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회화 초상화론에 '전신사조(傳神寫照)'라는 말이 있다.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외형 묘사뿐 아니라 인격과 내면세계까지 표출해야 한다(한민족대백과사전)”는 뜻이다. 동진(東晋)의 인물화가 고개지(顧愷之)가 처음 사용한 말이라고 한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화가의 고민은 같은 지점에서 만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서 단토는『무엇이 예술인가』에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개념에 관하여 설명하며 1831년에 발표된 미지의 걸작을 예로 들고 있다. 대가 프렌호퍼가 화가 포르뷔스의 그림을 보며 평하는 장면이다.

 

자네의 성녀를 보게, 포르뷔스. 처음 보면 성녀는 근사해 보이네. 하지만 두 번째 보면 그녀가 그림의 배경에 달라붙어 있어 그녀의 육체를 둘러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네. 이것은 단 하나의 면만을 가진 실루엣이고, 절단된 외양이며, 뒤돌려 볼 수도, 위치를 바꿀 수도 없는 이미지일 뿐이야. 이 팔과 그림의 바탕 사이에 공기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가 없네. 공간과 깊이가 부족하기 때문이지. 물론, 투시법상으로 모든 게 좋아. 대기원근법도 정확히 지켜지고 있고. 하지만 그토록 칭찬할 만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아름다운 육체가 따뜻한 생명의 숨결을 받아 생기를 띠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네.(미지의 걸작78p)”

 

대가 프렌호퍼는 포르뷔스의 이집트의 마리아가 생명이 없는 이유는 그가 데생과 색채 사이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푸생과 루벤스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엄밀한 냉정함과 눈부신 격정, 엄격함과 풍요로움 사이에서의 선택은 세잔 이후 화가들에게서 반복되는 것이다. 프렌호퍼의 모델이 누구일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추측을 하지만 한 예술가를 꼽기에는 복합적이다.

 

단토는 프렌호퍼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포르뷔스의 작품에 몇 번의 붓질을 하여 그림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장면에서 이 생명은 정신의 개념을 의미한다고 한다. 세잔으로부터 입체주의와 현대의 호크니, 고흐로부터 표현주의, 마티스로부터 로스코에 이르기까지 많은 화가들의 반복되는 작업과 실험을 통해 얻으려 했던 것은 무엇이 예술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답일 것이다. 노화가 프렌호퍼의 작업과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뒤에 올 화가들이 수없는 붓질을 통해 찾은 답이라고 할 수 있다.

 

미지의 걸작에는 이제 막 자신만의 화법을 찾아가고 있는 푸생과 오랜 기간 그림을 그려왔고 어느 정도 명성은 얻었지만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포르뷔스와 대가(大家) 프렌호퍼가 등장한다. 푸생에게 비친 프렌호퍼는 예술가의 본성에 대한 완벽한 이미지였다. 그의 천재성과 광기는 악마적인 어떤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포르뷔스와 푸생은 프렌호퍼의 작업실에 초대되고 그의 작업과 작품을 엿볼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프렌호퍼의 완성하지 못한 작품에 대해 알게 된다. 프렌호퍼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작품의 모델을 찾지 못한 까닭이다.

 

연인 질레트에게 노화가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푸생과 자신의 화폭에 그려진 여인을 보여주는 것은 끔찍한 매춘이라고 하는 프렌호퍼의 생각은 대비(對比)를 이룬다. 프렌호퍼의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피그말리온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그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여자야! 나와 함께 울고, 웃고,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여자이지. 자네는 내가 십 년 동안의 행복을 외투를 내던지듯 갑자기 버리길 바라나? 갑자기 내가 아버지이자, 연인이자, 신이 되는 것을 그만두기를 바라나? 이 여자는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나의 창조물이야.(116p)”

 

질레트를 모델로 프렌호퍼는 작품을 완성하고 완성된 작품을 감상하는 푸생과 포르뷔스는 처음에는 그 화면에서 혼란스럽게 쌓인 색깔들만 보이고 여인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한 구석에서 벗은 발의 끝부분을 찾고, “그 발은 색깔과 색조, 불분명한 농담(濃淡)들의 카오스로부터, 즉 형태 없는 안개 같은 것으로부터 삐져나와(미지의 걸작128p)” 있는 것을 본다. 두 화가는 프렌호퍼의 도취 상태를 모호하게나마 납득하기 시작한다.

 

내 작업을 주의 깊게 살펴보게. 모사와 윤곽선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 내가 자네에게 얘기했던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걸세. 가슴의 빛을 보게. 어떻게 내가 아주 두텁게 칠한 일련의 터치들과 하이라이트들로 진정한 빛을 획득하였는지, 또 어떻게 그 빛을 밝은 색조의 반짝이는 흰색과 결함시킬 수 있었는지 보게나. 그리고 어떻게 상반되는 작업을 통해 돌출 부분과 물감의 우둘투둘함을 지우면서 반-농담에 잠긴 내 인물의 윤곽을 공들여 다듬었는지, 그 결과 어떻게 데생의 인위적 수단의 개념까지 없애버리고 인물에게 실물 그 자체의 모습과 둥근 형태를 줄 수 있었는지 살펴보게.( 129p)”

 

자신의 작품을 알아보지 못하는 포르뷔스에게 하는 프렌호퍼의 설명은 가까이는 인상파의 그림을, 더 나아가 세잔으로부터 시작된 야수파와 입체파, 현대미술의 도래를 예언하는 듯이 보여 놀랍다. 이 설명을 듣고 푸생이 그는 화가라기 보다 시인이라고 한 말과 지상에서 우리 예술이 끝나는 군(미지의 걸작129p)”이라고 한 포르뷔스의 말은 개념미술과 아서 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을 떠올리게 한다.

 

발자크가 어떻게 이런 것을 알고 작품에서 구현했느냐고 질문한다면, 나는 그가 미술을 완전히 알고 전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작품이 쓰여진 시대 이전 푸생과 루벤스의 논쟁을 통해 예술가들의 고민과 그 갈등이 가리키는 예술의 방향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푸생을 사랑하기에 프렌호퍼 앞에 선 질레트를 묘사하는 단어들이 독자인 나를 당혹스럽고 불편하게 한다. “강도들에게 유괴당해 노예 상인 앞에 끌려온 순진하고 겁먹은 조지아 처녀처럼, 순수하고 꾸밈없는 태도”, “수줍어하는 듯한 홍조” “눈을 내리깔았고. 힘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두 손을 허리 곁에 늘어뜨렸다. 그리고 그녀의 수치심에 가해진 폭력에 저항하는 듯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미지의 걸작121p)” 그런 그녀를 보고 프렌호퍼는 놀라고, 푸생은 아름다운 보물을 그의 창고에서 꺼낸 것에 절망하고 스스로를 저주했다, 아연해질 수밖에 없다.

 

프렌호퍼의 작품 안에서 찾아낸 조형을 바라보고 감탄하던 푸생은 구석에서 잊고 있던 질레트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질레트는 푸생을 경멸한고 증오하고 있다고 울부짖는다. 화폭을 바라보는 푸생을 보며 자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고 깨닫고 절망하는 질레트는 당시 화가들의 모델이었던 여성들의 소외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누드모델의 감독은 이 지점에서 사유를 확장시켰을 거라 생각된다. 원하는 포즈을 요구하는 노화가에게 내가 찾겠어요라고 하는 마리안의 대응은 발자크의 질레트로부터 더 나아간 것이다.

 

노화가가 요구한 포즈, 거기에 자신의 창조물인 여성의 이미지, 그 화가의 정신이 있다. 그 포즈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그리고 마네의 <올랭피아>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몸과 자세에 대한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한다. <비너스의 탄생>베누스 푸디카는 정숙한 여인의 자세로 여겨졌다. 그녀가 서있는 조가비가 사라지게 되면서 바닷가에 누워있는 비너스를 그리게 되고, 그것은 다시 <우르비노의 비너스><올랭피아>와 같은 변화된 이미지들을 생산해냈다.

 

시선의 불평등에서 특별히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여성에게 강요된 비현실적인 미의 기준들과 성적이 성숙에 대한 억압이 지속적으로 미친 영향에 대해 논리를 전개한다. 미술과 주류 이미지에서 비너스의 몸은 오랫동안 인간의 성과 욕망을 탐구하는 합리적인 틀이고 보이지 않는 규범(시선의 불평등59p)”이 되었다. 성적 욕망을 보편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선택되었고, 남성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만들어졌다. 누드 작품에서의 여성의 포즈, 배경에 그려진 사물들이 지시하는 의미들은 오랫동안 여성에게 폭력적이었다.

 

발자크의 작품을 볼 때마다 에필로그가 달려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이것은 그가 인쇄소까지 쫓아가서 그 자리에서 고쳤다는 작품에 대한 조바심이 습관의 결과물이 아니가 생각한다. 아직 발자크에게는 자신이 낳은 작품을 독자에게 맡기는 자유로움과 성숙함이 없었을까?

 

미지의 걸작의 첫 번째 버전(프렌호퍼 선생)은 질레트의 울부짖음으로 끝났었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뒤에 내용이 덧붙여졌다. 노화가와 작품의 마지막에 관한 내용이다. 이제까지 읽었던 발자크의 에필로그나 추가된 부분 중에 가장 맘에 들지 않는 내용이다. 처음의 엔딩이라면 질레트에게 시선이 모아지게 될 것이다. 발자크는 노()화가와 그의 걸작에 시선을 두고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 역시 시대의 감옥에 갇혀있던 작가이다.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1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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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다른 분들이 왜 김홍도에 관한 이런 책을 못내는지 알것 같다. 조선 미술사에서 김홍도 챕터는 대부분 이 책을 인용하고 있는듯. 상세하고 도판이 충분히 담겨있어 이 화가를 공부하기엔 아주 좋은 텍스트다. 다시 출간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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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7-01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몇년 전에 오주석님 ‘한국의 미 특강‘이랑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읽었는데 참 좋았던 기억입니다. 김홍도는 이 책이 찐이군요! 절판이라니 안타까워요.. ㅠ

그레이스 2024-07-01 18:26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한국미술사 공부하면서 중고책으로 샀어요 ^^
 

메르카데는 투기자다. 주식 가격이 떨어졌을 때 사뒀다가 오르기 시작하면 매입자를 속여 되팔아 넘기는 수법으로 돈을 번다. 그의 투기 형태는 오늘날 금융자본주의의 모습과 닮았다. 자신의 경제 상황과 사업 능력을 포장하고 은행과 채권자에게서 끌어온 자본으로 거대한 투기장에서 이익과 자리를 획득한다

 

메르카데 : ……오늘날 하나의 주식은그 실체가 보이지 않더라도 당장 수익이 보장되는 종목이라면 할 만한 거야! 사람들은 미래를 팔아, 불가능한 행운의 꿈을 복권으로 팔 듯이. 그러니까 증권 시장 회합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날 도와주게, 거기서 그 꽉 막힌 속을 뚫어 보세! 이보게,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은 아주 어렵게 그걸 찾아내, 하지만 노리지 못하면 결코 찾지 못한다네.(194p)”


그가 하는 투기는 현대의 프로젝트 파이낸싱(PFProject Financing)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오늘날에는 그것이 법으로 보호되고, 더 규모가 크고계획적이며, 실물이 아닌 보이지 않는 금융 경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PF는 사업의 미래 가치만으로 수천억원의 자금을 모을 수 있다. 이것이 메르카데의 시대로부터 자본주의가 발전해온 방향이다.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윤리적인 문제를 발견하게 되는 경계들이 존재한다. 메르카데의 시대와 달리 오늘날에는 법과 윤리의 경계들이 서로 별개인 것처럼 보인다.

 

메르카데는 채권자들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다그의 파산에 대한 주변인들의 반응과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드 라 브리브와 딸 쥘리를 결혼시키려는 그의 계획은 그 사회의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돈의 권력을 보여준다. 가부장적 계급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나타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의 결혼은 돈의 힘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문명 뒤에 감춰진 야만성이다.

 

셰익스피어는 아테네의 타이먼에서 돈은 검은 것을 희게, 추한 것을 아름답게, 늙은 것을 젊게만들고, 심지어 문둥병조차 사랑스러워 보이도록만들며, “늙은 과부에게도 젊은 청혼자들이 오게 만든다(아테네의 타이먼43)”고 말한다. 돈의 능력을 저주한 타이먼의 말을 인용하며 맑스는 화폐의 본질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고병권은 화폐, 마법의 사중주에서 이것을 인용하면서 사람들의 돈에 대한 예속을 말한다.


메르카데와 그의 친구들은 고도가 다시 돌아오면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 믿고 기다린다. 고도는 메르카데의 동업자였다. 그는 도망치듯 떠났다. 그후 메르카데는 고도로 인해 이익을 보기도 했다. 그들의 기다림은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메르카데는 고도는 전설에 불과하고 허구”, “유령이라고 말하기도 한다.(248p) 고도는 갑작스럽게 돌아왔다. 그를 본 사람들은 없지만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어서 돌아왔다. 고도의 귀향은 그들의 상황을 회복시킨다.

 

한편, 고도는 직접 등장하지 않음으로 이 소설에서 다중적인 상징을 갖고 있다. 고도는 자본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권력)이다. 투기를 하는 그들에게 호황과 불황을 가져오는 알 수 없는 무엇이다. 그 부침은 고도의 도주와 귀향처럼 갑작스럽다. 고도는 캘커타에서 돌아왔다. 이것은 당시 유럽이 식민지로부터 배를 불리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발자크의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발자크는 메르카데의 가정과 그의 딸 쥘리와 가난한 아돌프의 사랑 이야기를 배경으로 당시 프랑스 사회의 자본주의를 그려가고 있다.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이들처럼 돈이라는 큰 권력 앞에서 굴복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힘은 자본주의이다. 또한 메르카데를 속이고 정략결혼을 하려는 드 리 브리브의 욕망은 돈과 언론과 정치가 한몸처럼 묶여 있는 시대의 부조리를 시사하고 있다.


곱세크는 고리대금업자다. 화자는 곱세크의 소송대리인으로서 목격하고 경험했던 것들을 이야기한다. 곱세크와 고리오 영감』에서 드 레스토 백작의 가정사를 다루고 있다. 곱세크에게 돈을 빌리는 백작부인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서 담보로 취한 물건들로 방을 가득 채우고 죽어간 곱세크와 같은 인간이 있다. 두 유형 모두 돈의 지배를 받는다. 돈은 그 사람들의 욕망, 거짓을 드러내어 파괴하고 냄새를 풍기게 한다. 발자크의 인간희극에 등장하는 당시 모든 인물들이 겪는 문제들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


화폐에 새겨진 숫자의 가치를 믿는 믿음, 오늘날로 말하면 통장에 적혀진 숫자와 마그네틱 카드를 판독기에 넣음으로 지불했다는 믿음은 이상하고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린 이 믿음만으로 무엇을 지불하기도 하고, 내게 이만큼의 재산이 있다고 생각한다. 밀튼 프리드먼은 모든 화폐제도는 어떤 점에서 본다면 하나의 허구에 불과한 것을 서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듯 그 허구는 쉽게 깨지지는 않는다.

 

화폐는 일종의 허구이다. 왜 우리는 그런 허구적 존재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가. 왜 우리는 삶의 조건으로서 그런 허구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가. 무엇보다도 왜 우리는 그런 허구적 존재에 지배받고 있는가.(화폐, 마법의 사중주고병권 23p)“

 

어쩌면 우리는 모두 사기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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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06-17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의 곱세크, 빌려서 결국
못 다 읽고 반납한 기억이...

비트코인이 허구라는 건 확실
히 알겠는데...
말씀해 주신 대로 통장에 숫자
로 기록된 무언가가 자신의
자산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해봅니
다.

그레이스 2024-06-17 13:09   좋아요 1 | URL
^^
그때나 지금이나 돈은 우상이고 고도와 같이 보이지 않는 무엇,,,,
우리는 그것에 사기를 당하기도, 스스로 사기꾼이 되기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곱세크는 스크루지를 연상하게 해요!
 
부닌 단편선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29
이반 부닌 지음, 이상철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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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자체가 러시아어라는 사실만 알아볼 정도로 러시아어에 문맹이다. 아마도 남편이 들여왔을 이 손바닥 보다 작은 책이 러시아어로 된 시집이라는 짐작만 했다. 장식품으로 놓여있던 책의 표지에 우연히 스마트폰 번역기 화면을 갖다 대고서야 И. Бунин이 이반부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집의 제목 Холодная весна』차가운 봄이라고 번역된다. 곧 이 시집의 위치는 몇 안 되는 이반 부닌의 작품들 곁으로 정해졌다. 사실 작품들이라고 말했지만 부닌 단편선아르세니예프의 인생두 권뿐이다. 그 외에는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 없기도 하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은 마음으로 부닌 단편선을 뽑아 읽게 된 나의 사정은 잊었다. 부닌의 명징한 글에 사로잡혔고 복잡한 마음이 깨끗하게 씻기는 느낌이었다. 이 단편들의 과거의 지나간 사랑을 기억하는 화자의 이야기는 그렇게 맑고 간결하지는 않다. 그런 이야기를 작가는 시리게 아름답고 깨끗한 문장으로 전달하고 있다. 러시아라는 배경이 주는 정서도 있을 것이다. 또한 기억 속에 남은 것은 다른 부수적이고 복잡한 사건들이 희미해져 사라진 한 줄기의 선명한 느낌일 테다.

 

이 책은 원래 첫 번째에 위치한 소설의 제목 어두운 가로수길로 출간되었던 단편집에서 선별 수록한 책이라고 한다. 한 가지 주제로 연결되어있는 옴니버스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부닌 단편집의 주제는 지나간 사랑을 기억함이라고 해야 할까? 기억하는 화자들의 생각에 달려있고, 기억하지 않으면 그것은 글이 될 수 없기에 지나간 사랑보다는 지나간 사랑을 기억함이라고 하고 싶다. 어떻게 기억하는가는 화자의 사회, 종교, 문화적 배경과 개인의 상황에 좌우되겠지. 그 총합이 작가의 사유일테고.

 

수록되어있는 작품의 화자들은 대부분 남성이고 상류층이다. 한 작품만이 주인공인 여성의 삶과 사랑을 되짚어 간다. 남자들이 젊은 시절 사랑한 여인들은 대부분 하녀, 농민의 딸, 가난한 집 출신들이다. 그들은 신분의 격차, 아버지, 정착하지 못하는 불안한 삶 때문에 그녀들을 떠날 수밖에 없다. 여인들은 남겨진다. 이후 그녀들의 실존적 삶이 불행했음이 당연하지만 화자(혹은 주인공)의 기억만 존재할 뿐이다. 몇 편의 작품에서 해후가 이루어지지만 그녀들의 삶은 발화되지 않기에 남성의 회환만이 남는다. 그 회환은 시적이고 사랑의 기억은 아름답다.

 

인생의 어느 시점을 되돌아보며 그 순간의 선택이 달랐다면 하고 생각한다. 어두운 가로수길의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는 춥고 비오는 어느 가을날 지친 여행길에서 들른 주막에서 사랑했던 나데지다를 만난다. 그녀는 이 주막의 여주인이고, 그가 버리고 떠난 농노 신분의 소녀였다. 그가 떠난 후 그의 아버지가 농노 해방증을 주었다는 말에서 부모의 개입으로 그녀와 헤어져 떠날 수밖에 없던 그의 사정을 짐작하게 된다. 자신도 불행했다고 용서해달라는 그의 말에 그녀는 무덤에서 시신을 꺼낼 필요는 없다고 한다. 기억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무의미한 시점이다. 기차역을 향하는 그는 자신이 그녀를 선택했더라면 지금처럼 불행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욕망으로 인해 최후를 맞이한 어느 공작의 후회와 교훈의 발라드는 한 편의 전설이다. 기차가 멈춘 곳에서 젊은 시절의 사랑을 회상하는 주인공의 우울함은 그를 바라보는 부인조차 바깥에 존재하는 타인이 될 수밖에 없다.(루샤) 차가운 가을의 화자는 여성이다. 이 단편집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화자(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쟁이 시작되고, 차가운 가을날 그녀의 약혼자는 전선으로 떠나 한 달 후 전사한다. 그가 떠나기 전 산책길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한 편의 시()이다. 이후 그녀는 결혼하고 피난하고 크림의 내전에서 홀로 남아 조카의 어린 딸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플, 불가리아, 세르비아, 체코, 벨기에, 파리, 니스 등을 유랑한다. 인생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그녀는 질문한다. ‘대체 내 삶에 무엇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오직 그 차가운 가을 저녁만이 있었을 뿐이야.’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처음 사랑했던 그와의 약속을 기억한다. 단편 전체가 시().

 

모래시계를 뒤집어 모래가 밑으로 흐르면 그 속에 파묻힌 것들이 드러나듯, 시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랑의 기억들은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살 희망을 잃게 만든다. 그 때 어떻게 사랑했는가가 기억하는 현재의 마음을 결정할 것이다. 그들이 저버리거나 때론 어쩔 수 없이 빼앗긴 혹은 떠나버린 사랑, 한 순간 불태우고 버린 범죄와 같은 욕망들을 말하는 화자들에게 판결봉을 두드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왜 여성들은 실존적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남성들은 자신의 과오조차도 아름답게 추억하고 있을까? 그들 사회적 지위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부닌의 소설은 시적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단어, 문장, 그것들이 모여 그리는 풍경 모두 그림이고 시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덮으며 나의 마음은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으로 향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반 부닌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해서 더욱 더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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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5-04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도 이 책을 읽으셨군요. 러시아 특유의 감성 너무 좋습니다 ~!! 전 아르세니예프보다는 부닌 단편집이 더 좋았습니다~!!

그레이스 2024-05-04 17:40   좋아요 1 | URL
아!
전에 새파랑님 리뷰를 본 듯도 하네요.
부닌 단편선 좋아요~
아르세니예프도 좋은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4-05-05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닌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데~~
(한두개가 아니지만 ㅎㅎ)
어떤 러시아의 느낌을 줄지 궁금해요^^

그레이스 2024-05-05 17:50   좋아요 2 | URL
ㅎㅎ
읽을 책이 너무 많아요
ㅠㅠ

서니데이 2024-05-07 0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어린이날 연휴 잘 보내셨나요.
작은 크기의 시집은 러시아어 원서로 된 책이군요. 러시아어 배우기가 어렵다는데, 원서 읽을 수 있는 분들 부럽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4-05-07 06:49   좋아요 1 | URL
그니까요!
러시아어로 문학을 읽는 것 저도 넘 부럽네요.
무슨 언어든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린이가 없어서 어제는 어버이날을 대체했습니다.
비가 계속 오네요.
서니데이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자운영 2024-05-14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즘 번역이나 독해는 독서와 똑같이 편리하고 쉬운 일인 시대입니다.

yamoo 2024-05-14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닌 단편선 읽어보고 싶네요! 그레이스 님의 멋진 리뷰 덕분에 아르셰니에프의 인생을 새롭게 봅니다. 원래 있던 책인데, 그레이스님이 가치를 새롭게 불어넣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4-05-14 15:43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예요.
작품 하시느라 바쁘셨나봐요.
감사합니다 ~~

젤소민아 2024-06-06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그레이스 2024-06-06 13: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골짜기의 백합 을유세계문학전집 4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정예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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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의 소설을 읽는다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읽을 것을 권하겠다. 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항상 마지막 부분의 반전에 있다. 통속과 순문학 사이에서 모호함을 띄며 여러 번 책을 덮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문학에서 많이 마주친 식상한 사건들 속에서 순간순간 빛나는 문장들과 번뜩이는 시선은 들었던 책갈피를 내려놓게 한다.

 

발자크는 부인했다고 하지만(초판 서문에서), 이 소설에는 발자크의 전기()적 사실과 감정이 녹아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펠릭스가 지닌 부모로부터의 사랑 결핍은 발자크의 그것과 닮았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발자크 평전에서 이 소설 『골짜기의 백합 속 주인공 펠릭스의 사랑하는 여인 모르소프 백작 부인의 모델이 드 베르니 부인이라고 쓰고 있다. 그녀는 발자크에게 어머니 같은 보호자, 부드러운 안내자, 헌신적인 협조자였고, 그 만남은 이후에도 같은 사랑의 유형을 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편지형식을 띄고 있다. 화자인 펠릭스의 연인 나탈리 드 마네르빌 공작부인의 요구에 대해 지나간 사랑을 들려주는 내용이다.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면서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했던 유소년기 에피소드는 어린 나이에 느꼈을 고독과 고통을 가슴 아프도록 공감하게 한다. 청년이 된 그는 법학을 공부하고 고등교육을 받던 도중 파리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투르로 가서 홀로 지내게 된다. 그곳 축제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외로움을 타던 그가 그녀에게 끌림은 모성이 엿보이는 순간의 태도 때문이었다. 잠시 후 그가 보인 행동은 성에 눈뜬 청년의 충동이었을까? 어쨌든 그 행위로 인해 그는 사랑에 빠진다.

소녀처럼 솜털이 난 목 위로 매끈하게 내려오는 윤기 나는 머릿결, 상상력이 뛰어다니는 산뜻한 오솔길처럼 빗이 그 위에 새긴 흰 선들, 이 모든 것이 내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어머니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아이처럼 이 등 위로 달려들어 머리를 부비며 어깨 전체에 입맞춤을 퍼부었다.(30p)”

 

모르소프 백작은 18세기 대혁명 이후 10년의 망명생활과 10년의 농촌생활로 인해 늙었고 정신적인 병을 얻는다. 모르소프 백작 부인(앙리에트)은 숙모로부터 금욕주의적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의 결합은 출발부터 한쪽의 헌신과 인내가 일방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삶은 백작의 광증과 두 아이들의 병약함으로 인해 걱정과 불안을 안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펠릭스의 등장은 숨통을 트이게 하는 사건일 수도 있고, 자녀나 남편에게 죄의식을 느낌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자학하게 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었다. ‘골짜기의 백합은 이 앙리에트를 가리키는 펠릭스만의 은유이다.

 

유년시절의 상처와 모성에 대한 결핍을 지닌 펠릭스는 모르소프 백작 부인(앙리에트)에게 자연스럽게 끌린다. 앙리에트 역시 자신의 고단함에 공감하는 그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그들에게서 결핍을 투사하고, 상대방의 상처에 전이되는 사랑의 유형을 본다. 한편, 사랑은 많은 경우 이런 전이와 투사로 시작되는 것을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앙리에트는 펠릭스의 고백을 거절하고 친구 또는 어머니로 대할 것을 요구한다. 펠릭스는 그녀를 성녀와 순교자로 숭배한다. 앙리에트를 향한 절대적인 사랑-“중세의 기사도를 연상시키는 사랑(252p)”-을 마음에 담고 돌아간 파리 사교계에서 펠릭스는 영국 귀부인 레이디 더들리와 관능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에 빠진다. 이를 알게 된 앙리에트는 찾아와 변명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펠릭스에게 다정하지만 가혹한 태도로 대한다.

 

상심으로 인해 죽게 된 앙리에트, 죽음이 임박한 그녀를 바라보는 펠릭스의 시선이 안타깝다.

그녀는 더 이상 내 사랑스런 앙리에트도, 고귀하고 거룩한 모르소프 부인도 아니었다. 그것은 보쉬에가 말했던 이름 없는 무엇인가였다. 그것은 허무와 싸우고 있었으며 갈망과 충족되지 못한 욕망 때문에 삶으로 하여금 죽음을 상대로 이기적인 맞대결을 하도록 시키고 있었다. (344p)”

남편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고 인내한 자신의 삶을 후회하고 거짓이 아닌 실제의 삶을 살고 싶다고 고백하는 그녀, “미친 듯한 교태를 부리는 그녀를 바라보고 아연실색하는 펠릭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진심을 보이는 그녀 앞에서 당황하는 그는 누구를 사랑한 것일까? 시몬느 보바르의 2의 성을 떠올린다. 남성의 여성을 향한 숭배적 사랑은 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을 타자로서 신화화하고 있는 것이다.

 

앙리에트(모르소프 백작 부인)을 향한 펠릭스의 숭배는 그 언어가 자칫 통속으로 읽힐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자면,

달빛의 조명을 밝은 두 줄기 굵은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나와, 볼을 타고 얼굴 끝까지 흘러내렸다. 나는 그 순간에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마셨다. 남몰래 흘린 눈물, 지쳐 버린 감성, 한결같은 정성, 끊임없는 불안으로 보낸 10년의 세월과 여성의 가장 고귀한 용기가 묻어 있는 그녀의 말들은 내 안에 경건한 열망을 불러 일으켰다.……이것이 사랑의 첫 영성체입니다. 그래요, 저는 지금 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성혈을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 교감하듯이 부인의 영혼과 결합했습니다. 가망 없는 사랑도 행복입니다.” (103p)”

이런 내용들이다.

이런 과잉된 감정과 언어들 때문에 그가 전하려는 고통과 괴로움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발자크에게 실망할 뻔 했다.

 

반전은 에필로그처럼 붙어있는 나탈리의 답장이다. 통속적으로 읽혔던 장황한 문장들과 생각이 발자크가 아닌 펠릭스의 것이 되면서, 발자크의 메시지가 선명해진다.

당신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읽어보니 …… 당신은 모르소프 부인의 미덕들을 자랑함으로써 레이디 더들리를 상당히 성가시게 하셨고, 영국식 사랑의 기교들을 과시함으로써 백작부인을 많이 아프게 하신 것 같군요. 게다가 당신의 마음에 들었다는 장점밖에 없는, 저라는 가엾은 여인을 배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앙리에트처럼, 또는 아라벨처럼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하신 셈이죠.(382~387p)”

나탈리는 펠릭스가 상대방을 대상화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글쎄……과연 발자크가 펠릭스와 같은 사랑을 하지 않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아니, 부정적이다. 작가는 삶에서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글 안에서 넘는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노출 본능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은 거짓이다. 더 정확하게는 위장이다.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이 행복해 죽겠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때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불행한 현실에 마취제를 주사한다. 독자들 또한 마취제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뿐이다.(생의 이면이승우 24p)”

 

발자크는 펠릭스를 화자로 등장시켜 숭배와 같은 사랑의 고백들을 장황하게 펼쳐놓고 독자를 질리게 한 후, 마지막 나탈리의 답장으로 그런 낭만주의 사랑의 종언을 선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도 실천할 수 없고, 잘못이라고 생각해도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이 연민을 자아내는  모순덩어리 인간 발자크는 연인의 비난을 통해 자신의 삶과 일치하지 않기에 하지 못했던 말을 하고 있다. 이 나탈리 드 마네르빌 공작부인의 답장은 발자크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하는 에필로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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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4-22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로만 치면 진짜 죽이지 않습니까? ㅎㅎㅎ 열세 살 짜리 꼬마처럼 보이는 스무 살 청년이 모르소프 백작부인한테 홀딱 빠져서 부인의 목을 기습, 입을 맞추었으니, 당시에 양치나 했나, 아이구, 침 냄새 그거 어땠을까요? ㅋㅋㅋㅋ
참 다양하게 잡놈들 많이 나오는 작품입니다.

그레이스 2024-04-22 16:18   좋아요 0 | URL
ㅎㅎ
저는 그 장면에서 깜놀했는데...^^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모성에 대한 그리움과 성적 충동이 마구 뒤섞여 있는것 같기도 해서 안됐기도 하고 그랬어요 ^^

새파랑 2024-04-22 17: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표지는 처음 보는데 재미있어보입니다~!! 게다가 서간문이라니~!!

그레이스님은 진정한 발자크 마니아 이십니다. 발자그레이스~!!

그레이스 2024-04-22 22:04   좋아요 2 | URL
ㅎㅎ
넘 재미있네요
읽어가다보면 서간문인지 잊어버려요,
나탈리를 부르는 돈호법이 나올때 아! 편지 였지... 합니다.

페크pek0501 2024-04-28 12: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을 읽다 말았던 것 같아요. 끝까지 읽겠습니다.^^

그레이스 2024-04-28 20:22   좋아요 2 | URL
네 ~~^^
끝까지 읽으시면 별점이 하나 올라갈거예요

서곡 2024-05-01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골.백. 읽으면 리뷰 자세히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레이스님 오월 잘 보내십시오 ~

그레이스 2024-05-01 13:1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서곡님도 오월 잘 보내세요

yamoo 2024-05-14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재밌나보군요. 아직 읽지는 않았는데, 이것두 얼른 읽어야 겠습니다...발자크는 그러고보니 버럴책이 없네요..ㅎㅎ

그레이스 2024-05-14 15:46   좋아요 0 | URL
예~~
재밌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