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빛 - 검은 그림자의 전설 안개 3부작 1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송병선 옮김 / 살림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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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에 시원한 그늘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아주 작은 그림자에도 숨어들어 더위를 피하려 할 정도이다. 아주 추운 겨울에는 반대로 무조건 그늘과 그림자를 피해 밝은 해가 있는 것으로 대피(??)하기 마련이다. 그림자는 우리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올 지 모르지만 그림자 자체는 똑같을 뿐이다. 빛이 물체를 통과하지 못해 생긴 현상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신기하다는 생각도 든다. 빛이라는 것이 통과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어떠한 빛도 모든 것을 밝혀 줄 수는 없다. 빛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아침, 저녁에는 더 많이 생기고 한 낮에는 덜 생기는 차이가 있을 뿐 빛이 있는 것에는 빛이 통과하지 못해 생긴 그림자가 있다.


이러한 현상때문에 많은 문학작품에서는 그림자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있다는 표현처럼 빛과 그림자야 말로 창작에서 가장 많은 영감을 주는 현상이자 사실이다. 또한, 그림자는 또 다른 나를 표현하기도 한다. 내가 가는 그 어느 곳에도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바로 그림자이다. 나라는 인물에 모든것을 탈의하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도 유일하게 끝까지 나를 쫓아오는 게 바로 그림자이다. 내가 죽어도 그림자는 나를 떠나지 않는다.


문학작품에서는 그림자를 나를 떠나기도 하고 나를 잡아 먹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그림자를 잡아먹어 힘을 키우기도 한다. '9월의 빛'은 실제로 빛이 아니라 그림자가 주인공이다. 그림자가 주인공이라는 말은 희극이 아닌 다음에 비극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림자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뜻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사폰의 소설을 지금까지 총 3권을 읽었는데 전부 10대가 주인공이다. 또한, 판타지적인 요소가 섞여 있다. 이러한 점이 유럽 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아닐까싶다. 유럽은 신이 인간이고 신이 인간세계에 내려와 다양한 행적을 펼쳐 신과 인간을 동일시한다고 할 수 있는데 사폰의 책은 전부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느낌을 물씬 풍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장난감이다. 이러한 동심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어른들이지만 이 역시 작가의 상상력에서는 엄청난 소재를 제공한다. 장난감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이들이고 이들은 악마가 영생을 위해 가장 좋아하는 대상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작품들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9월의 빛'은 그림자와 장남감이 결부되고 비밀에 쌓여 있는 한 인물의 장소에 새롭게 등장한 가족들이 벌이는 이야기다. 거의 대부분 작품들이 그렇듯이 평온한 마을에 다른 가족들이나 사람이 들어와 새로운 사건이 생기고 사실은 평안한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 결국 빛의 반대편인 그림자에는 - 온갖 생각할 수 없는 어두움이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추가로 사랑이야기가 곁들이면 거의 완벽한 작품이 탄생한다.


그렇다고 9월의 빛이 완벽한 작품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대략적으로 그런 구성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읽는 사람들이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추리 소설로 가느냐, 판타지 요소가 들어 가느냐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9월의 빛'은 제대로 판타지적인 요소가 이야기의 중심을 이끈다.


계속 사폰의 소설을 읽고 있는데 나와는 그다지 맞지 않는 것 같다. 판타지 요소가 있는 것에는 거부감이 드는 것은 아닌데 내용이 그렇게까지 흥미진지하지는 못하다. 읽다보니 끝까지 우리나라에 나온 모든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향후에 계속 읽을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나중에 봐야 하겠다.


사폰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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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왕자 - 오르페우스호의 비밀 안개 3부작 2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수진 옮김 / 살림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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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부르기 어려운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첫번째 작품이 '안개의 왕자'라고 한다. 시폰이라는 케익때문이지 자꾸 사폰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시폰이라고 읽게 되는데 '안개의 왕자'는 내용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흥미를 끌만한 요소들이 다수 포함되어있다. 무엇보다 판타지 요소가 들어 있는 것이 가장 흥미를 끄는 요소가 아닐까 한다.


'안개의 왕자'라는 표현이 우아하고 고급스럽게 느껴지지만 여기서 말하는 안개의 왕자는 아주 나쁜 놈이다. 안개가 미지의 것을 보여주고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자연현상이듯이 안개는 우리에게 몽환적인 분위기를 피우지만 일상에서는 선호하지 않는 현상이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좋은 것이 없는 게 안개이다.


그래도, 안개의 왕자라고 하면 - 일정부분 표지의 그림에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하지만 - 왕자라는 표현때문에 좋은 사람이라는 착각이 들게 되는데 이 책에서 안개의 왕자는 청소년들에게 소원을 들어준 후에 그들의 젊음을 빼앗아 영생을 누리는 존재로 나온다. 소원을 들어 준 후에 자신이 내리는 명령을 시행하라고 하는데 하기 힘든 명령이라 고민을 하다가 결국 안개의 왕자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게 되는데 이러한 에너지를 자양분 삼아 영생을 하고 있는 존재다.


누구에게나 소원은 존재한다. 소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사람이기를 거부한 존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룰 수 있는 소원이건 이루기 힘든 소원이건 소원은 사람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현실이 힘들어도 소원을 꿈꾸며 참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소원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희생을 강요하거나 동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원에 걸맞게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생기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책을 읽는 시간을 택하거나 TV를 보는 시간을 택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런 이유로 누군가가 나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소원을 이뤄준다는 제안에는 단호히 거절하는 것이 맞겠지만 인간들은 알면서도 관심을 보이는 것이 속성이다.


그렇게 안개의 왕자는 다양한 아이들의 에너지를 공급받아 살아 왔지만 어느날 이를 단호히 거부하는 한 아이를 만나게 되고 이 아이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그 마수를 뻗고 잠시 잊었다고 생각하고 소멸되었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오래도록 에너지를 집중해서 다시 소원에 대한 약속을 이루기 위해 안개의 왕자가 나타나고 우연히 바닷가 동네로 이사 온 아이가 알게되면서 함께 엮이고 풀어내는 내용의 책이다.


첫번째 작품이라 그런지 담백하게 거의 직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안개의 왕자라는 판타지 요소가 섞여 있어 이를 읽는 재미도 있다. 보다 치밀하게 내용 전개가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깔끔하다는 장점도 있다. 군더더기 없이 이런 저런 쓸데없는 내용을 전부 거둬내고 돌직구처럼 전개되는 맛이 있다.


향후에 작품을 더 읽어 봐야 알겠지만 2편을 읽었는데 2편 전부 표면적인 주인공은 10대 초반의 아이다. 실제적인 내용의 주인공들은 20대라 할 수 있고. 실제로 이 '안개의 왕자'도 청소년 문학제와 같은 곳에 제출했던 작품이라고 한다. 다만, 자신은 청소년 작품이라는 것을 따로 읽어 본 적이 없기에 굳이 청소년 작품이라는 구분에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뉘앙스를 풍기기는 했지만.


소설치고는 책의 부피도 얇고 내용도 부담없이 가볍게 약간의 추리소설, 약간의 판타지 소설, 약간의 성장 소설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늘 그렇듯이 악마의 제안은 늘 달콤하고 향기롭다. 그에 따른 결과는 언제나 최종적인 결론은 안 좋지만. 그렇다고 쉽게 거절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나에게 소중한 사람을 빼앗아 가는 소원이라면 거절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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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의 예언 2 루나의 예언 2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강만원 옮김 / 창해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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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루나의 예언'을 다 읽고 드는 생각은 이 소설은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보면 한 개인이 역사의 흐름에서 어쩔 수 없이 다양한 경험을 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는 역사 드라마같지만 정작 이 소설의 내용은 한 개인의 자아탐구라고 할 수 있다. 나란 누구인가? 한 개인이 알 수 있는 부분은 어디까지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종교를 통해 우리는 위안을 얻을 수 있는가와 하나님을 믿는 종교들이 서로 왜 그러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소설이 좋은 이유는 소설을 통해 우리는 전혀 접하지 않은 다양한 분야에 대해 알 수 있고 - 내용이 팩트인지 아닌지는 논외로 치고 - 생각을 해 보게 된다는 것이다. 소설가들은 특정분야의 전문가들보다는 깊고 심오한 지식은 없을지라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관련되어 벌어지는 사건을 특정분야와 결부하여 생각해 보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들고 궁금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 준다. 차라리 그들이 특정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서 오히려 더 참신하게 미처 눈여겨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 화두를 던져주기도 한다.

 

'루나의 예언'은 다빈치 코드라는 광고문구로 인해 완전히 착각을 하게 만든다. 심지어 어딘지 모르게 '루나의 예언'이라는 제목은 신비스럽고 중세시대라는 배경은 환상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만들지만 정작 소설은 예언을 보여주고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하나씩 보여주지만 예상을 했던 다빈치코드와 같은 추리, 탐정 소설류는 아니다. 그보다는 소설의 외피를 감싸안고 종교라는 것에 대해 종교의 의미에 대해 말한다.

 

종교를 믿지 않거나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고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해서 도저히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나 혼자의 개인으로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칠 수 있지만 '왜 저토록 선한 사람들이 그 힘든 고생을 겪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지'에 대해서 진정 신의 뜻을 알 수 없다. 그런 질문에 대해 고민을 해 보지 않았다면 어쩌면 감히 말하건대 신을 믿고 있다고 말만 하는 사람일 것이다.

 

절대 악과 절대 선은 없겠지만 그래도 신이 있다면 저와 같은 사람이 저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거다. 또한, 저처럼 선한 사람이 저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이해 할 수 없다. 지구상에 있는 종교중에 가장 숫자가 많은 기독교(카톨릭)와 이슬람이 결국에는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 가장 영향력 있는 유대교까지 - 서로 상대방에 대해 못 잡아 먹어 안달이고 모든 전쟁과 불화의 씨앗이 이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다.

 

종교의 본질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효과의 지속력을 위해 하나씩 만들어지고 덧입혀진 것들이 어느덧 본질을 뛰어넘어 본말이 전도되는 현상을 지켜볼 때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내용과 형식중에 형식은 내용을 빛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을 해야 하는데 내용보다는 형식을 갖고 이러니 저러니 이야기를 하고 제대로 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논란은 진정으로 신이 원하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만든다.

 

'루나의 예언'에는 루나라는 예지력을 지닌 인물이 한 사람에게 예언을 하고 그는 자유 의지를 갖고 살아가지만 예언대로 하나씩 실현이 된다. 그러는 와중에 지식을 쌓고 무력을 갈고 믿음에 대해 탐구하지만 예언은 하나 둘 씩 이뤄진다. 아무리 내가 발버둥쳐도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라는 것은 어느정도 정해져 있는가에 대해 깊은 번민과 좌절을 겪게 된다. 우리가 부자부모 밑에서 태어나느냐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냐에 따라 운명은 정해진다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유의지로 운명을 극복할 없는가에 대해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예언이 하나 둘씩 실현될 때마다 두려움을 느끼고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가에 대해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되지만 운명의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분명히 있고 그 선택의 판단은 순전히 본인의 몫이다. 예언이 이뤄진 후에 예언이 이뤄졌다고 두려워하지만 분명히 예언대로 하지 않을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다. 분노를 삭힐 수 있었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증오를 안 낼수 있었고 질투하지 않을 수 있다.

 

두려워 할 것인가 극복할 것인가, 누군가를 증오한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분노할 것인가 참을 것인가, 질투할 것인가 이해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달려있다. 어떤 판단을 하건 간에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본인의 책임이다.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종교에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다. 인간은 결코 신의 꼭두가시가 아니기때문이다.

 

모든 종교에서는 온갖 좋은 말들과 깨달음을 우리에게 선사하지만 모든 종교는 결국 사랑이 아닌가한다. 문제는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고 저주할 수 있고 죽일 수 있고 분노할 수 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우리는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분명히 그런 것이 아닐진대 남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특히,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는 표현처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십자군전쟁이 벌어졌고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이슬람의 자살테러가 벌어진다. 과연, 이것들이 진정으로 신이 원한 것인지, 신의 이름을 빙자한 인간이 - 특정인간 - 원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지식은 믿음의 정 반대 대착점에 있는 요상스러운 것이 아니라 진정 믿음을 더욱 밝혀주는 등대의 역할을 한다. 십자군 전쟁이나 자살테러를 자행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실행했지만 그들이 생각한 진정한 믿음을 지식이라는 매개체로 투영했다면 혹시 달라지지 않았을까싶기도 하다. 물론, 믿음과 지식은 어딘지 같이 공존할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로 보인다.

 

지식인중에는 신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고 더욱 신에 귀의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신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모태 신앙인 기독교라 그럴 수 있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고본다. 인간의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걸 신의 섭리로 간단하게 치부할 수 있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루나의 예언'에서도 지식이 쌓일수록 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존재유무에 대해 고민을 하지만 결론적으로 신을 믿는것처럼 솔직히 신을 믿는것이 난 더 좋다.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루나의 예언'은 버라이어티한 인생을 산 한 개인의 이야기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가르침을 받으며 신에 대해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철학책이라 할 수 있다. 기도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진정한 실체에 대해 고민하고 믿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소설의 관점으로 책을 읽어도 지루하지 않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루나의 예언 1편의 리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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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의 예언 1 루나의 예언 1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강만원 옮김 / 창해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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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도 모르지만 가끔은 책 제목과 표지에서 풍겨나오는 이미지와 광고문구에 끌릴 때가 있다. 아마도 그건 내 의식과 무의식과 관계된 어떤 것을 자극한 결과가 아닐까 싶은데 '루나의 예언'은 그런 책이다. 내용은 몰라도 어떤 느낌이고 내용인지 대략 유추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다 광고도 '다빈치 코드'를 언급하고 있어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흔히 초판 발행은 저자의 인지도를 가늠하는 잣대라고 할 수 있는데 '루나의 예언'은 초판을 무려 5만부나 발행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시장의 크기는 존재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 정도의 초판 발행이라면 흔히 말하는 '믿고 쓰는 000'처럼 믿고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책이든 호불호는 존재하기 마련이니 그 점은 논외로 치고.

 

사람은 첫 인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다빈치 코드'를 언급한 점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여하튼 음모론이나 중세시대와 연관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정말로 아예 중세의 이야기인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딘지 음모론을 읽으려면 중세에 벌어진 일들이 현재에 까지 영향력을 미처 그로 인해 파생되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개되어야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흥미진지하게 만들어 준다.

 

처음에는 어느정도 예상을 충족한다. 마녀가 나오고 마녀를 처단하려고 하고 우연히 한 사람(주인공)이 발견되어 그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살인이 벌어진다. 중세와 마녀라면 마법이 펼쳐지고 신비한 체험들이 본격적으로 쏟아지려니 하는 순간 저자는 시치미 뚝떼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전개를 해 버린다.

 

주인공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long long age'로 시작해서 자신이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운명적인 만남부터 새롭게 도입부로 시작한다. 그런데, 정작 읽으려니 점점 실망스러웠다. 기대했던 마법이니 음모론이니 중세기사단이니 하는 것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종교혁명이 벌어진 이후의 시대에 살아간 한 개인의 이야기가 진행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의 재미가 시작된다. 내가 기대했던 내용들은 살짝 살짝 언급이 되지만 보여줄 듯 보여주지 않으면서 진행이 되지만 어딘지 모르게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 둘 씩 주인공이 겪는다. 귀인을 만나고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비밀스러운 문서를 전달해야 하는 임무를 맡는다.

 

 

 

저자의 전작들이 종교와 관련되어 있는 책이라 그런지 소설 내용에는 기독교(카톨릭)의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설명하고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설 속 주인공이 향후에 나아가야 할 길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이자 탐구로 봐야 할 듯 했다. 읽을 당시에는 조금은 뜬금없을 수 있지만 내용이 전개되면서 그러한 질문들에 대해 하나씩 자신의 인생과 연결이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내용이 꽤 철학적이고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소설은 말한다. 단순히 음모론이나 중세 기사단과 같은 이야기만을 예상하고 읽는다면 자칫 지루할 수 있지만 진중하고 천천히 한 걸음씩 오히려 더 거대한 음모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종교에 귀의하여 살고자 했던 주인공이 마지막에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존재에 대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구와 더불어 루나의 예언1권에 끝난다.

 

여전히 많은 것들이 물음인 상태에서 단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존재 이유에 대해서까지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오면서 소설이 끝이 나니 2권부터는 본격적으로 활약도(?)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더구나, 주인공은 철학과 무예와 종교, 예술등 다방면으로 뛰어난 스승밑에 가르침을 받아 -이렇게 쓰고 보니 무협지같은 - 어느 누구와도 부족할 것이 없는 인물이다. 다만, 1권에서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다니는 여정으로 보인다.

 

 

생각나는 작품은    (이 책만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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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얼룩진 교과서 2
모모세 시노부 지음, 한성례 옮김, 사카모토 유지 극본 / 느낌이있는책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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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교의 상황이 우리나라의 상황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기시감마저 느낀다고 했는데 이 책이 출판된 년도는 - 우리나라말고 일본 - 2007년이다. 우리나라에는 2012년도에 출판되었지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무려(??) 5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시간의 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현재 일어지고 일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중,고등학생은 아니지만 심심치 않게 뉴스로 나오는 이야기를 보거나 과거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의 선생들을 생각하면 일본의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라고 다를 바는 전혀 없다고 느껴진다. 책이 또한 소설의 형식이지만 드라마로 만들어진 작품을 소설로 다시 엮으며 많은 내용들이 압축되고 생략된 면이 있어 꽤 스피드하게 진행이 된다.

 

처음부터 소설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 읽다보면 르뽀형식처럼 장황하고 세밀한 묘사보다는 즉시 다음 내용을 이어주거나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야기 구조를 쫓아가는데 있어서는 재미가 있지만 소설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런 면에서 일반 소설과는 좀 달라 좋게 볼 수도 있고 - 이야기에 집중하는 사람은 - 소설처럼 세밀한 묘사가 없어 아쉬울 수도 있다.

 

한 아이의 죽음으로 벌어지는 한 학교에서 벌어진 많은 것들이 감춰지고 숨겨졌고 그와 관련된 가족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정확하게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모든 것을 학교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 가족의 문제가 먼저 내 눈에는 보였다. 제대로 아이들과 함께 생활을 하는 부모밑에서 자라지 못한 아이들이 나온다. 소설에서는 이 부분을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지만 극복해 내는 아이는 부모를 통해 함께 풀어내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받지 못하는 것을 결국에는 다른 곳에 에너지를 쏟는다.

 

왕따 경우에도 책에서는 작정을 하고 처음부터 누군가를 헤꼬지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치부를 감추기 위한 방편으로 왕따를 저지른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수습할 기회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지고 만다. 한 명의 희생자가 나오면 다른 희생자가 생기지 않는다는 점도 어쩌면 신기하다. 모든 것을 전가한 상태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한 아이의 죽음이 자살인가의 여부로 시작된 이야기가 왕따문제로 번지고 학급에 있는 아이들의 가족문제로까지 번지면서 직업인으로써의 선생의 모습들이 그려진다. 소명의식을 갖고 선생님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보인다. 소명보다는 직업이 먼저 일 듯 하다. 현실적으로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어 보인다. 다만,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프로답게 자신의 일을 잘하면 대접을 받는 것처럼 선생님들도 프로답게 하는 것이 아이들의 성적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닌 다른 부분이였으면 한다. 각 선생들의 문제가 아닌 사회전반적인 분위기가 아닐까 한다.

 

지금 청소년들이 무섭다고 하지만 그 이야기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들었던 내용이다. 사실은. 옛 문헌에도 '요즈음 젊은것들은...'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늘 어른들의 눈으로 보는 아이들은 미숙한 존재다. 자신의 기억은 포장하고 왜곡하지만 현재의 아이들은 날것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원래 문제아이이거나 삐뚤어진 아이들은 없다고 본다. 사춘기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폭발시키지 못하고 힘들어 하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책적으로 힘들기에 어른들이 어느 정도 간섭보다는 판을 깔아주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다.

 

이렇게 글을 쓰지만 과연 내 아이들은??? 이라는 생각이 든다.

협찬 받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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