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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나무의 삶 - 문학, 신화, 예술로 읽는 나무 이야기 ㅣ 피오나 스태퍼드 식물 시리즈
피오나 스태퍼드 지음, 강경이 옮김 / 클 / 2019년 5월
평점 :
이제 서울에서는 자작나무를 볼 수 없게 될 것 같다. 한동안 공원마다 자작나무를 10주 이상씩 군식(群植)해서 하얀 수피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렇게 심겨진 자작나무는 이제 기온상승으로 인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한그루씩 베어져 나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무리짓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나무다. 내가 처음 자작나무에 매료된 것은 광릉 숲에서다. 가을 금빛으로 반짝이는 나뭇잎들을 달고 무리지어 서있는 하얀 나무들은 숲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안내하는 연구원 분은 이쪽 거는 우리나라 자생, 저쪽은 만주 자작나무 하고 손으로 가리키며 알려 주셨지만, 그런 식의 구분은 나에게 의미가 없었다. 하얀 옷을 입고 서있는 무리들이 만드는 이국적인 정취에 반해 이후로 자작나무는 나의 최애 나무 중 하나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라는 소설에서 매머드의 시대 사람들이 자작나무 부드러운 수피의 효용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다. 클림트의 그림, 시베리아 유형지 등, 자작나무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나의 추억과는 다르게 저자는 이 나무 이야기를 자작나무(Birch)의 체벌(birch)이라는 뜻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 유연한 가지들이 회초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수피에 있는 짙은 반점들은 눈처럼 보여서 아르고스(그리스 신호에 등장하는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인)나무라고 부른다. 존 러스킨, 존 밀레이, 구스타프 클림트, 로버트 프로스트의 그림과 시에 담긴 자작나무를 소개하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오슬로 북쪽 거대한 삼림지대 노르마르카에 있는 은색자작나무 숲이다. 이 삼림지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미래도서관>은 묘목들로 이루어져 100년 후 1000그루를 이용해 출판할 계획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청탁받은 작가는 마거릿 애트우드, 데이비드 미첼과 함께 한강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내게 있어 호랑가시나무는 항상 천리포 수목원을 떠올리게 한다. 방문 당시 탄성을 자아낸 것은 사람 키의 두배 정도 되는 사초류(억새)이다. 잡지에 나온 캘리포니아나 미국 남부지역의 저택 입구의 풍경을 이루던 그 식물을 보게 되어 반가웠고, 이런 조경식물이 우리나라에도 있었으면 했는데, 이제는 서울 도심에서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또 한 가지 감탄의 대상이었던 것은 물속에 잠겨 있던 낙우송이다. 붉은 낙우송은 연못을 조성하면서 물에 잠기게 되어 그런 신비한 빛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나무들에 시선을 빼앗기고 감탄하고 있는 우리에게 연구원은 그들은 열악한 생존을 이겨내고 있는 중이라고 수목원의 숲을 이루고 있는 호랑가시나무를 주목하라고 환기시켰다.
호랑가시나무는 백악기 화석기록을 남긴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이름이 Holly인 이 나무는 크리스마스 리스에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친숙하다. 이름에서 예측되듯 악령을 쫓는다든지 이 나무를 훼손하면 재앙을 당한다든지 하는 그런 믿음들이 있었다고 한다. 미국의 Hollywood가 이 나무 이름에서 왔다. 재미있는 것은 유럽 이주민들이 미국 서해안에 도착해서 주홍 열매와 상록수 잎을 단 토착나무를 보고 캘리포니아 홀리(Callifornia Holly)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사실 그 나무는 토연나무(Toyon tree)였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토연우드보다는 할리우드가 더 그럴듯하다.
물푸레나무(Ash)는 실물보다는 도마나 가구, 문학으로만 익숙하다. 이제는 물푸레나무는 제임스 조이스의 지팡이와 존 컨스터블의 그림으로 기억될 듯하다. 컨스터블의 풍경화에 자주 등장하듯 영국의 풍경을 이루고 있는 흔한 나무이다. 이 나무로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하는 놀이가 있다는 것은 쉽게 구하고 친근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속성수라는 점과 목재의 단단함과 유연성 때문에 목재를 다루는 이들에게 사랑받는 소재다. 썰매, 스키, 갈고리, 지팡이, 의자, 마차 바퀴 등에 사용된다. 제임스 조이스가 항상 들고 다닌 것이 이 물푸레나무 지팡이다. 1941년 생산라인을 떠나게 된 모스키토 폭격기 역시 이 나무가 재료이다. 1940년대 자동차의 뼈대에도 사용되었다. 영국에서 가장 친근한 나무 가운데 하나인 이 나무는 물푸레나무 역병과 호리비딱정벌레의 습격으로 인해 위기를 만났다고 한다.
‘사시나무처럼 떨다’는 말이 영국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플러(Poplar)의 한 종류인 사시나무(은백양)은 잎병(잎자루)가 가늘어서 공기의 작은 흐름에도 흔들린다. 잎의 윗면은 짙은 초록색이고 뒷면은 은회색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바람에 흔들리면 그 잎의 떨림이 반짝이는 듯 더 눈에 띈다. “존 키츠는 미완성 서사시 <히페리온Hyperion>에서 정복당한 고대 대지의 신들을 그릴 때 이 패배한 이교 신들의 지도자가 흐린 눈에 마비된 혀, ‘사시나무 병으로’ 벌벌 떠는 수염을 가졌다고 묘사했다.(183p)”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조경수 뿌리에 달려와 심기는 바람에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은백양이 한그루 있다. 책상에 앉아 창밖을 보면 바람이 없는 날에도 파르르 반짝이고 서있다.
저자는 이 책의 목차 첫 번째로 주목(Yew)을 두었다. 길고 긴 나무의 삶(The Long, Long Life of Trees)라는 제목과 가장 잘 어울리는 수목이기 때문일 것이다. 느리게 자라기도 하지만 긴 수명을 가진 나무다. 성장이 느려서 나이테로 그 정확한 나이를 측정할 수 없다. 오래 전 문학이나 역사 향토 기록을 통해 그 수명을 짐작해보기도 한다. 둘레가 10미터가 넘는 주목은 약 2,500년이 넘는다고 추정한다.
주목은 정원수 중 비싼 나무에 속한다. 묘목을 심으면 다음 세대에야 성목을 볼 수 있다. 아파트 입구에 원추형으로 서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그 형태 때문에 겨울이 되면 전구로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보는 그 형태는 전정가위로 다듬어진 모양이다. 주목은 잎을 잘라내면 옆으로 퍼지면서 밀도를 높이기 때문에 토피아리나 수벽으로도 이용된다. 유럽의 오래된 정원의 자수화단에 서있는 동물모양의 나무들은 대부분 주목이다. 느리게 성장하는 주목의 목재는 그만큼 튼튼해서 고급 소재로 사용된다. 목재의 강함과 탄성때문에 주목은 영국의 활 롱보우longbow 에 사용되었고 그 파괴력은 가히 위력적이었다고 한다.
<웨일스의 위대한 주목길>
‘웨일스의 위대한 주목 길’에 있는 아치형 주목 터널에 있는 오래된 나무는 피를 흘리는 것처럼 붉은색의 액체를 내기도 한다. 주목은 나이가 들면 줄기 속이 비기 시작하고 가지가 늘어져 땅에 닿으면 그 가지에서 새로운 생장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해서 터널이 형성된다. 사람들은 오랜 역사와 그 신비로움에 반하는 듯하다.
그밖에도 벚나무, 마가목, 사이프러스, 산사나무, 느릅나무 등 영국인들이 좋아하고 친근한 나무들과 관련된 역사와 신화 문학과 예술 정치와 경제를 시적 언어로 이야기한다.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자주 그려졌던 산사나무와 포플라는 영국인들에게는 조금 다른 느낌의 대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사나무의 추억과 관련된 프루스트의 아름다운 표현과 달리, 아일랜드의 산사나무(가시나무)는 경작지의 울타리로 사용되었고,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는 조금은 어두운 인상을 준다. 아일랜드의 기근을 배경으로 한 소설 <슬픈 아일랜드>에서도 산사나무가 죽음의 소식을 전해주는 매개로 사용되었다.
롬바르디아 사이프러스에 반해 여행자들이 영국으로 들여오던, 여행이 유행이던 시대 풍조들, 버찌와 산사열매를 좋아해서 식재를 장려한 왕들, 위험성 때문에 Cherry picker 면허를 받은 사람만 버찌나 산사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들, 이 책에 등장하는 나무들은 신화, 역사, 생활사, 문학과 예술 등의 다양하고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새삼 나에게도 나무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해준, 충만한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