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에서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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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에서 1편은 http://blog.naver.com/ljb1202/191790484

 

'인간의 굴레에서 1'에서 첫 사랑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필립의 마지막 장면에서 짜증이 났지만 헤어지며 1편이 끝나 괜히 기쁜 상태에서 다른 책들을 읽고 다시 '인간의 굴레에서 1'를 읽게 되는데 필립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자 상당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괜히 알고 있던 친구가 다시 등장한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놈의 첫 사랑은 남자를 아주 멍청하고 단순하게 만드는 요물이다. 꼭 필립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그렇다. 첫 사랑을 평생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간다는 남자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남자들에게 첫 사랑은 지울 수 없는 문신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한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고 다시 보게 되면 잊었다고 생각하는 감정이 다시 새록 새록 되살아나는 상대이다.

 

나쁜 남자나 나쁜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젊은 시절 이성에 사랑이 빠지는 대부분의 청춘남녀들의 공통점인데 책을 읽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싶기도 하다. 태초의 이브와 아담이 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과를 결국에는 먹는 것처럼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매력에 끌려 자신에게 심하게 막 대해도 더욱 좋아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대부분의 착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평소에 하지 못하는 일이나 생각을 자연스럽게 뱉고 행동하는 이성을 볼 때 갖고 싶다는 욕망이 불꽃처럼 살아난다. 자기처럼 착한 이성에게는 오히려 고리타분함을 느끼고 같은 극끼리는 서로 밀어내는 것처럼 다른 극에 나도 모르게 끌리게 되는 감정이 이성이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립에게 밀드레드는 요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필립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매력을 인지하고 언제든지 불리하고 아쉬울 때는 어김없이 뻔뻔하게 필립을 찾는 밀드레드를 볼때마다 울화통이 터지지만 그것이 바로 청춘의 매력인가 싶기도 하다. 필립과 같은 젊은 남자에게는 내면의 매력보다는 외적인 매력이 더욱 미칠 듯이 다가올테니 말이다. 

 

이미,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계속 옆에 간직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첫사랑의 매력일 것이다. 남자들이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다시 찾고 만나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이제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도 여전히 곁에서 첫사랑을 잃고 싶지 않은 필립의 마음은 아닐까한다. 

 

반면, 철저하게 남자의 관점이지만 - 시대상황을 볼 때 - 자신의 매력때문에 필립이 자신을 가까이 두고 있다고 믿었던 밀드레드가 온갖 유혹에도 필립이 넘어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저지른 사건은 끔찍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한 상대방을 가만히 놔두냐는 것이다. 측은지심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인간의 굴레에서' 사랑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돈이다. 밀드레드가 사랑하지도 않은 필립 근처를 떠나지 않고 맴도는 것도 바로 돈이 없기 때문이고 필립이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것도 돈때문이다. 시대가 아직 자본주의라는 말이 회자되지 않았을지라도 돈은 이미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광범위한 위력을 떨치고 있었다.

 

상류계층이나 하류 계층은 여전히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돈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 여부였다. 상류계층이라도 돈이 없으면 하류계층이 되는 것이고 -의사를 준비하던 필립도 돈이 없어 노숙자 생활과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기숙사 생활을 한다 - 하류계층이라도 돈이 있으면 상류계층 사람을 부리면서 살 수 있다. 

 

필립은 상류계층은 아니고 중류계층에 속했지만 특별히 돈이라는 것을 벌면서 살아 본 적은 없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통해 풍족하지 않지만 아쉽지 않게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본인뿐만 아니라 밀드레드까지 책임지고 살았던 것이다. 진정으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으니 돈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지만 딱히 준비를 한 적도 없고 대단히 노력을 한 적도 없었다.

 

어느덧 갖고 있는 돈은 다 떨어지고 - 인과응보에 속했다 -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필립은 맞서 싸우기 보다는 도망을 택한다. 정처없이 떠 돌아다니고 아직까지 체면이 앞서 - 이건 나랑 같다 ㅠ.ㅠ -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제대로 빌리지도 못하고 어렵사리 친하게 지내던 지인을 찾아가 다행히도 지인의 배려로 인해 맞설 용기를 갖게 되어 상점에 취직을 하게 된다.

 

늘, 문학을 이야기하고 예술을 논하던 필립은 눈 뜨고 일하고 피곤해서 잠에 골아 떨어지는 삶을 살게 된다. 일단,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인간은 그 다음을 생각하고 인식하고 노력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봉급에 정신이 멀쩡할 때에도 체력적으로 힘들어 휴식을 해야만 하는 삶이 반복될 때 인간은 단순해진다. 바로 눈 앞을 해결하는 것에 집중할 뿐이다.

 

숙부의 사망으로 받은 유산으로 다시 중산층으로 돌아온 필립은 무사히 의사과정을 마치는데 어려웠던 과정을 통해 오히려 자존감이 커지고 당당해 진다. 젊은 시절의 불같은 사랑은 이제 느껴지지 않지만 - 그 당시 나이로 30살이면 지금의 40살은 족히 되었을테니 -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니라 내가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여자라 판단되는 여성에게 청혼을 하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젊은 청춘 남녀들이 나쁜 남자, 나쁜 여자에게 끌리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환상때문이 아닐까 한다. 평소에 자신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생각이나 행동을 자신 앞에서 하니 끌리는 것이다. 특히, 자신에게 못되게 구니 오히려 이런 점이 매력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자석이 같은 극끼리는 밀어내지만 다른 극끼리는 끌어당기는 것과 같은 이치로 말이다.

 

점점,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신이 갖지 못한 인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인물을 만나게 되고 그런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이 좋아진다. 청춘의 시기라는 것은 반항의 시기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편안것을 찾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비슷한 조건과 비슷한 환경을 갖고 있는 이성과 만나게 된다. 사랑이냐의 여부도 중요하지만 후자도 결혼을 하면 중요한 것을 보면 정답은 없는 듯 하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인간이 태어난 의미에 대해서 필립이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태어난 이상 무엇인가 거창한 것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는 인간들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질문중에 하나로 보인다. 내용중에 양탄자 이야기가 나온다. '페르시안 양탄자 이야기'로 꽤 유명한 듯 하다. 사람들의 해석이 있던데 내 생각에는 인간이 태어난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거창하게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와 같은 문구도 있지만 인간이 태어난 의미를 찾으려 하니 대단한 것을 하려고 하고 자신의 존재를 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게 되니 이로 인해 본인 삶이 힘들어 지고 가끔은 역사가 힘들어 지기도 하다. '페르시안 양탄자'를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 달리 보이는 것과 같이 인생도 다르다는 표현도 하던데 그 보다 인간이 태어난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더 나에게는 정답에 가깝다. 허무주의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인정하고 노력을 하면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보인다.

 

그토록,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고 있어 불꽃같은 사랑을 경험했지만 필립은 우연히 결혼이라는 것을 결심하면서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현재에 안주하기보다는 보다 멋있고 있어 보이는 것을 찾아 다녔지만 그 보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더 행복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말이다.

 

자아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 자신이 현재 누릴 수 있는 작은 것을 소중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오손도손하게 가정을 꾸려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기에 그것이 인간이 태어난 의미로 규정할 수도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 말이다. 별 것 없는 하루 하루로 보일지 몰라도 말이다.

 

'인간의 굴레에서'를 읽다보니 앞으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책도 읽을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조금 부담스러워 읽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 당시의 책들을 읽는데 부담이 사라졌다. 아마도, 세계 문학 전집을 읽는 권수가 10권이 넘어가면서 예전의 글스타일에 어느정도 익숙해진 것이 아닐까 싶다.뭐, 흔히 말하는 만연체에 적응하면 되는 것이니..

 

열심히 썼던 6~7문단이 날라가서 다시 썼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쓸데없이 더 길게 필요없는 이야기를 첫번째보다 재미없게 썼다. 처음의 강렬한 감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굴레에서' 추구하는 인간들의 심리로 보인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추구말이다. 그래도, 이미 사라진 것을 어쩔 수 없어 이상으로 마친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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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에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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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은 영국 작가이지만 파리에서 태어나 의사를 하다 문학을 하게 된 인물이다. 고등학교때 '달과 6펜스'를 읽었는데 사실 당시에는 고갱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걸 보면 문학작품을 아주 안 읽지는 않았던 듯 하다. 전혀 기억에 없었는데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의 작품을 보다보면 읽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말이다. 문제는 읽었다는 기억만이 존재할 뿐 어떤 내용인지는 기억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뒤늦게 읽었다는 기억만이 작품을 보고 떠올랐을 것이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한다. 스스로 서문을 통해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아마도, 여러 추측과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밝힌 듯 한데 작품의 초기부터 밝힌 것은 아니고 작품이 출판된지 꽤 시간이 지난 후 작품이 빛을 발하며 갈수록 인기를 끌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때 새로운 판본을 내면서 밝힌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예측한다.

 

굴레라는 표현은 속박이라고 할 수 도 있는데 원제는 'of human bondage'이다. 번역서같은 경우에는 우리나라 말로 표현된 제목이 아니라 원제를 찾아보고 그 뜻을 파악하기도 하는데 이 책의 원제인 bondage는 덕분에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해 준다. 단어를 검색하니 19세용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여 찾아보니 인간의 몸을 묶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단순히 포박의 개념이 아니라 성적인 결박을 의미한다.

 

'인간의 굴레에서'라는 책 제목에서는 절대로 그러한 점을 전혀 의식하지도 뉘앙스도 알 수 없다. 그저, 인간이라는 존재가 유한하지 않고 특정한 상황이나 장소에 묶일 수 밖에 없는 걸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한편으로 1,2권으로 나눠진 책 중에 1권만 읽기는 했지만 bondage라는 의미중에 성적인 개념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을 듯 하다는 판단도 든다.

 

인간의 굴레에서 1권은 유년기 시절부터 20대 초반까지의 성장기를 그리고 있는데 지금보다 더 성숙하고 조숙했던 시대 - 책의 배경은 19세기 말이다 - 를 생각하면 젊은 남성에게 성적인 문제는 가볍게 다룰 수 있는 부분도 아닐 뿐더러 실제로 책에서도 자세하게 묘사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한 남성으로써 이성인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추파를 던지고 연예를 하는 모습도 그려진다.

 

인간이라는 몸은 한계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에 비해 영혼은 자유롭다고 하지만 과연 얼마나 자유로울까에 대한 부분은 의문을 갖게 된다.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자신이 보고 듣고 읽은 것을 결코 뛰어넘을 수는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신적인 존재(인간)는 없다고 볼 때 어떤 것이든 무조건 인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보인다.

1권만 해도 무려 500페이지에 빽빽하게 글들로 가득하다. 예전 작가들의 글은 페이지 마다 글로 가득하고 행간의 틈도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은 내용이 채워져 있다. 과거의 사람들이 현재의 사람들보다 더 한가하고 여유가 있어 더욱 많은 시간을 글쓰는데 집중할 수 있고 책 읽는데 집중할 수 있어 그렇고 현대인들은 워낙 바뻐 글의 행이 넓고 간단명료하게 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는데 불과 20년 전만해도 소설이라고 하면 의례 글들로 가득했다. '태백산맥'같은 경우도 몇 페이지에 이어서 새로운 문단도 나오지 않고 글이 이어질 정도이니 말이다. 그만큼 사람들은 책을 통해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의 많은 부분을 보낸 것이 아닐까싶기도 하다.

 

책의 주인공인 필립은 어릴 때 부모를 여위고 숙부를 통해 기숙사로 가 한쪽 다리를 불편하여 제대로 학교생활을 평범(??)하게 보내지 못했지만 나름 비상한 머리를 통해 성적을 유지했지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조기에 때려치우고 평소에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듣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파리를 가 2년 동안 노력하지만 자신은 이류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영국으로 와서 의사가 되기로 하는게 1권의 내용이다.

 

학교 기숙사에서 비록 따를 당했지만 인기있는 친구에게 관심을 받아 좋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새로운 친구를 찾아 간 인기남에게 -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방편으로 상대적 약자들을 가깝게 했는지도 - 절망하고 성직자가 되기를 바라는 숙부와 달리 오히려 종교에 대한 반감을 통해 옥스포드를 포기하고 파리에서 화가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실력이 향상되지만 출품에서 떨어진 후 냉정한 비판을 받고 예술에서 이류가 되는 것은 비참하다면서 아버지의 직업이였던 의사가 되기로 하고 의사 수련을 받지만 중간 시험에서는 2번이나 낙방을 한다.

 

파리로 가기전 자신의 이모뻘인 여성과 남성으로써의 호기심을 충족하고 파리에 가서는 남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여성에게 약간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오해를 사게 만들어 상처를 준 후에 영국으로 건너와 자신에게 관심을 전혀 갖지 않고 반항(??)하는 여성에게 마음이 끌려 공부는 뒷전이고 오로지 한 여자에게 모든 시간을 받쳐 얼마정도의 관심과 시간을 공유하지만 냉정한 여자는 사랑도 딱히 하지 않았지만 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한 남성과 결혼을 하기로 약속한다.

 

간략하게 '인간의 굴레에서' 주인공 필립의 삶을 요약한 것이다. 여러 번 자신의 직업을 찾기 위한 과정을 겪고 자신의 적성이 무엇인지 몰라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는 부분에 뛰어든다. 아니라고 판단을 내리고는 진로를 변경한다. 그리고 보니 중간에 회계사가 되기 위해 1년 동안 도제 시스템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지금과 달리 평균 수명도 짧고 한 직업을 택하면 계속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사회였을텐데 - 아마도 - 과감히 거부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걸 찾아 헤매는 것은 젊음의 특권이라 생각한다. 20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특권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해 보고 싶고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해 보는 것이 인간이 갖고 있는 굴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길이라 본다.

 

막상 해 보면 스스로 깨닫게 된다. 막연히 동경하고 상상을 했던 것과 직접 해 볼 때 그 간격과 실재의 차이에 대해서 말이다. 책의 주인공처럼 2류가 될 바에는 하지 않겠다는 것도 좋고 2류여도 상관없다는 생각도 좋다고 본다.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이외에는 없다고 본다. 그럴바에는 해 볼 수 있는 것을 해 보는 것이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것이 아닐까싶다.

 

소설 막판에는 한 여자에게 꽂혀 쫓아다니는 내용인데 좀 짜증은 났다. 난, 아무리 그래도 좋다고 쫓아다닌 후에 사귀게 되었는데도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한다면 포기할 것 같은데 말이다. 좀, 굴욕적인 구애는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서로간의 관계도 유지되기 힘들다고 본다. 어느 한 쪽이 좀 더 좋아할 수는 있어도 말이다. 결국에는 여자가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2권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이성과의 만남과 재능을 찾아가는 과정이 나올련지 확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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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문학선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
김동인 외 지음, 이남호 엮음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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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전집을 시리즈로 1편부터 차례로 읽고 있지만 엄연히 한국 문학도 세계에 들어간다. 한편으로는 굳이 세계문학전집에 한국 문학 소설을 넣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만 시리즈물에 10번째로 당당히 들어가 있으니 차례로 첫 권부터 읽기 시작한 나로써는 건너 뛰지 않고 읽는다만 언제 다 읽을지 평생에 걸쳐 다 읽기는 할련지 궁금하기는 하다.

 

 

한국 단편 문학선에는 우리나라 작가들이 나오는데 대부분 내가 학창시절에 한 번씩은 언급되었던 작가들이다. 일제 강점기시대부터 해방 직후 시기까지의 소설들이고 주무대도 그 당시 한국 땅에서 벌어진 내용들이다. 읽고 있는 시간은 현재이지만 책에 나오는 내용들은 그 당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하면서 읽어야만 한다.

 

 

나는 책을 청소년 시절에 읽은 편에 속하기는 해도 그렇게 많이 읽지는 않았다고 여겼는데 이 책을 보다보니 내가 꽤 책을 읽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 이유는 비록, 교과서에 각 내용들이 조금씩 언급되고 소개되고 있지만 난 직접 교과서에 나온 소설을 읽었다는 게 이 책에 소개된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기억이 되 살아 났다.

 

 

김동인의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나도향의 물레방아, 김유정의 동백꽃, 이효석의 모밀꽃 필 무렵은 분명히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외에도 책에 소개된 저자들의 다른 책들도 분명하게 단지 책 제목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읽었다. 시험을 잘 치기 위해 책을 읽은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냥, 자연스럽게 당시에는 지금처럼 책이 많지 않은 시절이였고 내가 구할 수 있는 한도내에서 읽을 수 있었던 책이지 않을까 한다.

 

 

기억이라는 곳은 왜곡이 된다는 말처럼 몇 몇 작품들은 읽으면서 내가 예전에 읽고 기억했던 내용과 아주 약간 달라서 좀 혼동스럽기는 했다. 기억에 이효석의 모밀꽃 필 무렵도 메밀꽃 필 무렵이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미세하지만 약간씩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는 작품이 있었다.

 

 

이상의 날개 같은 작품은 읽어보니 거의 마지막 2~3페이지만 읽었는데 전체적인 작품을 읽지 않고 마지막 2~3페이지만 읽어서는 절대로 여기서 왜 이리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겠구나라는 판단이 들었다. 이상의 날개같은 작품은 워낙 난해하고 해석하기 어렵다는 말이 있었는데 솔직히 읽으면서 눈에 보이는 글과 내용상으로 해석할 때 직독직해만 했을 때 어려운 것은 없어 보였다. 그 숨은 의미를 찾아가면 어려울 수 있겠으나 말이다.

 

 

사실, 국어 시험은 여타의 과목에 비해서 아주 좋은 성적을 올리기는 했으나 그 당시에도 어렴풋이 느꼈고 지금도 느끼는 것이 왜 작품의 해석을 시험을 통해 획일되게 강요하는지 모르겠다. 읽는 사람에 따라 작품의 해석은 달라질 수 있고 작품의 의미는 천차만별이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꼭 의미여야만 정답이 되게 만드는 작품에 대한 시험과 정답은 말도 안된다고 본다. 

 

 

저자 자신이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이런 의미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작가도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런 의미이고 이런 해석으로 읽어야 한다고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밝히지는 않을 것이다. 작품은 쓴 사람의 몫이 있고 작품을 읽는 사람의 몫이 엄연히 다르고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읽는 사람에게 다시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이라 본다. 그런 의미에서 어렸을 때 읽었던 것과 지금 읽는 것이 조금 다르기는 하였다.

꽤 많은 작품이 소개되는데 시대적 상황이 그러한 것처럼 작품도 시대상황을 표현할 수 밖에 없어 그런 것인지 소설이라는 것은 현실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읽게 만들어야 하는 특정한 상황을 묘사해야만 하는 특수한 상황이라 그런지 몰라도 '한국단편문학선 1'에서는 총 12명의 작가에 19개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특징중 하나라고 하면 제대로 된 가족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배제된 것인지 소설의 내용을 쓰다보니 굳이 다룰 필요가 없었는지 까지는 알 수 없고 당시의 시대상황이 평범한 일상적인 일들보다는 무엇인가 통제되고 터질 듯 한 에너지와 체념의 에너지가 공존하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부부만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부가 결혼을 했으나 자식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거나 부부가 있고 자녀가 있었으나 부부중에 한 명이 얼마전에 사별을 했거나 현재 위급상황이거나 작품속에 부부 중에 한 명이 죽는 경우가 있다. 꼭 주인공이 아니라도 주변 인물이라도 언급되는 인물중에 제대로 된 가족이 나올 수도 있으나 그런 언급도 없었다. 물론, 단편소설이라 많은 부분을 언급하기보다는 생략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점은 있겠지만 말이다.

 

 

또 하나는 작품에 나오는 글과 말들이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같은 한국말이라도 지역에 따라 다르고 쓰는 사람의 위치와 나이에 따라 약간씩 다른 것처럼 '한국단편문학선1'에 나오는 작품상의 시대에서 썼던 말이 지금과는 다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몇 몇 언어는 한국말이 아니라 외국어를 한국말로 써 놓은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한국말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었는지 알게 해 준다. 한편으로는 저런 말은 - 대략적으로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단어같은 경우 - 지금 다시 쓰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는 거의 사라지는 단어가 되어 버린 결과가 되어버렸는데 다시 살려내는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갖고 현재의 소설가들이 작품에서 쓰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기는 한데 그럴려면 그 뜻에 대한 소개를 하지 않으면 읽는 독자가 무슨 의미인지 유추를 할 뿐일테니 쉽지는 않으리라 판단이 든다.

 

 

시간상으로 따져보면 20년도 넘어 한국 근대문학이라 할 수 있는 소설들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조금은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할까? 특히, 다른 문학작품들도 읽는 게 그다지 쉬운 것은 아니였지만 분명히 번역을 통해 읽어야 하는 것과 달리 '한국단편문학선1'에 나온 작품들은 내 나라 작가들의 내 나라 말로 쓰여 있어 그 미묘한 뉘앙스와 깊은 뜻을 읽으면서 음미(까지는 아닐지라도)할 수 있어 최근의 작품들과는 다른 색다른 맛을 볼 수 있는 소설들이였다.

 

 

비록, 오랜 일제 강점기로 인해 몇 몇 소설가들이 변절하여 그 의미가 퇴색되기는 했지만 소개된 작품들은 그와는 별개로 한국 문학을 빛 낸 작품이니 - 그 후에 변절했으니 - 그것으로만 봐야 할 듯 하다. 또한, 이 책에서는 그러한 변절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작가 소개면에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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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명환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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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예상은 하루에 120페이지 정도를 3일에 걸쳐 읽으려고 했다. 조금 무리해서 140페이지까지 읽어야만 했지만 사람에게 예정은 예정일 뿐이였다. 첫날 겨우 10페이지 읽고 둘째날 100페이지 읽고 셋째날 30페이지 정도를 읽게 되었다. 제한된 시간은 목요일이였고 일요일에 읽기 시작해서 화요일까지의 사정이 이러하여 수요일에 어쩔수없이 250페이지 이상을 읽어야만 하는 엄청난 상황이 나에게 닥쳤다. 꼭 다 읽어야 한다는 사명감은 없지만 내 원칙이 집어든 책은 끝까지 읽자는 주의라 부랴 부랴 수요일에 200페이지 정도를 읽고 당일인 목요일에 50페이지 정도를 읽었다. 덕분에 읽느라 힘들었다. 읽었다는 성취감만 남은 듯하다.

 

샤르트르를 철학자로 알고 있었다. 하여, 이 책의 저자인 장 폴 샤르트르가 내가 알고 있는 샤르트르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책이 다소 생소했다. 철학 내용이 아니라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책이라니 말이다. 내 미션중에 하나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전부 읽는 것이라 차례가 되어 읽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샤르트르가 맞았다. 실존주의 철학자라는 부분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동일했는데 그 외에도 이 책과 같은 비평집도 펴 냈고 소설도 썼고 희곡까지 썼고 내가 알고 있는 그 철학자로써 철학책도 썼다. 다방면에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야 할 듯 하다. 내가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이니 당연히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듯 하고 말이다. 내가 안다는 것이 유명인사와 동일시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장 폴 샤르트르는 장 폴 샤를 에이미르 샤르트르라는 풀 네임을 갖고 있다. 아마도 내가 샤르트르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프라스 영화에서 장 뤽 고다르와 프랑소와 트뤼포와 같은 영화감독들의 누벨 바그를 통해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과 달리 당시의 프랑스 영화는 문화를 리드하는 입장이였고 화면의 구성이나 철학들이 감미되어 사람들에게 영화를 새롭게 바라보는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했는데 이런 것들이 철학과 맛물려 이야기가 되었고 우리나라에도 뒤 늦게 90년대 전후로 유명세를 치르면서 함께 프랑스 철학들도 더 유명해진 것으로 기억한다. 

 

샤르트르는 느벨바그의 사람들과는 30년의 차이 정도가 나는 인물이지만 그들의 사상적인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라 생각된다. 단순히 그들이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에게 실존의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하게 만든 여러 사람중에 한 명이 아닐까 싶은데 당시의 시대 상황과 연결되어 생각하면 실존에 대해 고민을 하고 궁금해 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던 듯 하다. 2차 세계대전과 그 후에 살아 남은 자들에게 당면한 문제 였을테니 말이다. 또한, 마르크스를 비롯한 공산당의 유럽 공습과 함께 더더욱 지식인으로써 고민을 하던 시기라 생각이 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제목과는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로 들리지만 이 책의 내용을 읽게 되면 결코 뜬금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책 한권이 세상에 나올 때는 그 책과 관련되어 당시의 시대상과 사람들의 생각, 행동들이 다 결부 된 것이고, 그 책을 저술한 저자와도 밀접한 연관이 된다. 저자가 어떤 생활태도와 자세와 철학과 세계관을 갖고 있느냐도 중요하고 어떠한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거쳐 성장했는지 여부를 비롯해 현재 작가의 상태와 상황도 중요하고 작가가 책을 쓸 당시의 시대상을 비롯한 다수의 알 수 있고 없는 힘들이 뭉쳐 작가의 머리에서 글이라는 매체를 통해 책으로 펴 냈는지를 아는 것은 책의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1947년 작가의 상황'이라는 네 꼭지에 대해 저술된 작품이다. 제목만 볼 때 꽤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고리타분할 수도 있고 읽기 어려울 것이라는 냄새가 팍팍 난다. 한편으로는 단지 저 4개의 제목을 갖고 이리 긴 글을 써서 책을 출판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역시 철학자이자 작가답다는 다소 경탄어린 생각을 갖게 만든다.

 

사람은 무엇에 대해 보고 듣고 알고 느끼고 생각한다고 해서 꼭 글로 쓰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그 자체로 끝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음악을 하고, 누군가는 온 몸으로 표현을 하고, 누군가는 글로 표현을 한다. 이 중에서 글로 표현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란 무엇인가'이다. 일단, 이 많은 사람들중에서 가장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직접적으로 사람의 뇌리에 들어가는 말로된 표현을 글로 써서 시각을 통해 머리에 들어와 기억에 남고 어떤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모든 독자는 작가라고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혼자만 알고자 쓰는 법은 없다.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위중에 하나로 글을 쓰는 것이다. 불 특정 다수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특정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쓰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을까? 글을 써도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망망 대해에 오로지 나 혼자 있다는 게 확실하다면 굳이 글이라는 걸 쓰려고 하지 않을 수 있다. 단, 내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고대로 부터 내려와서 글을 쓰면 누군가는 본다는 걸 의미하는데 중세시대까지는 글을 읽는 사람들이 명확했다. 글을 쓰는 작가가 일반인이라도 해도 글을 읽는 사람은 고위층이였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야만 했다. 중세시대라면 성직자들이 좋아할 글을 써야만 글이 읽혀진다. 글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누군가 글을 읽어야 만 존재의 가치가 생긴다. 중세 이후라 하더라도 큰 변화는 없었다. 이제는 성직자에서 돈 많은 사람들 - 귀족, 왕족, 신흥 세력들 - 을 대상으로 글을 쓴다는 차이가 다를 뿐이다.

 

작가로써는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다. 지금도 대다수의 작가들에게 여전히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글을 읽고 만족할 사람이 나와야 하니 부자들에게 글을 쓰고 그들에게 돈을 받으며 먹고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불행한 존재일 수 있다. 시대가 흘러 부자를 위해 특정 계층을 위해 글을 써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지만 여전히 글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대상으로 쓰게 되어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리뷰도 누군가 이 글을 읽을 사람들이 읽지 않는다면 존재 이유가 없다. 단순하게 내가 이 글을 쓰고 내적으로 풍부해지고 내공이라 표현하는 것이 생긴다는 이유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솔직히 말이 안된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반응을 보이거나 최소한 이 글을 읽는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글을 쓴 보람이 생긴다.

 

아울러 내가 아무리 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고 하여도 이미 내가 자라온 성장 배경이나 만났던 사람들, 지금까지 읽었던 책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상황 - 직업, 사는 곳, 쓰는 언어, 가족 구성원을 비롯한 잡다한 것까지 - 을 비롯해 이 글을 쓰기 직전에 봤던 인터넷 기사까지 다 포함된 총합으로써 정념이 글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같은 주제를 갖고도 오늘 쓰는 글과 내일 쓰는 글이 다르고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아 글로써 표현이 되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 생각을 정리하고 읽은 것을 내 자신에게 맞게 다시 조합하는 일련의 과정이고 이를 사람들이 보는 곳에 올려 검증이 되기도 하고 공격을 받기도 하고 함께 공감을 받기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 알 수 없는 누군가를 인식하며 올리게 된다. 이런 문구에 기분이 나뻐할 지 좋아할 지에 대해서도 잠시 고려하기도 말이다. 글을 쓰고 누군가에게 보여줌으로 인해 최소한 몇 명이라도 내 글에 공감을 표시하는 것에 기뻐하는걸 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기 위해 글을 쓰다보면 어느 순간 나라는 자아가 흔들리고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쓰게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이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 글을 쓰고 누구를 위해 쓰는 것인지에 대해 이 책을 읽는다고 답을 알 수는 없다. 책에서 1947년 작가의 상황처럼 어느 작가가 쓴 글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그 글을 쓴 목적과 글을 쓸 당시의 상황과 작가의 처지까지 알아야만 작가의 머리속에 들어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내가 읽고 내가 깨닫는 것이 바로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내 주관을 갖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나로써는 글을 쓴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였지만 지속적으로 글을 쓰면서 점점 내 글을 누군가가 읽는다는 명확한 인식을 하고 글을 쓰고 있다. 그럼으로 인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을 할텐데 대체적으로 부정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훨씬 많다. 스스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쓰지는 않아도 최소한 더 잘 쓰려고 노력을 하는 측면이 있으니 말이다. 나에게 문학이란 세상을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이고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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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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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해서 시작하는게 힘들지 시작하면 끝까지 하자는 게 내가 노력을 하려는 것이라 시작했으니 끝까지 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쉽지가 않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민음사에서 골라 읽는 것으로 했으면 그나마 덜 했을텐데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1권부터 시작을 하다보니 나로써는 처음보는 작가들도 등장을 하고 그들의 작품을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읽다보니 제법 어려운 미션이 되고 있다.

 

인문학에 대해 떠드는 것보다는 직접 인문책을 읽는 다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렇게 읽고 보면 역시 인문학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더 편하고 쉬운 듯 하다. 더구나, 읽는 책들이 민음사에서 선정이유를 모르겠지만 차라리 장편이면 읽겠는데 단편을 묶어 놓은 책이 많아 단 편 하나를 읽고 다시 또 새로운 이야기를 접하려고 하니 이것도 만만치 않게 문제다. 가뜩이나 어려운데 이름과 지명까지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로 가득차 있는데 겨우 익숙해 질만하면 한 편이 끝나고 새로운 단편이 시작되어 머리에 들어가는 게 참으로 어렵다.

 

원래부터 좀 두꺼운 세계문학전집은 대략 일주일정도를 예상하고 읽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도 답답하고 - 다른 책들은 팍팍 잘도 넘기지만 거의 대부분의 책을 정독스타일로 읽다보니 - 글자도 빽빽해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으니 더더욱 읽는다는게 약간은 고역이다. 그래도, 읽는다. 문 말인지 몰라도 읽는다. 읽으면 읽었다는 것만 기억에 남어도 읽는다.

 

토마스만은 독일작가이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작가로 20세기 독일 제일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의 형은 하인리히 만으로 급진적인 작가로 또한 독일에서 유명하다고 하는데 그에 반해 토마스 만은 보수적인 정치성향을 지녔다고 한다. 그가 1차 세계대전에 12년동안 집필한 '마의산'은 독일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 후에 2차 세계대전이 반발한 후에 독일을 탈출하여 미국으로 가 집필과 대학수업을 하면서 나치에 대해 지속적인 반대운동을 펼쳤고 그 중에는 반-나치 라디오 연설 시리즈는 미국에서 녹음되어 영국에 전해진 후 독일 국민들까지 듣기를 원했다고 한다. 말년에 스위스에서 거주하며 독일로 여행도 하다 1955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단편이 총 8편이 실려있어 차라리 처음부터 한 편씩 읽고는 간단하게라도 그 작품에 대해 생각을 적은 후에 다 모은 후 추가 생각을 적는 것으로 서평을 했으면 - 정확하게는 독후감이지만 - 보다 밀도있고 작품마다의 이야기를 했을 수 있었는데 다 읽고 적으려니 사실 조금은 난감하다. 각 작품마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더더욱 공통적인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각 작품마다 다른 이야기를 전부 쓰기에도 애매하다. 정확하게는 내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것이 좀 더 클 것이다만.

 

8편의 작품에서 느끼는 공통점은 이거다. 모든 작품이 처음과 중간이 다소 동 떨어진 이야기를 한다. 도입부에는 어떤 이야기가 시작될지 전혀 추측이 되지 않다가 도입부를 지난 후부터는 본격적인 이야기가 다뤄진다. 그 후 거의 말미에 - 말미라고 해도 정말 말미인 것이 한 작품이 끝나기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 - 완전히 반전으로 이야기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었는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갑작스럽게 이야기가 종결을 맞이한다.

 

토마스 만의 작품은 높은 식견과 사상적인 깊이가 있고 연마된 언어 표현과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유명하고 이를 통해 노벨상까지 받았으리라 유추할 수 있는데 불행히도 난 전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특히 언어 표현이야 우리나라 말로 되어 있으니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각 작품이 어려워서 이해가 되지 못했다는 것보다는 읽는 것이 그리 편하고 익숙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 듯 하다. 내용은 딱히 어렵다고 할 수는 없는게 한 인물이 겪게 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식이라 그냥 읽으면 된다. 

 

딱히 어려운 말이나 표현은 없었다. 글이 길게 이어지고 끝을 모르게 줄이 연속되어 힘들다면 힘들뿐이다. 그나마, 대사가 이어지는 문단은 아주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주로 소설을 내러티브 위주로 이해하고 읽다보니 더더욱 자세한 묘사와 심리표현에 적응하지 못한 측면도 있는 듯 하다. 

 

간단하게 보면 토니오 크뢰거는 학생시절에 사랑했던 인물을 커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에게 나라는 인물이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결국에는 혼자만 갈등하다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마리오와 마술사는 한 식구가 서커스 구경을 가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서커스는 제대로 진행되지도 않고 이상한 내용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러한 사건들이 하나씩 모이면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그나마 볼 만했는데 마지막에 가서 자신을 속이고 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행동으로 끝을 맺는다. 타락은 여배우를 사랑한 한 남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를 사랑했지만 여배구가 갖고 있는 비밀을 주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데 본인만 모르고 있다 결국에는 그 사실을 아는 이야기인데 초반에 이에 대한 판단이 나온다.

행복에의 의지는 어릴때부터 지내 사랑을 하게 된 연인이 부모의 반대로 서로 멀어졌지만 끝내 서로 부모의 허락 - 여자 부모가 결국에는 딸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 을 받아 결혼을 한 다음날 그 남자는 죽는다. 키 작은 프리데만씨는 키가 유난히 작아도 많은 누나들의 사람을 받아 자신의 상황을 모르고 한 여자를 사랑한 후에 버림받은 이야기이다. 어릿광대는 성장한 어른이라 생각하였지만 결국에는 어릿광대였다는 자각을 한 이야기이고, 트리스탄은 요양원에서 만나 한 여인을 사랑하고 그를 내 것으로 만드려고 했으나 혼자만의 멍청한 생각이였고 그 여인은 사망을 한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토마스 만의 가장 유명한 작품중 하나라고 한다. 여기서는 어느 유명한 작가가 베니스의 한적한 호텔에서 머물다 어느 소년을 보고 그만 빠지고 만다. 그저, 그의 주변에 맴돌고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해하다 뜻하지 않게 호텔에서 더 머물게 되면서 주변 사람들도 약간 의식할 정도로 맴돌다 전염병이 돌아 소년이 떠나는 날 소년이 놀고 있는 모습을 행복하게 보다가 죽게 된다. 

 

토마스 만이 보수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면 남색까지는 가지 않았더라도 그러한 성향을 지닌 인물은 유명하고 아무리 고고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도 전염병에 허무하게 죽는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은걸까라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소설은 소설을 쓴 사람의 생각도 있지만 소설을 읽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고 볼 때 어차피 어떤 생각을 하느냐는 내 맘이다.

 

토마스 만이라는 독일 작가가 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것도 노벨상까지 받을 정도로 유명한 작가 말이다. 그러니, 우리나라에 작품이 소개될 정도겠지만. 차라리 마의 산이라는 것을 읽었으면 어떠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다 읽은 후에 다시 줄거리라도 대략적으로 요약을 하니 읽었다는 것만 남지는 않고 그보다는 아주 아주 조금 더 남게 될 것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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