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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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관련되어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을 잘 따져보면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어딘지 고전이라하면 최소 몇 백년은 되어야 할 듯한데 그렇지 않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대부분 기껏해야 100~200년이 고작이다. 특히나 최근 100년 안팎이 제일 많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에게 작품이라고 추앙받는 것은 작품이 세상에 나오고 얼마되지 않아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도 한다. 아무리 우리가 무엇이라고 떠들어도 결국에는 당대 사람들이 선택해야 한다.


가끔 시간이 지난 후 재발견으로 좋은 작품이 알려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당대 사람들에게 보편타당한 정서와 공감을 불러일으켜 인정 받은 작품이라야 한다. 시대가 지나며 뉘앙스는 달라질 수 있어도 인류보편 타당한 정서 등이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인정한다. 시간이 꽤 지나도 인간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살아가는 모습과 생활이 달라졌을 지라도 인간이라는 본성은 동일하다.


지금까지 여전히 사람들에게  살아남아 선택받는 작품은 그런 힘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지금도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을 사람들이 읽는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닐까. 한편으로는 지적 허영도 어느 정도 있다고 본다. 굳이 꼭 고전을 통해서만 그 정서와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안정빵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읽고 좋았다고 칭찬하니 선택한다. 최근 작품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으니 무엇인가 모험을 시도하는 것은 다소 꺼름칙하다.


반면에 이러다보니 작품을 접한 후 별로인데도 차마 이야기를 못할 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검증된 작품을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별로라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다. 유명한 작품은 유명하기 때문에 훌륭할 때가 많다. <데미안>이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늘 고전을 읽어야겠다는 부채감을 갖고 있다. 고정관념이란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을 좀 읽는다고 하는데 고전을 읽지 않았으면 수준이 떨어지는 느낌이 있다. 그도 아니면 고전을 그래도 읽어야 한다는 책 좀 읽었다는 소리를 듣는다.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중고등학교 때 <데미안>을 읽은 듯하다. 늘 그렇듯이 읽었다는 기억만 있다. 딱히 어떤 내용인지는 가물가물하다. 워낙 유명한 문구가 이 책에는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시스."

청소년의 성장기에 대한 책은 이유여하와 시대를 막론하고 솔직히 어떤 이야기를 할지는 비슷하다. 사춘기를 거치며 자아가 형성된다. 그 전까지 수동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사춘기부터 나라는 사람이 누군인가를 자각하고 사회 구성원과의 만남도 달라진다. 이전과 달리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스스로 무엇이라 하기 형언하기 힘든 마음 상태가 된다.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이 갈등하며 폭발하는 순간도 온다. 흔히 말하는 중2병이 대표적이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컨트롤하기 힘들다. 자신도 모르게 행동이 나오게 된다.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도 따지고보면 부모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되려는 시도인데 그것자체가 사춘기를 거치며 자아가 형성되며 생성되는 질문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이전까지와 달리 세상을 달리 보게 된다. 사회의 부조리도 보이고 선과 악이라는 것이 보다 선명하게 느껴진다. 불의를 참게 된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누군가를 참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시기가 사춘기다.


책 첫 에피소드 제목이 두 세계라는 것은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의 핵심이다. 우리는 늘 두가지 세계에서 고민한다. 선명하게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에 대해서 고민이 된다. 선이라 생각했던 것이 그렇지 않다. 악이라 증오했던 것을 내가 하고 있는 걸 발견하기도 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변질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라고 물어본다면 사람은 변한다. 나쁜 일을 해도 대체로 그런대로 잘 살아간다. 좋은 일을 했는데도 못 사는 경우도 참 많다.


세상에 오롯이 나라는 사람 자체로 이제 홀로서야 한다. 부모의 햇빛이든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부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성인이 너무 많다. 그들은 결국 이 책 주인공인 싱클레어처럼 데미안을 만나지 못한 이유일까. 싱클레어는 과연 데미안을 만났기에 자아를 형성하고 세상에 알을 깨고 나오게 된 것일까. 데미안이 아니었어도 알을 깨고 나왔을까. 어느 누가 옆에서 독려하고 촉매제 역할을 해도 그 알을 깨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누구도 그건 대신할 수 없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예전보다 정신연령은 늦어지고 있다. 신체나이가 늘어난만큼 함께 더뎌진 것이 아닌가도 한다. 여전히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오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이걸 좋아할 필요는 없다. 세상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바라볼 여건이 안 되었거나 억지로 잊고 살아가는 걸 의미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작품 속 세계와 다르다. 작품은 기승전결이 있어 주인공이 무엇인가 깨닫고 끝날 수 있다. 이제부터 아마도 잘 살아가겠지. 


우리는 그렇지 않다. 무엇인가 깨닫고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간다고 해도 또 다시 반복이다. 여전히 미묘하게 깨달은 것과 다른 세상이다. 내 의지대로 꼭 되는 것도 아니다. 다른 모습을 하고 늘 나에게 문제는 던져지고 상황은 다가온다. 그때마다 늘 고민하고 번민하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기로에 선다. 지속적으로 선택이 교차되며 성장한다. 나만 성장하는 것이 아닌 세상도 함께 발전하며 쫓아가게 된다. 그 와 중에 여전히 힘들다. 데미안같은 존재는 어차피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늘 나에게 데미안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이런 책을 읽어가며 난 오늘도 성장한다.


까칠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역시나 고전은 잘 안 읽혀.

친절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고전은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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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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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궁금했다. 왜들 이렇게 조르바를 좋아할까.나에게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쓴 작가로 기억한다. 솔직히 그 소설을 읽었다는 기억만 남아있을 정도로 대략 30년 전에 읽지 않았나 싶다. 이러다보니 늘 조르바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그 작가라고 꼭 확인하는 버릇까지 생겼다. 조르바를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 지극히 편견을 갖고 - 결혼한 남자와 미혼 여성이었다.


솔직히 확실히 그 이유를 파악하긴 힘들다. 내가 어떻게 그들이 좋아하는지 알 수 있겠는가. 조르바를 알지 못하는데 말이다. 이제 읽었으니 그 이유를 어렴풋이 느낀다고 할까. 고전 소설은 이유를 모르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천천히 여유를 갖고 느릿하게 읽어야 그 참 맛을 느낄 것 같은 기분이 있다. 하다보니 최근에 바뻐 이 책을 무려(?) 일주일도 넘게 읽었다. 계속 돌아다니고 읽을 시간이 적다보니 오래도록 읽게 되었다. 솔직히 천천히 느릿하게 읽는 이유는 사실 쉽게 안 읽혀서다.


쉽게 읽힌다면 아무리 책이 두꺼워도 금방 읽을 수 있다. 고전이라 불리는 소설이 안 읽히는 이유는 지금 살고 있는 삶의 템포와 다르기 때문이다. 소설을 창작한 작가의 삶의 태도와 템포와 의도적인 문체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모든 소설은 작가가 가공한 세계다. 아무리 가공한 세계라해도 작가가 살고 있는 세계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소설이 창작된 시대를 알아야 도움이 된다. 현대소설은 굳이 몰라도 템포 자체가 지금과 별 차이가 없다.


현대 작가가 최대한 느린 템포로 써도 고전 소설보다 빠른 호흡이다. 이러니 자연스럽게 고전소설은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작품 세계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시대상황을 알아야만 더 잘 이해되고 재미가 배가 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 벌어지는 현상과 상황을 우리는 알고 있어 현대소설을 읽자마자 의미를 알아채지만 100년 후에 읽으면 어떤 의미인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치다. 이 책에도 결국에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살아가던 시대의 상황을 알아야만 정확한 이해와 재미가 증가하리라 본다.


그렇다고 내가 굳이 작품 속 배경을 찾아보진 않았다. 읽다보면 첫번째로 드는 의문은 이거였다. 과부. 작품 속에서 여자라는 명칭보다는 과부가 나온다. 무엇보다 작품 속에 나오는 과부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대인의 관점은 너무 시건방진 시점이고 내 관점에서. 무엇보다 작품 속에서 정확한 명칭하면 조르바에게 다들 흠뻑 빠진다. 조르바는 희대의 바람둥이라고 해도 된다. 만나는 여자에게 최선을 다해 사랑한다. 단 한 여자에게 머물진 않는 것 같고.


과부들도 너무 쉽게 자신의 감정을 준다. 작가가 남자고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보다 더한 남성 중심 사회니 그런가하는 생각을 했다. 사랑에 굶주려있다고 할 정도로 금방 사랑에 빠진다. 주인공인 두 남자라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다소 의아했다. 워낙 바람둥이가 인기 좋은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당연하지만 - 남성에게는 공공의 적이지만 - 설정이라고 하기에는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뒤에 가서 모든 의문이 풀렸다. 당시 시대 상황이 어떤지 정확히 모르지만 <그리스인 조르바> 속 세상은 과부는 가장 천한 신분이었다.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존재였고. 어떤 인격적인 존중도 없이 언제든지 가차없이 생명을 어떤 재판은 커녕 의견도 필요없이 제거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 장면을 읽고나서 생각해보니 작품 내내 여자라는 존재가 아닌 과부라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인 여성이 등장했다.

작품 속 과부들에게 조르바는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유일한 남성이었다. 존재가 아닌 남성이었다. 남성으로 그들을 여성으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사람이자 남성이었다. 조르바는 거기에 늘 자유롭다. 어디에 얽매이려 하지 않는다. 하는 일도 자유롭게 마음 내키는대로 하진 않는다. 자신이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한다. 그 외 삶의 태도는 자유 그 자체고 대체적으로 무대포라 느낄 정도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과연 조르바 같은 인물이 내 주변에 있다면 나는 그를 자유로운 영혼이라며 좋아하고 만나고 함께 일을 할까. 그렇지 않다.


내 주변 사람이 조르바처럼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 한다면 오히려 껄끄럽고 부담스럽다. 그만큼 내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도 되지만 사람은 자신이 생각한대로 행동하고 말을 내 뱉지 않는다. 반대급부로 조르바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대리만족이다. 내가 하지 못하는 걸 나 대신 해 준다는 만족. 조르바는 영혼 자체가 자유롭다. 그 이유는 역시나 작품 후반부에 나온다.


작품 속 조르바는 이미 노인이 나이다. 그 전에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사실 궁금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왔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자유로운 영혼은 나와 상관이 없을 때 멋져보이지 내 주변에 있으면 골치아프다. 60세가 넘도록 그렇게 살아 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역시나 작품인가 라는 생각도 했다. 좀 더 읽어보니 조르바는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삶을 살고 태도를 보이고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이 대목이 가장 내가 생각하는 지점과 일치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마지막으로 입에 들어갈 빵 덩어리에다 놓고 맹세합니다만)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지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나는 이데올로기가 제일 싫다. 종교이데올로기, 국가이데올로기, 민족이데올로기. 기타등등. 대부분 인간이 가장 끔찍하고도 단 하나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저지를 때 바로 이데올로기가 접목된다. 물론, 내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와 같은 고상한 이념이다. 상황에 따라 달리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인류역사에서 벌어진 모든 처참한 기록은 전부 이데올로기다. 보다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이데올로기를 빙자한 이익 추구였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지만 편 가르기!


조르바가 지금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된 것은 이데올로기 피해를 직접 받았고 그 페혜와 해악을 몸소 체험했던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특정 집단의 이익과 결부될 때 내 편과 네 편이 나눠지고 내 편이 아니면 적이고 죽여도 된다. 내 편마저도 이해를 못 시키면 죽이는 게 가능하다. 문제는 이럴 때 순수한 이데올로기가 아닌 특정 집단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데올로기를 이용해서 상대방을 조종한다.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이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아주 큰 국가 단위부터 여러 이익 단체는 물론이고 기가 차지도 않고 몇몇 사람이 모여있는 카페까지도 말이다. 몇 천명에서 몇 만명을 보유한 카페라면 작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저 안타깝다. 덧없음을 느낀다. 살아가기에 내 편과 아닌 편으로 구분하면 살아가긴 보다 쉬울지 모른다. 평생 잘못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 수도 있다. 비록, 나 자신이 규범적이고 규칙적인 생활패턴과 삶을 살지라도 난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와 같은 고전 소설을 읽게 되면 재미없을 때도 있고 지루하기도 하다. 재미있고 흥미진지할 때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인류 보편적인 타당성을 근거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들이라 그런지 몰라도 무엇인가 쓸꺼리가 많아진다. 조르바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여,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세상을 보고 생각을 유연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지금 세상은 조르바가 살던 시대보다 더 자유롭지 못하다. 과거보다 더 평균이라는 잣대가 활발하다. 특히나 한국처럼 내편, 네편을 편가르며 나와 다르면 이해하려 하지 않고 배척하는 사회에서 더욱 조르바같은 인물은 나오기 힘들다.


고전 소설답게 읽는 것도 - 의도하지 않게 일이 바빠 그랬지만 - 꽤 오래도록 읽었고 이 리뷰도 어느 덧 2시간은 넘게 쓰고 있다. 이 마저도 자꾸 TV보느라 집중을 하지 못해 그런 것도 있지만. 이렇게 고전은 재미있든 없든, 유익하든 아니든 무엇인가 생각할거리를 던져주는 맛이 있다. 그렇게 <그리스인 조르바>는 영혼이 자유로운 나에게 찾아왔다. 자유롭게 얽매이지말고 보내자. 바바이.


까칠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난 소설 뒤에 평론 실린 걸 싫어한다.

친절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자유, 여자는 남성의 로망.


다른 고전 소설

http://blog.naver.com/ljb1202/181897499

허클베리 핀의 모험 - 마크 트웨인


http://blog.naver.com/ljb1202/187778830

문학이란 무엇인가 - 답이 없는 것


http://blog.naver.com/ljb1202/203852286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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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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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롤리타라는 제목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이미지가 떠 오른다. 그만큼 롤리타는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롤리타가 어떤 이미지로 세상 사람들에게 소구되고 있고 활용하고 있는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된다. 워낙에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이미지들이 나온 세상이 되어버려 예전만큼 롤리타라는 이미지는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아도 여전히 롤리타는 우리들에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이미지로 남을 것이다.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롤리타 신드룸'이라고 한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간의 관계까지 접근하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남성들이 젊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성의 본능이다. 남자는 생존하기 위해 자신의 씨를 안전하고 튼튼하게 키워줄 어린 여성을 선호한다고 한다. 롤리타가 세상에 나왔을 때는 그러한 학문적인 연구는 아직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 학문적인 연구가 있다고 해도 그다지 자연스럽고 좋게 보지 않는다.

 

롤리타에 나온 여성은 단순히 젊은 여성을 넘어 어린 여성이다. 우리나라 나이로 따지면 중학생 정도의 아이일 것이다. 60대 남성이 20대의 여성을 만나는 것은 꼬깝게 보고 자연스럽게 보지 않는데 40대가 10대를 만난다고 하면 이건 무조건 천일 공노할 나쁜놈이 되어버린다. 그 이유는 20대는 자신의 의지를 갖고 남성을 접근하거나 남성과의 관계를 결정할 수 있지만 10대의 여성은 아직까지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강요와 강압에 의한 폭력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 생활에서는 그런 경우를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가공의 상상력으로 보여주는 여러 사진이나 소설이나 영화등을 포함한 곳에서는 10대의 여성이 자발적으로 나이 든 남성과 관계를 맺는다. 자연스럽게 감정이 생기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나이라는 차이를 제외하면 일반 연인과 별 차이점이 없는 모습을 그려준다. 이런 영향으로 아직까지 뇌성숙(??)을 이루지 못한 남성들은 현실과 가공의 현실을 착각한다. 더구나, 자신이 얼마든지 마음먹은대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어린 아이들에게 표출해서 절대자로써 행동하게 된다.

 

어린 여성들에 대한 이미지를 심어준 최초의 작품이 바로 '롤리타'이다. 책을 읽어보면 현대에 못된 남성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알게된다. 오로지, 단 하나 성적인 점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성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온갖 미디어가 만들었다. 이런, 이미지에 남성들은 열린(??)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아무리, 손사래를 치고 아니라고 부정해도 젊은 여성이 더 눈에 들어간다는 것이 솔직한 감정이다. 거기에 어린 여성을 훔쳐보는 시선은 남성의 본능이다. 이성으로 억누르고 도덕적인 감정으로 외면할 뿐.

 

꼭, 모든 남성이 그럴 것이라는 판단도 잘못되어 있다. 그저, 귀엽게 볼 뿐이다. '롤리타'의 남성은 단순히 어린 여성을 좋아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이상한 감정을 지닌 삐뚫어진 남성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듯 하다. 롤리타라는 어린 여성을 좋아한 것만이 아니라 소설에서 그가 만난 모든 여성들은 롤리타를 포함하여 평범하고 보통의 여자들은 단 한명도 없다.

 

주 메인이 롤리타이고 2명의 여자들이 추가로 더 나와 험버트와 함께 살때 어떤 여성도 익히 알려진 여성의 이미지는 없다. 험버트가 자신의 딸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이용하여 결혼하는 여성이 있고 함께 살면서 총이 눈 앞에 있는데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장난하는 여성이 있다. 근본적으로 험버트라는 남성이 제대로 된 정신을 갖고 있는 인물을 절대로 아니라고 본다. 

'롤리타'라는 제목은 책을 읽기전에 여러 상상을 하게 만들어 주고 책의 내용이 자극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만들어준다. 책이 나왔을 당시에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 단순히 어린 여성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논란이 엄청 되었겠지만 - 지금 클릭 한 번이면 온갖 자극적인 것들이 넘쳐나는 지금 이 시대에는 책에서 어떠한 말초적인 묘사도 느끼지 못했다. 약간의 은유와 아주 작은 묘사가 나오지만 그 정도는 '롤리타'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세계적인 문학작품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통속소설이 아닌 문학작품으로 취급받는(??) 분명한 점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원래부터 어린 여성에 대한 약간의 판타지를 갖고 있던 험버트는 롤리타를 보자마자 빠지게 된다.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협박한 롤리타의 엄마와 결혼을 한다. 조심하려하는데 교통사고라는 천운이 따른다. 롤리타와 단 둘이 이 세상에 남겨진다. 그것도 부녀지간이라는 묘한 관계로. 어디에 가더라도 아무런 꺼릴것이 없게 되었다. 롤리타는 결코 수동적으로 아빠라 불리는 남성에게 끌려다니거나 강압과 강요에 의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주체적으로 자신이 오히려 리드를 한다. 애달프게 만든다. 두 사람의 관계와 나이차를 제외하면 남녀간의 연애와 비슷하다.

 

험버트라는 남성의 시선으로 내용이 전개되고 롤리타에 대한 묘사는 너무 자세하고 애절하다. 이토록, 자세하게 이성에 대한 묘사를 하는 연애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사랑이 담긴 세세하고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 묘사에 감탄을 하게 된다. 롤리타에 대한 외부의 모습을 숨소리마저 놓치지 않고 묘사하거나 그의 행동이나 모습을 보면서 사랑스러워 미치는 묘사는 얼마나 절절하게 롤리타를 사랑하고 있는지 진심이 분명히 느껴진다. 롤리타가 험버트의 의부딸이자 이제 겨우 한국나이로 만 10세가 넘었다는 점을 잊고 읽는다면 이토록 이성에 대한 사랑넘치는 묘사는 일찍히 읽어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롤리타도 결코 정상적인 인물은 아니다. 왜 아니겠는가마는. 분명히 자신과 30살 정도의 차이가 나는 남성이 자신을 좋아하는 감정을 넘어 사랑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애써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도 모잘라 이용하고 놀리고 갖고 논다는 느낌마저 든다. 흔히 생각하는 어른 남성이 아이 여자를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롤리타가 험버트를 조정하고 감정을 주물럭 주물럭 만지면서 자신에게 더욱 미치도록 만든다고 본다. 그런 이유로 비록, 험버트가 속으로 부르는 애칭이지만 '님펫'이라고 한다.

 

'님펫'은 롤리타를 부르는 말로써 작은 요정을 말하기도 하지만 책에서는 작은 악마라는 뜻으로 쓰인다. 롤리타가 진정으로 험버트에게는 악마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상관이 없을 세상 유일의 사랑이자 질투의 대상이고 세상이다. 끊임없이 롤리타를 혼자만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롤리타에게 험버트는 그저 스쳐가는 남자였을 것이다. 아빠로써의 의미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어쩌면 남성을 알게 해 준 인물로써의 의미가 더 클지도 모른다. 

 

1부는 롤리타와 험버트가 역경(??)을 딛고 사랑을 이뤘다면 - 전적으로 험버트의 관점에서 - 2부는 파국을 맞이한다. 모든 관점은 롤리타를 바라보는 험버트의 관점이다. 험버트는 롤리타를 가지려고 했고 갖지 못했지만 그가 행복하기를 바랬다. 그를 불행하게 만든 인간에게는 철저하게 복수를 하는데, 평생 지켜보며 복수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싶다. 분명히 스스로 사회적인 지탄을 받을 것이라 알고 있지만 자신의 사랑을 멈추지 못하고 더욱 더욱 빠져든다. 금지된 사랑의 달콤함이라는 늪에 빠져 나오려고 하지도 않고 점점 빠져가는 자신을 끝까지 인정하고 나올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다.

 

분명히, 롤리타는 문제적 작품이다. 롤리타의 나이로 인해 벌어지는 사회적인 관념이다. 나이를 제외한다면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애절하게 사랑하는 이야기다. 문학작품이라는 표피를 쓰게 된 것은 단순히 통속적인 이야기에 치중한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묘사와 내면의 변화를 자세하게 보여주고 심경을 공감할 수 있게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걸 근거로 아동 성적 학대와 결부시켜 합리화하는 놈들은 나오지 말았으면 한다. 험버트가 분명히 이상한 놈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남성이라는 동물의 속성과 진화론적인 본능은 인정하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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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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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제일 유명하다. 농담도 기억속에 남아 있어 선택하게 되었다. 현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모두 읽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듯 하여 유명한 작품 위주로 선택해서 읽고 있어 농담을 읽을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농담도 분명히 내 기억속에 있는 것으로 보아 유명하다는 판단이 들어 읽기로 했다. 아니면, 농담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오는 친숙함에 선택했거나.

 

농담을 즐겨하는 편인데 농담 자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고 인간중에서도 언어사용이 풍부하고 관찰을 잘 하는 사람이 하는 한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농담으로 받아들이면서 웃기도 한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 우스운 상황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농담을 빙자한 상대방의 자아를 괴롭히는 농담도 있다.

 

예전에 농담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농담으로 타인이 실망감과 상처를 입는다면 농담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견 맞는 말이다. 우리는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농담의 당사자는 기분이 나쁠 수 있다. 될 수 있는 타인을 상대로 한 농담은 조심해야 하지만 농담은 사람들 사이를 더욱 친근하게 만들고 부드럽게 하는 긍정적인 요소가 더 많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데 있어 농담만큼 좋은 것도 없다.

 

책에서 농담은 그다지 농담이라 생각할 수 없게 시작된다. 또한, 책에서는 농담이라는 단어가 제법 많이 나오는데 - 책 제목 때문에 더욱 유심해서 본 측면도 있을 것이다 - 그때마다 농담이 별 의미없어 보이기도 하고 상황에서 중요한 요소로 보이기도 한다. 농담으로 인해 인생이 꼬여버린 루드빅을 생각하면 농담은 더이상 하지 말아야 할 지도 모르지만 농담을 한다는 것은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는 의미로도 보볼 수 있다. 마음에 즐거움이나 긍정이 없다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좋아하는 여자에게 보낸 엽서에 쓴 농담때문에 공산주의 국가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사람으로 지목받아 학교에서 축출을 당한다. 경직된 사회에서는 사소한 농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농담이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받아들인다. 웃어 넘길 수 있는 상황에서 경직된 표정으로 기분나뻐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가 박탈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개인과 개인끼리의 농담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가능하지만 개인을 넘는 농담에 충분히 웃어 넘길 수 있느냐의 여부가 그 단체나 집단이나 국가가 포용력과 함께 스스로 자신에게 떳떳하느냐와 결부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같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 후에 농담이라고 치부하는 변명은 말고 말이다.

루드빅은 그렇게 한 여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했던 농담으로 인해 인생이 완전히 변모한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좋은 인생이 눈 앞에 있었을텐데 학교에서 나와 군대를 가게 된다. 군대에서 중요한 것은 상사이다. 어떤 상사가 오느냐에 따라 군대생활이 달라지는데 밑의 부하들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하라는대로 할 수 밖에 없다. 군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내가 속해 있는 단체에서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인간으로써 그저 지위가 높다는 것일 뿐이지 더 많은 경험과 인격과 지식이 있다는 뜻이 아닌데 지위가 깡패라는 말까지 있다.

 

군대에서 만난 루치에에게 다시 온갖 정성을 들이지만 서로 사랑은 했지만 그 결과물을 만드는 것에 실패한다. 루드빅 입장에서. 모든 것이 차단된 공간에서 지낸 루드빅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고 루치에는 그 이상을 생각했던 것이 다시 한 번 사랑에 실패하게 된다. 뜻하지 않은 삶의 추락은 여러가지로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항로를 떠나게 만든다.

 

루드빅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데 책은 그다지 단순하지가 않다. 내용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시점이 단순하지 않다. 매 챕터마다 나라고 하는 화자가 다르다. 루드빅, 헬레나, 야로슬라브라는 세 명이 대표적인 화지인데 매 챕터에서 이름이 나온 후에 '나는'이라고 시작하면 그 화자가 챕터의 주인공이 된다. 가뜩이나 우리나라 이름도 아니고 친근한 영어식 이름도 아닌데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

 

더구나, 마지막 장은 '나는'이라고 시작하지만 도대체 그 나가 누구인지 알려주지도 않고 그저 나라고 시작한다. 한참을 읽고 있어야 나가 누군이지 알게 된다. 읽고 있으면서 도대체 누가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읽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읽다보면 그제서야 '누구'라고 알게된다.

 

대체적으로 1인칭 시점으로 쓰는 소설들은 나라는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서술하는데 반해 여러 사람이 자신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하다보니 한 명에 적응되면 다른 인물이 나온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딱히 여러 사람의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는게 재미있거나 다른 관점으로 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계속 루드빅의 관점으로 책이 구성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끊임없이 한 남자가 사랑을 찾기 위한 여정으로도 보인다. 단 한명에게도 진실한 사랑을 받지 못했던 루드빅은 자신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제마넥에 대한 복수로 거짓 사랑을 보여 함께 하게 된 부인인 헬레나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루드빅에게 매달리고 떨어지지 못해 안달이 난다.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철저하게 계산해서 사랑하지 않지만 보여준 거짓된 사랑은 진정으로 나를 원하는 상황이라니.

 

책 말미에 '너는 그 여자에게 똥을 싸게 했어'라는 표현이 나온다. 루드빅을 사랑하는 헬레나의 현재 모습을 은유가 아닌 실제 모습을 이야기한 것인데 얼마나 상황이 우스운지 나도 모르게 뿜으면서 웃었다. 이런 작품에서 말이다. 전체적인 상황을 알게 되어 웃을 수 있는 장면인데 이것은 농담이라 할만큼 우스운 말이지만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것이 더 웃낀다. 정말로, 개그 콘서트에서나 나올법한 상황이였다.

 

폐쇄되고 경직된 공산주의 국가인 체코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생각보다는 경직되지 않고 자유롭게 이뤄진다는 사실이 오히려 내가 알고 있는 공산주의 국가보다 더 자유롭다는 점이 학생시절의 잘못된 교육의 폐허로 보였다. 물론, 많이 경직되어 있고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같은 시대에 우리나라가 공산주의였던 체코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아 보였다. 이미, 공산주의는 역사의 뒷안길로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경직되고 농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는 공산주의가 문제는 아니라 보인다.

 

아직도 윗 사람에 대한 가벼운 농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먼저 눈치를 보며 정신적인 검열을 하기도 하고 자신에 대한 농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직된 사고를 갖고 있는 윗선의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여전히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는 건전하지 못한 사회라고 생각된다. 아무리, 창의력을 외치고 자유로운 사고를 요구한다고 해도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부터도 사고가 경직되어 있는데 어떻게 자유로운 생각이 표출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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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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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파우스트로 불멸의 작품을 남겼을 지 몰라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더 각인되어 있다. 슬프게도 좋은 의미가 아니라 '베르테르 효과'라고 불리는 자살효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김없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유명인이 자살을 선택할 때 - 특히, 연예인 - 이를 보고 자살을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이 함께 자살을 선택할 우려가 있을 때 '베르테르 효과'라고 하니 괴테가 이런 효과를 원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는 지금도 물론이지만 과거에도 분명히 인정할 수 있는 삶의 선택은 아니였을 것이다. 더구나, 기독교 문명이 퍼져있던 유럽에서 자살은 더더욱 금지되는 행동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괴테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작품속에 넣었다. 주인공이 자살을 선택한 작품중에 이처럼 인기를 끈 작품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최초였을 것이다.

 

괴테는 이 작품으로 단숨에 인기 작가로 떠 오르게 되었는데 당시의 시대상을 볼 때면 다소 의아하다. 오히려, 이런 결말을 보여준다면 지탄받고 외면받을 것이라고 보이는데 괴테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로써의 명성을 얻게 되고 결국에는 '파우스트'라는 불멸의 작품까지 완성하는 것을 볼 때 당시 시대가 미처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하고 싶은 바를 건드린 것이 아닐까 싶다.

 

과거 서양이나 동양이나 똑같이 지금과 같이 평균 수명이 길지 않을 때는 10대에 이미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집에서 정해진 짝이 있었다. 원하지 않는 짝은 사실 복불복에 가깝지 않았나 싶다. 어떤 인간이 내 짝이 되어 여생을 살아가게 될련지 어떤 사전 정보도 없는 뽑기였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진 짝은 평생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두번의 기회가 오는 경우는 극히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아직 결혼을 하지도 않았는데 단지 약혼을 하거나 결혼을 하기로 정해진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이성에 대해 무감각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부러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서만 머물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성에 대해 가장 왕성한 호르몬이 생기는 10대에서 20대 시절에 이런 경험을 겪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한 반려자가 아니라는 것은 운명이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체념하는 것이지 결코 담담히 받아들인 감정은 아닐 것이다. 지금보다 감정표현을 자제했던 시대라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청춘 남녀이든 나이가 든 남녀이든 사랑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것은 본인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혼을 한 후에는 사회적 합의와 도덕교육에 의해 스스로 억제하려 노력하고 엄청난 불만이 있지 않다면 지금의 반려자가 있다는 감정은 다른 이성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것 또한 신기한 체험일 수 있고 놀라운 경험이다.

현재, 자신의 반려자가 없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선사한다. 자신이 바라보는 이성이 자신의 반쪽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드는 상대방을 만났을 때 저절로 모든 감각이 집중하게 된다. 보자마자 그런 경우도 있고 만나다보니 어느 순간 그럴 수 도 있다. 어느 순간이든지 사랑이라는 감정은 오늘부터 시작한다고 이야기하는 성질이 아니다.

현재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과거와 달리 행동반경이 워낙 넓어져서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었지만 과거에는 선택의 폭이라는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제한적이였다. 결국, 자기 눈에 콩깍지가 씌워여 한다는 의미라 사람이 많고 적고의 의미는 퇴색될지 몰라도 적은 인원이 있을 때는 그만큼 괜찮다 생각되는 이성이 나타나면 더욱 모든 감각이 곤두서지 않았을까 한다.

베르테르는 자신이 언제 어떤 방법으로 사랑에 빠질 것이라 예상하지도 않았지만 늘 그렇듯이 사랑은 자신이 인식하지도 못하는 순간에 불현듯 찾아온다. 호감을 느낀다는 감정은 여전히 미스테리하다. 호감이라는 것이 개인적으로 차별성은 존재하겠지만 딱히 정해져 있는 획일화된 감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감정이 아니라 호감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미지로 나에게 찾아온다.

샤로테는 이미 약혼자가 있어 늘 경계막을 마음속에 치고 남자들을 만났을 것이다. 당시 시대상황을 볼 때 당연하다. 정분이라는 것은 볼 때 생기는 것이다. 보지 않고 생기지 않는다. 자꾸 마주치고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어느순간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현재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인물이다. 바로 그 사람이 베르테르가 된 것이다.

초판 - 저작자표시: "Wikipedia: Foto H.-P.Haack"

보지 않으면 멀어진다는 표현처럼 베르테르는 샤로테에서 멀어지기 위해 노력했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일하러 갔으나 여러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샤로테를 보고 싶은 마음이 그를 다시 샤로테에게 끌어당겨졌다. 차라리, 애초부터 계속 봤다면 오히려 좋았을지도 모르는데 한동안 보지 못한 기간동안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확신하고 벼랑끝에 서게 된다.

 

샤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트가 있어도 집에 가고 그가 없을 때는 자신의 마음을 여러 방면으로 표현했다. 샤로테도 베르테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한다. 그게 바로 사랑이다. 숨길려고 해서 숨길수 없는 감정. 당시에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베르테르는 그저 옆에 있기만 원했을지도 모른다. 샤로테가 자신이 움직이는 마음에 흔들려 베르테르를 흔든 것이 베르테르를 극한의 상황까지 몰고 간 것으로 보인다.

 

샤로테, 알베르트, 베르테르 이렇게 세명은 함께 공존할 수 없다고 믿는다. 누군가 한 명이 사라져야만 한다는 믿음은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는데 어떻게 보면 강요당했다고 할 수도 있다. 분명히 베르테르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적극적 동조자가 있고 방임자가 있다. 이 둘의 관계는 과연 계속 이어지는 삶에서는 어떻게 흘러가게 되었을까?

 

죽은 자는 불멸의 명성을 얻고 지고지순한 사랑의 대표자가 되었지만 남은 자들은 그 운명과 무게를 오롯이 전부 온 몸으로 받아 견뎌야만 한다. 더구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은 지탄받을 수 있지만 그가 선택한 이유를 알게 되면 모든 사람들은 베르테르를 아름답게 여기고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칭송할 수 있어도 남은 자들에게는 비난과 힐난을 받게 될 것이다. 실제로,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단순히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흔히 보는 삼각관계에 의한 치정 이야기도 아니다. 워낙 극단적인 선택을 해서 유명해졌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알려주는 고전이다. 사랑이 전부가 아닌 사람들이 있다. 사랑이 전부인 사람들이 있다. 둘 다 힘든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삶만큼 행복하고 풍족한 인생을 즐기는 삶도 없겠지만 그 사랑이 자신이 열렬히 사랑하는 이성간의 사랑만으로 그친다면 이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사랑은 이성간의 사랑에만 그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첫 사랑에 실패한다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시의 사랑이 짝사랑이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지금 만나는 또는 애타게 그리워 하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나이를 먹으면 알게 되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참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아저씨가 된다는 것이 문제다.

 

그런 이유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그렇고 그 이후의 많은 작품에서 여전히 사랑은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갖고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사랑을 매개로 이뤄지는 많은 것들로 인해 역사는 발전하고 퇴보를 했다. 우리들은 그런 소설을 읽으면서 대리만족을 하고 내가 차마 선택하지 못한 행동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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