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외국어를 배우는가?
에르하르트 지음, 이정희 외 옮김 / 아르케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한국인들은 영어 광풍, 중국어 광풍에 휩싸인지 오래다.
혀의 어디인지는 몰라도 영어 잘한다고 수술시키는 황당한 부모가 사는 땅이 한반도 남단이다.

철학을 가진 교육, 발도르프 학교에선 외국어를 어떻게 가르칠까?

이 책에선 원칙이 주로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에서 어떤 수업이 이뤄지는지는 더 자세한 책을 봐야 하겠다.

발도르프 학교의 외국어 교육의 초점은 이렇다.

가능한 한 어린 시기부터 외국어를 접하게 한다.
교사는 외국어로 한 시간 이상 수업이 가능한 이라야 한다.
교재가 없이 외국어를 듣도록 한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다른 문화를 익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점진적인 학습이 되도록 한다.
적극적인 관용을 배우게 한다.

발도르프 학교가 <전문적인 교사의 양성>에 비중을 두는 데 나는 적극 찬성한다.
내가 어떤 전문성도 배우지 못한 <한국의 사범대학>이 한국의 엉터리 교육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적어도 특정한 철학적 환경에서 특정한 커리큘럼을 이수해야 한다.
반드시 철학적 견지에서 지속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미군정기를 거치면서 교사의 부족으로 <긴급 양성소>과정 등을 거친 교사들이 한국의 학교에는 득시글거린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학연>에 의한 연고주의가 그 지역의 교육을 말짱 황으로 만든다.

특히 외국어 같은 과목은 단순한 <기능>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한국이 토익시험 가장 많이 보는 나라로 부각된 것은 국가적 <기능> 우선주의가 판을 쳤기 때문이다.
외국어는 반드시 <철학>을 널리 펼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외국어를 가르칠 때에도 제대로 된 교사가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은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읽을 것이 없다.
외국어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읽고 또 읽어도 한도 없을 것 같고...
영어, 일본어 등 외국어 선생님들이 읽어 본다면 도움이 될 책.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RINY 2006-03-02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정말이지 실전에서 부딪히다 보면 '이런 건 대학에서 배운 적 없단 말이야!'하는 게 너무 많습니다.

글샘 2006-03-03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교대, 사대에서 너무 쓰잘데기 없는 것만 잔뜩 늘어놓지요.
요즘에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합니다.
학급에서 학생들 관리하기, 연간 학사 일정, 학부모와의 관계... 등을 좀 다룰 수 있어야 할 텐데요... 수업에 있어서도, 지식적인 측면보다는, 어느 단계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배워서 가르치는 것과 그냥 되는대로 가르치는 것엔 천양지차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 지적 망국론 + 현대 교양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정환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그런 애들이 있을까보냐고? 있다. 고등학교까지 문과에서 정치, 역사 이런거 배우다가, 의대나 약대로 진학하는 애들 있다.

서울대에서 기초 학력이 안 갖춰진 아이들이 진학한다고 난리다. 고등학교에서 무얼 가르치느냐고...
그건 아니다.
고등학교에서 최고의 학생들이 가는 학교가 서울대 아닌가.
그런 애들 모아 놓고, 과연 서울대는 바보 만드는 학교 아니던가.
과거 독재 정권 시기엔 애들 감옥 다 보내고, 이젠 취업 준비나 알아서 하지 않는가 말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의견은 이렇다.

도쿄대 아이들이 '기본적인 지적 능력이 결여된 사람'으로서의 바보일 리는 없다.
콩도르세의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바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교양이 없다는 것>.

일본이 후진국이던 시절, 상부로부터의 획일적 관리 교육 시스템은 지적 수준 향상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지적 독립이 요구되는 시대가 되자, 그 제도가 발전의 발목을 잡는다.
어쩜 이렇게 한국과 같은지...

고등교육이 유비쿼터스(ubiquitous, 도처에 존재하는) 시대에는 대학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 <고등교육 독점 시대>와는 달라야 한다.
한때, 지금이야말로 스페셜리스트의 시대라고 한 때가 있었다. 제네럴리스트는 모든 분야에 사용할 수는 있어도, 큰 도움은 되지 않는 대중적 지적 노동자로 폄하하면서... 그러나 그것은 낮은 차원의 제네럴리스트이고, 스페셜리스트보다도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제네럴리스트도 존재한다.

사회의 모든 시스템은 결국 제네럴리스트가 움직이는 것이다.

고등학생들을 문과와 이과로 갈라서 교육하고, 대학 입시에도 불필요한 과목은 안 배운다. 그러면서 과학과 수학은 필요가 감소되고, 배우는 교과목이 전반적으로 감소한다. 그러다 보니 관심이 떨어지고, 이 관계는 사슬처럼 연결된 지식인의 재생산 구조에 맞물려 사회 전반을 무식의 나락으로 몰아 넣는다.

학교에서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은 입시에서 승리자는 될 수 있어도, 엘리트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고등학교 시절에 무엇인가를 희생한 결과, 입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가련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는 바람직한 교양인을, 지구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세계를 보는 사람,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이 그토록 목을 매는 외국어 습득은 한낱 기술에 불과하다.

그의 글을 읽다 보니, 왜 한국엔 이런 통찰들이 그토록 부족한가... 하는 아쉬움에 젖게 된다.
한국 교육의 문제점. 입 달린 사람은 누구나 밤새도록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결코 이십 년 전과 지금은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교육은 후퇴하고 있다.

올림픽을 앞두고, 교복을 벗기고 머리를 자유롭게 놔 두었다. 왜? 맘엔 내키지 않지만, 외국인 보기에 쪽팔리니까..  올림픽 기간 동안 고궁 입장료에 청소년 youth 연령은 14-24세였다. 올림픽 마치고 그 연령은 다시 14-18로 줄어들었지만...

올림픽 마치고 다시 교복을 입히고 머리를 깎였다. 왜? 꼴보기 싫으니깐. 학생이 무슨 인권?
올림픽 마치고 전국에 골프장과 대학이 마구 들어섰다.
요즘은 바보들이 대학가기 더 쉽다. 고교 졸업 학력만 있으면 4년제 가는 건 문제 없다.

평준화가 학생들의 질을 떨어뜨린다고 난리들이지만, 같이 공부하면서 얻는 것이 따로 공부하면서 잃는 것에 비해서 더 많다는 의견이 더 우세하다.
그렇지만, 김영삼 시절의 제7차 교육과정과 함께 학교를 강타한 <열린 교육>, <교육 개혁> 파동은 학교를 분쇄해 버리기에 충분한 강풍이었다.

초등학교 교실에선 뚜껑열리는 상황이 연일 속출했다.
아이들은 통제되지 않았고, 자기 주도적 학습에선 배우는 것보단 베끼는 일이 많았다. 학습의 편중성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실험, 실습, 실기, 손을 움직이는 체험 학습은 전혀 없고, 인터넷 베끼기만 강조했다.

중학교 교실에선, 학습이 실종되었고, 그 결과 아이들은 학원으로 내몰렸다.
사교육이 판을 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원인은 연합고사가 폐지된 것이다.
내신 성적으로 고교를 가게 되자, 학생들은 중간만 하면 되었다.
전처럼 모의고사도 없고, 연합고사 준비에 따른 집중도가 현격히 떨어졌다.
중3이 되어도 입시생으로서의 긴장감을 잃은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수영장, 골프장, 테니스장, 야구장, 육상 트랙에서 특기 적성을 기르기엔 한국은 너무 후진국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간 곳은? 네. 학.원.

고등학교에선 완전 바보같은 중학생을 받아서 변함없는 입시 전쟁을 준비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에 때맞춰서 도입된 선택중심 교육과정은 아이들을 <수학> 안해도 대학가는 바보로 만들었다.
<국어> 못해도 대학가는 멍청이로 만들었다.
내가 수능에 응시하지 않는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는 수업시간에 떠들지 않았으면... 하는 아이들로 교실은 가득하다. 솔직히, 학원보다 못하게 된 것이다. 학원은 수능치는 과목만 들을 수 있잖은가.

어쭙잖은 <전인교육>의 모토를 달고 여러 과목을 가르치는 학교는 학원에 비해 입시에 있어서 그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을 누가 부정하는가.

그렇지만, 그게 교육은 아니다.
대학에서 아이들을 자주적으로 뽑게 선발권을 주고,
고등학교는 알아서 교육과정을 편성하게 국가에서 관리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교육인적자원부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 모든 시기가 일치하는 것은, 국가가 책임지고 반성해야 할 일이다.

어쩌면, 그렇게 일본과 한국의 교육 문제는 비슷할까?
그것은 한국 교육이 황국 신민 교육의 연장이며, 일본의 교육 제도는 전승국 미국의 본을 받은 그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이 변화의 시대에,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아이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아이들에겐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영어>만 잘 하면 돼. <컴퓨터>만 잘 하면 돼. 하는 식의 단세포적 미래를 보여준 우리 선배들은 사죄해야 한다.

영어는 잘 하면 좋지만, 모든 사람이 잘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컴퓨터는 잘 쓰면 되지, 자격증을 딸 필요까진 전혀 없다.
초등학생이 토익 만점을 받는 나라. 토익 응시생의 절반을 차지하는 기형적인 영어의 나라.
초등학생들이 워드 프로세서 자격증을 수두룩하게 소지한 아이티 강국.
초등학생들이 피시방 가득하게 모여 <살육전>을 벌이는 대~한민국.

과연 미래는 있는가?
서울대생은 누가 바보로 만들었는가.
정답은, 우리 모두다.
서울대생(엘리트 집단의 상징으로서의)을 바보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정답은, 없지만, 이제라도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모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RINY 2006-03-01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남의 탓 하기에 바쁘겠지요.

글샘 2006-03-03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학교에 문제 있는 줄 모두 알면서도, 누구도 나서지 않는 슬픈 현실.
 
노래하는 나무
한주미 지음 / 민들레 / 2000년 3월
평점 :
절판


개개인 모두가 건강한 생각을 할 때,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발도르프 학교는 아침부터 노래로 시작해서 율동으로 하루를 연다.
우리 학교는 아침부터 딱딱한 격식에 맞춘 지시사항을 듣고, 짜증을 내면서 아침 조회를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발도르프 학교에 대한 공부를 통해서 내가 얻으려고 했던 유연함을 요즘 얼마나 잃고 있었던가를 반성해 보았다.
3년 전엔 용기를 내서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기도 하지 않았던가.
방학 중, 보충수업 비는 시간을 이용해 혼자서 조용히 음악실에서 바이엘을 치기도 하지 않았던가.
음악을 틀어주는 것보다는, 직접 연주해 주는 것이,
그것도 손끝에서 오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연주를 통해 울리는 맛이 사람을 기른다.
요즘은 음악을 흥얼거리며 아침을 시작한 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교육이란 이름으로 아침부터 아이들에게 체벌을 가한 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

창의성 있는 교육 활동은 새로운 교구나 이론을 교실 안으로 들여오는 것에서 시작될 수 없다.
생명의 리듬을 일상에서 발견하고 체험하는 교사 자신에서 출발한다.
안정된 리듬 안에서 아이들도 안정적으로 자랄 수 있다.
즐겁게 사는 교사라야 하나를 가르쳐도 올바로 가르칠 수 있다.

교사가 학부모 면담을 하면서, 아이가 처음 걸었을 때, 처음 말했을 때, 그런 관심을 쏟는 교사. 아름답다.
교사로서의 자기 계발. 이것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한다면 좋은 가르침을 줄 수 없다.
인사 정성껏 하기.
하늘 자주 바라 보기.
명상을 좀더 착실하게 하기.
공동체 성원으로 학교 일을 열심히 스스로 나서서 하기.
화 덜 내고 다른 사람 칭찬해 주기.
리듬 있는 생활하기.
내 건강을 내가 알아서 챙기기.
다른 사람 이야기를 정성껏 듣기.
바른 자세로 서 있고, 바르게 걷기.
하루를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잘 믿지 못하는 습관.
듣지 않고서는 믿으려 하지 않는 습관.
자신을 바로 세우려고 배우기보다는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후다닥 배워 치우는 습관.
이런 습관을 건강하게 바로 세우는 것이 발도르프 교사 교육의 근본이다.
우리 사범대나 교육대에서도 강조해야 할 바가 아닌가.
저자 한주미씨는 그래서 교대, 사대에서 생각해야 할 바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나도 매일 생각해야 하는 문제다.

그래서, 사냥꾼처럼 일하지 말고, 농군처럼 일할 것.

학습에서의 <잠 이야기>는 깊이 생각할 일이다.
언어와 예술 교과목은 우리의 '몸'이 그것을 익혀야 하기 때문에 날마다 되풀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사고의 힘을 필요호 하는 과목들은 배운 것을 '잠재우는 것'이 필요하다.
배운 것을 한참 동안 되풀이하지 않고 지내다가 다음 학년에 새로 시작하려면 곤란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일리가 있다. 그것이 슈타이너 학교의 <에포크> 원리다. 집중의 원리.

그들의 교사회의 시작하는 시는 읽어둘 만하다.

한 사람 한 사람 영혼의 거울에
전체 공동체가 비추이고
그 공동체 속에
한 사람 한 사람의 덕이 살아있을 때
건강한 사회의 삶이 만들어진다.

이 책은 슈타이너 교육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서는 아니다.
오히려 초창기에 우리나라에 슈타이너 교육을 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사연들이 실감나는 책이다.
영국의 발도르프 학교인 에머슨 학교에서 슈타이너 교육을 받은 경험을 잘 적었다.

가르치면서 늘 가르치는 데 대해 생각할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리의 교사론 - 기꺼이 가르치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교육문화연구회 옮김 / 아침이슬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대학 시절, 사범대 앞 비탈진 잔디밭에 붙여진 이름이 <페다고지>였다. 멋모르고 조금 높다고 -고지라고 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파울로  프레이리의 책 이름이 페다고지였다. 실천적 교육을 일컫는 말.

교직을 선택한 친구들끼리 학습을 하면서 읽은 프레이리이 <페다고지>는 교육에 대한 눈을 번쩍 띄게 했다. 교육은 지배 권력의 재생산 구조에 포함된 것이어서, 은행 적금식 교육(한국의 문제 풀이식이 해당함)으로는 변혁에 앞장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제 해결식 교육이 미래의 대안이라는 주장이었던 기억이 난다.

브라질의 선각자적인 교육학자 프레이리의 사후에 발간된 그의 마지막 저서다. 좀 지루한 부분도 있지만, 교사라면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 첫 부분은 교육자로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네 가지의 편지를 보내고 있다.
두번째 부분은 현장에서 가르칠 때 맞닥뜨리는 문제에 대한 네 가지의 편지가 실렸고,
마지막 부분은 교육 현장에서 철학하기라는 이론적 글이 실려 있다.
앞의 여덟 개의 편지는 단속적으로 읽어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고 있으며, 뒤의 두 편지는 철학적인 글이어서 비교적 딱딱한 글이다.

여느 사람들은 교사라고 한다면 교육 대학이나 사범 대학에서 교사가 되기 위한 모든 준비를 철저하게 마치고 나온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래서 졸업식과 함께 발령을 받으면 바로 유능한 교사가 되기를 기대할는지도 모르고.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범대나 교대에서는 별로 유기적이지 못한 단편된 과목들을 배우느라 허덕이고, 요즘은 임용고사를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보내다 보니 교사가 되어 있더라는 식이다.
진실로 아동에 대한 고민도, 교육 제도에 대한 철학적 통찰도, 역사적 비판의 안목도, 교과에 대한 전문적 식견도, 학생 지도와 상담에 대한 노하우, 노웨어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교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교사들은 발령받고 나서 부쩍 자란다. 다행스럽게도 첫 발령지에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또래의 교사가 있으면 서로 이야기를 통해 어려움을 나누고 해결책을 건강하게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곤란한 상황에서 자아 존중감만 곤두박질한 채, 자책하면서 스스로의 무능을 한탄하면서 피곤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브라질처럼 저개발국가의 교육 이론은 미제 교육 이론보다 촌스럽긴 하지만 우리 현실에 적합한 것 같다. 나의 가려운 점을 긁어준다는 것이다.

프레이리의 교육론을 읽으면서 밑줄 그은 부분들을 적어 본다. 두고 두고 씹어 보려고...

-------------------

교사의 과업은 진지함과 과학적, 육체적, 정서적, 감성적인 준비를 요구한다.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사랑은 물론이고 가르치는 일에 포함된 과정에 대한 사랑도 개발해야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마음의 관료화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방법을 꼭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시도를 그만두는 것이 차라리 물질적으로 이득이 될지라도, 이 도전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밝히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은 대상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이며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를 깨닫는 것입니다. 도전하고 무릅쓰지 않으면 창조나 재창조를 할 수 없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 교육 실천을 준비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저임금은 결국 가르치는 직업에 어느 누구도 매력을 못 느끼게 합니다. 많은 장관들은 별다른 적성이 없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게 될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해왔습니다.

진보적인 교사의 자질에 관하여 : 겸손(결코 자아 존중감의 결여나 체념, 혹은 비겁한 같은 의미를 함축하는 말이 아니고, 반대로 겸손은 용기, 자기 확신, 자기와 타인에 대한 존중을 필요로 한다.), 무장된 사랑이 없다면 교사 직업의 부정적인 면들을 견뎌낼 수 없다. 용기, 인내, 능력, 결단력, 인내와 조급함, 말을 절제하는 삶.

교실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읽으려고 노력하고 기록하라.

우리가 말하지 말아야할 주제나 가치란 없으며, 침묵해야 하는 영역도 없다.

교육은 정치적 행동이다. 학습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들에게 이야기하게 해야 하며, 학습자들에게 귀기울이고, 그들이 귀기울이도록 하는 일. 이것은 의도적으로 일어나야 하고, 그것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교육의 비중립성:
교육자들이 교육을 정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진보적이고 민주적으로 일관되게 살 것인가,
아니면 과거처럼 권위적이고 반동적이거나 무의식적이고 무비판적인 선택을 하며 살 것인가,
즉 그들이 스스로를 민주적인 인간으로 규정하든지 아니면 권위적인 인간으로 규정할 것을 요구한다.
모든 것을 용인하는 허용성은 때로 '자유를 지향하는 학습'이란 인상을 주지만,
결국엔 자유와 상반되는 활동을 만들어 낸다.
허용성이 말들어내는 무법천지의 분위기, 방종의 분위기는 오히려 권위적인 입장을 강화한다.
그런 반면, 허용성은 권위주의자들이 원하는 순종적이고 복종적인 사람을 만드는 <훈련>을 거부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그 투쟁을 통해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민주주의자가 되기 위한 훈련마저도 허용성은 거부한다.
허용적인 사람들은 자유에 의해서도 권위에 의해서도 일관되게 규정되지 않는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팽이 2006-02-16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두고 못본 책인데...
언젠가는 읽겠지요..

해콩 2006-02-17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하하하.. 교사들의 필독서라는 말에 쪼끔~ 긴장했는데.. 읽은 책입니다요. 캬캬
사실 프레이리 할아버님의 글은 좀 어렵게 다가와요. 대중에 대한 언어교육을 엄청 중시하는 분이니까 (원서는 쉽게 씌여졌을 것이나)번역과 어감상의 문제인 것 같은데..
추천하고 퍼갑니다. 꾸우벅~

글샘 2006-02-17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다고지에 비해서 이 책은 좀 딱딱하더군요.
그래도 편지글이라서 되는대로 읽을 수 있을 듯 한 책이지요.

역전만루홈런 2006-04-18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다고지는 읽어봤는데,,,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아이를 절대로 탓하지 마라 - 사춘기 편
아케하시 다이지 지음, 김경인 옮김 / 프리미엄북스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청소년들은 인간이 아닌 <청개구리>라서 <청>소년이라고 부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만큼 사춘기에 겪는 갈등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기성세대가 보기에 그 갈등은 별것 아닌 우스운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자기 할 일을 하기 싫어 핑곗거리를 대는 데 불과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아이들의 문제 행동엔 반드시 문제가 되는 원인이 있었고,
그것을 제대로 해결해 나가지 못한다면 사회 문제화 되기까지 하는 청소년 문제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사춘기 아이들의 마음이 왜 혼란으로 가득한지, 원인부터 대책까지 쉽게 설명한 책이다.
어려운 심리학 용어도 등장하지 않으며,
사례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 전문적인 상담이나 청소년 문제를 살펴 보기엔 조금 간략한 감이 없지 않지만,
청소년 문제에 대한 핵심은 모두 짚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신과 의사이기도 한 저자는 청소년들의 문제를 <자기 평가의 극단적인 저하>라고 본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온갖 몸부림을 통하여 아이들은 자기의 문제를 표출한다.
그렇지만, 어른들은 그것을 야단치기에 급급하지, 그 원인을 따지거나 해결책을 모색하지는 못한다.

아이들의 마음의 성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의 리듬대로 응석을 부렸다가 반항도 했다가 하는,
<의존과 자립의 반복>을 존중해 주는 것이란다. 이것은 방치가 아니다. 너무 방치하면 비행으로 내닫고, 자립심을 억압당하면 히키코모리(구석방 폐인)이 되기 쉽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응석을 받아주는 단계에서 실패하면, 그는 <의존>적 인간이 되기 쉽다. 알콜 중독, 과식증, 도박중독, 쇼핑중독, 일중독, 연애중독, 스토커, 도벽, 인터넷 중독...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의존하고 중독이 되어도 안심감이나 만족감을 얻을 수 없다는 것.
그 이유는 원래 의존해야 할 대상에 의존하지 못하고 엉뚱한 데 의존하기 때문이란다. 일리가 있다.
응석은 타인에 대한 신뢰와 배려를 키워주는 중요한 요소다.

그렇다고 조용히 앉아서 공부만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춘기에 전혀 반항을 하지 않는 경우, 사실은 더 걱정이다. 자기 욕구를 표출할 기회를 놓치기 때문.
나중에 어떤 형태로 문제를 표출시킬지 알 수 없다.

이에 사춘기 아이들을 둔 부모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부모의 리듬에 아이들을 맞춰서는 안 된다. 아이들의 리듬에 맞춰,
아이들이 의존과 자립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그 모습에 '동조'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동조란 적극적인 동의가 아닌, 수동적인 동의다.
아 그렇니? 아 그랬구나. 기분이 나쁘겠네? 이런 반영적 경청이 아주 필요한 것이다.

상담 공부를 하면서, 이런 책을 읽는 것은, 아이들을 예쁘게 보는 눈을 틔우는 것 같아 좋다.
내 눈에 좀 커져서, 아이들의 모습이 다양한 각도에서 보일 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기분 좋은 책.

청개구리띠 아이들을 집안에 두신 부모님이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