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목서 향기가 세상에 가득하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모과향 비슷한 꽃향기로 대기를 가득채우는 꽃나무가 금목서인데,
금목서 향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걸 보면,
사람의 향기도 저렇게 넓게넓게 퍼졌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오늘은 금목서 향기가 흩날리는 풍경을 틈타,
치자꽃 향기를 음미해 보자.
박규리의 '치자꽃 설화'를 우선 읽어 보렴.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 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 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박규리, 치자꽃 설화)
설화는 구비전승되는 이야기야.
치자꽃에는 왠지 이런 서러운 이야기가 담겨있을 것 같다는 시를 쓰고 있지.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서 보내고는
돌계단을 올라가는 스님이 울고 있는 걸, 화자는 보고 말았어.
캬, 요것만 가지고도 짠한 순애보(순수한 사랑의 기록)가 한편 떠오르는구나.
스님은 고요한 법당 안에 들어가시고,
문 한 쪽만 열어 두고는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
빗물에 우는 소리처럼...
사랑하던 사람과의 인연을 끊어야 하는데,
그 밀어내던 자신이 스스로 <못>이 되어
스스로의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처럼 여겨진대.
그렇게 목탁소리만 은은하게 이어짐으로써 스님의 기도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주지.
화자는 스님의 슬픈 순애보에 가슴이 짠해서 계속 관심을 갖고 보고 있는데,
여자는 돌아가지 않고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더래.
그러다 일어나더니
산길을 휘청이며
마치 물살에 떠내려가듯 휘청거리며 내려갔대.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도 듣고(떨어지고)
그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소리만 산허리에 가득하구나.
하필이면, 짝을 잃은 그 순간에 짝을 찾는 소리라니...
화자는 내려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생각해.
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구나.
한 번도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가장 가난한 사람이구나.
그러고 있는데,
방 안의 스님은
잿빛 승복만 입은 채
날이 저물도록 경을 읽는 소리로만 남았어.
떠난 사람보다
더 서럽게 보이는 스님의 잿빛 등과 독경소리.
아, 화자는 그만, 독경소리가 너무 싫어 졌나봐.
마치 자신이 버림받은 여자가 된 듯,
스님의 버리려는 독경소리가,
오히려 더 깊어가는 사랑인 것처럼 들려서
화자 역시 하염없이 산길에 앉아 있대.
독경소리는 이렇게 중의적으로 쓰였지.
스님은 여인을 보내고 잊으려고 독경을 시작했지만,
그 독경소리 <저물도록 그치지 않는> 걸 보면, 마음 속에서 잊히지 않는 거야.
그게 마지막 부분의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이란 표현과 딱 맞아 떨어지는 거지.
사랑하는 사람을 돌려보내며 겪는 이별의 정한을
마치 멜로 드라마 한 편 보는 듯, 생생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시란다.
치자꽃이 나온 김에, 이해인 님의 시도 한 편 읽어 보렴.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
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
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리는 것일 테지요?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모든 사람들을
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
그가 지닌 향기를
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
설레 일 수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7월의 편지 대신
하얀 치자 꽃 한 송이
당신께 보내는 오늘
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 이루십시오 (이해인,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수녀님은 치자꽃을 보면서,
사람을 만날 때 설레는 마음을 계속 유지하였으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향기를 맡는다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었으면...
그런다면 삶이 곧 꽃밭이 될 것을...
이렇게 생각한단다.
치자꽃 향기를 맡으면서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고
향기로운 날들을 이루기를 기원한다.
아,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만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는 거란다.
오늘은 작년 모의고사에 난 시조 중에 아이들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던 시조를 한 편 읽어 보자.
우뚝이 곧게 서니 본받음 직하다마는
구름 깊은 골에 알 이 있어 찾아오랴
이제나 광야에 옮겨 모두 보게 하여라<제5수>
세상이 하 수상하니 나를 본들 반길런가
왕기순인(枉己順人)*하여 내 어데 옮아 가료
산 좋고 물 좋은 골에 삼긴 대로 늙으리라<제6수>
천황씨(天皇氏) 처음부터 이 심산에 혼자 있어
너 보고 반기기를 몇 사람 지냈던고
만고의 허다 영웅을 들어 보려 하노라<제7수>
소허(巢許)* 지낸 후에 엄 처사*를 만났다가
아쉽게 여의고 알 이 없이 버려 있더니
오늘사 또 너를 만나니 시운인가 하노라<제8수> - 박인로,「입암이십구곡(立巖二十九曲)」-
*왕기순인 : 자기 몸을 굽혀 남을 좇음.
**소허 : 소부(巢父)와 허유(許由). 상고 시대의 대표적인 은자(隱者).
***엄 처사 : 엄자릉(嚴子陵). 한나라 광무제 때의 은자(隱者).
이 시조는 박인로가 '입암(선바위)'을 대상으로 쓴 시조 29수의 5~8수가 되겠다.
제5수, 7수는 화자의 말이고,
제6수, 8수는 바위의 말이라고 한다.
한 수씩 뜻을 살펴 보자꾸나.
제5수 [화자의 말]
우뚝이 곧게 서니 본받음 직하다마는
구름 깊은 골에 알 이 있어 찾아오랴
이제나 광야에 옮겨 모두 보게 하여라<제5수>
화자가 입암(우뚝 선 바위)을 보고 "너는 우뚝 곧게 서서 본받을 게 많다."고 했어.
그런데 도회지에 있지 않고 구름 깊은 골짜기에 있어 아는 이가 찾아오겠느냐고 한다.
이제라도 넓은 광야로 옮겨 모두들 보게 하고 싶다는 희망을 드러냈어.
<영월의 입암>
화자가 바위를 보고 캬, 너 멋지군.
근데 이렇게 촌구석에 있음 누가 알아나 주겠냐?
야, 너 슈스케 한번 나가 볼래? 이런 거지.
그랬더니 바위가 제6수에서 이렇게 대답했어.
[바위의 대답]
세상이 하 수상하니 나[바위]를 본들 반길런가
왕기순인(枉己順人)*하여 내[바위] 어데 옮아 가료
산 좋고 물 좋은 골에 삼긴 대로 늙으리라<제6수>
세상이 하도 수상하다 보니(어지럽다 보니) 나를 봐도 별로 반기지도 않을 거 같아.
내 몸을 굽히고 남을 쫓아서 어디로 가란 말이야?
그러니 산좋고 물좋은 골짜기에 생긴대로 늙고 싶다.
그러니깐, 야, 슈스케 같은 데 나가봤자, 별거 있겠어?
세상은 노래 잘한다고 가수 만들어 주는 거 아니란말야.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 지 잘 알면서?
사람들이 나 본다고 좋아할지 어떨지도 모르잖아.
피디한테 수구리고, 대중의 인기에 영합해야 하고... 하이고...
차라리 산좋고 물좋은 여기서 숨어 사는 게 내 팔자에 딱 맞아.
그러니깐, 다시 화자가 한 마디 거들지.
[화자의 말]
천황씨(天皇氏) 처음부터 이 심산에 혼자 있어
너[바위] 보고 반기기를 몇 사람 지냈던고
만고의 허다 영웅을 들어 보려 하노라<제7수>
아냐, 넌 정말 훌륭해.
네가 처음부터 이 산속에 혼자 있어서 그래.
너보고 멋지다고, 네 숨은 재주를 알아주고 반기던 사람이 몇이나 만났겠어?
하고 많은 영웅들의 이름을 들어서 너랑 비교해 보고 싶다.
화자는 정말 바위가 멋진 존재임을,
그래서 세상 누구라도 바위한테 홀딱 반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지.
다시 바위가 대답하고 있어.
[바위의 대답]
소허(巢許)* 지낸 후에 엄 처사*를 만났다가
아쉽게 여의고 알 이 없이 버려 있더니
오늘사 또 너[화자]를 만나니 시운인가 하노라<제8수>
소부와 허유, 소허는 중국 고대의 대표적인 은자들이지.
소부, 허유랑 지내다가 다시 엄처사를 만났대.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서 지냈단 거지.
이제 소허와 엄처사를 아쉽게 이별하고
알아주는 이 없이 버려져 있은 지 오래였는데,
오늘에서야 또 나를 알아주는 너(화자)를 만나니,
시절 인연이 운이 맞는 것 같다.
우리 한 번 잘해보자.
이런 거지.
박인로가 '입암'더러 '은자'라고 추켜세우면서
너, 세상에 나가면 인기 좋을 거야.
왜 세상 사람들이 너를 몰라보는지 몰라...하고 아쉬워 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투정인지도 모르겠다.
난 박인로가 투정부리는 것처럼 보이거든. ^^
왜 세상은 재주 많은 나를 알아보지 않은 거삼? 이러고 말이지.
사람이 일단 뭐든 무기가 있어야 해.
나들보다 이것은 잘할 자신 있다... 이런 것.
그걸 갖고 있으면, 박인로처럼, 시절 인연을 기다리면 되겠지.
만리 밖까지 향기가 퍼진다는 만리향, 금목서를 다른 이름으로 그렇게도 부르더구나.
향기가 듬뿍 담긴 사람이라면,
어디 숨어 있더라도,
누군가 알아볼 때가 있겠지?
우리 아들이 금목서처럼,
만리향처럼
은은한 향기로 가득한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아빠가 몇 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