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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다섯 권을 전부 들고 갈지 한 권만 들고 갈지 잠시 고민하다 세 권만 가방에 담았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사인을 『아버지의 해방일지』 한 권만 받을까, 아님 세권 다 받을까, 고민했다. 많은 사람들 사인해주려면 피곤할텐데 하는 걱정과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책들을 계속 사서 읽었던 흥분 사이에서. 결국 나는 세권을 내놓으며 “한권만 해주셔도 되요”라는 소심한 부탁을 했고, “세 권 다 해드려야죠” “『빨치산의 딸』 두 권은 염치가 없어서 못 가져 왔어요” “염치라뇨.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하죠”라는 대화를 나누며, 세권의 책에 작가 사인을 받았다.
작가는 구례에 내려간 계기와 그곳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시골 정착기를 소재로 한 단편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과 『즐거운 나의 집』에서 읽었던 내용들이 떠올랐다.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내려간 고향 마을사람들은 두 모녀를 수시로 방문하며 이것저것 가져다주신다고 한다. 그래 봬도 마음은 ‘city girl’인 작가는 불편했다고 한다. 빨치산 부모님 덕에 타인에 대한 경계가 몸에 배어서 그것이 성격을 형성했다고, 지금도 여전히 한 사람을 삶에 들일 때 오랜 시간이 든다고…. 구례에서 산 시간동안 그 긴장과 경계가 조금은 희미해진 듯 보였다. 『빨치산의 딸』 이후 작품들이 종종 그곳 사람들의 삶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빨치산의 딸』은 소설이 아니고 실록이라고 작가는 강조한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증언을 기록함으로 자신이 누구의 딸인가에 대한 정체성을 찾는 것에 치열함이 느껴진다. 작가가 고백하듯, 그 때는 자신이 “누구의 딸인가(『아버지의 해방일지』 224p)”가 중요했던 시기였다는 생각이다.
“세상을 이해하는 철학을 공부하고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알게 되면서 나는 빨치산의 딸이라는 카인의 표지가 부끄러운 것도 죄스러운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부모님은 오히려 내게 가장 순결한 이름을 물려준 것이었다. 친일파의 딸도 아니고 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매판자본가의 딸도 아니라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여성이 봉건적 인습에 묶여 있을 때 떨쳐 일어나 빨치산이 되었던 어머니의 딸이었다. 나의 지리산, 내 이름처럼 나는 가장 깨끗하고 건강한 핏줄을 이어받은 민중의 딸이었다. 나는 비로소 이승만 이래의 독재정권이 부모님에게 덧씌운 허물을 벗겨내고 부모님을 사랑할 수 있었다. 단순히 혈연적인 정뿐만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에서 조국의 아들딸로 부모님을 일떠나게 했던 시대의 모순들은 자식인 내 시대에 와서 오히려 심화된 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내가 하는 고민들을 내 부모 역시 했으려니 하는 생각은 혈육 이상의 애정으로 부모와 나를 결속시켰다.(『빨치산의 딸1』 63-64p)”
작가는 구례라는 곳에서 변화하고 가벼워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가볍게 풀어낼 수 있었던 이유도 그곳의 생활에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라는 인상적인 짧은 문장으로 시작되고, 딸의 기억 속에 드문드문 남아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는 너무 진지해서 헛웃음을 웃게 한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심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13p)”
그들의 대화는 종종 혁명과 민중에서 맺어진다. 그렇게 웃고 넘어가지만, 그 에피소드에 감춰진 노혁명가가 붙들고 있는 신념을 얼핏 보게 되어 마음 아프다. 그러기에 화자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블랙 코미디(244p)”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질게 뻔한 싸움인 줄 알면서도 지는 편에서 싸웠다. 그리고 목숨을 건 자신들의 투쟁이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기에 진지일색인 아버지의 말은 블랙코미디처럼 들린다. 웃기지만 슬프고, 가볍지만 무겁다.
구례는 아버지의 고향이자 전장이다. 패한 전쟁터. 그 전쟁과 패배는 그녀에게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를 안겨주었다. 방황하던 고등학생 시절, 하루 동안의 가출을 기억한다. 무작정 집을 나와 걸으면서, 구례를 점점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가벼워지는 것만 같았었다. 그런 그녀를 쫓아온 작은 아버지가 “고만 가자”고 “저 질이 암만 가도 끝나들 안 해야.(209p)” 하던 몇 마디는, 작은 아버지도 떠나고 싶어서 그 길을 걸었고, 떠나지 못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두 사람은 아무 실랑이도 없이 되돌아간다. “워쩌겄냐. 가야제(208p)”하며 가야할 곳, 그래서 돌아설 수밖에 없던 장면이 어느 인생에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딸에게 구례는 “기이하고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작은 감옥(163p)”이었다. 이 감옥같던 인연들은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것이고 아버지 자신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모여든 사람들, 바로 그 인연들로 인해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노년까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순간의 아버지를 만난다. 장례식장을 찾은 빨치산 시절의 동지들, 죽은 동지들의 자녀들, 좌파와 우파 친구들, 교도소에서 만난 사람들, 다문화 가정의 모녀, 그리고 전쟁 때 살려준 순경, 베트남 파병 상이(傷痍)군인 노인 등,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촘촘한 그물망(239p)”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영정 속의 아버지가 꿈틀꿈틀 삼차원의 입체감을 갖는 듯했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불렀다.(181p)”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동창생부터 철물점 사장, 과일 가게 사장, 지물포 사장 등의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아버지의 어릴 적 친구 박선생이 하루에 몇 번씩 들락거리며 데리고 왔다. 조선일보 애독자 박선생과 매일 만나 투닥거리면서도 왜 만나냐는 핀잔에 “그래도 사램은 갸가 젤 낫아야.(47p)”라고 아버지는 대답했었다.
“신우형, 복례누이, 복희누이, 상욱아. 총을 쏠 때마다 손이 떨려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네. 총구를 하늘로 겨눠도 재수 없으면 떨어지는 내 총알에 누군가 죽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 누구도 내 총에 죽는 일만 없기를 날마다 기도한다네. 부디 살아서 돌아오시게. 살아서, 꼭 살아서, 다시 만나세.(48p)”
빨치산 형제자매 친구들에게 미군식량과 함께 남긴 박선생의 편지는 가슴 아픈 우리의 현대사를 시사하고 있다. 더불어 사람은 그가 제일 낫다고 했던 아버지의 말을 납득하게 된다. 장례식장을 찾아오는 사람들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이 현대사와 연결되어있고,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하기에, 아버지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다.
허구한 날 술에 취해 있고, 남 탓만 하던 작은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딸은 아버지의 말이 이해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게, 아버지의 사정은 아버지의 사정이고, 작은아버지의 사정은 작은아버지의 사정이지, 그러나 사람이란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것 아닌가(42p)” 하고.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를 보내는 장례식장에서 그녀는 사회주의자 아닌 아버지를 전혀 알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봉건잔재 극복과 구습 타파와 혁명을 논하던 아버지는 산이 아닌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했다. 아버지는 사상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도리를 잊은 세상과 권력에 대항해 떨쳐 일어났던 것이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266p)”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화자 고아리는 아버지 장례식 마지막 밤 그동안 “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고,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음을 자각하며 눈물 흘린다. 아버지가 수감된 시간, 잃어버린 그 6년 동안 자신이 그 이전의 삶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단 것만 생각했다. 그러나 ‘사무치게’라는 말은 감옥에 갇힌 긴긴밤을 그리워하며 보냈던 아버지에게 어울리는 말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다.
작가는 이 소설을 가볍게 쓰기 위해 여러 번 고쳐 썼다고 했다. 무게를 덜어내도 덜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오늘 하루의 삶이 밥 먹고 사람을 만나고 농담을 주고받는 가벼운 일상이어도, 그 일상을 둘러싼 시대가 슬프면, 눈물이 서리게 마련이다. 세상은 이미 훌쩍 한계를 넘었지만, 여전히 해방 전후의 한계와 맞서 싸우는 중인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둔 자식의 통렬한 반성이다. 가볍게 쓴다고 해서 그것이 가볍게 읽혀지겠는가.
왜 나는 자식으로서가 아니라 부모로서 이 책을 읽게 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