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성적표 - 고등 학생, 우리들이 쓴 시 보리 청소년 6
고등 학생 81명 시, 구자행 엮음 / 보리 / 200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교지 담당이라 다른 학교의 교지들을 읽어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교지를 펼쳐서 휘리릭 넘기다 보면, 아이들이 쓴 글을 반가워라 하고 읽게 되는데, 그 교지를 만든 선생님의 취향을 잘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어떤 학교 교지에 실린 시들은 겉으로 번지르르 하지만 무슨 말인지 모를 글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학교 교지는 가슴을 퉁~ 치고 가는 짧은 글들이 있기도 하다.(개인적으로 이 비싼 교지를 확 폐지하고 싶지만, 학교 전통을 이야기하는 관리자 앞에서 매번 만들고 만다.)

이 책은 부산에 사는 고등학교 아이들이 쓴 시다.
부산상고는 대통령의 모교지만 95% 이하의 아이들이 가는 학교고,
부산고등학교는 30년 전까지는 부산, 경남 최고 성적의 학교였지만 지금은 일반계 최하위 성적을 유지하는 못사는 동네, 도심 공동화 현상이 빚어낸 학교고,
강서고등학교는 부산시는 부산시지만, 김해공항보다 더 외진 데 있는 농어촌 학교다.

이런 데로 다니시는 선생님이 존경스럽다. 나는 실업계와서 숨이 턱턱 막히는데...

이 책에 담긴 아이들의 시를 보면 지도하고 엮으신 선생님의 철학이 잘 드러난다.
아이들의 삶이 그대로 표현되는 글이 좋은 글이고, 그 속에서 느낀 감정들이 오롯이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중학교 1학년 입학하면 배우게 되는 김지하의 <새봄>이란 시가 있다.

벚꽃 지는 걸 보니/푸른 솔이 좋아./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벚꽃마저 좋아.

이 시는 감옥에서 나온 시인이 <중심의 괴로움>을 토로하고, 사쿠라마저 좋아하는 오묘한 정신세계를 그린 것인데, 이걸 중학교 책에서 배워야 하는 내 아들이 가엾다. 이게 무슨 시냐.

우리 학교 벚꽃은/ 소나무 옆에 서있다./ 아이들은 벚꽃만 본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소나무는 서운해진다.

이게 훨씬 생동감있고, 올곧은 정서의 시라고 생각한다.

핸드폰을 보니 20일 수요일이라고 되어있다. 좀전만 해도 25일 화요일이었는데, 하루를 마친 시각이 오늘이 아니고 내일이다. <학원 수업 마치고>

이런 글을 읽으면, 한국의 학생들을 정말 그대로 마주하게 된다.

가엾은 사람이나 동물을 보면, 가엾다고 느낄 줄 아는 아이들.
처음에는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장애자, 독거 노인, 외국인 노동자들 처럼 낯선 이들에게서도 곧잘 동질감을 획득하는 순수한 젊은이들.

이 아이들은 파업을 하는 이들의 정당함에 쉽게 <연대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 아이들의 학교 생활은 날마다 패배만을 가르치고 있는 거나 아닌지...

학교에서 나오면서 시계를 보니, 6시간 50분 후엔 다시 학교에 와야 하는 비극을... 어찌 보고만 있을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들이 아니라 학교가 문제다 - 현 교육 시스템에서 아들을 성공시킬 학습 전략 8가지
마이클 규리언.캐시 스티븐스 지음, 고정아 옮김 / 큰솔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아들이 아니라 학교가 문제다. 이런 얄궂은 제목은 참 맘에 안 든다. 그럼, 학교을 안 보낼 거유? 이 책의 원 제목은 <The minds of Boys>이다. 남자 아이들의 마음...이란 뜻이다. 원래 의도는 <남자 아이들의 특성>인데 <학교의 문제>로 제목을 붙인 편집부의 상술에 속상하지만, 이 책은 좋은 책이다.

사회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것과, 한 남성이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 사이에는 말할 수도 없이 큰 거리가 있다. 우리 사회가 아무리 가부장적 사회의 유전자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남성들은 그 수레바퀴 아래서 신음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미국의 <한 아이도 뒤처지게 할 수 없다. No Child Left Behind>는 교육관의 일환으로 연구된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 ADHD(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 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치료약의 80%를 소비하는 것은 남자 아이들이고, 그것은 지난 10년간 5배 늘어난 수치다.

이런 것은 남자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아>를 판별하는 시스템 내지는 남자 아이들을 <problem>로 인식하게 만드는 학교 시스템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문제 제기를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남자 아이들의 특성이 충분히 학습 장애로 오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단 자체도 너무 허술하게 이루어진다는 문제도 제기한다. 그래서 두뇌 스캔 등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논지다.

남자 아이들은 주의력이 약하고 산만하며, 자주 쉬고 싶어한다. 그것은 남자 아이들의 두뇌가 여자 아이들의 두뇌와 다르게 생겼기 때문이라는 연구가 있다. 이런 것을 연구하는 분야를 <젠더- 과학>이라 부른다.

남자의 두뇌는 평균적으로 여자의 두뇌보다 공간-기계적 자극에 더 많이 의존하고,
남자 아이들은 도파민 수치가 높고 소뇌의 혈류량이 많아 신체 움직임을 통해 배우며,
뇌량(두 반구를 연결하는 조직 다발)이 여자 아이가 많아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멀티태스킹 점수가 높다.
남아는 도표, 그래프 등의 체계적 제시를 잘 기억하지만, 여아는 언어적으로 더 빨리 발달한다.
여아는 덜 충동적이며, 브로카, 베르니케 영역(두뇌의 언어 중추)이 더 빨리 발달하기 때문이다.

특히 학교에서 교사가 수업 상황에 말을 더 많이 사용할수록, 즉, 도표와 그림을 덜 사용할수록 이 차이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언제부턴가, 남녀 공학에서 남자 아이들은 중하위권 성적을 가득 메우고 있다. 지금처럼 고등학교 진학을 중학교 내신 성적으로 하게 되고, 특히 내신 성적에 수행 평가의 비중이 높은 세상에서, 남학생들이 여학생들과 평등하게 고등학교로 진학할 확률은 극히 낮다. 한 반 30명의 학생 중, 수물 한두 명이 일반계 진학이 가능한데, 그 안에 남학생은 7,8명을 넘어서지 않는다. 반면 나머지 8,9명은 거의 남학생이게 마련이다.

남학생은 쉬는 시간이면 여지없이 교실을 벗어나야 하는 것으로 알고,
쉬는 시간을 노는 시간으로 착각하여 10분 동안의 게임에 몰두하거나 매점에 집착하여 수업에 늦기 일쑤이며,
수업 시간에도 쉽게 집중력을 놓치는 일이 많으며,
학습 동기가 별로 없는 여러 과목을 학습하는 데, 흥미를 놓치기 쉽고,
흥미가 없으면 실무율의 법칙에 따라, 올 오아 나씽이 되어 버려 그 과목은 통째로 포기하게 되며,
과제 제출에 대한 압박감이 적어, 동지만 많다면 되도록 늦게까지 버티려는 속성이 있다.

<차이>를 차별하지 않는 것이 똘레랑스라고 했던가.

여성의 신체적 허약함을 배려해 주면서(나도 예전에 체력장 만점 받으려고 죽을 노력을 했다. 한 반에 만점 못받는 애들이 꼭 대 여섯 명 나왔다. 그렇지만 여학생 반에는 체력장 만점 못받는 애는 거의 없었다.) 남성의 신경적 허약함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차별일 수 있음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나도 아들을 기르지만, 이 문제는 해결이 쉽지 않다.

남아들이 차별당하자 강하게 반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인간에 대한 탐구는 필요한 것 같다.

그런 한편, 도제, 노동, 행동, 실습 등 육체 활동의 시대에서 멀티태스킹, 언어를 통한 창조성, 서비스의 시대로 세상을 바꾼 주역은 남자들이다.
남성 중심의 세상을 극단적으로 이끌어 나가다 보니, 그 부작용으로 여성들이 더 적응하기 쉬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것은 남성 중심 교육의 <부메랑>이 돌아와 제 뒤통수를 치는 셈인 것이다.

이제 여성 우위의 시대임을 인정해야 한다.
여학생이 더 똑똑하고, 여성들의 권리가 더 많아지는 시대가 와도 좋지 않겠나?
남성성의 <폭력, 잔인함, 전쟁, 살육>보다는 여성성의 <평화, 공존, 환경친화>적인 세상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꼭 남자 아이들이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젠 남자 아이들에게 지배욕, 성공의지 보다는 평화 교육과 진정한 인생의 영적 선배로서 <멘토링>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한다.

시험이 성공과 실패라는 <판정표>가 되어 자부심을 손상시키는 일은 성공적인 인생에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서, 양질의 학교 생활과 평생 학습, 지속적 멘토링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단순하게 뒤처진 남아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학생, 모든 인간에게 베풀어져야 하는 은총이 아닐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석란1 2006-11-30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직업상 남자 아이들을 많이 상대하는데 100% 공감합니다.

글샘 2006-11-30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들이란 정말 연구대상이 아닐까 합니다.
아니, 모든 인간이 연구대상이어야 하겠지만, 이적지 남자에 대한 연구가 너무 없지 않았나 해요. ^^
 
살아 있는 교실 살아있는 교육 이호철 선생의 교실혁명 4
이호철 지음 / 보리 / 200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선생님을 보면 진짜 선생님이란 생각이 든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 하는 체하는 인간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진짜' 선생님을 만난 기분이랄까...

대선을 앞두고 진보 세력 엿먹이기 작전이 우익 언론, 정치권에 의하여 종횡무진 펼쳐지고 있다.

전교조도 12월 있을 위원장 선거를 앞두고 정책 대결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렇지만, 어느 후보에게서도 아이들에 대한 진한 사랑은 느낄 수 없다. 원래 조직은 인간적일 수 없는 것일까?

유세장 가는 길, 오는 길에 읽은 이호철 선생님의 교실 이야기는 정말 깐깐한 선생님의 작품이었다.

<쫀쫀하게 뭐, 그런 것까지 챙겨 두어야 하나...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교사는 그렇게 꼼꼼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없다.>  는 선생님의 말씀은 교단에 서는 한 불변의 진리다.

새 학기를 시작하기 전날 밤, 교사들은 잠을 설친다. 내년엔 어떤 아이들을 만나게 될까. 그리고 작년에 내가 제대로 품어주지 못한 아이들에 대한 회한이 진하게 배어나고, 졸업이라도 시킨 아이라면 시집보낸 딸 생각하듯 더 애틋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새로 만날 아이들을 전혀 모를 경우엔 남모를 기대를 갖기도 하고, 작년에 가르쳐 보아 아는 아이들의 경우엔 새 학기 작전에 이런저런 생각들로 밤새는 줄 모르며 뒤척이게 십상이다.

새 학기 첫 날, 목욕을 하기도 하고, 마음을 간결히 하고 등교하지만, 첫날 할 일이 너무 많아 새내기 교사라면 뭐 하나쯤 빼먹을 수도 있는 날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누구는 천직이라 하고, 누구는 성직이라 하지만, 나는 <행복한 사람들>을 만나는 <행복한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동창회에서 만나는 친구 누구누구가 아무리 돈을 잘 벌어서 동창회 기금을 팍팍 내고, 누구는 법관이고 의사라지만, 내가 걔들보다 공부를 못해서 이 길로 들어선 것도 아니고, 우연히 하고 싶었던 일인데 난 늘 자랑한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아무리 못됐어도 천사들이다."고...

이호철 선생님의 급훈은 참 인상적이다. <참, 사랑, 땀> 참된 삶이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땀흘려 일하는 삶. 학교에서 이 정도는 가르쳐 줘야 하지 않겠나. 나는 참 헛된 교사짓을 많이도 했다. 꼼꼼하지 않아서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없었나 보다.

열정만으로는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없다. <아이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칭찬받고 관심 받는 것을 귀찮아할 수도 있으니, 아이들마다 성격에 따라 방법과 정도를 달리 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기까지 나도 십 년이 넘게 걸렸다.

선생님은 차렷, 경례의 일본식 인사를 '바로 서 주세요'와 '인사 나눕시다'로 바꾸셨다. 참 깊은 선생님이다.

요즘 아이들은 보자기로 뭘 싸 보는 경험이 적다고 <보자기 싸기>까지 해 보이시는 분. 난 정말 가까였다.

말로만 앞세우고,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귀찮으면 내가 해 버리는 민주적이지 못한, 그래서 아이들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교사였다. 훌륭한 분을 만났으니, 우리 아이들도 조금 더 행복해 지려나. 이호철 선생님 덕택에...

선생님이 아이들 손 잡고 손톱도 깎아 주고, 생일이라고 업어 주시고(난 이건 못한다. 고딩들은 100킬로가 넘는 애들도 있어서...) 하는 모습은 잰체 하는 교사가 아니라, 정말 아이들을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하는 '진짜' 선생님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나도 20년 가까이 선생 노릇을 하고 있지만, 아직 책으로 쓸 만한 뭣 하나 하지 못하고 있다.

쓸 데 없는 감투에 마음 쏟지 말고 교실에서 아이들과 먼지 털고 분필가루 날리며 재미진 생활을 하는 <진짜> 교사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마음 가득 들도록 만드는 고마운 책.

옆자리 신규 교사에게 소개해 줘야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팀전 2006-11-15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은 이미 훌륭하세요/^^

글샘 2006-11-16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 그런 아부의 말씀은, 되려 상처가 된다는 걸...ㅠㅠ

드팀전 2006-11-17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언제 아부하는 것 보셨나요^^ 좋은 하루되세요.아웅 졸려.아이가 6시에 눈을 떠서 막재웠네...이제 세수하러 가야지..

글샘 2006-11-17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 너무 과분한 칭찬이라... ㅎㅎ 아, 아이가 깨우는 아침, 정말 조금 더 자고 싶은 일이었지요.
 
낯선 길을 비추는 오래된 꿈
최갑진 지음 / 작가마을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인터넷에서 어지간하면 댓글을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어쩌다가 매력적인 제목에 낚여서 글을 읽다보면 댓글까지 보게도 된다. 특히 교육에 대한 기사의 댓글에는 전교조를 박살내면 이 국가의 교육의 악은 일소되는 것같은 댓글이 반드시 있다. 마치 반공민주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던 유신 시대의 망령을 보는 듯하다.

공산당, 인민군을 미워하는 것이 애국이던 시절이 있었다. 나라 사랑은 당연한 것이고, 매일 오후 6시면 길거리에 가만히 서서 애국가를 경청해야하던 어두운 시절이 있었다.

이제 극장에 가서도 애국가를 듣는 일이 없지만, 아직도 한국인들의 뇌리에는 애국가가 흐른다.

최갑진 선생은 해직교사 출신으로 부산에서 활동하는 문인이다. 초창기 전교조 해직 교사들이 가지는 투쟁성을 합법화 시기 이후에는 담보해낼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합법화로 인한 대중 조직이 된 것이 아니라, 시대가 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이념의 시대에서 자본 획일화의 시대로... 무한 경쟁의 시대로...

그래서 0교시 철폐나, 불법 모의고사, 찬조금 고발, 강제자습 반대, 보충수업 참가 거부 등의 투쟁은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에게 <참교육>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학교 안에서도 두발 자율화, 주번 폐지, 교문 지도 폐지 등의 사안은 아이들을 믿지 못하는 교사들의 낡은 인습의 틀에 묶여, 또 경쟁에 나서는 아이들에게서도 <참교육>은 아닌 듯 하다.

그럼, <참교육>이란 무엇이며, 전교조는 이제 어떤 위상을 가져야 할 것인가?
교육부는 아니, 인적자원을 교육하는 교육인적자원부는 이제 국민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전교조>를 매도하려고 하고 있다. 마치, 국익이란 이름으로 이라크 파병을 내세운 정치인들처럼...

해방과 함께 우리에겐 미국이 왔다. 미군정이 가장 먼저 만든 것은 <국립서울대학교>였다. 국립종합대학교설립안(국대안)의 의도는 기존의 사학의 개성을 죽이고, 유일무이한 특급 대학을 만들어 미국인의 시녀로 종사하게 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원대한 포부는 지금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누구나 서울 대학교를 들어가고 싶어하며, 서울 대학교가 주는 꿀단지를 맛보고 싶어한다. 서울 대학교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늦었지만, 이미 이 나라의 상층부를 다 차지해 버렸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국립대는 돈이 많이 드는 인문대, 자연대를 기르고, 나머지는 사학에 특화시켜 줘도 무방하지 않은가?

지금 전교조는 교사평가제 반대, 차별성과급 반대, 연금법 개악 반대를 두고 총력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것은 참교육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이 제도들은 교사들의 밥줄을 옭죄고 있는 것으로 중요한 당면 현안이다. 그러나, 비극적으로도 이런 정당한 싸움들이 일반인들에게는 <밥그릇 싸움>으로 보이는 것 같아 아쉽다. 그렇게 매도할 수도 있는 측면들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교육부가 저지르는 사업들이 <인적 자원 교육>에는 관심이 없는 것들로 일관되어 있어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정당한 싸움이라고 해서 늘 인정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무한 경쟁 궤도에 올라있는 아이들을 방패로 삼아 교육청은 <교육>을 방관하는 <관청>으로 전락해버리고 만 현실에서... 날마다 광포해지는 아이들과 학부모를 상대로 <학교 폭력 위원회>를 열고, 시달리는데도 지쳐버린 관청에서 어떠한 교육적 지시도 내려올 수 없지 않겠는가.

리영희 선생님이, 자신은 과거의 사고 방식으로 미래를 읽기 어렵다는 논조의 말씀을 하셨듯이, 과거의 조직인 전교조가 미래에 어떤 조직으로 거듭 나야 할 것인지를 읽어 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일은... 지금 이 안개 자욱한 시기를 쓰러진 온 몸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해직, 독재의 시기처럼 온 몸은 만신창이지만 하늘의 별은 또렷하던 시기의 운동과는 또다른 뒷심이, 아니 더욱 강한 뚝심이 앞으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멀게 보고, 눈 앞의 싸움에 연연해 하지 말고, 별이 보이지 않아도 그 별은 어느 날 문득, 내게 부끄러움으로 드러날 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지고 온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엄중한 시기가 아닐까 한다.

최갑진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부산의 골목들, 거기서 마시던 대선 소주들의 휘발성 단냄새가 진동을 한다. 엊저녁 마신 술이 목 뒤를 뻐근하게 만들지만, 술과 함께 희망도 가슴 깊이 심어둘 일이란 생각을 한다.

이제는 낯선 길이지만, 별로 비추는 오래된 꿈, 그러나 꿈은 이뤄진다던 소망처럼 그 오래된 꿈을 잊지 말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 이오덕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
이오덕 지음 / 길(도서출판)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떻게 살 것인가를 떠올릴 때마다 고 이오덕 선생님을 생각한다. 그 분께서는 뾰족한 이론 같은 것 모르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부려 쓰는 일을 통해 표현하는 가르침을 베푸느라 한 평생을 보내셨고, 대인다운 면모로 교육을 걱정하시면서도 한국 교육의 모습을 그려주셨다.

무엇보다 고 이오덕 선생님의 교사 생활이 출세 지향적이었거나, 점수를 따려고 노력한 그것이 아니었으며, 오로지 아이들의 성장에 관심이 있으셨던 것에서 내 모습을 비추어 보곤 했다.

이 책은 월드컵에서 보여준 우리의 힘에 감격하신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한국의 스포츠 쇼비니즘적인 광적 애국주의에 찬성하시는 것은 당근 아니다.
축구를 잘 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에겐 이런 좋은 에너지가 있었는데 그것이 역사적으로 억압되었던 것이 2002 월드컵으로 표출되었던 것이 가능성을 보셨던 것이다.

이제 고인이 되신 선생님께 부끄러운 것은 2006년 월드컵에서는 그런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도 보여주지 못했을 뿐더러, 다시 백인 지상주의적인 감독에 대한 러브 레터를 이번에도 보냈고, 응원 문화도 상업지향적 플레이에 빠져버렸고, 일부 청년들의 광적인 축제 뒤풀이는 스포츠 쇼비니즘의 광적 국가주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가장 걱정하시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 대한 사랑이 없는 교육. 아이들을 죽이는 교육이 아직도 이 땅의 학교에서 자행되고 있고, 부모들이 저지르는 일이라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학교에서 친구를 폭행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엉망이 된 시스템은 그 아이들 개인의 문제가 아닌 때문이다. 괴롭힘을 받아 죽은 6학년 아이, 정현이가 이젠 걱정 없는 세상에서 편안히 살기를 바라며, 담임으로서 늘 조마조마한 마음인 것은 교사 아닌 이들은 알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담임을 하기 싫어하는 것은 일이 많아서가 아니다. 담임을 하지 않으면 보람도 그만큼 없다. 그러나 담임이 져야 하는 책임은 무한 책임이기 때문에, 요즘의 무지막지하고 무차별적인 학부모의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은 언제나 담임의 자리이기 때문에 갈수록 담임 구하기가 어려운 것이 모든 학교의 실정이다.

아이들을 놀이터에서 마음껏 놀게 하지 못하는 나라. 아이들이 발랄하게 뛰어 놀고, 창의력을 기르는 놀이 속에서 예술가의 심성을 배우며, 친구가 공부보다 중요함을 가르치지 못하는 나라의 미래는 과연 조금이라도 있을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이 책에서 다룬 또 하나의 테마는 국어에 대한 애정이다. 선생님은 우리말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오신 분으로서, 그 세대에 정리하셔야 했던 일본어 찌꺼기에 대하여 관심을 많이 기울이셨다. 넓게 본다면 한반도에서 발원한 <한어>가 일본 열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지금은 <한어>와 <일본어>의 두 양태로 살아 남았는데, 연변 조선족과 이북 사람들, 이남 사람들이 쓰는 이 말을 <한국어>라고 함은 어불성성이다. <한어>라는 가치 중립적인 용어를 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조선어>라는 말은 임시 방편으로 쓸 수는 있을지라도 우리말의 정확한 용어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어도 한어라고 하지만, 한자가 다르고 쓰임이 다르므로 통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늘 생명 기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으신 선생님. 그것이 참교육이며 올바른 교육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신 선생님을 생각하면, 날마다 갈팡질팡하는 내 얄팍한 마음은 볼수록 부끄럽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몽당연필 2006-10-08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오덕 선생님의 책은 아동문학을 공부하면서 알게 됐는데요.
우리 글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아끼셨던 분이란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실때도 그 점을 무척이나 강조하셨고...
좀 더 우리곁에 계셨으면....얼마나 좋았을까요...

2006-10-08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06-10-14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당연필님... 아동 문학과 어린이 그 소중함에 대해서 이오덕 선생님은 얼마나 철저하셨는지요. 아이들을 모두 하느님으로 보신 분. 그래서 아이들이 모두 소중하단 것을 아신 분이시죠. 조 카페엔 함 가볼게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