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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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작품 해설에 의하면 - 아직 작품 해설을 읽지는 않았다 -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파우스트를 읽으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인지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감흥도 오지 않았다. 파우스트라는 작품이 어제, 오늘 갑자기 뜬 베스트셀러도 아니고 몇 백년이라는 시간을 단련되고 검증받은 작품이다. 

 

파우스트는 수 많은 사람들이 읽고 -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작품해설에 나온 이야기는 분명히 사람들이 느끼고 읽은 것에서 얻은 공통적인 이야기를 한 것이라 보면 내가 읽은 파우스트는 전혀 그러하지 않게 느껴졌으니 이것은 분명히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것이다.

 

파우스트를 1권과 2권으로 나눠져 있는 책으로 읽다보니 한 권씩 리뷰를 쓰게 되어 다소 구분되어 쓰게 된다는 점은 있다. 지금은 2권의 리뷰를 쓰게 되는 시간이다. 대체적으로 대하장편 드라마와 같은 경우에는 주인공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맞지만 미니시리즈보다는 주인공이 나오는 장면이 많지 않다. 워낙, 긴 호흡으로 드라마가 이어지다보니 주인공뿐만 아니라 주변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을 한다.

 

주인공만 나오고 주인공의 이야기만 하게 되면 긴 호흡으로 가는 문제가 있다. 영화같은 경우에는 아예 주인공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도 있을만큼 러닝타임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만큼 파우스트는 대작이라고 하면 대작이라 할 수 있어 - 당시를 생각하면 이렇게 긴 작품이 많지는 않았을테니 - 파우스트가 주인공이라도 꼭 모든 장면에 나오고 극을 이끌어 가야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파우스트를 읽으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가 도대체 파우스트가 왜 이리 등장을 하는 장면이 적느냐였다. 심지어 몇 십페이지를 넘어가도 파우스트는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면, 무대 어딘가에서 존재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읽기로는 그랬다. 다양하게 변신을 거듭하는 메피스토펠리스가 오히려 더 많은 장면에서 등장을 한다.

일견, 그렇게봐도 무방한 것은 파우스트와 거래를 한 메피스토펠리스가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해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예초에 파우스트에게 거래를 제안한 메피스토펠리스가 없었다면 이야기가 시작되지도 진행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거래를 승낙한 파우스트가 없었다면 마찬가지였다. 둘의 관계는 공생이라 할 수 있다. 서로 상대방이 없었다면 존재자체가 무의미할 수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존재의 이야기를 언급했으니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맞는 것인가?)

 

열심히 읽으면서 - 실제로 열심히 읽지는 않았다 잘 읽히지 않아 - 파우스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유심히 보는 편이였는데 개인적으로 도대체 왜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리스와 거래를 성사시켰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딱히, 파우스트가 원하는 것이 없었다. 파우스트는 악마와 거래를 하여 인간의 욕망을 이룬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후에 많은 문학작품과 현재의 대중문화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작품으로 생각되는데 그에 비하면 파우스트라는 작품에서 파우스타가 원하는 욕망은 모호하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먼저 의식주의 해결이다. 의식주가 먼저 해결되어야 그다음의 욕망이 생겨난다. 파우스트는 딱히 의식주를 갈급한 인물은 아니였다. 의식주가 해결되면 다음으로 명예, 사랑등등이 따라올 것이라 본다. 대체적으로 대부분의 현대 문학에서는 악마와 거래하는 이유가 잘 먹고 잘 살기위해서이다. 또는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서인데 대체적으로 명예욕을 만족하기 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이유가 많다.

 

파우스트는 딱히 그런 점에서 특별한 이유를 찾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그가 메피스토펠리스와 거래를 한 이후에 가장 슬퍼하고 애타게 찾는 것은 사랑으로 보였다. 대부분 첫 눈에 반한 이성에게 꽂혀 사랑을 하려 하지만 매번 사랑을 얻지 못한다.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하지만 결국에는 혼자가 된다. 매번, 메피스토펠리스의 농간에 의한 좌절을 겪는다. 이렇게 보면 파우스트는 사랑을 찾는 한 인간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똑똑하고 지식으로 가득차 있고 어느정도 의식주가 해결되는 파우스트에게 부족한 부분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이였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어봤을 때 파우스트가 딱히 명예를 추구한 것 같지는 않다. 상당히 높은 자리와 자산을 갖게 되었지만 간절히 원하고 바라던 바는 아니였던 듯 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얻게 되었을 뿐이지.

파우스트가 무엇인가를 꼭 갖고 싶어 눈을 반짝이는 장면은 없다.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을 때 간절히 원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른 부분은 간절히 원하지 않아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았을 뿐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만났을 때 삶의 의미가 달라지고 살아가야 할 의미가 부여된다. 어김없이 슬픈 결말로 사랑이 이뤄지지 못하고 아주 짧은 추억만이 남았지만 추억이라 불릴 수 없는 회한만이 남을 뿐이다.

 

전쟁이 일어나고 전투가 치뤄지고 파우스트는 일정 역할을 메피스토펠리스와 더불어 해 내는데 왜 그 장면이 필요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그런 상황에 뛰어들어 업적을 세우기 위한 방편이였을까? 평시에는 업적을 세워 명예를 드높힐 기회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 전쟁이나 전투가 아니고는 이름을 널리 알릴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현대는 꼭 전쟁이나 전투가 아니라도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 이유로 전쟁이나 전투가 과거보다 덜 생기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름을 드높힐 기회지만 거꾸로 볼 때 한 방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전쟁이나 전투보다는 본능적으로 다른 영역으로 통해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러한 다양한 인간의 욕망을 현대사회에서는 풀어낼 수많은 기회가 눈꼴사나울 수 있어도 한편으로는 덕분에 인류가 보다 풍성해지고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파우스트는 죽고 메피스토펠리스는 처벌(??)을 받게 되는데 인간의 죽음은 그가 어떠한 업적을 남겼는지와 상관없이 죽음으로 끝이 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어떠한 업적을 남겼는지에 따라 후세에 대대로 그의 이름과 업적이 내려오게 된다. 한편으로 그의 후손이 대대손손이 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전승하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지금 살아가는 존재들은 엄청난 환경을 이겨낸 승리자들이다.

 

메피스토펠리스는 당시 시대상을 볼 때 권선징악적인 요소를 마지막에 넣었어야 했을 것 같은데 현대의 작품에서는 그런 요소를 굳이 넣지 않는다. 어떤 선택이든 인간의 결정이였고 얼마든지 멈출 수 있는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에게는 갈수록 본인에게 책임을 묻는 시대가 되어버린 시대상이 아닐까한다. 

 

파우스트를 읽게 되었지만 제대로 파우스트에서 이야기하려는 점이나 괴테라는 대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고 올바르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아니, 정확하게는 단 하나도 모르겠다. 남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 것이 아닐까하는 점도 있지만 수 많은 사람들중에 나같은 생각으로 읽은 사람이 어디 나뿐이랴. 작품은 작가가 쓰지만 작품의 해석은 오로지 내 몫인걸.

 

 

파우스트 1편의 리뷰 http://blog.naver.com/ljb1202/20222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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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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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우리는 괴테라는 부르기 편한 이름으로 호칭하고 있는데 괴테의 대표작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등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베르테르 효과를 알고 있는 것처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어 볼만큼 분량이 짧지만 '파우스트'는 워낙 유명한만큼 실제로 책을 읽은 사람들은 많지 않고 그저 '파우스트'라는 제목만 알고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머리속이 약간 뒤죽박죽이라 순간 '유리알 유희'가 떠오르면서 분명히 다른 작가의 작품이라 기억되는데 떠오르지 않아 찾아보니 헤르만 헤세의 작품이였다. 둘 다 독일작가라 혼동을 했던 듯 하다. 괴테는 가장 유명한 두 작품 이외에도 꽤 유명한 명언들을 많이 남겼고 살았던 당시의 평균수명에 비하면 긴 82세까지 생존을 했다.

 

단순히 괴테의 작품으로만 알고 있던 '파우스트'는 사실 순수한 창작품이 아니다. 당시 독일지역에서 전설과 민담처럼 전해져 내려오던 이야기를 괴테가 새롭게 구성하고 창작한 작품이다. 이런면에서는 세익스피어와 비슷하다. 세익스피어의 많은 작품들이 현재 불멸의 작품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모든 창작품의 영감을 주고 있지만 세익스피어도 내려오던 이야기를 했던 것과 같다.

 

위대한 작가들이 위대한 작품을 세상에 내 놓게 되었는데 둘 다 그런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볼 때면 창작하는 사람들이 역시나 꼭 새로운 것을 하려 하기보다는 기존에 있던것을 얼마만큼 자신의 능력범위에서 잘 버무리고 다듬고 새롭게 선 보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듯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작자의 역량이 무척 중요한 요소이기는 해도 말이다.

더구나 파우스트를 읽다보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너무 친숙하고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세익스피어의 작품과 같이 소설형식이 아니라 희곡대본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재는 많이 사라졌다고 느끼는데 특유의 번역체라는 것이 있다. 아무래도 외국어를 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특유의 미묘한 맛을 살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한데 예전에는 그런 점이 더욱 도드라져서 분명히 국어임에도 불구하고 국어처럼 읽히지 않는 번역이 많았다.

 

그나마, 소설은 읽어 나가면 되기 때문에 직독직해식의 번역이라도 큰 무리가 없는데 '파우스트'와 같은 희곡 작품들은 우리나라 말로 제대로 번역되지 않다보니 작품이 공연될 때보면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으로 대사가 나온다는 느낌을 갖게 될 때가 많은데 워낙 거장의 작품인 세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그런데 파우스트에서도 그런 점을 느끼게 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17~18세기 작품을 읽는다거나 하면 지금 쓰는 말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도 여전히 판소리를 듣게 되면 우리가 현재 쓰는 말과는 달라 분명히 한국말이면서도 이질적으로 들리는 것과 같다. 그만큼 예전 작품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올 수 밖에 없는 요소이기는 해도 너무 우리 실생활과 동 떨어진 번역체의 대사가 갖는 이질적인 느낌은 '파우스트'에서도 그대로 느껴진다.

 

파우스트가 소설형식이 아니라 희곡형식으로 되어 있어 세부적인 묘사가 생략되다보니 읽는 사람입장에서 다소 여유를 갖고 읽게 되지만 그만큼 생략되는 세부적인 묘사는 읽는 사람이 알아서 채워넣어야 한다. 공연으로 올려졌다면 연출자의 몫이고 보이는 것을 쫓아가며 이해해야하겠지만 글로 읽는 사람들로써는 오롯이 순수한 본인의 몫일 뿐이다.

파우스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드라마틱하게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어떤 사건들이 일어 날 것이라 지레짐작을 했던 듯 하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읽고 느낀 감정이나 평론가들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설명과 평론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파우스트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순수하게 내가 읽으면서 든 생각을 적으려고 하는데 먼저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이 맞는가 하는 점에서 약간 의아한 측면이 있는데 그건 최근의 작품들이 워낙 드라마틱하게 악마와 계약을 통해 무엇인가 얻으려고 하는 점을 묘사하는데 반해 파우스트는 너무 밋밋하다. '이게 끝??'이라는 심정이 들만큼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리스가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이뤄진다.

거창한 점은 전혀 없고 '해 볼래?'라고 물어보니 '한번 해 볼까?'하는 식으로 이야기되는데 파우스트가 딱히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악마로 대변되는 메피스토펠리스와 계약을 했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악마와 계약을 할때면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얻기 위해 하지만 무엇인가 잃는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한다는 파우스트 이후의 작품들에 비하면 말이다.

인생에 있어 반드시 무엇인가를 강렬히 원해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려야하는 상황도 아니였지만 파우스트의 서두를 보고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볼 때면 파우스트는 엄청난 지식인으로 스스로 뛰어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어 악마가 유혹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인간인 네가 그렇게 잘 났다는 말인가?하면서 말이다.

특별히 원하는 것이 없는 파우스트가 처음으로 생긴 감정은 사랑이다. (특별히 원하는 것은 없었는지 몰라도 불만은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사랑!사랑!사랑! 인류의 가장 큰 골치꺼리이자 행복이자 인생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감정이 생긴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은 이제 원하는 것이 생겼다는 의미가 된다.

그다지 원하는 것이 없던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갑자기 원하고 바라고 욕심이 생긴다. 내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 해주고 싶다는 욕망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어버린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런 이유로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사랑은 영원히 인간에게 불멸로 남는 주제이고 소재이다. 닳아도 닳지 않는 무궁무진한 무엇인가이다.

사랑이 영원하고 무엇인가 의미로 존재하려면 대부분 작품에서 사랑은 짧아야 한다. 짧은 사랑의 경험과 추억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그런 인간은 어떤 쪽으로 튀어버릴지 모른다. 본인도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인간 스스로 다스릴 수 없는 감정은 인간을 파멸시키기도 하지만 인간을 성장 또는 발전시키고 넓게 나가서 인류를 퇴보시키기도 하고 발전시키기도 하는 위대한 비물질(??)이다.

파우스트 1부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리스와 계약을 하고 파우스트가 사랑을 하게 되고 불행에 빠지게 되는 여정이다. 파우스트는 무척이나 이성적이고 똑똑한 인물이지만 감정에 빠지게 된다. 감정은 이성을 지배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이게 악마의 유혹인가? 단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사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은 악마의 괴략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작품에서.

이제 겨우 도입부를 읽었다고 할 수 있어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2부까지 읽어야 정확하게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아직까지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영혼을 팔았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나 느낌은 들지 않는 것은 그만큼 현대가 워낙 당시보다 독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어지간한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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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신화전설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
위앤커 지음, 전인초.김선자 옮김 / 민음사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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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화는 딱히 대단하고도 신기한 측면은 많지 않다. 우리와 비교할 때도 비슷한 놈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리스 신화가 참으로 뛰어난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는 듯 하다. 서양 사람들의 정신 세계를 알기 위해 그리스 신화와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허언이 결코 아니다. 

 

중국도 문학이나 스토리라는 측면에서는 결코 뒤 떨어지지 않을것이라 여겨지는데도 중국 신화들은 딱히 대단할 것이 없다. 아니면, 이미 어릴 때부터 조금씩 들었던 내용들이 나오다보니 딱히 새롭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측면이 있는지도 모른다. 2권에서는 좀 더 신화라고 할 수 없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들이 사자성어나 옛 이야기로 듣거나 중국의 위대한 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는데 이런 부분들이 나오다보니 아마도 참신함이 떨어지게 느껴졌고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보다 신비로운 요소들이 삽입되어 있을 뿐이다. 인간이 할 수 없는 내용이나 기이한 현상을 제외하면 익숙하게 알고 있는 내용이였다.

 

진시황제의 이야기와 제자백가중에 공자와 묵자, 노자에 대해 설명한다. 대체적으로 중국신화전설 2권은 이들이 살고 있는 시대배경을 바탕으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보니 다양한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언급되지만 이미 뻥이라는 것을 알고 읽게 되어 김빠진 콜라를 먹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책을 읽게 된다.

 

중국 신화 전설이라 이야기를 하며 나오는 인물들이 현실에서 실제로 존재 했던 인물이 이미 인간으로써 신화적인 요소를 배제되고 역사적 인물로 역사를 통해 배웠던 인물이다보니 책에 나오는 신비로운 요소들을 읽으며 저런식으로 당시에는 용비어천가와 같은 신비로운 요소를 삽입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 보게 만들었다는 판단이 든다.

고대까지는 가지 않지만 지금으로부터 상당히 오래 전의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현대에 사람이 비하면 참으로 잔인하고 허장성세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인의와 충의와 같은 대의를 위해 살던 시대였고 그러한 쇄뇌를 받으면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주군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이 말이다.

 

또한,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넘겨주고 원수와 함께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점도 그렇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인의 목숨같은 것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 즉시 죽여버리는 행동을 볼 때면 지금 이 곳에서 살고 있는 내가 얼마나 다행이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감사하게 된다.

 

자신의 억울함이나 결백함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깨끗함을 알리기 위해 누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칼에 자결하거나 자신의 모든 가족들을 죽이고 진정한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행동하는 것을 볼때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보다는 솔직히 저렇게 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내가 너무 소심하거나 현재의 인간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정으로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어떻게 나보다 임금이 먼저 될 수 있고 대신해서 죽을 수 있나? 갈수록 그런 위대한 정신이 사라지고 있다고 안타까워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소중한 내 인생을 무엇때문에 그런 결정을 해야 하는지 나로써는 절대로 절대로 이해되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다.

 

대부분 아주 아주 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높고 높은 사람들의 이야기라 그들의 정당성과 권력을 곤고히 하기 위한 신화와 전설로 뒤덮여 있는 측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 판단이 들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통해 주군에 대한 충성을 당연하게 여기고 부모의 원수 갚는 것을 자신의 목숨만큼 중요하게 생각한 사회적인 문화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중국 신화와 전설에 대한 이야기지만 신화와 전설로써의 이야기적인 재미는 좀 작다. 중국다운 허세와 뻥이 좀 심하다고 느껴지는 측면은 있지만 그리스 신화와 같은 크리에티브적인 내용은 다소 드물다. 중국이라는 엄청난 땅 덩어리와 다민족 사회로 볼 때면 이 정도 밖에 안되었을까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이다. 

 

거짓말을 조금 더 보태서 김용의 영웅문 씨리즈가 더 기발나고 중국인의 정체성에 부합되는 신화와 전설이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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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신화전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
위앤커 지음, 전인초.김선자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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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마다, 민족마다, 지역마다 자신들만의 신화와 전설이 존재한다. 신화라는 말을 하면 현실과는 동 떨어진 이야기로 의심할 수 있어도 신화와 전설이 떠 돌던 시대 상황과 맞아 떨어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도, 신화와 전설이 처음 퍼 졌을때는 저잣거리의 아낙네들이 하는 소문으로 치부하거나 재미삼아 이야기하는 흥미거리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고 발전하여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소문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장 그럴 싸한 음모론마저 사람들이 동감을 표명하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결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증거이다. 음모론에 나오는 이야기는 너무 그럴싸하기 때문에 보고 듣는 사람들이 전부 100%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믿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신화와 전설도 당시에는 그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이 과학이 발달하지 않고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이 사회를 지배하던 당시라 거기에 맞는 이야기들이 각색되고 윤색되어 전파되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위정자들이 자신의 치세와 업적을 자랑하거나 숨기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한 측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 본다.

 

이러한, 신화와 전설은 당시에는 어느 정도 신비감을 주면서 사람들에게 경외감마저 전달했겠지만 시대가 흘러 사실이 아니라 신화와 전설로 구전되어 내려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100% 믿지는 못해도 그랬을 것이라 추측하고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은 현대의 음모론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을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많은 신화와 전설이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그리스 로마 신화이다. 실제로는 그리스 신화를 로마에서 이름만 변경해서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그리스 로마신화로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로마의 현명함도 볼 수 있지 않을까도 싶다. 이름 하나만 살짝 얹었을 뿐인데.

 

중국에도 당연히 신화와 전설이 있을 것이지만 그다지 많이 알려진 것이 없다. 중화사상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문화를 자랑하는 중국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화와 전설이 많이 퍼지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은 워낙 철학적인 백가쟁명으로 유명하고 삼국지, 초한지등의 역사와 서유기와 같은 스토리들이 많아 그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신화전설'을 읽어보니 근본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비해 재미가 없다. 이 점이 가장 크다. 오랜 시간동안 살아남은 스토리들은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역시나 사람들이 들으면서 재미있고 교훈도 줄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야 하는데 중국 신화 전설을 읽어보니 중국쪽의 신화들은 그러한 스토리 전개가 조금 어설프고 엉성해서 짜임새가 적어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몰입도를 많이 떨어뜨려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많은 민족들의 신화에는 비슷한 내용들이 많이 있다. 세부적인 내용들은 약간씩 달라도 전체적인 얼개는 비슷한데 그렇다면 얼마나 내용의 완성도가 있느냐에 따라 사람들에게 더욱 현실성을 갖춘 믿음을 부여하게 되지 않나 싶다. 한편으로는 각 민족마다 비슷한 신화와 전설과 동화가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하는 의문도 든다. 또한, 최초의 유포자는?

 

중국은 대륙답게 스케일이 크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런 것에 비하면 중국 신화 전설에 나오는 내용들은 그다지 스케일이 크다고는 할 수 없다. 몇 몇 이야기들에서 나오는 존재들의 크기가 대단하고 정말로??할 정도의 이야기들이 있지만 차라리 무협지가 더욱 스케일이 크다는 생각도 든다고 하면 그래도 신화인데 하는 생각이 들까?

 

중국은 여러 민족들이 섞여 살고 있는 국가라서 각 민족들에서 전해지는 내용들이 많을 것이라 예상은 되는데 의외로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대표적인 몇 몇 민족들의 신화와 전설들을 교차해서 소개하기도 하면서 그들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저자가 설명하기도 하는데 단순하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 자신의 가치판단을 내리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어 그 부분은 개인적으로 약간 거부감이 들었다. 그냥 신화와 전설이니 내용 전달만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말이다. 어차피, 알고 있는데 하면서. 그래도 몇 몇 부분은 그러한 부연 설명을 통해 그렇구나~~하는 점들도 있었다만.

 

책을 집필한 것이 1984년이다. 모든 신화와 전설의 구성이 그런지 몰라도 초반에 신화와 전설을 소개하지만 말미부터는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인물들이 소개된다. 흔히 요순시대라고 이야기하는 시대인데 나오는 인물들이 서서히 인간으로써의 역할과 내용이다. 몇몇 사례에서는 여전히 신화적인 내용들이 구성되어 있어도 말도 안되는 인물과 사건은 발생하지 않는다.

 

우공이산도 나오고 - 그 산을 정성이 갸릇해서 신이 직접 옮겨주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 강태공도 나오는데 전설의 인물로 소개되고 의외로 신화적인 인물보다는 보다 객관적인 묘사를 한다. 또한, 백이숙제의 이야기도 나오면서 점점 신화와 전설이 아니라 현재도 제법 쓰고 있는 한자성어나 인물들이 나오다보니 좀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굳이 볼 때 그리스 로마신화의 상상력은 뛰어나고 기발하고 흥미로운 것이 많은데 중국신화전설은 그 보다는 괴기하고 좀 빈약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이런 신화와 전설을 중국은 살아있는 사람을 통해 충분히 극복하고 더 번영, 번창을 한 것으로 보인다. 워낙 여러 민족이 섞여 있어 각 민족의 신화와 전설이 널리 퍼지도록 방지한 측면도 있지 않을까 싶다. 

 

늘 듣고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신화에 비해 처음 듣는 중국 신화 전설이라 적응하는데 낯설기도 하지만 그림삽화가 있어 보다 괴기스러운 장면들이 직접 연상되어 친숙(??)하기도 한데 가장 가까운 중국의 여러 신화와 전설을 알게 되어 그 자체로도 꽤 괜찮은 읽기가 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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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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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읽고 있는 중에 처음이다. 그동안 읽었던 책은 사실 작가는 알지만 작품을 몰랐거나 작가도 작품도 알지만 이미 다른 방식으로 조금이라도 그 책에 대해 접했던 책들이였지만 세계문학전집을 읽기로 결정했을 때 작가와 작품만 알고 전혀 접하지 못했던 책을 읽고 싶었던 생각이 강했는데 드디어 작가와 작품은 알고 있지만 접하지 못했던 첫 책에 당도했다.

 

솔제니친은 노벨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오랜 기간동안 수용소에 갖혀 있었고 망명도 했다는 사실 정도를 알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당시에 소련에서 사상투쟁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고 공산당은 무조건 나쁜 놈이고 그 중에서도 소련에서 감옥에 있는 사람이니 무조건 우리편인데 그의 작품으로 노벨상까지 받았다고 하니 어딘지 모르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당시에는 명확하게 흑백논리가 횡행하고 있어 우리편이 아니면 무조건 적이였다. 지금이야 러시아라고 하면서 교역도 하지만 당시에 우리는 미국과 함께 자유진영이였고 소련은 공산당으로 대변되는 아주 아주 나쁜 놈들의 우두머리였다. 중국은 별로 존재감이 없던 시절이였는데 이제는 사정이 변화해서 러시아가 예전의 존재감 근처도 못가고 있다.

 

책에서 재미있게도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의 영화 내용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이 나와 상당히 반가웠다. 지금이야 사람들의 관심도 없는 작품이지만 몽타주 기법으로 영화의 기술사적으로도 대단한 작품이고 영화내용적으로도 선상반란에 대한 이야기로 예전에는 참으로 많이 언급되었던 작품이 나와 반가웠고 두번째로 한국전쟁에 대한 언급도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중국이 한국전쟁에 뛰어들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솔제니친의 작품은 노벨상으로 인해 유명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에서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사실에 괜히 반갑고 친근함이 느껴졌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것에서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나 사물을 만나거나 노래를 들은 것과 같은 감정이 아주 잠시 왔다.

수용소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로도 꽤 있고 책으로도 좀 있다. 한 때는 영화들이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많아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작품이나 '빠삐용'같은 작품들도 있었고 최근에 가장 유명한 '프리즌 브레이크'는 아예 수용소를 탈출하는 내용으로 하나의 시리즈가 구성되어 있다. 최근에도 수용소의 부조리한 상황을 사회의 축소판으로 들여다보는 작품들도 심심치 않게 등장을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대부분 어느 정도 예측가능한 자유 주의(??) 사회에서 벌어진 일들이지만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전혀 정보가 없고 알지도 못하는 소련의 수용소, 그것도 공산당 정권 시절의 하루를 그리고 있어 무엇이 다른가에 대한 궁금증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읽어보면 인간 사는 것은 결국에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든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수용소라고 하면 떠 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고 점호받고 식사하고 노동을 하고 다시 들어와 식사를 하고 점호를 받고 하루를 마감한다. 어느 나라의 작품을 봐도 동일하다. 직접 경험해 본적은 없으니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점은 있겠지만 대동소이한 일상이다.

 

딱 하루동안 수용소 안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그리고 있으나 솔제니친의 인생과 결부되어 소설이라 느껴지기보다는 실제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하루로 축약하고 압축하여 보여줬다는 인상이 더 강하게 남는다. 더구나, 직접 수용소에서 체험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묘사할 수 없는 세밀한 장면들이 나오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기본 밑밥으로 작품의 작가가 경험한 바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책을 읽게 되면 도저히 작품의 주인공과 작가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저절로 작가의 상황이였다고 감정이입이 된다. 그에 따라 주인공의 생각과 태도와 행동에 따라 함께 감정의 고조를 겪게 된다. 

책의 배경인 소련의 수용소에서만 겪을 수 밖에는 없는 환경이 묘사된다. 무려 영하 20도의 추위에 제대로 된 낭방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옷이랄 것도 보잘기 없고 신발도 따뜻함은 바랄 수도 없고 발을 덮는 정도이고 음식은 죽이니 아주 작은 환경적인 변화에도 쉽게 자신의 몸이 상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수용소 안에는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별의 별 이유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 각자 억울한 사정도 있지만 이미 수용소라는 환경은 수용소 밖에서의 지위와 환경은 무시된다. 오로지 수용소 안에서의 권력이 중요하다. 그나마, 유일하게 지켜주는 것은 바로 돈이다. 외부에서 돈이 될 수 있는 것이 들어온 죄수는 그 안에서도 남들보다 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다. 수용소 안에서 거기서 거기지만 보다 따뜻한 곳에 있을 수 있고 노역을 가도 편한 것을 할 수 있는 정도면 아주 아주 훌륭한 것이다.

특히, 음식과 관련되어서는 서로 엄청난 에너지를 분출한다. 추위는 어찌 할 수 없지만 음식만큼은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노력하고 먼저 먹으려고 노력을 한다. 그 작은 차이로 인해 인생의 행복까지 느낀다. 각자 알아서 빵같은 것을 숨겨서 몰래 몰래 먹는다. 열량을 보전하지 않으면 이 추위에 버텨낼 방법은 전혀 없다.

의외로 주인공은 끊임없이 빵을 먹는다. 몰래 옷에 숨겨 놓고 죽을 먹을 때 발라 먹기도 하고 너무 배가 고플때도 먹는다. 훔친 것은 아니고 배급을 아껴 먹는 것인데 한편으로 참 신기했다. 잘도 틈틈이 먹어서 말이다. 더구나, 들키면 영창인 상태에서 - 영창을 가면 이 추위에서는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 인간의 생존능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더구나, 다른 죄수들도 각자 그런 부분은 알아서 해결하는 것인지 그에 대한 반응은 전혀 없는 걸로 묘사된다.

밖에 나가 노역을 한 후에 점호가 늦어져 수용소에 늦게 들어가게 되어 이미 좋은 자리와 음식을 선점할 수 없다는 포기감에 일부러 느리게 걸음을 옮기던 죄수들이 자신들말고도 다른 조들도 늦어졌다는 것을 알게된 순간에 엄청난 속도에 자리를 선점하려고 하는 묘사는 애잔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참으로 잘 알려준다. 아무리 빨리 걸으라고 해도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온갖 회유와 협박을 경비병들이 해도 일심단결해서 서로 말없이도 알아서 느릿하게 걷던 죄수들이 말이다.

딱 하루동안 수용소에서 겪는 생활에 대해 묘사를 한다. 여러 날을 묘사할 이유가 없는 것이 탈출은 꿈도 못 꾸는 상황에 - 그 모습으로 영하 20도에 탈출한다는 것은 죽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 하루 하루가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하루만 이야기로 전달해도 사람들은 충분히 알아들을 것이라 본다.

읽으면서 책 제목 자체에서 하루라고 되어 있어 어떤 식으로 작품이 끝이 날지 궁금했다. 잠을 자면서 끝이 나는지 하루에 대한 감상으로 끝이 날지에 대해서 괜히 호기심이 발동했다. 뭐, 딱히 특별한 것은 없고 그렇게 하루가 끝이 났고 주인공은 그렇게 10년을 수용소에서 지냈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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