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뻬 씨의 행복 여행
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오유란 옮김, 베아트리체 리 그림 / 오래된미래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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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는 단어는 언제부터 우리에게 인식되었을까?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정도로 특정 감정과 상황과 인식등이 있어야만 행복한 것일까? 행복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인간은 어떤 식으로 행복을 표현했을까? 행복이란 너무 주관적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행복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상황이면 누구나 무조건 행복하다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

 

행복에 대해서는 단순히 '행복하다'라고 느끼는 정도를 넘어 학문적으로 밝히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도대체, 행복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현대인들은 행복에 목메달고 있는 것일까?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행복한지 여부를 따지고 현재 내 상황이 행복한지 살펴보고 이정도면 행복하다고 판단하는지에 대한 것들이 전부 주관적이다. 대체적인 공통점을 갖고 행복에 대해 논의하고 정의를 내리기는 해도 여전히 행복은 잡히지 않는 모래와 같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이렇게 되었으면 행복할 것이라 이야기한다. 현재는 힘들지만 이것만 지나고나면 행복하다고 말한다. 지금은 참고 있지만 미래에는 원하는 것을 얻게 되어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 믿는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고 한다. 바로 지금 내 주변에 행복이 있다는 뜻인데 나는 왜 지금 행복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일까? 행복을 추구하면 오히려 행복은 전설속에 있는 파랑새와 같이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신기루와 같다.

 

온갖 책에서 행복에 대해 알려준다. 행복은 내가 느끼는 것인데 도대체 무엇때문에 저 사람은 나에게 행복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이런 것이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내 행복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행복은 아닐까? 자신이 이런 순간과 상황에 느낌에 행복하다는 것을 나에게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동의하게 되고 충분히 행복할 것 같은데 과연 그런 순간에 나에게 찾아왔을 때 나도 똑같이 행복하다고 여길까? 행복이라는 것이 그렇게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미지수인가? 똑같은 상황에도 누구는 행복을 느끼고 누구는 슬퍼한다. 감격해서 우는 경우도 있지만 인상을 쓰면서 싫어하기도 한다.

 

행복이란 남과의 비교를 통해 더 좋으면 된다고 한다. 비교대상의 선정이 무척이나 중요해 진다. 그런고로, 비교를 통한 행복은 끝이 없는 출구에 들어선 것과 마찬가지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지만 똑같은 감정으로 누군가는 나를 보고 그런 감정을 느낄 것이고 언제까지 남과의 비교를 통해 행복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남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나만의 잣대로 행복을 느낀다고 해도 그 잣대라는 것 자체가 나와의 비교를 한다는 의미가 되어버린다. 남과의 비교가 아닌 어제의 나와 비교를 통해 스스로 대견해 하면서 행복해하는 것은 결국에는 비교대상이 변경되었을뿐 달라진 것은 없어보인다. 오늘의 내가 어제보다 못하면 오늘부터 불행이 시작된 것이라는 의미가 되어 버린다.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은 예능 프로에 소개되면서 더 큰 사랑을 받게 된 작품이다.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동화류의 소설이다. 과거에 동화는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였다면 최근에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도 나온다고 할 수 있는 데 바로 꾸뻬씨와 같은 종류이다. 심오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 때우기용의 이야기도 아니지만 부담없이 책을 선택해서 읽게 되지만 그 내용은 결코 쉽게 넘길 수 없는 책이다. 이솝우화가 쉬운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인간의 본질에 대해 촌철살인의 관찰력으로 아직까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널리 퍼진 것처럼 분명히 몇몇 작품은 그렇게 후대에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 작품중에 하나가 아마도 '꾸뻬'시리즈일지도 모른다.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으면서도 읽는데 심각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명확하게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어 굳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이 책을 읽다보면 하나씩 하나씩 작가가 이야기하는 바를 충분히 전달된다.

 

정신과 의사 꾸뻬가 행복에 대해 여행을 통해 알아가는 과정이다. 꼭 여행을 통해 행복을 찾을 필요는 없지만 여행은 추억이라는 기억만으로도 사람에게 행복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여행의 과정중에 행복을 하나씩 찾고 기록하는 과정이 공감이 간다. 책에서는 특이하게도 나라 이름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정신과 의사가 많은 나라라는 표현을 한다. 물질이 풍부한 나라, 예술이 넘치는 나라, 음악이 풍성한 나라, 먹을 것이 버려지는 나라처럼 무엇인가 나라 이름보다 더욱 와 닿는 표현이다.

 

먹을 것이 풍성하고 인간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많은 도구들이 있는 발달된 사회에서 정신과 의사가 많다. 먹을 것이 없는 나라에서는 정신과 의사가 없다. 사람이 아프고 치료를 요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곳에서는 이와 관련되어 치료를 요하는 의사가 필요하지 정신적인 문제를 의논할 의사는 필요없나 보다. 하긴,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사람들에게 정신과의사는 필요없을 듯 하다.

 

여러 나라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꾸뻬씨는 행복에 대한 정의를 하나씩 하나씩 적어나간다. 각자의 내용은 행복을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아니여도 행복을 말하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무려 23가지나 되는 것을 모두 적용되는 행복은 행복일까? 그 중에 하나만 적용해도 행복하다고 만족하는 것은 또 어떨까? 아니면, 23가지 중에 하나인지 일일히 파악하는 것은 행복일까?라는 생각도 든다.

 

행복은 그저 자기만족인지도 모른다. 성공 지상주의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자기만족은 도태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문제다. 회사에서 사원으로 만족하고 대리로 만족하고 과장으로 만족한다는 것이 일단 도태된다는 뜻이 되어버린다. 현재, 살고 있는 생활수준에 만족한다는 것도 역시 인플레이션의 시대에서는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못 뿐이다. 도대체, 행복이란 어쩌란 말인가? 물론, 관점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행복에 이르는 핵심일지도 모른다. 

 

이거 저거 다 떠나서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에 "전, 그래도 이정도면 행복해요!"라는 대답정도면 되지 않을까? 

 

 

 

 

 

배움1 행복의 첫번째 비밀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다.

배움2 행복은 때때로 뜻밖에 찾아온다.

배움3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이 오직 미래에만 있다고 생각한다.

배움4 많은 사람들은 더 큰 부자가 되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배움5 행복은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산속을 걷는 것이다.

배움6 행복을 목표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배움7 행복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다.

배움8 불행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다.

배움9 행복은 자기 가족에게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배움10 행복은 자신을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배움11 행복은 집과 채소밭을 갖는 것이다.

배움12 좋지 않은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기가 더욱 어렵다.

배움13 행복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배움14 행복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이다.

배움15 행복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배움16 행복은 살아있음을 축하는 파티를 여는 것이다.

배움17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이다.

배움18 태양과 바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

배움19 행복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배움20 행복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달려 있다.

배움21 행복의 가장 큰 적은 경쟁심이다.

배움22 여성은 남성보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 더 배려할 줄 안다.

배움23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책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다. 내 대답은 이랬다.

행복한 상황 속에 있는 자신을 상상하라 - 가족과 함께 집에서 TV를 보고 있다.

아주 슬픈 상황 속에 있다고 상상하라 - 식구중에 한 명이 죽었다.

매우 두려운 상황에 처한 자신을 상상하라 - 파산하기 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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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잡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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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은 거의 빼 놓지 않고 읽고 있다. 그 중에서도 더잡은 상당히 오래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 출판된 년도와는 상관없이. 워낙 마이클 더글라스의 인기가 좋다보니 과거의 작품까지도 새롭게 - 최근 작품인지 알았다 - 출판이 되었는데 그만큼 작가가 얼마나 변화하였는지 알게 해 줄 수 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더글라스 케네디의 전개는 동일하다. 처음부터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구성과 얼개는 짜여져 있다. 그 안에 내용과 인물만 늘 다를 뿐이다. 기승전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항상 동일하다. 주인공이 자신의 일에서 조금씩 인정을 받는다. 보다 높은 성공을 받으려 하는 찰나에 삐끗하고 잘못되어 추락한다. 더이상 나쁠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더 나쁜 일만 계속 생긴다.

 

그 안에서도 자신이 지금까지 했던 과거의 것들이 여전히 살아남아 새로운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되어준다. 그리하여 겨우겨우 유일하게 눈 앞에 보이는 동아줄을 잡는다. 지금까지 자신의 갖고 있던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말이다. 이전보다 더 높은 성공을 가지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이 패턴이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이다. 

 

결코, 난 이러한 패턴에 불만을 갖거나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아주 좋아한다. 아주 단순하고 뻔하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서 펼쳐지는 내용전개가 흥미롭고 뻔히 알면서도 새롭게 읽을 수 있다. 몇 몇 작가들의 작품은 읽다보면 패턴이 뻔히 보이면서 좀 지루해지고 당분간은 읽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반해 더글라스 케네디는 현재 우리나라에 출판된 책 중에 딱 한 권만 읽지 않았는데 여전히 재미있다.

 

이번 '더잡'은 작가의 작품중에 오래된 작품이라 그런지 최근 작품들에 비해서는 다소 기승전결에서 전과 결이 흥미롭지 못하다는 것이 조금 아쉽다고 하면 아쉬운 정도이다. 최근 작품들은 감정이입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전과 결을 통해 충분히 대리만족을 하면서 '그렇지, 그렇게 되어야지.'라는 감정을 충분히 만끽하게 해 준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세일즈맨이다. 세일즈 세계에 대한 묘사와 동기부여 강사의 이야기가 절묘하게 이어졌다. 세일즈맨에게서 판매는 모든 것이다. 판매를 하면 행복이고 못 하면 불행이다. 팔면 돈을 벌고 못 팔면 돈을 벌지 못한다. 실적 이상을 달성하면 초과 보너스가 들어오고 미달이면 조만간 직장에서 짤린다.

 

늘, 초과달성을 하던 중에 미달이 될 위기에 처해 위협을 통해 달성한 후 승승장구라고 믿었던 직장생활이 완전히 끝이 나고 그 과정에 벌어진 일들로 취직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되고 우연히 만난 친구의 보스 동기부여 강사밑에서 일을 하게 된다. 말이 동기부여 강사이지 사기꾼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에게 엮여 더 바닥으로 추락할 수 있었으나 슬기롭게 헤쳐나가 좋은 결과를 맺는다.

 

특정 패턴을 갖고 그 안에 소재를 잡고 등장인물의 성격을 부여하고 벌어질 사건들을 잘 조합해서 소설이 나온다. 무척이나 통속적인 대중소설이라 할 수 있지만 1년에 하나의 작품을 펴 낼만큼 필력도 있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집중해서 읽게 만드는 흡인력도 있다. 사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책읽는 시간이 아깝지 않게 책을 읽고 있다면 성공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인간에 대한 탐구나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의식을 심어주는 소설도 있겠지만 재미있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페이지를 넘기는 소설도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은 딱 하나를 제외하면 전부 마음에 들었고 재미있었다. 소설을 쓰게 된다면 꼭 이런 식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론, 최근 작품들이 훨씬 세련되고 내용도 풍성하고 다채롭지만 직구 스타일로 달려가는 이번 작품은 보다 박진감있게 스토리가 진행된다. 마지막이 여타의 작품에 비해서 행복을 보다 만끽하며 읽을 수 없지만 충분히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역시나,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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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 - 판타스틱 픽션 WHITE 1-1 판타스틱 픽션 화이트 White 1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송정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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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200페이지까지 읽은 후에 결정을 했다. 리뷰를 쓰기로. 'give up'이라는 제목으로 이 책은 그만 읽겠다고. 600페이지 중에 3분의 1 밖에 읽지 않았으니 리뷰라고 할 수는 없을 듯 하고 왜 중단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나 쓰려고 마음을 먹었다. 책을 읽으면 어지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정독은 아니라도 글자 하나 하나를 읽지만 1년에 1~2권 정도는 끝까지 읽지 못하거나 후반부에 가서는 휙~~휙~~ 넘기며 읽는 경우가 있다.

 

이번 '케빈에 대하여'는 소설이다. 후반부를 휙~~ 읽는 것도 실용서적들과 같은 책이나 가능한 것이지 소설은 끝까지 읽지 않았다고 하면 과연 읽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판단하여 읽었다고 할 수는 없다고 판단된다. 고로, 읽다가 포기한 소설로써 이 책에 대해 언급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먹고 책을 읽지 않으려고 했는데 왠지 괜히 억울했다. 세상은 단순하게 보면 단순하다.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책이 어렵든 읽히지 않든 읽기 싫어지든 끝까지 읽는 방법은 단 하나다. 읽으면 된다. 아무리 두껍고 안 읽히는 책이라도 하루에 몇 페이지씩 읽으면 결국에는 다 읽을 수 있다. 하루에 100페이지 정도를 목표로 삼고 읽으면 된다. 그런, 마음으로 다시 읽기로 했다. 이상하게 안 읽히고 내용도 원하는 것과는 많이 달라 집중하는데 더 힘들었지만 매일 읽으면 된다.

 

처음에는 영화로 '케빈에 대하여'를 접했다.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에서 보게 되었는데 분명히 당시에 내가 그 영화 예고편을 보면서 느꼈던 점은 한 여자가 엄마가 되었지만 여전히 여자로써의 삶을 갈구하거나 살려고 하려는데 이 놈의 아들은 자신을 엄마로써 묶여 놓으려고 한다는 식으로 알았다. 책의 내용도 그런 구성이라 보고 택했다.

 

책의 표지에는 '소시오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자)와 가족'이라는 문구가 있어 내가 생각하는 내용이 아닌가하는 의문도 들면서 잠시 주저했지만 한 번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책의 두께도 그렇고 내용도 이게 결코 만만치 않은 책이였다. 더구나, 내가 생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책이 전개되고 있다보니 읽으면서 어딘지 모르게 내가 겉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읽으면서도 대단한 필력이라고 느끼고는 있었지만 다 읽은 후에 느낀 감정도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보통 책이 안 읽히는 경우는 책 내용이 아직 나에게 어렵거나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거나 번역이 이상하거나 등등의 이유다. '케빈에 대하여'는 결코 어렵지도 번역이 이상하지도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200페이지가 될 때까지 잘 안 들어오기는 했어도 이토록 미주알 고주알 글로써 써 내려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정도는 느끼면서 읽었다.

 

플랭클린이라는 남편에게 에바라는 아내가 쓴 편지내용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에바가 플랭클린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 대해 시시콜콜 구구절절 사연을 적어 내려간 것처럼 자신이 떠오르는 기억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보다는 남김없이 지난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성이다. 그 당시에 느꼈던 감정까지.

이렇게 볼때 어딘지 연애이야기나 남편과의 알콩달콩한 이야기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세상에 '그 놈'이 나오면서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태어나자마자 나를 반기지도 않고 밀어내려 하고 남편에게는 울음을 그치던 놈. 내 젖을 거부하던 놈. 어릴 때부터 내가 사랑으로 감싸주고 자식으로 대하려해도 나를 적대시하고 나를 언짢게 만들고 기분나쁘게 의도적으로 행동하고 늘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던 놈.

 

아내이자 엄마이자 한 명의 존재로써 에바라는 인물이 철저하게 자신의 관점에서 글은 써져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방의 감정이나 생각은 그들이 알려주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철저하게 내 관점에서 유추하고 멋대로 상상하고 임의대로 판단내릴 수 밖에 없다. 아들이 나에게 한 행동의 의도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내가 판단한 것은 평범한 놈이 아니고 무엇인가 남다르다. 평균을 많이 벗어난 놈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내 아들이지만 나도 쉽게 가까이 접근하기 힘들고 어렵다.

 

더 큰 문제는 나이답지 않은 조숙함과 똑똑함이다. 나는 그의 본질을 깨다고 지식하고 있지만 주변 사람들은 어렴풋이 인식을 할 뿐 깨닫지 못한다. 본능적으로 피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들은 연기를 잘 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특히, 자기 편이 되어야 하는 남편에게는 그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고 알려주고 행동한다. 더없이 좋은 아빠의 아들연기를 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통제하기도 한다. 쉽게 범접하지 못할 인물로 포지션을 설정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알게 모르게 조정도 한다. 상대방은 그런 점을 잘 알지 못할 정도로 생각없이 사는 아이들이기도 하고.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를 파악하고 치료할 이유가 없다. 놈은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그를 상대하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남편은 나와는 다른 면을 본다. 내가 보는 아들은 끔찍하고 무서운 놈이라 피해야 할 인물이고 같은 공간에 있으면 질식할 것 같은 긴장감이 흐르지만 남편에게 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해주는 착한 아들이다. 동생인 딸은 워낙 착해서 오빠가 어딘지 모르게 무섭지만 오빠가 시키는 것은 믿고 한다. 그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여전히 오빠는 오빠로서 본다. 좀 무서워하기는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보이지만 철저하게 엄마의 관점이 아닌 책을 읽은 타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과연 처음부터 아이가 엄마를 밀어내고 거부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든다. 모유를 거부한다는 것이 자신을 거부한 것이 아니고 갓난 아이가 무엇을 안다고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을까? 어느 정도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눈에 보였어도 엄마도 워낙 시니컬한 아이에게 더더욱 시니컬하게 세상을 바라보도록 하는 시선을 선사한 점도 분명히 있다.

 

사랑으로 감싸려 하기보다는 나와는 다른 놈이고 나를 미워하는 놈이고 나에게 하는 행동과 남편에게 하는 행동이 다른 놈이고 자신의 본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나와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가 아닌 여자로써 한 개인으로써 상대하려 했다. 절대적 자기 희생을 해야 하는 것이 꼭 엄마의 역할은 아니지만 자녀로써 보다듬고 포용하기보다는 본인 스스로도 타인으로써 밀어내려고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와 다른 아들이라 스스로 더욱 아들을 아들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아닐까하는 점이 있었다.

 

끝까지 이 책을 읽자고 마음 먹은 후에는 오히려 더 집중하고 몰입해서 읽으려고 했다. 글자 하나까지. 500페이지를 넘기니 그때부터는 확실하게 서서히 재미있게 읽게 되었다. 또는 글 스타일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익숙해졌거나. 시작하자마자 결론은 나온다. 아들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죽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할 수 없다. 현재, 감옥에 있다. 면회를 간다.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편지를 보내는 시간이 흐른다. 그러면서, 하나씩 하나씩 자신이 스스로 어디서부터 어떻게 된 것인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야기하고 현재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도 편지에 쓴다.

 

자신만이 아들은 괴물이고 얼마든지 타인에게 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힐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지만 피하면 된다고 본다. 재미삼아 상대방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내면을 건드려 힘들게 만들어도 진짜로 누구를 죽일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또는 예측은 했지만 설마했거나 차마 멈출 수 있는 것을 포기했다.

 

또한, 아들은 결코 의미없이 단순히 재미삼아 무엇인가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엄마에게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 한 것도 많다. 엄마와 게임을 한 것이다. 더이상 게임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에 게임의 종지부를 찍으려 살인을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결말에 가서는 전혀 예측하지도 못한 결과를 보여준다. 읽은 후에 '어~~???? 뭐야??'하면서 전 페이지로 넘어가서 다시 한 번 읽었다. 그 후에 최종 날짜의 편지를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늪에 빠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서 어느 순간 빠져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늪에 빠져 버리는 것처럼 일정 순간이 지나면서부터는 책이 재미있게 읽혔다. 늪에 빠지기 전까지는 상당히 힘겹게 읽었다. 전후사정과 부연설명과 꼭 관련이 없는 내용의 연속적인 묘사등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걸 견뎌내야 내 책의 재미를 알 수 있게 한다라고 알려주는 듯 하다. 책을 펼치자마자 읽게 만드는 흡인력은 초반 몇 페이지에서는 궁금증을 유발할지 몰라도 그 후에는 사막 한 복판에 떨어져서 작가가 알려주는 방향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방황한다는 느낌은 분명히 있는데 쫓아갈 수 밖에 없게 만들어 주는 듯 하다.

 

억울해서 일부러 리뷰도 길게 쓰고 있다. 오래도록 붙잡고 읽었던 시간을 보답받기 위해서. 이렇게 오래도록 읽을 것이라 예상하지 못하던 배반에 대한 응답으로. 도대체, 이 내용인데 왜 영화 예고를 봤을 때 전혀 감도 잡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에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결심이 든다. 

 

향후에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작품을 또 읽겠냐고 물어본다면 음~~~ 솔직히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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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의 늑대
조던 벨포트 지음, 차휘석 옮김 / 열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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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실화인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는 소설이다. 분명히 소설이라고 표현을 했다. 이 말은 이 책은 소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저자의 프로필을 보면 소설가가 아니라 월가에서 활동을 한 정도가 아니라 투자은행을 설립했다는 표현이 있고 마약과 섹스에 불법자금까지 연루되어 구속 수감까지 되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저자에 대한 이런 소개글을 읽고 책을 읽게 되니 책의 내용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에 대한 여부가 좀 아리송했다. 그저, 소설이라는 생각으로 책을 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책에 나온 내용이 저자가 직접 겪은 경험이라는 믿음이 읽는내내 중첩되다보니 저절로 책에 집중하게 되는 장점이 생긴다.

 

한 편으로는 '월가의 늑대'에서 원했던 부분은 월스트리스에서 벌어지는 민낯을 제대로 까 발려주리라였다. 보다 금융적인 이야기와 월스트리트에서 벌어지는 합법과 불법, 절세와 탈세, 그들끼리의 투자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라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최첨단(??) 금융기법을 통해 돈을 긁어 모으는 방법에 대해 자세한 묘사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지금에 와서는 고리타분한 방식일지 몰라도 당시에는 최첨단 방식의 금융기법을 통한 투자 수익률 올리는 방법에 대해 알려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책은 그저 한 개인의 개인사에 좀더 집중하는 책이다. 가장 아쉬운 것은 바로 어떻게 해서 저자 자신이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완전히 삭제되었다는 것이다.

 

조금의 유추할 가능성마저 완전히 배제하고 이미 성공한 상태에서 성공을 유지하고 더 성공하기 위한 방법들만 나온다. 책 프롤로그로 투자업계에 신인으로 들어와서 애송이의 모습을 보여줘서 본격적으로 저자가 어떤 식으로 월스트리에서 성공해서 사장이 되었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라 생각을 했다.

 

자신의 상사가 몇 년 후에 자기 회사의 부하가 된다는 마무리를 통해 더더욱 성공스토리가 흥미진지하게 펼쳐질 것이라 봤지만 소설이 시작되고서 나오는 도입부는 이미 사장이 되었고 그 후로는 절대로 사장 이전의 이야기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 부분을 알고 싶었고 궁금했는데 좀 배신감을 느끼게 만들어 준 책이다.

 

사장이 된 후에 어떤 식으로 운영을 하고 동기부여를 제시하고 돈을 긁어 모으는지에 대해 알려주기는 한다. 가장 큰 돈은 기업공모를 할 때 차명으로 자신의 주식을 시장에 높은 가격에 팔면서 생기는 것으로 나오는 데 그 보다는 자신의 직원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벌어들이는 이익이 가장 클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한 세부적인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전화로 부유층에서 기업의 이익을 설명하고 투자하라고 하는 정도의 이야기만 나오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회사를 어떻게 부유층에게 설명해서 구워삶았는지 묘사되었으면 훨씬 더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기 보다는 재미있었을 것 같다. 또한, 기업공모를 통한 돈벌이도 보다 자세하게 본인의 주 종목이였으니 설명하면 좋았을텐데 그런 점에서는 아쉬웠다.

 

소설은 월스트리트를 배경으로 한 투자 소설이 아니라 월스트리트에서 성공한 '월가의 늑대'라는 닉네임을 얻게 된 한 개인에게 집중을 하다보니 투자나 월스트리트의 돈버는 방법보다는 주인공이 어떻게 돈을 흥청망청쓰고 점점 파괴되어가는지에 집중한다. 돈이 워낙 많아 부담없이 몇 천만원, 몇 억을 펑펑 써도 문제가 없고 거대한 성에서 살고 있으면서 진정한 로얄 패밀리의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각종, 약물과 마약에 취하는 모습이나 월스트리트에서 성공한 주식 중개인들이 어떻게 그들의 스트레스를 푸는지에 대한 묘사는 사실여부를 떠나 그토록 난잡한 생활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돈을 감당하는 것인지에 대해 솔직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한 두명도 아니고 집단이 다 함께 그렇게 한다는 점이 말이다.

 

한편으로는 소설속 주인공이 바로 저자 자신이라 그런지 상당히 세부적인 묘사가 솔직하기는 하지만 무엇인가 자신의 치부에 대해서 방어막을 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어떻게 보면 완전히 개차반의 삶을 돈이라는 물질로 세상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부분에서 개와 같다고 할 수 있음에도 소설의 분위기는 좋은 쪽으로 묘사된다.

 

권선징악이라고 하면 권선징악이라고 할 수 있는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그 마저도 지운 죄에 비하면 너무 가벼워서 역시나 우리나라의 무전유죄 유전무죄는 세발의 피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미국은 자본주의의 최첨단답게 돈이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사회니 말이다. (정말로 그런지는 살아보지 않아 확신할 수 없다) 

 

생각과는 다른 전개와 내용이라 다소 실망스럽지만 한 개인이 정점에 취해서 완전히 망가지는 과정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이마저도 책이 나온 당시에는 새로웠을지 몰라도 지금은 많이 알려져서 딱히 새롭다고 볼 수 없다는 한계는 있지만. 그래도, 중간에 기업을 키우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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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방대수 옮김 / 책만드는집 / 200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20년 전 정도에 읽지 않았을까한다. 고백하자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보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드라마 제목을 먼저 알고 있었다. 알고 보니 드라마가 톨스토이의 제목을 차용한 것이였지만. 제목만 보면 너무 철학적이고 무거운 내용을 말하는 책이라 여겨진다.

 

최근에도 여전히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하여 쉽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이 나오고 있다. 다만, 예전과 달리 단순하게 권선징악의 내용이 아니라 어떻게하면 잘 살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는 경우가 많다. 자기계발서적류의 책중에 동화형식을 빌어 나온 책들도 있는데 이 중에는 대박을 친 책들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책이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이다. 대박을 넘어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배려'와 같은 책도 꽤 많은 사랑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고 현재도 소설형식을 빌어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알려주려고 하는 실용서적들이 꽤 많이 존재한다.

 

소설형식으로 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딱딱한 내용을 부드럽게 해 주는 효과는 있지만 지금까지 읽은 책들은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를 제외하면 너무 오글거리고 낯간지러운 내용과 문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알리려고 하는지는 알겠는데 워낙 눈에 뻔히 보이고 작품성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개연성과 글의 힘이 느껴지지 않아 최근에는 아예 읽을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내가 한 번 써 볼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용을 보여주기위한 글이 조악한 것이 많다.

 

그런 저자들과 톨스토이를 비교한다는 것은 너무 죄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톨스토이의 작품은 이미 고전이라는 반열에 오르기도 했고 톨스토이 자체가 거장이라는 호칭에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번에 이 책을 읽기전에 무려 90여권이나 되는 저서가 있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워낙 위대한 작품들을 우리들에게 선사해서 몰랐다.

 

거장이라 대단한 작품 몇개가 있는줄 알았는데 이토록 많은 작품을 세상에 내 놨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책 내용과는 상관없지만 확실하게 무엇인가 대단한 작품 단 하나만 내 놓겠다는 생각 자체가 이토록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여러 권의 책을 펴 내는것에 대한 계면쩍은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꼭 그럴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을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확신했다. 나처럼 별 거 없는 사람은 오히려 더 많은 글을 쓰고 펴 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걸 말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우연히 딸의 책상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2년 전에 교회 선생님에게서 선물 받았다고 하는데 책 두께를 보면서 무릎을 쳤다. 2013년 150권을 채우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마지막 한 권을 얇은 책으로 했으면 했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선택해 읽을 수 있다는 판단이 들어 말이다.

 

예전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고 사랑이라는 생각을 했다면 이번에도 그 결론은 똑같다는 판단을 했지만 진정으로 나 자신에게 물어봤을 때 도대체, 사람인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답변할 꺼리가 생각나지 않는다. 사랑으로 산다는 진부하지만 확실한 진리말고 나는 지금까지 무엇으로 살았고 앞으로 무엇으로 살 건인지에 대한 답변을 하지 못할 만큼 바쁘게 산 것도 아니니 생각없이 살았다는 뜻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생각한다고 그렇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변은 완전히 다른 의미다.

 

지금, 나는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책을 펴 내고 투자를 하고 살고 있는데 이것들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다. 무엇으로에 대한 답이 아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아우르는 개념이다. 개인적으로 사랑보다 상위개념은 없다고 본다.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말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내 원수도 사랑해야 하는것이 인간으로써 과연 할 수 있는 감정이란 말인가? 내 자신은 안 보면 된다는 생각이라 사랑보다는 역지사지에 좀 더 가깝다.

 

결혼을 하면서 아이가 생기면서 나 혼자와 다른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나오지 않을까 한다. 혼자라면 얼마든지인데, 식구들때문에 쉽사리 선택하고 결정할 수 없고 홀가분하게 할 수 없다는 비겁한 순간이 많아진다. 나 혼자 망하면 되는데 남은 식구들에게 최소한 어려움을 주는것은 아니지 않나싶다. 나라는 사람은 그렇게 볼때 가족으로 사는 것일까? 이것도 아니다. 가만히 나를 보면 아무리 내 가족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내가 먼저인 순간이 많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닌 아빠라 그런 듯 하다. 엄마가 더 위대하다. 아빠가 뭐라고 해도.

 

대답이 없는 아니, 답변하기 힘든 현 상황에서는 더이상 물고 늘어지는 것은 무의미할 듯 하고 머리속에 넣고 뜨문 뜨문이라도 떠오르면 되지 않을까 싶다. 한편으로는 답을 찾는다고 해서 달라질 인생이 될 것같지도 않고.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와 '바보이반'은 욕심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에게 꼭 필요한 의식주를 제외한 것들은 얼마나 더 욕심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만족도가 달라진다. 또한, 가장 필수적인 의식주를 제외한 의식주마저도 인간의 욕심에 의해 과시욕구와 자기 만족을 채워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살아 생전에 좀 더 많은 땅을 가지면 그만큼 풍요롭게 살 수 있다. 권력과 자본이 있으면 이 역시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지만.

 

얼마나 이 욕심과 욕망과 기본적인 욕구를 잘 다스려서 살아가느냐가 인간의 행복과 궁극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더 가질수록 더 좋은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다.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무의미하다고 말하지만 그걸 말하는 사람들도 그만큼의 소유를 했느냐의 여부가 문제이고 그만큼 소유를 해 본 결과에서 나온 통찰인지 여부도 확실하지 않고 가지지 못한 자의 체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해도 결국에는 자신의 결정이 중요한 부분이다. 금으로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왕이 자신의 욕심만큼 가질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에 빠지는 것처럼 욕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소유의 문제이다. 하긴, 소유냐 존재냐라는 철학적인 명제가 있을 정도이니 이 부분은 인간의 오래된 화두일 듯 하다. 개인적으로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할 부분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바보이반'은 쉽게 읽을 수 있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할 수 있는데 우습게 여기고 볼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톨스토이라는 시대를 통찰하고 혜안을 가진 위대한 성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 말이다. 연말에 본 마지막 책으로 쉽게 보고 가볍게 읽었지만 울림은 몇 천페이지의 책과 비교하여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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