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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랑의 힘에 사로잡힌 삶 - 세이비어 교회 창립자 고든 코스비의 묵상집
고든 코스비 지음, 유성준 옮김 / 평단(평단문화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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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독교 모태신앙이다. 오프라인에서는 굳이 숨기지 않았지만 온라인에서는 굳이 알리지 않았다. 내가 쓰는 글이 종교라는 필터링으로 걸려 선입견을 갖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데 혼자 오지랍이었다. 더구나, 기독교라고 부르지 않고 개독교라는 표현을 하는 것처럼 그닥 평판이 좋지 못하다는 느낌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 듯 하다.


여러 책을 다방면으로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내 종교를 밝혀야 했다. 기독교 책을 올릴때도 그렇고 철학이나 기타 관련된 책을 읽게 되면 자연스럽게 내 사상중에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적인 관점은 배제할 수 없다. 나같은 경우 기독교인이지만 좀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선데이 크리스찬이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성가대도 하고 회장단 활동도 하고 공연도 섰다. 20대에는 교회에서 교사도 했다. 30대에는 고등부 부장까지 했었다. 20대 초반에는 성인 예배 성가대도 섰고 덕분에 세종문화회관에도 성가원으로 서기도 했다.


지금은 주일 예배만 드리는데 기독교에는 바리새파라고 하여 남들에게 보이는 것에 좀 더 치중하는 파인데 지금까지 주일에 예배를 빠진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일요일 오전은 예배드리는 것으로 정하고 있어 대부분 제외한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점도 컸다. 하지만, 봉사활동을 하는 것과 신앙심은 별개의 것이라 본다. 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신앙심도 많다고 할 수는 없다. 교사를 할 때도 나는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지 기도와 같은 신앙적인 측면은 게을리 했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매주 빠지지 않고 교회에 오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담임교사가 빠지지 않고 오면 아이들은 신경을 쓰지 않는것 같아도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런 이유로 난 교사를 했을 때 단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교회는 믿음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있어 참 힘들다. 무엇인가 부탁을 할 때는 꼭 믿음을 들먹인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 '그게 정말로 하나님의 뜻인지, 저에게 부탁하는 당신의 뜻인지 모르겠네요.' 그럼에도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부탁을 하면 수락을 하고 봉사를 하게 되었다. 지금은 여러가지 이유로 봉사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다. 주로 강의를 주일 오전에 하고 있기에 1부 예배를 드린다.


읽는 책의 권수에 비해서는 기독교 서적은 거의 읽지 않았다. 그나마 매일 하루에 딱 한 장의 성경을 오전에 일어나 씻고 읽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마저도 매일 판에 박힌 기도라는 함정이다. 10년 넘게 변하지 않는 기도내용. 대표적인 기복신앙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하는. 그럼에도 나는 기독교인이고 믿는다. 지식이 쌓이며 이에 대해 흔들리기 했지만 역시나 믿는 쪽을 선택했다. 그게 더 인생을 풍성하게 해준다.

일부 기독교인들의 종교인답지 못한 행동에는 나도 실망을 금치 못한다. 종교인이 아닌 한 개인의 이익과 욕심을 넘는 탐욕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는 행동은 면죄부를 판매하던 중세시대랑 다를바가 없다고 느낀다. 다만, 그 점은 기독교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결합되어 얼마나 무섭게 인간을 변화시키는지 우리는 역사를 돌아볼 필요도 없이 지금 당장도 뉴스를 통해 목격하고 있다.


진정으로 기독교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봉사한다. 양지보다 음지에서 활동하기에 일반 사람들이 모르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기독교인으로 음지에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많은 사람을 알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행동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일반인들은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분들은 진정으로 이 땅에서 낮은 곳에서 임한다. 높은 곳에서 빛은 이상한 놈이 다 차지하고 있다.


<위대한 사랑의 힘에 사로 잡힌 삶>의 저자인 고든 코스비는 미국의 세이비어 교회의 창립자로 낮은 곳에서 임했던 목회자다. 스스로 빛내려고 노력하지 않고 믿는 바를 실천하려 노력했다. 교회를 대형화 시키지도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 목회자다. 이런 목회자들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욕을 먹으면서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종교가 된 것이다. 권력과 이득과 욕심을 쟁취하기 수단으로서의 종교인이 아니라.


이 책에 대해 이러쿵 저렁쿵 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신앙에 대한 부분이라 뭐라고 서평을 쓰는 것이 어렵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뭐라 표현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이상으로 줄인다. 대신, 책에서 몇 몇 글은 꼭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좋은 글로써도 충분히 읽어 볼만하다는 느낌이 들어 그 부분중에 몇몇을 발췌하여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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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로 가는 길 - 이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적 가르침
무함마드 아사드 지음, 하연희 옮김 / 루비박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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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크게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로 나눈다. 각 지역에 대한 구분은 유럽인의 관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랍과 우리를 같은 아시아로 묶는다는게 이해되지 않는다. 유럽인들에게 아랍은 지근거리에 있는 아시아였고 후에 만나게 된 중국도 같은 땅덩어리에 있으니 아시아로 엮어 버린 것이 아닐까 한다. 유럽은 지들끼리 서로 지지구 볶고 하니 이해라도 되는데 아랍과 우리는 같은 아시아로 묶어 취급하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본다.

 

아랍과 우리는 만날 일도 거의 없었다. 오히려 유럽과 아랍은 서로 만나기라도 하고 존재라도 의식하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그로 인해 동아시아는 여러모로 손해를 많이 본다. 엄연히 아랍과 동아시아는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유럽이 발달하며 유럽의 문명은 어느덧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친숙하다. 미국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에게도 유럽의 문물은 너무 자연스럽다. 아랍은 전혀 친숙하지 않다. 굳이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아랍은 불행히도 한국의 눈으로 본 시선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편향적인 스펙트럼으로 본 시선이다. 특히나 헐리우드가 자신들의 이익과 재미를 위하여 가공한 이미지로 우리는 아랍을 대하고 있다. 문명의 4대 발상지이고 전 세계의 아주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슬람 문화와 종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극히 없다. 코란이나 모하메트와 같이 자주 들리던 단어들이나 친숙하지 그 외에는 이슬람에 대해서는 테러라는 아주 부정적인 이미지만 남는다.

 

지적인 궁긍증 차원에서 이슬람에 대해서는 배우고 싶다는 평소에도 했다. 그동안 이슬람에 대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봤다. 이슬람에 대한 역사였다.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한 때 세계를 지배했던 이슬람의 역사에 대해 언제 한 번 책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럽인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것도 유럽인들에게 이슬람의 정보를 알려준 유럽인이라니 특이하다.

 

시대 배경은 1990년대이다. 이 당시의 배경을 말하자면 사우디아라비아가 탄생한다. 저자의 이력도 특이하다. 저자는 유대인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이지만 종교가 없다. 신에 대해 무신론자였다. 신문기자가 된다. 이스라엘에 있는 사촌 형의 초대로 이슬람과 만나게 된다. 단순히 잠시 쉬로 간 이슬람과의 만남은 한 남자의 운명을 송두리째 변화시킨다. 무신론자라고 하여도 기독교적인 사회에서 살아온 저자는 어쩔 수 없이 유럽적인 관점으로 이슬람 사람들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미지는 최근에 만들어진 이미지라 이때만해도 지금과 같은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 여전히 유럽인들이 이슬람을 폄하하고 낮춰보며 자신들보다 모자란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들에 대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려 했고 이슬람도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고 새롭게 국가가 태동하던 시기였다. 이럴 때 저자는 이슬람을 방문하게 되었다.

저자가 이슬람을 방문하여 놀란 점은 이들이 순진무구할 뿐만 아니라 유럽인에 비해 정이 넘치고 함께 나누려 한다는 점이었다. 유럽인들은 내것 네것이 명확하지만 이슬람은 형제로써 함께 무엇이든지 나누려고 한다. 또한, 서로 상대방의 잘난점을 인정하지 않아 어려울 때는 뭉쳐도 위기를 극복하면 또 다시 서로가 반목한다. 끊임없이 자신들끼리도 끊임없이 국가가 세워지고 있던 때라 더욱 심했던 것으로 보였다. 

 

크게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이 당시에 아쉽게도 이슬람은 기독교적인 요소가 삽입이 된다. 이슬람은 원래 종교라고 해도 이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현세와 내세를 함께 믿지만 내세는 미래에 발생할 일이고 현세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기에 내세보다는 현세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신비주의적인 요소도 거의 없었다. 이성을 통해 신을 만날 수 있는 종교였다. 연금술이 발달하고 천문학이 발달한 이유가 바로 이슬람은 이성을 중시한 종교라 그렇다.

 

불행히도 이슬람은 점점 이성을 중시하지 않고 기독교적인 신비주의를 받아들인다. 이슬람은 원래 사제가 필요없다. 너도 나도 다 사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점점 이슬람은 사제들이 힘을 갖게 되고 이들이 자신의 힘을 키우고 유지하기 위해 이슬람을 변질시킨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교묘히 조종한다. 이것을 모르고 사람들은 코란이 알려준 본질보다는 엉뚱한 면에 집착하고 받아들여 이슬람에서 오히려 더욱 멀어졌다고 한다.

 

저자는 우연히 가게 되었던 이슬람 나라에 대한 정보를 독일의 신문에 기고를 한다. 냉정하게 이슬람에 대해 유럽인의 편향적인 관점이 아닌 객관적인 관점을 기사로 송고한다. 당시에 사우디아라비아를 세운 왕과 알게 되고 그를 돕기도 한다. 유럽인이지만 점점 이슬람에 동화되면서 이슬람 사람보다 더욱 이슬람의 근본적인 본질에 대해 집중하고 이슬람 사람들에게 잘못된 점을 지적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이슬람 사람입니다."라는 소리까지 듣는다.

 

무신론자이고 유대인이며 기독교적인 사고를 하던 저자는 이슬람을 개종을 한다. 게다가 아랍 모든 나라를 전부 돌아다닌다. 아프카니스탄까지 돌아다닐정도로 아랍과 이슬람의 모든 유적지와 성지까지 돌아다니며 이슬람에 대해 종교적으로 귀의를 한다. 단순히 종교적인 귀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인들에게 이슬람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는 전달자의 역할까지 한다. 당시로써는 유일한 사람인 듯 하다. 책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럽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걸 보면.

 

유럽에서 넘어온 유럽인이자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이슬람의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추구를 한 인물이라 아랍의 여러 민족들과 왕족들은 그를 융성하게 대접한다. 이 당시는 아직까지 아랍나라들도 제대로 국가로써 제대로 갖춰지기 전이라 그가 가는 곳마다 역사적인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직접 왕에게 부탁을 받고 사명을 수행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책에서 당시의 왕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각각 건국의 아버지들이다. 저자도 사진이 나오는데 나중 사진을 볼때면 유럽인이 아닌 아랍민족으로 느껴진다.

 

저자는 이슬람의 순수한 종교적인 본질에 동화되고 이슬람 사람들의 유럽인들과 다른 면에 개종을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 저자가 이슬람의 좋은 점이라 이야기하는 부분은 동아시아라고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렇게 따지면 아랍과 동아시아를 아시아로 묶은 점이 어색하지 않게도 보인다. 책을 읽어보니 유교는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유교도 충분히 종교로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게 보였다. 이슬람도 내세보다는 이성이 더 강조된 종교라고 하니.

 

이 책인 <메카로 가는 길>은 유럽인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된 계기와 여정만 있지 않다. 저자가 살았던 당시의 이슬람 국가들의 상황과 그들이 유럽과 반목하며 - 당시는 제국주의가 번져가던 시기 - 각자의 국가를 세우는 역사를 알게 해 준다. 지금과는 다른 당시 아랍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친숙하지 않은 지식은 익숙해지고 머리에 들어오는데 시간이 걸린다. 

 

<메카로 가는 길>은 그나마 저자가 기자로 활동을 했기에 보다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과 묘사가 있어 그나마 많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다. 그럼에도 꽤 오랫동안 여러 이유로 읽었던 책이다. 이슬람은 여전히 나에게는 미지의 공간이자 어려운 영역이다. 우연히 읽게 된 이 책으로 인해 조금 더 이슬람에 대해 - 그것도 근본적인 본질 - 알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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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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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발상지는 인류가 터전을 잡고 생활을 했다는 점도 있지만 그 부근에서 많은 것들이 탄생을 했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그 중에 재미있게도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천추교)는 같은 신을 믿고 있다. 각자 다른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신이다. 신은 다 같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같은 신을 믿고 있지만 서로 열심히 싸운다. 또한, 그 뿌리로 올라가면 같은 민족이라 할 수 있는데 가까운 놈이 더 무섭다는 이야기가 이뤄지고 있다.

 

크리스트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존재가 핵심이다. 예수님의 핵심은 태어난 것이 아니라 죽었다는 것이다. 죽었다는 부부은 어느 누구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다 동일한 결과이지만 다른 부분은 부활을 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인간이 아닌 신이 되는 것이다. 그 이후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상을 널리 전파하여 아랍을 넘어 서양을 비롯한 지구의 모든 영역에서 영향을 미친 종교가 되었다.

 

이슬람 종교에서도 예수님의 존재는 있다. 다만, 여러 선지자중에 한 명으로써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한, 이슬람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관심이 갔다. 물론, 현재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라는 점도. 끝으로 종교로 접근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접근하는 예수님이라는 점에서 흥미가 갔다. 한 마디로 신으로써의 예수님이 아닌 인간으로써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니 말이다.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인물이라면 분명히 성경이 아닌 곳에도 예수님에 대한 많은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다. 또는 그와 관련되어 있거나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을 통해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동안의 이야기를 추측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생존했던 인물이라는 점은 역사적 사실이다. 여기서부터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과 당시의 기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예수님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다.

 

신으로써의 예수님에 대해서는 딱히 반박을 할 수 없겠지만 인간으로써의 예수님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기록이 있다. 문제는 이 부분을 종교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인데 사실 예수님을 신으로써 믿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불순하고 불쾌하다. 하지만, 이 책은 전적으로 역사적으로 살아있던 인간 예수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당시의 시대적 환경과 배경, 예루살렘 주변에 살던 사람들과 주요 인물들을 통해 예수님의 인간으로써의 삶을 추적한다.

 

철저하게 인간으로써의 예수님에게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어 신으로써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배제하거나 무시한다. 몇몇 장면에서는 신으로써의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그것이 아니라고 이야기도 하지만 증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증명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역사적으로 남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언급을 하는 것으로 책을 서술되어 있다. 이 책은 예수님을 부정하거나 깎아 내리기 위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은 초반에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 대한 전체적인 역사적인 사실을 먼저 알려준다. 그 후에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는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과 역사적 사실을 교차로 알려준다.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 베들레헴으로 가는 이야기는 당시 로마의 조세체계상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과 갈릴리 지역에서는 전체 동네 인원이 몇 명 되지도 않아 목수로써 살아가기는 힘들어 근처에 보다 큰 도시에서 하루를 겨우 살았을 것이라는 내용과 예수님의 가족은 대가족이였다는 사실.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메시아라며 등장을 했던 시기였는데 가장 유명한 세레 요한이 사실은 예수님의 스승이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과 달리 세레 요한에게 세레를 받은 여러 사람들 중에 한명으로 예수님을 세레를 받았을 것이고 세레 요한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 후에 세레를 받은 후에 세레 요한 밑에서 제자로써 가르침을 받은 것이 성경에서 광야로 나간 시기라는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며 선교활동을 했는데 예수님이 다니던 곳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있던 지역이였다. 점점 예수살렘으로 다가오며 예수님의 명성은 높아졌는데 귀신을 물리치거나 치유하는 행적은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던 것이였고 사람들은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인데 다만, 당시에 마술사들과 같은 사람들도 했던 행동인데 다른 점은 전혀 돈을 받지 않고 행적을 했다는 점이라 점점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행했던 말들이나 행동은 당시 유대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예루살렘 내부는 원래부터 이방인을 위한 공간이 있었고 사고 팔며 장사하는 공간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지 성전 내부가 부패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제사장들이 로마와 결탁한 것은 맞지만. 아울러 예수님이 바리새파에 대해 한 이야기와 달리 바리새파와 교류도 했고 실제로 예수님을 무덤으로 이장한 것도 바리새파였다고 한다.

 

예수님이 십지가에 돌아간 것도 당시 로마에서는 흔한 일이였고 '강도'라는 표현은 로마에 반기를 든 사람들에게 했던 표현이고 성경에서는 좌우에 두 명만 나오지만 실제로 그 장소는 엄청나게 많은 인원이 십자가에 죽던 장소였고 부패해 썩을때까지 놓던 곳이라 온갖 짐승들이 썩은 시체를 먹을 정도로 십자가에 많은 사람이 죽었고 당시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지역을 지배했던 인물은 예수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행동할 정도의 인물이 아니라 그전에도 수 많은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던 인물이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내용이 성경속의 예수님과 실제 역사속에서 유추할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관련 기록과 역사적 사실을 통해 예수님에게 했던 것과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후 가장 중요한 인물인 바울에 대해서 나온다.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은 엄청나게 중요한 사실인데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해 한결같이 목숨을 걸고 이야기를 했다고 하며 역사적인 사실로 밝히지는 못한다. 또는 할 수 없어 보인다.

 

그저, 유대인들의 종교로 남을 수 있었던 예수님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역할이 엄청나게 크다고 평소에도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는 의외로 바울의 노력은 초반에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나온다. 예수님의 부활이후에 그의 동생인 야고보가 실질적인 우두머리로 예수님을 전파할 때 될 수 있는 율법에 따를 것을 요구했는데 바울은 그런 것을 무시했다.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모른다. 환상으로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기존 체계와는 다른 이방인을 위한 예수님을 전파했다.

 

야고보를 비롯한 제자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오히려 바울이 다니던 곳마다 따르지 말 것을 지시한다. 좌절을 겪었을 바울인데 그의 사후에 그의 제자들이 성경을 쓰면서 바울의 사상을 많이 받아들여 성경에 넣게 된다. 그 이유는 당시에 로마는 유대말살정책을 폈고 실제로도 몰살했기에 유대 율법을 지키는 예수님을 널리 전파하며 전도할 수 없기에 이방인들이 부담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종교로써 만들기 위해 첨삭을 했다는 것이다.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열심당은 예수님 부활 30년 후 정도에 생긴 것이고 당시에는 열심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져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세레 요한이였고 예수님도 젤롯이라는 열심이라는 사상을 받아들여 전파했고 이로 인해 십자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물론, 열심이라는 사상은 어디까지나 유대인의 종교인 하나님과 결부가 되어 있어 유대인의 해방이였지만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복음서들이 써지고 전파되면서 지상의 국가 아닌 이 땅에 없는 국가라는 개념으로 변경이 되었다고 한다.

 

역사속에서 만날 수 있는 예수님과 당시 시대상황을 통해 성경속의 예수님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하나씩 알려주는데 오히려 덕분에 성경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어차피, 종교는 믿음의 영역이라 지식적으로 아무리 뭐라고 해도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그 믿음이 각종 사건 사고와 문제를 일으키는 원흉이 되기는 하지만. 어찌되었든 재미있게 읽었다.

 

그건, 아마도 '젤롯'을 통해 처음으로 접하고 알게 된 지식이 아니라 이미 익히 다양한 경로를 통해 알고 있던 내용이라 기독교인 내가 재미있게 보다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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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청년 바보의사
안수현 지음, 이기섭 엮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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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내가 믿고 있는 종교를 남들에게 굳이 전파하려 할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그저, 내가 믿는 종교를 나로 인하여 욕을 먹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남들이 묻지 않는데 굳이 먼저 이야기를 하지도 않지만 내가 믿는 종교를 베드로처럼 부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만약, 그 물음이 내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온다고 해도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제일 최선은 나로 인하여 욕을 먹는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사람들이 나를 본 후에 '저 사람이 믿는 종교를 나도 믿어봐야 겠다'정도이지만 밝히지 않는다면 분명히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 해도 이 책을 읽으면 그저 부끄러워지고 한없이 작아짐을 느낀다.





종교의 지도자나 나서서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영적인 존재만이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더 깊은 공감과 유대감을 형성하여 많은 영향을 받는 것처럼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가깝게 다가 설 수 없는 분들이 하는 이야기의 이론적인 설교나 접근하기 힘든 그 분들의 알 수 없는 행동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하면서 내 행동을 돌아보게 만들어 준다.





'낮은 곳에서 임하소서'라는 말이 있다. 말이 쉽지 이 말을 실천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너무 힘든 욕망이다. 나서려 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지만 인간은 누군가 자신을 알아주기 원하고 떠 받쳐 주는 것을 더 좋아하는 존재이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되고 충분히 사람들에게 그런 칭찬과 존경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무시하고 한결같이 낮은 곳에 임한다는 것은 보통 어련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남들이 세운 원칙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는 절망과도 같은 일이다. 스스로 세운 원칙을 지키기 위해 남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는 차라리 그 원칙을 안 지키는 것만 못하다. 책의 주인공인 안수현씨는 자신의 원칙으로 인해 남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자신이 편안하고 쉽게 갈 수 있는 것을 포기하며 실천하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의사들에게 갖는 이미지는 돈 많이 버는 직업, 개인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존재자로서의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받는 사람이면서 환자로써 의사들을 만날 때 충분하게 눈을 맞쳐주며 이야기해 주지 않는 위에 군림한 사람이나 알 수 없는 용어를 자연스럽게 써 가며 우리에게 위압감을 주는 존재로도 보인다. 히포크라테스 선언을 통해 직업인으로써 갖는 이미지보다는 인간의 생명을 위하는 사람으로 보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나고 느끼는 많은 의사들이 그렇다.





분명히 그렇지 않은 의사들이 더 많을 것이고 그들이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처리해야 하는 일의 속성상 그럴 수 있지만 일반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한다. 환자의 눈높이에서 환자를 돌보는 의사들의 이야기가 회자되는 것은 그만큼 드물기 때문으로 보인다.





안수현이라는 의사는 그런 부분에서 진정으로 낮은 곳에서 환자의 눈 높이 정도가 아니라 환자가 어려워하고 힘들어 하는 점을 미리 먼저 긁어 줄 정도의 의사라는 점에서 뛰어난 의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내가 의료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확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놀란 점은 단순히 환자를 돌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환자의 집까지 방문하고 환자들의 대소사까지 챙겨줬다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의사라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못했을 듯 하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 정도까지는 직업적인 사명감이나 소명감을 갖고 했겠지만 그 이상으로 환자들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의사들 입장에서도 호불호가 있었겠지만 진정으로 한 명, 한 명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행동이라 생각한다.





책은 의사 안수현이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벌어진 여러가지 상황과 내면을 일기 형식으로 인터넷에 올린 글들과 안수현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 사람들의 추모형식의 글로 엮여져 있다. 의사로써 분만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길잡이 역할도 했고, 한 교회의 성경모임 리더자로서 겪은 리더로써의 어려움과 사명감에 대해서도 언듯 언급되면서 이 시대의 리대가 진정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서까지 제시하고 있다.





시대가 가면 갈수록 각 개인들의 자존심과 자아는 강해지고 내가 남들보다 뛰어나고 남들로부터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자의식은 강해지고 있다. 최소한 속으로 어떤 새각을 갖고 있던지 간에 겉으로 들어나는 모습에서는 남들을 존중하고 무릎을 꿇을 정도의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 이제 구성원 다수는 결코 리더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안수현이라는 사람은 단순히 의사로써 자신의 의술을 펼친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써 다른 인간을 동등하고 대하고 진심으로 - 측은지심이 아니라 - 한 인격체로 마음을 교환하고 자신에게 주워진 것들을 불만 불평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 실천했다. 책을 통해 의사로써의 기술이 뛰어난지는 전혀 알 방법이 없지만 그가 훌륭한 의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책의 거의 말미가 되도록 안수현이라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나오고 있지 않아 궁금했다. 암같은 불치의 병에 걸려 돌아가신 것으로 오독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자신의 일기가 나오리라고 생각했으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부분에서는 진정으로 인간은 신의 깊은 뜻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한 사람의 인생 성공(????)여부는 그의 사후에 알 수 있다고 한다. 이제 겨우 33살에 불과한 안수현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장례식장에 몇 천명이나 되는 사람이 왔다는 것은 그가 전파한 것들이 헛되지 않고 그로 인해 변화된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나와 동년배로 보인 한 사람과 비교하여 지금 당장 내가 사망한다면 장례식장에 오는 사람이 몇 천명은 커녕 몇 십명밖에 되지 않을까 한다.





예수님이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셨다면 지금과 같은 종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수현이라는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 의술과 인술을 펼치며 옆의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동거동락하며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서 변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안수현이 보여준 사랑에 감화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후에 커밍아웃을 하며 안수현씨와 같은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책의 이야기는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죽음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면 혹시 그에 대한 결례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 생존하지 않다는 점에서 - 그로 인해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 곳곳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안수현씨가 지키려 했던 가치관과 삶의 자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현재에도 아직 그가 이 땅에서 살고 있다고 보인다.





책을 읽으며 몹시도 부끄럽고 몹시도 창피하고 몹시도 부러웠다. 누군가에게 이렇게도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부러웠지만 그 이외에 그가 했던 그 모든 것에 대해 지금의 내 자신이 하는 행동과 생각에 부끄럽고 창피하면서 무엇인가 울컥하며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어떤 행동으로 구체화되어 움직일 지는 아직 모르겠다. 오랫동안 여러 생각을 하고 있고 해야지라며 미루고 있던 것들이 바로 지금이라는 속삭임을 해 주고 있는 듯 하기도 하다. 분명히 책을 읽은 지금과는 달리 오래되지 않아 잊고 살 수 있지만 결코 잊지 않고 구체화되지 않은 이 울컥을 실천할 것이라고 이렇게 글로써 남기며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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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3 -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열쇠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3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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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소개를 하고 그 중에 사랑과 관련된 신화만 소개한 후 이제는 신화에 나오는 내용을 토대로 신들과 더불어 사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신화중에는 굳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크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아니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희미하고 의미없을 때도 있었지만 신들이 만든 최고의 작품인 인간을 자기 휘하에 두기 위한 신들끼리 서로 다툼이 있을 정도로 인간은 신들에게도 소중한 존재이다.

 

어찌보면 너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중에 오직 인간만이 신을 찬양하고 신에게 기도하며 신에게 감사의 제물을 드리는 등 신의 사랑을 받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반대로 인간만큼 신을 노여워하게 만드는 존재도 없고 신에게 도전하는 존재도 없기는 하지만 신에게 있어 인간은 비록 자기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지만 그만큼 더 애정이 가는 존재이다.

 

신들도 워낙 종류(???)가 많아 신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각 신들의 성격 - 이라기 보다는 신격이라 해야겠다 - 을 파악해야 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며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알아야만 신들로부터 저주나 미움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신들 중에 최고는 제우스 신이지만 인간이 칭송하고 갈구하는 대상은 꼭 제우스가 아니듯이 인간과 여러 에피소드를 읽으키는 신도 제우스는 아니다.

 

한편으로는 가장 망각한 제우스라는 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우스가 아닌 다른 신을 부르짖으며 외친 인간들이 있는지 좀 의아하기도 하다. 각 상황에 맞는 신이 있는 것은 알겠지만 그런 모든 존재를 뛰어넘는 신이 제우스이니 말이다. 물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는 절대 권력은 갖고 있지만 아주 아주 인간적이며 약간 우유부단하고 난봉꾼의 이미지마저 갖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점이 아마도 다른 신들을 갈구하는 인간들이 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신들도 인간도 절대라는 진리는 없다.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틀린 것도 없는 것이 바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나오는 세계관이다. 신화라는 것은 어느 정도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거나 정당성을 확복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퍼뜨리거나 약간은 각색한 이야기라 생각한다.

 

뜬금없이 나타난 지도자들을 일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할 때 신화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 만큼 뛰어난 마케팅은 없기 때문이다. 그 사실여부를 확인 할 길이 없는 신화라는 매개체를 통한 권력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것 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권력을 가진 자들을 직접적으로 반대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고대 사회일수록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신화라는 장치를 이용하여 풍자하고 조롱하고 백성의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에 나오는 내용들은 절대권력을 갖고 있는 신이지만 인간을 존중하고 힘없는 인간이지만 신을 다른 신이나 다른 사건을 통해 조롱한다고 볼 수 있다. 책에 나오는 타이틀처럼 인간과 신과의 약속은 서로가 지켜야 하는 체제이고 규범이라는 것은 권력자와 백성이 지켜야 할 도리인 것이다.. 또한, 신들은 앎과 겨룸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야기자체가 권력자들이 자신의 치세를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한 정치수단일 수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3권까지 오는 동안 꽤 많은 신화를 읽게 되느데 그 중에는 중복되는 사건들도 있고 꽤 유명하야 알고 있지만 그 세부내용까지는 확실히 알고 있지 못한 신화들이 있었는데 3권까지 읽는동안 세부 내용을 확실히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일부 신화는 눈으로 들어 왔다가 공기로 빠져 나가기도 했다.

 

무엇보다 신들의 족보가 참으로 복잡하고 책에도 나오는 용어처럼 실타래처럼 얽혀있어 아직까지도 어느 신이 어느 신과 연결되어 있는지 아리까리하다. 프로메테우스같은 경우에 유명한 신화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벌로 간을 독수리에게 쪼아 먹힌다는 것만 알았지 그 이후에 풀어나서 신들의 궁전에서 살게 되면서 그 이후로는 신화세계의 이야기에서 완전히 빠졌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리스 로마신화가 단순히 그리스와 로마에 - 솔직히 그리스 로마신화라고 하지만 로마 신화는 어떤 것을 말하는지 모르겠고, 실제로 로마의 신화들은 대부분 생존 인간의 사후에 신으로 대접받는 것으로 알고 있고 로마는 그리스 신화를 존경하고 선진문물로 받아 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에 비슷한 내용들이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에도 말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통해 서양을 바라보는 시선이 깊어지고 이해의 폭이 넓어졌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 무엇보다 서양의 역사 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등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 그리스 로마신화를 읽으므로 막연히 그리스 로마신화라는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인지하고 있어 향후 서양의 여러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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