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 / 이숲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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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쓴 책이다. 헤밍웨이는 널리 알려진 책을 많이 쓴 작가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노인과 바다>등은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아도 제목을 알 정도다.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고, 무명일 때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헤밍웨이가 아직까지 소설가로 명성을 얻기 전 이야기다. 헤밍웨이 자신이 직접 쓴 에세이다. 파리에서 머물며 집필하던 때에 벌어진 다양한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작품을 선 보이지 못할 때라 경제적으로도 다소 궁핍했다. 다양한 곳에 기고를 해서 받은 원고료로 먹고 살 때다. 신문사 특파원으로 있었기에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먹고 살았다. 아직까지 장편을 써 본 적이 없어 주로 단편 위주로 집필하던 때라는 걸 읽으면 알 수 있게 해준다. 파리는 어딘지 낭만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기본적으로 프랑스어가 갖는 나근나근함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아닐까한다. 정작 프랑스어는 많이 쓰지 않는데 말이다.


파리는 워낙 문화와 관련된 것들도 많다.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을 내가 이용하고 활용해서 감상하는 등의 행동을 해야만 의미가 있다. 헤밍웨이도 분명히 그런 문화활동을 한 것 같은데 그런 부분은 별로 나오지 않는다. 그보다는 헤밍웨이 주변 인물과 자신의 집필 활동에 대해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알려준다. 그 중에서도 역시나 가장 인상적인 건 스콧 피츠제럴드와 함께 한 에피소드다. 책에서 둘이 함께 한 경험이 분량상 꽤 많이 차지할 정도인데 이미 스콧은 유명한 때였다.


아직까지 헤밍웨이는 본인이 쓴 작품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력은 주변에서 인정한 듯하다. 스콧은 이미 쓴 소설인 <위대한 게츠비>가 유명해져서 경제적으로도 그다지 어렵지 않은 때였다. 아마도 그런 점 때문에 어느 정도는 헤밍웨이가 자격지심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여기서 나오는 스콧은 그다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안고 다소 이상하게 그려진다. 특히나 스콧의 부인은 더욱 그렇게 그려진다. 언제나 술을 즐기는 부인이고 스콧의 집필을 방해한다.


스콧이 집필하는 것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는 게 아닌가한다는 게 헤밍웨이의 판단처럼 보였다. 스콧이 집필만 하려하면 못되게 굴면서 방해한다. 스콧도 역시나 다소 이상한 성격을 갖고 있다. 둘이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아 헤밍웨이 먼저 기차를 타고 떠난다. 뒤늦게 온 스콧은 그다지 미안하다는 말도 없다. 여행에서도 몸이 안 좋아 해열제 등을 찾아야 하는데 헤밍웨이에게 가져오라고 한다. 프런트에 말했느냐는 이야기도 계속 묻고 말이다.



더구나 더 신기했던 것이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서양 사람과 차이가 아닐까 한다. 스콧이 어느 날 헤밍웨이에게 묻는다.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 불만을 부인이 갖고 있다고. 부인이 자신의 물건이 작다고 불평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스스럼 없이 카페에서 둘이 한다는 점도 신기했다. 더 신기했던 건 그 다음 장면이었다. 둘은 함께 화장실에 갔다 온다. 그 후에 헤밍웨이가 스콧에게 너는 정상이라고 말한다. 둘이 함께 화장실에 가서 직접 확인을 하고 온 것이었다.


그러면서 전혀 문제가 없고 오히려 부인이 스콧에게 기싸움을 하는 것 같다고 알려준다. 여전히 스콧이 아니라고 우긴다. 헤밍웨이가 어떻게 알 수 있냐고 하면서. 그러자 헤밍웨이는 파리에 있는 조각상을 보라고 이야기한다. 조각상에 묘사한 것과 크기 차이가 거의 없다고 설명한다. 그래도 아니라고 하자 둘이 함께 파리에 있는 유명 조각상을 직접 가서 확인한다. 이 에피소드는 다소 신기하고 한국 정서로는 거의 없는 일이라서 꽤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었다.


또한 책 전반에 걸쳐 헤밍웨이 부인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도 나온다. 둘이 함께 자주 여행도 다니고 돈이 없는 상태에서도 아껴 다닌다. 어디를 갈 지 함께 의논도 한다. 그랬는데 책 후반부에는 다른 여자와 결혼까지 생각하는 묘사가 또 나온다. 내가 읽은 책이 소설이 아닌 에세이라 자신의 직접 다 겪은 경험을 한 내용인데 그런 것도 쓴다는 점이 놀라웠다. 역시나 작가란 무조건 자신의 이야기에서 모든 걸 출발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소재가 없으면 영혼을 끌어서라도 해야하는 숙명같다.


분명히 미국인인데도 당시에는 상당히 많은 미국인이 파리로 넘어와서 집필활동을 한 듯했다. 워낙 파리가 문화의 중심지라서 당시에는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가들도 파리 등에서 활동할 때이긴 했다. 집필을 할 때는 대체적으로 카페에서 작업을 한다. 책을 읽어보면 각자 자신의 카페가 있어 그곳으로 다른 작가는 서로 노터치였던 듯하다. 어떤 작가가 모 카페에서 집필한다면 그곳을 가지 않는게 에티겟말이다. 그래야 집필하는데 있어 방해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책에서 나온 헤밍웨이는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글을 써야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책을 읽으며 느껴지는 건 담담하게 자신이 해야 할 걸 했다는 점이다. 매일 하루 중 집필하는 시간에는 무조건 집중하고 나름 할당된 양을 채워야만 그 다음 일을 했다는 점이다. 무척이나 근면 성실하다고 할까. 위대한 소설가 헤밍웨이가 되기 전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에세이로 읽으면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까칠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재미없는 에피소드도 많다.

친절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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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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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여러 인종이 다함께 살아가는 국가다. 지금은 많은 국가가 그러하지만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문화가 한국에 다른 국가보다 알려져 있기 때문에 좀 더 친숙하다. 지금도 미국에서 백인과 흑인 사이에 벌어지는 여러 문제가 뉴스에 나온다. 아마도 개인으로 만날 때는 큰 문제가 없지만 흑인과 백인이라는 집단으로 만날 때 문제가 터지는 듯하다. 서로가 건드리면 안 될 부분이 있다. 그걸 건드릴 때 큰 폭발이 일어나면서 미국 전체적으로 들고 일어서면 난리가 난다.



<앵무새 죽이기>는 배경이 아마도 1940~50년대가 아닐까한다. 흑인과 백인은 서로 명확하게 거주공간과 업무가 구분되어 있다. 서로가 서로를 으르릉 거리며 못잡아 먹어 난리는 아니지만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흑인과 백인이라고 딱히 구분하지 않고 잘 지내는 사람도 있지만 극렬히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생기는 사건에 대해 보여주는 소설이다. 사건 자체가 소설의 핵심은 아니라는 점이 또 이 책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한다.



책의 주인공은 스카웃으로 변호사 아빠인 애티커스 핀치와 젬 오빠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칼퍼니아는 흑인이다. 스카웃은 늘 오빠와 함께 학교를 가고 오며 논다. 집에서도 늘 오빠와 함께 놀거리를 찾아 다니며 주변 인물에게도 흥미를 갖고 관찰한다. 스카욱은 아이다우면서도 아이답지 않게 당차고 똑똑하다. 무엇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균형잡혔다. 아직까지 누구의 이념에도 젖어들지 않았기 때문인데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내용이 책의 주요 핵심이다.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 이미 글자를 보고 말할 줄 아는데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에게 혼난다. 집에 가서 아빠에게 글자를 가르쳐주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당한다. 글자는 학교에서 배워야 하기 때문이란다. 한국에서는 선행학습으로 미리 다 배우고 학교에 들어간다는 걸 생각하면 새삼스럽다. 시대가 다르다는 점도 있지만. 스카웃이 억울한 건 아빠에게 글자를 배우지 않았다. 자신이 스스로 습득한 것이니 말이다. 스카웃의 불만과 달리 선생님에게 혼나기 싫어 침묵해 버린다.



스카웃 주변 사람들은 여자답지 못하다며 못마땅해 한다. 아빠만이 스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 아직은 어린 아이라서 걱정을 하지만 스카웃이 하는 것과 관련해서 호불호없이 받아들인다. 책에서 스카웃이 올바르게 자라며 사고를 갖게 된 건 아빠 덕분이 아닐까했다. 어린 아이의 눈에는 어른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스카웃 주변에 있는 어른들은 자신 입장에서는 이상하다. 늘 뛰어다니고 여러 친구와 만나 노는데 진심인 스카웃과 달리 늘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점 등이 그렇다.

책의 중반까지 스카웃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을 소개한다. 스카웃이 살고 있는 동네 인물을 비롯해서 어떤 성향이고 가족 상황인지 알려준다. 그 후에 문제가 터진다. 흑인인 톰에게 문제가 터진다. 그가 저지른 사건이 예삿 일이 아니다. 그는 흑인인 상황인데 백인에게 위해를 가했다. 흑인이 흑인에게 위해를 가해도 문제인데 백인에게 한 행동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야 하지만 사람들은 결코 그런 식으로 사건을 보지 않는다.



무엇보다 흑인이라 국선 변호사가 해야 하지만 판사가 핀치에게 사건을 맡긴다. 비록 백인이지만 피해자 가족이 밥 이웰이기 때문이다. 밥 이웰은 동네에서도 평판이 안 좋고 바닥까지 떨어진 인간이라서다. 밥은 일 자리도 불성실해서 금방 짤리고 동네에서도 기피대상이다. 그 집 아이들도 학교를 학기 첫 날에만 다니고 더이상 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톰이 했다는 사건이 진실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좀 더 공평하고 확실히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핀치에게 맡긴걸로 보인다.



누구나 법을 잘 모르니 대신해서 변론받을 권리가 있다. 동네에서는 누구도 톰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핀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맡았지만 될 수 있는 한 내용을 발설하지 않는다. 소설에서 가장 하이라이트인 법정 내용은 흥미진지하다. 철저하게 법정에서만 톰과 관련된 내용이 전개된다. 그 전까지는 어떤 일이 생겼는지 힌트도 주지 않는다. 짧다면 짧은 시간 내에 톰의 상황에 대해 핀치가 알려주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저절로 깨닫게 만든다.



법정에 있는 사람이 침을 꼴깍 넘기고 숨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다. 책을 읽으면서 손을 놓지 못하고 읽었지만 이런 과정 자체를 스카웃의 눈과 귀와 생각으로 보여준다. 어린 아이인 스카웃이 볼 때 무엇이 정답인지 유추하게 만든다. 특히나 오빠와 함께 티격태격 할 때도 좀 더 공정하게 본다는 생각도 들 정도다. 이럴 때 소설에는 해당 사건과 관련되어 분개하는 사람 위주로 묘사한다. 인간을 탈을 쓰고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한다는 점이 다소 위선적이라는 느낌도 들게 만든다.



제목인 앵무새는 원제로 볼 때 앵무새는 아니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흉내지빠귀과인 새로 노래만 불러준다. 한국에서 처음 번역할 때 앵무새가 되면서 그냥 굳어지고 말았다.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아마도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카웃 입장에서 모든 걸 보여줄 뿐이지 작가가 개입하지 않는다. 스카웃이 어린 아이라 그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건 확실히 어른과 다르다. 그런 점이 책을 읽을 때 조금은 균형있게 벌어지는 상황을 보게 만들어준다.



얼마든지 누군가를 나쁜 사람으로 몰 수도 있는 사건이 생겼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건의 전후를 모르는 스카웃 입장에서 묘사된다. 거기서 한 발만 더 들어가면 누군가를 나쁜 놈으로 묘사할 수도 있다. 소설에서 나쁜 놈이 나오긴 하지만 그마저도 담담하다. 치를 떨며 나쁜 놈이라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다. 미국인 사랑하는 소설 1위에 선정되었다고 하는 건 역시나 균형있게 흑인과 백인의 관계에 대한 설명 덕분이 아닐까한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니 한 번 읽는다면 푹 빠져 읽지 않을까한다.



까칠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뭔가 뚝 끊어지며 끝난다.

친절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미국의 과거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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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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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인 <오만과 편견>에서 이미 모든 걸 알 수 있게 해준다. 책을 막상 읽고 나서 제목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다 초반이 지나며 제목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뭔가에 대해 판단을 내릴 때 오만이나 편견은 둘 다 무척이나 위험하다. 오만이라는 것 자체가 내가 남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오만은 스스로 알 수 없다. 남들이 볼 때 내리는 판단이 이날까. 편견도 역시나 자신이 그런 판단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편견이라 할 수 있다.



내가 편견이라는 걸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그때부터는 편견이 아니다. 균형있게 보지 못하는 시선을 가졌다는 뜻이다. 막상 편견이라는 걸 알게 되어도 자기도 모르게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한 번 잘못되어 머릿속에 심어진 인식이라는 건 그만큼 강력하다. 책은 문학소설로도 유명하지만 영화로도 널리 알려졌다. 제목과 어울리지 않게 로맨스 드라마라고 해도 된다. 1800년도 로맨스라 그런지 지금처럼 엄청 로맨틱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나마 생각보다 여성이 주체성을 갖고 뭔가를 결정한다는 사실은 솔직히 좀 의외였다. 소설의 내용은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하다. 짝짓기라고 할까. 남녀가 어떻게 하든 상대방을 만나 결혼하는 게 지상과제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은 전부 하인 계급은 아니다. 각자 받을 것이 있는 사람들이다. 받을 것이라는 건 상속내지 자산을 의미한다. 결혼하는데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요소다. 흥미롭게도 아주 꺼리낌없이 서로 어느 정도를 상속받을 수있는지 이야기를 한다.



어느 정도 자산을 갖고 있다는 것도 역시나 다들 이야기를 할 정도로 서로 알고 있다. 한국적인 정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서양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을지라도 일찍부터 돈이나 자산에 대한 이런 태도가 자본주의를 태동시킨 원인이 아닐까한다. 10대 중반부터 이미 결혼을 해서 집에서 나갈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엄마의 최대 목표도 어서 빨리 좋은 신랑을 만나 집에서 나가게 하는 것이다. 단순히 결혼은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닌 가문이라면 가문의 결합이라 어느 정도 수준도 맞아야 한다.



수준이 맞지 않아도 서로가 좋아한다면 괜찮겠지만. 그나마 책에서는 정략결혼은 나오질 않는다. 서로가 상대방에게 호감을 갖고 사랑을 해서 결혼하는 걸로 나온다. 다만 그 사랑이라는 부분이 지금과는 다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서로 상대방을 만나고 알게 되고 감정을 확인하고 연애를 하다 결혼을 하는 현대사회와는 다르다. 대체적으로 남자는 선택하고, 여자는 선택을 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엄청나게 대단한 감정도 아니고 단순히 상대방에 대한 호감정도면 된다.



남성이 여성에게 호감을 가지면 그것으로 충분한다. 여성도 남성에게 호감을 갖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괜찮다. 남성이 청혼을 하고 여성이 거절할 수도 있고, 승낙할 수도 있다. 대체적으로 남성은 여성에 대한 호감을 갖고 청혼을 한다면 여성도 어느 정도 호감을 갖긴 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다소 정략적으로 승낙하기도 한다. 실제로 연애한 후에 결혼하는 과정이 인류 역사에서 그다지 오래된 제도는 아니다. 대부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모들의 합의를 통한 결혼이었다.



엘리자베스와 디아시가 주인공이다. 엘리자베스는 상당히 수동적으로 살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갖고 생활한다. 결혼적령기가 되었기에 많은 남자들이 있는 파티 등에 참여를 한다. 가기 싫어도 엄마의 성화와 주변의 눈치를 볼 때 안 갈수도 없다. 그런 곳에서 여러 남자를 만난다. 딱히 남자를 만나 꼭 결혼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진 않는다. 대부분 여자들이 어떻게 하든 좋은 남자와 연결되기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다르다. 주변에 있는 남자는 뻔하니 군인같은 경우가 최고다.



남성들과 여성들은 서로 견제를 하기 마련이다. 자신이 마음에 드는 이성을 자기에게 끌어들이기 위해서 상대방에 대한 험담도 한다. 이런 작전이 통하기도 하는데 바로 엘리자베스가 그런 경우다. 엘리자베스는 위컴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마도 디아시가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아니었을까. 디아시는 무엇보다 자산이 빵빵하고 신분이 낮지도 않다. 모든 여성들에게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다. 위컴과는 서로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지만 현재는 틀어졌다.



사람을 판단할 때 백지 상태일 때와 달리 백지에 뭔가를 그린 후에 보게 되면 인상깊게 머릿속에 남게 된다. 그렇게 위컴의 이야기는 엘리자베스에게 강력히 남아 디아시에 대해 백지상태로 보지 못한다.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어떤 편견을 갖고 보게되면 달리 보인다. 위컴은 더할나위 없이 친절하고 사교성있게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디아시에 대한 이미지를 심어 놓은 상태였다. 엘리자버스는 무척이나 당돌하다면 당돌하고 자기 주장도 확고하고 똑부러지는 성격으로 보인다.



예의도 있고 아마도 예쁘게 생기지 않았을까. 그런 이유로 여러 남자들에게 호감을 얻는다.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하는 남자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콜린스였는데 다소 오만하고 자신을 상황을 자랑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모습이 별로였기에 거절하지만 그런 모습이라도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여긴 다른 여성은 받아들인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모습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엘리자베스의 관점에서 소설은 그려지고 내용이 전개된다.



막상 디아시와 엘리자베스의 만남이나 서로 함께 하는 장면은 많이 나오진 않는다. 또한 엘리자베스 자매들의 다양한 소동도 함께 다뤄진다. 다양한 결혼을 보여주기도 하고 당시 시대에 어떤 식으로 남녀가 만나고 결혼을 하는지 알게 된다. 책에는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준다. 엘리자베스가 디아시에게 갖게 된 편견은 그의 인간성까지도 오해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알게 된 후에는 너무 죄스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 내용이 꽤 방대한데 의외로 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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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4
루이스 캐럴 지음, 김민지 그림, 김양미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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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유명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이게 고전 문학으로 되어 있지만 동화기도 하다. 이상하다는 표현처럼 뭔가 특이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도 든다. 나도 이제서야 제대로 읽었다. 유명세에 비해서 전체 내용에 대한 부분은 잘 모른다. 여왕이 유명하고, 토끼가 나온다는 점 정도가 익숙한 내용이다. 그 외에는 앨리스가 어떤 식으로 그곳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모른다. 이번에 읽으면서 확실히 그 부분을 알게 되었다.

앨리스는 우연히 하얀토끼가 뛰어가는 걸 재미삼아 쫓아간다. 딱히 할 일도 없는 앨리스 입장에서 너무 당연한 선택이었다. 토끼가 굴 속으로 들어가 뛰어 들어갈 때 끊임없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이 장면의 묘사는 어떻게 볼 때 많은 현대 영화에서 보여주는 타임라인처럼 느껴졌다. 굴을 빠지면서 두개의 시간축과 공간이 변하는 모습인 듯했다. 별 생각없이 쫓아 들어간 토끼가 사실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인지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가장 큰 이유는 소설 원전이 아닌 팀 버튼과 같은 후대의 예술가가 토끼를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포지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토끼는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에 인도하는 역할이라 해도 틀리진 않다. 이상한 나라라는 표현처럼 이곳은 참으로 이상하다.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별로 이해가 되지 않을 행동을 한다.  거기에 있는 모든 인물이 다 이상하지만 앨리스도 결코 만만치 않다. 어린이라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지만 참 당돌하고 맹랑한 아이라는 표현이 딱인 듯했다.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 별로 망설임이 없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거침이 없다. 그렇게 볼 때 전형적인 서양인같기도 하다. 아마도 앨리스가 한국에 있었다면 이상한 아이로 볼 수도 있었겠다. 왜냐하면 이상한 나라에서도 이상하게 보인다. 이상한 나라의 모든 존재가 이상하기에 정상적인 앨리스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앨리스 자체가 이상하다. 특이하다는 표현이 좀 더 올바를 듯한데 이상한 나라에서 또 이상한 아이니 특이하다는 표현이 좀 더 적절한 듯하다.

무엇보다 이 곳에서 앨리스는 단 한 번도 정상적인 몸을 가질 때가 없다. 아주 살짝 있었을 뿐이다. 언제나 많이 크거나 아주 작다. 아이다운 행동이라 할 수 있는데 중간이 없는 행동을 한다. 자신도 이유를 모르고 커지고 작아진다. 어느 정도 뭔가를 먹으면 그렇게 된다는 걸 알게 된다. 적당히 조금씩 먹어 조절하면 될텐데 그런게 없다. 냅다 많이 먹어 커지거나 작아진다. 그렇게 된 후에는 언제나 후회한다. 후회하자마자 또 워낙 낙천적이라 큰 신경을 안 쓰는 모습도 보인다.

뭔가 무척이나 어린이답게 생각을 딱히 하지 않고 입에서 곧장 나온다. 쥐와 이야기할 때도 그렇다. 아무 생각없이 자기 집 고양이 이야기를 한다. 쥐가 무서워하자 미안하다고 하면서 또 다시 신나게 고양이 이야기를 한다. 쥐가 싫어하면 또 다시 깨닫고 미안하다고 한 후에 자기도 모르게 또 고양이 이야기를 한다. 어른인 내 관점에서 볼 때와 달리 어린 아이인 앨리스 입장에서는 당연해 보인다. 그저 생각나는대로 자기 감정에 충실해서 이야기를 하는게 아이니 말이다.

실제로 이상한 나라에 고양이가 존재한다. 고양이가 어떻게 볼 때 제일 매력적인 캐릭터다.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느낌도 든다. 다른 존재와 달리 고양이는 유일하게 어느 곳이든 나타나고 사라진다. 움직인다는 느낌보다는 홀연히 스며들듯이 나타나고 휘날리며 형체가 사라지는 느낌이다. 더구나 고양이와 대화는 이상한 나라에서 만난 어떤 존재와는 달리 가장 정상적이고 선문답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이상한 나라에 신이 있다면 고양이로 보였다.

마지막에 왕과 여왕이 다 모인 곳에 재판이 이뤄질 때 고양이가 다시 나타난다. 이때에 하늘에 있다. 왕과 여왕은 고양이를 처음 본 것처럼 행동한다. 앨리스는 그곳에 처음 갔는데도 고양이를 만나 대화를 했는데 거의 절대자인 왕과 여왕이 오히려 처음 본 것처럼 행동하니 신기했다. 중간에 공작부인이 나온다. 아주 괴팍하고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공작부인이 여왕이라는 착각을 했다. 곧 공작부인이 꽤 괜찮다는 느낌도 받는다. 앨리스의 말을 아주 잘 듣는다.

오히려 문제의 여왕이 나온다. 결국에는 이것도 편견이 나를 사로잡았다. 원작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다양한 여왕의 모습을 본 상태라 여왕이 아주 못 되고 괴팍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뭐,, 맞다. 여왕은 아주 이상하다. 여왕만 이상한 게 아니라 왕도 이상하다. 정상적인 존재가 한 명도 없는 곳이니 이상하지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까. 즉흥적으로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한다. 걸핏하면 죽이라는 명령까지 할 정도인데 정작 죽는 존재는 없는 듯도 하다.

다들 너무 익숙한지 몰라도 잽싸게 다 도망간다. 쫓으라고 하지만 곧 사라지면 포기한다. 아마도 이런 일이 매일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다. 오래 기억하지도 못하고 그때 뿐이다. 그 순간만 넘어가면 모든 게 끝난다. 그렇게 볼 때 다들 내일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 날 벌어진 일은 그 날만 지나면 전부 삭제된다. 반대로 볼 때 참으로 행복한 삶이다. 어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하지 않는다.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다. 

이상한 나라의 존재들은 그렇게 다 이상하다. 이상한 나라에서 인간은 앨리스가 유일하다. 앨리스도 자유자재로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그곳에서 유일한 인간이니 다른 존재일 뿐이다. 쭈우욱 읽다보면 어떤 식으로 결말이 일어날지 별로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다. 아무런 징조도 없다. 현실에 돌아온 앨리스는 좀 허탈하기도 하다. 이상한 나라에서 현실로 돌아온 앨리스가 갈 때와 달리 올 때는 너무 눈깜짝할 새에 눈을 떠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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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모던 컬렉션 시리즈 3
버지니아 울프 지음, 정미화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이다. 하룻동안 벌어지는 일이다. 댈러웨이 부인이 제목에 있으니 당연히 댈러웨이 부인을 기준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고 생각했다. 막상 소설을 읽으니 이게 꼭 그렇지 않았다. 댈러웨이 부인을 기준으로 다양한 인물이 나온다. 보통 이렇게 인물이 나올 때는 댈러웨이 부인의 관점에서 본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면 각자의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중심은 댈러웨이 부인이 된다. 이 소설을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 소설은 모더니즘 작품이다. 뭔가 거창하게 느껴지는데 의식의 흐름대로 소설이 전개된다. 이런 형식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대표적이다. 읽고자 욕심만 내고 엄두를 내지 못한 소설이다. <댈러웨이 부인>을 읽어보니 역시나 이유가 있었다.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읽었더니 소설의 내용을 쫓아가는 것이 힘들었다. 댈러웨이 보인이 파티를 주최하고 끝내는 것까지 전체 내용이다. 그럼에도 읽는데 어려운 이유는 단 하나였다.

소설에서 새롭게 인물이 등장하면 해당 인물의 관점에서 모든게 진행된다. 댈러웨이 부인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댈러웨이 부인의 생각과 시선에 따라 진행된다. 그러다 새로운 인물이 나오면 그 인물의 관점과 생각과 시선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한 마디로 댈러웨이 부인과는 1도 상관없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예를 들어 댈러웨이 부인이 누군가를 만났다. 그렇다면 보통 댈러웨이 부인 관점에서 상대방을 묘사하고 서로 사건이 진행된다. 상대방의 생각이 나올 때가 있어도.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갑자기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면 그 사람 관점에서 모든 게 진행된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관점에서 댈러웨이 부인과 사연이나 생각에 대한 것도 아니다. 그런 부분도 나오긴 하지만 그때부터 자신의 생각이 흐른다. 댈러웨이 부인에 대해서도 아직 잘 모르는데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알려주기 시작한다. 그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 틈도 없이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난다.

또 다른 인물이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해댄다. 이러다보니 솔직하게 책을 다 읽었지만 이렇다하고 기억나는게 많지 않았다. 의식의 흐름대로 내용이 전개된다고 할 때 내가 제대로 의식이 없었나 보다. 그나마 제목에 등장했으니 댈러웨이 부인과 셉티머스가 제일 비중을 많이 차지한다.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주최하며 사람들을 초대한다. 초대하지 않았지만 셉티머스가 러시아에서 돌아온다. 댈러웨이 부인과 썸이 있었는데 현재는 헤어진 상태다.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표현처럼 현재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 상태다. 셉티머스는 다른 여자와 사귄걸로 나오는데 여전히 댈러웨이 부인에 대해 잊지 못하고 있다. 또는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댈러웨이 부인을 보는 순간 자신의 마음을 확인한다. 군인이었으나 현재는 낙오자라고 할 수 있는 상태였다. 셉티머스에 대해서는 꽤 길게 설명하는데 그마저도 다소 빠른 시간 내에 퇴장한다. 그러니 뭔가 특정한 인물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뭔가 적응 되기도 전에 다른 인물로 교체된다.

또한 초반 적응이 힘들었던 건 달러웨이 부인이라고 호칭이 나오지 않고 클라리사라고 한다. 풀 네임이 클라리사 댈러웨이 부인이다. 그러니 친근하게 부를 때는 클라리시고, 격조 있게 부를 때는 댈러웨이 부인이다.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작품을 볼 때 대체적으로 주인공과 주변 몇 명의 인물로 좁힌다. 그래야 작품을 보는 사람이 어렵지 않다. 우리가 누군가를 새롭게 알게 되면 한동안 그 사람을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각자 살아온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모임에 갔을 때 바로 옆에 있었던 사람을 제외하면 기억도 남지 않는다. 그 사람마저도 이야기를 좀 했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다시 만나도 가물가물하다. 실생활에서도 이럴진대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더욱 심하다. 그러니 최대한 인물을 좁혀 설명한다. 그렇게 해도 주인공이나 기억한다. 이를 방지하는 건 비중있는 조연이거나 인지도 있는 사람이 출연할 때다. <댈러웨이 부인>은 그런 면에서 읽기 힘든게 당연하다. 내가 이 책을 읽어 단 한 명도 제대로 인지를 못하고 있다. 댈러웨이 부인이나 셉티머스도 그나마 이름이 자주 나와 기억하는 정도일 뿐이다. 실제로 그들이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이 책에 대해 이런 표현이 있다.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롭다.' 그럴 수밖에 없다. 보통 어지간해서 같은 책을 2번 읽는 경우가 없다.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내용을 굳이 또 읽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다. 그렇다면 <댈러웨이 부인>은 또 읽을 필요가 없을까. 그 관점에서 본다면 또 읽어도 분명히 새로울 듯하다. 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읽을 때마다 새롭다면 그것도 괜찮다고 본다. 워낙 명성이 높은 책이라 내가 읽었다는 건 분명히 인식한다는 점이 거부할 듯하다.

이 책을 읽으려고 도전할 때마다 너무 힘들게 읽었는데 또 읽어야 할까..하고 말이다. 한편으로는 댈러웨이 부인은 파티를 주최할 정도로 풍요로웠다. 자신에게 최대의 일이 바로 파티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그건 당시에 어느 정도 사는 집에서는 당연한 일과였다. 그게 꼭 무료한 삶을 버티는 힘은 아니라고 본다. 당시를 살아가는 삶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언제나 맥락을 알아야 누군가를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댈러웨이 부인의 맥락을 제대로 몰라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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