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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파울로 프레이리 외 지음, 프락시스 옮김 / 아침이슬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원 제목은 ‘We make the road by walking.’이었다.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정도면 멋진 제목이다.
미국의 지역학교 활동가 <호튼>과 브라질의 교육학자 <프레이리>의 교육과 사회 변화를 위한 대화는 교육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나에게 큰 깨우침과 부끄러움을 한꺼번에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프레이리와 호튼은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통점을 갖는다. 그래서 이런 대화를 펼치게 된 것이다. 프레이리는 글에서나 대화에서나 호튼에 비해 이론적이지만, 호튼은 일화 중심의 소박한 편이고, 프레이리가 대학의 연구와 정부 관료로서 프로그램 운영을 한 반면, 호튼은 철저하게 지역학교에서만 활동했다. 프레이리는 정치적 영향으로 여러 나라를 떠도는 반면 호튼은 미국의 남부지방에서 뿌리박고 살고 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지식은 사회적 경험으로부터 성장하며 사회적 경험을 반영한다’는 의식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출생지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국가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즉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공통점이 많은 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 공통점은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들의 세력화를 위한 참여교육의 역사와 비전을 공유하는 것>이란 결과를 낳게 된다.
옮긴이 praxis는 비판적 교육학을 공부하는 모임이다. 프락시스는 ‘실천’을 일컫는 말인데, 이름에 걸맞게 실천적인 프레이리의 대화를 멋지게 번역해 내고 있다.
그들의 대화에서 얻은 한 가지만 말하라면 이것을 들 수 있다. 평생 학교를 다닌다고 하더라도 결코 모든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는 없다. 네가 얻고자 하는 답은 바로 삶의 현장, 사람들 속에 있는 것.(315) 공부란 어디에서도 답을 얻을 수 없지만, 무엇에서든 답을 얻을 수도 있다. 솥을 아홉 번 옮기고 도가 튼 구정 선사 이야기처럼...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서 진리를 배울 수 있다. 학교가 그 유일한 기관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대화에서 학교란 진리를 외면하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 되고 만다.
그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읽노라면, 독서에 관한 이야기, 학교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자유분방하게 실려 있다.
독서는 책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그 텍스트를 다시 쓰는 일. 이는 창조적이며 동시에 미적인 활동. 책을 읽는 행위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노력(프, 46)
선생님들의 바보 같은 질문 때문에 바보가 되기보다는 혼자 책읽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일.(호, 47)
글쓰기와 책읽기의 의미를 학생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것은 쉽다’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일이다. 독서 역시 하나의 연구라는 것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생들에게 이 창조의 순간을 맛볼 수 있도록 자극을 주어야 한다.... 공부는 사랑과 비슷... 사랑에 시간표는 있을 수 없다... 사회가 갖고 있는 가장 비극적인 병 중 하나는 마음의 관료화.(프, 58)
그리고 그들이 평생을 바쳤던 교육 운동에 대한 이야기들은 앞으로 살아갈 나의 앞길을 가늠하는 데 등댓불을 비쳐 준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실천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채찍질하지 않으면 말은 자꾸 두려워하게 마련이니까...
헌신하면 가능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변화할 수 있습니다.(호, 77)
처음 가졌던 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꿈이 새로운 꿈이나 비전으로 확장되는 것.(프, 80)
교사는 가르쳐야 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83) 훌륭한 교사란 늘 놀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인생에서 가장 나쁜 일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어지는 것.(91)
그렇다. 변화를 인생의 목표로 삼았더라도, 헌신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비전은 바뀌며, 훌륭한 교사의 섬세한 촉수를 내려서는 안 된다.
대담하게 행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도전이 있어야... 도전할 만한 것이 눈에 보이고, 자신들을 위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서고, 목표를 향해 가야 할 길을 볼 수 있다면 민중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변화가 국가 단위에서 일어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작은 희망과 모험의 보따리를 움켜쥐고 일을 하고 있는 것. (호, 123)
정치적 결단이 개입된 교육은 결코 자발성을 이끌어 낼 수 없다.(프 124)
교육이 보편적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메리, 피터, 존과 같은 구체적인 존재. 교육자는 누구를 위해 일할 것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교육자는 정치적으로 명확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프, 132)
중립성에 대한 이야기는 하워드 진 교수의 의견처럼, 중립이란 하나의 정치 수사라는 것을 명백히 한다.
중립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 중립성은 현체제에 찬동한다는 것을 감추는 교묘한 말, 중립성은 비도덕적인 행동.(호, 134) 사람들이 체제 안에 있다면 체제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일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일보다는 사회 변혁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136)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사이에서도 중립적이란 말이 통할까? 절대 불가능하다. 이런 관계에서의 중립성이란 지배집단을 위한 봉사를 의미할 뿐. “나는 지배집단 편이오”라는 말 대신에 “나는 중립적이오.”라고 말하는 것.(프, 136)
스스로를 중립적이라고 우기면서 우리더러 중립적이지 않으니까 선동가라고 비난하는 사람들 역시 중립적이지 않다. 자신들이 현상 유지의 지지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호, 235) 스스로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주장하는 데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프)
그리고 지도자의 품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꿈을 번역해 내는 지도자. 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닌 지도자. 아, 체 게바라가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도자에게는 겸손이 중요하다. 만약 지도자가 민중들의 기대에 부응해 카리스마를 갖게 되었다면, 그 지도자는 민중의 열정과 꿈을 번역해 내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 꿈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프, 145)
교육은 인간의 존재와 호기심과 관련된 영속적인 과정(154)
호튼 선생님의 교육자의 개입 방법은, ‘해법을 제시하지 마라.’와 ‘정직하라’이다. 첫번째는 ‘나는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둘째는 ‘내가 답을 알고 있더라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해답을 말하게 되면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답을 말해주어야 하기 때문.’(163)
전문가의 지식을 이용하는 것과 그 전문가가 사람들이 해야할 일을 직접 말해 주는 것은 다르다.(167)
호튼의 하이랜더에서는 늘 두 가지를 따라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완전한 의사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176)
교육자라면 단지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기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강요할 권리가 없다고 해서, 침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는 개입할 의무가 있는 것.(프, 178) 전통은 좋은 것을 선별해서 지켜야 하는 것.
때리지 않는 것... 자신이 잔인해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잔인한 사람... 신체적 학대에 대한 사고 방식의 반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야...(호, 181)
스스로 교육과정을 조직하고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일은 그만큼 사람들을 성장시킨다. 자신이 기대하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그만큼 더욱 요원해진다.(프, 188)
질문은 사람들의 생각을 돕는다. 잘 따라와준다면 질문을 통해 상황을 진전시킬 수도 있고 생각을 전달할 수도 있다. 성장하도록 도우면서도 의존적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질문은 생각을 전달하는 데 정말 좋은 방법.(호, 190) 어떤 권위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했기에 자신의 생각이 되는 과정.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과정. 말을 목마르게 해서 스스로 물을 마시게 하는 것.
교사는 자신만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아이들의 발들을 위해 교사만이 할 수 있는 임무. 교사가 제대로 하지 않고 서툴고 무능하다면, 그래서 아이들의 지적 능력을 계발하지 못하고 정서적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면 <교사의 권위>를 손상시킨다. 또 교사의 권위와 아이들의 자유를 조화시키는 문제도 있다. 교사라면 학생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237)
이런 교육적인 테제들을 읽고 있노라면 나의 과거는 언제나 어두운 쪽, 가진자들의 쪽, 민중의 반대쪽에서 억압의 기제에 동참하는 인간으로서의 교사 역할이었다는 자격지심이 가득해 진다.
박사도 모르는 게 있는 법. 나도 풀 이름, 생선 이름 모른다. 어떤 도회인이 산에서 길을 잃고 아이에게 길을 물었더니 계속 모른단다. ‘넌 정말 아는 게 없구나.’라고 했더니, ‘그래도 저는 길을 잃진 않아요.’ 하더란다.
노동자이건 대학생이건 학생 입장이 되면 스스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다.(프, 204) 그들 자신이 답을 갖고 있는데도 말이다.(호) 학생들은 교사는 권위적인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프)
교육자가 어디에서 활동하든 가장 어려운 일은 교육이 진지하고 엄격하며 체계적인 하나의 일관된 과정 속에서 행복과 기쁨을 만들어 내는 일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은 위대한 모험. 행복과 기쁨.(프호, 217)
공부는 자유로운 일이 아니어서 어렵다. 하늘이 내려준 선물도 아니다. 공부는 엄격하고 무미건조하고 고된 일, 그러나 고됨 속에서도 행복이 솟아오른다. 어느 순간 공부의 성과 때문에 생복해 지는데 이는 진지함과 엄격함으로부터 나온 것(프, 218) 좋은 학교는 공부를 하면서도 놀이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곳.
교육자로서의 확신.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차별하지 앟는 것이 중요. 비전을 가지고, 오늘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들에게는 더 큰 어려움이 될 뿐.(프, 240)
프레이리의 ‘비판적 낙관주의자’란 말이 맘에 들어 온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는 신념이 들리는 듯한 말이 아닌가. 비판적 낙관주의자.
호튼은 평생을 걸어온 길을 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룬 것이 크지만, 아직도 그들이 갈 길은 요원함을 안다. 그렇지만,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낙관한다. 강철같은 의지로...
(호튼, 270) 하룻밤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할 가치도 없는 일. 어려운 일일수록 시간이 걸리낟. 그 일을 부여잡고 오랫동안 씨름해야 이룰 수 있다. (프, 273) 학교 체제가 변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실천하기가 참 어렵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자유에 대한 신념을 갖기 위해서는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 없이 자유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다른 한편, 자유가 필요없을 때까지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유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또한 자유를 얻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유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는 말아야 한다. (274)
혁명은 토지소유 관계, 선거 제도 등 혁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들은 바로 변화시켰다. 하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학교는 저절로 바뀌지 않았다. 사회변화는 역사적인 것이지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276)
진보적이라 함은 중요한 결단을 내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혁명을 지켜나가는 일.
민중들과 관계를 심화시키는 것.
민중의 다양한 신념들을 존중하는 것.
민중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
민중의 언어에서 출발하는 것.
민중이 가진 지식의 주순을 인식하는 일.
이것이 바로 혁명의 과정(프, 280)
당신은 종교인인가요 하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저는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인이에요. 제게는 이 상태가 정말 편합니다.(프, 303) 비판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사고가 특정한 것에 붙잡혀 갇혀버리면 안 된다. 굳어버리면 안 된다.
나도 배웠다. 나도 종교인은 아니지만 신앙인이라고 하리라.
노자,
민중에게 가서 민중에게 배우라.
민중과 함께 살고, 민중을 사랑하라.
민중이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고
민중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들어라.
그러나 최고의 지도자는
모든 일이 끝나고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 힘으로 이 일을 해냈다.’고
민중 스스로 말하게 할 수 있는 자일지니...
민중 교육의 깃발이 오른 것도 어언 이십 년이 지났다. 전교조는 이제 학교에서 우뚝 서 있지만 아직도 색깔 공세에 밀리고 있으며 그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의 민중 교육을 위한 발걸음도 우리가 걸어감으로써 길을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인터넷에서 노무현을 싸잡아 욕하고, 전교조를 비난하고, 386 세대를 비웃더라도, 그들이 이룬 역사의 진보는 한국 사회에서 명확한 발전의 발걸음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20년 전에 비운의 운명을 마감한 박종철 학형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진보의 발걸음에 부끄럽지 않도록 손을 모으고 힘을 보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책.
오랜만에 밑줄을 그으면서 노트를 하면서 책을 읽었다. 미국 민중사처럼 비참한 장면들이 많지 않고 희망을 노래하는 글들을 읽는 일은 심장을 튼튼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새해 벽두, 선생님들께 권하고픈 반가운 책을 만나 고맙고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