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와 당 - 마르크스에서 그람시까지
존 몰리뉴 지음, 이진한 옮김 / 북막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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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반적으로 '정당' 이라 하면, '선거' 가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하지만, 정당의 목적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들을 ‘선거인’이 아닌 ‘정치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것이겠죠.

선거란, 목적이 아닌 수단입니다. 그들이 정치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죠.

선거는 수단이라고 했으니, 분명 다른 수단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즉, 정치를 목적으로 하되, 선거에 연연하지 않는 정당도 논리적,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도 이런 류의 정당은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노동자의 힘’ 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정당이 있구요. (이들은 스스로를 정의하기를 ‘비제도적 투쟁정당’ 이라 부릅니다.)

여튼, 중요한 것은, 정당에게 선거란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선거에 출마하고 출마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정의하건데, 정당이란 정치조직이지 선거조직은 아닐테니까요.
정당의 사전적인 의미는, “정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정치권력의 획득ㆍ유지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견을 실현시키려는 목적으로 조직한 정치적 단체”입니다.

존 몰리뉴의 <마르크스주의와 당>은, 마르크스-레닌-로자-트로츠키-그람시 에 이르기까지 당과 관련한 각 혁명가(사상가)들의 이론과 실천이 어떻게 성립 발전되어 왔는지를 짚어내고 있습니다.

(이들 역시도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정당을 필요로 하였지만, 이들에게 수단은 선거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회문제의 원인을 특정 정치인, 특정 정책이 아닌, 자본주의 경제체제 그 자체로 바라보았기 때문이죠. 이들은 선거를 통해 행정부 또는 입법부를 장악하는 것 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몰리뉴씨가 기대한 독자층은, 자본주의 의회정치에 대한 기대를 거두어들이는 것과 동시에 다른 대안을 진지하게 찾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설사 의회 밖 정치라 할지라도 말이죠.
몰리뉴씨의 독자층을 묘사하기 위해 아래의 한 단락을 할애합니다.

「이론적 사상적 대안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한 역사는 있지만, 억압받는 이들의 투쟁이 없었던 역사는 없었습니다. 소련 중국의 변화와 상관없이, 온갖 포스트 사상들이 불러온 논쟁들과 상관없이, 신자유주의의 광풍에도 상관없이, 자본주의가 존재했고 억압받는 이들의 투쟁이 존재했죠.
그리고, 투쟁이 거세질 수록 사람들의 자신감도 커집니다. 급기야 이들은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라고 한목소리로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어떻게 다른 세계를 만들까?” 라는 질문에 각각 다른 대답을 합니다.」

몰리뉴는 이 독자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대중투쟁과 심지어 대중혁명조차도 자생적으로 또는 비공식적 지역 네트워크들을 통해 분출할 수는 있지만, 그런 형태로는 자본주의를 정말로 패배시킬 수 없다. 이런 과제를 위해서는 혁명적 노동자 정당이라는 지도부가 필수적이다.”

그의 얘기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에 비유할 수 있는데,
다른 세계에 대한 우리의 ‘열망‘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열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기존 세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테니까요.
기존 체제와의 싸움, 새로운 세계의 전망을 수립하는 일은, 일치된 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 - 그것은 불가피하게 전부를 포괄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 의 일치된 ‘전망’, 이것을 곧 정당이라 할 수 있겠죠.

몰리뉴가 소개하고 있는 거의 100년간의 정당이론은 이에 대한 것입니다. 1848년에 쓰여진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주의당 선언>으로 부터 1930년의 안토니오 그람시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가 쉽게 얘기하는 사회주의 정당이론의 오랜 역사적 경험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물론, 옳다 그르다라는 대답을 누구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얘기는 이렇게 시작해야합니다. “어떻게 다른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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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논쟁
크리스 하먼 지음 / 풀무질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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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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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말 그대로 논쟁을 모아둔 것입니다. 논쟁은, 소련이 해체된 90년대 초반,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이 발간하던 이론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주제는 "소련의 몰락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라는 것이었죠. 책에는 주로 두명의 집필자가 번갈아가며 등장하는데, 크리스 하먼과 에르네스트 만델은 각각 특정 정치그룹의 대표적인 이론가들입니다.

물론, 이 둘의 논쟁과 상관없이,
당시의 지배적인 분위기란 '사회주의의 몰락' 이었고, 잠정적으로라도 사회주의를 표방하던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이 이에 순응했습니다.
하지만, 이 논쟁은 소련이 사회주의인가 아닌가 라는 논쟁은 아니며, 이 두 집필자 모두 소련을 사회주의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먼의 경우는, 소련은 국가자본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91년 소련의 해체는 국가자본주의가 사적자본주의로 옆걸음 친 것 뿐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고,
만델의 경우는, 소련은 10월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속해있었는데, 스탈린과 같은 관료들에 의해 점점 자본주의로 퇴행하다가 결국 완전하게 자본주의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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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쟁은 유효기간이 지난게 아닐까요?
중국과 소련이 완전하게 자본주의국가의 면모를 보이고 있는 지금, 이론적 탐구라는 측면 외에는 꽤나 재미없는 논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북한 쿠바를 모종의 사회주의국가로 바라보는 시각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이 시각의 근본에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경제', '일국 폐쇄경제', '중앙집권적인 국가관료', 등을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관점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런 왜곡된 관점이 자본주의에 대한 정당한 비판 마저도 '대안 없음' 으로 귀결시키는 자석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여집니다.

이 논쟁의 유효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제목은 논쟁이지만, 굉장히 재미있고 흥미로우며, 동시에 분석적이라는 짧은 평을 덧붙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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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대학시절 한 선배를 만났는데, 안부를 주거니받거니 하다가 노동운동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말씀하시길, "요즘 민주노총에 대한 여론이 별로 안좋던데.." 라며 걱정을 하시더라구요.

이 선배의 걱정은 민주노총과 노동운동을 동일시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죠.
노동조합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당하고, 취업비리를 저지르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대공장 노동조합의 이기주의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이 어렵다는 정부의 선전도 한몫 했을겁니다.

하지만, 노동운동이란, 말 그대로 노동자운동이지 민주노총운동이 아니죠.
민주노총이 분명 잘못된 길을 가고있지만, 사회적으로 양극화되는 노동자들의 처지나 정당한 요구가 잘못된 길을 가고있는 것은 아니죠. 노동계 내부에서도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이 빈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이라는 기구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정부의 선전은, 대공장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겁니다.

만델의 입장이 이와 같은 맥락에 놓여있습니다.
만델은 소련이 스탈린 관료집단에 의해 타락의 길을 가고있지만, 10월혁명으로 이룩한 노동자국가임에는 틀림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타락한 노동자국가' 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소련의 억압받는 노동자들이 정치혁명을 일으켜 스탈린과 같은 관료집단을 일소하기만 하면 다시 본연의 노동자국가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소련의 해체는, 노동자국가로 돌아갈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도 잃어버린 '패배' 라는 것이죠.

반면에 하먼은, 소련이 스탈린 집권 이래로 이미 (국가)자본주의화 되었고, 소련의 해체는 비능률적인 국가자본주의가 사적자본주의로 옆걸음질 친 것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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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먼과 만델의 입장이 처음으로 충돌하는 지점은, 스탈린의 집권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물론, 만델도 하먼도 소련을 사회주의국가로 바라보지는 않았습니다.
소련은 10월혁명으로 자본주의를 벗어났지만, 벗어난 자본주의의 압력도, 다가가야 할 사회주의의 압력도 동시에 받고있는 불완전한 체제인 것입니다.

양쪽에서 힘을 받고있던 소련에서, 기점은 스탈린의 집권인데,
만델에게 그저 '타락'일 뿐인 스탈린의 집권은, 하먼에게는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反혁명'인 것입니다.
반대로, 만델에게 자본주의로 돌아간 '反혁명'인 소련의 해체는, 하먼에게는 국가자본주의가 사적자본주의로 옆걸음을 딛은 것 뿐이구요.

91년 이후 소련에서 자본주의의 경제법칙(가치법칙)이 작용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겠지만,
하먼의 주장대로라면, 소련에는 이전부터 이미 가치법칙이 작용하고 있었던겁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 이전까지는 폐쇄경제를 유지했던 만큼, 제한적이었지만 말이죠.

하먼은 제한적 가치법칙의 작용을 군비경쟁에서 찾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의 자유시장경제의 다음 단계로 지칭되는 '제국주의 시대'에, 국가와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본은 밀접하게 유착하게 되어,
자본 사이의 경쟁인 자본주의 가치법칙이 곧 국가간의 무기 경쟁과 전쟁으로 왜곡된다는 것이고, 소련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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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입장의 하먼의 것에 가깝습니다.

대규모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인 소유의 철폐라는 것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형식일 뿐이지 내용 자체는 아닐테니까요.
집중화시킨 생산수단을 민주적인 계획을 통해서 잘 이용하느냐 아니냐가 더 근본적으로 중요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탈린의 집권 이후에 생산계획 자체가 인민들의 동의 없이 소비재 보다는 중공업 위주로만 폭압적으로 이루어졌고,
스탈린 스스로도 일국에서도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일국사회주의' - 실제로는, 폐쇄적 자본주의 경제에 불과했지만 - 를 주창하면서 사회주의로 나아갈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다는 점을 보면,

그것은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제 형식과 상관없이, 아니 그 형식 때문에 더욱 왜곡된 자본주의 국가로 회기한 것이죠.
소련 해체 이전부터 독일, 헝가리, 폴란드, 중국, 등에서 체제 저항적인 투쟁이 있었다는 점도 그것을 뒷받침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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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논쟁적인 성격의 글 보다는 좀 더 분석적이고 실증적으로 쓰여진 <소련 국가자본주의>를 비롯해서, 논쟁의 배경이 되는 시대적 정황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해야 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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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의 노동조합투쟁론
레온 트로츠키 지음, 서상규 옮김 / 풀무질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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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트로츠키의 저작에 대한 여행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저작은 <노동조합투쟁론>입니다. '노동조합'이라는 가장 익숙한 주제를 제일 마지막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동안 여타의 독서후기가 현저히 낮은 조회수를 기록했는데, - 어느정도 짐작했지만 제 예상보다도 낮았습니다. - 덕분에 이번에는 좀 더 현실 중심적으로 후기를 써볼까 합니다.


# 어용노조

제목에 걸맞게 노동조합 얘기로 시작해볼께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다들 아실텐데, 한국노총을 소위 '어용노조'라고 불러왔습니다.

어용의 사전적인 의미는 '권력에 아첨하고 자주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본래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사용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파편적이고 힘이 없는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기위해서 결성되는 것이니 만큼, 사용자에 대해 독자성 내지는 자주성을 가져야하는데 그러하지 못한 경우를 일컫는 것이죠.

하지만, 한국노총의 노조간부들이라고 해서 대놓고 "나는 親사용자적이요." 라고 할 수는 없을겁니다.
겉으로는 어떤 방식이든 시늉을 해야하기 마련이죠. 제 경험을 빌리자면, 이런 사람들이 종종 내세우는 것이 '합리적 사고' 혹은 '공존의 사고' 입니다.

"무조건 우리 주장만 할 수는 없으니 상대방(사용자)의 입장도 반영하자."
"요구하는 것을 무조건 관철시킬 수는 없으니 적당히 우리도 양보하자."
"회사가 무너지면 결국 우리 일자리도 사라지는 것 아니냐."

기타 등등의 논리가 '합리적 사고'라는 이름을 빌리게 됩니다.
여기서 합리적 사고란 대부분 양보 내지는 쟁의행위를 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인지라, 사용자들에게는 무척이나 환영할 만한 일이고 사용자들과 노조간부들의 관계는 돈독해집니다.

사용자 입장에서 노조간부의 역할이란 실로 막중한 것입니다.
노조간부가 사용자와 노동자의 사이에서 중재를 빙자한 양보를 해주어야 회사측의 이익을 보존할 수 있는 셈이니까요.

이익이 되는 일에는 투자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사용자들은 노조간부에게 온갖가지 특혜를 주기 시작합니다. 차도 사주고, 비싼 술집도 데려가고, 노조전임자로서 일하지 않아도 월급을 꼬박꼬박 지급하며, 기타 등등

또 소위 강성인 노조원을 공격하는데 있어서도 이들은 동맹을 맺습니다.
강성인 노조원은 회사에는 물론이거니와, 노조간부들을 비판하면서 이들의 달콤한 지위를 공격할테니까요.
노조간부에게 해고할 권한은 없으니, 회사에서 해고를 시키고, 노조는 이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서로 장단을 맞춥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그들의 이해관계가 잘 짜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동맹일겁니다.
한국노총이든 민주노총이든 태어날 때 부터 어용딱지 붙이고 태어난 것이 아닌 이상, 이름에 '민주'가 들어갔건 들어가지 않았건, 어떤 노동조합이든 이런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 노사정위원회

위에서 전해드린 얘기가 노조간부와 사용자간의 야합이라면, 노조간부와 국가기구간의 야합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정리해고법 근로자파견제 변형시간근로제를 통과시키려 했고 실제 날치기 통과되었던 96년 노동법 개악이 그 사례가 될겁니다.
이때 민주노총의 최대 이슈는 복수노조 금지, 3자개입 금지, 공무원 교사의 단결권 제한과 같은 법안을 폐지하는 것이었는데, 도리어 정부는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 변형시간근로제를 합법화하려고 했습니다.

이 노동법 개악은 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 상정된 안이었고, 정부의 강행의지로 민주노총은 10월에 탈퇴하게됩니다.
노사관계개혁위원회는 깨졌지만 이 법안이 날치기 통과될 것이라는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었는데, 이때 민주노총의 노조간부들은 총파업을 연기하면서 논란을 빚게 됩니다.

이때 노조간부들은, "실질적으로 노동법 개정을 할 수 없는 현실적 상황에서, 일단 정리해고법 근로자파견제 변형시간근로제의 강행 통과만이라도 막자" 고 말하며, 국회가 이것을 강행처리 할 경우에 파업에 들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이었죠.
결국, 총파업은 몇차례 유보되었다가, 12월 25일 날치기 통과가 된 이후에야 일어나게 되는데, 결국 법안을 철회시키지 못하고 일부를 개정하는 수준에 그치게됩니다.
단 하나, 민주노총 합법화를 따내게되는데, 이 때문에 민주노총 합법화와 노동법 개악을 맞바꾸기 했다는 얘기들도 있구요.

그런데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 얼마 전,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오해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때 소속 조합원들끼리 물리적 충돌이 있어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현재 민주노총 지도부가 다시 노사정위원회에 가입하려하자 이에 반대하는 조합원들과 충돌이 있었던거죠.
민주노총 지도부는 민주노동당의 비정규직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고자 했고, 정부는 도리어 비정규직보호법안 - 노동계의 표현은 비정규직개악안 - 을 강행통과하려 했던겁니다.

96년과 꼭 닮은 형국입니다. 노조간부 몇몇의 협상으로 양보안 타협안을 도출하려는거죠.


# 관료주의의 항변

위에서 전해드린 얘기들은 몇해 전부터 노동운동 내의 굉장히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어온 것들입니다.
'관료주의'라는 제목을 달고있는 이 문제의식은, 노조의 상층부가 사용자나 정부의 이해를 대변하며 조직의 기반이 되는 조합원들과 심각하게 괴리되는 현상을 뜻합니다.
그리고, 트로츠키의 <노동조합투쟁론>은 이것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 현대 전 세계 노동조합의 발전, 아니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퇴보에 있어서 하나의 공통된 특징적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노동조합이 국가권력과 유착하거나 함께 성장하는 현상이다. "
" 개량주의 노동조합의 지도부인 노동귀족과 노동관료 특권층은 노동자들을 부르주아국가의 이익을 위해 통제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에서만 국가는 이 특권층의 사회적 지위를 보호한다. "


트로츠키의 분석에 따르면, 퇴보기의 노조운동은 노정교섭이나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국가기구와 함께 발을 맞출 것이고, 노조 지도부는 국가의 이해를 어느정도 반영하면서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속 노조를 적당히 통제하면서 국가의 이해를 받아들이고 대신 자신의 위치를 보호받는 것이죠. 대신, 노조간부가 소속노조를 적당히 통제하지 못한다면, 언제든 국가는 이들을 내칠 것이구요.

민주노총 지도부가 조합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사정위원회 참가를 강행하려 했던 것은,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하지 않았을 때 국가로부터 버림받을 걱정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930년대에 쓰여진 이 저작이 2005년 한국의 문제들을 훌륭하게 분석하고 있는 것은, 트로츠키가 뛰어난 예지능력을 갖추고 있어서는 아닐겁니다.
그의 분석이 단순히 직관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객관적인 조건을 면밀히 분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죠. 세계 어는 곳에서나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는 것 처럼.


# 관료주의 분석하기

그렇다면, "왜 노조간부들은 타락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동조합이란, 자본주의적 기구이죠. 자본주의 사회의 헌법에도 노동3권이 명시되어 있으니까요.
이마저도 현실과 괴리되어있지만, 허울좋은 법안이나마,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사용자의 횡포에 대항해 자신들의 임금이나 근로조건, 등을 개선할 권리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나마 이만큼의 법적 지위도 그간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들의 죽고 다치는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지만요.

여튼, 노동조합 자체는 부의 분배를 조정하려하지, 자본주의 자체를 변화시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적 기구이죠.
노동조합의 한계, 그리고 노조간부들의 타락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한국자본주의가 어느정도 부를 축적하고 있다면 분배도 가능하겠지만,
시장이 개방된 제국주의 시대에, 한국자본주의가 초국적자본주의와 경쟁을 해야하고 경쟁력에 뒤쳐져 분배할 능력을 상실한다면, 부의 분배를 목적으로 하는 노동조합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요.

이 경우, 노조간부들은 필연적으로 사용자와 유착하거나, (혹 사용자의 지불능력이 없다면) 국가기구와 유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과의 유착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느정도 조합원들의 요구를 양보하거나 조절해야하구요.


# 관료주의 벗어나기

이런 필연적인 귀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목적을 자본주의 내에서 부를 분배하는 것 정도로 '제한하지 않는 것' 밖에 없을겁니다.
트로츠키는 정당의 역할이 여기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정당은, 아무리 정체되고 퇴보한 노동조합이라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활동해야하며 노동조합이 그 목적을 자본주의 내로 한정하지 않도록 꾸준히 설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극심한 위기에 처하게되어 노동조합이 무기력해진다면, 이때 정당은 노동조합이라는 덫에 걸리지 않고 노동자들이 다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도 97년 총파업 이후에 민주노총 40만 조합원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민주노동당이 결성되었는데, 민주노동당이 트로츠키가 언급한 정당에 부합하는지는 확연하지 않습니다.
다만, 민주노동당이 기존의 정당들에 비해 단지 정책적으로 조금 왼쪽에 있을 뿐이라면, 그리고 단지 집권을 목표로 한다면, 이들도 타락한 노조간부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해봅니다.

연일 노동조합운동의 내부비리로 메이저 언론 뿐만 아니라 노동계 내에서도 문제가 심각한 이때,
트로츠키는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그저 노조간부를 새로 선출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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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혁명을 위한 이행기강령 - 트로츠키 저작시리즈 7
레온 트로츠키 지음, 김성훈 옮김 / 풀무질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강령’은 계획과 비슷한 뜻입니다. 쉽게 풀이하자면, ‘이행기강령’이란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사회주의자들의 계획을 뜻하는 것이겠죠. 트로츠키가 작성한 이행기강령을 대략적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물가임금연동제 시행
(2) 공장위원회 수립
(3) 기업비밀의 철폐
(4) 개별기업집단의 몰수
(5) 민간은행의 몰수와 신용체제의 국가관리
(6) 가격위원회 수립
(7) 노동자에 의한 군수산업의 통제와 이윤 몰수
(8) 비밀외교의 철폐
(9) 상비군을 민병대로 대체

여러분들의 느낌은 어떠하신지요.
풀무질 출판사에서 나온 <사회혁명을 위한 이행기강령>에는 트로츠키가 이 행기강령을 두고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 소속 당원들과 토론한 기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운을 떼죠.

“일부 동지들은 내가 제안한 이행기 요구들이 일부는 기회주의적이며, 일부는 너무 혁명적이라 객관적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다.”

제 생각엔, 일반적인 시각도 그러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쉽게 얘기해, 몇몇 요구는 그리 대단치 않게 느껴지고 몇몇 요구는 너무 멀게 느껴지는 것이니까요. 이를테면, 공장위원회 수립이나 기업 은행의 몰수, 민병대, 등은 너무 멀게 느껴지는 요구들일겁니다.
물론, 이행기강령이란 자본주의가 경제위기와 전쟁과 같이 극심한 위기에 처했을 때에나 제안되는 요구들이지만요. 그것은 여전히 일반적인 정서와 한참의 거리를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흔히, “비현실적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위의 요구들은 자본주의라는 현실에서 이루어 질 수 없는 요구들이죠. 트로츠키도 이것을 알고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이 요구를 실현시키는 것보다,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것이 더 쉽다.”

하지만, 비현실적이라고 해서, 이행기강령이 공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굳이 형용어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현실지양적이죠. 그저 ‘미래에나 가능한 일‘을 꿈꾸기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계획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회주의자로서 트로츠키의 태도를 옅볼 수 있습니다. 그는 ‘솔직함‘이라는 덕목을 꼽았습니다. 고려해야 할 것은 대중의 정서 보다는, 객관적 현실이라는 것이죠. 비록 이행기강령이 지금 당장 대중의 정서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조있게 자신의 주장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무릇 정서라는 것은 객관적인 현실에 따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판단 자체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은 비현실적인 요구들이 현실적인 요구들로 받아들여질 때가, 즉 주관적인 정서가 객관적인 현실과 만나게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만히 앉아 하루속히 이 날이 오도록 기도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 만남(?)이 더욱 빨리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끈기있게 설명을 해야하구요. 이행기강령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일 것입니다.

훌륭한 예시는 아니겠지만, 부동산과 관련한 역대 정책들을 예시로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공급자와 소비자가 있고 거래가 성사되어 이윤만 보장된다면 무엇이든 팔려고 달려드는 것이 자본주의의 운동입니다. 처음엔 TV, 냉장고 같은 상품을 팔다가, 교육 의료 같은 기본적인 권리도 팔았고, 사람도 팔고(파견법), 사람의 장기에 성기, 난자까지 파는 세상입니다.

땅도 예외가 아닌데요,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경우 상위 20%가 전체 토지면적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극단적입니다. ‘땅 투기‘죠.
하지만, 인트라넷 책마을에서 썼던 ‘투자와 투기’에 대한 칼럼에서 처럼, 투기는 본질적으로 투자와 같습니다. 결국, 땅에 대한 사적인 소유, 사적인 소유를 바탕으로 한 거래가 투자이고 투기이고 비상식적인 토지분배의 원인이 되는 셈입니다.

제가 보기에, 땅값을 잡겠다고 두팔 걷어올린 역대 정권들의 부동산 정책이 실패했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땅에 대한 사적소유를 인정하는 한,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로 뒤덮인 정책의 차이는, 토지 거래를 얼마만큼 규제하느냐 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니까요.

숱한 부동산 정책에 일희일비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토지를 공공의 소유로 하자는 주장은 여전히 비현실적이지만, 자본주의가 땅 투기를 잡는다는 것은 비현실적일뿐더러 불가능하기까지 하니까요.

현실적 불가능과 비현실적 가능.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스스로 만들어낸 재앙으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요구들을 만족시킬 능력이 자본주의에게 없다면 이 체제는 멸망해야 한다. 실현가능성이나 실현불가능성은 계급역관계의 문제이다.”


# 보태어

본문에 대한 소개가 다소 미흡했군요. 간략히 소개합니다. 총 여섯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소개하지 않은 두편의 글은 『이행기 요구들: 코민테른에서 제4인터내셔널까지』『제4인터내셔널의 역사』입니다.

『트로츠키와의 이행기강령 토론』: 이행기강령을 두고 트로츠키와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들이 토론한 내용의 속기록입니다.
『이행기강령 -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 제4인터내셔널의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이행기강령 본문입니다.
『프랑스 행동강령』: 위의 이행기강령이 국제적으로 일반화 된 내용이라면, 이것은 프랑스 상황에 맞게 더욱 구체적으로 서술된 프랑스만의 강령입니다.
『국제항만창고노동조합 제10지부의 노동자들이 계급투쟁강령을 내건 후보를 지지하다』: 이행기강령의 현실적용판이라고 할까요? 미국 노동운동에서 사회주의 강령을 걸고 활동했던 이들에 대한 기록과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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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대안 - 트로츠키주의
레온 트로츠키 지음, 강대진 옮김 / 풀무질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혁명운동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한가요?"


“혁명운동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및 비판능력의 저하는 이들을 필연적으로 체제내화시키고, 보수화 경향으로 인도한다.”

트로츠키주의에 대해서는 저번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동구권의 몰락과 함께 근거도 없이 원천적으로 거부되었던 혁명운동의 역사에 트로츠키가 서있습니다.
<역사의 대안 - 트로츠키주의>는 간략하게 말씀드려, 트로츠키주의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대안’ 이란, 다름아닌 연구되기 보다는 거부되었던 러시아의 혁명역사를 뜻하는 것이구요.

트로츠키가 저술한 몇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의 사상을 가장 명쾌하게 보여줄 수 있는 논문으로 선별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혹, 입문서를 통해 그의 사상에 수긍한다면, <러시아혁명사> <배반당한 혁명>을 찾아 읽어보면 될 것입니다. ( <러시아혁명사>는 10월혁명이라는 실제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혁명’이라는 大사건과 관련한 일반화된 정식을 내어놓고 있고, <배반당한 혁명>은 10월혁명 이후의 러시아의 사회체제의 성격에 대해서 분석해놓았습니다. )

<역사의 대안 - 트로츠키주의>에 소개된 논문 각각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공산당선언』
『10월 혁명의 교훈』
『러시아혁명에 관한 세가지 사상』
『10월 혁명을 옹호하며』
『스탈린주의와 볼셰비키주의』

각각의 논문에 대해서 짧게 설명하는 것으로 후기를 대신할까 합니다.


『오늘날의 공산당선언』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20대 후반에 집필한 『공산당선언』(이하 ‘선언’). ‘선언’ 발표 90주년을 기념해 1937년에 집필한 글입니다. 핵심 논지는 ‘선언’에는 아직도 유효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그렇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수정과 보완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언가의 예언처럼, 고정되어 있는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죠.

하지만, 그는 여기에 하나의 전제를 붙입니다.
수정과 보완은, 오로지 ‘선언’이 서술된 기초인 ‘과학적 유물론의 사고’를 바탕으로 해야한다는 것인데요,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체제를 일방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흠집내려는 이들과의 차이점일 것입니다.

쉽게 풀이해서, ‘선언’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판단은, 그저 ‘옳다 그르다’ 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상황을 반영해서 이루어져야하며, 마찬가지 맥락에서 수정과 보완 역시도, ‘선언’이 근거했던 사회체제의 운동법칙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론은 보편화된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이죠.

트로츠키는 이런 관점에 입각해서, ‘선언’의 과거적 요소 -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본주의에 내재한 발전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계급의 혁명적 성숙도를 과대평가했으며, 중간계급들의 소멸과정을 지나치게 단순 묘사하고, 식민지와 반식민지국가의 해방투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 등 - 를 지적합니다.
동시에, 이러한 과거적 요소는, ‘선언’이 집필되었던 19세기는 오늘날과 같은 국적없는 산업자본, 금융자본은 물론이고, 개별 국가 차원에서의 대기업 조차 없었던 초기 자본주의시대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0월 혁명의 교훈』『러시아혁명에 관한 세가지 사상』


“효과적인 수영법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물에 뛰어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혁명이론을 검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제 혁명이 전개될 당시 드러난 온갖 견해들이 실제로 어떻게 현실의 시험을 거쳤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10월혁명 자체에 대한 기록이나 논문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10월혁명의 교훈을 도출해야 하는 이유를 강변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이 집필된 1924년은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관료주의에 맞서 ‘좌익반대파‘ 라는 당내 분파를 결성한 즈음이었는데, 그는 아마도 스탈린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190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스탈린을 비롯한 당내 의견의 궤적을 추적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는 러시아혁명의 중요한 논쟁시기를 되짚어가며, 당내에서 대립했던 의견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대를 한국으로 옮겨오자면 이런 예를 들 수 있을겁니다.
사회적 통념은 80년대 민주화투쟁을 벌여냈던 세력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생각하지만, 직선제 선언과 군사정권의 종식 이후에 이 세력들은 정당, 시민사회단체, 노동현장, 재야,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죠. 그리고, 그 중 일부가 02년 이래로 주요 정부기구를 운영하면서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구요.

이것을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무슨 재밌는 기사거리라도 난 것인양 역사의 아이러니라며 떠들어대겠지만,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니에요. 정반대로, 근본적인 차이를 가진 세력들이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이라는 집단 안에 뭉뜽그려져 있었던 것 뿐이지요.
이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모르는 사람만이, 이것을 두고 ‘아이러니’ 운운할 수 있겠지요.

10월혁명 매시기 마다의 논쟁을 소개하려는 트로츠키의 노력은, 군사정권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가려졌던 의견의 대립을 밝히려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트로츠키를 독일의 첩자로 몰아붙이며 탄압했던 것이, 볼셰비키당 당원으로 함께 10월혁명에 참여했던 스탈린이라면, 문민정부 이래로 집권한 정부 여당 치고 민주화투쟁의 외피를 둘러쓰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이니까요.


『10월혁명을 옹호하며』


“거대한 변화의 과정들은 이에 걸맞은 규모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회주의사회가 성경에 나오는 낙원과 같을지는 모르겠다.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소련이 아직도 사회주의를 성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련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전환되는 이행기를 경과하고 있으며, 온갖 모순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과거의 후진성을 물려받아 짓눌려 있으며 더욱이 자본주의국가들의 적대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

이 논문은 1932년, 트로츠키가 덴마크의 사회민주주의 학생조직의 초청을 받아 행한 강연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혁명사>의 요약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10월혁명의 진행과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일반화시켜 혁명의 의의에 대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단순히 10월혁명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혁명 일반의 의의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혁명 이후의 러시아에 쏟아진 여러 가지 비판들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1932년의 러시아는 10월혁명을 15년이나 경과한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여타 자본주의국가들보다 상당히 낙후되어 있었는데, 이를 두고 악의에 찬 많은 선전들이 쏟아졌습니다.
“혁명으로 이룩하고자 했던 사회주의국가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냐” “고작 이런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그토록 많은 희생을 감수했느냐” 라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비판들일겁니다.

트로츠키는 이를 두어 ‘주관주의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라고 응수하는데, 러시아를 둘러싼 객관적인 상황들은 무시한 채 드러난 결과에만 집착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비판입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에디슨이 맨 처음 만든 전구는 성능이 형편없었지만, 오늘날의 고성능 조명기구는 그가 발명한 전구를 토대로 한다는 것이죠.

강연문에서는 구체적인 정황은 소개되지 않습니다. 당시 러시아를 둘러싼 객관적 상황에 대해서는 <배반당한 혁명>에 잘 나와있습니다.


『스탈린주의와 볼셰비키주의』


“위험의 근원은 정책이나 전술이 아니라 노동계급독재의 물질적 취약성에 있었다.“

가장 적극적으로 스탈린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 논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논문은 트로츠키의 말년인 1937년에 쓰여졌는데, 이 시기는 이미 강제집산화, 독-소 불가침 조약, 모스크바재판, 스탈린헌법, 등 스탈린의 통치의 폐해가 본격화된 시기였습니다. 많은 비판이 잇따랐습니다.

90년대 초 한국에서 있었을법한 패배주의가 유럽을 휘감고 있었을겁니다. 스탈린주의의 폐해가 곧 사회주의사상의 귀결인 것 마냥,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그 어떤 대안도 없다며 한탄했을겁니다.

이에 대한 트로츠키의 답변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스탈린주의는 볼셰비키주의와 공통점이 없다는 것이며, 둘째로 볼셰비키주의의 타락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볼셰비키주의 역시도 객관적 현실에 상관없이 승승장구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것이죠. 『10월혁명을 옹호하며』에서 밝혔던 ‘주관주의’에 대한 비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이 논문은 제목과는 달리, 스탈린주의를 비판하기 보다는 볼셰비키주의를 설명하는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스탈린을 비판하기보다는 “아무런 대안도 없다.”는 허무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트로츠키는 자본주의국가 뿐 아니라 10월혁명으로 수립된 노동자국가 역시도 ‘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 라는 마르크스의 분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자본가국가이든, 노동자국가이든 억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억압적인 국가를 폐지시키고자 하는 목표에서 허무주의자들과 일치합니다.

하지만, 그는 허무주의자들이 국가의 폐지를 희망하기만 할 뿐, 어떤 현실적 방안도 마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선을 긋습니다. 동시에, 현실에 무기력한 허무주의자들이 결국 혁명과 같이 계급의 대립이 치열해지는 시기에는 결국 자본주의의 편에 섰다며 비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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