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으로 가는 길 - 20세기 현대 중국사의 불꽃
찰리 호어 지음, 김희정 옮김 / 책갈피 / 200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왕팡시의 <나의 중국혁명 회상>은 1950년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한권을 더 읽게 되었습니다. 찰리 호어의 <천안문으로 가는 길>은 중국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빠지지 않고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주의 역사가들이 그러하듯, 호어는 사건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주객관적인 조건들을 서술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모든 사회문제는 경제체제의 강한 영향을 받는다는 마르크스주의에 비추어, 경제 사회문제에 좀 더 집중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을 지도했던 마오쩌둥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1949년 중국 2차혁명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막연히 비효율적인 집산정책이라고 알려져있는 마오쩌둥의 경제정책은 어떠했는지, 중국의 시장화를 이끌었다는 덩샤오핑은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정책을 펼쳤는지, 1976년과 1989년의 천안문시위의 원인과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등 주된 관심사들은 결국, ‘중국의 대대적인 개방과 개혁의 의미‘를 밝히기 위함입니다.

1차 국민당-공산당 합작을 통해서 형식적이나마 한편이라고 믿었던 국민당의 장제스가, 공산당원과 노동자들의 시위에 대해서 무차별적인 쿠데타를 저지르면서 공산당의 세력은 크게 줄어듭니다. 그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공산당원들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광둥에서 무모한 폭동을 일으키면서 절멸하는 수준에 이르게됩니다.

한줌밖에 되지 않았던 공산당은 대부분의 도시에서 철수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이가 바로 마오쩌둥입니다. 중국에서 공산당이 결성된 것은 고작 6년 전이었으니, 초기 정당의 모습이 의례 그러하듯 지식인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을겁니다. 마오쩌둥 역시 그러했구요.
그리고, 도시에서 철수한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으며 산간지대를 근근히 돌아다녔으니, 당의 주축은 응당 농민과 지식인들 중심이었을 것이구요.
당원들의 구성정도는 응당 정당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1949년 중국혁명의 성격은 당원의 구성을 떠나 실제 과정에서도 나타나는데, 중국공산당은 일본에 맞서던 게릴라식 전투로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봉건적인 소작제로 고통받던 많은 농민들이 중국공산당을 지지했을 뿐, 중국공산당은 노동자들에게 시위 자제를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중국혁명을 취재했던 한 미국인 기자는,
“주목할 만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도시 노동자들에게 과도하게 높은 임금을 지불하여 환심을 사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유공장에서 생산에 대한 최고 권위를 경영자에게 부여했다는 것이다.”
라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며 국가기구를 장악했다는 점에서 ‘혁명‘임에 틀림없으나, 구성이나 방식 면에서 사회주의 혁명과 어떤 공통점도 없었던겁니다.

물론, 이러한 성격은 이후 공산당 정부의 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기에 중요합니다.
중국공산당은 처음부터 사회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타국의 지배와 봉건적 소작제에 고통받았던 기존의 경제 대신, 자립적인 경제를 수립하고 싶었을 뿐이고, 생산수단의 공공소유라는 형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용이 빠진 채 형식만 갖추어졌다고 해서 변화를 기대하기란 힘듭니다. 역사에는 순리, 즉 나름의 운동법칙이 있는 것이니까요.

내용이 빠진 생산수단의 공공소유란 오히려 해악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중국에서 보게됩니다.
더구나 대중의 지지를 받았을 뿐, 대중의 자발성이 단순히 지지를 보내는 것에 그쳤던 중국혁명에서, 공공소유된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력을 대중들이 발휘할 수는 없었겠죠. 모조리 국가기구의 손에 쥐어졌던 셈입니다.
1958년부터 시작한 대약진, 인민공사 운동을 통해, 강제적으로 생산수단의 국가소유를 이루게 되고, 지극히 강제적인 방식으로 노동자와 농민들은 착취받게 되고, 대중의 착취를 기반으로 한 경제란 그것이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어떤 명찰을 달고있느냐에 상관없이 비효율, 곧 경제침체로 귀결되는 것이죠.

결국, 마오쩌둥은 4년 만에 정책을 철회하고 농업과 공업의 사유화를 시작하는데,
정책적 실패를 인정한 그의 입지가 약해지는 것에 따라, 반대파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문화혁명과 덩샤오핑의 등장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찰리 호어는 마오와 덩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두 그룹을 두고 이렇게 논평합니다.
“전체 전략의 성격과 속도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이것은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정립된 대립이라기 보다는, 현대화 전략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의 반영이었다. 보수파는 중국이 뛸 수 있기 전에 먼저 걷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덩샤오핑파는 설사 계속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뛰는 것만이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대응했다.”

덩샤오핑의 집권을 두고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급선회했다는 평가를 내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 무지한 평가자들은 덩샤오핑의 개방화 정책을 찬양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전혀 사회주의적이지 않았던 마오쩌둥에게 사회주의자라는 명찰을 달아준 셈입니다.

여튼, 덩샤오핑의 경제정책은 마오쩌둥의 그것에 ‘전면적’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수출지향적 경제와 전면적 시장화를 실시했는데, 필연적으로 부작용을 안고 있었습니다.
1978년에 집권한 덩샤오핑의 경제정책은 흡사 박정희의 그것과 비슷한 셈이죠. 덩샤오핑과 박정희가 도달했던 같은 결론이란, 자본주의는 축적된 대규모의 자본을 바탕으로 하는데, 축적된 자본도 없는 상태에서 규모있는 경제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국외의 축적된 자본을 빌려와야 한다는 사실이었을겁니다.
그리고, 외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구미를 당길만한 요소, 이를테면 세금의 감면이나, 저임금 상태로의 동결, 등이 반드시 필요했을거구요.

그 이후에 중국에서 표방했던 구호가 ‘정치와 경제의 분리‘ 였습니다. 이 아이러니한 구호는, 경제분야에서는 자본주의 개방정책를 채택하지만, 정치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유지한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 이후에도 사유화가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 시사하듯이,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공문구에 불과했습니다. 정치와 경제는 서로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전자는 후자에 종속적이니까요.
정치체제는 해당 경제체제에 가장 합당한 형식으로 유지될 뿐입니다. 이를테면, 무역, 세금, 금융, 노동에 관한 법안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처럼요.
이것들은 특정 시기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여튼, 경제는 경제대로 발전시키고 통제는 통제대로 하고싶었던 중국 지배계급들의 순진한 소망과 상관없이, 중국이 세계경제에 편입되는 그 순간부터, 중국의 정치란 중국 지배계급이 아닌 세계자본주의의 흐름 내지 대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이죠. 지배계급의 통제에서 벗어나는겁니다.

1978년부터 1988년 사이에 일어났던 소위 민주화에 대한 대중적인 열망과 1989년의 천안문 시위까지는 이러한 경향들은 반영한다고 생각됩니다.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저임금의 착취 속에 가두어두어야 하고, 금융 은행업 부문이 팽창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점점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관료들의 부패가 이들 시위의 원동력이었습니다. 500만에 가까운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인민을 해방시킨다는 군대가 2,000여명 이상의 인민들을 학살했던 천안문 시위는, 중국의 경제위기가 극심했고 당국이 초긴축정책으로 옥죄였던 1989년에 있었구요.

중국의 정치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변화를 겪을 것이고, 다당제가 시행되면 중국공산당은 가장 보수적인 정당으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일당독재의 중국공산당, 부르주아 의회체제에서 왼쪽 날개를 맡고있는 이탈리아 재건공산당, 프랑스 공산당을 비롯해서 각국의 숱한 노동당, 사회당, 등등
당명은 스스로의 정치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혼재되다 못해 극과극의 경향을 이루면서도 같은 당명을 가진 정당들이 있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하긴, 군사독재 시절 정권을 장악한 쓰레기들도 당명에는 ‘민주’며 ‘자유’를 갖다 붙였지만요.

당명 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꼭 부르주아 의회체제에 국한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임명시켜주는 것도, 자임할 수 있는 것도 아닐겁니다.
진정한 노동자계급의 정당, 사회주의 정당은, 정당 역사상 단 한번, 혁명의 시기에만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테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회상 - 나의 중국혁명
왕범서 지음, 김승욱 옮김 / 새물결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한국에서 ‘사회주의‘는 무척 먹칠되어 있어서, 그것은 ’부패한 관료‘와 ’비효율적 경제‘를 뜻하는데 사용됩니다.
이것은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현실의 국가들, 즉 소련과 중국의 경험들이 미친 영향입니다. 사회주의 사상은 멀지만, 소련과 중국은 가까우니까요.
따라서, 소련과 중국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사회주의의 복권을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라는 오랜 공식에 비추어 볼 때에도, 소련의 1917년 10월혁명과 같은 명실상부한 노동자혁명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가까이 사회주의국가를 표방하고 있는 - 이제는 거의 억지수준으로 - 중국이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중국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을 조금이나 덜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구요.

최근 중국의 세계경제의 엔진으로 각광받으면서 중국 관련 서적들이 쏟아져나왔고, 그중의 일부는 중국의 역사나 사상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돌아보는데 있어 나름대로 풍족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셈이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인 역사란 존재할 수 없고, 사료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역사가의 주관이 강하게 개입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누구에 의해 쓰여진 역사인지도 무척이나 중요한 사실일겁니다.

<나의 중국혁명 회상>은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왕팡시(왕범서)의 회고록입니다.
그는 중국 사회주의운동의 2세대이고, 1953년에 중국공산당에 의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거의 절멸된 이후, 2002년 사망할 때 까지 오랜 망명생활을 하며 트로츠키의 저작들을 중국어로 번역하는데 애썼습니다.

그는 본래 공산당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1차 중국혁명으로 알려진 1925년 혁명이 장제스에 의해 파괴되면서 모스크바로 일종의 도피성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의 현실과 스탈린에 맞선 트로츠키의 활동과 저작들을 보며, 트로츠키주의자가 됩니다.

1차 중국혁명의 실패는 스탈린이 장악한 코민테른의 정책과 밀접한, 아니 거의 절대적인 수준의 영향을 받았고, 트로츠키의 反스탈린 활동이란, 단순히 개인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공산당 정책에 대한 대립, 중국의 당면한 혁명정세에 대한 정책의 대립이었으니까요.

그는 중국혁명에 대해 올바르게 분석하고 있는 트로츠키의 의견에 동의하게 되고, 유학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와 트로츠키주의 활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 번의 감옥살이를 거쳤고, 단 한번도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던 소수파였던 왕팡시를 비롯한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 그의 회고는 마치 제 자신이 1920년대에 중국과 소련에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그 당시 분위기를 감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붉은 10년‘이라고도 불리우는 1930년대는 사회주의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실패의 경험들을 전해주고 있는데, 사건 나열식으로만 접했던 당시의 역사를 경험담을 통해 생생히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1949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 50년의 중국역사는 한국역사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대략적이기는 하지만, 1911년에서야 봉건제 사회였던 청이 몰락하고, 1차 세계대전과 함께 본격적인 경제발달이 시작되었으며, 인접국가였던 러시아에서 1917년 10월혁명이 일어나면서 사회주의사상이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했고, 한국의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그 해에 5.4 운동이 일어났던 점, 일본 제국주의의 착취와 봉건적 잔재 하에서 어떤 형태로든 운동이 일어났다는 점, <태백산맥> <경성트로이카>에 등장하는 국내파 사회주의자들과 국제파 사회주의자들(스탈린의 코민테른과 연계되었던)의 갈등도 공통점입니다. 퍼즐을 맞추듯 하나의 큰 그림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30년대 한국에도 트로츠키주의자가 있었을까요? 저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왕팡시가 말년에 ‘중국에 좀 더 일찍 좀 더 강력한 트로츠키주의정당이 있었다면..’ 하고 회상하듯, 한국에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없겠지만.

“혁명을 준비해야 할 뿐 아니라, 나아가 혁명의 도래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혁명이 앞에 닥쳐왔을 때, 우리는 여전히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고 느꼈다. 조직적으로 확실히 그랬고, 심지어 사상적으로도 어느 정도 그랬다. 대중은 발효되었지만, 과자를 만들거나 술을 담글 만한 강력한 조직과 정확한 사상을 갖춘 혁명당은 없었다. (중략) 그때 중국 트로츠키파가 수천의 기간조직을 가지고 있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만약 수백 명이라도 있었다면, 능히 이 공백을 메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의 세계 제패 전략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김용욱 옮김 / 책갈피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이성" 누구나 한번즈음 들어봤을 법한 경구입니다.
대인관계에서의 잘못이든 사회의 부조리이든 그것을 접하는 첫 감정은 '분노'이기 마련인데, 그 분노가 아무리 정당하다 하더라도, 분노 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뜻일겁니다.

"화가 나면 열을 세라" 는 격언처럼, 분노는 곧 사그러드는 법이니까요.
더군다나 그것이 일회적 일시적이거나 돌발적인 잘못이라면 모르되, 끊임없이 반복되는 잘못이라면 더욱 그렇구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혹은 이 사회로 하여금 한번즈음, 아니 두세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겁니다.

이런 태도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대해서도 그대로 드러나느데요,
단순히 전쟁에 대한 반대, 혹은 절차상의 문제 - UN 안보리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거나,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았다거나, 등 - 을 지적했던 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 막연한 평화주의자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대한 관심을 접어두기로 한다 하더라도,
미국으로 하여금 최소한의 명분조차 없는 전쟁을 감행하게 한 '근본적인 원인' 이란 너무나 뿌리깊고 대단한 것이어서, 설사 그것을 올바르게 지적했다고 해도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닐테니까요.

전쟁을 막아내는데 실패했던 평화주의자들이 이점을 배웠을까요?

캘리니코스의 <미국의 세계 제패 전략>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의 뒷배경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전쟁을 분석하는 틀을 점점 확대 심화시켜나가는 방법인데,

총 5장으로 나뉘어져 있는 본문은, 전쟁을 합리화하려는 억지 논리에 대한 (그리 어렵지 않은) 반박을 시작으로 해서, 이 전쟁을 기획하고 실행한 네오콘(neocon, 신보수주의자)이라 불리어진 미국 공화당 우파의 행보에 대한 추적, 그리고 1945년 전후에 제출되었던 미국의 세계 제패 전략, 그 전략의 일환인 중동에 대한 정책을 다루고 있고, 마지막으로 미국을 포함한 제국주의의 역사 속에서 미국의 정책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억지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하는건 어려운 일이 아닐겁니다. 그건 기성 언론들에서도 조심스레 던지는 의혹이기도 하죠.
캘리니코스는, 왜 그들이 이런 서푼짜리 억지논리를 내세워가며 전쟁을 감행해야 했었는지 밝힙니다. 억지 논리 뒤에는 그걸 감행했던 공화당 우파들이, 공화당 우파들의 뒤에는 뿌리깊은 미국의 세계 제패 전략이, 한 국가의 국가정책 뒤에 이들을 움직이는 내적인 동학(動學)이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이론과 행동은 떨어져있지 않습니다.
캘리니코스가 194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던 것은 행동의 축적이 곧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론은 행동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끔찍한 침략전쟁을 바라보는 여러분들의 이해는, 분석은 어디까지 나아가 있나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존 몰리뉴 지음, 최일붕 옮김 / 책갈피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인 존 몰리뉴가 영국사회주의노동자당의 기관지에 10년 가까이 기고했던 칼럼들을 모은 것입니다. 대략 어마어마한 분량일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일부만을 주제에 따라 선별하여 재분류한 것이죠.

우선, 많지 않은 분량과 매끄러운 번역이 마음에 드실겁니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은 마르크스주의의 훌륭한 입문서라는 점입니다.

몰리뉴씨는 서문에서 이 책이 목표로 하는 독자층이, 현실의 억압에 저항하고자 하는 전투적 노동자들, 그리고 이들에게 사회주의적 전망을 제시하고자 하는 사회주의자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각 칼럼의 제목들은,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의 만남을 가로막고 있는 수많은 오해와 편견들이고, 칼럼의 내용은 그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과 대안입니다.
더구나, 칼럼의 내용은 크게 어렵지 않고 읽기에 전혀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연구소의 두터운 책 속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학자와 지식인들이 여는 심포지움에서 논의되는 사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뺑이치는 작업장에서의 10분 휴식시간에, 붉은 머리띠를 동여매고 앉은 아스팔트 위에서 논의되어야 할 사상입니다.

현실에 순응해 살았고,
참다못해 현실에 저항했고,
순진하게도 자신의 정당한 목소리를 사회가 이해해줄거라 생각했지만,
동시에 집중포화를 받으며 나뒹굴었던 사람들,
그동안 세상을 너무 몰랐다며, 이제 진정한 사회의 모습을 알았다던 사람들,
싸우는건 옳지만 두렵고 겁난다, 지는 싸움은 하고싶지 않다며 다시 현실에 기죽였던 사람들,
대안은 뭐냐 사회주의라도 하자는거냐며 하늘에 외치던 사람들,

내가 만나고 함께 했던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목차를 첨부합니다. 목차의 질문들을 한번씩 던져보길 권합니다.

---------------------

1장 도대체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하지만 인간 본성은 바뀌지 않는 법…"
경영인은 꼭 있어야 하나?
혁명은 폭력을 뜻하는가?
"사회주의는 사람들을 다 똑같이 만들어 버릴 거야…"

2장 어떻게 해야 사회주의에 이를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월요일을 싫어할까?
착취란 무엇인가?
'자본'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는 어떻게 경제 불황을 낳는가?
역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무엇이 사회주의 혁명을 재촉하는가?
노동자 권력이란 무엇인가?

3장 올바른 인식에 이르려면…

"하지만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한줌밖에 안 되잖아"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무엇인가?
저들의 진리와 우리의 진리
하지만 중요한 점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4장 지배 전략

사회주의가 되면 민주주의는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국가는 아무 편도 아닌가?
누구를 위한 법과 질서인가?
지배계급은 어떻게 지배를 유지하는가?
흩어지면 죽는다

5장 사회주의자는 다음에 대해 무어라고 주장하는가?

'인구 과잉'
종교
전쟁
테러
계급
범죄
가정

6장 세계는 이렇게 생겼다

국익을 지켜야 하지 않는가?
이주에 대해서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는 민족해방 운동에 반대하는가?
'무조건적 그러나 비판적' 지지란 무엇인가?
러시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나?
중국은 좀 다른가?
하지만 세계 동시 혁명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7장 사회주의 전략

"하지만 이미 대중적 노동자 정당이 있는데…"
노동당은 바뀔 수 있는가?
조직은 필요하긴 한 거야?
노동조합은 어떤 구실을 하긴 하는가?
국유화가 시장보다 낫긴 하잖아?
혁명적 지도란 무엇인가?
운동은 많아도 전쟁은 하나뿐
왜 혁명정당이 필요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 건설을 향하여 - 레닌 1893 ~ 1914
토니 클리프 지음, 최일붕 옮김 / 북막스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본래 토니 클리프가 쓴 레닌 전기 3부작의 일부분(1부)입니다.
하지만, 레닌이라는 혁명가가 생의 대부분을 정당을 건설하는데 보냈기 때문에, 그의 전기가 곧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건설사가 되었습니다. 1880년대 소규모의 마르크스주의 학습모임에서 시작해 1914년 명실상부한 대중정당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가까운 한국을 두고, 굳이 먼 나라의 정당사를 둘러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역사상 유일하게 노동자 혁명을 수행한 정당이니 만큼 일종의 벤치마킹이죠.
"혁명정당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정당에 비해 뭐 좀 특별한거 없나?" 그저 이런겁니다. ^^;

적어도 당의 건설과정 자체에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정당의 골간에 직업적인 정치인(혁명가)이 있고, 이들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동의하는 이들을 전국적으로 규합한 후 당을 창설합니다. 볼셰비키당 역시 “정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정치권력의 획득ㆍ유지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견을 실현시키려는 목적으로 조직한 정치적 단체” 라는 사전적 정의에 한치 어긋남이 없는 것이니까요.

물론, 형식상에서 약간의 공통점은, 더 많은 차이점과 내용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차이를 전제로 합니다.

일단, 이 정당은 의회가 생기기 훨씬 이전에 설립되었다는 점이 주목할만 한데요,
볼셰비키당의 전신격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설립된 것은 1898년, 러시아에 최초로 의회(두마, Duma)가 생긴 것은 1906년입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로 시작된 대중적인 시위에 대한 양보조치였죠.

물론, 이 당시 의회도 없는 러시아에서 덜컥 정당을 만들게 된 것은,
이미 서유럽 몇몇 국가들에 의회-정당 체계가 성립되어 있던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무엇보다, '정당'이 우리가 익히 생각하듯 '선거조직'이 아닌 '정치권력을 획득하려는 집단' 이라는 점을 확실히 하는 것 같습니다.

두번째는, 당원의 구성입니다.
본문에 통계자료가 나와있는데, 노동자의 비중이 월등하게 높습니다. 한국에서야 인구 대부분이 노동자이니 별 대수로울게 없지만, 이제 막 자본주의가 개막했을 뿐더러 인구의 절대 다수가 농민이었던 당시 러시아의 정황을 고려한다면 한번쯤 놀랄만한 일일겁니다. 대부분이 노동자이고, 약간의 농민과 학생당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번째는, 조직의 모양새.
우리가 알고있는 정당은 대부분 지역구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요, 볼셰비키당은 공장과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있죠. 당시 러시아의 의회가 간선제로 의원을 선출했기 때문에, 지역구 별로 직선제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는 한국과 비교할 상황은 아니겠지만, 당의 편재 자체를 공장 기반으로 하고있다는 사실은, 이 정당이 누구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는지를 명백히 보여주는 대목일겁니다.

물론, 이런 형식상의 차이점은 내용이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정치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되, 어떤 방식의 정치권력의 장악이냐가 다른 것이죠.

<마르크스주의와 당> 독서후기에서 언급했던 바이기도 하지만, 이 책이 더욱 세세하게 다루고 있는데요,
이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느냐 마느냐는 두가지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대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을 것, 두번째는 기존 국가기구를 활용하지 않을 것 입니다.

첫번째가 없는 두번째란 테러나 쿠데타가 될 것이고, 두번째가 없는 첫번째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형태의 권력장악일진데,
이들이 이 두가지 경우 모두를 거부했고, 이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1917년 10월혁명은 이 두가지가 모두 충족된 조건에서 일어나게됩니다.

물론, 이들이 의회를 비롯해 기존 국가기구의 권력기구를 원천적으로 무시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989년에 의회가 설립되었었고, 제정 러시아가 몰락하는 1917년에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두 기구 모두에 약간의 참여를 했었어요.
'약간의 참여'라는 것은 그것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겁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두가지였으니까요. 이것에 도움이 될 것인가가 참여의 여부와 정도를 결정했습니다.

얘기가 다른 곳으로 많이 흘렀는데요,

한국의 정당정치에 신물이 나신 분들이라면,
정당이란 대체 무엇을 하는 조직이며,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활동하는지, 굳어진 고개를 돌려보는건 어떨까요.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b 2005-11-07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독서후기에서 한가지 빼먹은 것이 있군요.

이 책은 나로드니키 운동을 언급하며 시작됩니다.
나로드니키 운동은 테러주의입니다. 러시아의 봉건적 성격과 짜르의 폭압정치에 분노한 지식인들이 제정 러시아의 각료들에 대한 테러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운동이죠.

1860년대부터 시작되어, 레닌이 태어난 1870년에는 이 운동이 한창 활발했었거든요. 레닌을 비롯한 당시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강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나로드니키 운동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성립됩니다.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를 처음으로 도입한 플레하노프라는 아저씨가 바로 나로드니키 운동에서 분리 독립한 사람이구요. (사실, 이 아저씨는 완전하게 분리독립하지 못했는데, 레닌은 이 아저씨를 비판하며 완전하게 독립하죠.)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이고, 혁명은 곧 테러니까, 마르크스주의가 곧 테러리즘이다.' 라는 일반적인 편견에 대해,
꼭 얘기해주고 싶은 사례였어요. 마르크스주의는 테러리즘에 반대합니다.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