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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녀 펭귄클래식 56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곽명단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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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부정적인 내용보다는 긍정적인 내용을 좋아한다. 특히나 어려움을 이겨내고 잘 되는 내용만큼 좋아하는 소설도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조건이다. 고생을 했는데 귀인을 만나 잘 풀리는 것도 좋아한다. 원래 귀한 사람이었는데 알 수 없는 사정에 의해 어렵게 살다 비밀이 밝혀지며 원래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아한다.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면서 안타까워하고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보게 된다. 이럴 때 주인공이 잘 되면 내 일처럼 기뻐하면서 소설을 읽게 된다.

이런 종류는 과거부터 많이 있었다. 과거에는 이런 내용이 소설보다는 연극으로 많이 공연되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글을 쓰고 읽을지 몰랐던 시절이다. 그러니 연극으로 공연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기면서 공감하며 웃고 울며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 <소공녀>는 그런 작품이다. 원래 연극으로 공연했던 작품을 소설로 다시 만들었다. 소설은 약간 동화책에 가깝다. 어른이 읽어도 큰 무리는 없지만 아이들이 읽으면 더욱 손에 땀을 쥐고 흥미진지하게 읽을 수 있다.

제목처럼 소공녀는 고귀한 여자 아이다. 소설 주인공 사라는 어떻게 보면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아이다. 책이 나온 1905년에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현대는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일단 너무 해맑고 올바르고 게다가 유연하다. 사라는 부잣집 딸이다. 엄마가 없는 관계로 아빠가 어떤 응석도 다 받아줬을 것이라고 본다. 이럴 때 보통 되바라지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하고 싶은 건 하고 얻고 싶은 건 무조건 떼를 써서라도 얻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듯 한데 그렇지 않다.

어쩌면 워낙 큰 부자라 언제나 요구하는 건 아빠가 다 들어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보다는 천성이 고운 아이다.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자신이 잘 남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뭐 하나 아쉬울 게 없는 아니가 이렇게 자라는 건 쉽지 않다. 최근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저 남들보다 돈이 많다고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는 우월감에 빠진 사람이 많다. 각 사람은 전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고유의 인격을 갖고 태어났다. 돈이 많을 뿐 인격이 더 훌륭한 건 절대로 아니다.

천박하다는 표현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양은 예전부터 이렇게 사회지도층이 최소한 겉으로는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예의범절과 해야 할 에티겟을 지키며 행동한다. 그게 오히려 사회지도층이 해야 할 마땅한 규범으로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 사라는 몸에 베여있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학급에 있는 친구들 중에는 그렇지 못한 아이도 있다. 대신에 그 아이들이 귀족 집안이거나 큰 부를 갖고 있어 보이진 않는 걸로 묘사된다. 어릴 때부터 체득한 교육이 다른 듯하다.

엄청난 부자로 따로 한자 큰 방을 쓰고 있던 사라에게 시련이 닥친다. 아빠가 인도 광산에 투자했다 돈도 날리고 돌아가셨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사라는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사리 분별이 뛰어나서 말도 똑부러지게 했다. 교장 입장에서는 마음에 안 들지만 학교 운영을 위해 너무 필요한 인물이니 평소 화를 꾹 참고 지냈다. 사라 생일에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는다. 교장은 골치아프게 사라를 떠맡게 생겼다. 다행인 점은 사라가 똑똑하고 언어를 잘하는 점이었다.

사라가 평소에 올바른 소리만 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데리고 있기로 한 이유다. 소설에서 교장은 분명히 나쁜 인물로 묘사된다. 사실 사라에게는 아빠 이외는 누구도 없었다. 만약 교장이 거두지 않고 내쳤다면 사라가 갈 곳도 없었을텐데 어떤 운명이 되었을까. 워낙 예의 바르고 똑똑하고 외국어도 잘하니 어딘가에서 잘 되었을까? 그런 누구도 모른다. 이제 겨우 초등학생 정도 되는 아이를 귀엽고 볼 수 있어도 집으로 데리고 갈 사람은 없지 않았을까 예측한다.

그나마 교장이 데리고 있었으니 해피엔딩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한다. 소설 특성상 주인공을 돋보이는 인물로 묘사되긴 했어도. 제대로 먹이지도 않고 옷도 주지 않아 인간답게 대우해주지 못한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워낙 사라는 단 한 번도 뭔가 모자란 점이 없었기에 겸손은 조금 부족해 보였다. 그건 아직 어린 사라에게 쉽지 않은 행동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미움을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라에게는 강력한 비밀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상상력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가정 원칙으로 자신이 무엇이 된 것처럼 행동했다. 비록 지금 위치는 하녀나 마찬가지지만 혼자 있을 때면  공주처럼 상상하며 품위를 유지했다. 또한 더 대단한 건 그런 상황에서도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고 공부를 한다. 소설이 단순히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착한 아이라 복을 받았다. 그런 개념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라 자체가 현실은 암울해도 상상하며 미래를 대비하고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천성이 밝은 아이라 누구에게도 귀여움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이런 아이가 있을 수 있을가까라는 의문은 들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점도 놀랍다. 제대로 먹지 못한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어려운 아이에게 먹을 걸 준다. 웃음을 잃지 않고 밝음이 내면에 늘 가득했다. 소설이 나온 시기는 1900년대 영국이니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 연극을 보고 많은 사람이 희망과 꿈을 갖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소공녀>는 다른 여타 고전과 결을 좀 달리하는 소설이다.

다른 소설이 현실에 기반하여 탄탄한 내러티브를 보여준다. <소공녀>는 그보다는 철저하게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고 운이 많이 나온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며 보여주는 소설도 좋다. 신기하게도 사람은 현실을 또 작품으로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현실을 잊게 만들 판타지같은 작품을 더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소공녀>는 당시에는 좀 판타지였을 듯하다. 현실을 잊고 연극을 보거나 소설을 읽으며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된다면 오히려 좋은 게 아닌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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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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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어떤 사람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헤어진다. 실제로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하다. 오랫만에 만나면 어떻게 살았는지 듣는다. 대체적으로 함께 이야기하면 좋은 정도다. 너무 흥미롭거나 빠져들 정도는 아니다. 무난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쩌다 만나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그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거나 생활 속에 들어가는 경우는 없다. 소설 <면도날>은 그런 면에서 작가가 단순히 관찰자 입장에서 머물지 않고 중요할 때마다 만나고 조언도 한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엘리엇이 주인공으로 알았다. 책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다. 철저하게 작가인 내가 만나고 보고 들은 이야기를 서술한 소설이다. 심지어 자신이 특정 내용은 어느 정도 각색을 했거나 윤색했다는 뉘앙스가 있지만 고백한다. 들은 이야기라 불안정하다고. 엘리엇은 상당한 부자다. 기본적으로 거의 매일 파티를 즐긴다. 자신이 직접 개최하기도 하고 초청받아 참여하기도 한다. 부동산을 구입하고 투자로 수익을 내며 미국과 유럽에 여러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

엘리엇은 작가를 만났지만 그다지 유명하지 않기에 처음에는 다소 탐탐치 않았다. 여러 번 만나면서 점차적으로 친하게 지낸다. 그건 아마도 작가가 갖는 특성 때문이 아닐까한다. 소설을 쓰는 작가는 예술적 심미안을 갖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다양한 문화와 에술에 대한 조언이 깊은 경우가 많다. 이건 돈이 있다고 가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단순히 부자는 천박하다. 돈만 있는 부자는 귀족에 끼지 못한다. 예술적인 소양을 갖춰야 귀족이 아니라도 대접을 받는다.

엘리엇은 그렇게 작가와 친해진다. 엘리엣에게는 조카인 이사벨을 만난다. 더없이 발랄하고 얼핏 천진난만하지만 가난을 모르고 살았다. 부자까지는 아니지만 엘리엇을 통해 여러 도움을 받으며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다. 그는 결혼을 약속한 래리가 있다. 래리는 전쟁에 참여해서 전우가 죽는 모습을 보며 세상에 대해 새롭게 인식한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이사벨 마음과 달리 어딘지 결혼에 대해 미적거린다. 무엇보다 번듯한 직장을 가지려 하기보다는 한량처럼 살려고 한다.

가능했던 이유는 어느 정도 유산을 받아 어렵지 않게 살고 있다. 풍족하지 않지만 아끼며 살면 살아갈 수 있다. 래리는 직장을 얻기보단 자신에 대한 탐구를 원한다. 이사벨이 간청을 하지만 유럽에서 1년 정도 생각도 하며 시간을 보낸 후 돌아오겠다고 말한다. 그 후에도 특별한 일이 없다면 직장도 잡고 결혼도 하자며 이사벨은 말한다. 래리는 영혼이 자유로운건 아니다. 그가 원하는 건 구원도 아니다. 알 수 없는, 잡히지 않는 뭔가를 찾고 싶은 순수한 욕망인지도 모른다.

래리가 한 행동을 엘리엇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사벨이 래리와 헤어지길 바란다.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불편한 심기는 내비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사벨이나 작가에게만 말할 뿐이다. 래리는 유럽에 거주하면서 연락도 하지 않는다. 래리가 이사벨을 사랑하는건 맞다. 래리에게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이라 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래리에겐 본능이라 할 수 있는 욕망을 억누르는 절제가 있다. 책을 읽어볼 때 래리가 성욕이 있는지 여부는 확실히 모르겠다.

이사벨이 자신에게 향한 마음을 알지만 외면하는건 아니다. 그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 마음 속에서 찾아야 할 뭔가를 찾지 못하는데 다른 건 크게 의미가 없다. 육체적 어려움이나 막노동도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육체노동을 통해 힘든건 자신이 찾는 구도를 위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먹고 살아야 하니 일을 한다. 그런 면에서 경제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작가가 말한다. 당신에게 금전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후회할 것이라고 작가 자신이 그걸 너무 잘 안다고.

래리는 자신이 갖고 있는 돈을 다 버리고 뭔가를 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췄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는 나도 속물이라 너무 찬성한다. 굳이 고난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각자 추구하는 삶의 의미가 다르니 이건 가치 영역일 수 있다. 정답은 없다. 결국에 이사벨과 래리는 헤어진다. 정확히는 이사벨이 포기한다. 제대로 된 일을 하는 사람과 만나 결혼하길 원한다. 그건 이사벨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래리가 나쁜 것도 아니다. 각자 선택한 길이 다를 뿐이다.

래리와 작가, 작가와 이사벨, 엘리엇과 작가는 그런 식으로 몇 년에 걸쳐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엘리엇은 이제 작가를 만나게 된다면 기꺼이 자신의 속마음도 말한다. 이사벨은 작가와 더할 나위 없는 친구가 된다. 작가도 이사벨이 좋다. 단순하다면 단순하지만 말이 통한다. 작가는 그렇게 셋이랑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에게 가교역할도 한다. 이사벨은 래리를 여전히 사랑한다. 사랑이 먹을 걸 주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다.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래리가 살아온 인생을 전부 내가 소개하긴 너무 방대하다. 그는 유럽에서 탄광에서도 일한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그가 찾고 싶은 건 없었다. 다소 신비주의에 가까운 영을 추구했다. 누군가 알려준 인도로 간다. 그곳에서 자신에게 직접적인 정답을 준 구도자를 만난건 아니다. 구도자는 선문답처럼 대화를 하지만 래리에게 영적인 충만함과 스스로 찾아 갈 길을 제시한다. 정확히 제시했다고 보다는 래리 스스로 찾았지만 덕분에 찾았다고 느꼈다는 게 맞지 않을까 한다.

이 모든 과정을 작가답게 무려 500페이지나 되는 분량으로 쏟아낸다. 작가가 직접 경험한 것인지, 창작한 허구 인물인지는 모른다. 래리는 결혼할 뻔도 하지만 그건 사랑보다는 측은지심에 좀 더 가까웠다. 이사벨은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만 자신이 사랑한 래리를 쉽게 놔주지도 않는다. 래리가 그 사실을 알았는지 모르겠다. 래리는 영적으로 충만한지 몰라도 세상 이치는 오히려 몰랐던 것이 아닐까. 저 높은 곳을 보면 낮은 땅에서 벌어지는 일은 소홀하게 된다.

여기까지 말하면 래리는 영적 지도자가 되어 살아 갔을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다. 아니다. 래리는 그런 삶을 살지 않는다. 아니다. 모르겠다. 작가는 래리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다. 래리가 청년으로 살아간 삶은 안다. 래리가 좀 더 나이를 먹어 중년이 되었을 때까지는 모른다. 래리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일반인과 비슷하게 살아가는 삶을 택한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영적 전도를 했을까. 소설에서는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청년으로 살며 경험한 인생을 통해 나이들어 보여지는 삶이 아닐까한다.

까칠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젊고 튼튼하고 미래 생각하지 않으면 가능한 삶
친절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진정한 인생과 삶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사는게 의미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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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216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강훈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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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우리가 영국이라고 부를 때는 단일 국가다. 영어로 잉글랜드로 할 때와 United Kingdom는 다르다. 잘 모르는 사람은 영국으로 생각하지만 각기 다른 국가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를 합쳐 유나이티드 킹덤이라고 한다. 이들은 같은 영어권 국가일 뿐 각자 다른 국가로 전쟁을 최근까지 했었다. 지금은 과거를 잊고 각자 살아가는 듯하지만 여전히 서로 축구 경기 할 때보면 으르릉거린다. 월드컵할 때도 서로 각자 국가팀으로 출전한다.

그 중에서도 아일랜드는 상당히 많은 작가를 배출했다.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를 비롯해서 제임스 조이스도 아일랜드 작가다.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스>로 유명한데 읽는게 극악무도하게 힘들어 쉽게 책을 선택하기 힘들다. 제임스 조이스의 책을 그나마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더블린 사람들>이다. 제목만 볼 때 몰랐지만 막상 책을 읽어보니 단편소설을 엮었다. 총 15편의 단편소설이다.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서로 연관이 1도 없다.

공통덤을 찾자만 전부 아일랜드 더블린에 사는 사람들이다. 제임스 조이스가 그곳에서 태어나 그런지 소설의 배경을 더블린으로 한 경우가 많다. 책에 나온 15편의 배경이 더블린이다. 보통 단편을 엮을 때 그 중에서 하나를 대표 제목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제임스 조이스가 의도한 것은 아닐진대 너무 자연스럽게 단편소설을 대표하는 단어가 되었다. 모든 내용을 소개하기는 힘드니 그 중에서 '가슴 아픈 사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깔끔할 듯하다.

제임스 더피가 주인공이다. 그는 주로 집에만 머물러 살아간다. 무엇보다 제임스 더피는 무질서한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자신의 통제하에 놓인 걸 선호한다. 너무 익숙한 듯 직업이 은행원이다. 은행원은 정해진 틀에서 시간을 칼처럼 맞춰 일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숫자를 세는 직업일수록 정확함이 생명이다. 하루 일상이 칼처럼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저절로 간다. 이는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의 성격을 직업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게 한 장치다.

게다가 제임스 더피는 동료도, 친구도, 교회도 나가질 않는다. 혼자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과의 만남은 아주 최소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 접촉할 뿐이다. 크리스마스와 같은 행사나 경조사에만 참석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어 하는 행동일 뿐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평탄한 하루 하루를 보낸다. 그에게 익사이팅한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런 일이 생길 일도 없고 하루 종일 루틴도 뻔하니 부딪칠 일도 없다. 그런 그에게 특별한 일이 생겼다.

남자에게는 역시나 여자를 만나는 것만큼 흥미진지하고 익사이팅한 일은 없을 듯하다. 제임스는 극장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다소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보이는 시니코였다. 텅빈 극장에 사람이 너무 없다고 말한 시니코가 한 말을 대화로 받아들였다. 그 후로도 여러 연주회에서 다시 만난다. 그녀는 이미 결혼을 한 시니코 부인이었다. 서로 몇 번의 만남을 유지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다.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할 수 있을까.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제임스는 자신의 천성을 버릴 생각이 없던 인물이다. 또는 그가 만나 시니코는 제임스를 변화시킬 정도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제임스에 비해서 시니코가 좀 더 적극적인 만남이었다. 어쩌면 그 점이 제임스에게 맞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자기 생각이 확고한 제임스 입장에서는 누군가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걸 반기지 않았다. 서서히 스며들듯이 제임스 원 안으로 들어가 어느 순간 시니코가 떨어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제임스는 시니코가 자신에게 한 행동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과 생활에 함부로 침입한 사람으로 여긴 듯했다. 사람은 세월이 흘러가며 변한다. 천성은 변하지 않을 수 있어도 다양한 면에서 나이에 맞게 변한다. 남들 눈에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제임스는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온 삶을 더 중시한 듯했다. 시니코에 대해 그는 거절한다. 더 가까이 오려는 시니코를 의식적으로 밀어내며 관계를 끝내버리며 헤어진다.

시니코 입장에서는 좀 친해졌다고 생각한 제임스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을 듯도 하다. 자신에게 한 행동에 모멸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제임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시니코를 삭제했다. 원래대로 루틴대로 제임스는 살아가며 아주 평범하게 지내고 있었다. 우연히 부고기사를 보기 전까지는. 어느 여인이 기차역에서 사망했다. 플랫폼에 기차가 움직이는데도 철로를 걷다 사망했다. 그녀가 바로 시니코였다. 부고기사에는 2년 전부터 술에 취해 폭음하며 살았다고 한다.

제임스가 한 여인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한 것일까. 자신은 그 이후 아무 일도 없이 평안하고 평온하며 일상을 살고 있었다. 기억조차 못하고 있던 시니코는 전혀 딴판으로 고통스럽게 살았다. 둘 사이에 생긴 일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듯하다. 지금까지 아주 평범하게 살던 제임스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까. 그건 전적으로 제임스에게 달려있다. 소설에서는 제임스가 흔들리는 걸로 나온다. 해당 역사를 찾아갈 정도로 마음이 흔들리고 요동친다.

<더블린 사람들>에 나온 단편소설은 전부 끝이 뚝 끊긴다. '소설이 이제 끝났구나'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게 한다. 우리 일상은 소설처럼 마무리가 확실히 되지 않는다. 매일같이 어떤 이벤트가 끝나도 삶은 이어진다. 그처럼 소설은 전부 읽다가 순간 끝이 난다. 그는 행복하다, 슬프다. 이런 식으로 종결은 없다. 그는 밥을 먹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이다. 단편소설이라 집중하며 읽을만하면 내용이 끝나 연속성이 없다는 점이 힘들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까칠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집중하는 게 조금 어렵다.
친절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여러 단편을 통해 인간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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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172
알베르 카뮈 지음, 김예령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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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에 있든 누구와 만나든 이방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리에 속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인간은 군집 생활을 하는 동물입니다.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한편으로 누군가에게 독립되어 살기를 원합니다. 종속된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경계 어딘가에서 살아가는 것이 제일 좋지 않을까 합니다. 좀 더 집단에 가까운 사람이 편할 수 있겠죠. 집단에서 떨어져 있다는 이야기는 내가 선택할 수도 있지만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주체적으로 선택하면 좋지만 반대인 경우가 대다수죠. 

아무리 내가 주체적인 삶을 살아도 사람들에게 이방인으로 느껴지는 순간 외롭습니다.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꼭 좋다고 할 수 없어도 혼자 살 수 없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이방인이 되는 순간 잘못하면 낙오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오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보통 이방인이라 하면 나와 다른 사람을 의미합니다. 대부분 다른 국가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하지만요.

소설 <이방인>은 읽어보면 작가의 정체성과 연관이 있는 듯도 합니다. 작가가 알제리에서 태어난 사람이니이까요. 아마도 프랑스에서 살았어도 그 점은 평생 자신의 정체성이 되었겠죠. 책 초반에는 엄마의 죽음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 내용 자체가 이방인과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주인공은 엄마를 양로원에 보냈습니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흔한 일이 아니었던 듯합니다. 더구나 엄마가 죽었다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보편타당할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슬퍼하고 애도하는 것이 당연하겠죠.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니 말이죠. 주인공은 그런 면에서 다소 독특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나에게 집중하는 사람이 아닐까 말이죠. 엄마가 돌아가셨어도 본인은 일도 했기에 피곤합니다. 굳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의지대로 행동합니다. 솔직히 저는 그게 큰 문제일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건 이미 결과이며 과거죠. 당장 피곤하고 힘든 건 현재의 내 상태고 말이죠.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는 건 기쁜 일은 분명히 아닙니다. 슬픈 일이지만 그걸 담담히 맞이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주인공은 그렇게 어머니를 떠나보냈습니다. 편하지 않더라도 잠도 좀 잤고요.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요? 그건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주인공이 할 노릇을 못한 건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전부 했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전부 치렀으니까요. 여기까지 본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이 내용이 소설의 초반에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별게 아닐 수도 있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다지 인상적인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충분히 주인공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을 했고요. 함께 있던 분 중에는 큰 소리로 우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건 그곳의 원장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는 양로원에 모인 사람이라 누군가 사망을 하면 다들 좀 더 감정이입을 하면서 힘들어한다고요. 그런 이유로 될 수 있는 많이 모이게 하지도 않고 빠른 시간 내에 장례식을 끝낸다고 말이죠. 그렇기에 빨리 끝낸 거죠.

주인공은 그 후에 다시 업무에 복귀합니다. 여기서 또다시 당시의 현실은 지금과 다를 것이라 봅니다. 지금 같으면 휴식을 좀 취하고 마음을 정리한 후에 회사에 나오라고 했을 겁니다. 작은 회사에 다니는 주인공에게 그런 호사는 사치입니다. 장례식으로 가기 위해 회사에서 빠지는 것도 엄청 눈치 보이고 힘든 일이었으니 말이죠. 다른 누구도 아닌 어머니의 사망인데도 말이죠. 그런 후에 인간의 감정과 본능이 사라질까요? 그건 아마도 사람마다 다소 다르지 않을까 전 봅니다.

주인공은 사귀는 여자가 있습니다. 결혼을 약속하지 않았지만 여자는 주인공에게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집에 왔을 때 합니다. 주인공은 그러자고 합니다. 꼭 결혼할 생각은 없지만 여친이 결혼하자면 그렇겠다고 합니다. 연애하며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는 관습도 인류 역사에서 그다지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여친이 자기를 사랑하냐고 묻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하죠. 그러면서도 결혼하자는 이야기에는 그러자고 합니다. 또한 함께 정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엄마 장례식을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렇게 하는 건 죄악일까요? 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본능이라는 게 있습니다. 굳이 일부러 피한 것이면 모를까. 그렇지 않았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여친은 장례식에 참여하지도 않았습니다. 주인공이 알려주지 않아 그랬겠지만요. 사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이 중요할까요, 아닐까요? 아마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 인생은 아주 평범하면서도 일상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똑같은 일이라도 어떤 의미를 부여하면 그때부터 완전히 달라집니다. 주인공이 했던 모든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아주 지극히 평범하게 자신의 일상을 살아갔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일생에 몇 번 경험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죽음이 있었고요. 이후에 주인공에게는 아주 끔찍한 사건이 생깁니다. 그건 바로 살인을 저지른 겁니다. 피해자는 아랍인이었습니다. 아랍인은 분명히 프랑스에서 이방인입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알제리 사람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프랑스 사람이라고 느껴지고요. 굳이 피해자를 아랍 사람으로 한 것은 그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볼 때 별문제가 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방인을 살해한 것이니 말이죠. 그것도 계획된 것이 아닌 우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끔찍이도 불행한 사건이 생긴 겁니다. 감옥에서 살긴 하겠지만 별일 없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주인공은 여기서부터 뭔가 다른 일이 펼쳐집니다.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은 자신의 주관이 확실합니다.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나 의견을 존중하지만 자신과 일치하려 하지 않습니다. 너무 뚜렷하게 자신의 생각이 확실합니다. 이런 점이 일반 사람과 일치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죠. 뚜렷한 주관은 대체적으로 무리와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사람은 이방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를 때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배척할 때 그는 이방인이 되어 버리는 거죠. 도대체 주인공에게 무슨 큰 잘못이 있었기에 재판 결과로 사형 판정을 받았을까요? 그 부분은 직접 읽어보시고 판단하세요.

까칠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남과 달랐을 뿐인데?
친절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이방인도 똑같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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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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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는 1800년대 후반에 미국을 살아가는 흑인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토니 모리슨이 쓴 소설이다. 흑인이라는 정체성과 미국에서 벌어지는 흑백 갈등에 대해 한국에 살고 있는 나는 크게 와닿지 않을 때가 있다. 미국을 가 본적도 없기 때문에 미묘한 차이를 알기는 더욱 힘들다. 과거에 흑인은 노예였다. 하나의 상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점은 꼭 흑인이 아니라도 한국에서도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명확한 구분이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나 누가 노예였는지 여부를 파악하기 힘들다. 다 비슷하게 생겼으니 알 길이 없다. 심지어 양반 가문이라고 해도 이걸 확인하기도 쉽지 않다. 반면에 흑인은 너무 명확하다. 과거에 흑인은 무조건 노예였다. 노예가 아닌 흑인은 있을 수 없었다. 좋은 주인을 만나 노예지만 인간적으로 대할 수는 있을지언정. 흑인을 미국에 데리고 온 목적 자체가 노동을 시키기 위해서다. 백인이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건 분명히 아니다. 좀 더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서라고 할까.




흑인이라는 점은 피할 수 없는 증명이 된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모든 흑인은 무조건 노예다. 노예는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하나의 물건이다. 언제든지 필요에 의해 사고 팔 수 있다. 더구나 가격이 그렇게 높다고 할 수도 없다. 인간은 죽어서 쓸모가 하나도 없다. 돼니나 소는 죽은 후에 쓸모가 아주 많다. 그러니 흑인은 살아있을 때 가치는 인정받지만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젊을수록 쓸모가 있고, 나이를 먹을수록 필요가 없어진다.


젊은 흑인 남자는 그런 면에서 쓸모가 아주 많다. 백인은 흑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짐승으로 봤다. 분명히 자신들과 이야기도 할 수 있는 존재인데도 인간으로 보질 않았다. 철저하게 쓸모에 따라 이용했을뿐이다. 심지어 흑인 여성은 아이의 젖을 주는 역할로 기능을 했다. 자신의 아이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었다. 일을 해야 했기에 다른 아이에게도 젖을 먹어야했다. 추가로 단순한 모성이 아닌 잉태의 기능이 중요했다. 많은 아이를 낳으면 전부 주인에게 도움이 된다.




혈기왕성한 남성에게 성욕을 풀어주는 역할까지 해야한다. 이렇게 인간성보다는 기능적으로 존재했다. 남성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오로지 일해야 하는 기능만 중요하다. 노예를 데리고 있는 주인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흑인을 팔아버린다. 그 돈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 그럴 때 철저하게 노예의 상태가 중요하다. 얼마나 젊은지 여부는 일하는데 있어 핵심 중 핵심이다. 말을 듣지 않아 흑인을 죽이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심장이 뛰는 일도 아니었다.


백인이 흑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죽이는 건 너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양심의 가책 따위는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볼 때 기르는 가축보다 못하게 여긴다고 해야할까. 이런 정서를 여전히 미국에서 갖고 있는 백인도 있다. 이걸 단순히 흑인에만 국한하지 않고 유색인종으로 확대해서 품고 있다. 이를 대놓고 드러내지 않을뿐. 드러냈을 때 자신에게 돌아오는 후폭풍이 과거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어보면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있을 때 흑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지 알게 된다.


너무 끔찍하고 살고 싶지 않을 듯하다. 본인이 그렇게 태어났고 너무 당연하다고 여기기에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인간이기에 생각할 줄 안다. 지신의 처지에 대해 자살을 생각할 정도다. 아니 생각을 넘어 실행하는 사람도 있다. 죽는 게 살아있는 것보다 편하기 때문이다. 이를 무엇이라 하기에는 생존하는 의미가 너무 다르다. 제목인 빌러비드는 사람 이름이다. 세서는 흑인 여성이다.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며 계속 살아간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함께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기도 했다. 또한 빌러비드 같은 경우에는 알 수 없는 존재다. 흑인으로 태어나는 건 축복일 수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흑인인 경우에는 결코 유쾌하지 않다. 어떤 삶이 펼쳐질지 눈에 선하다. 주인에게 도망치던 세서는 그런 이유로 자신의 여자 아이가 죽게 내버렸다. 또는 죽였다. 가슴에 묻었다는 표현이 아니다. 그 후에 덴버를 낳고 스위트홈에서 살아간다. 그곳은 자유를 찾아 도망간 남편의 엄마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죽은듯이 살아가고 있었다.


폴디가 그 집에 찾아와 함께 3명이 살아간다. 어느날 어느 흑인 여자가 찾아왔다. 그는 빌러비드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덴버는 자신의 언니라는 걸 알게 되고 세서도 알게 되면서 서로 간장감이 흐른다. 이렇게 볼 때 소설은 판타지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죽은 딸이 시간이 지나 생존했을 때의 나이로 왔다는 사실. 빌러비드의 존재를 서로 알아본다. 소설은 그러면서 세서의 숨겨진 진실과 흑인이 어떤 식으로 살아갔는지에 대한 내용을 소개한다. 더 놀라운 건 이 내용은 마거릿 가너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아이들을 노예로 만들지 않기 위해 죽였다는 사실이다. 소설 뒷 부분에 흑인으로 살지만 노동에 따라 돈을 받는다. 받은 돈으로 물건을 사고 거스름 돈도 받는다. 이게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폴 디의 이야기가 나온다. 너무 당연한 건데 이게 가능하다는 점에 폴 디가 느낀 감정이 내겐 오히려 생소하게 받아들여진다. 소설에 나온 모든 내용이 전혀 와닿지 않을 정도로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최소한 눈에 보이는 차별은 없어졌다. 이런 소설을 볼 때 미국에서 흑인과 백인의 반목은 쉬운 건 아닌 듯하다.




인간다움을 박탈당한 삶은 어떨까. 일을 해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주인이라도 결국에는 흑인으로 대할 뿐이다. 인간보다 못한 취급을 안 할 뿐이지 노예로 대할 뿐이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 착한 주인이라고 다를 건 없다. 결국에 흑인 노예는 노예일 뿐이다. 인간이 아닌 특정 기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 겨우 100년이 살짝 지났을 뿐이다. 한국에서도 100년 전에는 똑같았다. 소설을 읽으면 읽기 어려워 안 읽히기도 하지만 답답해서도 안 읽힌다.


까칠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지금 이곳에서 태어나 다행이다.

친절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정말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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