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느 보부아르는 여성의 상황을 제시하기 전 ‘여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생물학적·정신분석적·사회학적인 분석을 한다. 그녀는 이 탐구를 구조주의적인 방법으로 수행하고 있다. 구조주의는 사물의 참된 의미가 사물 자체의 속성과 기능에서가 아니라, 사물들 간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여성이 ‘제 2위’로 여겨지는 것은 남성이 ‘제 1위’인 사회가 여성 자신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에 대항하는 존재로서 몸, 심리, 능력, 기능을 인식하는 것이다.
숙명 편(제1편)에서는 자궁을 지니고 있는 몸이 단지 번식의 객체로 여겨지는 것은 부장제(父長制)라는 사회적 환경 때문이다. 여성이 만들어지는 생식세포 단계에서부터 사회적 관념에 지배를 받는 유추를 하고 여성을 객체화 한다. 탄생과 성장 단계에서 남성과 대비되어 몸의 소외를 겪는 여성은 임신의 단계에서 희생을 강요당하는 심각한 소외를 겪는다. 폐경기의 여성 역시 여러 가지 기능의 중단과 함께 번식 기능의 종결과 함께 같은 상태에 빠진다. 여성의 생물학적 조건은 “여성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며 또한 여자의 상황의 본질적인 요소이다.”(65p) 왜냐하면 “육체는 세계에 대해 우리가 파악하는 도구이며, 세계는 파악하는 방법여하에 따라서 상이한 양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65p)
생물학적 조건이 여자에 대하여 움직일 수 없는 숙명을 부여하고 있다는 생각은 거부한다.
남성에 비교해서 육체가 약하다는 것은 사회에서 여성이 타자(他者)라는 것에 이유가 되지 못한다. “생물학적 조건은 존재론적·경제적·사회적·심리적인 전체의 관계에 잘 비추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70p)
남성의 ‘거세 콤플렉스’와 비교되는 여성의 소외에 대한 정신분석적 견해도 거부한다. 이것은 남성의 몸에 대항하여 분석된 것이다. 여성의 초월이나 소외행위로 간주되는 남성적 태도나 여성적 태도는 객체의 역할(‘타자’의 역할)과 자기 자유의 요구 사이에서 망설이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여자가 객체가 되는 이 세계의 경제적·사회적 구조를 아는 것이 필요불가결하다.
마찬가지로 엥겔스의 사유 재산 제도와 남성의 세력 팽창 계획 아래서 여성의 무능력과 몰락을 설명하려고 하는 엥겔스의 관점도 불충분하다. 프로이트의 성적 일원론과 엥겔스의 경제적 일원론을 거부한다. 육체 성적생활 기술 등은 인간존재의 총체적인 전망 속에 파악될 때에 한해서만 인간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가치는 실존자가 존재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기본적인 투기(投企, 기투)에 의하여 지배된다. 이때 동일성에 기투(企投)한다면 그 가치는 변화하지 않을 것이며 여성은 영원히 타자로서 존재할 뿐이다.
분석의 과정에서 주목하게 된 것은 사유재산제도와 사회주의 하에서 여성의 지위이다. 노예와 같은 지위를 갖고 있었던 아테네나 다른 도시국가들과 달리 스파르타에서 여성은 남성들과 동등한 수행을 했다. 어떤 면에서는 우월한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공산주의가 여성에게 약속한 지위 역시 달랐다. 어느 정도는 사유재산과 자본주의가 여성을 객체화 하는 중요 요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 편(제 2편)에서는 남성에게 속해왔던 세계와 여성들이 반복과 내재 속에 갇혀있던 역사를 다룬다. 원시 유목민의 삶에서부터 근대의 여성의 지위에 대해, 제 1위가 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서술 한다.
“왜 인간인 여자는 자주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가? 노동력의 필요가 개발해야 할 원료의 필요보다도 더 절실했기 때문에 인류가 가장 맹렬하게 출산을 요구하던 시대에 있어서조차, 또 모성이 가장 존경을 받던 시대에 있어서조차도 인류는 여자에게 제 1위를 획득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서 인류는 단순한 자연적인 종(種)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종으로서 자기를 유지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목적은 정체가 아니다. 그것이 목표하는 것은 자기를 초월하는 데 있다.”(100p 上卷)
사유재산제도의 등장과 함께 여성은 사유재산과 결부되어서 그 운명이 결정되고 재산에 애착을 갖게 된 주인은 재산을 존속하기 위한 방법으로 상속자를 만든다. 그 재산과 아이들은 여성과 분배하지 않았다. 사유재산제도와 함께 국가주의 아래서 가정단위에 간섭과 통제가 이루어지고 자본주의 아래서 재산의 세습이 견고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 여성의 지위가 하락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공공에 대한 여성 사회참여와 관련해서 여성의 권리는 남성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여성들은 남성이 여자를 정의하는 대로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선택”(214p 上卷)해왔다.
신화 편(제 3편)에서는 가부장제의 사회 안에서 만들어져 내려온 여성다움의 신화를 내면화 한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신화와 문학에 나타난 여성 숭배의 이중의 의미, 여자의 육체에 대한 신화에 대한 편견과 오해들을 살핀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의 신화들이 작가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윤색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작품에서 ‘타자’로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여성숭배와 신화가 나타난 몽테를랑, 로렌스, 클로델, 브르통의 작품을 스탕달과 비교한다. 그들 작품에는 남성의 자유, 초월조차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들 각자에 있어 이상적인 여자는 자기에게서 자신을 명백히 드러내 줄 수 있는 ‘타자’를 정확히 구현하는 여성이다. ……몽테를랑은 그로 하여금 남성의 권위를 측정하게 하는 여자를 동정하는 데 찬성한다. 로렌스는 자기를 위하여 스스로를 포기하는 그런 여자에게 열렬한 찬사를 보낸다. 클로델은 남성에게 복종함으로써 신(神)에 복종하는 여종자(女從者) 하녀 헌신자를 찬양한다. 브르통은 여자가 자식이나 애인에게 가장 온전한 사랑을 바칠 수 있기 때문에 여자에게 인류의 구제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스탕달의 경우에도 여성 인물이 남성 인물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그녀들이 남자보다도 더 격렬한 기세로 그 정열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373p 上卷)
남성들이 굳게 믿는 여성적 ‘신비’는 여성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신비로 남겨두는 상호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라는 것을 지적한다. 여성은 그렇게 자신의 몸과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된다. 부장제(父長制)의 희생자인 여성들이 여성다움에 대한 신화를 내면화하고 가부장제에 공모한다.
제2부 체험 편에서 가장 중요하고 쟁점이 되었던 제2부 체험의 서론과 제1편 상황 부분이다. 서론에서 작가는 ‘여자’ 혹은 ‘여성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어떠한 원형(原形)도, 어떠한 불변 부동의 본질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의 주장 중 대부분의 경우는 ‘현재의 교육과 풍습의 단계에서’ 이다. 여자가 여자로서 살아가는 모든 실존의 공통적 배경을 그려 보려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형성편(제1편) 제1장 유년기를 들어가며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392p)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작가의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가장 적확하다. 피투(彼投)된 현존재는 끊임없이 기투(企投)한다. 피투는 현사실성을 이야기 하고 실존은 그 안에서 떠날 수 없고 영향을 받는다. 여성의 몸으로 태어난(피투된) 역사, 사회(현사실성)가 그 존재에 영향을 주고 있다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원형적, 본질적 여성이 아닌 사회적 환경 안에서 규정되어지고 교육되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년기와 젊은 처녀, 중년의 여성, 노년을 맞이한 당대의 여성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 그리고 있다. 상대적으로 남성에 비해 핸디캡을 지닌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하며 성장하는 것은 앞에 유치되어 있는 ‘타자’로서의 전망 때문이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성적운명을 성취한 후에도 이 과거의 인식을 바꿀 수가 없다.
상황 편(제2편)에서는 결혼제도 하에서 제약을 당하는 기혼여성의 몸과 성취, 관계의 욕구에 대해 이야기 한다. 성관계에서 올 수 있는 생물학적인 남녀의 차이로 인한 어려움은 사랑이 있었을 때도 사랑이 없을 때도 여성들에게 굴욕감과 어려움을 준다. 결혼한 여성은 어머니로서 강요된 모성을 짊어진다. 또한 “아이는 여자의 기쁨이며 정당화이다.”(191p) 자기의 노력으로 성취를 이룰 수 없는 가정주부, 아내, 어머니는 “타자에 의하여 ‘이’ 주부, ‘이’아내, ‘이’어머니, ‘이’ 여자로 인정받기를 원한다.”(253p 下卷) 이렇게 만족을 구하고 있다. 남성의 보호아래 있다는 것과 경제적 지원, 불감증 등을 들어 당대의 매춘부와 기혼여성을 비교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의 노년은 위기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여자는 스스로 해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경제적 발전도 이루어야 진정한 해방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집단적이어야 한다.
반면, 여성이 자신의 상황을 바꾸려는 왜곡된 노력이 나르시시즘, 정열적 사랑에 빠짐, 신비주의로 나타난다. 정당화 하는 모습이다. 특별히 끊임없이 연애하는 사랑에 빠지는 여인의 자기소멸의 꿈은 실제로 존재하고 싶다는 격렬한 의지이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애인(남편)이 가치를 보유하길 바라고, 그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경험한다. “연애는 여자에게 있어서 운명 지어진 의존적인 생활을 감수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하려는 최고의 시도이다.”(448p 下卷) 그러나 그것 또한 하나의 잔인한 속임수일 뿐이다.
문학과 예술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성이 해방하려는 방편이 되었고, 전위에 섰다. 하지만 해방을 모색하는 여자들조차 여전히 남자 앞에 주체성이 부여된 객체로서 자신을 바라보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남성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여된 존재로부터의 해방을 하려면 남성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주체로서 일어서야 한다. 결론 부분에서 보부아르는 "자연의 구별을 초월해서 우애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문장으로 마치고 있다.
노예와 여성의 차이가 없는 모호한 성관계에 대한 서술을 읽으면서 ‘컬러퍼플’을 기억했다. 노예에서 해방된 여성이 사랑하지 않는 남성의 보호 아래에서 겪는 비인간적인 상황! 남편과의 성관계에서 자신이 화장실인 듯 느껴졌다는 여주인공의 담담한 고백이 너무도 비참하게 느껴졌다. 여성과 노예를 연결 배치시킨 작가의 의도가 읽혀지는 부분이었다.
우리는 톨스토이의 불행한 결혼과 어느 시골 기차역에서 발견된 그의 마지막에 대해서만 기억하고, 그의 명성 뒤 가려져 소외된 채 오명을 쓴 톨스토이 부인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제2의 성』에 제시된 사실들은 지금에서 보면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할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고 동의하지 않는 사실들도 있다. 하지만 그가 여성에 대하여 탐구한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인 방법은 당시로서는 전무한 것이었고 여성학에 있어 새로운 제시였다는 생각이다.
당시 여성들이 처한 현실에 더 나아가 오늘날 여성의 상황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한층 더 복잡한 역학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경제적인 자립뿐만 아니라 욕구 실현이라는 문제가 더욱 어려운 문제점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기본소득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지점이다.
한 가지 떠오른 그림이 있다. 유명한 정치인들의 경우 부동산과 같은 축재를 부인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경우들을 본다. 명예, 성취, 권력은 남편이 가져가고, 그 부동산, 주식, 심지어 뇌물수수에는 부인이 연루된다. 남편들은 그녀의 불의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듯한 입장을 취하는 모습을 본다. 남편의 명성, 성공, 가치를 자신의 것처럼 여기는 근대 여성의 모습에서 달라진 바가 없다는 생각이다. 일반화 시킬 수 있는가? 있다고 본다.
내가 피투되어 있는 세계는 어떤 곳인가?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기투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나는 어떤 존재인가? 앞으로 어떤 의미에 기투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