2월 임기국회가 열리면서 다시 긴장이 되었지만 민주노동당, 한나라당, 민주당, 국민중심당 등 4개 야당 원내대표들이 2월 22일 회담을 갖고 비정규직 관련 법안의 차기 국회로의 이월 등을 합의했다. 이로써 06년 2월에도 국회에서 비정규노동법 개악안 통과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운동 진영에서도 잠시 긴장을 놓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월 27일 갑작스레 환노위 통과가 진행된 것이다. 2년 여 가까이 오랫동안 매 시기마다 통과에 대한 긴장과 대치가 계속되었던 터라 이날의 환노위 통과는 많은 사람들을 허탈하게 했다. 미처 어떻게 손도 써보지 못하고 날치기 통과가 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의 무기력은 더 심했다.

민주노총은 다음 날부터 총력투쟁으로 대응했지만, 그나마도 철도 파업으로 온 관심이 집중되어 비정규 법안 환노위 날치기 통과에 대한 분노는 이후에 보이지 않게 된다. 그나마 전비연은 2월 28일 총력투쟁과 3월 2일에 국회의장 공관 앞에서 새벽 항의시위를 하는 등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움직임을 보였고, 철폐연대에서는 국회의장과 노무현에게 여러 사람들의 항의 엽서를 모아 전달하기도 했다.

(4) 비정규 노동법 관련 ‘재논의’ 안의 등장 (06년 5월부터 현재까지)

○ 다시 불거진 노동법 개악 재논의 안 (06년 4월부터 현재까지)

이 부분은 안타깝게도 현재 진행형이다. 추후에 글에서 더 보강되겠지만 비정규노동법 관련 재논의안이 기정사실화 되어 나오는 상황이다. 민주노총은 노동자대회를 통해 노동법 개악안에 대한 재논의 입장을 스리슬쩍 비추었고,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공조가 다시 얘기되고 있다. 6월에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하여 어느새 노동법 개악 ‘재수정’은 기정사실화되어 가고 있다.

아직도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개악안이 통과된 이후 그 알량한 2년 이후 무기계약근로 간주를 피하기 위한 사용자들의 움직임에 기간제 노동자들은 벌써부터 계약해지 아니면 계약 변경을 강요받고 있고, 지난 7월 1일 파견법이 시행된 지 8년이 된 이래로 죽어나가는 파견노동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이를 질타하듯 6월 말 파견노동자의 설움을 폭로하며 방송사비정규노조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개악안을 바탕으로 하는 ‘재수정’은 이처럼 비정규 노동자들의 삶을 하나도 건질 수 없을 것이다. 

'매일노동뉴스'의 참을 수 없는 오만함.. 그 진실과 거짓 
[철폐연대 연속기고](3) - ‘비정규 법안 공방의 진실과 거짓’에 대해 
  
최하은(철폐연대)

 
 지난 5월 '매일노동뉴스'는 ‘비정규법안 공방의 진실과 거짓’이라는 제하의 10회차 연재를 시작했다. 현실운동과 투쟁의 역사를 배제한 채 철저히 ‘국회’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서술된 이 연재에서 '매일노동뉴스'는 ‘노동계가 명분 찾기에 급급했을 뿐 실력도 진의도 없었으며, 결국 충분히 따낼 수 있었던 것들마저 유산시킨 채 비정규노동자들의 눈물을 외면했다’고 주장했다.

처음 이 기사들을 접했을 때의 심경은 ‘어처구니없음’과 ‘분노’였다. 그럼에도 이 연재들에 대해 논박을 벌이지 않았던 것은, 그로 인해 그 기사들이 쟁점이 되고 그래서 그 글들에 사회적 발언력을 실어주게 되는 것보다는 ‘무시’하는 것이 차라리 덜 유해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 이어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이 '노동계단일안 마련'을 요구하고 나섰고, 더 나아가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을 만나 ‘비정규법안 재수정’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여전히 불참하겠다던 민주노총 중집의 결정이 번복되었으며,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비정규법안 재수정을 위한 논의틀을 마련했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표출된 주장들은 단순히 한 기자ㆍ한 매체의 ‘가치판단’이 아니라, 비정규개악안의 본질과 그간의 투쟁 과정에 대한 ‘기억’을 왜곡하는 특정한 기조를 기정사실화하고 이데올리기화하려는 거대한 흐름의 일부였다고 '철폐연대'는 판단한다. 그것이 의도되었든 의도되지 않았든 말이다. 때문에 다시 비정규개악안저지 투쟁을 촉구하는 연재를 진행하며, '매일노동뉴스'의 연재에 대한 비판을 생략할 수가 없게 되었다.

세세한 모든 것들을 논박할 수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묵과할 수 없는 몇가지 것들을 이하에서 지적하고자 한다.

비정규개악안이라는 수건 돌리기를 원하는 측은 명백히 존재한다.

'매일노동뉴스' 연재의 첫 회차 제목은 ‘아무도 원하지 않은 수건 돌리기’였다. 주장인 즉 슨, 노동계와 정치권 내부는 비정규법안을 둘러싸고 복잡다단한 이해관계와 파워게임을 벌였을 뿐 정작 비정규법안이라는 ‘수건’을 돌리고 싶어한 측은 없었다는 것이다. 주체들의 진의없음 혹은 무책임함의 근거로 밝히고 있는, 매 교섭상황에 대한 기사 자체의 사실여부는 일단 접어두자. 그리고 기사의 주장대로 때때로 혹은 많은 경우 교섭장에서 정부와 자본은 후퇴하기도 하고 어쩌면 당시의 정세적 역관계상 일방 추진을 늦추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밝힌 대로 2004년 비정규개악안은 2000년 아니 96년부터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의 법제화’라는 ‘역사적 임무’를 지닌 채 세상에 나왔다. 더 이상 ‘무시’로만 일관할 수 없을 정도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불거지고 있었고(여론을 타든 말든), 노동계는 그 주체들의 요구를 담은 비정규권리보장입법안을 들고 비정규직 문제를 쟁점화하고 이를 관철시키겠다는 싸움을 하겠다고도 했다. 무엇보다, 정부 스스로 법안 취지 설명에서 인정했듯 이제 바야흐로 한국의 ‘경직된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풀어야할 내외부 자본의 요구와 필요가 어느 때보다 높아가던 시기.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비정규개악안은 세상에 나온 것이다. 교섭장의 언저리에서 혹은 교섭장 인사들에게 ‘들은’ 내용들을 근거로, 혹은 표면상 드러난 ‘결과’들을 조합해 ‘누구도 수건을 돌기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자칭 ‘노동과 진보의 모든 것’을 다룬다는 '매일노동뉴스'는 남한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노동의 역관계와 이해관계, 현실의 전선을 무시했거나 아니면 무지했다고 볼 수밖에는 없다. ‘노동부가 표가 깎아먹는 법안을 들고 나와 들이대고 있다’는 여당의 ‘볼멘소리’를 액면 그대로 용인하는 부분에 이르면 그 무지나 안이함에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

아전인수로 흘러버린, 비정규직 ‘보호’ 필요성에 대한 절실함?

‘노동운동이 지금 두려워하는 게 정녕 무엇인가. 내셔널센터의 주도권을 잃은 게 두려운가, 민주노동당의 주도권을 잃는 게 두려운가. 아니면, 자신들의 실력이 공개되는 것이 두려운가, 자신의 정체성이 공개되는 것이 두려운가. 그것도 아니면 이 모든 게 다 두려운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대중의 눈에서 눈물마저 마르게 되는 상황 아닌가’('매일노동뉴스' 10회차 연재 중)

'매일노동뉴스'는 10회에 걸쳐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매우 높은 강도로 비판하고 있다. '철폐연대' 역시 비정규개악안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안과 태도에 대해 우려와 염려를 보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너무나 깊은 강이 존재한다. 왜일까?

'매일노동뉴스'의 논지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노동계는 자신들의 요구를 ’쟁취‘할 실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노동계는 ’전부‘만을 주장했고, 몇 번의 교섭상의 호기가 찾아왔음에도 눈치보기에 급급해 ’결단‘의 시기를 날려버렸고, 이 경직성과 무책임함 때문에 결국 비정규직 노동자의 마르지 않는 눈물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근거로 가장 크게 드는 것이 ‘사유제한’에 대한 노동계의 태도이다. '매일노동뉴스'는 인권위 권고안 발표 이후 비등한 여론으로 정부와 자본 모두 ‘사유제한 도입’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있었음에도, 노동계가 ‘사전사유제한도입’을 포기하지 않아서 이 호기를 놓쳤다고 말한다. 또한 이후 노동계가 교섭에서 우위를 점하던 당시 여당이 ‘사유제한을 포기하고 불법파견고용의제를 받을 것’을 제안했는데, 역시 전무 아니면 전부라는 태도로 ‘불법파견고용의제’를 버리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대목들에서 '철폐연대'는 '매일노동뉴스'가 심각하게 이번 비정규개악안의 내용을 오독하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비정규개악안은 기간 기업차원에서 존재하던 기간제 사용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파견법의 허용범위를 넓히는 것을 본질로 한다. 정부 스스로 밝힌 법안 설명에서도 기간제와 파견고용의 안정적 수급이 매우 절실하다는 것이 핵심 이유임을 인정했다. 단지 이 법제화와 확대를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 몇 가지 보호조치들을 도입한다는 것이 정부의 구상이다. 이 보호조치들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는 1회차 연재에서 서술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사전)사유제한’의 요구는 그 자체로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기간제 사용을 금지하라’는 우리 측의 적극적 요구사항이기도 하지만, 기간제를 법적으로 원칙 용인하겠다는 정부의 개악안을 ‘무력화’시키는 저지의 수단이기도 하다. 기간제 법제화를 포기하든지, 마땅히 상식적인 형태로 기간제사용사유를 법제화하라는 것이 ‘사유제한’도입의 요구다. 이것은 협상에서의 ‘바터’ 대상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을 기간제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유연화의 시도를 ‘파탄’내야하는 절대절명의 핵심적 투쟁의 대상이었다.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교체를 반복당하는 기간제 노동에 있어서, 3년이든 2년이든 1년이든 입구를 열어둔 채 사후에 사유제한을 하겠다는 것은 사유제한이라는 ‘이름’만을 남긴 채, 결국 정부의 의도를 고스란히 관철시키는 것이다. '매일노동뉴스'가 그토록 비판하는 ‘명분다툼, 원칙논쟁’이 아니란 말이다.

적들의 핵심 요구가 존재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치명적인’ 공격이라면, 응당 그에 대해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교섭이든 투쟁이든. 적들의 본질적 공격을 비껴둔 채, 그 안에서 쟁점을 분리하고 이해득실을 따지는 행위 자체가 바로 적들이 미리 배치해둔 ‘지뢰’-그 허울뿐인 양보조치-를 스스로 밟는 행위다. 또한 ‘불법파견 고용의제’라는 것 역시 그 말의 수용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기준으로 어떤 시점에 이를 적용할지가 문제인 것이다. 현재 환노위를 통과한 법안 내용을 보라. '매일노동뉴스'도 인정하듯, 법안은 고용의무 발생 시기를 ‘2년’ 경과 후로 규정함으로써, 오히려 불법파견을 사실상 2년간 허용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겠다. “노동자 대중. 비정규법안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게 될 현재와 미래의 비정규직 노동자 대중의 입장에 서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애써 평가절하하지 않겠다. 그러나, 한번만이라도 비정규개악안의 내용을 숙독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노동운동이라는 것이 먼저 조직한 자들의 명예나 지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때로는 부끄러움 심지어 굴욕까지 감수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힘이 모자라는 자가 듣기 좋은 소리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 그 때 도장 찍지 않았다’는 알리바이는 만들 수는 있어도, ‘나는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는 훈장을 얻을 수는 있어도, 결코 후위의 고통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는 자신들의 글을 다시 한 번 곱씹어 주길 바란다. 도대체 노동계에게 감수하라고 하는 ‘부끄러움과 굴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굴욕으로 해결하게 될 ‘후위의 고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정파논리에 진저리치는 '매일노동뉴스', 그러나 누구보다 정파적이었던 '매일노동뉴스'

우리의 정중함은 여기까지다.

바로 앞서 '매일노동뉴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원칙고수를 주장하는 자들은 민주노총 지도부를 흔들기에 급급했을 뿐이고, 비정규법안을 핵심적으로 고민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교섭 추진에 딴지 놓기에 골몰했으며, 때문에 정작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이 파견법이나 사유제한 부분에서 주요한 후퇴를 결정했을 때도 침묵했다’는 지점에 이르러 '철폐연대'의 인내심은 고갈되고 말았다.

정부 법안의 본질과 의도가 명확한 상황에서 이 법안을 놓고 ‘협상’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 본질을 일정 수용해야함을 의미하기에 '철폐연대'는 비정규개악안을 가지고 사회적 교섭을 추진하는 것을 반대했다. '매일노동뉴스'도 말하지 않았나, 협상이란 무릇 하나를 얻으면 무언가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저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가 명확했고,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확했기에 반대했다. 당신들이 ‘폭력사태’를 운운하는 그 대의원대회 자리에서 대다수 반대자들이 외쳤던 말은 ‘파견법의 후과를 기억하라, 비정규개악안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였다. 우리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이 판단착오였다고 평가한다면 그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라. 어째서 ‘민주노총 지도부를 흔들기 위해 비정규법안을 이용했다’고 왜곡하는가.

매순간 정파적 판단에만 매몰되어 있었다고 노동계에 독설을 퍼 붇는 와중에 그러나 당신들 스스로는 이미 모든 것을 정파적 논리로만 재단하고 있다. 정권과 자본이 던진 것이 전노동자계급에게 무엇을 의미하지는 지에 대한 무지 때문으로 돌리기에는 과도한 ‘무엇’이 당신들에게는 존재한다. 그래서 당신들의 눈에는 눈물로 호소하던 비정규동지들의 총파업 요구도, 그 알량한 ‘1년사용-1년 사유제한-1년 고용의제’와 불법파견고용의제를 바꾸자는 제안을 거부한 비정규당사자들의 의사도, 인권위에서 던진 사전사유제한 도입이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라는 민주노동당의 요구도,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인권위 권고수준으로 요구를 후퇴시키고 민주노동당이 사유제한 폭을 확대한 것에 대한 비판했던 목소리도 들리지 않은 것이다. 아니 들으려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당신들에게 ‘그저 특정 정파를 방해하기 위한 반대를 위한 반대’로만 읽히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이 매우 안타깝게 회고하고 있는 ‘결단의 시기’. 결국 내부 반발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버리고 말았다는 ‘결단’이 무엇에 대한 결단이며, 그 ‘내부’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당신들은 명확히 알 것이다. 그 결단이란 결국 명목상의 ‘사유제한’이라는 타이틀을 받고 저들의 의사가 면면히 살아있는 법안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기간제와 파견제 확대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마지막 선을 지킬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었다. 그 판단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제동을 건 것은 민주노총 ‘내부’에서 비정규 투쟁을 벌여나가는 비정규직 당사자들이었다. 누구보다 비정규직의 고난을 몸으로 겪어오면 살아가고 있기에, 고용의 유연화가 어떻게 노동자들의 삶을 파탄내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유연화의 확대를 수용해서는 안된다고 설득했던 것이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커서, 소수의 반대론자들이 너무나도 극성맞아서가 아니라, 그 요구가 노동자계급에 있어 정당했기에 ‘결단’은 유보된 것이다. 노사정의 사회적 교섭이 진행되던 와중에도 울산에서 청주에서 서울에서... 정권과 자본의 살인적인 폭력 앞에서 정말 ‘처절한’ 투쟁을 온 몸으로 해내고 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그 자체가 ‘비정규개악안저지’의 마지노선이 무엇인지를 웅변하는 현실이었다. 정권과 자본만이 아니라 우리 ‘내부’를 향해 끊임없이 던지는 웅변이었다. 민주노총 집행부에게, 그리고 노동자민중의 정당 민주노동당에게 요구되었던 결단은 유연화 확대를 ‘봉쇄’하기 위한 실질적이고 목적의식적인 ‘투쟁’의 전술이었다. 쟁점을 임의로 분리하고, 특정부위의 반발이 예상된다해도 어떤 부위에 득이 될 수 있다면 일정한 선에서 교섭을 정리하라는 결단이 아니다.

87년 7~8월은 여전히 유효하다.

“‘수명을 다한 87년 6월이 마지막으로 보낸 회심의 ’센터링‘. 그것을 무위로 돌린 것은 국가와 자본의 압박수비가 아니라 87년 7~8월의 연이은 ’자살골‘이었다. 그것은 87년 7~8월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내부경고‘였다“

지난해 4월 인권위 권고안 발표 전후의 교섭 상황을 평가하는 '매일노동뉴스'의 규정이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겨버린 엄청난 수치의 비정규노동비율, 이들의 불안정하고 빈곤한 삶, 매순간 전면전의 양상으로 전화되곤 하던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 인권위 권고안은 소위 386세대의 마지막 양심이 만들어낸 ‘선의’가 아니라, 비정규직의 문제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남한사회 전체의 문제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조건 속에서 나온 하나의 결과다. 그것을 무위로 돌린 것은, 노동을 분할하고 그 분할의 하부단위를 87년 6월 이전의 폭압적 착취의 상태로 되돌렸으며 그 폭을 넗히려는 정권과 자본에 대한 노동의 배수진이었다.

굳이 87년 7~8월에 대해 말하고 싶다면 좋다. 그것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87년 7~8월의 목소리가 여전히 남한사회에서는 현실적 쟁점이며, 남한사회 노동자와 자본가 그리고 정권은 여전히 87년 7~8월의 그때처럼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적대전선의 대립자임을 환기하는 ‘내부경고’였다고 치자. 차라리 그건, 노동조합이 노동운동이 노동대중의 현실적 이해를 대변하는 것만이 아니라, 여전히 그 적대전선 앞에 선 하나의 투쟁체임을 환기하는 ‘내부의 확인’이었다는 것에 가깝다.

투쟁할 힘이 없는 민주노총을 벼랑으로 몰아세우는 소수의 내부 강경론자와 그 강경론자들에 휘둘리는 무능력한 민주노총 집행부, 정작 계급과 기층 민중과는 분리된 상층의 권력투쟁을 통해 야기되고 있는 노동운동의 위기, 합리적이고 상생할 수 있는 노사정의 관계 구축을 가로막는 전투적 노동운동의 망령...

'매일노동뉴스'의 10회 연재의 근저에 흐르고 있는 것은 결국 이러한 공격들이다. 그래서 '철폐연대' 당신들의 주장에 대해 명백히 ‘정파적’ 인 목적의식을 가지고 비판할 수밖에 없다. 당신들의 주장은 너무나도 정권과 자본의 그것과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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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자료 채집이 공부의 반입니다”  
구본준 기자 이정아 기자
  

창조는 자료에서 나온다. 자료 자체는 과거의 흔적일 뿐이지만, 자료가 쌓이고 엮여 발효가 되면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글이 익는다. 수없이 자료를 모으고, 그 속에 담긴 공통의 씨앗을 골라내 새 싹을 틔우는 사람, 자료들을 잇는 생각의 고리를 찾는 사람. 저술가는 그런 사람이다.

민속학자 주강현(51)씨는 그런 점에서 가장 ‘아키비스트(기록관리전문가)’적인 저술가라고 할 수 있다. 주씨는 자신이 관심갖는 분야에 관한 한 모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모으고 또 모은다. 자료란 쌓이면서 생명력을 갖는 법. 당시에 한번 쓰고 버려지던 것들을 모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때 자료는 진정 자료가 된다. 주씨는 그렇게 자료에서 책을 뽑아내는 저술가다. 그 자신도 스스로 아키비스트란 인식이 강하다.

지난 1995년 전통 미륵사상을 다룬 책 <마을로 간 미륵>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주씨는 그 해 <한겨레>에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란 시리즈를 1년 동안 연재하면서 이름을 알린다. 이듬해 이 시리즈를 묶어 나온 같은 이름 책은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리고 10년이 넘도록 꾸준히 팔리며 판매부수 30만부를 넘겼다. 이후 주씨는 <조기에 대한 명상>(1998) <왼손과 오른손>(2002) <개고기와 문화제국주의>(2002) 등 전통문화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담은 저작들을 이어 펴냈다. 2003, 4년 동안 잠시 책이 뜸하나 싶더니 지난해 해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를, 올해에는 <독살><두레><관해기1·2·3> 등 무려 5권의 책을 펴내며 예전보다 더 왕성하게 저술활동을 펼지고 있다.

주씨의 이런 왕성한 생산력이 바로 자료에서 나온다. “생각해보세요, 신문에 전면으로 1년을 연재하려면 그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불가능한거죠. 사람들은 제가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로 갑자기 등장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만큼 오래 자료를 모으고 글을 써왔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최근 다시 활발하게 책을 내는 것 보고 일부에서는 ‘다작’이라고 말하는 것도 언제나 학술분야 책을 쓰고 자료를 모으는 기본작업을 물밑에서 계속 해온 것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주씨의 출세작은 1996년 <우리문화의 수수께끼>지만, 첫 책은 1987년 <민족과 굿>(공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이전에 쓴 책만 10여권으로 학술서와 대중서를 꾸준히 내왔다. 그리고 <우리문화~> 이후로는 거의 해마다 3~4권을 써 저서가 40여권을 넘는다.

실제 주씨의 연구실인 일산 ‘정발학연’은 자료실 수준을 넘어 개인이 만들어낸 도서관에 가깝다. 책 2만여권, 녹음테이프 2000여개, 사진 20만장이 한치의 틈을 용납하지 않고 빼곡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다. 이 곳에는 집필용 컴퓨터말고 사진용 컴퓨터가 따로 있다. 혹시 바이러스 때문에 자료가 날아갈 수 있어 인터넷을 연결하지 않고 사진만 보관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제본기. 주씨는 인터넷에서 자료를 보면 당장 필요가 없어도 그 자리에서 출력한다. “나중에 언제 다시 검색해서 찾아보겠습니까. 봐서 쓸만하다 싶으면 그 때 뽑는 게 더 시간을 절약해줍니다.” 이런 출력지들, 각종 다른 자료를 항목별로, 또는 시기별로 모아서 제본한다. 메모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어떤 것이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종이에 적고,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에 입력하고, 원본은 따로 메모함에 보관한다.

출장이나 여행길에는 반드시 빈 바인더나 클리어파일을 가지고 간다. 현지에서 거저 구할 수 있는 모든 서류-관광안내서, 교통시간표, 홍보용 전단, 어촌계 서류 따위-를 모조리 집어넣는다. 여기에 여행에서 적은 메모까지 넣어 여행에서 돌아오면 자료철 1권이 새로 생긴다.

올해만 5권…저서 무려 40여권

주씨의 이런 자료정리는 출판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주씨 책을 다뤄본 편집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주씨의 강점은 3가지. 어떤 것을 책으로 써야할지 아는 기획력, 답사와 취재 열정, 그리고 방대한 자료다. 특히 자료에서 사진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책에 들어가는 시각물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저술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전 사진을 단순하게 책에 집어넣는 컷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 자체가 중요한 자료라는 점을 인식해서 오래전부터 중시해왔습니다. 민속학의 특성상 그 순간 찍어놓지 않으면 사라지거든요. 이미 제가 찍은 뒤 사라진 것들이 허다합니다.”

주씨는 “자료가 공부의 반”이라고 말한다. 기본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모으는 과정 자체가 연구와 저술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며,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일반자료가 진정 자신만의 자료로 변한다는 게 주씨의 지론이다. 또한 자료는 ‘아이디어의 소산’이라고 강조한다. 연구하고 쓸 거리가 많다보니 모을 것도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주씨가 모으고 있는 자료에는 80년대 민중집회·연희 등의 자료도 있다. 당시 ‘대동제’ 행사 진행 및 준비자료들, 팸플릿, 심지어 기획회의록 등을 보관중이다. 앞으로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란 생각에 그때부터 모아놓았던 것들이다. 이런 자료의 힘은 주씨 저술의 핵심이자 강점이지만, 반대로 문체나 구성면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자료를 풍성하게 다루다보니 내용이 장황해지고 중언부언하는 느낌을 주며, 산만하다는 평도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출판시장에서 주씨의 자리는 확고해보인다. 민속문화란 분야에서 대중들과 직접 소통하고 있는 글쟁이는 주씨가 유일하다. 이는 주씨 개인에겐 아픔을 겪은 대가이기도 하다. 주씨는 80년대 초반부터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농촌 문화와 해양문화를 취재하고 주민을 인터뷰해 녹음하고 사진을 찍어왔다. 그렇게 10년을 보낸 뒤 저술가로 이름을 알렸고 책으로는 성공했지만, 교수가 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후 주씨는 “교수들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한다”는 각오로 저술활동에 더욱 매달려왔고, 자신이 교수들보다 민속학을 알리는 데 더 기여한다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바다’ 화두로 세계 항구 답사중

최근 몇년새 주씨는 ‘바다’를 가장 중요한 화두로 삼고 있다. 조기라는 물고기 한 마리로 서해안을 조망한 책 <조기에 관한 명상>으로 시작한 바다 연구는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를 거쳐 올해 나온 <관해기>로 기본틀을 갖췄다. ‘바다에 대한 온갖 다양한 이야기’를 다룬 <관해기>는 앞으로 주씨가 연구하고 글 쓸 것들의 단초들이 담겨 있는 책이다.

주씨가 바다를 자신의 분야로 미리 잡은 것은 오랜 관심에서 나온 것인 동시에 아직 아무도 다루지 않은 ‘블루오션’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즘 주씨가 매달리는 일은 아시아 주요 나라의 항구 답사를 통해 제국주의사와 해양교류사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푸념하면서도 주씨는 매달 어김없이 해외 현장을 찾아간다. 조만간 그 결과가 또 다른 책으로 선보일 것이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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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경제)
 
"언론의 신뢰성이야말로 생존의 비결입니다 ."
프랑스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창간을 기념해 방한한 이냐시오 라모네 발행인 겸 주필(64). 그는 14일 한국언론재단이 마련한 `세계화와 미디어 문화민주주의` 토론회에 참석해 언론의 생존 비결을 이렇게 전망했다.

라모네 주필은 현재 미디어가 직면한 위기를 양적 팽창과 질적 저하라는 두 가지 차원으로 평가하고 미디어의 생존 비결을 질적 개선에서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뉴미디어 세상이 열려 매체 숫자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 하지만 오히려 통신ㆍ방송ㆍ신문 겸업 등 언론의 독점화와 집중화로 인해 다양한 목소리는 줄어드는 실정이며 매체들은 생존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 사례를 들어가며 현재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독자에 대한 신뢰성 회복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 △미디어 통합에는 거대 자본이 필요하므로 위기에 처한 매체에는 현실성 없는 대안이며 △미디어 홍수 속에서 오히려 독자들은 방향을 제시할 줄 아는 언론을 찾고 있으며 △결국 독립적이고 신뢰성 있는 매체만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라모네 주필은 지난해 있었던 프랑스 EU헌법 개정 투표 사례를 얘기했다. "EU헌법 개정 찬반 여부가 국민 투표에 부쳐졌을 때 거의 모든 언론이 국민들이 개정 찬성을 원한다고 기사화했죠.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국민들은 반대를 원했습니다 . 이를 계기로 대다수 국민들은 언론을 신뢰하지 않게 됐습니다." 그는 자사 신문이 추구하는 방향이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추구하는 방향은 바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을 견제하는 `제4의 권력`을 발휘하는 데 있어요. 내용 면에서 미디어의 획일화로 특수성이 떨어지고 있기에 신뢰성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죠."

한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은 국내 월간지와 달리 일간지 외형을 지니면서 가격은 월등히 비싸다. 국내 일간지에 비해 14배 높은 7000원인데 이는 신문이 독자적인 입장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라는 설명이다.

[이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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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경제)
 
최근 미디어의 진보 경향은 이른바 '플랫폼의 다각화'다.
몇 년 전만 해도 위성 이동멀티미디어방송(DMB)이 방송 시장에 폭풍을 일으켰다면 최근에는 인터넷프로토콜TV(IPTV)와 그 전 단계인 TV포털로 인해 방송과 통신의 영역이 모호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결국 미디어 업체가 지닐 수 있는 경쟁력은 '유용한 콘텐츠 확보'로 모아지고 있다.

이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최근 케이블 프로그램사업자(PP)들의 발빠른 행보다. 이들은 자체 또는 외주 제작 드라마 콘텐츠를 크게 늘리며 지상파와 대적할 태세다.
 
◆ PP 드라마 방영 공격적 행보 = 지난 12일 MBC플러스가 보유하고 있는 케이블ㆍ위성채널인 MBC드라마넷지역 케이블TV방송사(SO)들과 공동으로 드라마 '빌리진 날 봐요'를 자체 제작한다고 밝혔다. '빌리진 날 봐요'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PP와 SO가 공동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해 선보이는 것으로 플랫폼 사업자와 콘텐츠 사업자간 새로운 사업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SO로서는 제작 역량을 갖춘 PP를 통해 우수한 콘텐츠를 확보하는 한편 제작 노하우를 전수받는 등 많은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울러 PP 또한 공동제작에 참여한 SO와 향후 프로그램 공급계약 등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게 됨은 물론 프로그램 제작비를 충당할 창구도 마련한 셈이다.

장근복 MBC드라마넷 대표는 이번 협력에 대해 "콘텐츠 확보를 통한 경쟁력 우위 선점 차원에서 큰 의의가 있다"며 "그 같은 공동제작 모델은 향후 방송장비, 제작인원의 교류와 공동펀드 조성 등 발전적 사례를 낳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지훈 박탐희 등이 출연하는 '빌리진 날 봐요'는 30분짜리 26부작 로맨틱 코미디로 이달 말부터 촬영을 시작해 12월 말 MBC드라마넷을 통해 방영될 예정이다.
케이블ㆍ위성 PP 양대산맥인 온미디어와 CJ미디어도 외주 제작 드라마를 자체 방영하는 데 더욱 주력하고 있다.

온미디어 채널인 OCN은 다음달부터 제이엔미디어홀딩스가 제작한 '가족연애사 2', 11월부터는 옐로우필름이 제작한 '썸데이'를 각각 방영한다. 이의정 윤기원이 주연한 '가족연애사 2'는 지난해 12월 방영된 '가족연애사'에 이어 삼형제의 다양한 연애이야기를 다룬 코믹물이며 '썸데이'는 김민준 배두나 오윤아를 내세워 젊은 남녀의 진정한 사랑을 그린 사전제작 시리즈물이다. 특히 OCN은 지난 7월 여름 시즌을 맞아 미스터리 공포물인 '코마'를 총 5부작으로 선보인 바 있고 같은 온미디어 계열인 수퍼액션도 8월 30일부터 '시리즈 다세포소녀'를 40부작 시리즈로 방영해 오고 있다.

다음달 9일 개국하는 CJ미디어 계열 오락전문 채널인 TVN도 김민종 윤다훈 오만석이 주연한 신작 드라마 '하이에나'를 선보인다. 특히 지난 2월 MBC를 통해 축소 방영된 드라마 '내 인생의 스페셜'도 12부작 전편으로 TVN에서 방영될 예정이다. 아울러 CJ미디어는 아직 채널을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옐로우필름이 제작한 이서진 박한별 주연의 드라마 '프리즈'도 곧 방영할 계획이다.

◆ 위협받는 지상파 방송사 = 케이블ㆍ위성 PP들이 독립적인 드라마 콘텐츠까지 선보이고 있으니 이제 긴장하는 쪽은 지상파 방송사들이다. 아직까지는 시청률 면에서 지상파가 케이블보다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케이블이 다양한 콘텐츠를 계속 개발해내는 한 지상파의 위기 의식은 높아질수밖에 없다.

우선 해외 판권을 고려할 때 외주제작사는 케이블ㆍ위성 PP에 작품을 제공하는 것이 지상파와 계약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케이블ㆍ위성 PP는 대부분 방영권만 갖고 나머지 사업권은 제작사에 일임하는 경우가 많지만 지상파는 해당 드라마의 국내외 판권을 독점 소유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제작 환경 측면에서도 다르다. 케이블ㆍ위성 PP에 방영되는 드라마들은 대부분 사전제작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입김에 휘둘릴 소지도 지상파에 비해 적다. 또 제작사들은 지상파에 한정된 드라마 계약에서 벗어나 케이블ㆍ위성 등으로 플랫폼을 다양화함으로써 운신의 폭도 넓히고 있다고 분석해볼 수 있다.

온미디어 관계자는 "예전에는 케이블에서 만드는 드라마엔 배우들이 출연을 꺼리는 사례가 많았지만 이젠 케이블ㆍ위성 시청률이 크게 오르고 그 위상도 달라져 출연진 섭외도 더욱 수월해졌다"고 말했다.

[서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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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경제)

BCWW 이틀째…"맞춤형 콘텐츠가 미디어 좌우"
 
방송과 통신으로 양분돼 있던 미디어 영역이 서로 통합되고 그 수단인 플랫폼이 점차 디지털화함에 따라 세계 유수 미디어 기업들의 생존 전략도 다양해지고 있다.

지난달 3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 방송영상 콘퍼런스(BCWW) 이틀째 행사에서 한국 영국 멕시코 대만 홍콩 미디어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디지털 메가트렌드의 미래'라는 주제로 이른바 '슈퍼패널' 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CEO들은 각국 미디어산업 환경의 변화상을 소개하고 해당 기업의 미디어 전략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들이 공통으로 강조한 것은 △매체에 상관없이 콘텐츠가 경쟁력의 핵심이고 △모바일 미디어가 다른 미디어 수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미디어 환경 변화가 소비자들 행태도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선 정연주 KBS 사장은 콘텐츠 중요성을 강조하며 "아이팟, 아이튠 등 콘텐츠 유통 혁명이 일어남에 따라 더욱 강조되고 있는 것은 결국 콘텐츠의 질적 가치"라고 역설했다.

수단보다 콘텐츠가 우선이라는 주장은 국외 미디어기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알레한드로 벨라 두할트 멕시코 MVS텔레비전 이사는 "다국적 미디어기업이 늘어나 콘텐츠 전송 채널이 증가함으로써 소비자 선택권도 다양해졌다"며 "전송 수단의 변혁 못지않게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확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특히 두할트 이사는 "전 세계 누리꾼들을 상대로 동영상을 공유하는 인터넷 사이트인 유튜브(youtube.com)처럼 멕시코에서도 온라인 비디오 클립을 제공하는 사이트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며 "(콘텐츠)전송 틀이 어느 정도 안정됨에 따라 콘텐츠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영국의 세계적인 공영 방송사 BBC는 소비자들의 개인화에 더욱 집중했다.

닉 반 츠바넨버그 BBC월드 지역이사는 "현재 수직적인 방송체계는 사라지고 1인 중심의 호환적(interactive), 주문형 서비스가 늘어나고 있다"며 "이는 기존 '브로드 캐스팅'과 달리 개인을 상대하는 P2P식 '내로(narrow) 캐스팅'으로 소비자들에게 더욱 직접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BBC TV 프로그램을 맞춤형 라디오로 제공하는 아이플레이어(iPlayer) 서비스가 올해 말 영국에서 실시되고 내년 전 세계로 확대될 것이라고 츠바넨버그 이사는 밝혔다.

데이비드 창 대만 ETTV 대표는 2003년 단행된 자사 뉴스 부서의 디지털화를 중점적으로 소개하며 "이젠 'TV Anywhere'라는 개념이 등장할 정도로 디지털 미디어가 자리잡았다"며 "이로써 미디어기업은 기존 광고 수익에만 의존하던 것과 달리 유료 채널, 주문형 비디오 등으로 수익원을 확대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비자 행태 변화도 지적됐다.

그레그 문 소프트뱅크코리아 대표는 "디지털 기술이 미디어에 미치는 가장 큰 영향은 단순한 단말기 변화나 방통 융합이 아니라 기존 소비자를 활발한 '프로슈머'로 바꾼 데 있다"며 "이로써 콘텐츠 서비스 플랫폼은 모바일ㆍIP TV로 급격히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때 모바일TV와 아날로그TV가 서로 단점을 메워줄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제이슨 옙 홍콩 스타TV 그룹 부사장은 "모바일TV가 많은 장점을 갖고 있긴 하지만 스크린 크기가 작다는 단점이 있는데 이는 기존 TV와 인터넷으로 보완될 수 있다"며 "결국 미디어기업은 각 매체의 내재적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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