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왜 하지? - 꼼꼼하게 들여다본 아홉 개의 수업 장면
서근원 지음 / 우리교육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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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디는 판소리를 스승이 가르친 그대로 익힌 것이고, 더늠은 제자가 더 늫-은 것이다. 원본의 복원 면에서 바디가 훨씬 낫다면, 새로운 창작이란 면에서 후자가 유리하겠다.

이 책은 초등 교사로 근무하다 사표를 내고 공부를 계속하는 작가의 뼈저린 수업 관찰 기록이다. 우리 교육(초등편)이라는 '불온한(?)' 잡지에 연재된 것을 책으로 엮은 듯 하다. 난 중등 책자는 자주 보게 되지만, 초등 이야기는 다른 세상 이야기인 듯이 생각해 왔다.

나도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로 발령 받아서 5년 반, 부산의 남자 중학교 교사로 4년 반, 여자 중학교 교사로 1년 반, 남녀공학 일반계 교사로 4년 반을 근무하고 이제 공업계 고등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는 십육 년 동안, 많게는 주당 24시간의 수업을(특활과 학급회 빼고), 적게는 14시간의 수업을 했고, 특히 고등학교에 와서는 특기적성, 보충학습, 특강 등 다양한 이름으로 끊임없이 수업을 해 왔다.

그렇지만, 수업을 왜 하는지... 에 대해서 고민을 깊이 한 것은 몇 해 되지 않았다. 수업은 맡기니까 하고 있었고, 나의 수업의 목표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중학교에서는 교육개혁을 추진한 이후로 고등학교 입시가 내신제로 바뀌었고,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할 이유가 사라져서 수업에 몰두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고 할 수 있다. 직장은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 체제로 들어섰고, 컴퓨터를 활용한 수업, 기자재의 활용, 학생 중심의 수업이 <열린 교육>의 이름으로 우리를 짓밟았다. 여유있던 시간에 일본어도 공부하던 교사 생활이 연구학교 중심, 업무 중심으로 돌아서는 시발점이 된 1996년, 그 후로 9년간 나는 나를 잃고 살았던 것 같다.

그나마 일반계 고교로 옮긴 후에는 수업이 재미있었다. 나는 수업을 왜 하지? 하는 물음에 그저, 아이들이 열심히 들으니깐, 더 충실한 내용을 들려 주기 위해 교재를 편집하고, 이야기를 만들고, 나름대로 몇 가지 수업 방법을 터득하기도 했다. 내 지난 십육년의 수업의 <화두>라면, 재미있는 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처음 수업을 하던 1989년에는 세상이 참 차가웠다. 발령받은 지 넉 달 만에 해직될 뻔도 했다. 그 후 징집 영장이 나와 군대로 도망하고 말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간은 경직된 사상을 토로하는 열변형 수업이 되기 일쑤였다. 그 땐 그나마 젊었고 아이들이랑 친했으니 불평의 이야기를 덜 들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수업에서 아이들이 졸거나 학습 내용이 재미없던 시간들을 지나면서, 아이들이 나를 쳐다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후로 나는 서서히 교실에만 들어서면 코미디언이 되어 갔다. 자연스럽게 <지위 거래>를 통해 자주 나는 낮아졌고, 수업의 질과는 상관 없이 수업에서 아이들이 등 돌리는 일이 줄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이 <즐겁게> 수업하도록 <이야기>를 혼자 꾸며내고, 그림도 그려 보이고, 나름대로 다양한 방법을 창안한 것이 아직도 내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고개를 박고 잠만 자진 않도록 한 원동력이 된 듯 하다.

이 책에서는 교육 개혁 이후 학교에 몰아닥친, 행동주의 수업 연구, 절차적 지식을 중시하는 학생 중심의 수업 연구 활동으로 흐르고 있는 <좋은 수업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교실의 수업을 아홉 장면 서술하고 있다. 참 마음 아픈 현실이다.

철학이 없는 교실. 삶이 없는 교실. 교실에는 국가의 명을 받아 학생을 지도하는 국가공무원으로써의 <교사>가 있고,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을 얻어 부와 명예를 축적하고 남을 짓밟기 위해 경쟁하는 <학생>이 있으며, <하면 된다> <2호선을 타자(서울의 유명 대학들이 2호선 주변에 있다는...)>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를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 이런 급훈이 내려다 보는 파리한 형광등 불빛 밝힌 교실에는 <경쟁과 살기>가 등등하다. 이 책에 등장한 초등 교실에서도 9년 전의 <교육 개혁>의 무지갯빛 미래를 위해 희생되었던 교실의 살육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공교육"이라 함은 <왜 하는가> <어떤 인간을 기를 것인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그러자면 여건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가> 를 총체적으로 고민하는 국가의 거대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거대 시스템이 올바로 설계, 유지, 보수 되기 위해서는 <철학적 청사진>과 <국민적 의견의 통합>, <예산의 지원> 등의 각종 <프로그램>이 올바로 기능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쟁체제가 몰고온 교육개혁은 외국의 결과만을 도입한 <교육 방법, 공학>의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고, 그러한 방법만 도입한다면 결과는 <선진국>으로 나타날 것이라 착각하였다.

그래서 전국의 모든 학교에 삼천만원을 들여 교무실에 칸막이를 하였고(이에 칸막이 회사만 돈벼락을 맞았다.), 모든 학교의 교실에 42인치 프로젝션 티브이를 넣어 주었고, 펜티엄급 컴퓨터를 전격적으로 설치하였다.(그 설치가 급속히 완료된 해는 97년도로 대통령 선거 직전이었고, 당연히 그 기종은 일률적으로 삼성이었고, 삼성은 엄청난 돈을 벌어 이모 후보에게 밀어주었을 것이다.) 지금 각 학교의 42인치 티브이는 비오는 날 전체 조회 관람용으로 쓰이고, 월드컵 축구 중계용으로 쓰인다. 아, 학년말에 교사들이 정신없이 바쁘면 비디오를 보기도 하고, 체육 시간엔 간이 탈의실용 벽면으로도 쓰인다. 그 때의 컴퓨터가 지금은 모두 쓰레기가 되어 버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요즘 하는 작업들은 각 학교에 오천만원씩 줘서 도서실을 <정보 종합 열람실>로 만들려 한다. 도서실에 컴퓨터를 좀 넣고, 시설을 개선해서 도배를 다시 하고, 책상을 다 내다 버리고 새 것으로 교체하면 <정보가 종합적으로 열람되는 도서실>로 개선된다.

공교육이 무너지는 이유는 <사교육>에 있지 않다. 공교육이 무너지는 이유는 <부모들의 잘못된 교육열>에 있지 않다. 공교육의 붕괴 이유는 <철학>의 부재에 있고, <청사진>의 부재에 있고, <고민>의 부재에 있고, <고민할 시간>의 부재에 있다. <공학>이 철학의 위에서고, <시범학교, 연구학교, 수업연구대회, 각종 경진대회, 교사연구대회>등 단시일내에 세계적으로 가장 훌륭한 결과들을 뽑아내는 연구들이 <청사진>의 위에 오르며, <남을 짓밟고 승진에 눈먼 사욕>이 <고민>의 위에 서고, 학교장은 <돈>에 욕심을 부리다간 잘리게 생겼고 교사를 통제할 힘은 전혀 없는 <경영권이 전혀 없는> 전문 경영인으로 투덜거리기만 하는 학교에 미래는 없다.

그러나 학교에 교육이 없을 수 있나? 눈을 초롱거리는 아이들이 있고, 그 눈을 외면하지 못하는 교사들이 있고, 서로 생각이 많이 다르더라도 학교라는 제도 내에서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곳에 교육은 느리지만 숨쉬고 있고, 화산재가 덮어버려 불모의 땅으로 변한 듯한 잿더미에서도 싹이 트듯이 사랑이 있는 것이다. 수업은 교육의 가장 주된 형식이다. <교육과정>이 명시적으로 드러난 것 중 가장 주된 것이 <수업>이란 이야기다. 물론 수업을 통해서도 '암시적'으로 <교육과정>을 강조할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다. 수업을 통해 교육과정의 긍정적 측면을 배울 수도 있고, 암시적인 것을 부정적으로 내면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문제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리라. 수업의 기본은 무엇인가. 수업을 설계하고, 진행하고, 반성하는 과정을 학교급별에 따라서 어떻게 달리 운영해야 하는지... 문제도 아닌 것 같은 것이 곰곰이 들여다보면 문제란 것을 깨닫는 것이 <기본>을 익혀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지난 십여년간 <바디>를 익힌 선생이었다면, 이제 <더늠>을 향한 몸짓을 익혀 나가리라... 생각하는 봄방학의 봄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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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지 않는 아이
펄 벅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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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쳐 버릴 수 없는 슬픔을 인내하는 법은 혼자서 배워 나갈 수밖에 없다. 또한 참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억눌린 슬픔은 씁쓰름한 뿌리처럼 삶에 박혀서 사람을 병들고 우울하게 하는 열매를 맺어 다른 사람의 삶까지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내는 시작일 뿐이다. 슬픔을 받아들여야 하고, 슬픔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그에 따르는 보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슬픔에는 어떤 마력이 있기 때문이다. 슬픔은 지혜로 모양을 바꿀 수 있고, 지혜는 기쁨을 가져다 줄 수는 없을지 몰라도 행복은 줄 수 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다. 달랠 수 있는 슬픔과 달래지지 않는 슬픔이다. 달랠 수 있는 슬픔은 살면서 마음 속에  묻고 있을 수 있는 슬픔이지만, 달랠 수 없는 슬픔은 삶을 바꾸어 놓으며 슬픔 그 자체가 삶이 되기도 한다. 사라지는 슬픔은 달랠 수 있지만 안고 살아가야 하는 슬픔은 영원히 달래지지 않는다.”


“나는 행복이 아이의 환경이 되게 해주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에 대한 기대, 긍지도 모두 버리고, 있는 그대로 아이를 받아들이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고, 다만 흐릿한 아이의 정신에 어떤 빛이 반짝일 때 감사하기만 하겠다고 결심했다. 아이가 가장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곳에 아이의 집을 마련해 주면 되는 것이었다.”


“당신의 아이가 당신이 바란 대로 건강하고 멀쩡하게 태어나지 못했더라도, 몸이나 정신이, 아니면 둘 다 부족하고 남들과 다르게 태어났더라도, 이 아이는 그래도 당신의 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아이에게도 그것이 어떤 삶이든지 간에 삶의 권리가 있고,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서 부모가 그 행복을 찾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있는 그대로 아이를 받아들이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나 시선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이 아이는 당신 자신과 세상 모든 아이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존재이다. 아이를 위해, 아이와 함께 아이의 삶을 완성해 주는 데에서 틀림없이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개를 당당히 들고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다.”


“인간으로 대한 것 뿐이죠”

“행복이 있으면 다른 것은 저절로 따른다. - 아이의 정신과 마음에서 불행이 사라지지 않으면 아이에게 아무 것도 가르칠 수 없다. 행복하지 않은 아이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감정은 지능과는 무관하다.”


펄 벅 여사가 노벨상 수상자이며, ‘대지’를 지었다는 것은 간단한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그의 캐롤이라는 딸이 정신지체라는 장애를 가진 아이였고, 그래서 그의 삶이 상당 부분 일그러졌으며, 그의 삶의 많은 부분은 전쟁으로 발생한 미국-아시아의 ‘기대하지 않은 아이’로 태어난 혼혈들의 <입양>에 할애되었다는 것은 이 책을 읽고서야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어머니의 마음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란 걸 느끼게 된다. 자식의 아픔은 부모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아픔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장애를 가진 아동을 기르면서 당면하게 되는 부모의 심리적, 사회적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장애 아동의 부모들이 빠지기 쉬운 수렁에 이런 객관적인 경험담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책은 그런 역할을 오랜 동안 해 왔다.


한국 전쟁 이후, 우리 나라의 많은 아이들이 혼혈로 태어났고 이 땅에서 버림받은 이야기는 숱하게 있었지만, 그들의 입양에 펄 벅이 노력했다는 이야기는 다시금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슬픔을 문학과 사회에 대한 봉사로 ‘승화’시킨 펄 벅의 인간상이 불굴의 어머니, 사랑과 자비의 어머니의 모습을 잘 구현하고 있다.


아픈 사람들은 도처에 흔하다. 하지만, 그들의 <감정>을 존중하고, 한 <인간>으로 대우하는 인격적인 사회는 아직도 우리에겐 요원한 듯 하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장애 교육과 특수 교육이 일반 교육과 통합되는 과정에 녹아들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영문 제목에서 차일드를 대문자로 적은 어머니의 마음을 상상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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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학교의 행복 찾기
여태전 지음 / 우리교육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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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에 간디학교가 있다. 경남교육청에선 골칫거리라고 인가해주지 않으려고 했던 골치아픈 학교다. 어느 고등학교 교사가 그 골치아픈 학교를 애정을 가지고 관찰했다. 기록은 상당히 객관적이고, 잘 짜여져 있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 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사랑하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3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리 알고 있네 우리 알고 있네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간디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 <꿈꾸지 않으면>

 

이 노래는 이 학교에서 지어 부르는 노래다. 간디학교의 싹은 제도권 교육에 대한 불신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공교육이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임을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 임금님이 벌거벗었음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그들은 떨어져 나간 것이다. 희망이란 불씨만을 안은 채.

 

한국 교육의 구조적 모순을 인식한 간디학교 사람들은 교육이란 문제를 언제까지 정부, 제도 탓으로만 돌릴 수 없었다. 비판만 하고 있기에는 우리 아이들이나 우리 자신에게 인생이 너무나 짧고 소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인생은 정말 소중한 것이고, 그러기에 너무 짧다.

간혹 아이들 중에, 살아갈 일이 끔찍해요... 라는 말을 듣는다. 그 아이들에게 인생은 정말 소중한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래서 너무 길고 지루한 것인지도...

 

아이들이 희망을 갖고 살아야, 인생은 소중하고, 짧아서 허투루 살 수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그래서 산골로 가서, 부유하지 않게 살고 있다.

 

‘사랑과 자발성’ - 간디학교에서 자발성이 없다면 그곳은 이미 자율학교도 아니고, 대안학교도 아니다. 자발성과 관심이 곧 사랑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게 한다.

‘행복과 탁월성' - 자신의 선택이 탁월했음을 믿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 위해서는 희망이란 불씨를 소중하게 안고 가야 한다.

 

물론 간디학교는 보통의 여느 학교처럼 순탄하지 않다.

학생 모집부터, 교사의 질, 교사의 고용과 보수 지급, 교육과정의 편성과 운영, 학부모의 참여. 이 모든 면에서 보통 학교들처럼 매끄러운 매너리즘을 따를 수 없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모든 것이 1회용이다. 수업도 한 번으로 끝이고, 축제도 한 번으로 끝이고... 그러나, 우리 삶이 원래 한 번으로 끝인 것 아니었던가? 자기 자식에게 그토록 마음 졸이는 것은 결국 자식의 인생은 일회성이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우리 반 아이들의 진로지도를 그 아이에겐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불성실하게 할 수 있을까?

 

보통의 교사들은 공교육의 보수적 매너리즘에 빠진 채, 성실함 정도로 그 빈 틈을 메워보려고 발버둥친다. 그러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코트는 결국 어느 순간엔가는 단추를 다시 열어야 함을 느끼게 하듯이, 개인의 성실함만으로 그 구조적 모순의 갭을 메우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임을 그들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오늘도 실패하고 있다. 그러나, 실패만이 성공의 어머니임을, 에디슨에게 2000번의 실패를 어떻게 극복했느냐고 물었을 때, '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오. 2000번을 시도했을 뿐'이라고 했음을 기억한다면, 그들의 실패는 우리 교육의 훌륭한 하나의 대안이 될 것임을 믿을 수 있다. 비록 그 길이 멀고 험할지라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기 어려운 세상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외치는 교사들이 있음에... 그리고, 스스로 자율적이지 못함을 질타할 줄 아는 간디인들이 있음에... 그들은 꿈이 없는 곳에, 삶도 없음을 잘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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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마한 내 꿈 하나 살아있는 교육 3
윤구병 지음 / 보리 / 199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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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쩌다보니 십년 전 책을 자주 읽게 되었다. 그러면서 마음은 자꾸만 우울해진다. 교실의 모습은 10년 전과 별반 바뀐 것이 없으므로...


윤구병은 상당히 개방적이고 급진적인 철학자다. 특히 교육 운동에 관심이 많다. 그는 남녀평등에도 관심이 많아서, ‘여자는 남자답게, 남자는 여자답게’를 외친다. 하긴 우리 사회에서 인간 해방의 질곡은 얼마나 깊은 골이던가. 그래서 그는 이오덕 선생님의 글쓰기 운동에 관심이 많다. 정직한 글쓰기, 가치있는 글쓰기를 외치시던 꼿꼿한 선생님.

그리고 소외받는 삶에 대한 사랑도 남다르다. ‘가장 상처받은 영혼에 가장 큰 사랑이 깃들 수 있습니다.’는 말로 나타나듯.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를 이야기하듯, 사회가 총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 대부분의 사람은 평생을 사는 동안 준 것 보다 받은 것이 늘 더 많다는 것 - 이 소박하면서도 근본적인 깨우침이 바로 가난의 선물이라는 걸 이야기하는 그는 천상, 운동가다. 그의 운동은 위에서 이뤄주는 ‘개혁’의 탈을 쓴 개량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건강한 ‘변화’다. 이집트의 건축가 하싼 파티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건축’에 드러난 메타포처럼.


문화는 뿌리에서 샘솟아

초록빛 피와 같이 세포에서 세포로

온갖 새순에, 잎과 꽃과 눈에 스며,

비가 내리면

젖은 꽃에서 풍기는 싱그러운 내음으로

우러나 대기를 채운다.

그러나 위에서부터 사람들 머리에

쏟아 부은 문화는

곧장 눅눅한 설탕처럼 엉겨 붙어,

사람들을 설탕 인형으로 바꾸고

생기를 주는 소나기가 몸을 적시면

끈적거리는 찌꺼기로 녹아 없어지게 한다.


모순이 있는 곳에 운동이 있다.

오늘은 야간 자율학습 감독(?, 자율과 감독의 자가당착)하는 날. 한 바퀴 돌아보고, 에프엠 라디오를 틀어 놓고 책을 읽는데, 교무실 밖, 자판기 커피 뽑는 소리, 칠십 년대 여공들이 타이밍을 먹던 그 심정이 아닐까. 우리 아이들이 그 여공들의 헛된 몸짓들과 다를 것이 무엔가. 천성산 도롱뇽보다 못한 아이들, 도롱뇽들에게는 지들 죽는다고 삼보일배 하시고, 청와대 앞에서 단식하시던 엄마같은 스님이 계셨는데, 나는, 청와대 앞에 천막이라도 치고 싶다. 청와대 앞에 수천, 수만의 교사들이, 학부모들이 천막을 치고 삼십일, 오십일 굶어서 지쳐 쓰러져서, 이 고리를 끊을 수만 있다면... 그러면 이 도롱뇽보다 못한 아이들이 하늘 한 번 쳐다볼 시간이라도 있을까? 건물에도 일조권이 적용된다는데... 한국의 고등학생은 건물보다 못해서 일조권도 없이, 희부연 형광불빛 아래서 시력만 떨어진다.


어느 여고 2년생의 글은 이십 년이 지났어도 유효하다. 공순이보다 못한 수인(囚人)의 삶.


노동이다, 노동/ 아니, 징역 3년의 선고를 받은 죄수에게 던져진 가혹한 형벌이다.//

새벽녘 어제의 달이 미처 지지도 않은/ 무거운 하늘을 이고/ 돌 캐러 간다./ 죄수 번호 21060 소속 00 여자 수용소/ 손이 부르트도록 머리가 깨지도록/ 돌을 캔다./ 선생님들은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열심히 쉬지 말고 파 보라고 하시지만/ 내 앞에 쌓이는 건, 내 손에 쥐어지는 건/ 쓰잘데 없는 자갈뿐이다.//

어쩌다가 가짜 금강석이라도 캐는 날이면/ 모두들 고함치며 함성을 지른다./ 무엇을 위한 기쁨인지/ 누구를 위한 기쁨인지/ 나 같은 바보는 모른다.//

‘사랑’이란 단어, 잊어버린 지 오래고/ ‘꿈’이란 풍선, 터져버린 지 오래다./ ‘보물찾기-대학’/ 지각이 아무리 변화해도 돌이 대학이 되진 않는데.../ 나 같은 바보는 모를 세상이다.//

돌 캐러 간다./ 오늘도 돌 캐러 간다./ 얼마나 많이 캐내야/ 얼마나 많이 복종해야/ 얼마나 많이 참고 울어야/ ‘대학’을 캐낼 수 있을까/ 아니, 이 수용소를 탈출할 수 있을까...//

‘땅 땅 땅...’/ 소름끼치는 소리, 저 끝없는 돌 캐는 소리/ 무의미한, 쓰잘데 없는/ 21060 가슴에 달린/ 죄수 번호의 명예(?)를 위해/ 허공을 위해/ 돌을 캔다./ 땅 땅 땅... / 오늘도 내일도 쉼 없이...


헤라클레이토스가, ‘멍청한 사람은 모든 로고스에 파닥거린다.’고 했다. 로고스는 말, 풍문, 보도 같은 남들의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것에는 눈을 감고, 정말 로고스에 파닥거리지 않았나, 레드컴플렉스, 노무현이 멍청하다, 박정희 신드롬, 억울하면 출세하라. 대학가면 살 수 있다는 로고스에 파닥거리다 새장 안에서 피투성이인 채 스러지는 존재일 뿐인 것들이...


도롱뇽보다 못한 우리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리려 커피에 중독되는데, 누가 위에서부터, 아래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힘을 기울이고 있는가...


한때, 전교조가 교육희망이던 때가 있었다. 전교조가 합법화되면, 뭔가 될 줄 알았다. 전교조 합법화는 ‘로고스’에 불과했다. 교실에 아이들이 30명 수준이면, 수업이 될 줄 알았다. 그것도 마찬가지 로고스였고, 핵심에서 머나먼 것이었다. 교육은 우리의 미래다. 미래를 위해 이제 목숨을 걸고 투자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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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1-05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샘님으로서 고독과 아픔과 사랑이 잘 묻어난 글입니다. 아래로부터의 건강한 변화를 부디 샘님은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분이시라고도 믿고요...

글샘 2004-11-29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롱뇽보다도 못한 아이들에게 제가 도와 줄 건강한 변화란... ㅠ.ㅠ 비관적이네요.
 
오이리트미 예술 - 혼을 그리는 동작
루돌프 슈타이너 지음, 김성숙 옮김 / 물병자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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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발도르프 학교의 오이리트미에 대한 강연들을 모은 책이다.

표지가 참 예쁘다. 사진으로 검색되지 않는 것은 안타깝지만, 옆부분 제목 자리에는 진분홍(분홍보단 진한데 색 이름을 모르겠다. 진달래색이라고 할까?)이고, 그 외는 연두색에 오이리트미 포스터가 은은하게 깔려 있다.

오이리트미는 슈타이너 학교의 언어예술이다. 어린이들이 연분홍, 오렌지, 하늘색 등 파스텔 색조의 옷을 입고 언어의 자음, 모음을 몸으로 표현하는 과정이다.

혼을 그리는 동작이라고 부제가 붙어 있다. 혼. 영혼. 정신. 인간에게 이것들이 없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혼이다. 그런데,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의 혼을 어떻게 지도하는가. 과연 매순간 아이들의 '영혼'에 관심이 있기나 한 것일까? 하고 요즈음 반성하며 읽었다.

이 책을 읽고 오이리트미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에겐 별로 권해주고 싶지 않다.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별로 알 수 없었다. 오이리트미에 대해서는 고야스미치코의 책에서 더 상세하게 관찰한 것이 있다. 이 책은 다만 오이리트미의 철학적 기반에 대한 연설을 적은 것들이다. 나는 슈타이너의 책을 읽으면 왠지 수도하는 느낌이 들어 좋다. 그의 말들로 세례를 받고 아이들을 바라보면 왠지 그들의 영혼 앞에서 나도 하나의 영혼의 자격으로 서 있는 느낌이 들어서... 내게 슈타이너 학교의 의미는 대안학교로서의 의미보다는 자기 성찰의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오이(아름다운) 리트미(리듬)을 들으면서 병아리처럼, 사푼사푼 걷고 몸을 놀릴 아이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천박한 가수들의 저속하고 관능적인 춤사위를 따라하는 어린 아이들을 보면 우린 아이들에게 독사의 독같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건 아닌지... 늘 돌아보게 된다.

인간의 언어를 관습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조응하는 관계로 본 그의 통찰력에 새삼 경외감을 느끼며 조잡한 나의 삶 속에도 영혼의 한 떨기를 피워올릴 수 있을지를 의심해보며, 돌아보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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