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학교 노교사, 교육 희망을 보다 - 이원구 선생님의 교육에세이
이원구 지음 / 우리교육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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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학교에 몸을 담은 것이 8살 때부터이니 어언 삽십 여 년을 학교에서만 지내고 있다. 중간에 군대 생활 1년 반을 제하고는 오롯이 학교란 공간에서 학생으로 선생으로 살고 있는데...

학교가 하는 일은, 그저 1년을 쳇바퀴 돌듯 굴리는 일이다. 그 와중에 진급을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교감으로 승진하는 사람도 간혹 있는데... 그들의 많은 수는 별로 존경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내가 닮을까봐 두렵다. 친하게 지내게 된 몇 분의 선생님들과는 주로 술을 마신다. 그러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는데... 학교에서 희망을 찾는 이야기는 나누기 힘들다.

이원구 선생님과 몇 번 만났던 일은 국어교사모임 초창기 마포 사무실에서였을 것이다. 하긴 내가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이었으니, 선생님도 젊으셨겠지.

선생님은 교사일에 '환멸'을 느끼셨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교육 개혁' 과 뚜껑 '열린 교육' 때문이다.
교육 개혁의 명목은 학교를 <하향 평준화> 시키는 데 열중했고, 교사들을 달달 볶는 데 안간 힘을 썼으며, 결국 아이들을 <학원으로 몰아 넣은> 결과를 낳고 말았다.

중학생들은 연합 고사만 잘 치면 됐는데(그래서 1,2학년때는 비교적 자유롭게 지냈다.), 이제 중1부터 점수 관리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오히려 나머지 시간에 특기, 적성을 기르는 일엔 염도 못 내고 보습 학원에만 목을 맨다.

고등학생은 더하다. 전에는 평소에 열공해서 내신만 좋던 아이들(얘들은 성실파지만 머리는 좀 별로인 아이들이기 쉽다.)은 수시로 가고, 벼락치기 고3파는 정시로 가면 됐는데, 이제 수능도 등급제로 돼버려서 아이들은 그야말로 '운'에 맡겨야 한다. 선배들이 학교 이름을 날려 두었으면 그나마 조금 나을 수도 있겠지.

학교에서 근무하면 '환멸'은 금세 느끼게 된다. 학교 시스템은 정말 환멸스러운 구조다.

학교에서 희망이라고 하면 오로지 아이들 뿐이다. 동료 교사들을 쳐다봐도 전혀 존경스럽지 않은 인간들로 그득하다. 그들 중 몇 명에게서만이라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즐거운 일이다. 그 희망을 잡기 위해 나는 무슨 힘을 쓰고 있는가, 어떤 힘을 써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모색하는 중이다.

이원구 선생님은 한 사립 여중학교 국어선생님이다.

아이들과 학교에 텃밭을 가꾸고 들꽃들도 심고 하면서 땅냄새를 맡으며 대화를 하는 시간에 아이들도 교실보다 자연스런 세상이란 학교를 배웠다. 그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담겨있다. 풀꽃들에게서 배우는 사람들...

아이들만 시키면 단순한 일이 되어버리는 일도 아이들과 함께하면 교육이 된다는 간단한 진리. 그걸 깨닫지 못하면 평생 손과 발을 움직이지 않고 이빨만 가지고 아이들 마음에 상처나 주면서 선생질을 할 뿐... 임을 말씀하실 땐 마음이 아려왔다. 철학자란 모름지기 인생의 맛을 아는 사람이랬는데... 그 맛은 모르고 그저 깐깐하게만 선생하다 보면 환멸을 느끼기 쉽다.

루소가 그랬단다. 신의 손에서 태어날 때는 모든 것이 좋았는데 사람의 손이 닿으면서 모든 것이 더럽혀지고 만다고...

꽃을 보면서 선생님은 생각한다. 새 생명은 사람이건 강아지건 들꽃이건 모두 아름다운 법이라고, 그래서 아이들에게 미래도 중요하지만 오늘도 행복하게 해 줘야 한다고... 과연 우리들은 들꽃보다 행복할까? 들꽃만한 향기를 내고 있을까? 인간만의 독취를 풍기면서 또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3불정책을 거듭 외치며 오로지 학교의 하향 평준화와 입시 정책의 오리무중화만을 외치는 교육부 관료들의 똥만 든 대가리 속에 진급에 대한 욕심만으로 가득한 악취를 부끄럽게 할 들꽃 한 송이 부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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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2007-03-24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처럼 좋은 선생님이 계시니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요. 들꽃 송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여기 대저 낙동강둑에 들꽃이 제법 있거든요^^

혜덕화 2007-03-24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꽃을 보고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후회할 일도 적게 하겠지요. 오늘이 행복하지 않은 아이들의 내일이 행복하리라고 믿는 사람들, 도대체 무엇이 그런 환상을 가능하게 하는 걸까요? 꼭 교육 관료가 아니라도, 각 집안의 부모인 우리들 부터.....

글샘 2007-03-2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기로운님... 좋은 선생님이라뇨... ㅋㅋ 말씀만으로도 황송하옵니다. 들꽃은요, 옮겨 심으면 기존에 있던 놈들이 싫어한다네요. ㅎㅎㅎ 핑계입니다. 나중에 필요하면 부탁드릴게요^^
혜덕화님... 정말 오늘이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내일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환상...이겠죠.
 
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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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있다. 인문학이란, 인간에 대한 학문이다. 인간이 쓰는 언어와 인간의 생각을 따지는 철학, 그 생각이 유형화 된 종교학,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미학이나 기호 체계의 형식적 절차를 따지는 논리학, 인간의 마음을 행동으로 파악하는 심리학... 이런 것들을 통틀어 이름인데... 이런 것들은 위기에 빠질 리가 없다.

인문학도의 위기나, 인문대학의 위기가 되겠지.

세상에서 제일 잘 사는 강대국도 미국이지만, 반면 가장 비참한 계층이 사는 나라도 미국이다. 다른 나라의 빈곤 계층은 식민지를 거쳤거나 종교적 계층 의식 등으로 생긴 계층이지만, 미국은 원주민을 학살하고 노예를 아프리카에서 잡아왔으며, 공업 입국의 체제에서 숱한 노동자들을 양산해 냈다. 술과 마약에 찌든 사람으로 가득하며, 갈곳 없는 아이들이 득시글거리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몰려든 라틴계도 이제 흑인 세력을 앞선다고 하는데, 그들은 대개 빈민층이다. 헐리우드 영화에 '아스타 마냐나'같은 스페인어가 뒤섞이는 일은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 빈민층이 각종 전쟁에 총알받이로 들러리를 선다.

그 미국의 빈곤 계층이 가난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도적 잘못으로? 게을러서? 구조적 모순... 이런 것들은 아무 해결책이 없는 망언들이다.
10년 쯤 전, 인생에 아무 비전이라곤 없는 사람들을 모아 소크라테스를 이야기하고 플라톤을 들먹이는 대학 교수들의 수업을 시작했다. 그것을 클레멘트 코스라고 한다. 이건 무슨 운동 차원도 아니고, 그냥 빈곤 계층에게 인문학 수업을 한 것이다. 그 수업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버드 대학생들도 들을 법한 그런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교학상장이라고...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들은 클레멘트 코스를 통하여 서로 배웠다. 그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못배우고 못사는 사람들의 특성은 <즉자성>이다. 어떤 일에 맞닥뜨리면 '단순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욕설이기도 하고, 폭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문학이란 부를 소유했을 때, 부산물로써, <성찰>의 공적인 삶으로 승화된다는 것이 이 책의 가설이기도 하고, 결론이기도 하다. 클레멘트 코스의 근본 목적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에는 값을 매길 수 없다는 것. 이 코스의 가치는 도저히 잴 수 없는 것.

비니스라는 여성 재소자에게서 길거리에 방치된 아이들에게 해줄 것으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제안받고 이 코스는 태동되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2년을 얼마나 반성했는지 모른다.
중학교나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가난한 아이들은 그저 무시하면 되는 거였다. 알량한 교사의 양심을 가지고 그 아이들에게 몇 푼의 동정심을 던져 주면 만족한 거였다. 고등학교 입학금이 없다는 녀석에게 내 통장에서 돈을 꺼내주고는 좋은 일을 했다고 만족하고 말면 그만이었다. 그녀석이 등록을 했든 말았든. 학부모가 주는 촌지로 공부방이 제대로 없어서 집에선 공부가 안 되는 아이에게 독서실 끊을 돈을 주었더니 녀석은 성적이 엄청 올랐다. 그게 다 내 덕이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실업계 아이들에게는 일말의 동정심을 던져 주기도 어려웠다.
아이들은 대부분 수업에 흥미가 없으며, 도대체 남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보였다. 이 아이들에게 도대체 난 무얼 해줄 수 있는지, 그닥 고민도 해보지 않았지만,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일이든 시간이 필요한 일이기에 다른 이들을 관찰하기도 했고, 나름대로 궁리도 해 봤지만 선뜻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슨 일이 이 아이들에게 자부심을 심어 주고 성찰의 힘을 갖도록 도와줄 수 있는 길일까?

희망의 인문학을 읽으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인문학이란 것을 깨달았다.
인문 고등학교와 똑같은 수업인 것이다. 일반계 고등학교에 비해 질은 떨어지지만,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학교는 더이상 실업계 고등학교라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수업을 일반계처럼 진행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가 따를 것으로 보인다.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가난해서 공부를 못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올해는 특별활동 시간이 토요일에 잡혀 있으니, 특활 시간을 이용해서 '수능진학반'을 1학년에 개설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대학을 가기는 가지만, 공부도 안하고 그저 내신으로 들어가고 만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도 3년간 노력해서 한양 공대정도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내팽개쳐두는 것과는 차이가 많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이들의 공부를 돌봐줄 수는 없지만, 의욕을 주고 계획을 관리해 주며 무엇보다도 언어영역의 <인문학적 소양>을 같이 공부하면서 아이들이 할수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

독서 지도를 체계적으로 하기엔 아이들이 너무 많다. 올해는 수업 시간을 이용해서는 재량활동과 연계하여 쓰기 수업을 적극적으로 해볼 것이고, 특활을 1학년부와 의논해서 수능준비반으로 운영해볼 욕심을 가져볼까 한다. 1학년 부장님이 마침 모교 출신 실과 선생님이니 반가워하실 일이다. 문제는 아이들의 호응인데, 시작이니 좀 유인책을 마련해서 좋은 아이들을 모집해볼 생각이다.

간혹 일반계에 가서도 충분히 적응할 수준의 아이가 실업계로 오기도 하지만, 우리 학교엔 그런 아이가 별로 없다. 개천에서 용나지 않는 시대라 하지만, 개천에 지렁이도 없다고 여기지 않도록, 도랑도 자주 치고 가재도 잡는 움직임이 필요할 거라 생각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에 비하자면, 얼마간 하다가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훨씬 앞서간 거라고 생각하고...

이 책에서 힘을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사회가 억압하는 무력을 force라고 했고, 거기 저항하는 폭력을 violence라고 하며, 정신적으로 자신감을 갖는 것을 power라고 했다.

포스로 찍어누르는 교사에게는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반항하는 바이얼런스가 생기게 마련이다.
교사의 할 일은, 포스의 권위를 갖추는 일이 아니라, 아이들이 파워를 갖추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아이들이 파워를 가질 때, 교사는 비로소 권위가 서는 것이라 믿고 올 한해를 살 힘을 이 책에서 얻는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볼 법 하다. 사회학도도 마찬가지다.
빈곤이나 소수자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도 이 책을 권해 본다.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하던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를 떠올리니 무심하게 제 좋은 책만 읽었던 내 뒷모습이 왜 이리도 낯뜨겁게 비춰지는지...

가난한 사랑 노래 (부제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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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2-27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인가?
프리모레비에 의해 무거워져도
그 무거움이 다시 사라지는 인간의 본모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 한 권이 언제나 조그만 실천으로 이어지는 선생님을 보면서..
나를 돌아봅니다.
인문학의 위기라고는 하지만
정작 그래서 더 필요한 인문학인데...
역설적인 세상이군요.
가슴에서 어떻게 이 역설을 녹혀내야 할 것인지 생각해봅니다.

신경림의 시가 갈빗뼈를 긁어댑니다.

글샘 2007-02-28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늘은 프리모레비를 읽어야겠군요. 저도 실천이라기 보다도... 생각만 합니다.^^
올해는 실천으로 옮겨졌으면... 하는 생각 말이지요.
갈비뼈를 긁어대면 어떤 소리가 날까요? ㅎㅎㅎ

2007-03-01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07-03-01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즉자성은 동물적 특성이지요. 사랑은 결코 즉자성에서 나올 수 없는 것이라서 모든 종교에서 결국 수행과 깨달음의 종점을 사랑이라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우리 아이들이 즉자적 존재라기 보담은, ... 좀 그렇죠. 욕 잘하고, 잘 싸우고... 제가 포기하지 않기를 빌어 주세요^^

starla 2007-03-14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심하게 제 좋은 책만 읽었던 내 뒷모습'이란 표현이 눈에 밟히네요. 수업계획 모쪼록 성과 좋으시길 바랍니다.

글샘 2007-03-15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기초입니다만... 쉽지만은 결코 않네요^^ 아이들을 위한 읽기 자료를 충실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아직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고요... 격려해 주셔서 열심히 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의 매는 없다 - 폭력과 체벌 없는 어린 시절을 위하여
앨리스 밀러 지음, 신홍민 옮김 / 양철북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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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한 것이 18년 지났다. 세상이 서너 번 뒤바뀔 시간을 근무했지만, 생각해보면 학교는 안 바뀐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또 곰곰 생각해 보면 많이 바뀌기도 했다.

'인권'이란 개념이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예전처럼 툭하면 걷어차고 몽둥이 찜질을 하는 일은 드물고, 학생을 괴롭히는 부적격 교사들도 많이 줄어든 것 같다. 나도 학교라는 제도에 참으로 불만이 많았던 학생이었던 모양이다.

그랬는데, 내가 학생부 선생이던 시절, 나도 참 아이들을 많이 때렸다. 학생부 교사는 일정 정도 악역을 담당해야 하고, 특히 학생들을 조사할 때 아이들의 인권은 존중받지 못했다는 생각을 이제야 하지만, 십여 년 전만 해도 그런 생각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학교에 배당된 외국어 강사가 내가 학생 뺨을 때렸다고 와서 마구 말린 적도 있다.

한동안 아이들이 맞는다고 경찰차가 학교에 들어온 적도 있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학교 현장에서 폭력의 매는 사라져 가고 있지만, 사실은 '사랑의 매'도 줄어들고 있다. 과연 '사랑의 매'는 있을까?

나는 문화적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매는 '폭력적인 수준'의 것이지, 말을 알아듣는 아이에게 규칙을 알려주고 '찰싹' 손바닥을 때리는 정도의 매는 결코 치욕스럽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심리학의 많은 이론들을 배우다 보면, 독자들이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리적 갈등이 생길 때 여러가지 방어기제를 사용하면서 살아날 길을 모색하므로 크게 문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질병 이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이 문제다.

이 책의 원리는 단 한가지다. 폭력은 대물림된다는 것. 그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렇지만, 폭력을 낳은 많은 원인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임을 이 책은 놓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아동 학대를 심각하게 다루는 SOS란 프로그램이 있어서 가끔 봤는데, 경제적 궁핍이 알콜 중독을 낳고, 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우리의 정신은 폭력을 잊을 수도 있지만, 우리 몸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학생 시절이나 군대에서 겪은 '폭행의 추억'이 권력자를 폭력행위자로 만들듯이, 폭력의 문화는 폭력을 크게 문제시하지 않는다.

불안감을 통해서 아이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불안감 뿐'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이 책의 가치라고 한다면, 폭력을 통해 배우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부모나 교사가 아이를 가르칠 때 '사랑'이란 이름으로 폭력을 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널리 알리려는 시도에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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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2-16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글샘님이 학생 뺨을 때린 적이 있다니, 상상이 안 되네요.
중고교 때 그런 선생님이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치욕적이었던
기억이 나요. 저도 사랑의 매는 없다고 생각하는 쪽인데, 이런 생각도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겠지요.

달팽이 2007-02-16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매는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들어보면 늘 습관이 되기 쉽거든요.
하지만 지나고 보면 일년에 몇 번씩은 매를 대거든요.
반성합니다. 하지만 매를 댈 때 마음만은 이 녀석이 이 매 맞고 바른 마음으로 친구와 잘 지내기를.. 하는 발원을 하도록 노력합니다.
매는 어쨌거나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
하지만 더 사실은
"꽃으로 때려도 폭력일 때가 있고
망치로 때려도 사랑일 때가 있다."는 말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글샘 2007-02-16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가능한한 학생부에는 안 있으려고 합니다만,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생기겠지요. 학생부는 일종의 경찰 역할이라, 아이들 야단칠 일이 정말 많습니다. 정말 무서운 아이들도 많거든요^^ 세상이 더 좋은 쪽으로 바뀌어야 할텐데요...
달팽이님... 아이들과 약속하고, 안지키면 한두대씩 맞는 걸 남자아이들은 훨씬 좋아하지요. 두고두고 혼내는 거보다는... 아이들을 툭툭 건드리고 머리 쓰다듬고 하는 걸 저도 좋아하는데요, 아이들도 만져주면 좋아하는 것 같애요. 근데 가끔은 싫어하는 아이도 있고... 무엇이든 과유불급이겠지요.

해적오리 2007-02-16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서 아직 안 읽었는데 책을 보기 전에 님의 서평을 먼저 보게 된게 다행이라는 생각이드네요. 잘 읽고 갑니다.

드팀전 2007-02-22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지요....2월 가기 전에 한번 뵙고 싶었는데..이거 쓸데없이 번잡한 일이 많아서 여유를 못내고 있습니다.3월 달은 선생님들이 바쁘신 계절이니 더 따뜻해져야 가능할까...^^ ...교육감선거다 학교안전요원이다 해서 교육청을 자주 들락거렸습니다.
전교조 지부도 들락거리고... 선생님들 생각이 나더군요.
학교에서의 폭력을 사랑의 매라고 하는 것은 점점 더 동의할 수 없어집니다.아무리 좋은 의도였다고 하더라도 다른 접근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폭력은 가장 쉽고도 전통적인 방식일 뿐이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달팽이님의 고민은 인정하지만 결국 그것도 학교에서 어느 정도 폭력은 수용할 수 밖에 없다는 전제하에서 시작합니다.대신 그 범위와 또 그 의도의 순수성을 문제삼고 있는것이지요.느슨한 접근은 선생님의 감정적 체벌과 이성적(?)체벌 사이의 경계를 쉽게 무너뜨리게될 듯 보입니다.

학생들의 인권문제는 참 관심이 많이 가는 주제입니다...나름대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신분들도 아이들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아니 '학생답게'라는 이름으로 간과되는 분위기가 맞겠지요.현장에 계신 선생님들과는 조금 다른 시각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만...외부에서 바라보는 시각으로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통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비인간적인 입시 교육 하에서 당연한 귀결같기도 합니다만 거기에다가 모든 책임을 미루는 것 역시 현재의 문제를 사소한 것으로 만들 수 있기도 합니다.참교육 학부모회에서 학교교칙 분석을 통한 학교인권 보고서가 있었는데...(그다지 심층적이지는 않습니다만)...결국 과거 교육제도와 그에 익숙한 교육자들,그리고 학부모들의 고루한 생각이 교육을 우리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제도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글샘 2007-02-22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적님... 좀 지루하긴 하지만, 재미있는 책입니다. 함 읽어보세요.
드팀전님... 저도 폭력에 대해서는 정말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만, 학교에서 체벌이 사라지면서 형식적 권위나마 무너져 버리는 것에 혼란을 겪고 있어 보입니다.
공교육이 사실은 '개인의 진학과 출세'를 위한 사교육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너무 욕심을 내선 안되는 것 같습니다. 한번에 하나씩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놓치는 일 없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파울로 프레이리 외 지음, 프락시스 옮김 / 아침이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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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 제목은 ‘We make the road by walking.’이었다.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정도면 멋진 제목이다.

미국의 지역학교 활동가 <호튼>과 브라질의 교육학자 <프레이리>의 교육과 사회 변화를 위한 대화는 교육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나에게 큰 깨우침과 부끄러움을 한꺼번에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프레이리와 호튼은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통점을 갖는다. 그래서 이런 대화를 펼치게 된 것이다. 프레이리는 글에서나 대화에서나 호튼에 비해 이론적이지만, 호튼은 일화 중심의 소박한 편이고, 프레이리가 대학의 연구와 정부 관료로서 프로그램 운영을 한 반면, 호튼은 철저하게 지역학교에서만 활동했다. 프레이리는 정치적 영향으로 여러 나라를 떠도는 반면 호튼은 미국의 남부지방에서 뿌리박고 살고 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지식은 사회적 경험으로부터 성장하며 사회적 경험을 반영한다’는 의식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출생지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국가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즉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공통점이 많은 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 공통점은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들의 세력화를 위한 참여교육의 역사와 비전을 공유하는 것>이란 결과를 낳게 된다.

옮긴이 praxis는 비판적 교육학을 공부하는 모임이다. 프락시스는 ‘실천’을 일컫는 말인데, 이름에 걸맞게 실천적인 프레이리의 대화를 멋지게 번역해 내고 있다.

그들의 대화에서 얻은 한 가지만 말하라면 이것을 들 수 있다. 평생 학교를 다닌다고 하더라도 결코 모든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는 없다. 네가 얻고자 하는 답은 바로 삶의 현장, 사람들 속에 있는 것.(315) 공부란 어디에서도 답을 얻을 수 없지만, 무엇에서든 답을 얻을 수도 있다. 솥을 아홉 번 옮기고 도가 튼 구정 선사 이야기처럼...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서 진리를 배울 수 있다. 학교가 그 유일한 기관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대화에서 학교란 진리를 외면하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 되고 만다.

그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읽노라면, 독서에 관한 이야기, 학교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자유분방하게 실려 있다.

독서는 책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그 텍스트를 다시 쓰는 일. 이는 창조적이며 동시에 미적인 활동. 책을 읽는 행위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노력(프, 46)

선생님들의 바보 같은 질문 때문에 바보가 되기보다는 혼자 책읽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일.(호, 47)

글쓰기와 책읽기의 의미를 학생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것은 쉽다’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일이다. 독서 역시 하나의 연구라는 것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생들에게 이 창조의 순간을 맛볼 수 있도록 자극을 주어야 한다.... 공부는 사랑과 비슷... 사랑에 시간표는 있을 수 없다... 사회가 갖고 있는 가장 비극적인 병 중 하나는 마음의 관료화.(프, 58)

그리고 그들이 평생을 바쳤던 교육 운동에 대한 이야기들은 앞으로 살아갈 나의 앞길을 가늠하는 데 등댓불을 비쳐 준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실천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채찍질하지 않으면 말은 자꾸 두려워하게 마련이니까...

헌신하면 가능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변화할 수 있습니다.(호, 77)

처음 가졌던 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꿈이 새로운 꿈이나 비전으로 확장되는 것.(프, 80)

교사는 가르쳐야 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83) 훌륭한 교사란 늘 놀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인생에서 가장 나쁜 일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어지는 것.(91)

그렇다. 변화를 인생의 목표로 삼았더라도, 헌신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비전은 바뀌며, 훌륭한 교사의 섬세한 촉수를 내려서는 안 된다.

대담하게 행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도전이 있어야... 도전할 만한 것이 눈에 보이고, 자신들을 위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서고, 목표를 향해 가야 할 길을 볼 수 있다면 민중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변화가 국가 단위에서 일어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작은 희망과 모험의 보따리를 움켜쥐고 일을 하고 있는 것. (호, 123)

정치적 결단이 개입된 교육은 결코 자발성을 이끌어 낼 수 없다.(프 124)

교육이 보편적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메리, 피터, 존과 같은 구체적인 존재. 교육자는 누구를 위해 일할 것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교육자는 정치적으로 명확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프, 132)

중립성에 대한 이야기는 하워드 진 교수의 의견처럼, 중립이란 하나의 정치 수사라는 것을 명백히 한다.

중립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 중립성은 현체제에 찬동한다는 것을 감추는 교묘한 말, 중립성은 비도덕적인 행동.(호, 134) 사람들이 체제 안에 있다면 체제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일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일보다는 사회 변혁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136)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사이에서도 중립적이란 말이 통할까? 절대 불가능하다. 이런 관계에서의 중립성이란 지배집단을 위한 봉사를 의미할 뿐. “나는 지배집단 편이오”라는 말 대신에 “나는 중립적이오.”라고 말하는 것.(프, 136)

스스로를 중립적이라고 우기면서 우리더러 중립적이지 않으니까 선동가라고 비난하는 사람들 역시 중립적이지 않다. 자신들이 현상 유지의 지지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호, 235) 스스로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주장하는 데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프)

그리고 지도자의 품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꿈을 번역해 내는 지도자. 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닌 지도자. 아, 체 게바라가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도자에게는 겸손이 중요하다. 만약 지도자가 민중들의 기대에 부응해 카리스마를 갖게 되었다면, 그 지도자는 민중의 열정과 꿈을 번역해 내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 꿈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프, 145)

교육은 인간의 존재와 호기심과 관련된 영속적인 과정(154)

호튼 선생님의 교육자의 개입 방법은, ‘해법을 제시하지 마라.’와 ‘정직하라’이다. 첫번째는 ‘나는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둘째는 ‘내가 답을 알고 있더라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해답을 말하게 되면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답을 말해주어야 하기 때문.’(163)

전문가의 지식을 이용하는 것과 그 전문가가 사람들이 해야할 일을 직접 말해 주는 것은 다르다.(167)

호튼의 하이랜더에서는 늘 두 가지를 따라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완전한 의사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176)

교육자라면 단지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기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강요할 권리가 없다고 해서, 침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는 개입할 의무가 있는 것.(프, 178) 전통은 좋은 것을 선별해서 지켜야 하는 것.

때리지 않는 것... 자신이 잔인해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잔인한 사람... 신체적 학대에 대한 사고 방식의 반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야...(호, 181)

스스로 교육과정을 조직하고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일은 그만큼 사람들을 성장시킨다. 자신이 기대하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그만큼 더욱 요원해진다.(프, 188)

질문은 사람들의 생각을 돕는다. 잘 따라와준다면 질문을 통해 상황을 진전시킬 수도 있고 생각을 전달할 수도 있다. 성장하도록 도우면서도 의존적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질문은 생각을 전달하는 데 정말 좋은 방법.(호, 190) 어떤 권위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했기에 자신의 생각이 되는 과정.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과정. 말을 목마르게 해서 스스로 물을 마시게 하는 것.

교사는 자신만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아이들의 발들을 위해 교사만이 할 수 있는 임무. 교사가 제대로 하지 않고 서툴고 무능하다면, 그래서 아이들의 지적 능력을 계발하지 못하고 정서적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면 <교사의 권위>를 손상시킨다. 또 교사의 권위와 아이들의 자유를 조화시키는 문제도 있다. 교사라면 학생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237)

이런 교육적인 테제들을 읽고 있노라면 나의 과거는 언제나 어두운 쪽, 가진자들의 쪽, 민중의 반대쪽에서 억압의 기제에 동참하는 인간으로서의 교사 역할이었다는 자격지심이 가득해 진다.

박사도 모르는 게 있는 법. 나도 풀 이름, 생선 이름 모른다. 어떤 도회인이 산에서 길을 잃고 아이에게 길을 물었더니 계속 모른단다. ‘넌 정말 아는 게 없구나.’라고 했더니, ‘그래도 저는 길을 잃진 않아요.’ 하더란다.

노동자이건 대학생이건 학생 입장이 되면 스스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다.(프, 204) 그들 자신이 답을 갖고 있는데도 말이다.(호) 학생들은 교사는 권위적인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프)

교육자가 어디에서 활동하든 가장 어려운 일은 교육이 진지하고 엄격하며 체계적인 하나의 일관된 과정 속에서 행복과 기쁨을 만들어 내는 일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은 위대한 모험. 행복과 기쁨.(프호, 217)

공부는 자유로운 일이 아니어서 어렵다. 하늘이 내려준 선물도 아니다. 공부는 엄격하고 무미건조하고 고된 일, 그러나 고됨 속에서도 행복이 솟아오른다. 어느 순간 공부의 성과 때문에 생복해 지는데 이는 진지함과 엄격함으로부터 나온 것(프, 218) 좋은 학교는 공부를 하면서도 놀이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곳.

교육자로서의 확신.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차별하지 앟는 것이 중요. 비전을 가지고, 오늘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들에게는 더 큰 어려움이 될 뿐.(프, 240)

프레이리의 ‘비판적 낙관주의자’란 말이 맘에 들어 온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는 신념이 들리는 듯한 말이 아닌가. 비판적 낙관주의자.

호튼은 평생을 걸어온 길을 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룬 것이 크지만, 아직도 그들이 갈 길은 요원함을 안다. 그렇지만,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낙관한다. 강철같은 의지로...

(호튼, 270) 하룻밤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할 가치도 없는 일. 어려운 일일수록 시간이 걸리낟. 그 일을 부여잡고 오랫동안 씨름해야 이룰 수 있다. (프, 273) 학교 체제가 변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실천하기가 참 어렵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자유에 대한 신념을 갖기 위해서는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 없이 자유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다른 한편, 자유가 필요없을 때까지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유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또한 자유를 얻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유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는 말아야 한다. (274)

혁명은 토지소유 관계, 선거 제도 등 혁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들은 바로 변화시켰다. 하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학교는 저절로 바뀌지 않았다. 사회변화는 역사적인 것이지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276)

진보적이라 함은 중요한 결단을 내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혁명을 지켜나가는 일.
민중들과 관계를 심화시키는 것.
민중의 다양한 신념들을 존중하는 것.
민중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
민중의 언어에서 출발하는 것.
민중이 가진 지식의 주순을 인식하는 일.

이것이 바로 혁명의 과정(프, 280)

당신은 종교인인가요 하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저는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인이에요. 제게는 이 상태가 정말 편합니다.(프, 303) 비판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사고가 특정한 것에 붙잡혀 갇혀버리면 안 된다. 굳어버리면 안 된다.

나도 배웠다. 나도 종교인은 아니지만 신앙인이라고 하리라.

노자,

민중에게 가서 민중에게 배우라.
민중과 함께 살고, 민중을 사랑하라.

민중이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고
민중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들어라.
그러나 최고의 지도자는

모든 일이 끝나고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 힘으로 이 일을 해냈다.’고
민중 스스로 말하게 할 수 있는 자일지니...

민중 교육의 깃발이 오른 것도 어언 이십 년이 지났다. 전교조는 이제 학교에서 우뚝 서 있지만 아직도 색깔 공세에 밀리고 있으며 그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의 민중 교육을 위한 발걸음도 우리가 걸어감으로써 길을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인터넷에서 노무현을 싸잡아 욕하고, 전교조를 비난하고, 386 세대를 비웃더라도, 그들이 이룬 역사의 진보는 한국 사회에서 명확한 발전의 발걸음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20년 전에 비운의 운명을 마감한 박종철 학형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진보의 발걸음에 부끄럽지 않도록 손을 모으고 힘을 보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책.

오랜만에 밑줄을 그으면서 노트를 하면서 책을 읽었다. 미국 민중사처럼 비참한 장면들이 많지 않고 희망을 노래하는 글들을 읽는 일은 심장을 튼튼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새해 벽두, 선생님들께 권하고픈 반가운 책을 만나 고맙고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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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폭군
이리나 프레코프 지음, 황진자 옮김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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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인터넷에서 가장 많은 조회를 기록한 뉴스는 '여중생 폭행 동영상 파문' 기사였다.
같은 반 친구에게 욕을 하며 주먹질을 하고, 우는 아이 얼굴을 찍으면서 머리를 위로 묶고, 뺨을 때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시시덕 거리는 장면은 폭력 영화에 노출된 장면에 비하여 훨씬 충격적이었다.

얼마 전에는 교사가 혈서를 쓰든지 청소를 하라고 했다고 해서 손가락을 베어 혈서를 쓰는 아이들도 있었고, 담임교사를 때려 실신시킨 초등학생도 있었다. 작년에 부산에서는 동급생을 교실에서 죽을 때까지 때린 중학생도 있었다.

이런 반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부모가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아이들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란 프로그램을 보면, 정말 막무가내로 떼를 쓰고 욕을 하거나 침을 뱉거나 폭력을 쓰는 아이들이 얼마든지 등장한다.

어쩌다가 아이들이 이렇게 <작은 폭군>이 되었을까?

이 책은 독일의 이리나 프레코프라는 발달 장애 치료사가 <페스트할텐> 치료를 위하여, 심리적 사회적 기저를 분석하고, 아동의 임상 관찰을 통한 해결책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페스트할텐>이란 아이를 억압하거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독립적인 자아로 성장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발판이 되고, 동시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것이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의 아이들을 보면, 환경의 문제가 두드러진다. 그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을 선택할 때에는 단기간에 치유적 증후를 보이기 쉬운 아이들을 선택할 것이다. 치유되지 않는 아이들을 <방송>에서 선택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는 유명한 생물학적 명제가 있다. 한 개체는 그 개체가 속한 집단의 역사적 발생을 반복하게 되어있다는 이야기다. 이 책에서 <작은 폭군>이란 소우주가 형성되게 된 이유를 사회의 변화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야기는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대부분의 사회가 집단적 삶을 살아왔다. 아직도 옛날식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아이들을 업고 안고 키운다. 잘 때도 당연히 엄마 젖에 얼굴을 묻고 잔다. 한국도 여기 속하리라.
그렇지만 잘나리아 서구인들은 개인주의를 위해서 아이들을 떼어 재웠고, 그 결과로 아이들이 애정 결핍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아기들이 부모의 권력을 강탈하게 되고, 부모는 아이들에게 질질 끌려가고 만다는 것. 이러한 힘의 지배가 지속적이고 강하게 반복되면 아이는 <중독>에 빠져 쉽게 돌이킬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아이의 자기중심적 나르시시즘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지배욕은 그 지속성과 강도가 주변인을 견디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이 무섭다는 말들을 많이 하지만, 그것은 한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가 서구인들을 모방하며 만들어지다보니 점차 서구의 문제들을 같이 떠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 서구인들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걸 해결해 보려고도 하는데, 우린 아직 거기까지 다다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전통적인 양육 방식의 장점을 이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도 어머니의 품에서 풍부한 사랑을 느끼며 자라는 아이는 드물게 되어 버렸다. 결국 인류라는 사회가 파편화되는 쪽으로 변하고 있고, 개인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지 못하고, 피시방에나 몰려다니는 현실에서 한국 사회라고 작은 폭군의 등장을 가벼이 여길 수만은 없지 않을까?

나는 학교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살지만, 어느 날, 어느 상황에서, 어느 아이가 <폭군>적 기질을 드러낼는지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교사의 지도는 언제나 아이들에게 강압적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폭군적 기질을 가진 아이의 저항에 부닥치면 미리 유도를 배워두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할는지도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말 인격적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라면, 아이들이 폭군적 기질을 억제할 수도 있겠지만, 학교라는 공간은 늘 억압적이고 지시적인 공간이므로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를 기르면서 과연 얼마나 사랑을 주면서 길렀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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