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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의 백합 을유세계문학전집 4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정예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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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의 소설을 읽는다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읽을 것을 권하겠다. 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항상 마지막 부분의 반전에 있다. 통속과 순문학 사이에서 모호함을 띄며 여러 번 책을 덮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문학에서 많이 마주친 식상한 사건들 속에서 순간순간 빛나는 문장들과 번뜩이는 시선은 들었던 책갈피를 내려놓게 한다.

 

발자크는 부인했다고 하지만(초판 서문에서), 이 소설에는 발자크의 전기()적 사실과 감정이 녹아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펠릭스가 지닌 부모로부터의 사랑 결핍은 발자크의 그것과 닮았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발자크 평전에서 이 소설 『골짜기의 백합 속 주인공 펠릭스의 사랑하는 여인 모르소프 백작 부인의 모델이 드 베르니 부인이라고 쓰고 있다. 그녀는 발자크에게 어머니 같은 보호자, 부드러운 안내자, 헌신적인 협조자였고, 그 만남은 이후에도 같은 사랑의 유형을 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편지형식을 띄고 있다. 화자인 펠릭스의 연인 나탈리 드 마네르빌 공작부인의 요구에 대해 지나간 사랑을 들려주는 내용이다.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면서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했던 유소년기 에피소드는 어린 나이에 느꼈을 고독과 고통을 가슴 아프도록 공감하게 한다. 청년이 된 그는 법학을 공부하고 고등교육을 받던 도중 파리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투르로 가서 홀로 지내게 된다. 그곳 축제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외로움을 타던 그가 그녀에게 끌림은 모성이 엿보이는 순간의 태도 때문이었다. 잠시 후 그가 보인 행동은 성에 눈뜬 청년의 충동이었을까? 어쨌든 그 행위로 인해 그는 사랑에 빠진다.

소녀처럼 솜털이 난 목 위로 매끈하게 내려오는 윤기 나는 머릿결, 상상력이 뛰어다니는 산뜻한 오솔길처럼 빗이 그 위에 새긴 흰 선들, 이 모든 것이 내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어머니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아이처럼 이 등 위로 달려들어 머리를 부비며 어깨 전체에 입맞춤을 퍼부었다.(30p)”

 

모르소프 백작은 18세기 대혁명 이후 10년의 망명생활과 10년의 농촌생활로 인해 늙었고 정신적인 병을 얻는다. 모르소프 백작 부인(앙리에트)은 숙모로부터 금욕주의적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의 결합은 출발부터 한쪽의 헌신과 인내가 일방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삶은 백작의 광증과 두 아이들의 병약함으로 인해 걱정과 불안을 안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펠릭스의 등장은 숨통을 트이게 하는 사건일 수도 있고, 자녀나 남편에게 죄의식을 느낌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자학하게 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었다. ‘골짜기의 백합은 이 앙리에트를 가리키는 펠릭스만의 은유이다.

 

유년시절의 상처와 모성에 대한 결핍을 지닌 펠릭스는 모르소프 백작 부인(앙리에트)에게 자연스럽게 끌린다. 앙리에트 역시 자신의 고단함에 공감하는 그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그들에게서 결핍을 투사하고, 상대방의 상처에 전이되는 사랑의 유형을 본다. 한편, 사랑은 많은 경우 이런 전이와 투사로 시작되는 것을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앙리에트는 펠릭스의 고백을 거절하고 친구 또는 어머니로 대할 것을 요구한다. 펠릭스는 그녀를 성녀와 순교자로 숭배한다. 앙리에트를 향한 절대적인 사랑-“중세의 기사도를 연상시키는 사랑(252p)”-을 마음에 담고 돌아간 파리 사교계에서 펠릭스는 영국 귀부인 레이디 더들리와 관능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에 빠진다. 이를 알게 된 앙리에트는 찾아와 변명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펠릭스에게 다정하지만 가혹한 태도로 대한다.

 

상심으로 인해 죽게 된 앙리에트, 죽음이 임박한 그녀를 바라보는 펠릭스의 시선이 안타깝다.

그녀는 더 이상 내 사랑스런 앙리에트도, 고귀하고 거룩한 모르소프 부인도 아니었다. 그것은 보쉬에가 말했던 이름 없는 무엇인가였다. 그것은 허무와 싸우고 있었으며 갈망과 충족되지 못한 욕망 때문에 삶으로 하여금 죽음을 상대로 이기적인 맞대결을 하도록 시키고 있었다. (344p)”

남편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고 인내한 자신의 삶을 후회하고 거짓이 아닌 실제의 삶을 살고 싶다고 고백하는 그녀, “미친 듯한 교태를 부리는 그녀를 바라보고 아연실색하는 펠릭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진심을 보이는 그녀 앞에서 당황하는 그는 누구를 사랑한 것일까? 시몬느 보바르의 2의 성을 떠올린다. 남성의 여성을 향한 숭배적 사랑은 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을 타자로서 신화화하고 있는 것이다.

 

앙리에트(모르소프 백작 부인)을 향한 펠릭스의 숭배는 그 언어가 자칫 통속으로 읽힐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자면,

달빛의 조명을 밝은 두 줄기 굵은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나와, 볼을 타고 얼굴 끝까지 흘러내렸다. 나는 그 순간에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마셨다. 남몰래 흘린 눈물, 지쳐 버린 감성, 한결같은 정성, 끊임없는 불안으로 보낸 10년의 세월과 여성의 가장 고귀한 용기가 묻어 있는 그녀의 말들은 내 안에 경건한 열망을 불러 일으켰다.……이것이 사랑의 첫 영성체입니다. 그래요, 저는 지금 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성혈을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 교감하듯이 부인의 영혼과 결합했습니다. 가망 없는 사랑도 행복입니다.” (103p)”

이런 내용들이다.

이런 과잉된 감정과 언어들 때문에 그가 전하려는 고통과 괴로움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발자크에게 실망할 뻔 했다.

 

반전은 에필로그처럼 붙어있는 나탈리의 답장이다. 통속적으로 읽혔던 장황한 문장들과 생각이 발자크가 아닌 펠릭스의 것이 되면서, 발자크의 메시지가 선명해진다.

당신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읽어보니 …… 당신은 모르소프 부인의 미덕들을 자랑함으로써 레이디 더들리를 상당히 성가시게 하셨고, 영국식 사랑의 기교들을 과시함으로써 백작부인을 많이 아프게 하신 것 같군요. 게다가 당신의 마음에 들었다는 장점밖에 없는, 저라는 가엾은 여인을 배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앙리에트처럼, 또는 아라벨처럼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하신 셈이죠.(382~387p)”

나탈리는 펠릭스가 상대방을 대상화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글쎄……과연 발자크가 펠릭스와 같은 사랑을 하지 않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아니, 부정적이다. 작가는 삶에서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글 안에서 넘는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노출 본능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은 거짓이다. 더 정확하게는 위장이다.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이 행복해 죽겠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때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불행한 현실에 마취제를 주사한다. 독자들 또한 마취제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뿐이다.(생의 이면이승우 24p)”

 

발자크는 펠릭스를 화자로 등장시켜 숭배와 같은 사랑의 고백들을 장황하게 펼쳐놓고 독자를 질리게 한 후, 마지막 나탈리의 답장으로 그런 낭만주의 사랑의 종언을 선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도 실천할 수 없고, 잘못이라고 생각해도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이 연민을 자아내는  모순덩어리 인간 발자크는 연인의 비난을 통해 자신의 삶과 일치하지 않기에 하지 못했던 말을 하고 있다. 이 나탈리 드 마네르빌 공작부인의 답장은 발자크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하는 에필로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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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4-22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로만 치면 진짜 죽이지 않습니까? ㅎㅎㅎ 열세 살 짜리 꼬마처럼 보이는 스무 살 청년이 모르소프 백작부인한테 홀딱 빠져서 부인의 목을 기습, 입을 맞추었으니, 당시에 양치나 했나, 아이구, 침 냄새 그거 어땠을까요? ㅋㅋㅋㅋ
참 다양하게 잡놈들 많이 나오는 작품입니다.

그레이스 2024-04-22 16:18   좋아요 0 | URL
ㅎㅎ
저는 그 장면에서 깜놀했는데...^^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모성에 대한 그리움과 성적 충동이 마구 뒤섞여 있는것 같기도 해서 안됐기도 하고 그랬어요 ^^

새파랑 2024-04-22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표지는 처음 보는데 재미있어보입니다~!! 게다가 서간문이라니~!!

그레이스님은 진정한 발자크 마니아 이십니다. 발자그레이스~!!

그레이스 2024-04-22 22:04   좋아요 1 | URL
ㅎㅎ
넘 재미있네요
읽어가다보면 서간문인지 잊어버려요,
나탈리를 부르는 돈호법이 나올때 아! 편지 였지... 합니다.
 
[eBook] 로기완을 만났다 (개정판)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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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향한 얕은 공감과 거짓된 연민, 금방 지치고 바닥을 보이는 나의 위로와 수고를 떠올리고 얼굴을 붉히게 하는 글들이었다. 열띤 위로로 가장된 자기만족과 담담함으로 감춘 무심함을 들키고, 나에게 기대하며 다가온 그들은 다시 원래 있던 거리만큼 떠나가던 순간들을 기억하게 했다. 진심을 들켜버린 그 순간조차 외면하고 잊어버린 나의 위선을 고발하는 글이었다.

 

화자(話者) ‘가 묻듯 태생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성되는그 연민이라는 감정이 거짓 없는 진심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포기되어야 하는(30/123)”가를 생각했다. 답은 가깝고 명료함에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시간, 수고, 공간, 관계, 돈 등 내가 쌓아올린 것, 소중히 여기는 나의 것을 내주고 포기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엔 정량이란 것이 없다는 게 문제일지 모르겠다.

 

는 죄책감 때문에 행복해질 수가 없다. 아니 행복하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혐오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너를 혐오해. 생전 처음 본 사람이 적의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쏘아붙인다 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새벽이다.(18/123)”

 

는 다큐프로그램의 메인 작가였다. 형편이 안 좋은 사람들의 사연을 미니 다큐로 내보내고 ARS로 후원을 받는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들을 미리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려 애썼다. 윤주는 뺨에 신경섬유종이 크게 자리 잡고 있어 얼굴 대부분을 머리칼로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엄마는 떠나고 아빠는 돌아가시고 동생은 행방불명으로 홀로 살아가는 열일곱살 고등학생 윤주에게 는 조금 특별하게 마음을 기울였다. ‘는 욕심을 부렸고, 윤주의 방송날짜를 시청률이 높은 추석으로 정하고 수술날짜도 의사와 상의해서 미뤘다. 수술실에 들어간 윤주의 종양은 신경섬유종이 아닌 악성으로 밝혀졌다. 화자는 죄의식에 갇혀버렸다. 수술을 미룬 그 세달 동안 악성으로 변한 것일지 모른다는 가학적 의심 때문에 는 괴로웠다. 윤주를 대했던 마음이 자족적이고 가식적인 연민에 지나지 않았던 거라는 의심과 선의에서 나온 결정이었다는 위로 사이에서 덧없어한다.

 

는 브뤼셀의 L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글을 쓴다는 구실로 브뤼셀을 향한다. 그것이 도피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L’과 면담했던 브뤼셀의 의사 박씨에게서 받은 L의 자술서와 일기를 통해 그의 행적을 따라가며 복기한다. 여기에 윤주의 어린 시절과 암 투병 중인 현재의 불행, ‘의 죄의식이 오버랩 된다.

가방에서 로의 일기를 꺼내 이번만큼은 행간의 의미,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까지 꿰뚫는 독서를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섣불리 연민하지 않기 위하여, 텍스트 외부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내부로 스며들어가 스스로에 대한 가혹한 고통과 뒤섞인 진짜 연민이란 감정을 느껴보기 위해서.(35/123)”

 

L의 이름은 로기완, 북한에서 연길을 거쳐 브뤼셀로 망명한 탈북인(북한이탈주민)이다. 연길에 어머니와 불법 입국했고, 어머니의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시신을 판 돈으로 베를린을 거쳐 브뤼셀에 도착했다. 호스텔 굿 슬립 good sleep’ 리셉션 직원의 냉랭함 앞에서 뒤돌아 가슴에서 방수포에 싸인 650유로를 꺼내 세던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묵직한 통증이 가슴속에 내려앉았다는 화자를 따라 나 역시 먹먹함을 느꼈다. 일주일을 머뭇거리던 로기완은 한국대사관을 찾아가지만, 밀입국할 때 버렸던 신분증이 없어 북한인임을 증명할 방법이 없어,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한다. 159센티미터 단신, 47킬로미터의 왜소한 몸인 그는 헬로봉주르조차 알지 못하는 무국적자이자 이방인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단서들은 생각보다 허술하다. 일상에서는 요구받지 않는 그 증명서들이 로와 같은 이주민, 망명자들에게는 그들 존재를 입증하는 단서들이 된다. 그것이 주는 위로는 영원한가? 개인의 절대적인 존재감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나무둥치에 주저앉은 날개가 젖은 새처럼 하늘로 날아갈 수도 땅으로 떨어질 수도 없는 순간순간을 살고 있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8/123)”

를 브뤼셀로 이끌었던 로의 문장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하지 못하던 시절의 로가 그러했을까? 아니 우리 모두가 인생의 많은 순간 그렇게 살아간다. 입국허가를 받지 못한 채 그 사회의 터미널에 있는 이방인이 된다. 대사관을 나와 담장에 기대 설움을 토해내고, 우연히 들어간 성당에서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들으며 오열하던 로의 모습에서 외로움의 극치를 본다.

 

로의 국적이 북한임을 판별하기 위해 인터뷰했던 의사 박 역시 탈북인이다. 그는 남한에서 벨기에로 왔다.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한 죄의식과 함께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를 갖고 있다. 상처(喪妻) 후 그는 의사를 그만두고 북한에서 온 난민신청자들의 국적을 판별하기 위해 면담을 하는 봉사를 하고 있다. 박이 로의 자술서와 함께 주 벨기에 한국대사 앞으로 쓴 코멘트는 로와 같은 난민신청자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저는 귀하께 로기완의 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보냅니다. 그는 비록 북한 신분증을 갖고 있지 않지만, 저는 그가 북한 사람임을 확신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를 돕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무적이고 정치적인 방식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그를 도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적인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놓치게 되는 것은 개개인의 고통이며, 이것이 우리의 비극임을 부디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의심되는 점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저에게 연락하십시오.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함께 전합니다.(91/123)”

 

이 코멘트를 쓰고 있는 박과 그것을 인용하고 있는 의 분노가 느껴진다. 그렇게 는 이방인 로의 행적을 쫓으며 냉담하고 폭력적인 태도를 보였던 이들에게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그의 외로움과 슬픔에 전이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슬픔에까지 진심이라는 잣대를 들이밀어 어리석은 검열을 했음을, 진심이나 진실을 지키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음을 깨닫는다. 타인인 이상 현재의 시간과 느낌을 오해와 오차 없이 나눠 가질 수는 없다는 불변의 진리는 어쩔 수 없기에 인정하고 슬픔은 슬픔으로 반응해야 했다. 타인이 내 삶으로 걸어 들어온 거리만큼 나 역시 그에게 다가감으로 내 인생을 보여줘야 한다.

 

이렇게 깨달아 가는 동안, 환상처럼 보이기 시작했던 그것의 형태로 선명해지는 시각적인 장치는 의 생각의 변화와 함께 멀리 있는 윤주의 상황을 암시한다. 성공적이었지만 귀를 살리지는 못했다는 윤주의 수술 소식과 함께 그것의 형태를 선명하게 갖춘다. 그리고 는 그 귀에 그동안 할 수 없었던 말들을 그 귀에 대고 고백한다. 그것은 윤주의 대체물이기도 하다. 그 귀에 대고 말하는 것은 단절됐던 통화이기도 하다. 다의적이며 탁월한 시각적 장치다.

 

이 소설에서 의사 박의 삶 역시 의료 조력 사망(MAiD, Medical Assistance in Dying)’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박의 고통을 다 알 수는 없기에 아무것도 물을 수 없다. ‘는 윤주, , 로에게 진심으로 공감했을까? 이것이 읽고 난 후 드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진심이란 잣대는 누구 혹은 무엇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일까?

 

처음으로 돌아가 태생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그 연민이라는 감정이 거짓 없는 진심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포기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가깝고 명료하다. 그런데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시간, 수고, 공간, 관계, 돈 등 소중히 여기는 나의 것이 필요하고 포기되어야 한다. 거기엔 정량이란 것이 없다는 막연함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을 읽고 공감했다고 해서 나는 현실의 로기완, 윤주, 박에게 거짓 없는 연민과 환대를 보일 수 있을까? 그들은 이 소설 속의 정제된 표현들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닐 텐데.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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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4-04 0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머 저 이거 표지 때문에 연예인이 썼거나 드라마 대본집 같은 건 줄 알았어요;;; 이런 내용이었다니..! 😱

그레이스 2024-04-04 08:11   좋아요 1 | URL
^^
넷플릭스에 영화가 올라오고 광고가 있어서 그런듯요.
잠깐 스쳐가는 광고 영상으로 본 송중기 배우때문에 읽는 내내 방해가 됐어요.
159센티미터 47킬로의 로기완과 배우가 매칭이 되지 않아서....
배우의 이미지를 지우느라 애쓰면서 읽었네요.
영화는 안보려구요 ㅠ
책이 넘 좋았거든요^^

새파랑 2024-04-05 15: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리뷰를 보니 흥미롭네요. 타인에 대한 나의 연민이 진심인지 아닌지 자주 고민했었는데 그와 비슷한 느낌의 작품인거 같네요~!! 마지막 질문에 공감합니다~!!

그레이스 2024-04-05 15:46   좋아요 2 | URL
^^
참 어려운 문제인듯요
함께 슬퍼하고 할수 있는 만큼 도와주는 것조차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얄라알라 2024-04-07 19:17   좋아요 1 | URL
남 얘기처럼 소비할게 아니라 뜨끔뜨끔 자기를 돌아봐야만 읽을 수 있는 소설인거 같아서 읽기가 겁나기도 하네요^^:

그레이스 2024-04-07 19:31   좋아요 1 | URL
예~
내내 저 스스로를 비추고 각성하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따뜻하기도 해요
 
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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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없으면 소설도 없다.(212p)”

작가는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으로 흩어져 있는 삶의 파편들을 선택하거나 배제하고, 왜곡함으로 소설을 쓴다. 그러므로 독자는 그 파편들 속에 감추어 둔 작가의 내밀한 음성을 발견해야한다. 독서는 파편들을 퍼즐 맞추듯 맞춰 사실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다. 독자가 읽어야 하는 것은 소설 속에서 형상화되고 발견해 낸 작가이지, 현실의 작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독자는 소설로부터 읽은 작가를 현실의 작가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흔히 범한다.

 

소설 중 화자 는 작가로서 출판사 편집자로부터, 한 작가의 문학과 삶을 집중 조명해서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내는 작가탐구에 글을 써줄 것을 청탁받는다. 그에게 부여된 글쓰기 대상은 그 작가의 소설이 아니라 바로 그 작가라는 말은 쉬울 수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어려운 작업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 작가의 삶의 과정그의 문학이 맺고 있는 인과성(14p)”을 전달하는 작업은 어렵게만 느껴진다.

 

몇 번의 인터뷰와 그의 자전적 소설에서 작가의 의식 안쪽에 단단하게 붙어 그의 삶과 문학을 지배해 온 질기고 억센 몇 개의 큰 흉터들을(19p)” 발견한다. 사실과 진실에 관해 침묵하는 박부길 앞에서 는 어쩔 수 없이 그 흉터들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자기 노출적인 소설 <내 속의 타인>에서 마주친 흉터들은 이후 작품들 안에서 질서 없이 몸을 섞고 있다. ‘는 그 흔적들을 찾으며, 어느새 박부길을 소설적으로 바라보고 있는(18p)” 자신을 깨닫게 된다.


가 작품들에서 찾은 파편들로 맞춰진 퍼즐, 그는 이렇게 불행하고 지독히도 외로운 존재가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비극적이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모친의 이야기 속에만 존재했던 신화 속 아버지는, 유년기의 그가 목격한 한 남자의 광기와 죽음, 그 남자를 향한 이유모를 끌림, 그의 죽음에 자신이 가담했다는 죄의식, 선산을 태우고 고향을 떠나면서 흉터가 된다. 모친의 사랑 역시 받아보지 못하고, 자신을 향한 사랑을 왜곡된 정서 죄의식과 회환으로만 표현하는 애처로운 어머니를 외면하는 그는 굶주리고 외로운 존재다. 그가 고향(현실)을 떠난다는 것은 곧 무극사(신화)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95p)”이지만 그 신화는 무극사에서 끝이 난다.

 

작가탐구를 준비하면서 박부길의 자전적 작품을 <지상의 양식>을 싣기로 한다. 이 소설은 액자소설의 형식으로 고향을 떠난 그의 청소년기와 20대의 삶을 그리고 있다.

외로움 안에 갇혀 있었던 그는 같은 세계에 사는 동질의 원형질을 가진 단 한 사람의 동료를 만나는 것(141p)”이 간절했기에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습관적인 독서 안에서 의도적인 오독을 한다. 골방에서 스스로를 가두고 철저히 혼자인 존재가 하는 독서란 외부 세계와 개인의 내면 사이에 높은 벽을 세우고 하는 행위이기에 오독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는 오독이 일어나는 상황과 그 빈번함을 소름끼치게 깨달았다. 나의 상황, 기분 안에서 작품들을 읽고 해석했던 많은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그는 나처럼 이 세상에 잘못 보내진 나의 형제, 나와 동일한 표적을 소유한 나의 동지, 나와 원형질이 같은 단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159p)” 그러므로 사랑 역시 그 대상을 자신과 같은 세계의 사람이라는 오해로 시작한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 사랑의 불구성을 짐작할 수 있다.(288p)” 사랑을 받지 못했고 배우지도 못한 그의 사랑은 너무 아슬아슬하고 가학적이었다고, 전쟁처럼 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사랑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289p)” 했다.

 

그의 사랑도 신앙으로 대체되어 있는 갈망도 가짜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신과 인간의 문제를 깊이 천착한 다른 작가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회의와 갈등, 반항과 구원의 드라마로부터 너무 자유롭다.(262p)”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도 동료들과 공감대를 찾지 못한다. 그가 주장하는 학자적 태도는 불통의 이면을 갖고 있다. 그가 세상을 따돌리는 오만함은 사실 슬픔과 울분, 또는 슬픈 울분이고 그 뿌리는 좌절감(31p)”이다. 그는 세상과 불화하며 부유(浮遊)한다. 많아지는 생각은 결핍으로 향하고, 불화감은 증폭된다. 그 증폭된 불화감은 더 복잡은 생각의 밑천이 되는 악순환에 갇힌다.


이승우 작가는 이 액자소설을 통해 한 사람의 지독한 외로움을 통해 사랑, 신앙심이 진실이 아닌 거짓일 수 있는 인간상황에 대해 그려가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면서 그것을 드러내거나 감추고 가장하면서 쓰는 작가의 작업과 그렇게 흩어져 있는 작가의 파편을 읽어내는 독자의 시선에 대해서 생각을 전하고 있다. 동시에 여러 가지 주제를 전하기 위해, 이런 소재와 구성을 취한 작가의 글쓰기가 탁월하다.

 

작가는 물론 자신의 삶을 사실 그대로 베끼지는 않는다. 기억되거나 말해진 사실은 결국 발췌된 사실일 뿐이다. 선택과 배제를 통해 사실이 구성된다. 거기에 굴절과 왜곡이 끼어든다. 그것이 작품이다.(210p)”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이러한 글쓰기를 보여주는 백미라 할 수 있다. 어둠이 그와 충분히 친해졌을 때, 박부길은 충동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으로부터 상상력의 위험을 경고 받은 바 있는 작문 <아버지>의 세련된 늘이기에 다름 아닌 이 작품을 씀으로써 그는 막혔던 글의 길을 비로소 뚫는다.(335p)” 그의 글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선생님들의 경고가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그의 잠재된 죄의식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기도하듯 내면의 고백을 털어놓는다.

 

사람들은 왜 기도를 하는가. ‘그것은 자기 이야기를 마음 놓고 솔직하게 늘어놓기 위해서이다.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한없는 끈기와 인내로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이야기들을 들어 줄 상대를 찾아서 사람들은 기도처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지상의 양식>) (331p)“

 

그는 그 죄의식을 노출하여 공식화함으로써 아버지를 인정하고자 했다.(335p)” 어릴 적 뒤뜰에 살고 있던 광인 아버지를 감추려했던 어른들의 태도로부터 전이된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아버지의 존재를 시인하고, 아버지로 하여금 그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는 새로운 신화를 쓰고자 했다는 말에서 뭔가 긍정적인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가 해낸 것은 아버지와의 값싼 화해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교묘한 것이다. 죄의식의 되돌림.(335p)”이라는 말에서 자전적 글쓰기가 가져다 줄 수밖에 없는 회환에 갇히는 작가의 고통을 보게 된다. 작가의 작업은 교묘하다. 드러냄은 전략적이다.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335p)”

작가들은 그렇게 신화를 쓴다. 그러기에 글쓰기가 자유롭게 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 고통스럽지 않을까?

 

사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고, 그 도시가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의 감추어진 마음 혹은 무의식 혹은 영혼의 어두운 곳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다. 그것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면이고 그것을 보는 것은 지울 수 없는 고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승우 작가의 이 책 제목이 생각났다. 누구나 갖고 있을 생의 이면’,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기억나게 하는 흉터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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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1-12 19: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삶을 사실 그대로 베끼지는 않지만 상당 부분 자신의 경험과 생각은 들어갈 것 같아요.
올려주신 기도에 대한 인용문~^
저는 신에게 제 얘기 늘어놓는 게 귀찮아서 ㅋㅋ
남을 위한 기도만 하는 듯요^^

그레이스 2024-01-12 21:56   좋아요 3 | URL
그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그 기도 장면 너무 처절했어요.

혹시 ‘다 아시잖아요?‘
이런 말은 안하시나요?
^^

미미 2024-01-12 2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죄의식의 되돌림‘, ‘감추기 위해 드러낸다‘ 그런 고된 작업이기에 작가들의 평균 수명이 의외로 낮은가 봅니다.ㅎㅎㅎ
그래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절박함이 느껴져서 슬프기도 하고요. ‘흉터‘맞는 것 같아요!!

그레이스 2024-01-12 21:57   좋아요 2 | URL
예!
작가의 글쓰기의 고됨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서곡 2024-01-14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일요일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레이스 2024-01-14 15:39   좋아요 1 | URL

서곡님두요
길 미끄러운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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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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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박구리가 죽어 있던 그날 아침(9p)

직박구리를 묻어주고,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던 철이는 가슴 속에 치밀어오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슬픔일까, 아니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까?” 생명 안에 내재되어 있는 죽음을 불현 듯 실체로 직면한,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보아버린 자의 두려움과 슬픔일 수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 감정은 마치 상점의 쇼윈도 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볼 수는 있지만 손으로 만질 수는 없는.(16p)“이란 표현에서 수상함을 발견한다. 인간이 감정을 이런 식으로 느끼나?

 

막연한 추상으로 먼 곳에 머뭇거리던 죽음이 어느 날 급습하여 아버지의 몸을 관통해서, 나와 정면으로 맞닥뜨렸을 때의 그 예리한 통증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지상에 숟가락 하나현기영 11p)”

 

대부분 발작적인 구토증, 흉통, 손끝의 저림, 눈물 등 즉각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철이에게는 그 분출이 거치는 단계가 있는 듯 보인다.

 

철이는 휴머노이드다. 스스로를 인간으로, 휴먼매터스의 연구원인 최박사를 자신의 아버지라 여기고 있던 철이의 정체는 곧 드러난다. 등록되지 않은 휴머노이드를 검거하는 요원들에 의해 잡혀 수용소로 보내진다. 그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독자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 철이는 수용소에서도 오랫동안 자신이 휴머노이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어떤 느낌일까? 후에 자신에 대한 자료를 찾아 나선 철이의 기억은 항상 직박구리가 죽어있던 그날 아침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흔들리던 그 순간에서 시작한다. 존재의 근원이 흔들리고 딛고 있는 지반이 사라진 주변을 둘러싼 모든 관계와 사물이 무의미해지는 그런 경험이 아닐까?

 

철이가 아버지라고 여겼던 최 박사는 가장 인간다운 휴머노이드, 인간의 감정과 윤리를 그대로 가지고 인간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해나갈 휴머노이드(94p)”를 연구했다. 철이는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철이가 갖고 있는 성품은 만들어질 당시 입력된 데이터들과 최박사가 철이에게 했던 교육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철이에게서 보여지는 생명에 대한 사랑과 공감능력, 배려심 등은 가장 이상적인 인간성의 재현이라고 볼 수 있다.

 

철이가 수용소에서 만난 선이는 인간의 치료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클론이고, 민이는 애완용으로 제작된 휴머노이드다. 인간이 해야 할 노동이나 물질적 활동 뿐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까지 휴머노이드에게 역할을 맡기게 되면서 인류는 존재할 이유를 상실한다. 의식은 데이터화 되어 사라진다.

 

몸이 파괴되거나 수명이 다한 휴머노이드는 인공 뇌를 활성화 시켜 의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의식으로만 존재하는 상태는 마치 전신마비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데이터 망을 이용해 자신이 살던 휴먼매터스 위를 조망하는 자유를 보여주기도 한다. 애초에 인간의 육체를 가진 존재로 만들어진 철이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몸으로 해왔는가 새삼 깨닫는다. 작가는 민이의 재활성화라는 문제를 통해 다른 몸을 가진 존재는 처음 존재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될까? 라는 질문을 하지만, 철이가 의식으로 있을 때나 두 번째 몸을 갖게 될 때, 다름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순으로 그 질문을 의미 없게 한다.

 

몸이 낡아 그 생명을 다해도 구조요청만 하면, 의식으로는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철이는 더 이상 존재하길 거부한다.

 

여기서 구조되더라도 육신이 없는 텅 빈 의식으로 살아가다가 오래지 않아 기계지능의 일부로 통합될 것이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되는 삶. 자아라는 것이 사라진 삶. 그것이 지금 맞이하려는 죽음과 무엇이 다를까?(295p)”

 

자작나무 숲에 누워 있는 철이는 직박구리가 죽어있던 날 아침을 회상한다. 의식이 사라지는 완전한 소멸의 순간 그가 회상한 그 장면은 철이 안에 심겨진 궁극의 인간성이 아닐까? 그 인간성이란 유한한 육체를 갖고 있는 인간의 죽음이다. 어쩌면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인간의 조건이 윤리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수용소의 문제, 생명 윤리, 인간의 조건, 죽음, 마음의 실체 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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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1-07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영하 작가는 계속 책을 내고 있군요!
한국 작가들 작품을 안 읽은지 너무 오래 되어 요즘은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궁금하긴 합니다.
요즘 한국 작가들 책들 보면 정말 예쁘게 잘나와 매우 읽고 싶게 만드는 거 같긴한데....읽어야할 세계문학 대기작이 넘쳐나서 읽을 수가 없어요..^^;; 그럴수밖에 없는게 김영하보단 부차티가 매우매우매우 좋아서...그런 순환의 연속..ㅎㅎ 한국작가들은 잠정적 후순위로 계속 밀리네요...하하~

그레이스 2023-11-07 11:44   좋아요 1 | URL
김영하작가의 읽어본 작품 중에 좋았어요.
항상 뭔가 걸리적 거리는 구석이 있었는데,,,
<검은꽃>, 소재는 좋았고 초반 내용도 좋았는데 뒤로 갈수록 읽기 힘들었구요
<엘리베이터...>는 처음부터 힘들었구요

항상 아이디어를 뒷받침할 스토리 구성력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제 생각!
제게 좋았던 작품은 <살인자의 기억법>이었는데... 이 작품 추가했습니다.
자료 풀이 좀 넓어지고, 구성력도 더 좋아졌단 생각입니다.
이런 평가할 자격이 있나 싶지만요.
제생각입니다.^^

새파랑 2023-11-07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의 별 다섯이군요~! 이 작품 너무 감동적이라고 하던데~!!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이 떠올라서 왠지 손이 안가더라구요 ㅎㅎ

그레이스 2023-11-07 19:11   좋아요 1 | URL
저도 클라라와 태양이 생각나긴 했어요
그런데 그 작품과는 결이 다른듯요.
이시구로는 모호한 면이 있는데,,, 이건 차이가 있는듯요
뭐가 좋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읽는데 어려움이 없어서 하루 안에 읽는게 가능하더라구요.
마음 감정 이런 것에 꽂힌다면 추천합니다.^^
 
발 없는 새
정찬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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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통 그림자극 홍루몽을 보고 나오면서 주인공은 실재와 허구, 있음과 없음에 대한 상념에 빠진다. 이 소설은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허물고, 있음이 없음이 되고 없음이 있음이 되는 공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죽을 때야 비로소 땅에 내려앉는다는 발 없는 새’, 장궈룽(장국영)과 워이커씽이 그런 존재다. 장궈룽은 실재고 워이커씽은 허구다. 작가는 장궈룽의 비극적인 결말에 허구의 인물 워이커씽과의 조우를 끌어들인다패왕별희의 감독 첸카이거의 회상을 통해 이들의 만남을 재구성한다. 장궈룽이 패왕별희의 주인공 뎨이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이 워이커씽이다. 매이란팡(매란방)은 중국 경극배우로 실존인물이다. 이 매이란팡이 장궈룽이 연기했던 뎨이의 모델이다. 매이란팡과 장궈룽 사이를 허구인 워이커씽이 잇는다. 장궈룽은 패왕별희이후 뎨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고 한다. 영화 속 그의 연기를 보면 그럴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뎨이의 잘려나간 여섯 번째 손가락처럼 모친의 사랑을 상실한 유년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허구 속 인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고단한 날개짓을 하다가 죽음으로 안식을 얻었다. 워이커씽 역시 그 영혼이 쉬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허구적 공간에 살았던 실존인물 장궈룽의 삶을 실재 역사를 통과한 허구의 인물 워이커씽과 직조하며 시작하는 이 소설은 있음이 없음이 되고 없음이 있음이 되는(9p)” 세계를 창조한다.

 

워이커씽에게는 난징 대학살이라는 비극적 현대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이 비극이 그를 만들었다. 난징이 그다. 그러나 그의 정체성은 이 땅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러기에 그는 난징대학살의 문제를 계속해서 탐구하고 규명하려 애쓴다. 땅에 내려앉기 위하여.

 

아이리스 장은 난징 대학살을 통해 감춰진 참극을 세상에 고발했다. 그녀는 인터뷰와 조사, 집필 과정에서 만난 난징의 심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참혹은 그녀로 하여금 길을 잃게 했다. 난징이 발 없는 워이커씽을 낳았고, 아이리스 장에게서 발을 가져갔다. 두 사람 모두 인류라는 실존적 공간에 디딜 곳을 찾지 못하는 발 없는 새.

 

위안부로 난징에 끌려갔던 조선의 여인들, 히로시마에서 인류의 종말과 같은 경험을 했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 돌아갈 곳을 잃은 사는 동안 그 영혼이 쉼을 얻을 수 없었던 존재들이다. 일본, 한국, 중국의 예술가들은  예술에서 구원을 찾기도 하고 오히려 침몰되기도 한다. 첸가이거가 전자라면, 미시마 유키오와 같은 작가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허구적 서사를 현실 쪽으로 끌어오려고 했던 미시마 유키오의 시도는 극단적 행위로 이어졌다. 영화감독 첸가이거의 나의 홍위병 시절은 큰 울림을 주었고, 그의 영화는 그에게 구원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 그의 작품을 보면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다. 중국이 나아가고 있는 현재의 방향에 발을 맞추고 있는 그의 행보는 역사와 그 시대의 사유를 벗어나지 못하는 개인의 한계를 생각하게 된다. 혹시 그것이 중국인으로 태어나 그곳에서 발을 딛고 사는 방법은 아닐지?

 

소설 속 워이커씽은 첸카이거와는 다른 방향에서 찾는다. 그러나 세상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는 난징대학살과 같은 잔인하고 참혹한 범죄의 근원을 천황숭배에서 찾는다. 홀로코스트와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전체주의가 아닌 숭배! 그러기에 그들은 죄의식을 갖지 않는 듯 보인다. 그 숭배는 홍위병의 폭력 안에도 존재한다.

 

한중일의 근현대사를 이룬 사건과 인물들과 허구의 인물들이 조우하고 마주쳐 생성한 이야기는 장자의 몽상처럼 여겨진다. 장자가 나비인지 나비가 장자인지.... 워이커씽은 비극에서 탄생한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다. 장자가 나비를 보듯, 나비가 장자를 보듯, 희생자가 가해자를 보아야 하고 가해자가 희생자를 보아야 한다는 그의 말은 언뜻 선문답 같지만, 가해자가 가해자임을 고백해야 한다는 말에 힘을 싣고 보면, 폭력과 비극으로 점철된 과거사를 정리하는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패왕별희를 다시 봤다. 뎨이는 중국의 근현대사-청나라의 패망, 중일전쟁, 문화혁명 등-를 통과하며, 경극배우로서 영욕을 누린 인물이다. 그의 잘려나간 손가락은 가슴 아픈 가족사를 상징한다. 불운한 역사와 비극적인 가족사는 서로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으며, 역사의 수레바퀴는 개인을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결박해서 몰고 간다.

 

아이리스 장의 난징대학살과 션판의 홍위병이라는 책을 보았을 때와 달리, 영화패왕별희』, 『인생』,『붉은 수수밭(홍까오량 가족)』, 『사람아 아, 사람아!와 같은 문학에서 더 실재를 경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은 삶과 결혼했다는 들뢰즈의 말이 다시 내 안에서 인용된다. 그렇게 허구가 실재가 되고 실재가 허구가 된다. 나는 그 실재가 된 허구에서 삶의 진실과 가치를 길어 올린다.


『길 저쪽』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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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6-23 10: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리뷰는 역시 명품입니다! 저는 정찬 작가의 작품을 이 책으로 처음 접했는데요. 장국영 이야기를 다루고 중국 근현대사 관련해서 나온다는 배경만 아는 상태에서 읽었어요.
그레이스님 글 읽으니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느껴지고 더욱 풍성한 읽기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다시 리뷰하는 느낌으로 읽고 가네요^^

그레이스 2023-06-23 10:3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정찬 작가의 다른 책도 읽게 되네요.

미미 2023-06-24 11: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난징대학살 >과 <발없는 새>를 읽고 <패왕별희>를 다시보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네요.^^ 난징대학살도 홀로코스트만큼 깊이있게 연구되어져야겠죠?
정도가 다를 뿐 그 혐오와 잔혹성만큼은 결코 과거형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레이스 2023-06-24 11:58   좋아요 1 | URL
저는 모옌의 <붉은수수밭> 읽을때 <난징대학살> 함께 읽었어요.
충격이었죠.
<패왕별희>는 이 소설을 읽은 후에 봐서 그런지 다르게 다가오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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