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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나 조형의 아름다움은 늘 사랑보다는 외로움이고, 젊음보다는 호젓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은 공감 앞에서 비로소 빛나며, 뛰어난 안목들은 서로 그 공감하는 반려를 아쉬워한다. 반려 없이 보는 아름다움은 때로는 아픔이며, 때로는 외로움과 호젓함이며, 때로는 그 의미를 잃는다. 사랑을 잃은 사람의 눈에 세상이 빛을 잃어 보이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공감하는 사람끼리 그처럼 아름답게 바라보던 자연과 조형 작품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허망해 보인다는 것은 아름다움이 그처럼 외로움을 잘 탄다는 증거이기도 하다.(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최순우 18p)”

 

선생의 안목이나 사랑, 그 깊이에도 미치지 못하나 그 뜻이 무엇인지 안다. 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전시에 막내와 동행한다. 취향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감상을 바로 알아듣고, 때로 다른 의견으로 나에게 자극을 준다. 그래서 나는 이 아이와 함께 가면 말이 많아진다.


대구 간송미술관에서 본 월 텍스트(wall text)”가 마음을 울려서 셔터를 누르고 오랫동안 그 앞에 서 있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청자상감운학문매병(233p)에 있는 문장이다. 책에서는 무심히 지나간 문장이었으나, 큐레이터의 선택을 받고 벽에 새겨지고 조명을 받으니 새로운 의미로 살아온다. 가끔 경험하는 일이다. 최순우 선생의 우리 유산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이 전시된 자기들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에는 간송미술관 소장 청자, 분청사기와 신윤복, 김홍도, 김득신의 회화에 대한 소개와 감상이 많다. 또한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에서는 간송 전형필과의 각별함을 보여주는 글이 담겨있기도 하다.

 

어제도 퇴근길에 어수선한 세모의 네거리에 서서 지금 내게 생각키는 것은 누구의 얼굴이냐고 자문자답을 해 보았고 그 자답이 옛 애인의 얼굴도, 가족을 얼굴도 아닌 한 선배의 얼굴이었다는 데 스스로 놀랐다.……내가 서울을 떠날 때 그분이 전송해 주었는데, 우리는 차 속에 나란히 앉아 서로 차고 있던 팔뚝시계를 바꾸어 차면서 오고 가는 마음속의 대화가 있었고 그 묵묵한 대화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간송 전형필과 벽오동 심은 뜻에서)”

 

회화 전시실은 그야말로 보고 싶었던 작품들을 만나는 즐거움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회화 전시 작품이 바뀔 때마다 몇 개의 작품을 보고 오는데 그쳐야 했던 아쉬움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시간이었다.

 

이번 개관기념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신윤복의 미인도와 화첩이고 그밖에도 김홍도의 풍속화첩, 정선의 산수화, 이정의 금니(金泥)로 그린 <삼청첩>, 김정희의 글씨도 너무 반가운 작품이었다. 1관에서 5관 그리고 간송의 방을 관람하는데 3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만큼 한 작품 한 작품이 오래 머물고 보게 되는 것들이었다.

 

그 중 나를 흥분하게 했던 작품은 심사정의 <촉잔도권>이다. 횡권! 대략 8미터에 달하는 가로로 그려진 두루마리 그림이다. 오세창은 평문(評文)에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이인문의 <강산무진도>가 있지만 이 <촉잔도권>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고 썼다.

심사정 필 <촉작도권>


오세창이 꼽은 3대 횡권(橫卷)<몽유도원도>, <강산무진도> <촉잔도권>이다. 아이랑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 회화실에서 <강산무진도>를 전시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다녀왔다. 그 몇달 전에는 실감 영상실에서 미디어 작품도 감상했었다. 막내는 미디어 작품이 좋았다고 하지만, 나는 그 실물과 대작을 그린 화가에게 감동했다. 그리고 여기서 <촉잔도권>을 만났다. 이 그림 앞에서 나는 말이 많아졌다


촉잔도가 뭔지 알아?” 아이는 사천지방에 있는 거잖아.” “알고 있네?” “잔도는 산의 절벽에 놓인 길.” “유방이 관중을 떠나 서촉 지방으로 갈 때 항우를 안심시키려고 한신이 잔도를 불태웠대, 그리고 수리하는 척하면서 우회해서 진창으로 쳐들어갔어. 거기서 암도진창(暗渡陳倉)’이라는 말이 나왔어…… 너무 나갔다. 흐흐.

 

심사정은 그 지역의 산세를 보고 쓴 이백의 촉도난을 주제로 촉으로 가는 험난한 길을 표현했다. <몽유도원도><강산무진>도 보다 여백과 운무를 이용한 원근법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두루마리 그림은 8미터가 넘는 작품들이다. 심사정의 경우 자신의 삶을 빗대어 담은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험난한 산봉우리들을 타고 돌며 아슬아슬하고 먼 길을 걷는 것이 인생이라는 철학적 해석도 가능하다. 감상자마다 다 다른 메시지를 발견할 것이다.

 

이인문 <강산무진도>

이인문의 <강산무진도>에는 360여명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먼 길을 떠나는 사람, 배웅하는 가족들, 장터, 노는 아이들, 노동하는 사람들, 험준한 산 등 여행자의 눈에 비친 풍경들이 담겨 있다. 끝없이 펼쳐진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시간 속에 이어져 온 공동체의 생활 등. 이 그림에서도 감상자의 시선에 포착되는 풍경과 주제는 다양하다.


화가들은  왜 이런 작품들을 그렸을까화가라면 한번쯤 도전하고 남겨볼 만한 작업이라는 의미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기에 도장깨기 하듯 보는 기쁨도 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워낙 많이 알려져 있다. 조선 초기 작품이라 화풍 역시 차이가 있다. 아마도 횡권 전체 실물을 감상할 기회는 없을 것 같다. 일본 톈리 대학까지 가 보고 싶은 마음도 없고, 혹시 국내에서 전시하게 되면 볼 마음이 생길지 모르겠으나, 여전히 꺼림칙하다. 11미터에 달하는 그림과 찬문을 상·하 권으로 나눠놓았다는데 마음이 상한다.

 

<강산무진도>를 접하고 김훈의 강산무진을 사서 읽었다. 역시 나는 김훈의 소설과는 맞지 않는다. 그의 남한산성, 흑산등은 제목과 관련된 역사는 기록과 고증보다는 소설 속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기 위한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강산무진 역시 불치병에 걸린 중년 남성이 우연히 들른 박물관에서 이 작품을 본 감상을 한국을 떠나며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본 풍경과 연결시킨 것이 전부이다. 모두 분주히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죽음을 앞둔 자신의 상황의 생경함, 존재의 외로움 등을 전하려는 의도인 듯 보인다. 그렇지만 강산무진이라는 제목은 너무 크고 연관성이 떨어진다. 스토리는 진부하고 맥 빠졌고, 그런 작품에 이런 제목을 갖다 붙인 의도가 의심스러웠다더구나 작가가 전시를 관람했는지 의심되는 지점이 있다.

 

전시실 안 소파에 앉아서 맞은편 벽에 걸린 그림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훑어보았다.(강산무진339p)”

 

8미터가 넘는 두루마리 그림을 벽에 걸었다고? 실제로 박물관 신문을 검색해봤다. 사진에는 작품이 유리관 안에 펼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올해 전시에서도 당연히 비스듬히 경사진 판 위에 눕혀져 있다. 2006년 이전 전시에서는 걸어 놓았을까? 아님 소설이니까...?


<청명상하도> 이 작품은 상하이 전시 때 벽에 수직으로 붙여져 있는 사진을 보았다. 이 책은 앞의 몇 장만 감상하다 말았는데, 5미터에 달하는 그림과 양쪽에 붙은 제발문이 붙어있는 중국에서 손에 꼽히는 두루마리 그림을 저자가 자세히 해설해 놓았다. 잊고 있었다. 다시 읽기 시작해야겠다.


 

중국에도 횡권 작품이 당연히 많이 있겠지. 올해 우연히 갖게 된 북경고궁박물관 기념품인 수첩과 만년필은 왕희맹의 <천리강산도>를 모티브로 한 굿즈다. 이 작품도 12미터에 달하는 대작이다. 북송시대 청록화법의 변모과정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는 설명과 함께 중국의 회화사를 다시 살펴볼 수 있었다. 우연한 즐거움이다.

왕희맹 <천리강산도>


고속철도 출발시간 15분 전에도 커피를 사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나를 말없이 기다려 주는 딸을 보며, 문득 이러면 나중에 같이 다니고 싶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미안!”이란 말을 던지듯 하고 서둘러 기차에 올라탄다. 막내를 향해 빨리해!”를 입에 달고 살았던 때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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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11-27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녀오셨군요. 저도 다녀오긴 했는데 저는 평일 시간이 안되어서 주말에 갔더니 진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좀 힘들었어요. 저는 심사정의 촉잔도권 봤지만 딱히 마음에 들어오지는 않더라구요. 물론 멋지고 훌륭한 작품인건 당연하지만요.
이번에 저는 도자기 하나가 눈에 진짜 똬악 들어오더라구요. 저도 나중에 그레이스님처럼 멋진 관람기는 못써도 대충이라도 쓰야 할텐데 요즘은 진짜 책볼 시간도 없어서 시간 아껴 책보고 있습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4-11-27 15:58   좋아요 0 | URL
ㅎㅎ
평일에도 사람이 적은 건 아니라서...
조금 기다리긴 했어요.
휴일에 안오길 잘했어. 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자기 중에 오리연적이 좋았고 최순우님도 그 연적에 글을 쓰셨는데 넘 좋았어요.
분청사기모란문병도 좋았죠
거기 전시된 작품 다 좋았어요.ㅎㅎ
간송에서 알짜만 남기고 팔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한번 다시 들려보고 싶었어요.

막시무스 2024-11-27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안에 꼭 다녀와야 할것 같아요!ㅎ

그레이스 2024-11-27 17:59   좋아요 1 | URL
미인도 전시는 기간이 얼마 안남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미인도 못보더라도 다른 좋은 작품들이 많아요.
기념품점 옆에서 설문조사 하시고 네컷 무료로 찍어보세요.^^

전야제 2024-11-27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촉잔도권에 흠뻑 빠지신 그레이스님의 감상이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실제로 가서 감상하는게 최고일테지만, 못 가보는 저에게 그레이스님의 관람기는 정말 소중합니다. 덕분에 저도 간접적으로라도 감상하면서 촉잔도권의 아름다움을 느껴봅니다. ˝험난한 산봉우리들을 타고 돌며 아슬아슬하고 먼 길을 걷는 것이 인생이라는 철학적 해석도 가능하다.˝라는 해석이 너무 멋져요. 해석이 감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이런거구나 다시금 느낍니다. 덤으로 김훈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비평 부분도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촉잔도가 사천지방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는 그레이스님의 자녀분 정말 멋진데요! 부모님께서 신나게 말씀하시는 주제에 대해서 아이들도 알고 있을 때, 정말 뿌듯할 것 같아요ㅎㅎ 멋진 글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그레이스 2024-11-27 19:2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전야제님!
그냥 제 감상이 그렇다는 거죠!^^
가끔 신나서 얘기하다 보면 애들이 웃고 있어요!^^ 미술관에서는 벌써 다음 작품으로 애들 발걸음이 옮겨지고 있는걸 보게되요.
나중엔 아이들한테 배우는 시기가 오겠죠^^

페넬로페 2024-11-27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녀 오셨군요.
미술관에 가면 작품에 대한 감상이 달라 그것도 재미있어요.
다른 작품에 맘이 뺏겨 저는 촉잔도권이 있었나 아리까리 합니다 ㅎㅎ
그래도 저는 김훈의 문장을 좋아합니다^^

그레이스 2024-11-28 08:08   좋아요 1 | URL

어제,,, 벌써 그제네요 화요일에 다녀왔습니다. 비가 와서 좀 그랬는데 오늘처럼 눈이 아니어서 다행이었죠.
미술관 카페에서 보는 비오는 바깥 풍경이 운치있어 좋았습니다.
나중에 기회 있을때 다시 가봐야겠어요.
너무 멀긴 하네요.^^
저도 에세이는 좋아합니다.^^
 
합체 (반양장) -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64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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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도 외모도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다. 노력해서 나아질 수 없는 조건을 갖고 있는 아이는 체 게바라를 형님이라 부르고 혁명을 동경할 수밖에! 청소년은 난쏘공을 어떻게 읽고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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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예술인가
아서 단토 지음, 김한영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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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걸작> 읽고, 예술이란 무엇일까? 화가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시각은? 관람자의 시선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아서 단토의 이 책을 들었다. 중간쯤에서 다시 메를로퐁티를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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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미술사는 전기·중기·후기·말기 로 나눈다. 초기는 중종 연간까지, 중기는 숙종 연간까지, 후기는 순조 연간까지 ,말기는 대한제국까지이다. 찾아보니 안휘준 교수의 책에서 역시 그렇게 나누고 있다.

초기에는 하직 고유의 화풍은 형성되지 않았고 안견의 <몽유도원도> 중국으로부터 유래된 <소상팔경도>의 유행으로 볼 수 있듯 사대부 사회를 중심으로 관념산수를 즐겨 그렸다. 중기에는 북종화의 영향으로 절파화풍이 유행한다. 후기는 문예부흥기로 문자향 서권기가 짙은 서화가 유행했다. 더불어 풍속화도 함께 발전한다. 말기에는 단원 화풍을 그대로 답습하는 매너리즘에 빠지지만, 추사 김정희을 통해 서화라는 화풍이 등장한다.

 

조선 초기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궁궐 장식화와 기록화가 먼저 소개된다. 그리고 어진과 함께 공신 초상과 선비 초상 등 많은 초상화들과 자화상들이 출현한다. 조선시대는 초상화 왕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초상화가 제작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초상화에는 외형적인 모습을 사실적이고 정확하게 담았을 뿐 아니라 그 인물의 내면적 정신세계를 담아내려 했다. 그 내면의 정신세계를 담는 것을 전신사조라고 한다.

 

“‘전신이란 정신을 전한다는 뜻으로 5세기 남북조시대 인물화의 대가였던 고개지가 전신사조라고 한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고개지는 전시의 핵심은 눈동자의 표현에 있다고 했다.(65p)”

 

이런 초상화의 대가로 소개된 인물 중 인상적인 화가는 단연 이명기이다. 그의 체제공 초상을 보면 그 사실적 표현이 놀랍다. 조선초기에서 중기와 후기를 거치면 초상화를 보면 그 복식의 변천사를 알 수 있고 그들의 자세나 배경에 따라 변화와 파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인물의 자세와 복식 배경은 모두 도상이 되어 정신과 상황을 알려준다. 자화상으로는 단연 윤두서의 자화상이 인상적이다. 터럭 하나조차 그의 인물됨을 가리키는 그의 자화상은 사실 반신을 그렸지만 얼굴 아래쪽의 몸의 형태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래서 사라졌음이 밝혀졌다. 시간이 완성한 강렬함이라고 할까?


 

초상화나 자화상뿐 아니라 고사나 역사인물, 풍속을 그린 그림 속 인물들, 사상을 담은 인물 그림 등 조선시대 인물화를 총망라한 책이 바로 조선시대 인물화이다. 엮은이가 안휘준·민길홍으로 되어있지만 여러 저자가 연구한 글이 담겨있다.

 

조선초기의 회화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로 시작한다. 국초부터 도화서 화원제도가 확립되어 안견과 같은 화원들이 활동하며 이름을 남겼다. 이 시대 회화는 관념적 화풍을 따르고 있다.

점차 중기로 가면서 북종화의 절파화풍이 자리를 잡고 도화서 화원들뿐 아니라 그림이나 서예가 문인들의 일과예(一科藝)가 하나의 전통으로 발전한다. 탄은의 대나무, 어몽룡의 매화, 이계호의 포도 그림과 같은 것을 일과예라고 한다. 눈길을 끈 것은 화법을 가르치는 교본이다.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그림의 교본을 제시하는 책인데, 그 교본 안에 있는 그림을 따라 그리도록 하는 것이다.

 

후기에 이르면서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등장하고 문인화가의 그림은 남종화풍을 따르면서 화제가 중요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림 안에 문자향 서권기가 짙게 서려있다.

 



조선시대 미술사에는 남태응의 청죽화사나 김광국의 석농화원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개인이 수집한 그림을 엮은 화첩이다. 또한 평론집이기도 하다. 그림에 담긴 화제들과 제발문, 그리고 수집가의 평론을 싣고 있다. 항상 그림을 보게 되면 그림 한쪽에 쓰여 있는 화제들이 궁금해 그 의미를 찾아보곤 했는데, 김광국의 석농화원이 출판되어 있어 반가웠다. 김광국은 조선 말기에 의관을 지낸 석농이 자신이 수집한 그림을 여러 번 여러 권에 걸쳐 증보한 화첩이다. 모두 10권으로 되어 있고 화첩 9권과 대작 1권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국립박물관 소장 화원별집역시 석농화원<별집> 편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어왔다고 한다.

 

주저 없이 구매해서 받아 본 이 두껍고 크고 비싼 책은, 거기 수록된 그림의 종류와 양, 궁금해 했던 화제와 화평들에 대한 해석들 때문에 그 이상의 만족감을 준다. 박지원과 홍석주의 서문 역시 반갑다. 조맹부의 제어는 미소를 짓게 한다.

 

책을 모으고 책을 소장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잘 보는 자는 마음과 생각을 맑고 단정히 가다듬고 깨끗한 책상에 향을 사르고서, 책등을 말거나 책 모서리를 꺾지 말고, 손톱으로 글자를 긁거나 침을 책장에 묻히지도 말려, 베개로 삼거나 옆구리에 끼지도 말아야 하며, 손상되면 즉시 수리하고 펴본 후에는 바로 덮어야 한다. 훗날 내 책을 얻은 자들에게 두루 이 방법을 권하노라(79p)”

 

석농화원에 담긴 그림들은 낙질되어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석농화원에서 떨어져 나온 작품으로 확인된 그림은 57폭이라고 한다. 그래서 석농화원에 그림은 없고 김광국의 발문만 남아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를 읽기 전에 『옛그림을 보는 법』이란 책을 읽었다. 전통미술의 상징세계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림 속에 나타난 상징과 관련된 이야기다. 예를 들자면 <노안도>는 갈대와 기러기를 그린 그림인데 그 한자어의 같은 음가때문에 노년의 평안을 기원하는 그림으로 선물했다고 한다. 게를 그린 그림은 장원급제하라는 기원이 담긴 그림이다. 장수, 부귀, 자손, 부부애와 같이 그림에 담겨 있는 상징을 알려 주고 있어, 우리 전통 미술을 공부하기 전에 읽어두면 유익한 책이다. 더불어 재미가 있다.


조선시대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벽돌 책만 쌓아가고 있다. 그 벽돌책 만큼이나 정말 모르는게 많았다는 깨달음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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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4-29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부가 끝이 없네요.
제가 우리 미술에 대해 무식함의 벽돌책 입니다^^

그레이스 2024-04-29 15:10   좋아요 1 | URL
ㅎㅎ
그러네요.
요즘 벽돌책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yamoo 2024-05-14 1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제를 거쳐 해방 그리고 6.25로 조선화는 끝났다는 게 요즘 미술계의 중론이더라구요..ㅎㅎ
이게 현대적으로 계승되어 담론화 됐으면 괜찮았는데, 전부 맥이 끊겼어요. 중국과 일본은 그래도 명맥은 유지하는데, 우리나라는 완전히 단절됐다네요..
개인적으로 좀 안타까운 느낌이 들어요. 멋진 그림이 많은데 말이죠..^^

그레이스 2024-05-14 16:27   좋아요 0 | URL
그것조차 모르고 있는게 너무 많아요~
이번에 공부하면서 조선의 미술 경지를 새삼 느꼈습니다.
 
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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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을 치고 고독한 공간을 만들어 읽어야만 한다. 그의 침묵을 읽어내려면! 어두운 숲은 죽음에 가까이 간 사람의 낯설고 적막함! 빛나는 은유 덩어리! 죽음이 이렇게 빛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고 영원한 빛 가운데 있을 것이란 믿음이 은유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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