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 -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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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동경한다. 불행한 아이들의 동경은 가슴 아프다. 바라봐 주는 부모, 평온한 저녁, 따뜻한 식탁 등 다른 사람들이 평범하게 누리는 것들을 꿈꾸고 있어서 비극적이다. 정원, 그것은 가족에게 얻을 수 없었던 행복, 고요함의 공간이고, 소년의 동경이다. 변하지 않는 어른들과 세상에서 유년의 정원은 문을 닫고 한줄기 빛의 기억으로만 남는다. 가부장제의 폭력 앞에 소외당하는 여성의 삶과, 어른들이 자신의 상처에 몰두하느라,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의 상처는, 독재 아래 묵인하며 견디는 민중들의 신음과 겹쳐진다. 한 가족의 상황도 그 역사를 닮았다.

 

상처가 많은 할머니, 그의 외아들인 아버지, 그 사이에서 매일 상처받는 어머니, 자신들의 상처에만 골몰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동구는 자신의 말을 마음속에 감춘 채 어른들의 감정쓰레기통이 되어간다.

 

아주 어린 시절에 일어난 일들은 손바닥 위에 얹힌 눈송이처럼 어느 결에 스르르 잊히기 마련이지만, 어느 하루, 뒤꼍에서 맞이한 어느 봄날은 꿈결에 보았던 한 장면처럼, 현실감이 퇴색되어 오래된 수채화처럼 어렴풋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나는 입으로는 앙앙 울고 귀로는 엄마가 내 엉덩이를 치는 철썩철썩 소리를 들으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는 미풍에 실려 긴 대각선으로 내 눈앞을 지나가던 벚꽃 잎 하나를 가만히 쫓고 있었다. 꽃잎은 매끄럽지 않은 사선을 그리며 한들한들 바닥까지 내려와 마당 모퉁이를 두르고 있던 버드나무의 흰 솜털과 노란 송홧가루의 품속으로 파고 들더니 오랜 동무라도 만난 듯 함께 구르고, 튀어 오르고, 아장거리다가 마침내 내 시야를 벗어났다. 모처럼 유람을 떠나는 아씨마님들처럼 유유하고 평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엉덩이에 감겨드는 맵짠 매질의 아픔은 기억나지 않는데 투명한 햇살, 눈앞의 허물어질 듯 아물거리는 아지랑이 속에서 초라하지 않게 추락하던 그 꽃잎의 기억만은 어찌 그리 선명한 것일까.(22p)”

 

9살이 떠올리는 더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엉덩이를 맞던 아픔보다는 어른들의 화와 설움이 뒤섞인 분풀이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는 것과, 그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아름다운 풍경으로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동구의 마음이 처연(悽然)하기까지 하다.

 

동구는 터울이 많이 나는 동생 영주를 좋아하고 잘 돌본다. 9살 남자아이가 여동생을 돌보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만큼 동구는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다. 3학년이 되어도 한글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하는 동구가 난독증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아버지는 그 문제를 외면하는 모습을 보이고, 할머니는 엄마의 탓으로 돌린다. 오히려 식구들의 관심은 어린 영주가 한글을 읽는 사실에 기뻐하며 관심을 둔다. 3학년이 된 동구의 담임 박영은 선생님은 이런 동구의 외로움과 상처를 알아보고, 방과 후에 한글 공부를 한다. 그러나 한동안 그들의 수업은 한글을 읽고 쓰는 공부가 아닌 말하기 공부다. 가족들에게 받은 서운함과 부모님의 불화로 인한 속상함과 영주를 향한 질투, 엄마에 대한 연민 같은 자연스러운 감정을 말하도록 도와준다. 선생님의 질문을 처음 받을 때는 예리한 것으로 가슴 속의 가장 여린 살점을 찔리는 것 같았지만 대답을 하면서 동구는 후련한 감정을 느낀다.

 

나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물어본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다들 착하고 똑똑한 영주, 미련 맞고 덜렁대는 동구라고만 생각했다. 커튼을 젖히고 무대 뒤편으로 가보면 그곳에는 아직 어리고 미숙한 영주, 생각 깊고 마음 넓은 동구가 있었다. 선생님이 지금 처음으로, 어두운 무대 뒤편에 쪼그리고 있는 착하고 멋진 나를 무대 위로 불러내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갑자기 조바심이 나고 숨이 가빠지면서 시키지도 않은 이야기를 시작해 버렸다.(112p)”

 

할머니, 아빠, 엄마는 원망을 하고, 화를 누르고, 폭발시키고, 외면하다가 대화하는 법을 잃어 버렸다. 동구가 자신의 감정을 선생님에게 했던 이야기는 가족들이 들어줬어야 하는 것이었다. 동구가 선생님과의 방과 후 수업을 통해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되고, 자존감을 회복할 때, 그들은 여전히 대화할 줄 모르고 깊이 멍들어 갔다. 영주의 죽음은 이 가족이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고, 그 사고마저 며느리의 탓으로 돌리는 할머니와 어머니는 함께 살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만다. 할머니를 이해해보려 노력했던 동구의 결심은 어른인 나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박영은 선생님과 선생님의 대학 선배와 고시공부를 하는 주리 삼촌의 대화에서 당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청년들의 가슴앓이를 보게 된다. 유신시대의 막을 내렸던 10.26 사태 이후 서울의 봄을 기대했던 청년들은 12.12 군사 반란으로 더 짙은 어둠가운데 갇혔음을 알려준다. 선생님은 광주에 내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한다. 동구의 유년기는 유신시대가 끝나고 80년대 새로운 군부독재가 시작되는 시점에 막을 내린다.

 

세상은 변하지 않고, 어른들도 변하지 않는다.

할머니처럼 세상을 편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한편 그 사람에 맞춰서 좀 더 불편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341p)”라고 생각하는 동구의 마음은 군부독재라는 너덜너덜한 헌 신발을 신는 민중의 체념을 닮았다.

 

산동네 맨 꼭대기에 자리 잡은 3층집, 아주 가끔 문이 열려 있을 때마다 들여다보던 잘 가꾸어진 정원, 나무와 꽃과 연못을 찾아 날아들던 곤줄박이를 바라보는 것은 동구에게 즐거움이었다. 그 아름다운 정원은 비록 남의 소유이긴 하지만 동구의 유년기와 9살 소년의 꿈을 상징한다(아홉 살 인생의 뒷산을 떠올리게 한다). 동구가 그 정원과 작별하는 마지막 장면은 유년기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대문이 닫히면서, 아름다운 정원의 정경이 차츰 좁아지더니 마침내 가느다란 광채의 선이 되었다가, 갑자기 시야에는 녹슨 철문의 모습은 이제 기억 속에 하나의 영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차가운 철문을 힘주어 당기며 나는 아름다운 정원에 작별을 고했다. 안녕, 아름다운 정원. 안녕, 황금빛 곤줄박이.

아름다운 정원에 이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겠지만, 나는 섭섭해 하지 않으려 한다.(350p)”

 

그렇게 다짐하고 반복하지 말자고 외쳐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은 세상, 이전의 경험으로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책임을 회피하는 영리함만 배운 것 같은 사람들, 그 가운데서 체념하고 희생하는 누군가가 생겨난다.

 

나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어른이 아니라 칼날 같은 의식으로 살아있어 계속 성장하길 바란다. 그럴 수 있을까?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 피우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빅토르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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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1-11 09: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른들의 무관심과 폭력이 아이에게 큰 상처가 되죠. 특히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는 모습은 이런 어른들이 모여 도돌이표가 되고 마는 사회적 책임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동구에게 선생님이 계셔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씁쓸하네요. 소중한 관심이 절실한 시기입니다.

그레이스 2022-11-11 10:38   좋아요 3 | URL
역기능 가정의 어른아이와 같은 모습이예요
저는 이 책 읽으면서 <애완의 시대>를 떠올렸습니다

새파랑 2022-11-11 0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동구의 어린시절은 많이 아쉽네요 ㅜㅜ

표지가 좀 오래된 책처럼 보입니다 ㅋ

그레이스 2022-11-11 10:39   좋아요 3 | URL
작가와 작가의 오빠 사진이래요
참고로 작가의 할머니는 인자하시고 좋으신 분이라고...!

scott 2022-11-11 15: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혹쉬 드라마로도 제작 되었던 것 같은데,,,

유년 시절 상처와 트라우마가 평생 간다고 합니다

그래도 동구에게 따스한 선생님이 계셨네요 ^^

그레이스 2022-11-11 15:11   좋아요 3 | URL
그랬나요?
전혀 모르고 있었네요
다행이죠
이런 선생님이 많이 계셨으면 합니다

Falstaff 2022-11-11 18: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고 공감하면서, 심지어 눈물까지 짜면서 읽은 책입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다소 전형적인 마무리...랄까요? ㅋㅋㅋ 제가 뭘 알고 하는 얘기이겠습니까. 강요된 해피엔드가 아쉬웠습니다. 물론 해피엔드로 끝나서 다행이긴 합니다만.

그레이스 2022-11-11 19:00   좋아요 3 | URL
해피엔드로 읽으셨나요?
저는 넘 슬픈 마무리라고 생각했는데...ㅠ
동구의 작별과 체념때문에...!
물론 할머니의 누그러지는 듯한 뉘앙스도 있었지만, 또 반복되는 것이란 예상을 했어요.ㅠ
제가 넘 깊이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네요 ^^;;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서니데이 2022-11-11 20: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표지가 제가 아는 것과 조금 달라서 찾아보니, 개정판이네요. 개정판도 나온지가 거의 10년 가까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표지의 사진 덕분인지 오래된 책 같은 느낌이 들어요.
잘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11-11 21:11   좋아요 3 | URL

개정판 나온지가 10년이 되었는데, 저는 이제야 읽었네요
요즘은 어떻게 쓰는지 읽어봐야겠어요
평안한 저녁 되세요

mini74 2022-11-14 17: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의 첫 문장부터 슬픈데요... 동구와 영주 둘 다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일뿐인데 말이지요.

그레이스 2022-11-14 17:25   좋아요 2 | URL

아이들은 따뜻한 돌봄이 필요하죠

서니데이 2022-11-16 17: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편안한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지난주보다 이번주는 조금 더 차가워진 것 같은데, 낮 시간의 따뜻한 시간이 짧아졌어요.
그런데 내일 수능시험 보는날이라고 하니까 이제 그럴 시기도 된 것 같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11-16 17:44   좋아요 2 | URL
예~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희선 2022-11-19 01: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이를 먹고 부모가 된다 해도 아이보다 자기 아픔이나 상처를 더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가까이 있는 어른이 아이를 봐주지 않으면 아이는 참 쓸쓸하겠습니다 학교 선생님이 있어서 다행이다 해야겠지만... 한 가정 모습이지만 그 시대를 나타내는 걸로 볼 수도 있군요


희선

그레이스 2022-11-19 05:10   좋아요 1 | URL
저는 이 책을 시대쪽에 더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독서괭 2022-11-29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두운 무대 뒤편에 쪼그리고 있는 착하고 멋진 나를 무대 위로 불러내려는 순간이었다˝ - 울컥하네요.. ㅠㅠ 이 책 제목은 많이 들어봤는데,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레이스 2022-11-29 12:03   좋아요 1 | URL
ㅠㅠ
이 책 읽으면서 눈물 많이 흘렸습니다

서니데이 2022-12-08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12-08 18:5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여름 에디션)
황보름 지음 / 클레이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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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많아서 그런지 행복하지만 식상한 느낌이다. 쉽지 않은 문제들이 쉽게 풀려간다는 생각이다. 삶에서는 깊은 고민가운데 막막함 속에서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에서 표현한대로, 작가는 인생의 우물에 빠져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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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1-09 0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이런 느낌의 작품이 많이 나오는거 같더라구요. 표지도 좀 비슷한거 같고 ㅋ

그레이스 2022-11-09 07:54   좋아요 3 | URL
지금 다시 읽으니 별4개 주고 부정적인 평가만 했네요^^ 너무 편하게 읽혀서 300페이지가 넘는 양이 지루하단 느낌이었어요.;;

책읽는나무 2022-11-09 0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딸이 읽고 싶대서 사줬었어요. 딸이 반쯤 읽더니 갑자기 서점 주인 하고 싶다고 꿈이 바뀌었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ㅋㅋㅋ
마음 심란할 때, 착해지고 싶을 때,
읽어야지~ 찜해 두긴 했어요^^

그레이스 2022-11-09 08:34   좋아요 2 | URL
^^
작은 서점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듯요~♡
맞아요
마음이 심란할 때, 착해지고 싶을 때 읽으면 좋겠어요.~~♡

scott 2022-11-11 15: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일본에 이런 일상의 소소함을 다룬 힐릴류 소설이 많이 나왔었는데 ㅎㅎ

인생의 우물!
그레이스님 말씀 처럼
작가님 삶의 큰 고난이 없으셨을지도 ^^

그레이스 2022-11-11 15:12   좋아요 2 | URL
^^;;
저의 편견일지 모르죠^^
 
제임스 조이스, 어느 더블린 사람에 대한 일대기 (만화평전)
알폰소 자피코 지음, 장성진 옮김 / 어문학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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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읽는다면 많은 도움이 된다. 당시 아일랜드의 상황, 가족, 유년기, 친구들, 결혼 등 그의 작품의 배경과 소재를 이해할 수 있다(의식의 흐름은 경험과 지식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그후에 굳이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고 방임된 생각을 따라가며 작품을 읽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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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04 21: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글자도 많은 그래픽 노블이네요 그림도 좋고 ^^

그레이스 2022-11-06 08:12   좋아요 3 | URL

넣어야 할 내용은 다 넣은듯요^^

독서괭 2022-11-05 12: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저 더블린 사람들 조금 읽다가 멈춰있는 상탠데 관심이 갑니다!

그레이스 2022-11-05 12:58   좋아요 2 | URL
저는 율리시스 읽는데 도움을 받고 있어요^^

독서괭 2022-11-05 13:00   좋아요 3 | URL
율리시스라니!! 대단하십니다👍👍👍

그레이스 2022-11-05 13:09   좋아요 2 | URL
함께 읽어서 읽을 수 있어요~~^^

mini74 2022-11-07 15: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추천 감사해요 그레이스님 ㅎㅎ 더블린 ㅠㅠ 애증의 손길 담은체 어딘가에 쌓여있어요. 그림들도 자세하고 예쁘네요 ~

그레이스 2022-11-07 15:35   좋아요 3 | URL
제가 율리시스를 읽다보니 더블린도 병행하게 되요
율리시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더블린 사람들에 나와서...^^
 
책만 읽어도 된다 - 50에 꿈을 찾고 이루는 습관 좋은 습관 시리즈 23
조혜경 지음 / 좋은습관연구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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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노트북만 쳐다볼 뿐 글 쓰는 것이 막막하기만 하다. 어이없고 황당한 죽음들 때문에 비현실감 속에 살고 있다. 생각을 정리해보려 했지만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은 가라앉지가 않는다. 어느새 책을 펼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마치 밥을 먹어야 살아가듯이 글자를 담아야 할 것처럼. 책은 나의 어지러운 생각을 흡혈하고, 나는 텍스트 안에서 숨을 쉰다.

 

읽은 지 일주일이 넘어서야 이 책을 리뷰하기 위해 다시 펼쳐들게 되었다. 막상 글을 쓰려했을 때, 책을 통해 받았던 긍정적 메시지가 지금 상황과 너무 배치(背馳)되어서 조금 뜸을 들이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격하고 즐거운 공감들과 기억들을 불러오기 위해, 손가락은 키보드를 더듬고 있다.

 

책을 좋아하고, 독서모임을 하고,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해봤을 경험들을 담고 있어서, 반갑고 감정의 고조를 느꼈다. 작가 자신의 경험담이 나와 일치 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한 가지 차별되는 정말 존경할 만한 점이 있다면 독서를 통한 성취도가 높다는 것이다. 그저 즐기는 독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 공부로, 단순한 공부가 아니라 번역가로, 자신만을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책을 출간하게 되기까지 공적인 글쓰기로 목표를 정하고 성취하는 작가의 모습이 부러웠다. 목표를 정하고 계획하고 실천해나가는 성실함이 이 책에 고스란히 묻어있다. 또한 각 장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조언을 하는 마무리에서 작가의 이런 성품이 돋보인다.

 

한 작가의 작품을 읽고 좋으면 어느새 나는 전작읽기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작가 역시 그런 경험들을 전작주의자가 되는 법이란 장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더구나 작가가 나쓰메 소세키를 예로 들어서 2021년에 나쓰메 소세키 전작읽기를 마친 나는 이 부분을 폭식하듯 읽었다. 일어로 읽었다는 작가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나름 비평서까지 읽었던 차라 너무 반가웠다. 작가가 인용한 풀베개의 도입부는 새롭게 다가온다. 인용 역시 적재적소라는 게 있고 해석에 따라 빛이 날 수 있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28p)

 

이 부분을 나는 어떻게 읽었을까? 삶의 관조에 공감하긴 했지만, 고집을 신념으로 이해하고, 나는 외롭더라도 신념대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강상중 교수의 책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가가 다녀왔다는 산시로의 연못이 상상 속에서 그려진다.

 

읽다가 포기한 작품을 다시 읽게 된 경험도 백퍼센트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전혀 들어오지 않던 책이 문학에서 인용되고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소개되면, 다시 찾아 들게 되고 이전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던 내용들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경우다. 작가는 나와 디턴에서 소개된 롤랑 바르트였다고 한다. 한 작품이 다른 작품을 읽을 수 있는 땔감이 되는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된다. 나는 이 책에서 서재에 꽂혀 있는 책들을 뽑아드는 동기와 읽어갈 수 있는 에너지를 받았다.

 

글쓰기와 관련된 작가의 경험들을 읽으며, 이쯤 되면 내 경험을 누군가 대신 써주고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블로그를 개설하기까지 주저하던 마음들, 그리고 알라딘 서재에 첫 번째 리뷰를 올리던 때를 기억했다. 리뷰를 쓰게 되면서 책 읽는 시간을 뺏기는 것 같은 조급함을 느꼈다. 지금도 사실 읽을 책을 쌓아 두고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다. 첫머리를 써놓고 생각이 진전되지 않아서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 슬쩍 다른 책을 집어들기도 한다. 주방이나 화장실에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잃어버릴까봐 얼른 책상으로 뛰어가 메모를 한다. 왜 항상 생각이 막 떠오를 때는 밥 할 시간인지!^^

 

5년 쯤 전부터 고전읽기 동아리를 만들어서 함께 읽어오고 있다. 작가의 고전을 읽는 법역시 나에게 격한 공감을 하게 한다. 옆에 두고 시간 날 때 마다 틈틈이 읽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시경이 그렇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법,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독서법이거야 말로 독서가들의 경지 아닐까? 책상 위에 쌓아둔 책 더미를 보며 아이들이 엄마 이 책들 다 읽는 거야?”라는 질문을 한다. 가끔 파묻혀서 잊혀지는 책이 있긴 하지만, 이런 독서를 한지 오래 되었다. 나의 조급함때문일까? 이것도 지나친 욕심때문일까? 반문해보지만, 나 말고도 이렇게 하는 독서가들이 많은 것을 알고 나서는 즐기고 있다.

 

이런 독서법이나 책들이 겹치는 사람들을 만나면 반갑고 책을 주제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작가의 말에 끄덕이고 나도 그래요라는 속말을 하게 된다. 처음 책 제목을 보고 책만 읽어도 된다라는 무한 긍정에, 책 없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나도 약간은 갸우뚱 했다. 어차피 인간은 세상 모든 것을 다하고 살 수 없으니, 내가 즐거워하는 것이 책이라면, 책만 읽어도 된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작가가 읽는 책의 폭이라든가, 작가의 활동을 생각해보면 책은 삶을 꽉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독서 치료사 과정을 듣고 사람들에게 책을 권하는 활동을 하며, 가끔 이 사람에게 이 책이 도움을 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었다. 그런데 기대보다 더 좋은 반응이 올 때를 경험할 때가 있다. 그들은 내가 권하는 책에서 내가 보지 못한 보화를 캐낸다. 작가가 인용한 몽테스키외의 문장을 보며 독서의 치유 효과를 새삼 다시 확인했다.

 

한 시간 동안 책을 읽고 난 다음에도 사라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슬픔을 나는 아직 겪어보지 못했다”(179p)

 

좁은 골목길에서 죽어간 젊은이들을 보며, 공포와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감정 때문에 힘이 들었다. 그런 나와 누군가를 위해 태그해 놓은 프루스트의 문장을 옮겨본다.

 

독서는 적어도 마음에서 우러나온 우정이고 그 대상이 죽은 자, 사라진 자라는 점은 사심 없음을 증명하며 거의 감동적이기까지 하다.”(184p)


사람들이 책처럼 사심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아있으므로 그럴 수 없겠지!


나는 작가가 들고 있는 캐치프레이즈의 한쪽 모서리를 잡고 동참하려 한다.


책만 읽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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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1-02 17:10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틈틈히 읽는 책이 <시경>이라고 하셔서 감탄하게 됩니다^^ 그런 책 하나 있으면 참 좋겠다 싶네요. 작가님의 부지런함과 실행력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레이스 2022-11-02 18:18   좋아요 7 | URL
해설이 붙어있고 한자 음과 뜻까지 달려있어서 어렵지 않고 재밌어요.
시대마다 사람마다 해석이 달라서 그것도 재밌구요
저는 올제에서 나온 시경 읽습니다^^

서곡 2022-11-02 17:2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나쓰메 전작읽기에서 박수!!!

그레이스 2022-11-02 17:23   좋아요 4 | URL
저도 반가워서 마음속으로 박수쳤습니다 ^^

서곡 2022-11-02 17:24   좋아요 5 | URL
모나리자님 그레이스님 두분께 다 박수친 것입니다~~~

그레이스 2022-11-02 18:10   좋아요 4 | URL
^^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2-11-02 19:1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으며 통하고 고개 끄덕일 수 있는 환희가 정말 좋죠^^

그레이스 2022-11-02 19:18   좋아요 5 | URL
예~
이런 경험들을 공유하시는 분들과 이런 책들 때문에 힘을 냅니다^^

모나리자 2022-11-02 19: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그레이스님~^^
함께 공감했던 내용이 많으셨군요. 그 자체로도 반갑네요.^^
책 내용 잘 소개해 주시고 그레이스님의 경험담과 함께 어우러져 더 풍성하고 멋진 리뷰가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편안한 저녁시간 되세요. 그레이스님.^^

그레이스 2022-11-02 19:32   좋아요 4 | URL
부족해서 모나리자님 글에는 못미칠것예요.
좋은 책 제공해주시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2022-11-02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02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22-11-02 20: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으면서 참 행복하게 읽었는데, 뜻밖의 참사로 마음이 어지러워 한동안 글을 못썼네요.
그레이스님의 경험담도 아름답습니다. 저는 오로지 혼자서 책만 읽을 뿐인데 고전읽기모임도 하시고, 독서치료사 과정도 들으시고.... 이곳에는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되네요. ^^

그레이스 2022-11-02 22:14   좋아요 2 | URL
제가 쓴 댓글이 어디 갔을까요?
사라졌네요 ㅠ

암튼 저도 훌륭하신 알라디너님들께 많이 배우는 편에 속합니다.~♡

mini74 2022-11-02 21:1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제가 했던 고민들도 그레이스님 글에 담겨있어 더 반갑네요 ~ 전 읽다만 책, 북플친구님들이 좋다고 하면 다시 보이고 욕심내게 된다는 ㅎㅎ

그레이스 2022-11-02 22:15   좋아요 4 | URL
저도 그래요.
미니님도 제게 그런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분이세요.^^

scott 2022-11-02 22:38   좋아요 3 | URL
미니님 고민 저에 고민 🙊

scott 2022-11-02 22:0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 독서 치료사라는 직업도 있었군요 ㅎㅎ
일종의 약사 처럼 독서도 개개인의 상태에 따라 처방전을 주는 것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요즘 각 서점에서 구매 알고리즘 이용해서 북큐레이션 해주는데

저는 항상 무시 하고 있습니다 ^^

그레이스 2022-11-02 22:17   좋아요 4 | URL
그 알고리즘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는 듯요
저도 무시하는 편이예요
오히려 알라딘 서재에 올라오는 글들을 참고하는 편이예요~♡
스콧님 글처럼~♡

새파랑 2022-11-02 22:3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는데 완전 공감됩니다~!! 특히 소세키가 너무 반갑더라구요 ^^ 모나리자님 그레이스님 두분다 독서 천재~!!

그레이스 2022-11-02 22:33   좋아요 5 | URL
저는 빼주세요^^
모나리자님이 대단하시죠^^
우리는 나쓰메 소세키로 대동단결인가요? ㅋㅋ

라로 2022-11-03 11: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지 못했어요,, 좋은 리뷰 감사해요.
이렇게 알라딘 분이 쓴 글을 또 다른 알라딘 분이
성실하게 읽고 좋은 리뷰 남겨주는 것 보면
넘 흐뭇합니다!!!^^

그레이스 2022-11-03 16:24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저도 이렇게 리뷰해서 행복했어요~^^

희선 2022-11-06 00:4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한테도 책추천을... 그저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군요 어떤 것 때문인지 말해야겠지만... 저는 그냥 제가 보고 싶은 거 볼게요 아니 마음이 어지러울 때 읽을 만한 책... 그건 어느 책이든 보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책처럼 사심이 없다면 좋겠다는 말 맞겠습니다


희선

그레이스 2022-11-06 08:03   좋아요 4 | URL

사심이 없다면!
세상의 많은 불화와 불행이 사라지겠죠?!

2022-11-06 0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나리자 2022-11-07 09: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화제의 글 맨 위에 떴어요!!
너무 기쁘네요~ㅎ 그레이스님~!!
새 한주도 행복한 책읽기 되세요.^_^

그레이스 2022-11-07 09:50   좋아요 4 | URL
아!
그런가요? 저도 기쁩니다.
제가 화제의 글 메일을 못받고 있어서 몰랐어요.^^
모나리자님도 행복하세요~^^
 

이 무거운 모래톱은 조수와 바람이 쌓아올린 하나의 언어이다. 그리고 저쪽에는 죽은 건축자가 쌓아올린 돌둑이, 족제비쥐들의 사육장이 되어 있는 암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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