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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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콘래드라고 읽는 저자의 원래 이름은 유제프 테오도르 콘라트 코제니오프스키이다. 원래 이름에서 느끼는 것과 같이 러시아 출생으로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그 후 고아가 된 후에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넘어가 선원으로써의 삶을 살다 늦은 나이인 서른 일곱에 작가로써 데뷔를 하고 여러 작품을 세상에 내 논 작가이다.

조셉 콘래드도 조세프 콘래드로 읽기도 하고 조셉 콘라드로 읽기도 한다. 어떠한 이름으로 부르던 암흑의 핵심이라는 책을 집어 들기 전까지는 이름도 알지 못했던 작가이다. 오로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1권부터 차례대로 읽다가 순서가 되어 읽게 된 작가였다. 도대체, 이 작가가 왜 세계문학전집의 7번째 순서로 소개되었는지가 궁금할 정도였다. 그토록 유명한 작가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먼저 소개가 되었다는 점이 말이다. 저작권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암흑의 핵심의 저자로써 조셉 콘래드를 알게 되었지만 조셉 콘래드의 작품은 알게 모르게 이미 친숙하게 우리에게 알려져 있고 명작이라 불리우는 작품을 탄생시킨 원작의 저자가 바로 조셉 콘래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처음 다가온 작가이지만 서구사회에서 특히, 영어권 나라들에서는 유명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현대 영화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지욱의 묵시록'의 원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년 전에 이 영화를 볼 때 제목답게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표현을 달고 극장에서 상영할 때 당시 극장에서 새로운 기술이라면 THX사운드가 도입되어 이 영화를 볼 때 그전과는 다른 새로운 음향효과로 영화를 보면서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의 압박이 있었다. 비록, 당시 본 영화가 제대로 된 영화가 아니라 이리 저리 가위질을 당한 영화였을지라도 그 충격만큼은 고스란히 전달이 되었다. 들어갈 때와 달리 극장 상영관이 왜 그다지 껌껌하고 어두웠는지 모르겠다고 생각이 될 정도였다.

그 외에도 로드 짐, 노스트로모, 사보타지, 비밀요원, 결투자들, 알마이에르 가의 광기등 꽤 많은 영화작품에서 조셉 콘래드의 작품이 원작이거나 참고하여 만들어졌다는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조셉 콘래드의 작품을 봤던 것인데 그 작품들의 원작이 조셉 콘래드라는 것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거창하게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고 할 정도는 아니여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람이 그동안 내 주변에 있었는데 내가 알아채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책 '암흑의 핵심'은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이듯이 책을 읽기 전에 지옥의 묵시록을 보고 읽는다면 더 잘 이해가 되고 영상이 뇌리에서 영향을 미쳐 책을 읽는데 있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암흑의 핵심보다는 영어 제목이 Heart of Darkness인 것을 보면 어둠의 심연이나 어둠의 속이라는 표현이 좀 더 다가온다. 나름대로 의역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딘지 모르게 책의 내용을 생각할 때 암흑의 핵심은 오히려 너무 모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암흑의 핵심'은 어느 선원이 자신이 겪은 내용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철저히 글도 선원이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어 선원의 관점에서만 모든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선원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이토록 자세하게 세밀하게 묘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듯 하다. 만담꾼도 이러한 만담꾼이 없을 듯 하다. 다만, 분명히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이토록 재미없게 이야기할 수도 있나하는 생각도 든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흥미를 갖고 들으려면 재미있게 여러 요소를 섞어가며 이야기할텐데 분명히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불구하고 듣는 사람들이 재미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에 괜히 물어봤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책을 읽는 사람들도 알아서 읽으라는 뜻이 될 수도 있을 듯 하다. 이런 경험을 이야기할테니 한번 들어보라는 식이다.

이야기의 화자인 선원이 아프리카 콩고에 가서 겪은 일로써 콩고에서 코끼리 상아를 수집해 오는 한 직원을 데리고 나오는 과정에서 겪은 경험을 이야기해준다. 다른 곳보다 월등히 많은 상아를 수집해서 보내주는 커츠라는 사람을 그곳에서 데리고 나오는데 가면서 커츠라는 사람이 무용담을 넘는 신화와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고 사람들이 그에게 보내는 찬사를 넘는 경의를 알게 되고 그의 이야기가 단순히 지도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격화된 사람의 이야기로 사람들이 받아들인다는 것도 목격하게 된다.

커츠라는 사람이 절대권력을 넘어 신과같은 입지를 그곳 사람들에게 다지고 있고 그가 사람들에게 하는 행동이나 말들도 어딘지 모르게 신비한 말들로 -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갖고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커치를 결국에는 그곳에서 데리고 나온다. 그가 죽은후에도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남아있고 심지어 약혼자마저 그를 경외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끝을 맺는다.

그가 그토록 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있던 지역에서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던 내용을 이야기하고 앞선 무기를 들고서 그들에게 강력하고도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기에 가능했다. 사람이란 일단 하나의 포지션을 획득하고 방향을 설정하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계속 갈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커츠는 분명히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나 이야기들은 분명히 아니였을 것이다. 그가 처음부터 위대하고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좀 더 이익을 얻기 위해 했던 행동에 사람들이 겁을 먹고 공포를 느끼며 자신을 대접하는 걸 느끼는 순간부터 서서히 자신이 스스로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말이 무조건 맞다는 확신을 얻고 사람들에게 전파를 했을 것이다. 콩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처음에는 같은 처지에 있던 백인들에게까지 말이다. 어떤 인간이든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확신은 주변을 전염시키고 어정쩡한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에 어느 순간부터 믿고 따르게 되어있다.

 

이런 자기 확신과 믿음이 좋은 방향으로 전개되면 본인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더 발전된 사회를 이룩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반대 방향으로 전개되면 아집에 빠지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처럼 '나를 무조건 따르라'가 되어서 사회적인 문제까지 발전하게 된다. 순박하고 어리숙하고 세상물정을 잘 모르고 누군가하는 이야기를 금방 믿는 사람일수록 이런 암흑의 핵심과 같은 사람에게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다.

 

'암흑의 핵심'은 콩고라는 곳에 들어간 한 백인이 흑인들을 상대로 벌였고 그 후에 백인들마저 전염이 된 것이지만 그와 달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그때보다 더 고도로 발달이 되었고 온갖 지식이 범람하고 앎의 확장이 넓어졌지만 여전히 혹~~하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한 편으로는 얼마나 스스로에 대한 자기확신이 없고 공허하면 그렇게 쉽게 빠지는 것일까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이 책은 제국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는 작품의 해설이 있다. 실제로 조셉 콘래드도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여러 행동이나 글도 쓰고 몸소 실천했다고 한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을 읽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라 여기고 당시의 상황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에 맞게 내가 생각한 점을 썼다는 것을 밝히며 이만 서평을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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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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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햄릿의 내용은 세익스피어가 초연 당시나 그 이후에 했던 극본과 100%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극장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자산이라 생각하여 대본을 극장에서 소유하고 있어 외부로 유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걔중에 기억력과 암기력이 좋은 사람들에 의지해서 대본이 돌아 다녔다고 하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대본이외에 세익스피어 사후에 극장 내부에 있던 극본까지 합해서 지금 돌아다니고 있어 영국에서도 햄릿의 대본은 3가지 정도가 된다고 한다.

 

문제는 3가지의 극본이 전체적인 극의 흐름이나 내용은 비슷할 지 몰라도 대사등이 달라 캐릭터들의 심리와 생각이 현저하게 다를 수 있어 지금도 햄릿의 내용은 언제든지 새로운 내용으로 선 보일 수 있다고 한다. 햄릿은 저절로 입체적인 인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극본에 따라 약간은 햄릿이 하는 행동과 생각이 달라진다면 다양한 이야기가 전개되어 더 풍부해지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어지간한 사람도 햄릿이라는 작품은 알고 있고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도 알고 있고, 세익스피어라는 인물도 알고 있다. 일부러 재미삼아 햄릿과 세익스피어를 연결짓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도 연출할 정도로 햄릿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다. 조금만 아는 사람은 햄릿의 대략적인 내용도 알고 있을 정도로 햄릿의 내용은 유명하다.

 

특히, 연극으로는 수시로 지금도 공연이 올려지고 있고 영화로도 꽤 많은 작품이 상영이 되었다. 꼭 햄릿이 아니라도 햄릿이 변용되거나 차용되어 다양한 예술작품에서 영감을 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러한 햄릿작품도 오리지널 작품은 아니라는 것 또한 재미있는 일이다. 세익스피어는 없는 것을 창조하는 것보다는 이미 기존에 있는 내용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발표하는 데 천재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미, 햄릿의 작품도 거의 유사한 내용이 시중에 있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을 세익스피어만의 세계에 편입하여 새롭게 창조한 작품이 바로 햄릿이다. 비슷하다고 느끼는 작품이 있어도 그걸 뛰어넘는 작품의 완성도가 있다면 사람들은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그것이 예술분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과 세계에 모두 골고루 적용된다.

 

햄릿을 연기한 배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예외없이 연기력을 인정받고 스타로 발돋움을 한다. 그만큼 햄릿이라는 인물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햄릿이 하는 행동이나 대사를 보면 절대로 평면적인 인물이 아니고 엄청나게 입체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그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번뇌하면서 우왕좌왕하기도 하고 진실을 알아가는 모습을 연기하는 것은 베타랑 배우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도전으로 보인다.

 

다른 역할들도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인물들이지만 햄릿이 번뇌하고 좌충우돌하는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고민과 행동이다. 왕이 고민하는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양심상의 고민이고 왕비의 고민은 그나마 엄마로써의 고민과 지아비를 잃고 동생의 부인이 된 고민이 있어 보다 쉽게 표현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햄릿에 나온 배우들은 어느 한 명 쉽게 나왔다가 들어 갈 수 있는 인물들이 없다. 그런 이유는 아마도 대사에 있을 것이다. 등장 인물마다 각자 뱉어야 하는 대사가 범상치 않기에 흔히 말하는 엑스트라마저 그 의미처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의미없이 나와 의미없는 대사를 뱉고 나가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읽다보니 어느 순간 왕의 행동은 왕비를 사랑한 행동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 왕의 권력에 대한 욕심보다는 - 왕비의 행동도 마찬가지로 왕의 동생을 더 사랑했기에 선택한 결과가 아니였을까하는 생각도 들고 햄릿마저도 엄마에 대한 사랑에 눈이 멀어 그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이 아닐까하는 다소 동 떨어진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는 햄릿이 미치광이 흉내를 내며 타인을 속이지만 실제로는 미친 것이 아닐까 싶다. 정말로 유령은 있었던 것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아버지의 죽음에 의심을 가졌을 것이고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이 사실을 밝힐 방법이 없어 같은 편을 만들고 이를 토대로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줄곧 줄다리기를 하며 실제로 행동한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말이다. 그가 한 행동들이 실제로 이성에 근거한 행동이 아니라 반 미친 상태에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한 행동 말이다.

 

아니면, 편집증에 사로 잡힌 것이 아닐까한다. 왕이 자신의 왕을 죽였다는 사실은 왕의 독백을 통해 알 수 있지만 그 외에 일들은 하나같이 햄릿의 편협적인 사고라 볼 수도 있다. 왕비는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한 선택일 수 있으면 플로니어스는 왕의 신하로써 의당 해야할 행동을 했고 친구들은 친구로써 햄릿을 아끼는 마음과 왕의 부탁을 받아 한 행동말고는 없다. 햄릿은 점점 오해에 오해를 더하고 스스로 만들어낸 세계에 빠져 버려 다른 생각이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아 플로니어스를 죽이게 되고 이 후에 왕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다.

 

햄릿은 무척이나 입체적인 인물이라고 표현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주 아주 단순한 인물이다. 비록, 그가 많은 지식을 갖고 있고 다양한 것이 교육을 통해 주입받았지만 그가 하는 행동은 오로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너무나 일직선으로만 행동한다. 영약하지도 않고 치밀하지도 않고 좌, 우는 살피지도 않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행동을 하는 것을 볼 때 햄릿이 정말 똑똑한 인물일까라는 생각은 든다. 확실히 지혜로운 인물은 아닌듯도 하다.

 

바로 이러한 점이 햄릿이 위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분명히 작품은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양한 생각돠 다른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고전의 힘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내가 생각한 것들을 남들이 읽으면 아주 아주 우습지도 않게 볼 수 있겠지만.

 

햄릿 작품은 이미 1~2번은 읽은 경험이 있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시대적 배경같은 것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읽었고 읽으면서도 우리나라 말임에도 읽는 것도 어렵게 느껴졌다. 사실, 번연극은 예전부터 대사의 문제가 있었다. 우리 말과는 다른 표현으로 인해 고상하다고 좋게 표현할지 몰라도 입에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표현들이 많다.

 

이 책도 읽어보면 비록 극본이라 할지라도 어색한 표현이나 대사가 많이 보인다. 심지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도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표현되어 있다. 'to be or not to be'라는 영어 표현으로 하면 후자가 좀 더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말로 할 때 몇 십년 전이라고 해도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표현을 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러한 번역극이 아마도 햄릿과 같은 세익스피어 작품이 번안되며 남긴 유산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는 이런 점이 개선되어 새롭게 번역이 되고 있는 듯 한다. 그 부분은 연극뿐만 아니라 일반 책에서도 볼 수 있다.

 

햄릿은 결국 죽는다. 왕도 죽는다. 왕비도 죽는다. 햄릿이 사랑했던 - 정말로 사랑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 오필리아도 죽는다. 오필리아의 아빠인 플로니어스와 레어티즈도 죽고 친구인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도 죽는다. 햄릿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관계에 있던 인물중에 유일한 생존자는 호레이쇼이다. 호레이쇼만이 유일하게 이 모든 사건을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햄릿이 아니라 호레이쇼가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도 한 번 구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철저하게 호레이쇼의 관점에서 말이다.

 

햄릿은 그다지 길지 않는 분량이지만 다양한 면으로 인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작품이다.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이 전부 각자의 사연과 사고를 갖고 움직이기에 더욱 그렇다. 햄릿이 과거에도 지금도 그렇듯이 미래에도 끊임없이 공연되는 것은 이와같이 우리 인간들의 다양한 면을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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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 핀의 모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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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소여의 모험'은 내 나이 또래라면 거의 대부분 그 내용 전체는 몰라도 딱 하나 기억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톰 소여가 페인트 칠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하는 것처럼 친구들에게 보여 친구들이 하고 싶다고 하니 사과 하나씩을 받아 본인은 사과를 먹으며 페인트 칠을 다 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톰 소여의 모험'에서 허클베리 핀도 등장을 했다는 것을 기억 하는데 워낙 어린 시절에 읽었는지 들었는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 톰과 연관되어 등장한 인물이라 그다지 유념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톰의 친구였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책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그렇다면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톰의 이야기가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워낙 두꺼워서 - 그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같은 미국 작가라 그런지 나도 모르게 마크 트웨인과 헤밍웨이에 대해 착각을 했다. 같은 작가라는 착각이 들어 작가의 작품 목록을 열심히 들여다 보는데 아무리 봐도 '노인과 바다'가 작품 목록에 들어 있지 않아 알아보니 다른 작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헤밍웨이는 마크 트웨인 이후의 작가였다.

마크 트웨인이라는 이름과 관련되어 재미있는 점은 당시 미국에서 -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 미시시피강 수로 안내인들은 조타수를 향해 '마크 트웨인'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 뜻은 배 밑으로 수심이 두 길(3.7M)라 안전하다는 뜻으로 쓰였다고 한다. 또한, 마크 트웨인은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독서를 통해 지식을 쌓았다고 한다.

 

도서관에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지식을 쌓고 이를 기반으로 지금과 같은 훌륭한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 뿐만아니라 단순히 위대한 작가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 생전에 글을 기고하고 작품을 써서 돈을 벌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발명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하니 지금 말로 '난 놈' '엄친아'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은 현대 미국 문학의 효시라고 칭해 지는데 바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그 이야기를 듣는 책이다. 헤밍웨이 뿐만 아니라 월리엄 포크너, T.S.엘리엇를 비롯한 다수의 미국 작가들에게 마크 트웨인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러한 마크 트웨인은 단지 발명을 하고 작품을 발표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에 잘못된 점에 대해 고발하고 개선을 촉구하는 행동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의 생각은 마크 트웨인이 발표한 많은 책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 마크 트웨인이 발표한 작품들은 당시에 금지 목록에 올라가기도 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만 해도 흑인에 대해 편견없이 바라 보는 시선도 있지만 어린 아이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대는 모습에서 청소년에서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금지목록에 올라 당시에는 읽을 수 없었던 책이 이제는 세계 고전이 되어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왕자와 거지도 마크 트웨인의 작품이다. 주옥 같은 명언들도 많이 남겨 사람들이 많이 애용하는 명언을 많이 후대에게 남겼다. 마크 트웨인은 헬리 혜성이 지구에 온 해에 태어 나 헬리 혜성이 다시 지구에 온 해에 사망을 했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인지 하고 있었다고 하니 그의 정신과 영혼은 헬리혜성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도저히 아이의 모험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많이 따른다고 느끼지만 그 당시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판단도 든다. 지금이야 대부분의 아이들이 어른들의 적당한 통제에 기들여져있고 부모들의 영역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예전만 해도 아이들은 낮에 나가 저녁 무렵에 들어오는 것이 당연했다.

 

그걸 부모들이 무엇이라 하는 경우도 없었고 아이들도 집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었기에 나가 노는 것이 당연했다. 나가도 특별히 놀꺼리가 지금처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지 자유롭게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 어린 시절에 초등학생이 여의도까지 놀러 갔다고 온 경험도 있는 걸 보면 부모들의 터치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할 듯 하다. 어린 나이에 거의 가는데 2시간 정도는 걸렸을 테니 가고 오는 시간을 합치면 여의도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의도에 가는 버스가 있었는지 여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처럼 지금과 달리 내가 어린 시절까지만 해도 특별히 부모의 관심속에 생활하기보다는 알아서 각자 밖에서 놀았던 듯 하다. 아니면, 우리 동네 아이들만 그랬거나. 당시에는 집에 TV가 있는것도 아니고 책이 있는 것도 아니라 논다는 것이 밖에 나가 무엇을 한다는 의미와 같았으니 말이다.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논, 밭이 펼쳐지고 개울이 있어 그런 곳에서 놀았고 동네에도 모든 곳이 집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터가 많아 그런 곳에서 열심히 놀았던 듯 하다.

1884년에 출간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표지

그렇다 해도 허클베리핀의 모험은 단순히 동네 아이가 좀 심하게 놀았던 것을 한참 벗어나 거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급으로 여행과 모험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이 책이 현대 미국 문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지 않나 한다. 당시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고 미국인들의 정신과 사회상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알 수 있다.

허클베리가 편부슬하에서 자라 좋은 이모 밑에서 잠시 자라지만 - 본인은 질색을 하지만 - 술 주정뱅이 아빠의 등장으로 아빠로부터 도망을 가게 되고 우연히 동네 흑인 노예와 동행을 하게 된다. 실제로 허클베리의 모험보다는 짐이라고 하는 흑인 노예와 함께 둘이서 벌이는 모험에 가깝다. 마지막에는 톰소여의 모험의 그 톰까지 등장을 하는 걸 보면 마크 트웨인의 세계에서는 확실히 이 친구들이 함께 살아 움직였고 이제는 다들 추억을 간직하고 사망했을 것이라는 엉뚱한 상상마저 든다.

허클베리가 여행동안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한결같이 특이한 사람들 뿐이 없을 뿐더러 다들 자신만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이고 그 욕심을 숨기지 않는다. 어른 대 어른으로 만났다고 하면 그러한 욕심을 숨겼을 지 몰라도 어른들은 굳이 아이앞에서 자신의 욕심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할 정도이다. 

고의인지는 몰라도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나오는 거의 대부분 백인 어른들은 한결같이 못된 사람이고 허클베리와 함께 여행을 한 짐이나  만난 모든 흑인들은 한결같이 친절하고 양심있고 인간적이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지언정 누구를 속이려 들지 않고 있는 것을 만족하고 순진 그 자체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백인 가문끼리 서로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허클베리는 묻는다. 어떻게 하다 서로 만나면 총질을 하면서 상대방을 죽이는 사이가 되었냐고. 허클베리와 비슷한 나이의 친구는 정확한 것은 모른다고 한다. 아마도, 할아버지 정도는 알 것이라고 하면서 아무런 이유도 모른체 오로지 상대 가문에 대한 증오만 남아 서로를 못 죽여 안달이다. 끝내는 허클베리가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허클베리의 친구도 총에 맞아 죽는다. 이런 것을 보면 지금까지 미국은 그때와 전혀 변한 것이 없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도중에 만나 두 명의 사기꾼과 함께 만들어 내는 일들도 미국사회를 많이 보여준다. 그들이 벌이는 사기라는 것이 보면 지금도 미국에서 한참 벌어지고 있는 내용들이다. 미국이 열등감을 느끼는 유럽에 대한 문화를 갖고 장난을 치거나 동기의식을 유발하는 번드르한 말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해서 돈을 버는 장면은 지금 이순간에도 미국에서 가장 돈 벌기 쉬운 것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다. 물론,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마지막에 가서 흑인 노예인 짐이 톰 소여의 친척 집에 묶이게 되는데 이미 그가 노예 신분을 벗어 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톰은 굳이 온갖 모험을 통해 짐을 구출하려고 한다. 그것을 모르는 허클베리 핀은 함께 모든 모험을 하는데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될 수 있는 한 폼이 나는 방법을 찾고 더 고생을 해도 의미있는 행동으로 탈출을 시키려 한다. 이런 것은 미국에서 이야기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억지로 의미를 갖다 붙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미국 현대 문학의 효시이고 많은 미국 작가들에게 영감을 준 작품이라는 이야기 하는 걸 보면 책에 나온 내용을 미국에서 벌어지는 현상들과 비교하거나 참작해서 고려해 보는 것을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어 억지로인지 사실인지 모르는 연결을 했다. 미국내에서는 다양한 의미를 찾거나 부여하겠지만 말이다.

허클베리와 톰이 벌이는 장난이나 거짓말을 아이들의 수준을 뛰어 넘는다. 어른들이 했다고 해도 용서 받기 힘든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용서받는다. 누가 특별히 피해를 입지 않았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미국인이 말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이고 정신이 아닐까하는 억지를 가져본다.

허클베리는 이제 고아가 되어 톰 소여의 양자로 가야했지만 스스로 이미 겪어 본 교양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평범한 가정 집보다는 인디언 부족으로 들어 가 살 결정을 하는 것으로 책은 끝을 맺는다. 최근에는 거의 드물지만 허클베리 핀의 1인칭 시점으로 책이 쓰여져 있다는 것도 책을 재미있게 하는 요소다. 최근 책들은 1인칭 시점이면서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구분이 모호하게 구술되는 데 반해 이 책은 오로지 허클베리가 보고 들은 것과 생각한 것들로만 엮여있다.

미국인이 아닌 내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는다고 미국인의 정신이나 세계관을 알게 되고 보지는 못하겠지만 허클베리 덕분에 예전 미국인들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잘 보았다 .허클베리가 이끌어 주는 대로 읽으면서 재미있는 시간은 이제 작별을 고해야 할 때이다. 나중에 혹 '톰 소여의 모험'을 읽게 되면 그때가서 다시 만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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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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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장속에는 암탉이 꼬끼오~~'하는 노래의 제목은 동물농장이다. 일요일마다 어김없이 친근한 동물들에 알려주는 프로그램 이름이 TV 동물농장이다. 동물들이라고 하면 무서울 수도 있고 친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물농장이라고 하면 가축을 키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무섭다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는다. 

이러한 친근한 느낌이 드는 동물농장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작품이 있으니 바로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이다. 소설을 읽을 때 알게 모르게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생각을 해 보거나 '이건 뭘 이야기 한다'라는 느낌을 갖게 될 수 있다. 작가가 명확하게 의도에 대해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고 읽는 사람이 알아서 유추를 해야 한다. 

'동물 농장'같은 경우에는 조지 오웰이 어떤 의도로 소설을 썼는지 알려 주기도 했지만 본인이 왜 글을 쓰는지에 대해서도 사람들에게 알려줬기 때문에 굳이 숨은 그림 찾기를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런 건 있다. 조지 오웰이 동물 농장을 펴 낸 해에 있었던 사건이나 나라중에 떠 오르는 나라가 있었겠지만 지금 이 시대에 동물 농장을 읽고 떠 오르는 사람이나 국가나 단체등이 또 다시 있다는 것이다. 데칼코마니도 아니고 신기하게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단순하게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이래로 계속 반복해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라는 거다. 갈수록 사람들이 똑똑해지기 때문에 그에 맞게 상황을 변화시키고 교묘하게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즉시 알아채는 위험이 있다. 문제는 여전히 모르고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거다. 알아채고 외치는 사람들이 이야기는 워낙 소수라 묻혀버려 진실은 저 너머가 되어 버린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 당구장에 가면 자주 볼 수 있는 그림 중에 하나가 있었다. 벽에 떠 하니 걸려 있는 그림에는 상당히 탐욕스럽게 보이는 돼지와 개들이 당구장에서 당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의 당구장에서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었는데 혹시나 민초들의 억압이 그런 곳에서 발산되었다고 하면 억측에 불과할까? 하긴, 내가 당구장이라는 보통명사로 표현을 했지만 다양한 당구장을 가 본 적이 없으니 내가 간 당구장이라는 표현으로 정정해야 할 듯 하다.

만약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라고 생각한다면 둘 중에 하나이다. 내가 이상하거나 남이 이상하거나. 나는 느끼는데 남들은 느끼지 못하니 이상한 것이다. 나만 이상한 것을 넘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느낀다면 그때부터 조금씩 여론이 형성될 것이고 한 두명씩 깨닫게 되면 본격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 하겠지만 몇몇에만 한정된다면 아마도 내가 이상한 것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여전히 진실은 저 너머일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좀 거창한 쓰잘데기 없는 말을 썼는데 그렇다면 동물 농장의 내용이 어떠하기에 이런 생각과 글을 쓰게 된 것일까? 한 번 쓰자면 짧게 하면 어느 동물 농장에 인간의 지배에 동물들이 반란을 일으켜 사람들을 쫓아냈고 동물들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했지만 그중에 몇 몇 동물들이 다시 다른 동물들을 지배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어딘지 너무 짧다. 보다 길게 쓰자면 인간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제대로 대접하지도 않고 동물들에게 착취만 하고 있어 어느 날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동물농장에서 쫓아내고 동물들이 살아갈 나름대로의 법과 체계를 만들어 평등하게 일하고 먹고 살 수 있게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몇 몇 동물이 자연스럽게 보다 앞 선 지위를 갖고 여러가지 지시를 내린다. 동물 농장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동물들은 초반에 여러가지를 배우지만 그 중에는 교육속도에 따라 받아 들이는 것이 달라졌고 차츰 차츰 노동의 강도는 예전과 달라 진 것이 없지만 그래도 스스로 원해서 한다는 믿음을 갖고 노동을 했고 점차 예전과는 조금씩 조금씩 무엇인가 달라진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지만 무엇인 변화 된 것인지 알아채기 힘들정도로 서서히 변화되어 그저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서 특별한 의심을 갖기 보다는 보다 열심히 노력하자고 생각한다. 

이렇게 쓰면 여전히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어 조금 더 길게 쓰자면 분명히 모두 함께 노력해서 얻은 결과물로 동물 농장을 인간이라는 거대한 적에게서 쟁취한 것이다. 그 후에 모든 동물들이 함께 잘 살기 위해서 그전과는 다른 합의를 정해 지키기로 했다. 이를 위해 각 동물들이 알파벳과 같은 교육을 받게 된다. 농장에서 하는 일이 기존에는 억지로 시켜서 한 일이지만 이제는 다들 스스로 자신들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하는 행동으로 변했고 일도 자발적으로 하다보니 더욱 생산성있는 작업을 이뤄냈다. 보다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동물이 하나씩 더 좋은 동물농장으로 가기 위한 다양한 제안을 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처음에는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점점 갈수록 그들의 제안이 모든 동물들에게 똑같은 잣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일부 동물들에게만 좋은 일이 생기고 많은 동물들에게는 여전히 피부로 느낄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전 인간의 지배하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 그래도 어떤 식으로 인간을 쫓아내고 이 동물농장을 획득했는지 알고 있는 동물들은 '내가 더 열심히 일 하면 된다'고 믿는다. 이 한 몸 동물 농장을 위해 아낌없이 쓴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 절대로 절대로 누군가에게 이용당한다는 생각을 추후도 해 본 적도 없고 비슷한 이야기라도 들을라치면 그 동물은 동물농장의 적으로 간주된다. 점점, 분명히 예전과 달라진 것은 없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지만 함께 동물농장을 세운 지도자들이 우리를 이용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들의 모든 행동과 말은 오로지 우리를 위한 것이라 믿고 따른다. 

동물 농장에 나오는 주요 동물은 돼지, 개, 양, 말, 닭등이 있다. 우리의 불쌍한 돼지는 늘 탐욕스러운 존재로 나온다. 동물농장에서도 어김없이 탐욕스러운 존재로 나온다. 미련하게 보이는 돼지임에도 가장 똑똑한 존재로 나온다. 어떠한 동물보다도 많은 지식을 쌓고 이를 근거로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데 이용한다. 지식 쌓은 자를 조심해야 하나보다. 지식이 있다는 이유로 타인을 지배하고 우월하다는 근거는 없으나 탐욕과 결부되어 지식은 탐욕을 확장하는데 남김없이 이용된다. 인간에게 가장 친근한 개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돼지를 지키는 데 앞장선다. 일반 동물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존재다. 돼지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개들을 조심해야 한다. 돼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지만 개들은 동물들이 직접 맞닿는 존재다. 동물들이 무슨 생각을 할라치면 양들은 생각할 틈을 주지않고 일방적으로 떠들어 댄다. 그냥 왁자지껄한 소리가 아니라 돼지에게 유리한 말을 일방적으로 다른 소리가 나오지 못할 정도로 떠들어 댄다. 엄청나게 힘이 좋은 말은 그저 돼지는 우리를 위해 노력하니 내가 더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다. 하지만, 이 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동물농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동물농장을 위해 노력하는 돼지는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인물이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은 내 잘못이다라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동물 농장을 읽으며 왜 이리 기시감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다양한 문학과 작품과 영화와 드라마와 만화에서 봤던 기시감이라 믿는다. 독재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얼마나 다수의 사람들이 더 잘 살고 본인이 욕심을 부리지 않는 지가 관건이다. 돼지가 처음부터 욕심을 갖고 동물농장을 인간에게서 빼앗었는지는 모른다. 갈수록 본인의 욕심을 채워가는데 이용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어떤 혁명도 탐욕을 채우기 위한 행동은 없다. 혁명 이후에는 다시 새롭게 보이는 과거로 돌아갈 뿐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와 법을 만들어도 지키고 행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에게 욕심은 당연한 것이다. 어떤 인간도 욕심이 없는 인간은 없다. 욕심을 탐욕까지 발전시키는 것은 인간에 따라 조금 달라지겠지만.

그러기에 제대로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지금 대다수의 민주주에서 행하는 삼권분리이다. 서로 상대방의 힘보다 내 힘을 더 가지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행해야한다. 독재가 안 좋은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힘만 더 키우려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갈수록 교묘해진다는 것이다. 이제 동물농자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모든 사람들이 자각할 수 있는 것은 전 세계에서도 몇 몇 나라에서만 행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나라들은 왜 동물농장처럼 하지 않을까? 동물농장에서 그 힌트가 있다. 교육을 하지 않는다. 아니, 교육을 한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만 교육을 시키고 진실을 덮어버린다. 인간에게 교육은 중요하다. 한번 받은 교육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올바른 가에 대해 의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어릴 때 받은 교육은 뇌리에서 없애기 힘들다. 또한, 누군가 뭔가를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이를 방행하는 나라는 동물농장에서 나오는 나라와 다를 바가 없다. 거짓말이든 아니든 뭐든 이야기는 하게 만들어야 한다. 누구는 알아야만 하고 누구는 몰라도 되는 대단한 정보라는 것이 많아질수록 권력은 다수에게서 소수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돼지는 틀림없이 끝까지 동물농장을 지배했을 것이다. 본인의 의지로 변화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부가 되었든 외부의 세력에 의해서든 스스로는 할 수 없다. 외부의 세력에게 당하는 것은 오히려 내부의 결속만 공고하게 해준다. 돼지가 탐욕스러운 돼지가 되기전에 권력을 분산하는 제도를 만들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나저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은 진정 동물농장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물론, 바로 옆에 있는 나라를 보면 단연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동물농장이 아니라 동물 농장 소설에 나오는 옆 농장에 보다 가깝지 않을까 하기도 한다. 동물농장은 가공의 소설속에 나오는 풍자다. 풍자라는 것은 어딘가 일어나고 있는 일을 묘사했다고 볼 수 있다. 전혀 없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모든 동물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건 정말 힘든 일일까?

동물농장말고도 자유와 행복,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글도 책 '동물 농장'에는 실려 있다. 자신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쓴다고 한다.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알리기 위해 글을 쓴다고 한다. 모든 작가는 이기적이라고 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알리기 위해 글을 쓴다고 한다. 조지 오웰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동물농장과 1984를 위해 그는 자신이 알리고자 하는 바를 알렸다. 여전히 그가 전한 내용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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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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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는 독일 사람이다. 카프카의 글을 읽은 사람이 많은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카프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카프카의 글을 읽은 사람에 비해 몇 배는 최소한 더 많을 것이고 수천배가 될 수도 있다. 카프카는 그렇다면 왜 유명한 것일까? 그 이유를 알려면 그의 글을 읽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도 분명한 방법이다. 카프카의 글을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카프카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카프카에 대해 아는 척 하는 것은 거짓일테니 말이다.

카프카의 변신 같은 것은 여러 문화나 영화에서 차용하거나 변용되어 나오기는 했다. 이제는 워낙 흔한 일이 되어버려 비슷한 상황에서 꼭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표현을 하지는 않더라도 카프카의 변신에서 모태가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들이 있다. 여하튼 그러한 카프카의 글을 읽었다고 카프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또 별개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 있어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카프카의 글을 읽었다고 하여 카프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카프카의 책을 읽었다. 변신을 비롯한 다수의 글을 읽었다. 그렇다면 나는 카프카에 대해 사람들에게 읽었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에 대해 손을 가슴에 얹고 이야기하자면 차마 읽었다는 대답이외에는 할 것이 없다. 누군가 나에게 카프카를 읽어냐고 물어 본 후에 읽었다고 하면 기쁜 마음에 나도 읽었어요하면서 카프카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려 든다면 그 자리에서 나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 읽었다고요. 읽기만 했단 말이예요라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또 읽었다. 열심히 읽었다. 읽는다는 점에서는 읽었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었다. 국어를 알고 한글을 알고 있으니 읽었다. 읽는다는 행위 자체에는 문제 될 것이 없다. 책을 펴고 손으로는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도록 잡으면서 눈으로는 글자를 읽는다. 글자가 내 눈을 통해 들어온다. 눈으로 들어온 글자는 눈과 연결되어 있는 머리로 향한다. 머리에 간 글자는 뇌를 통해 인지가 된다. 글자들이 모여 단어가 되고 단어들이 모여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여 의미를 갖게 된다. 여기까지다. 

눈을 통해 들어온 글자는 더이상 뭉쳐지지 않고 글자로 눈으로 들어 오고 머리로 이동하고 뇌로 가서 소멸된다. 뇌를 통해 의미를 갖고 이해가 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그만 소진된다. 어쩌면, 글자가 눈을 통해 들어오고 머리로 돌진하자마자 귀나 코나 입으로 빠져 나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유로 뇌에 들어 올 틈도 없었고 너무 빠른 속도로 움직이다 보니 잔상이 남지 않아 잘근 잘근 소화할 틈도 없이 내 몸 속 피에 녹아들어 몸 전체로 퍼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면 다시 돌아 올만도 하건만 피를 타고 몸 속으로 퍼진 글자들은 다시 돌아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몸 곳곳에 퍼진 지방에 껴서 흐르지 못하고 덕지덕지 붙어 있나 보다.

초판이라고 함

그나마 기쁜 점은 어떤 글은 한 페이지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글은 기쁜 마음으로 읽었다. 역시 읽었다. 이미 글자 자체로만 돌아다니는 작품은 더이상 나에게 작품이 되어 오지 못하고 그 짧은 문장도 문장이 아닌 글자로만 들어온다. 글자를 이어 붙혀 문장으로 만들고 의미를 소유하려 했으나 이미 막힌 구멍은 더이상 문장을 허락하지 않고 글자만 단편적으로 들어오게 한다. 글자도 들어와서 불행하게도 해체되어 자음과 모음으로 나눠지며 더이상의 의미마저 사라지고 만다.

변신의 주인공처럼 아주 아주 작은 단어에도 상처받고 아무것도 아닌 사물에도 움찔하면서 나에게 들어온 글자는 그대로 결국에는 죽고 말았다. 견고하게 쌓아놓은 내 이성체계는 새로운 카프카의 글자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의 단어는 낯설고 그가 나에게 이야기하는 몸짓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변신'에서 벌레로 변한 주인공은 이미 말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을 가족들은 알아 들을 수 없었던 것처럼 카프카가 나에게 전달하려고 한 내용은 난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하고자 했다면 나름대로의 의미와 이해를 구축해서 그 틀에 집어 넣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의미에 대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더구나, 고전이 되고 전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카프카에 대해 그 어떤 이야기를 하든 이미 누군가는 이야기를 했을 내용일테니 내 이야기는 오독을 했거나 충분한 이해를 하지 못했거나 그 어떤 것으로든 규정해 버릴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의식 흐름에 따라 글이 제멋대로 써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작품이 가장 난해하고 읽어도 완전히 소 귀에 경읽기와 같은 의미로 다가오는데 카프카의 글은 읽을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명확하게 줄거리가 있다. 의미와 의도를 알지 못해도 최소한 줄거리는 남는다. 이걸 근거로 읽었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절대로 카프카를 읽었다는 이야기 이외에는 내가 카프카에 대해 더이상 할 말이 없다. 그저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고 다신 한 번 읽으면 점점 글자에서 조금씩 더 들어오는 것은 있을 것이다. 더 고마운 것은 카프카의 변신같은 경우에 1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고맙고 고마운 일인가? 분량에 질리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줄거리도 머리에는 들어오니 말이다. 그 외에 판결이나 시골의사, 굴등 거의 대부분의 글들이 읽는데는 지장이 없다. 읽으면 된다. 까막눈이 아닌 다음에 읽는데 지장은 없다.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읽었을 때는 전혀 모르고 남는 것도 없는 것 같아도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는 그 힘이 있어서 일수도 있고 거대 담론내지 사람들의 끊임없이 반복적인 되새김질에 동화되어서 일 수도 있다.

그렇게 카프카의 글은 이번에 다가왔다. 읽었고 읽었고 또 읽었고 열심히 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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