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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 ㅣ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54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지음, 정은귀 옮김 / 민음사 / 2021년 12월
평점 :
“번역된 시는 비옷을 입고 샤워하는 느낌이랄까요.
Poetry in translation is like taking a shower wearing a raincoat.”
영화 《패터슨》 마지막 부분에서 일본인이 한 말이다. 서툰 발음으로 말을 건네며 어색한 대화를 이어가던 그 시인은 아포리즘 같은 대사를 남기고 떠난다.
‘패터슨’은 시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가 살던 도시이자 그의 시집 이름이기도 하고,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패터슨은 버스운전기사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같은 시간에 승하차하는 사람들을 태운다. 퇴근해서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바에 들러 맥주 한 잔 하고 돌아온다. 그의 단조로운 일상을 깨뜨리는 이벤트는 아내의 넘치는 예술적 성향으로부터 온다.
그를 진정 숨 쉬도록 해주는 일은 시를 쓰는 것이다. 잠깐의 휴식시간이나 잠자기 전 버스 주차장 건물 뒤에서, 패터슨의 폭포를 바라보며, 작은 골방에서 노트를 펴고 시를 쓴다. 귀에 들리는 사람들의 대화, 눈에 띄는 모든 사물과 풍경이 다 시가 된다. 떠오른 시상을 적고, 길을 걸으며 생각하고, 다시 적는다.
이렇게 매일 쓴 시들이 담겨있는 비밀 노트가 애완견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다. 상심한 그를 위로하는 아내에게 “단지 물위에 적은 단어들일 뿐”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더욱 깊은 상실감을 본다. 아마도 그동안 시를 쓰는 것에 대한 회의감마저 든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낙심한 마음으로 집을 나와 폭포를 바라보며 그레이트 폴 공원 벤치에 앉아있고, 일본인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두 사람의 대화는 흡사 한편의 시(詩)다. 한 연이 끝나고 다시 연을 시작할 때 여백을 두듯 그들의 대화는 그렇게 이어진다. “아하!”라는 감탄사와 함께.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도시를 보러 왔다는 그 일본인은 “당신도 이곳 패터슨의 시인입니까?”라고 그에게 묻는다. 그는 “버스 드라이버”라고 대답한다. 일본인은 “전 시로 숨을 쉽니다.I breathe poetry.”라고 말하며 자신이 시인임을 밝힌다. 영어로 번역된 시는 없다고 말하며, “번역된 시는 마치 비옷을 입고 샤워하는 것과 같다”는 말에 두 사람은 공감하며 웃는다. 일본인은 떠나면서 빈 공책을 선물한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Sometimes empty page presents more possibilities”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일 듯하다.
그런데 나는 왜 “아하Aha!”에 꽂히는지! 세상을 시의 창으로 보고 있는 두 사람의 공감을 이 두 음절에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인이 떠나고 홀로 남은 그에게 시상이 찾아오고 집으로 향하는 그는 마음속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 역시 시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일상은 시작된다.
영화를 마치 한 편의 시(詩)처럼 읽었다. 많지 않은 대사들이 다 시(詩)로 건너온다. 그리고 당연히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 『패터슨』을 샀다. 그의 소개를 보니 ‘서사시’라는 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아! 그래서 영화에 단테 알리기에리의 초상화가…! 핑크색 작은 꽃이 붙여져 있는 단테의 유명한 초상화는 그가 런치박스를 여는 장면에서 잠깐 카메라 앵글 안에 잡혔었다. 순간이지만 이 장면은 정지 화면이 되어 뇌리에 새겨졌고, 마음속에 많은 의미들을 생성했다.
그를 이미지즘 시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시를 따라 읽다보면 시인의 눈을 통해 들어온 풍경과 사물들이 그대로 그려진다. 때로는 그의 심상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이 이 이미지들과 섞여 들어가 다시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반가운 것은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 1525 ~ 1569)의 그림을 그려낸 시들이다.
그 중 「이카루스의 추락과 함께 하는 풍경」은 신화 그림을 공부할 때 찾았던 그림과 시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리를 절감했다.
LANDSCPE WITH THE FALL OF ICARUS
According to Brueghel
when Icarus fell
It was spring
(…)
the edge of the sea
concerned
with itself
sweating in the sun
that melted
the wings’ wax
unsignificantly
off the coast
there was
a splash quite unnoticed
this was
Icarus drowning
마지막 두 연은 그림에서 보여 주고자 하는 핵심이다. “앞바다에선/ 사소하게 / 일이 하나 있었으니(6연)”와 “아무도 몰랐던 어떤 풍덩/ 이것은 / 익사하는 이카로스였다(7연)”이다. 바쁘게 밭 갈고 행사 준비에 바쁜 사람들의 들썩거림 한 편으로 바다로 추락한 이카로스의 모습은 찾기조차 힘들다.(다리만 물밖으로 나와 있다) ‘이카로스의 추락’이라는 신화를 풀어낸 브뤼겔의 그림, 그것을 오마주한 윌리엄스의 시는 우리 시대에도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일상 속에서 타인의 비극에 눈을 돌리는 것, 알아채는 것, 그 슬픔에 머무는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 어려운 나를 돌아보게 된다.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영시와 번역시로 실어놓은 이 시집을 읽어가면서 처음 떠올린 것은 “비옷”이다. “Poetry in translation is like taking a shower wearing a raincoat.” 정말 적절한 비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