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매장
팡팡 지음, 문현선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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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는 길에 버려진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흙으로 덮고 장사지내기 위해 목숨을 건다. 고대의 비극이나 서사시에서는 시신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희생을 치르고 찾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리아모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찾기 위해 아킬레우스에게 고개를 숙인다. 성경에는 먼 거리를 밤새도록 달려가 사울의 시신을 찾아왔다는 기브아 사람들 이야기도 있다. 그들은 왜 목숨을 걸고 시신을 구했을까? 인간의 육체와 죽음 그리고 사후(死後)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육체를 썩고 분해되어 기본적인 물질로 환원되는 것으로만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사후세계나 부활과 관련된 특별한 신앙이 없더라도, 생전에 함께 하고 사랑했던 존재의 틀(혹은 그릇)을 안타깝고 귀하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아끼던 물건이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쉽게 함부로 버리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의 육신이지 않은가.

 

평생을 기억상실인 채로 살았던 딩즈타오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 연매장은 안돼!”라고 외친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도 연매장되기 싫어!”라는 말을 반복한다. 연매장이란 시신을 관에 담거나 시신을 감싸는 어떤 것도 없이 매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학살, 혹은 예를 갖출만한 여력이 없는 극단적 상황을 내포한다. 학살은 시체들을 묻고, 시간은 그들을 발굴한다.

 

1950년대 초 중국 공산당은 지주(地主) 계급의 토지를 무상 몰수하여 빈농에게 분배하는 대규모 토지 재분배 정책인 토지개혁을 한다. 이 과정에서 수백만 명의 지주가 학살되거나 숙청되었다. 딩즈타오는 이때 가족과 재산을 다 잃고 혼자 살아남아서 강에서 구조된 여성이다. 그녀의 아들 칭린은 아버지의 일기, 기억을 잃은 어머니의 분절된 말들, 직장상사인 류샤오찬의 아버지 류진위안의 기억을 통해 그들의 인연과 그들이 겪은 시대적 아픔을 알게 되고, 어머니가 상실한 기억의 진실과 고통의 근원 가까이에 다다른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언처럼 그 진실을 끝까지 파헤치지 않고 덮어두려 한다.

 

칭린은 알기 싫은 일을 알려 하지 않는 것도 강함의 또 다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긴 시간이 진실의 모든 것을 연매장 했다. 설령 안다고 해도, 그게 진실의 모든 것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432p)”

 

그 진실을 추적해 쓰는 것은 칭린의 친구 룽중륭이 한다. 칭린은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지만, 룽중륭은 싼즈탕 지역과 그 장원과 사건을 추적해서 쓴다. 칭린은 어머니의 과거와 고통의 진실이 매장된 채로 모든 것이 풍화되기를 바랐지만, 룽중륭은 역사는 진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망각을 선택하고 누군가는 기록을 선택해. 우리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살아가면 되는 거야.(444p)”라고 말한다. 칭린은 냉소하며 생각한다. 진실이 어떻게 언어와 글로 표현될 수 있겠느냐고, 세상의 어떤 일도 진정한 진실을 가질 수 없다고.

 

작가가 이 시대 토지개혁과 관련된 개인적 경험을 듣고 연매장이라는 말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이 단어는 시대적 비참을 품고 있다. 우리의 역사에도 수많은 연매장이 있고, 진실이 묻혀 있는 평토장 무덤들이 있다. 이 땅에는 여전히 감자를 먹지 못하는 많은 순이 삼촌들이 있고, 멸치도 못 먹는 유가족들이 있다. 자신의 손으로 묻은 가족들과 죄의식을 기억의 심연에 매장한 딩쯔타오처럼 침묵으로 아픔을 묻고 침묵하도록 강요받았던 사람들이 있다.


칭린이 진실을 밝히길 거부한 이유는 무엇일까? 차라리 알려하지 않는 것이 강함의 표현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나? 칭린과 룽중륭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실, 칭린의 태도에 나는 조금 의아했다. 알지 않으려 하는 게 강함의 표현이라고? 자라면서 알고 있던 부모의 정체가 다르다는 사실은 그의 삶을 흔드는 것일 수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감춘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아픔을 느끼지만 그는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중국인들이 문화혁명과 같은 부조리한 역사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같은 태도를 본다. 과거의 역사를 대하는 그런 방식이 경직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유물론적이고 실용적이 그들 나름의 태도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칭린에게서는 진실을 완벽히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패배의식도 엿보인다. 그러나 진실에 연루되어 있는 칭린보다는 자유로운 룽중륭은 연구자와 작가로서 탐사를 계속한다. 작가는 칭린을 이해하는 듯 쓰고 있지만, 사실 그의 태도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룽중륭을 등장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비중이 적은 제3자로서의 룽중륭은 작가 자신이라고 짐작된다. 룽중륭의 등장은 기록자로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작가 자신에게 확인시키는 지점이 아닐까 한다.

 

호메로스나 그리스 비극, 특히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다보면 사람들의 주검에 대한 예()는 시대, 지역, 문화마다 조금씩 상이하나, 그것은 그 사회에서 가장 고귀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된다. 불과 몇 십 년 전 우리사회에서 화장은 선호하는 장례방식은 아니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시대의 변화와 문화에 따라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도 달라졌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훼손되고 함부로 매장된 육체는 경악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경악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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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6-04-23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그런 내용이었군요. 어쩌면 어느 시대에나 통할 수 있는 이야기겠네요. 결국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 외면은 자기기만일 수도 있지만 들추면 닥칠 혼란, 공포와 두려움에 대한 자기방어일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국도 이념에 의해 많은 이들이 강요당하여 학살당한 이들이 있고 묻혀 있는 진실들이 많죠.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리뷰 감사합니다. 언젠가 읽어봐야겠어요.

그레이스 2026-04-23 10:26   좋아요 0 | URL
4.3과 5.18이 제일 먼저 떠올랐어요. 가족의 유해를 찾지 못한 세월호 유가족들도 그렇구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6.25나 일제강점기 양민학살 사건 등,,, 우리에게도 있는 같은 사건들이 계속 생각나네요.
감사합니다. 거리의 화가님은 역사를 많이 아시니까 깊은 독서가 되시리라 생각되네요.
 
영도의 글쓰기
롤랑 바르트 지음, 이채영 옮김 / 필로소픽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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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그, 스띨, 에크리뛰르, 작가가 말하는 언어, 문체, 글쓰기의 정의로 부터 출발해야 한다. 외부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작가의 문체가 완성되도록 하는것, 그것이 영도의 글쓰기다. 발자크, 졸라, 플로베르의 글을 비판적으로 읽게되고, 까뮈의 문체를 다시 발견하게 되는 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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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4-01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을만 한가요? 롤랑바르트 번역본들은 전부 읽을 수 없는 수준이던데요...저두 3권 있었는데 읽다가 전부 버렸어요..^^;;

그레이스 2026-04-02 09:19   좋아요 0 | URL
가끔 Gemini한테 의미를 물어봐야하긴 했어요.
스띨과 에크리튀르를 조금 혼용해서 번역해서...
위에 저 언어, 문체, 글쓰기 만 이해하면 그때부턴 읽을만해요.
바르트 책 중에서 그래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이예요.
비평에세이도 좋았구요.

yamoo 2026-04-02 09:37   좋아요 1 | URL
헛! 그런 번역본이 있단 말이죠? 저도 한 번 보겠습니다. 서점에서 몇 페이지 읽어보고 일을만한 번역이라면 구매해야 겠어요. 경험상 열받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라서뤼..^^;;
 

이오니아 반란의 주동자 밀레토스의 아리스타고라스는 자신이 일으킨 전쟁을 이오니아에 있는 도시들과 사모스나 키프로스 같은 섬들과 스파르타나 아테네에 까지 확산시킨다. 아리스타고라스의 배후에는 페르시아로 끌려간 밀레토스의 참주 히스티아이오스가 있었다. 히스티아이오스는 밀레토스를 공격해온 다레이오스에게 일찌감치 항복하고 그의 수하에 들어가 페르시아에 봉사하고 있었다. 그는 밀레토스를 다시 차지하고자 자신을 대리하고 있는 사위 아리스타고라스에게 페르시아에 항거하라고 비밀리에 메시지를 전한다. 이 메시지를 받기 전 아리스타고라스는 페르시아에 공적을 세우고자 군대를 동원해 낙소스를 공격했다. 낙소스 원정은 실패하고 막대한 경제적 손실만을 입었다. 아리스타고라스는 다레이오스에게 받을 문책이 두려워 오히려 페르시아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스파르타와 아테네에 원병을 요청하고,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오니아 지역 도시들을 선동했다. 각 도시국가들은 셈법과 정치적 상황에 따라 전쟁에 참전했다. 이것이 Ionian revolt, 헤로도토스가 말하는 이오니아 반란이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을 연구하며 이오니아와 아프리카 흑해주변 도시 등의 역사와 문화, 인종 등을 조사하고 직접 다니며 탐사했다. 그러면서 마라톤 전쟁 직전에 일어난 이오니아 지역 헬라스 도시들의 페르시아에 대한 전쟁에 주목한다.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서술해간다. 이 이오니아 전쟁을 통해 많은 도시들의 시민들이 희생됐다. 나름의 전쟁을 일으킬만한 이유들과 열망들이 있기도 했다. 노예 상태로 이주한 민족들과 혈육이 몰살당한 사람들의 분노와 복수심 등.

 

주목할 만한 것은 지도자들의 욕망과 무책임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빼앗긴 권력의 자리를 회복하기 위해 시민들의 복수심과 불안감을 이용한다. 페르시아가 시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 노예로 삼을지도 모른다는 거짓을 전파하며 선동한다. 아리스타고라스는 이오니아의 많은 도시들이 다 일어난 것처럼 호도하여 다른 도시들의 참전하게 한다. 그리고 패색이 짙어지자 도주하기를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5~6) 헤로도토스는 이 역사를 기록하며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들에 집중한다. 지도자들의 욕망에 의해 전쟁에 끌려 나온 시민들과 노예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전쟁의 승패가 기울면 지도자들은 항복과 결사 항전을 고민하고, 협정을 맺기도 하지만, 합의에 이르는 마지막까지 이익을 앞에 놓고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싸운다. 그 와중 협상과 지체와 결렬과 재개 사이를 오가며 사람들의 희생을 키우는 것을 보게 된다. 이들 고대 국가들은 전쟁 중 서로가 적이 되기도, 연합군을 이루기도, 중재자로서 개입하기도 한다. 구원(舊怨)을 따라 혹은 이익을 따라 합종연횡을 일삼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대에 일어난 전쟁의 발단과 전개, 그리고 결론으로 가는 과정이 현대 전쟁과 다르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 에서는 휴전시간 15분을 앞두고 지휘관의 자존심 때문에 신병들을 적의 참호로 보내 육탄전을 벌이는 비인도적 장면이 있다. 종전 협정 내용이 독일에 수치스러운 것이었기에 지도자는 프랑스군을 그대로 보낼 수 없다고 울분을 토한다. 적의 참호에서 끔찍한 육탄전을 벌이던 파울 보이머는 칼에 찔리고,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 휴전 나팔이 울리고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진다. 그 소리를 들으며 파울은 죽는다. 전쟁의 허망함을 전하려는 극적 연출 장면이다. 그리고 지도층의 몇 사람의 공로 의식이나 욕심에 의해 많은 생명이 부질없이 죽어가는 전쟁에 대한 분노를 느끼게 한다.

 

원작을 각색한 이 영화는 2023년 미국과 영국 아카데미에서 많은 부분 수상을 했다. 영화는 아름다운 풍경과 전장의 잔인함을 대비시킨다. 인물들의 대화는 때로 즐거운 상상을 하게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공포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굶주린 병사들의 열악한 식사와 후방에 있는 고관들의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식사 장면을 대비시킨다. 조국을 위해 참전하는 십대 청년들의 낭만과 첫 전투의 공포와 참혹함이 급격하게 대립한다. 그들의 패기와 열정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절망으로 변해버린다. 나 역시 저들이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고, 돌아간다 한들 희망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아름다운 풍경과 참담한 풍경이 반복되면서 나도 모르게 남아 있는 러닝 타임을 확인했다.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빗발치는 총탄과 화염 방사기 앞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을 달리는 그들의 둔한 몸짓이 나를 숨막히게 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이 비참한 시간을 버티고 있는 그들의 심정이 화면 건너편으로 전해졌다.

 

학교 교사, 탄광의 광부, 은행원, 양계장 주인, 시골 지주, 도시 중간계급, 노동자, 농민 등 그들이 격렬한 전화(戰火)의 한복판에서 계속 참호를 지키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무인지대 언저리 저 냉혹한 죽음이 다스리는 그 자투리 땅에서 그들을 버티게 한 것은 무엇일까? 병사들이 참호 밖으로 나와 공격에 나서도록 한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들을 버티게 했을까?”(봄의 제전289p)

 

원작인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작가의 체험이 담겨 있는 작품으로 상상된다. 그가 16살 때 전쟁이 났고, 2년 뒤 191611월에 사범학교를 다니던 중 징집되었고, 1917년 플랑드르에서 처음으로 최전선의 전투를 경험했다고 한다.(봄의 제전467p)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는 영화의 대비적 이미지 보다는 화자인 파울의 마음에 집중한다. 그의 심상에 떠오르는 문장들은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잔인하고 허무하다. 17살인 파울과 그의 동기들 7명은 전선으로 보내져 흩어져 배치되고 죽음을 경험한다. 파울은 자신들이 기대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파울은 우리는 길을 잃은 것 같다고 고백한다. 학생이 아닌 전우들은 구두 수선공, 농부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다. 이들 모두는 똑같이 총탄, 장갑차, 화염방사기, 화학전 독가스로 인해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다. 1918년 종전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파울은 끝나지 않는 전쟁에 조바심 낸다. 그 초조함과 실망이 나의 마음을 울린다.

 

“1918년 여름 불타 버린 전쟁터 위로 부는 희망의 바람, 초조함과 실망의 미칠 것 같은 열병, 두렵기 짝이 없는 죽음의 공포, 이해할 수 없는 물음. ? 왜 전쟁이 끝나지 않는가? 그런데 왜 끝난다는 소문이 솔솔 나도는가?”(11)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더욱 전쟁에 나가는 것이 힘들어지고, 여전히 어쩌면 더 많은 죽음들을 경험한다. 희망과 실망을 반복하는 파울 보이머에게서 우울과 당혹감을 엿보게 된다. 반면 그의 눈에 비친 나무들, 빨간 마가목 열매는 아름답기만 해서 처절하고 더욱 허무하다.

 

하지만 1918년 여름에 출정은 계속되고 죽음도 그치지 않는다. 비록 초라한 모습이긴 하지만 이곳 생활이 지금처럼 우리에게 간절히 여겨진 적은 없었다. 우리의 숙소 주변 초원에 피어난 붉은 양귀비꽃, 풀줄기에 달라붙은 매끈매끈한 닥정벌레, 어스름하고 서늘한 방 안에 스며드는 따스한 저녁노을, 해 질 녘의 신비스러운 검은 나무들, 하늘에 떠 있는 별들과 흐르는 물, 꿈들과 오랜 수면-, 이런 생활, 생활, 생활!”(서부 전선 이상 없다11)

 

그리고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고 작가는 쓰고 있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로 마치며, 자고 있는 것처럼 땅에 쓰러져 있는 파울의 몸을 조명한다.

 

종전 소식을 기다리는 전쟁 지역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대피 사이렌과 폭탄 터지는 소리로 시끄러웠던 도시의 밤이 당분간 조용하려나? 죽음의 공포를 겪고 있는 사람들과 달리 국가의 권력자들은 수많은 셈법과 경우의 수를 따져 이익이 되는 조항들을 매일 갱신하고 있다. 이 전쟁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사람들도 나름의 예측과 전망을 통해 종전의 때를 점치고 있다.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소문만 무성하고 그 시간이 언제 올지 불안한 가운데 어디선가 적막을 깨는 폭격 소리에 실망하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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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1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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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서 작가는 글을 쓸 때 두려움을 느낀다면서, ‘잘 쓰고 있나’ ‘인물이 윤리적인가’ ‘고증이 확실한가와 같은 자기 검열을 자주 한다고 고백했다. 이번 작품에서는 이런 인물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불편한 것을 애써 감추는 건 기만이고, 시대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이런 질문들을 오래 논했다는 작가의 말이 맴돌았다.(시사In) 인물들과 이야기에서 작가의 고민에 공감되는 지점들이 있다. 나 역시 다 읽고 나서도 그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리뷰를 할 방향을 찾지 못했었다.

 

모 배우의 한 줄 평이 카피라이팅 슬로건(copywriting slogan)이 되었다. 그의 영향력 때문에 과장된 경향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둘째가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을 읽고 소설 넘 신박하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도, 다 읽은 책을 소장하기 위해 구입하는 것을 보고도 아이의 취향이겠거니 하고 읽어야 할 책 순서에서 뒤로 미뤄 놨었다. 막내 아이도 읽고 좋았다고 하고, 지인들도 좋은 평가를 하고, 그제서야 책을 옆에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읽자는 의견이 나오고서야 읽기 시작했다. 확 빨려들어가고 신박한 느낌은 들었다. 계속해서 긴장시키는 부분도 있었다. 독서모임 회원들은 만난 순간부터 정말 좋았다고 감탄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나는 마음이 불편하지? 방어벽을 쌓았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인물들이 주는 불편함이 너무 컸다. 선과 악, 윤리적이고 비윤리적인 문제는 아니다. 인물들이 경계에서 줄을 타고 있어서, 사유라는 게 없어서, 작가가 그들을 위해 변명을 하고 있는 듯해서 무서웠다. 작가는 중립적인 자리에서 독자들에게 생각할 문제를 던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짧은 문장 안에서도 작가의 철학은 묻어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독서모임에서 회원들과 토론하면서 나는 철학 없이 재미로 읽는다면 차라리 영화를 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미디어와 텍스트는 어떻게 다를까? 나의 경우 독자의 사유에는 텍스트가 더 선명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는 기이한 상상인데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주제는 무겁다. 내 경우, 망막을 통해 들어온 이미지는 사라지거나 그 세계 안에 머물거나 인상적인 몇 장면을 남기거나 하는 정도로 생각을 만든다. 반면, 텍스트 한 단어 한 문장이 그대로 들어와 각인되고 비평과 수용을 통해 사유가 된다. 그래서 더 선명하다.

 

읽은 후 몇 달 동안 작가의 펜이 향하는 방향이 어디일까 고민 했다. 권력에 복무하기보다는 항거하며 시대를 바꾸어나갈 수 있는 작은 지점을 찾아가는 게 문학의 몫이라 생각한다. 그중 하나가 기억이고, 그것을 오답 삼아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게 중요하지 않나라고 한 작가의 말에서 조금은 안심이 됐다. 여전히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는 듯한 뉘앙스에는 마음이 쿵 내려앉는 불안을 겪는다.

 

등장인물들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들의 경향성은 우리 시대정신이지 않을까? 특히 혼모노에서 무당이 섬기는 할멈 신이 그 정신의 극단적 상징이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들의 내용이 대부분 그렇지만 이 혼모노는 최근 내란과 그 배후 사건들과 관련하여 더욱 시의적이다.

 

혼모노(ほんもの)는 일본어로 진짜’, ‘진품을 뜻한다. 일본 문화에서 이 단어는 장인정신의 상징이다. “저 사람은 진짜 혼모노다라고 말하면, 그 분야에서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한편 집착적인 오타쿠를 뜻하는 은어로 쓰인다. 그렇게 '혼모노'는 진품에서 비정상으로, 찬사에서 조롱으로 의미가 달라진다.

 

우리가 오타쿠처럼 집착하며 욕망하는 실체는 무엇일까? ‘길티 플레져’, 죄의식을 동반하는 즐거움일까? 죄의식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누군가를 추앙하는 팬클럽 회원들 각자에게 숨겨진 의도에 대한, 순수하지 못함에 대한 것일까? 누군가를 추앙하는 것, 진실이 무엇이든 무조건 믿는 것이 스스로를 위한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 때문일까? 그들은 배타적 언어와 규칙들과 가식적인 대화와 가장된 호의로 의구심들을 덮는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 때문에 모인 가짜들이다. 그들은 마치 이빨과 발톱이 빠진 호랑이를 만지는 것과 같이, 진실이 아닌 허위의 대상을 추앙하는 아니 자신의 욕망을 추앙하는 사람들이다.

 

'구의 집'이라는 이름에는 누군가의 범죄를 은폐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감금과 고문을 위해 지어진 이 건물을 설계한 주인공은 구보승이지만, 이것을 정부로부터 의뢰받은 자는 그의 스승 여재화이다. 대학원생이던 구보승에게 설계를 맡기고, 그 설계대로 세워진 건물에 이름을 구의 집이라고 명명한 것은 자신의 죄와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이다.


이 작품에서 구보승은 이 건축물 설계에 엄청나게 집중하고 그것이 인간을 위한 건축이라는 의의를 부여한다. 재능도 의욕도 없어 보이던 대학원생 구보승이 뜻밖에 열정과 비상한 재능을 보이며 설계에 구현한 공간은 감금과 고문, 의도된 자백을 받아내기에 최적화된 건물이다. 구보승에게 결여된 것은 무엇일까? 두 사람 중 누가 혼모노이고 니세모노(가짜)일까?


민주화 운동 기념 사업회’ 홈페이지에서 남영동 대공 분실’의 빈틈없이 용도에 최적화된 정교한 설계가 담겨진 도면을 볼 수 있다이 건물은 한국의 유명한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었고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왜 작가는 한 건축가의 설계가 아닌 그야말로 무기력한 무사유의 인간이 그를 대리하게 했을까? 그 유명한 건축가를 변명하는 듯 보여 오랫동안 고민했다. 두 사람 다 설계를 의뢰받는 순간부터 건물의 용도를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은 정의나 인륜 같은 것에 무심한 채 순간의 욕망과 성취감에 충실했고, 다른 한 사람은 사회적 명성, 사회적 지위때문에 거절할 수 없는 범죄에 다른 사람을 가담시키고 그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결론은 그가 끌어들인 사람이 한 명 두 명 백 명으로 늘어난다 하더라도 그는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타인의 안위나 사회적 정의와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시대정신을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어리석고 위험하다. 그 극단적인 정신의 형태가 혼모노의 할멈 신이다. 박수무당30년 간 섬기던 신은 다른 신애기에게로 옮겨간다. 그 귀신 조차 자신의 이익을 따라 옮겨다니는 것이다. 그런 신에게 자신의 안위를 의탁하고 공을 들이는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국가와 많은 사람들을 위해야 할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해 신당을 찾는 욕망이 낳을 결과가 얼마나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할지는 자명하다.

 

이것이 시대정신의 경향성이다.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개인의 욕망만을 추구한다. 타자들 혹은 공동체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아니 그런 것들을 생각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단지 직관적인 죄의식만을 희미하게 갖고 있는 것 같다. 습관이 된 이런 경향은 죽음의 위험을 당한 혈육 앞에서도 자신의 자존심과 욕심을 우선순위에 놓는 어리석음을 낳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그것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은 자연스럽다. 시류에 합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게 죄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욕망만을 추구하고 이익만을 챙기는 것이 삶의 습관이 되고 경향이 된 존재가 개별자로서 혹은 집단을 이루어 괴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해본다. 무섭고 두렵다. 그게 내가 되지 않으란 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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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의 구두 - 하이데거,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의 그림으로 철학읽기
박정자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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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데리다, 사르트르, 하이데거 등 철학자들에 의해서 해석된 미술작품들과 그들의 미학을 읽게 된다. 그들의 이론서에서 미학의 액기스만 뽑아낸듯 하다. 문학, 미술, 음악을 보는 미학적 시선을 맛보게 해준다. 미학사나 미학개론서 보다 더 즐겁고 자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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