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막스 갈로 지음, 임헌 옮김 / 푸른숲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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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출신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가 태어난 1871년은 러시아 전역에서 나로드니즘이 일어나던 시점이었다. 봉건 구체제에 저항하고자 했던 나로드니키들은, 차르 정부의 요인들을 암살하는 것을 통해 뜻을 펼치고자 했고, 이들의 장렬한 죽음은 젊은이들을 이 대열로 끌어들였다.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유태인으로, 지체장애로 차별받았던 학생 로자 역시도 이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로자가 본격적으로 혁명운동에 뛰어드는 것은, 나로드니즘에 대한 당국의 탄압을 피해 스위스로 피신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당시 스위스는 유럽 각국의 혁명가들의 피신처였고, 로자는 취리히 대학에서 수학하며 여러 혁명가들과 교류한다. 혁명의 시대 20세기 초를 풍미했던 유럽의 혁명가들에게, 나로드니즘과 스위스로의 피신은 하나의 정형과 같았다고 보여진다.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1세대인 노동해방단의 플레하노프, 악셀로드, 자술리치,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자 빅토르 아들러, 등을 여기서 만나게 된다.

그녀의 공식적인 정치활동은 1898년 독일 사민당에 가입하면서 부터 시작된다. 그녀에게 유럽에서 가장 먼저 사회민주당이 결성되어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독일은, 분명 세계혁명의 중심지로 받아들여 졌을 것이고, 그녀는 평생 국제주의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당시 독일 사민당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혁명 없이도 평화적으로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환상이 일어나고 있었고, 이러한 경향은 사민당의 지도자였던 베른슈타인이 불러일으킨 수정주의 논쟁으로 드러난다. 로자는 베른슈타인의 논리를 반박하는 논문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발표하면서, 독일을 비롯해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녀 역시도 여느 혁명가들과 다름 없이, 1차 세계대전을 앞둔 당내 갈등과 분화 속에서 외로운 싸움을 해야했다. 더군다나, 유럽 사회민주당들의 연합체였던 제2인터내셔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오던 역사 깊은 독일 사민당 내의 분화는 더욱 격심했으며, 독일이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참전국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전쟁이 발발하는 1914년 직전 1912년 선거에서 독일 사민당은 대거 승리하게 되는데, 의회로 진출한 사민당 내의 주요 지도자들은 전쟁공채 징수에 찬성하고, 심지어 대거 정부에 참여하게 된다.

주도적인 세를 떨치던 그(녀)들이었기 때문에, 로자는 전쟁과 당, 두가지 모두에 맞선 어려운 싸움을 해야했다. 그녀는 어제까지 친분을 유지했던 당내 주요 지도자에게도 필요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고, 예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독일 전역에서 연설했으며, 1905년 1917년 러시아 혁명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전쟁이 한참 무르익던 1919년 그녀는, 독일 사민당 내에서 끝까지 전쟁 반대를 고수했던 칼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독일 공산당(스파르타쿠스단)을 창설하게 되고, 1919년 예기치 못했던 봉기로 휩쓸려들어간다. 로자는 스파르타쿠스단을 지지하던 젊은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봉기에 반대했지만 끝까지 함께 했고, 실패한 봉기에 의해 결국 그녀는 독일 유격대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로자의 일대기를 기록한 막스 갈로가, 대외적 활동 못지 않게 로자의 인간적인 측면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보통 혁명가들은 자신의 정치활동에 일반적인 가치들을 종속시켜왔기 때문에, 그(녀)들의 일대기에서 정치활동 이외의 것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스위스 피신 중에 만난 폴란드의 지하운동가 레오 요기헤스를 비롯한 뭇 남자들과의 사랑, 가구나 악세사리에 대한 관심, 동물과 자연에 대한 애정, 등 우리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고 솔직했으나, 이를 자신의 정치활동 아래 망설임 없이 종속시키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898년 이후, 나는 개인적으로 끊임없이 가장 천박한 모욕들을 받아왔어요. 그러나, 그런 모욕들에는 결단코 단 한줄도, 단 한마디 말로도 응수한 적이 없어요. 적수들은 정치적으로 이념적인 갈등을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영역으로 몰고가려고 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대해야해요.”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중 350쪽

마지막으로, 로자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대립했던 부분을 살펴야 한다. 그녀는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직접 경험하면서, 크게 두가지 사안에 대해 다른 입장을 제출했다.

첫 번째는, 민족정책이다. 봉건 러시아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투비아, 리투아니아, 등을 지배하고 있었고, 10월 혁명 이후 수립된 볼셰비키 정부는 각 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해 분리독립을 허용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로자의 경우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태어나 스위스로 유학한 이래 줄곧, 자신의 조국 폴란드의 민족주의 운동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으며,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라는 명제 아래, 국경 없는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촉구해왔다.

두 번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러시아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1905년 혁명 이후 의회가 설립되면서 차후 러시아의 혁명전망에 대한 논의가 한참이었다. 이 논의는 크게 세가지 입장으로 나뉘었는데, 의회의 설립과 이에 대한 참여를 종용했던 멘셰비키 그룹과, 현재는 의회의 설립과 참여에 그치지만 의회를 이용해서 노동자 정부의 구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볼셰비키 그룹, 마지막으로 노동자 계급이 주도권을 쥐고 노동자 정부의 구성에 즉각 나서야 한다는 트로츠키 그룹이었다.
마지막 입장은 1905년에 쓰여진 트로츠키의 논문에서 제시된 것으로 ‘영구혁명론‘ 이라 하는데, 볼셰비키 그룹은 1917년 4월 이후 이 입장으로 선회하게 된다.
영구혁명론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대립해왔던 각 세력들에게 1905년에 설립된 의회를 비롯해 1917년 2월에 설립된 임시정부라는 공식적 국가기구는, 독자적인 노동자 계급의 세력에 의해 대체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이다. 로자가 반대했던 것은 이것이었다.

# 더 읽어야 할 책

<대중파업론> : 로자가 1905년 러시아와 폴란드의 혁명을 경험하면서 분석한 글. 1905년 혁명을 경험하며 향후 혁명 전망을 제시한 글은 이 외에도 레닌의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 트로츠키의 <평가와 전망> 등이 있다.
<자본축적론> : 1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되고 있던 1912년. 독일 사민당의 찬성 움직임을 경계하며 집필한 글.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발전하는 매커니즘을 서술하고 있다. 같은 시기, 레닌도 <제국주의론>을 집필해, 자본주의의 마지막 발전 단계로서 제국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 1898년 독일 사민당의 지도자였던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수정주의, 그리고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독일 사민당 지도부를 비판한 글. 로자는 이 논문을 발표하며 유럽 사회주의자들에게 주목받게 되고, 수정주의 논쟁은 1904년 독일 사민당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배격되어 종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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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6-20 0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이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릅니다.^^

sb 2006-06-20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 어록을 인용하려면, 로자가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독일 사민당 내에서 얼마나 고립되었는지를 좀 더 설명했어어야 했는데, 좀 뜬금없죠?

2006-06-23 0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b 2006-06-23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답변 드립니다.

1. 저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에 대해서, 평전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했을 뿐입니다. (꼽아놓은 책이 있긴 합니다. 풀무질 출판사에서 나온 <룩셈부르크주의>, 로자의 저작선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대중' 이라는 어휘는, 노동자계급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인민'은 일하는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지칭하는데, 소생산자인 농민을 포함합니다. 아시겠지만, 계급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구분하지요. '민중'도 '인민'에 가까운 의미입니다.

2. '인터내셔널' 이란 각국 사회민주당 내지는 공산당, 즉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정당들의 연합기구를 뜻합니다. 그에 숫자를 붙이는 것은 역사가들이 편의상 붙인 것인데요, 시대에 따라 인터내셔널이 결성되었다가 해체되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연대기를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각각의 인터내셔널은 가입 조건이나 활동 면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북막스 출판사의 <마르크스주의와 당>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시대 별로 인터내셔널이 결성되는 과정과 문제의식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3. 기존 체제가 격변하는 시기에는 늘상 대중기구가 출연합니다. 러시아에서는 그것을 소비에트(평의회)라고 불렀고, 한국의 경우에도 해방 직후에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죠.
'프롤레타리아 독재' 란, 노동자 소비에트가 혁명 이후 공백상태인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재' 가 뜻하듯이, 노동자 소비에트가 농민 소비에트와 같은 다른 대중기구에 앞서 새로운 국가권력에서 주도권을 명확하게 해야한다는 것이죠.
러시아 10월 혁명을 주도했던 것은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였는데, 페테르부르크는 공업도시였기 때문에, 구성원이 대다수 노동자였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란, 혁명 직후 최고의 의사결정 기구인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여기에는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처럼 노동자들이 중심인 소비에트 못지 않게, 농민 소비에트들도 소속되어 있습니다.)에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와 같은 노동자 소비에트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당시 러시아 대다수가 농민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획기적인 주장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동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 붕괴는 예언이나 예정이 아닌, 사회발전의 일반법칙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봉건주의가 자본주의로 발전했듯이, 자본주의 역시도 새로운 생산양식을 가진 사회로 발전할 것이라는 일반법칙입니다. 그것은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투쟁이 어떻게 일어나느냐에 달려있겠죠. 실패한 혁명도 있고, 성공한 혁명도 있듯이요.

로드무비 2006-06-25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책을 통해 읽었으니까요.
제 댓글이 뜬금없군요.
 
10월혁명사
이완종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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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트로츠키의 사상이 빛을 발하는 이유는, 그의 사상과 실천이 소련의 해체와 러시아의 자본주의화를 바라보며 낙담한 나머지 이성적 판단을 상실해버린 이들에게, 소련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실천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05년 혁명 이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 1917년 10월 혁명의 주역이었던 군사혁명위원회 지도, 혁명 정부의 외무인민위원, 적군 사령관, 망명 이후의 4인터내셔널을 조직, 등 활발했을 뿐 아니라 비중 있었던 그의 실천활동이 그의 사상에 대한 권위를 뒷받침해주고 있지만,
무엇보다 스탈린의 서기장 집권 이후에 유일하게 조직적으로 당내 비판을 했던 세력으로서 그의 저작과 실천경험은, 혁명 이후의 러시아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물론,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1930년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반당분자,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자, 심지어 미국의 간첩이라는 당내 비판을 받으며, 직위 해임, 당원자격 박탈, 투옥과 숙청을 당해야 했고, 그의 저작이 스탈린과의 당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나와 지나치게 편향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10월혁명사>의 저자 이완종의 출발점은 여기에 있다. 그는 이제 공개된 소련의 문서들을 기초해 1917년 혁명 이후 부터 1939년까지의 러시아 및 소련 내의 여러 정책과 세력관계를 분석하고 있는데, 그의 연구의 중심에는 스탈린이 놓여있다.
그는 과거 트로츠키주의 내지는 부하린주의에 편중되어 있던 혁명 러시아에 대한 연구가 객관적이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트로츠키와 부하린 역시 제3자가 아닌, 스탈린과 함께 혁명 러시아를 누볐던 핵심주체일 뿐 아니라, 심지어 스탈린과 대립했던 당내 비판세력이었으며, 심지어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객관적인 자료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스탈린이 집권했던 혁명 러시아의 숱한 과오들은, 집권 이전의 볼셰비키당의 역사와 정책, 혁명 러시아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레닌의 사상으로 부터 분리하여 규정할 수는 없다는 지적은 무척이나 타당하다.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부터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나, 스탈린 집권 하의 혁명 러시아의 과오로부터 사회주의를 분리하려는 논리는, 모두 반비판에 불과하다. 반비판에 기대어 있는 기존의 논쟁들을 스스로 일으켜세우는 데에 <10월 혁명사>의 의의가 있다.

<10월 혁명사>는 우선, 집권 이전의 스탈린의 행보를 추적하는데 충실하다. 스탈린은 1914년 볼셰비키당의 독자 당대회의 중앙위원, 볼셰비키당 기관지인「프라우다」의 편집진을 역임했고, 1918년부터 시작된 내전에서 활약했다. 레닌의 신임을 받으며 혁명 러시아에서 노농방위회의를 비롯한 중요 직책을 역임했고, 민족문제에 정통했다. 무엇보다 그가 서기장에 집권하고, 레닌 사후에 실제적인 당내 최고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을 단지 권력투쟁의 측면에서만 바라볼 수는 없으며, 그가 계승하고 있던 사상적 정통성에 대한 당내의 승인이 있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따라서, <10월 혁명사>는 스탈린 집권 이전의 레닌주의의 행보(국가자본주의, 전시공산주의, NEP)를 추적하는 것을 통해서, 스탈린이 권력을 승계한 이후의 정책(NEP, 농업집단화, 당내 숙정)을 분석하며, 마찬가지 측면에서 스탈린 집권 이후에 부각되었던 당내 비판세력인 민주집중파, 노동자반대파, 트로츠키주의, 부하린주의에 대해서도, 그 과거의 행보, 즉 레닌주의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을 통해서 분석한다.

<10월 혁명사>는 분명 연구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과거 70년 가까이 전 세계의 절반을 풍미했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의의는, 외면되어서도 안되고, 자본주의의 모순 앞에서 외면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 더 읽어야 할 책

<국가와 혁명> (레닌) :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레닌의 기본적 구상.
「노동조합의 역할과 과제」(트로츠키): 혁명 이후 민주집중제 논쟁의 일면. 노동조합의 군사화에 대한 당내 비판.
<좌익소아병> (레닌) : 혁명 러시아에서의 당내 반대파에 대한 레닌의 비판.
「사회주의로의 길과 노농동맹」(부하린) : 부농에 대한 수탈에 반대했던 부하린의 견해.
「식량세론」「협동조합론」(레닌) : 레닌의 농업정책 기본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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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또니오 그람쉬 - 이매진 올더피플 02
쥬세뻬 피오리 지음, 김종법 옮김 / 이매진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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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의 혁명가 안또니오 그람쉬.
그는 1919년 이탈리아 공장평의회 운동을 이끌었고,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했다. 1922년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파시즘에 맞서 싸웠고, 1927년에 체포되어 10여년간 옥고를 치루며 이탈리아의 정치 경제에 관한 다수의 저작을 남겨 <옥중수고>로 출판되었다. 헤게모니, 시민사회, 진지전, 등 한번즈음 들어봤을 법한 익숙한 개념들이 여기에서 등장한다.

혁명가들의 평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혁명가들의 생애를 통해서, 그(녀)가 살았던 시대와 시대의 정신을 옅볼 수 있다. 무엇으로부터 고통받았고, 어떤 갈등을 겪었는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떻게 실천하는지를 볼 수 있다.

시중에 유행하는 <체 게바라 평전>과 같이, 혁명가들의 삶으로 부터 도덕적인 교훈을 얻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자신의 시대에 온몸 부딪혀 살아간 그(녀)들의 삶이야 말로, 그 시대를 가장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
안또니오 그람쉬의 삶이 어디에 놓여져 있는지 부터 살피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1891년 출생. 그는 이제 막 통일된 이탈리아에서 태어났고, 이탈리아 자본주의는 가장 활발하게 축적운동을 하고 있었다.

자본주의를 봉건시대와 구분하는 하나의 특징이, '대규모적이고 급속한 생산' 이라는 데에는 이견(異見)이 없을 듯 한데, 대규모적인 생산을 위해서는 대규모적인 생산수단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
오로지 규모만이 경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초기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거대한 투자용 자본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는 배제되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에서 배제된 것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기도 했지만, 봉건시대의 생산활동에 머물러 있던 농촌이기도 했다. 안또니오 그람쉬는,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던 남부 농업지역에서 태어난다. 그는 어린 시절, 부제루 광산노동자들의 파업과 농민계층의 무정부적인 소요를 경험하며 자란다.

흥미로운 것은, 유년기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태어난 그람쉬가 경험했던 저항의 주된 두가지 형태, 즉 농민계층의 무정부적 소요와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가 태어난 지 100여년을 훌쩍 넘어선 오늘 날에도 변함없는 저항의 형태라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미FTA' 라는 자본주의의 시장통합에 맞서, 노동자들은 파업을 농민들은 좀 더 거칠고 무정형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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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쉬는 농업지역인 남부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공업지역인 북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유학생활을 하게되었고,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도 바로 토리노 대학에서였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것은 1911년, 유럽의 각국 자본주의가 한참 1차 세계대전에 시동을 걸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그람쉬는 <인민의 외침>이라는 잡지에 전쟁참여에 관한 글을 기고하면서 공식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며, 곧 이탈리아 사회당에도 가입하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듯이, 당시 유럽의 사회당 내지 사회민주당이란, 막연하게 '사회주의' 를 지향할 뿐 구체적인 실천방법에 있어서는 서로 달랐으며, '제2인터내셔널' 이라는 각국 정당의 연합체 역시도 다소 느슨한 형태였다. 따라서, 이러한 각국 정당들은 세계대전이라는 시험대 위에서 제각각 분열하면서,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사회당은 1915년 이탈리아의 참전을 막아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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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쉬는 1918년부터 대학에서 사귄 따스까, 똘리아띠, 떼라치니와 함께 전국신문 <신질서>를 발행한다. 당시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사회적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으나,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은 이러한 불만을 조직적 체계와 전망을 갖춘 사회적 운동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었고, <신질서>는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소식을 이탈리아 내에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소비에트, 현장위원운동에 대한 연구자료를 소개하는, 등 노동자들의 불만에 호응하면서 명성을 얻게된다.

이러한 호응을 바탕으로, 그람쉬는 러시아의 소비에트에서 영감을 얻은 공장평의회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노동조합과 달리, 생산활동의 기본 단위인 공장 내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할 수 있는 공장평의회가 피아트 자동차를 비롯해서 사빌리아노, 란치아사, 등지에서 구성되나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이 이를 방관하면서, 발전하지 못한다.

덧붙이자면, 평전인 <안또니오 그람쉬>에서 실제 공장평의회 운동이 어떤 범위와 양상으로 일어났는지를 살피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 또한, 공장평의회 운동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하지만,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럽 전체를 뒤흔든 전쟁의 시대,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시작된 혁명의 시대에 이탈리아의 정치운동가들이 노동자들의 대중적인 열망을 받아안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람쉬의 글 「사회당의 혁신을 위하여」에 나타나 있다.)

제몫을 다하지 못한 정치세력의 분화는 필연적이다. 시기적으로 공장평의회 운동 이후에 나타난 사회당의 분열, 즉 개량주의 그룹, 최대강령 그룹(세라띠), 공산주의 그룹(보르디가, 그람쉬)으로의 분열이 이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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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그룹 내에서도 보르디가와 그람쉬는 대립하고 있었다. 보르디가는 그람쉬의 공장평의회 운동에 대해서도 '생디칼리즘'이라 격하했고, 개량주의 그룹과 결별하지 않는 사회당에서 분리 독립할 것을 주장했다. 그람쉬는 보르디가의 분리 독립에 대해 반대하다가, 1921년에 이르러서야 사회당과 결별,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하게 된다.

하지만, 공산당 역시도 제 몫을 다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1922년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집권한 이후에도, 공산당은 사회당과의 연합문제, 등으로 끊임없이 당 내의 갈등을 일으키며 좌충우돌하게 되고, 급기야 1925년에 불법화된다. 그람쉬는 1927년에 투옥된다.

#
1927년에 투옥된 이후의 그람쉬는 1937년 사망할 때 까지, 집필 활동과 신병 치료에 매진한다.
<옥중수고>로 출판되어 있는 그람쉬의 방대한 옥중 저작은,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분석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람쉬는 이 책을 통해서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해, 이것이 '노동계급적 지식인'이라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남부 농업지대와 북부 공업지대로 나뉘어 갈등을 빚어온 이탈리아의 상황에서, 그람쉬의 고향이기도 한 남부 농업지대의 농민계층은, 빈곤에 대한 원인을 북부 공업지대 전부로 돌리고자 했고, 이 속에서 부르주아계급과 노동자계급의 구분은 없었다.

따라서, 농민계층의 불만과 분노를 사고있는 공업지대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농민계층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남부의 지배세력인 지식인 그룹과의 싸움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람쉬는 <옥중수고>를 통해서, 남부 농업지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동안 지배계급의 이해에 봉사해 온 지식인 그룹의 실체를 밝히고 그 사상을 비판한다.

"그람쉬의 글은 논리가 수미일관해서 문장 전체를 관통하는 실이 한가닥 있고, 그 실을 좇아 외견상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이는 여러 계기가 실제로 전혀 끊기지 않고 논리에 따라 하나의 논지를 펼치는 연속된 계기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 그람쉬의 정치적 제안은 독창성과 확실성을 겸하고 있어서, 사실로 뒷받침되지 않는 이론은 무익한 추상이며 이론의 뒷받침이 없는 행동은 쓸모없는 충동으로 끝나고 만다는 확신을 깔고 있었다." <안또니오 그람쉬> 중 233쪽

# 더 읽어야 할 책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중립」-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입장
「리용테제」- 이탈리아공산당 3차 당대회에서 발표된 문건. 봉기를 주장하는 보르디가의 소비에트 그룹에 맞서, 현재의 시기는 봉기의 시기가 아니라 파시즘에 맞선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하는 시기임을 주장함. 이탈리아의 경제 사회적 조건을 분석하며, 파시즘의 성격을 규정했다. 그람쉬는 3차 당대회를 통해서 보르디가와 확실히 결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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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매춘과 페미니즘, 새로운 담론을 위하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1
이성숙 지음 / 책세상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에 성매매가 음성화 될 것이라는 예상은 했으나, 포주들을 비롯한 성매매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시위를 벌이는 광경은 무척이나 낯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던 중에 민주성노동자연대(이하 민성노련)가 결성되고, 또 ‘성노동자운동‘이 등장했습니다. 소위 진보진영 내에도 논란이 일었습니다.
저 역시도 논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성매매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민성노련은 성매매특별법에 대한 반대시위로부터 결성되었습니다. 성매매특별법은 성매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많은 여성단체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그것이 노동이냐 아니냐를 떠나, 성매매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던 성매매 여성들은 당장 생계의 위협을 받아야했고, 동시에 국가라는 권력에 의한 불법이란 낙인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했으니까요.

성매매 여성들 대다수가 사회의 빈곤화와 여성의 빈곤화라는 이중 삼중의 굴레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고작 몇십만원의 생계보조금과 형편없는 재활프로그램을 내세운 정부의 정책은, 정부의 문제해결 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매매 여성들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궁지에 몰아넣은 셈이죠.

하지만, 성매매특별법에 대한 반대가 곧 성매매합법화 지지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매매특별법의 정책적 실효성에 대한 반대일 뿐이지, 여전히 성매매 자체를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죠.
물론, 마찬가지 맥락에서, 성매매를 인정한다고 해서 민성노련에 대한 지지를 뜻하는 것도 아니구요.

저는 성매매에 대한 태도부터 정리해야 했습니다.
<매매춘과 페미니즘, 새로운 담론을 위하여> 역시도, 성매매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성매매는 부도덕하다는 관념, 성매매가 근절될 수 있다는 관념에 도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자가 과거에 주장되었고 실현되었던 정책의 실효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는 점은 아쉬우나,
성매매는 사회 경제적 조건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성적 욕구로부터 기인하는 행위라는 점, 성매매가 부도덕하며 사라져야 할 것이라는 관념은 본질적인 것이 아닌 근대 이후의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점은 좀 더 생각해 볼만 합니다.

성행위에 행위자들의 애정이나 감정이 반영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것이나, 그렇지 않은 성행위라고 해서, 즉 성적인 만족만을 위한 성행위라고 해서 그것을 나쁜 것, 사라져야 할 것이라고 자의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 역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억압적인 가족제도는, 소위 정상적인 부부관계 내에서, 혹은 그것을 전제로 하는 성행위 만을 아름다운 것으로 규정하고, 그렇지 않은 모든 성행위를 금기시해왔습니다. 하지만, 실제 부부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성행위가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 처럼, 성매매 여성들 역시도 우리가 재단했던 것 처럼 몸을 팔고 영혼을 파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인격적 통제 아래 상대방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은 아닐런지.

그저 얄팍한 정리일 뿐, 저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외국의 성노동자운동의 사례, 성매매 여성들의 현황자료, 성매매에 대한 기록과 입장, 등 여러 가지를 참고하며 좀 더 성실하고 진지하게 접근해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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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박범준.장길연 지음, 서원 사진 / 정신세계원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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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시에서 성장했고 남 부럽지 않을 만큼의 대학교육을 받은 박범준 장길연 부부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고 무주의 한 산골에 정착합니다. 비록 크지 않은 규모이지만 함께 농사를 짓고, 화장실이니 목욕통과 같은 집기들은 직접 만들어 쓰며, 범준씨가 글을 쓰고, 길연씨가 천연염색을 하며 살아가죠.

언젠가 언론에도 올랐다는 이들의 삶은 아마도 ‘이색성‘ 이 강조되었겠지만, 정작 두 사람의 글에서 도시를 떠나 산골에 삶터를 마련한 ’이색성‘ 이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답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수필에 가까운데요, 주된 내용은 두 사람의 행복관과 연애관이며, 이것이야말로 이들로 하여금 도시를 떠나게 만든 것입니다. 주거와 생계는 두 사람이 가진 가치관의 ‘표현’ 이자 ‘방식’ 일 뿐입니다.

두 사람은 ‘행복이란 이렇게 사는 것이다‘ 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사는 것도 행복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 자신있게 ‘행복이란 무엇이다’ 라며 절대적인 정의를 내리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각자 행복에 대한 대답은 다를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저 수많은 행복관 중의 하나일 뿐일 두 사람의 행복관을 주목할 만한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두 사람이 주관대로 삶을 꾸려나갔다는 ‘사실‘ 인데요, 이것은 거꾸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관에 맞추어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늘날은 마치,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복모범답안에 맞추어 경제적 능력을 키우는 것에만 집착하는 것 처럼 보여집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는 현실이, 곧 그(녀)들이 ’주관이 없다.‘ 거나 사회통념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주관대로 삶을 꾸려갈 ‘용기가 없다.‘ 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녀)들이 주관이나 용기대로 살아갈 수 없도록 하는, 외부적 객관적 조건들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생활환경, 교육수준, 부양가족, 등 과 같은 것들이죠.
범준씨와 길연씨 역시도, 산골에 삶터를 마련하면서 ‘당장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라는 생계 고민을 했었고, 이것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객관적인 조건들이 반영되고 고려되었을테니까요.

범준씨와 길연씨의 꿋꿋한 삶이, 선택의 기회에서 용기를 내어야 할 사람들 뿐만 아니라, 기회로부터 박탈당한 이들에게도 희망의 메세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 보태어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의 연애관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답니다.
감정 보다는 이해나 신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대화의 방법에 대해서 열심히 고민한 흔적들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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