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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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면 슈베르트의 가곡을 듣게 된다.

발하임 풍경 곳곳 베르테르의 눈에 들어오는 보리수들, 그의 가슴 아픈 사랑 위로 슈베르트의 <보리수><세레나데>가 흐른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슬프고 안타깝고 짧은 삶도 함께 떠오른다.

 

아무튼, 괴테를 다시 읽는 중이다. 파우스트에 이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다. 이번엔 문학동네로 읽었다. 어투가 어색해서 덜그럭거리며 읽었던 기억과 달리 문장이 매끄럽다. 번역에 의존해 읽기에 번역자의 단어선택, 문장구성, 직역과 의역에 의지해 소설을 읽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전 독서가 어려웠던 것은 편지글을 서간체와 서술체로 오락가락하며 쓴 때문이었다.

 

출간 순서로 읽는다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먼저다. 그렇게 읽어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파우스트를 읽는 데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초기 작품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슈트룸 운트 드랑, 파우스트는 바이마르 고전주의에 해당하며, 하나는 서간체이고 다른 하나는 극시다. 형식도, 소재도, 정서도, 주제도 다르다. 전혀 다른 작가의 것인 듯 느껴진다. 그런데 파우스트를 먼저 읽으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파우스트를 연상하게 된다.

 

예를 든다면 이런 내용이다.

인생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이 수긍했지 않은가. 나 또한 어딜 가나 그런 감정에 사로잡힌다네. 활동하고 연구하는 인간의 능력이 한계에 부딪히는 것을 볼 때, 인간의 모든 노력이 욕구 충족을 위해 사용되며 그 욕구라는 것이 궁핍한 생활을 연장시키는 것 외엔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그리고 연구 성과에 만족한다는 것이 우리를 가둔 감옥의 벽에 온갖 형상과 밝은 풍경을 그려놓는 것 같은 몽상적 체념에 다름 아님을 알게 될 때, 빌헬름, 그럴 때면 나는 말문이 막힌다네. 그러면 나는 내면으로 되돌아와 또다른 세계를 발견하곤 하지! 그것 또한 사실적인 묘사나 생생한 에너지가 넘치는 세계는 아니라네. 어렴풋한 예감과 어두운 욕망의 세계지. 그곳에선 모든 것이 내 감각 앞에서 몽롱하게 떠돌고, 나는 꿈을 꾸듯 그 세계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다네.(21p)”

 

파우스트의 방황을 본다.

 

발하임에서 베르테르는 그곳의 일상을 편지로 친구 빌헬름에게 전한다. 아마도 그는 마음의 병(조울증) 때문에 이곳으로 온 듯하다. “번민에서 방종으로, 감미로운 우울에 빠져 있다가도 이내 위험천만한 열정으로 변해버리는(16p)” 굴곡이 심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 때, 농촌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한다.

 

그들은 삶의 작은 동심원을 그리며 행복하고 평안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지.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겨울이 온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라네.(26p)”

 

과연 그들이 겉에서 보는 것처럼 행복하고 평안하기만 할까? 베르테르의 시각에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우울함에 골몰해서 타인의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시선이다.

 

1부의 베르테르의 편지에 기록된 그의 글만 읽게 되면, 로테를 향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그의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그칠 수밖에 없다. 로테 역시 그를 사랑하지만 약혼자인 알베르트와 결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알베르트는 순수하고 훌륭한 사람이지만 베르테르가 편지에서 전해주듯 한편 편협한 사람인 듯 보인다. 베르테르의 편지에서는 로테, 알베르트, 그들이 처한 상황이 모호하게 전달된다.

그러나, 2부에서 편집자(빌헬름 혹은 괴테)가 그의 편지와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전해주는 정보는, 모호했던 진실을 선명하게 한다. 특히 알베르트의 인물됨, 불행할 거라 생각했던 그들의 결혼 생활, 로테의 감정 등에 대해 베르테르가 오해했음을 독자는 알게 된다. 로테도 자신을 사랑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베르테르의 판단이 틀렸음을 알게 된다. 베르테르는 그렇게 오해하고 슬퍼하며 매일같이 자신의 모든 활력을 소진시키고, 저녁에는 곤경에 처해 괴로워하는 인간(146p)”이었다.

 

베르테르의 점점 깊어지는 마음의 병은 전에 만났던 남자의 살인사건을 마주치면서 뒤흔들린다. 그 남자는 자신의 여주인을 사랑했었고 그 사랑이 지나쳐 살인을 저지른다. 베르테르는 그 남자를 구명하기 위해 애를 쓴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투사전이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문제로 알베르트와 논쟁을 벌이던 중, 알베르트가 그건 안 되네. 그자를 구원할 방도는 없네!”라고 한 말에 베르테르는 상처를 입는다. 그 말은 각인되고 자신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사건은 트리거가 된다.

 

베르테르가 죽기 직전 로테에게 읽어준 오시안의 시는 애도시 또는 레퀴엠이다.

봄바람아! 나를 깨우는 까닭이 무엇인가? “내가 천상의 이슬로 당신을 적셔줄께요!”하고 위로의 말이라도 하려는지. 그러나 나의 생기가 다하는 순간이 왔고, 나의 잎들을 모조리 떨궈버릴 폭풍우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네. 내일이면 일찍이 내 아름답던 모습을 본 적 있는 방랑자가 올 것이네. 그의 두 눈은 들판을 둘러보며 나를 찾겠지만 끝내 발견하지는 못하리라.(177p)

그 오시안의 긴 시는 죽음을 가리키고 있다. 낭송을 듣고 눈물을 흘린 로테는 석연치 않은 예감을 했다. 그리고 몇 번의 대화를 통해 베르테르의 죽음 암시를 들었던 알베르트도 권총을 내준다. 인간의 죽음이란 참 덧없고 어이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삶과 죽음을 가르기까지 하는 사랑, 이 모든 소란과 흥분, 조급함과 아우성, 고민과 격렬함, 당시 18세기 괴테 시대 사람들만 겪고 있는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사랑은 너무나 중요해서, 알랭 드 보통이 철학의 위안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누구든지 아무리 심각해져도 지나치지 않다.”

 

삶에서 겪는 고통을 겪어내는 것의 한계는 각자마다 다 다르다. 사람마다 그 고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다르다.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자아라는 게 있다. 고통은 다음에 오는 또 다른 고통이나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갖게 해준다.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만들어진 흔적, 페이소스가 마음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은 괴테가 1772년 베츨러에서 알게 된 샤를로트 부프와의 실연을 극복하기 위하여 루소의 영향으로 쓴 편지체 소설이라고 한다. 그는 이 소설로 많은 젊은이들의 심연을 건드렸고,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굳이 18세기 사람들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을지 모르겠다. 여전히 이런 슬픔에 잠긴 사람들이 존재하니까. 주인공의 이름과 배경만 바뀐 같은 이야기도 되풀이 된다.

 

왜 그럴까? 인간은 그만큼 연약하고, 비슷한 지점에서 무너지니까!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가 베르테르의 슬픔을 변주한다. 예술의 정수는 서로 통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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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4-11-18 0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부터 겨울이 시작되니까(과연...? 🤔) <겨울 나그네>도 듣게 되겠네요. 🙂

그레이스 2024-11-18 06:40   좋아요 0 | URL
ㅎㅎ
겨울나그네 !
전곡 다 틀어놓고 들었습니다.
곡이 난해하지 않아서,,, 독서하기 좋습니다.
오늘 체감 온도는 롱패딩 입어야 할듯요.

2rjfnr 2024-11-18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번 들어봐야 겠어요.
겨울나그네!~~♡♡

그레이스 2024-11-18 11:08   좋아요 0 | URL
네~♡
이 날씨에 잘 어울립니다.^^
슈베르트의 생애를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깊어집니다.ㅠㅠ

레삭매냐 2024-11-21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하 고견이십니다.

역시 예술의 고갱이들 단계에서는
서로 통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래 전에, 호주 배낭여행을 떠나
면서 가방에 집어 넣어 가져간
책이 베르테르였지요. 정말 오래
전의 일이네요.

그레이스 2024-11-21 18:34   좋아요 1 | URL
ㅎㅎ
출판사마다 다르기도 하고, 언제 읽는가도 감상이 다른듯 해요.
이번 독서가 제일 좋았어요.
 

체호프는 두려워. 그의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낯선 여인의 키스7p)”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게 된 이유다. 체호프 단편집 낯선 여인의 키스책머리에 소개된 주인공 가후쿠의 말이다. 체호프의 희곡을 읽는 내내 겪었던 감정 안으로 이 대사가 들어왔다. 바냐삼촌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포스터를 꽉 채운 붉은 색 차, 화려한 수상 이력 중 '2021칸 영화제 각본상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색 사브(SAAB)를 운전하며, 카세트 플레이어를 통해 나오는 아내 오토의 대사에 맞춰, 대사를 외우던 가후쿠의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오토와 가후쿠의 대사는 책 읽는 톤으로 일정하다. 도심과 해안 도로를 달리던 붉은 색 사브의 인상과 함께 청각의 이미지가 각인된다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후 이 차 안에 오래도록 머문다그녀가 갑작스럽게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타고 다니고 있다. 시력의 문제가 생기면서 운전을 하지 못하게 된 그는 미사키를 드라이버로 고용하고, 뒷자리에 앉아 여전히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대사를 말한다. 가후쿠가 이 차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신차(新車)들에는 카세트 플레이어가 없기 때문일까? 영화가 끝나고 표면적인 이유에서 시작된 차가 상징하는 의미에 대한 생각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빨간 색 이미지와 함께.

 

그는 히로시마 연극제의 프로젝트로 기획된 <바냐삼촌>을 연출한다. 이 연극은 출발 단계부터 감동을 준다. 각국에서 모인 배우들이 자신의 언어로 연기하는 기획이다. 차 안에서 가후쿠가 했던 감정을 뺀 대사연습은 이들의 대본 리딩에도 적용된다. 감정을 제거하고 대사를 연습하는 반복이 오랜 시간 지속되자 연기자들에게서 불만이 제시되지만 가후쿠는 계속한다. 대사가 나에게 각인되고 내 것이 되고 그 대사가 나 자신을 끄집어내는 순간이 올 때까지. 아이러니하게도 가후쿠가 두려워하는 것이다.

 

연극의 기획 의도는 <바냐삼촌>이기에 더욱 빛이 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체호프의 희곡속 인물들은 각자의 아픔 속에 갇혀 서로의 말에 귀기울이지 못한다. <바냐삼촌>에 등장하는 인물들, 보이니츠키, 소냐, 옐레나 아드레예브나, 세레브랴코프, 아스트로프, 텔레긴 모두 각자의 이유로 불행하고 고독하다. <바냐 삼촌>을 각국의 배우들이 자신의 언어로, 혹은 수어로 연기하는 무대, 배우들이 서로의 대사를 숙지하고 연기하는 모습은 같은 언어로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반어적으로 전하고 있다

 

단지 아내의 성 상대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다카츠키에게서 다른 진실을 들은 후, 그는 당황한다. 그동안 붙잡고 살았던 것들의 무의미함을 느꼈을까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존재였음을 확인하는 것처럼 불행한 순간이 또 있을까? 다카츠키가 연극에서 하차하고 망설이던 그는 다카츠키 대신 주연을 맡는다.

 

날 어떻게 좀 해줘! , 맙소사……. 내 나이 마흔 일곱인데, 만약에 예순 살까지 산다면 아직도 13년이나 남았어! 너무 길어! 내가 어떻게 13년을 견디고 살 수 있겠나?(바냐 삼촌4막 중)”

그는 보이니츠키의 대사를 하며 눈물을 흘리고 신음한다. 가후쿠는 결국 자신을 끄집어내는 체호프에게 항복하는 중이다.

 

미사키는 현실의 가후쿠에서 소냐이다. 가후쿠의 차를 조용히 운전하며, 체호프의 대사를 듣던 미사키는 자신의 상처를 서서히 드러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을 서서히 알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은 불행한 어린 시절, 배우자의 외도, 그리고 상실들의 근원에 자리잡은 치유되지 못한 분노와 죄의식에 있음을 알게 된다. 미사키는 산사태로 혼자 살아남을 수 밖에 없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엄마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했었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사실은 아내를 혼내주고 싶었다고 말하는 가후쿠는 아내가 쓰러진 날 오래도록 차 안에 머물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가후쿠의 오래된 붉은 색 사브는 분노를 억누르고 진실을 회피하고, 과거와 죄의식에 묶여있는, 버리지 못하고 떠나지 못하는 공간이고 심연이다.

 

바냐 삼촌, 우리는 살아갈 거예요. 길고 긴 낮과 밤들을 살아갈 거예요. 운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이 시련을 꾹 참고 견뎌낼 거예요.(바냐 삼촌4막 중)”

수어로 연기하는 소냐(이유나)의 뒤로 여러 언어로 자막이 올라가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의 희미한 얼굴들을 보며 저들은 자신의 아픔을 떠올리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미사키 홀로 운전하는 빨간색 사브가 강변도로를 달리는 엔딩은 가후쿠가 그 고통에서 자유로워졌음을 추측하게 된다

나에게도 이 붉은 색 사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있지. 누구에게나 있지.

 

원작 소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드라이브 마이 카. 조금은 각색되었지만 영화를 보고 이 소설을 읽는 것도 좋았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소설들의 장면들, 감정들이 섞여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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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rjfnr 2024-11-13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 먼저보고 책을 접했는데요 ᆢᆢ즐겁게. 읽으시기를 바랄께요.♡♡

그레이스 2024-11-13 18:58   좋아요 0 | URL
다 읽었죠 ^^
하루키스럽다는 생각!
책 읽고 영화보신 분 중에 영화가 잘 안들어왔다는 분도 계시더라구요.
저는 책보다 영화 각색이 더 좋았던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4-11-13 1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이라 해서 봤는데,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가 계속 나오더라고요.
근데 중간에 멈춘 상태예요.
다 봐야 하는데 ㅎㅎ

그레이스 2024-11-13 18:46   좋아요 1 | URL
ㅎㅎ
저도 그렇게 멈춘 영화가 줄서있지요^^
일단 제가 읽은 바냐 삼촌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었구요. 그래서 무대가 너무 좋았어요.

고양이라디오 2024-11-14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고의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고 <바냐 아저씨>를 읽었습니다. 역시 좋았습니다.

소냐(이유나)의 연기와 마지막 장면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때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리뷰 감사히 읽었습니다!

그레이스 2024-11-14 11:24   좋아요 1 | URL
같은 감동을 느끼셨다니 넘 반갑네요^^
수어로 연기하는 장면, 정적가운데 손이 부딪치는 소리... 넘 감동이었어요 ^^

고양이라디오 2024-11-14 13:55   좋아요 1 | URL
이유나씨 너무 좋았습니다. 수어 연기 감동이었습니다ㅜㅜ

전야제 2024-11-17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삿짐 정리를 하면서 틈틈이 읽다가 이제서야 댓글을 남기네요ㅠㅠ 주연인 니시지마 히데토시를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언젠가 봐야지 하고 아껴두었던 영화인데, 마침 이사도 했겠다 이참에 보려구요ㅎㅎ 그레이스 님의 영화 평론에 반해버렸습니다. 휘몰아치는 감정을 담백하게 풀어내는 느낌 덕분에 영화 감상이 너무 기대되요. 저번에 부모님 댁 가서 파우스트 가져왔는데, 다음에는 체호프 희곡 전집을 가져와야겠어요. 그레이스님 덕분에 예전에 사두고 읽지 않은 책들을 읽고 싶다는 열정이 마구 듭니다. 좋은 글 항상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4-11-18 10:22   좋아요 0 | URL
그렇게까지 읽어주셨다니 넘 감사합니다.
전야제님 댓글이 더 감동스럽네요.
즐겁고 보람있는 독서되시길 바랄께요
감사합니다 ~~.
 
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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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축하,,,,
대단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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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10-10 2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레이스 2024-10-10 20:37   좋아요 1 | URL
어제 방송에서 후보에 올랐으나 가능성은 낮다고 하더니,,, 항상 틀리는 듯요. ㅎㅎ

독서괭 2024-10-10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굉장해요!!

그레이스 2024-10-11 09:10   좋아요 0 | URL
진짜 예상도 못했는데,,,
역시 그 해의 이슈가 될만한 주제가 던져져야 하는듯요
인간의 폭력성!

jenny 2024-10-10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에 있는데도 이 책을 아직 못 읽었어요
읽어야겠어요

그레이스 2024-10-11 05:13   좋아요 0 | URL
한강 책 찾느라 한참 여기저기 뒤졌네요 ㅎㅎ
애들이 이제서야 달라고 해서!

레삭매냐 2024-10-16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박으로 축하합니다, 고저.
 

인간은, 지향(指向)이 있는 한, 방황하느니라.(파우스트전영애역 317)”

발자크를 보며 나는 파우스트적 인간을 생각한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자서전적이라는 루이 랑베르를 보며 더욱 그렇다.

송기정 교수는 발자크의 거듭되는 실패와 그로 인한 부채는 그의 창작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정체성을 늘 찾아 나섰던 그의 삶은 방황으로 보일 수 있으나,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파우스트전영애역 317)” 있듯, 그 역시 글쓰기에서 길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방황이라 보였던 것들이 글을 쓰기 위한 지식들을 담는 시간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다 어떤 때는 그의 이 방대한 지식이 빼어난 묘사들을 훼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견자로서의 자질을 보였던 루이 랑베르는 사제인 삼촌의 집에서 천착했던 영성 서적들과 방돔기숙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자 있는 시간동안 깊숙이 빠져들었던 신비주의는 파리에서 환멸감을 느낀 시간동안 더욱 빠져 든 사유의 대상이었다. 그의 천재성은 한 가지 주제에 과도하게 빠져 고립됨으로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과연 그가 삼촌의 신비주의 관련 책을 가까이 접하게 된 것, 그리고 스탈남작부인의 후원을 받아 방돔 기숙학교에 가게 된 것이 그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는가에 대한 물음이 남는다.

 

반쯤은 군사적이고 반쯤은 종교적인(21p)”인 기숙학교는 루이와 같은 소년에게 합당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발자크의 기억 속에 있는 방돔 기숙학교에서의 시간이 자신의 어머니를 비난할 만큼 불행했음을 알게 된다. 발자크는 이 근대학교의 비인간성과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발자크는 화자로서 루이 랑베르의 삶을 말해주고 있지만 두 인물 다 발자크임을 추측할 수 있다.

 

루이 랑베르가 이 학교 시절부터 계속 천착하여 연구한 주제는 인간의 정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 그것은 보는 것이라고 한다. 영적인 세계를 주변에 흐르는 자기로 설명하려 한다. 지금의 지식으로 보면 허황돼 보이지만 당시 과학의 한 흐름이었다고 한다. 그는 <의지론>을 쓰기 시작하지만 완성하지는 못한다. 그 의지론은 쇼펜하워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 고통으로 가득 찬 생()의 세계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첫째 모든 욕망을 떠난 예술적 관상(觀想)을 통해서이다.” 

결국 그렇게 꼼짝 않고 먹지도 말하지도 않는 상태, 정신만 남은 것 같은 상태로 있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결국 나약한 인간의 그릇에 담을 수 없는 '절대'를 담으려 했기에 그는 분열된 자아로 광기를 일으킨 것이란 생각이다. 그러면, 발자크는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이 작품이 그의 인간희극의 철학분야에 속해 있다는 것이 그 답을 어느 정도는 알려준다. 발자크는 철학자를 추구했다. 또한 과학에도 심취해 있었으며, 실험실을 마련하기도 했다고 한다. 철학과 과학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철학적 명제를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 소설은 그가 진리를 추구해왔던 과정, 그리고 유소년기의 상처와 그를 좌절시킬 수밖에 없었던 환경들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것이라 생각된다.


 그의 저널들 현대 생활의 발견이란 책의 우아하게 사는 법, 발걸음의 이론, 현대의 자극제론은 발자크 <인간희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들이 있다. 나는 발걸음의 이론에서 루이 랑베르의 연구와 집착, 광기의 위험한 순간들을 엿보았다.

 

발자크는 인간의 겉모습을 뚫고 나오는 의지가 전기 물질로서 드러난다는 루이 랑베르의 이론을 인용하며, 이런 인간 정신사를 증명하는 이론이 다루어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또한 발걸음이 그의 직업, 정신, 심리 등을 드러내는 체계를 만드는 연구를 하겠다고 한다. 하루 종일 한 자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그의 집요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 발걸음에서 사람의 내면을 파악하는 작가로서의 탁월한 관찰력이 뛰어난 표현력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임을 알게 된다.

 

나는 학자의 엄밀함과 바보의 미망(迷妄) 사이에 머무를 것이다. 나는 내 책을 읽으려는 사람에게 그 점을 충실하게 알려야 한다.(현대생활의 발견』「발걸음의 이론97p)”

 

여기서 바보는 구덩이를 보고도 빠지는 사람이고, ‘학자는 그 깊이와 거리를 측정한 뒤 계단을 만들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서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발자크는 말한다. 이 둘 사이에서 그 글을 쓰려면 두려움 없이 광기를 상대하고 겁 없이 과학을 상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 구덩이였을까?

 

그의 연구도 난관에 봉착하는 순간이 있다.

 

내 지식의 혼돈 상태를 두고, 내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나는 단지 보잘것없는 콩트를 끌어냈을 뿐이고, 혼돈 상태는 거기에서 인체 생리학을 불러냈다. 나는 우리를 극단으로 내모는 법칙들을 연구하며, 신이 그 힘의 중심을 우리 마음속 어느 곳에 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능력이 각 피조물의 환경에 부여한 현상들을 밝힐 수 있었다.(현대생활의 발견』「발걸음의 이론105~106p)”

 

루이 랑베르의 좌절이 보인다.

 

신의 목소리를 가장 잘 들었던 수학자가 천부적인 분석적 재능으로 주장하였듯이, 지중해 해안에서 쏜 총알 하나가 중국 해안에서도 감지되는 움직임을 일으켰다면만약 우리가 우리 박으로 큰 힘을 발산한다면 말이다.우리는 주위 환경의 조건을 변화시켰거나, 제자리를 찾고자 하는 활력의 효과를 통해, 우리를 둘러싼 생물과 무생물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현대생활의 발견』「발걸음의 이론106p)”

 

루이 랑베르의 자기 이론을 연상하게 한다.


18세기 말 메스머의 동물 자기론1830년대 프랑스에서는 신비주의가 유행했다. 루이 랑베르가 천착했던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은 프랑스어로 번역되기 시작하면서 다시 빛을 보았다. 자기에 관한 이론이 가장 많이 언급된 소설은 루이 랑베르.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은 루이 랑베르가 천착하며 읽었던 것들이다.

 

당시의 지적 분위기로 보아 신비주의에 대한 믿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발자크의 입장은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다라고 오노레 드 발자크의 저자 송기정 교수는 말한다.

 

당시 실증주의와 신비주의를 결합하려는 연구는 수없이 많았다. 스베덴보리도 메스머도 라바터도 과학자인 동시에 신비주의자였다. 인간과 땅과 우주의 통일성을 추구했던 발자크에게 과학과 신비주의의 결합만큼 유혹적인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과학에 몰두했지만, 과학자들보다 더 대담하게 우주와 인간과 과학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실증주의자였지만 신비주의적 실증주의자였던 것이다. 많은 작가가 그의 생각에 동참했다. 그러나 아무도 발자크처럼 시대의 신비주의와 과학의 관계를 묘사하지 않았다. 19세기 풍속연구가다운 그의 면모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오노레 드 발자크154-169p)“

 

나는 모든 것을 배웠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나는 걸었다. 나와 같은 가슴, , 두개골을 가지지 못한 어떤 사람은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다른 도리가 없어서 아마 이성을 잃었을 것이다. (발걸음의 이론111p)”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비서 역할을 하는 천재가 있다. 호메로스, 아리스토텔레스, 타키투스, 셰익스피어, 아레티노, 마키아벨리, 라블레, 베이컨, 몰리에르, 볼테르는 시대가 말해 주는 대로 펜을 들었다.(발걸음의 이론 117p)”

 

좌절의 순간에도 골상학과 신체과학으로 자신의 뛰어남을 피력하는 발자크!

그는 스스로를 자신의 시대의 비서 역할을 하는 천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주제를 연구하는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인간희극>에는 그가 문학인 이상(以上)의 정체성을 추구했음을 알려주는 철학·과학·역사·예술 분야의 방대한 지식이 담겨있다. 읽어갈수록 로댕의 <발자크>가 오버랩 된다. 좌절과 고단함, 지식으로 가득 찬 머리를 이고 가는 자만심 섞인 고뇌의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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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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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로 만난 키건의 문장은 간결함과 그 함축성 때문에 충격을 주었다. 읽어가면서 만나는 단서들은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게 하고, 지나쳐버린 조각을 찾아 퍼즐을 완성하게 했다. 그렇게 반복되는 되읽음으로 말들은 억양을 갖고 감정을 드러낸다. 단순하고 짧지만 한 문장도 허투루 읽을 수 없다. 그렇게 작가를 만났기에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는 작은 자취에서도 누군가의 비극을 읽어내는 남자의 시선을 놓치지않고 쫓으려 했다. 그리고 그의 심상에 일어나는 파문에 함께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단편집 푸른 들판을 걷다맡겨진 소녀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비하면 노골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작별 선물에서 모호함으로 가려져 있는 부분이 있지만 그것은 범죄다. 묵인이 있었고 입에 올리지 않는 그것,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집과 아일랜드를 떠나는 딸이 공항 라운지 화장실 칸막이에 안전하게 들어가문을 잠그고서야 울음을 터뜨리는 마지막 장면은 두 작품 맡겨진 아이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짐작한 가정 내 비극은 폭력, 학대, 성 착취 혹은 그 이상이었을 수도 있음이 드러난다. 또 다시 책장 펴 다시 읽게 된다. 고통의 현장은 가정이고 그 테두리 안에서 비극의 주인공들은 주로 여성과 아동일 수밖에 없다. 가정이기에 이 고통은 비밀이 된다. 이 비밀이 외부로 은밀히 알려지더라도 그들을 둘러싸는 것은 수군거림과 따돌림 혹은 방관이다. 그들은 생존에 대해 불안할 수밖에 없고, 실존은 없다. 그러기에 떠나는 것이다.

 

당신 문제 있어요.(푸른 들판을 걷다)” 중국인의 반복된 말에서 키건을 읽는다. 결혼식, 신부, 파티를 벗어나 사제는 자신의 죄의식, 욕망, 후회를 동반하는 산책을 한다. 들판을 걷다가 만난 중국인병을 치료한다고 소문난이 사제의 몸 여기저기를 만지는 치료 전후로 하는 이말! 영어가 미숙한 중국인의 반복된 이 말은 사제의 몸 뿐 아니라 영혼의 고통을 지시하는 것으로 사제가 받아들이고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의 산책은 이어지고 들판의 풍경은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생각으로 그를 이끌어 간다. 글쎄, 사람은 모두 비슷한가? 그가 서원을 한 사제일지라도, 욕망에 몸을 맡겼던 격정을 잊지 못하고, 그 기억을 맴돌고, 사제로서 일상의 일들은 생각함으로 그의 죄의식을 덮는다.

 

키건이 그리는 세상은 범죄가 받아들여지는 곳이다. 가정이기도 하고 작은 시골마을이기도 하다. 선량한 사람들은 그것을 관습과 질서 속에 은폐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비밀이다.

 

삼림 관리인의 딸마사와 디건 사이의 그들의 문제는 아이들이 툭 내뱉는 말들 속에서 드러난다. 아이들이 따라하는 질투해요?”, “누가 신경이나 쓴대요?”는 부모의 관계를 드러내는 일상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침묵의 뚜껑이 덮여있는 집에서 마사의 권태와 생각, 그리고 마사의 외도로 태어난 빅토리아에만 초점이 맞춰지던 부부의 문제는 불타는 집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그 근원이 드러난다. 부부의 내밀한 공간에서 행해지는 폭력과 그렇게밖에는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던 남자의 무지와 독선에 대해 확인하게 된다. 떠날 준비를 해 왔던 마사의 허탈한 마음조차 이해하지 못해서 불타는 집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이제 미안해?”라고 하는 디건의 원망은 빗나간 화살처럼 힘없이 땅에 떨어진다. 상대방의 마음에 무지하고 자신의 감정에만 몰두한 연인이나 부부의 말과 행위는 폭력적이다.

 

물가 가까이에서는 그런 폭력적인 말들이 등장한다. 새아버지의 말은 청년에게 상처를 주는 듯하다. 바다수영을 하다가 익사할 뻔한 경험은 새로운 가정에 대한 공포를 상징하는 듯하다. 강에서 수영을 잘했던 할머니가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를 몰라서바다에 들어가지 않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떠나려고 항공사에 전화하던 그는 어머니를 보고 잠시 머뭇거린다.

 

어떤 이들에게 가정은 벗어나고 싶은, 그러나 한편 묶여 있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가족이 병()”인 사람들은 가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되묻는 존재가 될 것이다. 나는 예외일까? 유년기로부터 시작된 이 이중적인 욕망과 오래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았는가?

 

키건의 작품 곳곳에서 얼룩을 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멍이고, 깊게 베인 상처이고, 흉터다. 간결한 문장들 속에 담긴 서사는 그 상처와 흉터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에 동요하게 만든다. 공항 화장실 칸막이 문을 닫아 걸고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유년기를 어둠속에 가뒀던 가족과 이별하는 소녀, 걷고 있는 푸른 들판 어딘가에서 신음하고 있는 자신의 분신을 보는 사제, 불타는 집을 바라보는 허망한 눈의 여자, 여전히 떠난 여인을 기다리며 그녀의 검은 말을 생각하는 침대 위에 움츠린 남자. 그들의 슬픔은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그것이 키건이 남겨 놓은 얼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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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10-10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송 기다리는 중입니다~저도 읽고 리뷰 쓸게요~

그레이스 2024-10-10 17:11   좋아요 0 | URL
리뷰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