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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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고 문학사 전체를 통해 이보다 더 훌륭한 작품은 없다고 봐요. 서사도 물론 좋지만, 나는 이게 교육적인 책이라 생각해요. 도스토옙스키 씨에게 사랑한다고 전해 줘요라고 지인에게 편지를 썼다. 1899년 출판된 부활에서 재판과 유형지의 모습은 도스토옙스키를 떠올리게 한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서로를 배제하는 통찰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들의 영혼과 육체라는 관념을 상호일체감 속에서 풍요롭게 호흡하고 있었다”(러시아의 문학과 혁명71-73p)고 이케타 사다요시는 말한다. 죄와 벌, 백치, 악령,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등에 자신의 유형지 경험을 담았던 도스토옙스키와 동시대 작가인 톨스토이 역시 유형지가 서사를 퍼 올릴 수 있는 러시아 문학의 중요한 원천임에 동의했음을 알 수 있다.

 

남편 없는 하녀의 딸로 축사에서 태어난 마슬로바의 애칭들은 태생과 삶을 시사하고 있다. 지주인 마님들은 그녀의 대모가 되어주고 이 아이를 구원받은 아이라는 뜻의 스파숀나야라고 불렀다. 반은 하녀, 반은 양딸이 된 그녀는 낮춰 부르는 카티카도, 사랑스럽게 부르는 카텐카도 아닌 그 중간인 카튜샤로 불렸다. 이 이름들에서 어떤 자의식이 생겨날지는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시골 영지에 잠시 들른 귀족 청년이 하녀와 사랑을 나누고 떠나버리는 이야기는 흔한 사건이었던 듯하다. 러시아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 푸쉬킨, 체호프, 부닌 등 많은 작가의 소설에 등장한다. 지주 마님들의 조카 네흘류도프와 사랑하고 버림받은 마슬로바는 이 사건으로 삶이 나락에 빠진다. 그녀는 그 집을 나와 다른 주인들을 거치고 결국은 유곽을 향한다. “천한 하녀라는 굴욕적 처지에서 달라붙는 남자들과 은밀하고 일시적인 간음을 할지, 아니면 생계가 보장되고 정당한 처지에서 법적으로 허용된, 벌이가 좋은 일상적인 간음을 할지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한다. 그 선택이 첫 남자와 다른 모든 남자들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하는 데서 그녀와 같은 처지의 여성들의 불행을 본다.

 

네흘류도프는 배심원으로 재판정에서 살인죄로 기소된 마슬로바를 만나고 변해버린 그녀의 모습에 죄의식을 느낀다. 재판의 부조리를 목격한 그는 그녀의 무죄 판결과 석방을 위해 힘을 쓴다. 그녀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결심을 하고 유형지를 향하는 그녀를 따라 간다.

 

네흘류도프는 카튜샤에게 속죄하기로 마음을 먹은 후, 스스로에게서 다른 모순, 죄악들을 발견한다. 그것들을 해결하기로 생각은 확장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차츰 그의 시선은 타인을 향한다. 정직한 자기성찰이 불러온 파장이다. 마치 둑의 한 부분이 무너지자 그 주변이 허물어지는 것처럼 삶의 전 영역에서 전복과 회복이 이루어진다. 신념을 되찾고 삶이 변화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그 과정이 너무 쉽게 보여서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과하는 것조차 몇날 며칠을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는 게 인간인데! 자신의 깊은 내면 안에 깊이 가라앉아 있던 죄의식을 마주하고 잘못을 정직하게 바로잡는 것은 삶을 전적으로 뒤바꿀 동력이 생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윤리와 사회정의라는 과제의 실현에 있어 둘 사이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이나 수치심이 현재 정의를 실천하려는 자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기에 사회 개혁에 참여하려 한다면 비록 도덕적 완성에 직접 반하는 수단이라도 모든 수단을 써야 한다는 위험한 유혹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 목적이 선의 원리에 등을 돌리게 한다면 그것은 허위이다.”(인생이란 무엇인가톨스토이)라는 말의 울림이 크다.

 

그가 한 자기 개혁 중 하나가 자신의 영지와 관련된 일이었다. 네흘류도프는 젊은 시절 헨리 조지의 사상에 품었던 열정을 깡그리 잊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토지는 사유의 대산이 될 수 없고, 물이나 공기나 햇빛처럼 사고 파는 대상이 될 수 없다. 땅이 인간에게 베푸는 모든 혜택을 인간은 똑같이 누려야 한다는 개념이다. 그는 급기야 자신의 영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의 개혁은 소작인들의 삶을 목격하는 충격을 통과하면서 급진적으로 나아간다. 그는 영지와 관련된 결정을 하자 모든 것이 단순해져서 놀란다. 우리는 복잡하고 망설여지던 일들을 한 단계 실행하자 단순하고 명료해지는 현상을 종종 경험한다. 삶이 복잡하게 보이는 것은 머뭇거림과 실천이 없기 때문 아닐까?

 

유형지를 향한 여정에서 네흘류도프는 죄수들의 비참한 행렬을 본다. 그들을 대하는 공무원들의 태도에 대해 비판한다. 사람에 대한 사랑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된다. 열차에서 농부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네흘류도프에게서 자유로움과 기쁨을 느낀다. 마슬로바 역시 네흘류도프의 도움으로 정치범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여정과 유형지에서의 생활 동안 그녀는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느끼고 그들에게 동화된다. 사면이 된 후에 유형지를 떠나 도시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은 더 이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결심으로 보인다.

 

제목 부활(Воскресение)’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을 뜻한다.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새로운 존재로 살아남을 의미한다.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는 유형지를 향하는 여정을 통과하며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날 밤 이후 네흘류도프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가 삶의 새로운 조건으로 들어가서가 아니라, 그때 이후 그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기의 그의 삶이 어떻게 매듭지어질지는 오직 미래가 보여줄 것이다.” (부활2, 338p)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이 그의 철학과 실천이 담겨 있는 소설이다. 이케타 사다요시가 말했듯 작가의 메시지는 의외로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영혼과 육체가 포함된 온전한 인간 존재로서 살아가라, 고뇌하고 고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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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루쉰의 첫 번째 소설집 납함(吶喊)과 두 번째 소설집 방황(彷徨)이 담겨 있다. ‘납함(吶喊)’적진을 향하여 돌진할 때 군사가 일제히 고함을 지름을 뜻한다. 그는 이 소설집 자서(自序)에서 젊은 시절 자신이 가졌던 적막한 비애를 잊을 수가 없고 그 적막함을 젊은이들에게 전염시키고 싶지 않기에 몇 마디 더듬거리는 고함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소설집을 펴내는 이유다.

 

신해혁명의 실패는 루쉰에게 대단히 깊은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광인일기에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청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슴 속에 타오르던 열정은 혁명의 실패와 냉랭한 현실 속에서 식어가고 혁명을 이끌 동력을 찾지 못한 채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불안에 잠식당한다. 일찍이 신해혁명의 실패와 환멸,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즉위, 장쉰(張勛)의 복귀 등을 목격한 작가 자신이 경험한 심리 상태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식인(食人)의 위협을 느끼는 청년의 정신증은 그만큼 시대가 야만성을 띄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에는 두 번째 소설집 방황(彷徨)의 소설들도 담겨있다. 납함의 소설들처럼 슬픔과 분노 같은 감정들이 담겨 있다. 방황에 담겨있는 Q정전에서는 혁명으로 밤사이 세상이 바뀌어 버리고, 혁명의 대상이었던 자들이 야합하여 권력을 유지하고 혁명을 일으킨 자들의 본질은 도둑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생존을 위해 굽실거리는 군중들의 무지함, 사형제도의 잔인함 등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Q’뿐 아니라 많은 등장인물들이 작가의 시선에 포획된다.

 

현실주의 작가 루쉰이 묘사한 인물들, 특히 그가 심혈을 기울여 부각시킨 근로 민중들의 형상은 대단히 진실하다. 그들의 고통과 수난, 염원 등 이 모든 것들은 깊은 감동을 준다.”(루쉰전魯迅傳왕스징 150p)

 

인상적인 내용은 작가 자신의 단발과 관련된 경험인 듯 보이는 서술이다. 단발을 비난했던 자들이 변발을 틀어 올리고 혁명에 앞장서는 것이다. 차마 변발을 자르지 못하고 틀어올리는 위선과 비겁함을 비판하고 있다. 여러 계층과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을 다각적 방향에서 여러 가지 주제로 바라보고 문제를 인식할 수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형제도에 대한 작가의 잡문이 있다. 죽는 순간까지 공포와 고통을 오랜 시간 동안 느끼게 하는 참형을 총살과 비교하는 글에는 루쉰의 인권 감수성을 볼 수 있다.

 

두 소설집에 담겨 있는 쿵이지, , 고향, 복을 비는 제사, 장명등, 조리돌리기, 까오 선생등은 봉건사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개혁을 실패한 채 비관에 빠져 비판만 일삼는 중국을 개탄하고 있다. 구습에 갇힌 구경꾼으로만 존재하는 군중의 냉혹함, 신분과 재산의 차이가 만들어낸 삶의 격차 등 봉건 제도의 부조리와 민중으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군중을 그리고 있다.

 

고향은 서정적이고 조리돌리기는 현실적이고, 복을 비는 제사는 깊은 교훈을 전한다. 매년 복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절기와 샹린댁의 죽음이 대비된다. 그녀의 불행한 삶은 그 시대 여성의 비참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복을 비는 입으로 불행한 여성을 향해서는 연민이 없는 냉정한 말과 태도를 보인다. 주지하고 있듯 타자를 향한 말은 죽음에 이르게도 한다.

 

그의 소설에 담겨 있는 비유와 상징, 그리고 그가 당시 중국에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는 데 루쉰전과 루쉰전집에 담겨있는 일기와 평론 등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는 소설뿐 아니라 잡문에 날카로운 비판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잘 담고 있다.


“‘무엇 때문에소설을 쓰게 되었는가를 말하라면 나는 여전히 10여 년 전의 계몽주의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반드시 인생을 위하여야 하고 또 그 인생을 개량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에 소설을 소일거리라고 하거나 예술을 위한 예술소일거리의 병적인 신식별명으로 부르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병적인 사회의 불행한 사람들 가운데서 제재를 많이 취하였는데 그 목적은 병의 원인을 드러내어 치료에 주의하도록 각성시키기 위해서였다.”(南腔北調集』 「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나)


 

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 패라

1925북경여자사범대학투쟁에서 교육당국에 대해 승리를 거두고 더 이상 물에 빠진 개를 때릴 필요가 없다는 저우쭈오런(周作人) 주장에 대해 한 말이다. 페어플레이는 뒤로 미루어야 한다라는 글에서 그는 사람들은 를 불쌍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참여했던 신해혁명의 실패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다.


개의 성질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 오늘날의 관료들과 지방신사나 외국신사들은 저희들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은 적화니 공산이니 하여 매도한다. 민국원년 이전에는 다소 달랐지만 처음에는 캉여우웨이(康有爲) 당이라고 하였고 후에는 혁명당이라고 하였으며 심한 경우에는 관청에 밀고까지 하였다.……그러나 마침내 혁명은 일어나고 말았다.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에 대하여)


혁명과 함께 새로운 풍조가 나타나고 새롭게 되는 과정 중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말고 그것들이 제멋대로 기어 올라오도록 내버려두었기에”, 민국2년 하반기 위엔스카이(遠世凱)를 도와 숱한 혁명가들을 물어 죽였다.”고 루쉰은 말한다.


신해혁명을 실패에 이르게 한 군벌 위안스카이의 칭제(稱帝)와 같은 반혁명적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의 글은 자신이 고백하듯 날카롭고 사정이 없다하지만 공정한 도리와 정의라는 미명으로, 도덕군자의 간판으로, 부드럽고 후한 체하는 가면으로, 유언비어와 공론을 무기로, 어물어물하면서 빙빙 돌리는 글로 자신의 배를 채우고, 세력도 문필도 없는 약자들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하는사람들이 있기에 붓을 멈출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신해혁명과 이후 혁명들의 실패로부터 얻은 이러한 깨달음들을 그의 일기와 잡문집, 소설에서 전한다. 미신과 구습의 노예가 되어 변하지 않는 군중, 사욕에 사로잡혀 추락하는 혁명가들, 허무와 무기력감에 사로잡혀 분열을 일으키는 지식인들을 상징과 비유의 언어에 담아 계몽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작가의 좌절감과 분노, 그럼에도 굽히지 않는 의지와 용기가 배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의 소설과 평론들은 이런 답답함과 분노의 감정이 짙다.

 

사람들이 과거의 오래된 습관으로부터 벗어나 변화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다. 혁명으로 큰 변화를 일으키고 민중을 깨울 것이라는 꿈은 곧 사위어 버린다. 루쉰은 그 원인을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구습, 적폐, 사욕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을 그는 물에 빠진 개로 비유하고 있다.


대선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루쉰의 글들은 새삼 많은 메시지로 다가왔다. 조금의 관대함도 없이 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인정으로 대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오래된 노신소설전집, 루쉰전, 노신문집』2,4권을 갖고 있다. 한겨레 출판 노신소설전집』인데 을유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을유의 노신소설전집』은 같은 번역자이지만, 말을 조금 더 부드럽게 다듬었다. 그런데 나에겐 거칠고 강한 표현들이 더 다가온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내가 겪고 있는 현재의 상황때문인가 싶다. 루쉰전』은 공동번역자인 신영복의 글체가 보인다.


루쉰 전집1-20권은 로망이다.

더구나 전집을 다 읽는다는 것은 꿈일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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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5-31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장 좋아하고 아파하는 소설인물..아Q..루쉰이여

그레이스 2025-05-31 22:29   좋아요 0 | URL
네, 아Q 마음아픈 인물이예요
루쉰의 삶을 읽고, 그의 일기나 시론을 읽으면 여러가지 감정들이 교차해요. 그에게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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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쇄가 떨어졌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던 나의 마음속에서 철커덕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이 소설은 이 장면으로 기억하게 될 듯하다. 형기를 마치고 유형지를 떠나던 날 그의 다리와 손을 연결해 묶고 있던 사슬을 푸는 장면!

나는 그것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들어 올려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것들이 내 발에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10년 동안 항상 몸에 붙어 있던 것이었음에도, 그에게서 떨어져 나온 그 물건은 그에게 생경한 외형과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족쇄 자체의 무게만이 아닌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들이 읽혀진다.

족쇄를 풀고 그것을 손으로 들어 올려 바라보는 이 행위는 유형 생활의 시작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화자의 마음속에서 되풀이되는 주제, 인간의 자유를 극적으로 나타내는 퍼포먼스다. 독자로서 이 마지막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白眉)라고 생각한다.


죽음의 집의 기록은 도스토옙스키의 자전적 소설이다. <페트라솁스키 서클>의 일원이었던 그는 내란음모죄로 체포된다. 이후 독방 수감, 신문, 재판, 가짜 처형, 유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경험들은 그의 소설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더구나 사형장에서 벌인 황제의 반인륜적 처형놀이는 그의 삶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는 군사재판정에서 시베리아 유형지 4년 징역과 사병복무 형을 언도받는다. 옴스크 수용소에서의 생활이 이 소설에 담겨있다. 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수용소 병원의 원장과 초소 위병들의 배려로 책을 읽고 쓸 수 있었다. 작가의 일기중 이 시기의 기록을 보면 당시 직접 경험한 많은 사건들과 감정이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에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1부 서론으로 시작한다. 서론에서 기록자(전달자)는 시베리아에서 만난 이주민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 고랸치코프의 수용소 일기를 선별하여 옮긴다고 밝히고 있다. 이 서론은 소설의 형식인 것이다. 다음 11장부터 화자는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다. 그는 살인죄로 10년 형을 살고 나와 시베리아에 정착해 살고 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소설 후반부로 가면서 화자(주인공)는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에서 작가 자신살인범에서 정치범으로 바뀐 듯 보인다. 이 현상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고 한다. 나는 작가가 경험한 4년의 수용소 기억이 그의 삶에 깊이 각인되어서 주인공을 타인으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도스트예프의 삶에서 이 경험이 그의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그의 작품의 방향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그가 불안정하고 불안한 심리, 특정한 상황에 대한 분노와 같은 부정적 심리를 갖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수용소의 풍경을 그리며,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이며,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반복하는 화자의 말은 인간 존재의 진실이라는 동의와 동시에 비참한 수용소 환경에 대한 역설로 다가온다. 부친 살해범, 아내를 죽이고도 자랑스럽게 떠벌이는 죄수, 쾌락을 위해 살인하는 사람, 굶어죽지 않으려고 살인한 죄수, 태어날 때부터 산적질이 생업이었던 공동체와 가족의 일원이었던 타타르족 소년 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같은 감옥에 갇혔다. 농노, 평민, 귀족 계급도 상관없다. 수용소는 그들의 변수와 차이를 없애버린다. 기결수와 미결수, 형기간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미결수란 아직 형 집행을 받지 않은 죄수를 말하는데 이때 형은 체형을 말한다. 몇 천대의 태형을 받은 죄수의 경우 몸이 견딜 수 있는 정도로 나누어 받는 동안 그는 형장과 수용소 병원을 오간다. 그 기간 동안 그 죄수가 겪게 될 불안과 공포는 가히 상상하기 어렵다. 형 집행 전날 자해나 폭력행위로 시간을 벌려는 시도에서 그 극단적 공포 심리를 읽을 수 있다.

 

그가 죄수로서 자유를 잃어버린 존재라는 분명한 가시적 이미지가 바로 족쇄다.

거의 손가락만 한 굵기의 철선 네 가닥을 서로 세 개의 고리로 연결시켜 놓은 것으로, 그것들은 바지 밑에 차게 되어 있었다. 혁대는 중간의 고리에 매게 되어 있어서, 이번에는 거꾸로 그것을 루바쉬까 셔츠 위에 직접 입는 허리 혁대에 고정시켜야 했다.”

처음 그것이 채워졌을 때의 무게, 소리, 불편함이 묘사된다.

 

그는 감옥 생활의 첫날부터 자유를 꿈꾸기 시작했다고 적는다. 봄이 오는 4월 노역을 나간 죄수들이 먼 들녘을 바라보며 어떤 초조함이나 충동적인 욕구를 강하게 느끼며 쉬는 한숨은 마음을 저릿하게 한다. “초원의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며 족쇄에 갇혀 있는, 시들어 가는 영혼을 달래 보려는 한숨이다.

 

목욕장에서 족쇄를 한 채로 옷을 벗는 화자의 어설픈 동작, 벗은 몸에도 여전히 족쇄를 차고 목욕하고 있는 죄수들의 모습들, 병원에서 폐병으로 죽어가는 죄수들의 깡마른 몸에도 족쇄에 채워져 있는 모습, 족쇄가 채워진 채 죽어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화자는 질문을 한다. “도대체 왜라고! 족쇄는 단지 탈주를 방지하기 위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족쇄란 하나의 수치심이며 굴욕이고 육체적, 정신적 부담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죽어 가는 자에게도 과연 형벌이 필요한 것인가?”라고 다시 묻는다. 수용소에는 인간 존재로서의 존중은 한 치도 고려되지 않는다.

 

대재기(大齋期, 러시아 정교에서 부활절 전 6주 동안의 근행기)가 끝날 무렵 죄수들이 조별로 교회에서 하는 재계(齋戒, 고백 미사와 영성체를 하는 러시아 정교 의례)의 장면은 도스토옙스키의 유형지 경험이 그의 삶에 일으킨 변화의 심리적 근원을 보게 된다. 죄의식!

 

사제가 두 손에 성배를 들고 < ……그러나 우리를 강도들처럼 여기소서>라고 기도서의 한 구절을 읽자, 모든 죄수들은 이것을 말 그대로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며, 족쇄를 절그럭거리면서 바닥에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강도, 살인죄로 이 곳에 족쇄를 절그럭거리면서 엎드리고 있지 않은가? 너무나 생생하게 그들이 죄수임을 각인시키는 시청각 효과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새 바뀌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나는 갑자기 이들 불행한 사람들을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곤 갑자기 마치 어떤 기적에 의해 내 가슴 속에서 모든 미움과 분노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걸으며 내 눈에 들어오는 얼굴들을 자세히 쳐다보았다.(작가의 일기도스토옙스키 75p)”

 

작가는 머리를 깎이고, 얼굴에 낙인이 찍힌죄수들에게서 유년시절 그에게 친절을 베풀던 농부 마레이를 떠올린다. 사형선고와 10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및 강제복무 이후 그는 심리· 철학·윤리·종교적 관점에서 인간과 민중의 문제에 천착하고 죄와 벌·악령·백치·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역작을 쓰게 된다. 그렇지만 나는 이 비인간적 경험을 겪은 그의 삶에, 주인공과 자신을 분리할 수 없는 감정에 연민을 느낀다.

 

얼마나 많은 젊음이 헛되이 매장되었으며, 여기서 얼마나 위대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버렸는가!”

형기를 마치는 날, 익숙해지고, 어찌할 수 없는 신체의 일부쯤으로 여길 정도가 되었던 족쇄가 풀어지고 낯선 그것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죄수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평소에는 아무 문제의식조차 갖지 못했던 제도, 관습, 프레임으로서의 관념들을 벗어나 그 억압의 무게를 깨닫는 순간이 온다. 진부한 질문인 듯 느껴지지만 내 인생의 족쇄는 무엇일까?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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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4-18 2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체코의 작곡가 레오슈 야나체크가 이 작품을 각색해서 그의 마지막 오페라 <죽은 자의 집에서>를 작곡합니다. 저도 상당히 비슷한 내용이지 않을까 짐작하고 읽었는데 많이 다르더라고요. 자기도 한 문장 한다, 생각하는 작곡가들이 대개 이렇습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5-04-18 21:01   좋아요 2 | URL
아!
이걸 어떻게 구현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많이 다르다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네요.

레삭매냐 2025-04-18 20: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전 도끼샘의 <카라마조프> 읽고
나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레이스 2025-04-18 21:04   좋아요 2 | URL
그 소설이 제일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종교적 내용이 많아서!
제겐 아직까지 <죄와 벌>이 최고입니다.
다시 읽어보면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페크pek0501 2025-04-30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어떤 것에도 익숙해지는 것 맞는 것 같습니다. 시체 바로 옆에서도 밥을 맛있게 먹더군요. (실제 경험을 쓴 책인데 요즘 제 기억력을 믿을 수 없어 책 제목은 언급하지 않겠음ㅋ)

그레이스 2025-04-30 12:25   좋아요 0 | URL
네 그런듯요.
ㅠㅠ
 


 

선고유예! 인간이 처한 상황이다. 카프카가 이 소설에서 말하는 인간의 부조리한 상황이다. 요제프 K는 선고를 받기 원하지만 판사도 만날 수 없고, 법정도 찾을 수 없다.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판별하는 예심 판사만 만났을 뿐이다. 법정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있지만 문지기가 막고 서있는 역설 역시 인간의 상황이다.

 

카프카의 소송에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없다. 주인공이 혼자 있는 어두운 공간에 갑자기 조명이 켜지듯 사람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문고리를 잡은 손 위에 어떤 손이 얹어져 있고 갑자기 시야가 넓어져 그 손의 주인을 의식한다. 마치 꿈을 기억하듯 불연속적인 장면들이 이어진다. 여기엔 어떤 인과관계도 설명도 없지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꿈과 현실의 경계 없음은 주인공 요제프 K 혹은 카프카의 꿈과 무의식을 수면위로 끌어올려 드러내고, 그의 억압과 실존의 문제들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존재하는 사회의 부조리들을 비판하면서 K의 꿈과 심리, 작가의 깊은 내면까지, 깊이 들어가며 여러 층위의 의미를 형성한다. 한 장면에서 다층적 해석을 하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의 뒤편에 자리 잡은 꿈과 같은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일상의 한가운데서 일어난다.

 

꿈과 같은혹은 신비한, 또는 환상적인이야기를 독자의 눈앞에 실재인 것으로 제시하고, 실재적인 수법을 사용해서 설명한다고 미하엘 뮐러는 프란츠 카프카-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낯선 자들이 이른 아침 갑자기 요제프 K를 찾아오고 소송과 체포를 선언한다. K는 이 상황에 전혀 놀라지 않는다. 마치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스치듯 언급하지만 그 소송은 다른 사람의 것인데 집행과정에서 잘못 전달된 것이다. 그럼에도 K는 오히려 먼저 예심판사를 찾아간다. 여기서 그 존재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죄의식을 상정하게 된다.

 

이렇듯 이 소설에는 그의 존재에 대한 의식과 거기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와 삶의 부조리를 의미하는 행위들과 사물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읽다가 무언가를 놓쳤다는 느낌을 받고 되돌아가 다시 생각하게 되는 지점들이 많다.

 

소송 사실을 통보받고 잠시 방 안에 홀로 있게 되었을 때 K가 침대 옆 탁자에서 집어먹는 예쁜 사과(17p)”는 선악과를 떠올리게 된다. 자신의 방이나 다른 공간이 아닌 하필이면 뷔르스트너 양의 방에서 낯선 자들에게 취조를 받는 것이나, 심문받기 위해 그 방의 한가운데로 옮겨진 그녀의 탁자(20p)”K의 성적 욕망 혹은 죄의식을 암시한다.

 

왜 이렇게 K에게서 억압된 욕망과 죄의식을 읽게 되는가? 라고 물으면서, 카프카의 삶을 소환하게 된다. 그가 믿든 안 믿든 유대교는 정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신앙적 전통은 그의 생활과 문화의 배경이 될 수밖에 없다. 유대교는 금지법과 죄를 해결하는 의식(儀式)의 종교다. 깨끗한가 부정한가, 죄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율법과 유전이 유대인들의 전통을 이루고 있다.

법정이 주거지 안에 위치하고, 화가의 화실 문을 열면 법원 사무처가 나타나는 장면은 이 신앙적 배경에서 기인된 작가의 심리를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K의 죄의식과 판결을 받으려는 시도들은 법정이 가까이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도무지 무죄이든 유죄이든 선고로 이어지지 못한다. 카프카의 해결 받지 못한 심리적 모순 상태와 더 나아가 인간의 부조리 상태를 보여준다. K가 법정을 찾아 지나가면서 어쩔 수 없이 우락부락하고 불량한 소년들(52p)”의 놀이를 방해하게 되었을 때, 그 소년들의 화난 얼굴들은 작가가 성장하지 못하고 묶여 있는 십대의 상처를 보게 된다.

카프카의 작품 선고에서는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죽음의 저주를 받은 뒤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함으로 그 판결을 실행해버리는 이야기는작가가 부친으로부터 받은 억압과 그로 인한 내적 갈등, 고통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부친의 이 선고로 아들이 자살하는 결론은 역으로 아들에게 있는 부친살해의 무의식적 욕망을 엿보게 된다. 카프카의 이런 무의식에 대한 예민한 포착은 죄의식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차라리 아들이 아버지의 선고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K가 심판을 받기 위해 법정을 찾고 변호사를 찾고 브로커를 찾는 상징적 행위의 의미다.

 

뷔르스트너 양에 대한 상상과 법원에서 만난 여자(72-73p), 변호사 비서, 화가를 따르는 소녀들의 모습에서 성적 욕망과 수치심을 엿본다.

 

카프카에게서 관청과 가족의 상황들은 다양하게 맞닿아 있다. ……관청과 소녀가 공통으로 지닌 가장 두드러진 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K소송에서 만나는 수줍은 소녀들처럼 모든 것에 자신을 내맡긴다는 점일 것이다. 이들 소녀들은 마치 침대에서 그렇게 하듯이 그들 가족의 품안에서 불륜에 몸을 맡긴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런 소녀들을 만난다. 그다음에 하는 일은 술집여자를 정복하는 일만큼이나 손쉬운 일이다.……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 창녀 같은 여자들이 한 번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카프카와 현대발터 벤야민 64p)”

 

그녀들이 아름답지 않게 보인다는 것은 그들의 처지나 법정의 부조리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억압되고 왜곡된 성적 욕망 때문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그러기에 누군가 엿보고 듣고 있다는 의식을 하고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소송을 당하고 예심판사 앞에서 변론은 했으나 선고는 유예된 상태에서 K는 판사를 만나기 위해 변호사와 브로커 화가를 만난다. 당시 법에서의 불의를 보게 된다. 화가는 판사들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림 배경에 그려져 있는 정의의 여신과 승리의 여신을 합쳐 놓은 이미지는 정의는 승자의 것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정의에는 중립이 없, "우리 안에, 저 깊숙이 살아 있는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듣기 바란다는 바티칸 추기경의 호소가 맥락 없이 떠오른다.

 

카프카는 선고유예 상태의 죄의식에 시달리는 인간 상황의 원인을 찾아갈 때, 그를 이런 상황에 빠뜨리는 원인을 저항할 수 없는 힘을 소유한 볼 수 없는 존재에서 찾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신이든, 해석의 권위를 가진 권력이든, 정신이든, 그를 대신하고 있는 부친이든!

 

환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하게까지 느껴지는 장면 중 하나가 성당에서 사제를 만나는 장면이다. 성당에서 홀로 있는 K의 시야에 갑작스럽게 신부가 등장하고 그는 자신을 교도소 신부라고 소개한다. 그 신부는 그에게 법 앞에 문지기(267-269p)” 이야기를 한다(이 내용은 작가가 법 앞에서라는 단편으로 먼저 발표한 작품이다). 법정으로 들어가려는 남자를 문지기가 막는다. 문지기는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한다. 문지기는 해석자 혹은 철학자 혹은 지도자이며, 신부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가 모르게 재판정이 열렸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집행장으로 끌려가는 그는 전혀 흔들림이 없다. 그가 끌려가는 채석장, 죽임을 당하는 방식 모두 유대교의 의식과 관련 있다는 생각이다. 숨을 거두기 직전 그는 개 같군!”이라고 말한다. 이유는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있을 것 같기(287p)” 때문이다. 결국 그의 질문은 해결 받지 못했다. 치욕은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니던 욕지기와 수치심과 관련 있을 것이다.

 

카프카의 반쯤 잠든 상태에서 찾아오는 환상들은 그의 글의 소재들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불면증으로 고통 받았고, 이런 꿈들을 꾸는 것을 괴로워했다고 한다. 꿈과 같은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일상의 중심에 놓아 독자로 하여금 아무 어색함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작가의 천재적인 재능에 감탄하게 된다. 불연속적이고 환상적이고 괴이한 장면들 속에서 주인공과 작가의 심연을 읽고, 그들이 찾는 답을 찾고, 여러 층위에서 해석을 한다. 그리고 작가가 드러낸 존재의 뒤편을 통해 나의 무의식 안에 침잠해 있을 억압과 상처 혹시 모를 내면 아이를 탐사한다.

 

10년 쯤 전, 지역 도서관에서 책 바꿔가기 행사를 했었다. 한 노부인이 그녀의 남편이 생전에 읽었던 책을 기증하면서, 계속 갖고 있으려 했지만 이제는 관리하기 어려워 내놓는다고 못내 아쉬워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녀가 내놓은 책들 중에 내 눈에 띈 책이 막스 브로트의 카프카 평전이었다. 이 책은 절판 상태였었다(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나온 나의 카프카역시 절판이다). 낡아서 누렇게 바랬지만 귀한 책이었기에 무조건 가져왔다. 그 날 하루 이 책을 다 읽었던 것 같다. 다 읽고 나서야 책 뒤쪽 헛지에 독서에 대한 단상이 흘림체로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적바림은 생을 형기(刑期)”라고, “옥중에서 구원을 기다림이라고 하고 있었다. 제일 마지막 줄에는 “84324〇〇로 가는 길, 터미널에서라고 적혀 있었다. 아직은 바람이 찬 터미널에서 카프카를 읽던 한 남자, 마지막 장을 넘기고 카프카의 삶에 대한 감회에 젖어 볼펜을 꺼내드는 그를 그려본다.

 

카프카 평전』 『변신』 『단편집은 카프카를 이해하는 일련의 독서였다. 그리고 소송』, 발터 벤야민의  『카프카와 현대』, 『프란츠 카프카은 그에게 깊이 들어가는 독서였다. 특별히 프란츠 카프카은 카프카의 꿈과 소설과의 연결을 이해하는 특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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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3-25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는 숫자가 맞나요?
84년? 대단하네요.
저는 몇년 전에 젊었을 때부터 모았던 책들을 팔아서 그렇게 오래된 책은 없습니다. 카프카 평전 겨우겨우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내용은 기억에 없습니다. 😂

그레이스 2025-03-25 10:49   좋아요 1 | URL

그래서 더 감상에 젖게 돼요.
돌아가신 분의 유품과 감상이어서,,, 평전이 더욱 다가왔던듯요.

고양이라디오 2025-03-25 1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카프카가 여전히 읽기 어려워요ㅠ <성>, <소송> 모두 몇 번씩 도전했는데 완독을 못했네요.

그래도 <변신>이랑 단편집은 읽었습니다ㅎ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시 카프카가 읽어보고 싶네요.

그레이스 2025-03-25 11:22   좋아요 1 | URL
쉽지는 않죠
미완성이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막바지 퇴고와 탈고를 거치지 않은 원고인듯요
그래서 막스 브로트가 초판본출간할때 순서를 변경하고 편집을 했다 해서 비판을 받았고, 다시 후에 원고의 원래 순서대로 출간했다고 하더군요.^^

제 경우 <프란츠 카프카-꿈>이 도움이 됐습니다.
추천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25-03-25 12:59   좋아요 1 | URL
<프란츠 카프카-꿈>! 카프카와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을 먼저 보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5-03-26 2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할아버지네요~!! 84년이라니~~
카프카는 그냥 읽는것보다 평전이랑 같이 읽는게 좋을거 같아요. 카프카<소송>, <성>은 이해하기 힘들더라구요 ㅜㅜ 꿈이 핵심 키워드군요~!

그레이스 2025-03-26 21:04   좋아요 1 | URL
네! 멋지시죠!
이건 말 안하려고 했는데,,, ^^
그 노부인이 사별하신 남편을 교수님이라고 부르신걸로 보아, 강단에 서셨던 분으로 추측합니다.

초란공 2025-03-26 2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4년 3월 24일... 딱 이맘때네요.. 산수유 피고, 진달래 개나리 피기 시작하는 시기.. 터미널에서 차를 기다리시는 청년(?)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레이스 2025-03-26 21:13   좋아요 1 | URL
3,40대였을 듯 한데,,, 청년이죠^^
예 그러네요
3월 24일

초란공 2025-03-26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 KBS 다큐에 나온 새한 서점 이야기가 감상에 젖어요. 학창시절에 서점이 서울에 있을 때 잠시 일했던 헌책방이었는데, 단양으로 이사 가셔서 숲 속에 책방을 열었는데요, 지난 12월에 화재로 책 60%가 소실되었거든요. 어제 다큐멘터리를 보고 사장님 나이드신 모습을 보고 짠했습니다. 텀블* 펀딩이라도 참여해야겠어요.

그레이스 2025-03-26 21:17   좋아요 1 | URL
아!
마음이 아픕니다.

(화재 이야기 들으니,,, 경남 산불이 저절로 떠오르네요
제발 빨리 진화되길 ... 저절로 기도가 나옵니다!)

페크pek0501 2025-03-27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카프카의 변신만 대단한 게 아니라 소송을 오디오로 듣고 쇼킹했죠. 낯설음과 생소함이 느껴졌어요.
판결, 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는 내용인데 결국 아들이 강에 뛰어드는 걸로 끝나죠. 이것도 쇼킹했어요.^^

그레이스 2025-03-27 22:17   좋아요 1 | URL

저도 충격이었어요
그런데,,, 변신도 그렇고 판결도 그렇고 우화나 자살 모두 같은 심리의 근원을 보게 되더라구요.

전야제 2025-03-27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의에는 중립이 없다, 우리 안에 저 깊숙히 살아있는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듣기를 바란다...는 추기경님의 말씀과 카프카의 <소송>이 연결되는 흐름에 반해버렸습니다ㅎㅎ
유흥식 추기경님의 말씀 맞지요? 좋은 구절이라서 찾아보았는데 글에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한 중고책을 이어받으신 추억이 평생 남을 것 같아 부럽습니다.
누군가가 마음을 쏟으며 읽었던 책은 지니는 것만으로도 풍족한 느낌이라 저도 그런 중고책을 만날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ㅎㅎ

그 적바림은 생을 “형기(刑期)”라고, “옥중에서 구원을 기다림”이라고 하고 있었다.
이 문장이 글을 다 읽고도 마음에 강한 여운으로 남아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5-03-27 22:23   좋아요 0 | URL
예!
소송과 선고까지의 과정 중 부조리를 보다 보니 자연스레 그 추기경님의 헌재에 호소한 말씀이 생각나더군요.

저도 보물을 찾은 듯 했습니다

페넬로페 2025-03-27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때 카프카를 꽤 읽었는데 오랫동안 다시 읽지 않은 것 같아요.
읽으면 너무 허무해서~~

그레이스 2025-03-27 22:16   좋아요 1 | URL
그렇긴 하죠
실존주의가 허무주의와 맞닿아 있긴 하죠.
사실 카프카는 제 안의 심리를 들여다보게 돼요
오늘 <실종자>가 배달됐습니다
 

한강의 소설을 읽으면 숨을 멈추고 모든 삶의 행위들을 생각하게 된다. 뻗었던 팔을 안으로 거두게 되고, 함부로 걷던 걸음의 보폭을 줄이게 되고, 말의 단어들을 고르게 된다. 나는 얼마나 주변인들 혹은 타인들에게 폭력적인 삶을 살아왔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호흡을 안으로 들이마시고, 발가락을 오므리고 전신을 움츠리는 자신을 상상한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손을 내밀어 빗물에 손을 적시던 두 부부. 아파트가 답답해서 살 수 없다고 하는 아내의 우울질의 피가 흐르는 깡마른 몸뚱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내 여자의 열매24p)”, 남편은 두 손에 가득 받고 있던 빗물을 아내의 얼굴에 끼얹으며 짜증을 낸다.

 

오래전 지인에게 들었던 에피소드가 기억났다. 대학생인 딸아이와 가볍게 언쟁을 하던 아빠가 손가락으로 말고 있던 쌀알크기의 휴지조각을 던지고 일어났는데, 그게 우연히 딸의 머리에 맞았고, 화가 난 아이를 달래느라 오래 걸렸다고 했다. 쌀알 만 한 휴지조각이고 겨냥한 것도 아니었다고 변명하는 남편에게 돌을 들고 있었으면 어쩔 뻔 했냐고 했다는 지인의 말에 웃으면서, 딸이 서운했던 것은 그 휴지조각이 아파서가 아니라 그 서슬에 담겨있는 분노와 행위의 폭력성 때문이란 생각을 했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말라가고 온 몸에 멍이 들어가던 아내는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어버린다. 남편은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식물을 돌본다. 식물이 시들고 열매를 화분에 심으며, 봄이 오면, 아내가 다시 돋아날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단편의 가장 인상적이었던 베란다 사건은 인간의 작고 무심한 동작 하나에도 마음에 켜켜이 쌓여 있던 분노를 담을 수 있으며,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내 여자의 열매채식주의자로 나아가는 발걸음처럼 보인다. 이 단편이 미완성이라든가 습작처럼 보인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폭력성과 거부하는 심리가 채식주의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한강의 작품들은 노벨위원회 강연에서 밝힌 것처럼 몇 개의 질문들로 연결되어 있다. 작가는 채식주의자를 쓰는 동안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 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의 질문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채식주의자에서 가장 먼저 기억나는 장면은 정육점 앞을 지날 때 침이 고이는 입을 틀어막고 지나가는 영혜의 꿈이다.

 

입 안에 침이 고여. 정육점 앞을 지날 때 나는 입을 막아. 혀뿌리부터 차올라 입술을 적시는 침 때문에. 입술 사이로 새어나와 흘러내리려는 침 때문에.(채식주의자42p)

 

그녀의 반복되는 악몽들은 어린 시절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개에 물리고, 아버지가 그 개를 잔인하게 죽이고, 개고기를 먹었던 누린내의 기억에서 그 꿈은 생겨났다. 불고기를 먹던 남편이 칼 조각을 입에서 뱉어낸 사건은 영혜가 일련의 꿈을 꾸게 된 트리거가 되었다. 아마도 그 칼 조각은 영혜 안에 있는 폭력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살인의 꿈, 피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꿈은 어린 시절 먹었던 개고기가 명치에 걸려 있는 것 같은 절망감과 연결되어 있다. 영혜가 육식과 섭식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폭력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영혜는 인간 종이길 거부하고 식물이 되고자 한다. 그 결과는 죽음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육식의 종말에서 먹는 행위는 에로스(eros, 성적충동)만큼이나 타나토스(thanatos, 죽음의 충동)과 관련이 있고, 생명만큼이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특히 육식은 도살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몽고반점에서 영해의 형부인 화자는 성적 충동과 예술가의 양심이 대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몽고반점으로 촉발된 욕망은 예술가의 것일까? 하는 질문이 남는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를 향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예술가의 것이라면, 예술이라는 행위 안에 있는 폭력성을 구별하는 경계가 모호한 까닭에 더욱 많은 폭력이 생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먹어라. 애비 말 듣고 먹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채식주의자50p)”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영혜를 향해 하는 아버지의 눈물 나는 애원은 다음에 이어지는 행동에 의해 폭력적이라는 것이 더욱 극적으로 폭로된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과 함께 우리는 타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가해를 하는가?

 

영혜와 언니는 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견디고, 그 시간은 두 사람에게 다른 모양의 흉터를 남겼다. 여전히 그녀들에게 고통은 진행형이다. 영혜가 입원해 있는 지방 병원을 찾아간 언니는 죄의식을 느낀다. 유독 아버지의 손찌검의 대상이었던 영혜는 자매가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그냥 돌아가지 말자고 했다. 산길을 내려와 경운기를 얻어 타고 집을 향하던 길에 저녁 빛에 불타던 미루나무를 말없이 바라보던 영혜를 떠올린다.(192p) 영혜의 고통을 모른 척 했던 것은 그때도 지금도 자신 역시 고통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그녀는 영혜를 실은 앰뷸런스 안에서 창밖으로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다.(221p) 영혜가 바라보던 풍경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희망을 남겨두었다고 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불평등을 외면했었던가, 요구 받은 정의를 얼마나 많이 회피했던가를 생각했다.

 

우리 안에는 원래부터 폭력이 내재 되어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폭력 아래 놓여 있고, 폭력을 습득하고, 행사하는가를 생각한다. 폭력적인 행동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상대방을 제압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문을 쾅 닫고, 서류를 사납게 낚아채고, 볼펜을 탁탁 거린다. 내뱉는 단어, 휘젓는 손짓은 누군가를 멍들게 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화자의 아내는 식물이 되기 전 온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든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지가 나오고 점점 나무로 변해간다. 그녀를 멍들게 하는 것은 도시의 주거 형태의 폭력성과 그녀가 추구하는 삶에 무심한 반려라는 이름의 타자, 그리고 짜증 섞인 말과 행동들이다


범죄와 테러 행위, 사회 폭동, 국제 분쟁 같은 직접적이며 주관적폭력은 가장 가시적인 일부에 불과하다.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인 폭력과 사회체제가 작동할 때 나타나는 구조적인 객관적 폭력이 존재한다고 지젝은 말한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지속적으로 이런 폭력을 행사하게 됨을 의미한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라고 한 한강의 질문에 대한 답은 나왔다고 생각한다.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 답으로서 인간 종이길 거부했던 영혜에게는 죽음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재되어 있었든 학습된 것이든 내면에 가득 찬 폭력을 해결하는 길은 두 사람이 앰뷸런스를 타고 가는 나무 불꽃의 마지막 장면에 있다는 생각이다. 나무 불꽃은 유년시절의 영혜가 바라보던 풍경이고, 이제 영혜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려하는 언니가 바라보는 풍경이다. 세계와 인간의 내면에 가득 찬 폭력을 밀어내고 관심과 배려와 사랑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초판본 표지는 에곤 실레의 <네 그루의 나무>가 담겨 있다. 그는 날카로운 선들로 야위고 핍진(乏盡)한 자화상과 피멍 투성이의 육체를 그렸던 화가다. 노을진 하늘과 땅, 나무들조차 병든 육체의 멍을 떠올리게 하는 검푸른 점과 선들이 섞여 있다. 사랑이 육체에 남긴 폭력적 질병과 죽음의 트라우마를 지닌 화가의 그림이다. 그러나 사랑에서 희망을 찾은 화가의 삶과 작가의 질문들이 겹쳐진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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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2-08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여자의 열매가 그런 의미였군요 ㅋ 한강작가님의 폭력성에 대한 묘사는 너무 강렬한거 같아요 그래서 더 공감이 된다는~!!

그레이스 2025-02-08 18:52   좋아요 2 | URL

단편을 읽으면 다른 작품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데, 폭력, 빛 등의 주제들인듯요.
맞아요 공감!

stella.K 2025-02-08 18: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는데 좀 당혹스러운 작품이란 생각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해 주시니 일견 그렇구나 싶은데 아마 저는 채식주의자 이후 다른 작품을 읽을 수 있을까 회의스럽더군요.ㅠ

그레이스 2025-02-13 12:14   좋아요 1 | URL
저의 경우, 노벨위원회 강연과 관련해서 읽으니 더욱 선명해져요.
작가가 자신의 몸을 도구로 해서 글을 쓰고, 혼이라는 존재를 통해 풀어가서 불편한게 아닌가 했어요.
사실 채식주의자는 이번이 세번째인데,,, 처음엔 저도 불편했어요.^^

2rjfnr 2025-02-09 0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블로그 글에서 한강 작가의 .책들을 읽고. 한동안 마음이 너무 가라앉고 착잡했다고 하는 글을 봤는데 ᆢ ᆢ 이해가 간다는 생각이 드너요 ~~!!

그레이스 2025-02-09 10:19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흰> 정도 가면 조금 밝아지긴 해요
조금요^^
뭔가 희망적 메시지가 보이는...!

페크pek0501 2025-02-13 1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채식주의자를 읽고서 한동안 고기가 싫더군요. 인간은 폭력이 폭력인지 모르고 행사할 때가 있어요.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육식도 죽여서 먹고 생선도 죽여서 먹는데 식물처럼 남을 해치지 않고 그저 햇볕과 비, 만으로도 살 수 있으니 식물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동생을 끝까지 돌보는 언니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봤습니다.^^

stella.K 2025-02-13 12:08   좋아요 2 | URL
그게 그뜻일 수도 있겠군요. 전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괜히 광합성이나 생각하고. 내내 멍하기만 하더군요. 😂

그레이스 2025-02-13 12:13   좋아요 2 | URL
ㅎㅎ
식물이 폭력적이지 않으니까요.
경작문화보다 육식, 수렵문화가 더욱 남성위주이고 폭력적이라고 하죠?!
<내여자의 열매>에서는 여자의 몸에 든 멍에서 가지가 나오고 잎이 나는 걸 보며, 그 상징성 때문에 감탄했어요.
다프네를 떠올리기도 했구요.^^

2025-02-14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4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4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4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