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파농 역사 인물 찾기 13
알리스 셰르키 지음, 이세욱 옮김 / 실천문학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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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프란츠 파농' 인가.

1. 닥터 노먼 베쑨
2. 케테 콜비츠
3. 주덕해
4. 뇌봉
5. 여운형
6. 랭스턴 휴즈(할렘의 세익스피어)
7. 아그네스 메들리(세계와 결혼한 여자)
8. 상해의 조선인 영화황제, 김염
9. 부에나벤투라 두루티(어느 한 무정부주의자)
10. 체 게바라
11. 스콧 니어링
12. 비노바 바베
13. 프란츠 파농
14. 바드샤 칸
15. 문익환
16. 간디

이 책들은 실천문학사에서 <역사 인물 찾기>란 시리즈로 내놓은 책이다. 체 게바라, 간디정도는 누구나 알 만한 인물들이지만 나도 최근에야 알게 된 인물들도 있고, 처음 듣는 이름도 몇 된다. 하긴 세상에는 피었다 진 꽃만큼의 전기가 있을 테니까, 그 사람들을 내가 알아도 그만이고 몰라도 그만일게지만... 내가 전기를 쓴다 한들 누가 읽고 나를 기억할까 말이다.

프란츠 파농은 정신과 의사이며, 훌륭한 저작들을 집필한 저술가였고, 행동하는 지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상가의 면모를 지닌 사람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프란츠 파농이 이런 직업을 가지고, 이런 삶을 살다 갔다는 건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만, 기실 그 당시의 프랑스와 알제리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명확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고 흐밋하게 뿌얘진 풍경이 떠오를 뿐이다. 이 책은 파농의 평전인 만큼, 그의 삶을 객관적 자료들로 뒷받침하는 데 힘을 쏟다 보니 잡다한 사건들도 상당수 지나치게 세밀할 만큼 기술되고 있고, 그 전거들을 주로 옮겨 놓아 파농의 생명과 같은 정신을 놓치고 있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책을 읽고 난 성과 중 가장 큰 것은, 내가 갖고 있던 파농에 대한 그림을 완전히 다시 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난 프란츠 파농이란 복사물을 <강촌 유원지>에서 읽었다. 대학시절 MT를 통해서 프란츠 파농과 사르트르의 글을 접했던 것이다. 그 때 내 머릿속에 각인된 프란츠 파농은 폭력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선배들의 우상이었던 것 같다. 지금의 대학생들이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이십 년 전 대학을 다녔던 우리는 옆집 아저씨가 우리의 <의식화 학습>을 신고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며, 미행을 따돌리는 스릴러의 주인공처럼 선배 자취방과 곰팡내 나는 중국집 으슥한 골방이나 모처럼의 엠티의 민박집에서 소위 <학습>을 했다. 식민주의 국가의 세뇌적 선전에 가뜩이나 주눅들었던 신입생이었던 나는 선배들과의 <학습>이 엄청나게 부담스러웠다. 중뿔나게 시위에 앞장서거나 학생회 활동의 주축이 되지 못하면서, 선배들의 지식인의 투쟁 당위론과 폭력에 대한 정당성에 늘 딴지를 거는 꽤나 미운 후배였던 것 같다. 1학년을 마칠 무렵, 투쟁과 시위의 일상에서 일탈을 하고 말았고, 그런 고민들로 기말고사까지 망쳐 학사 경고를 받았던 웃지 못할 기억도 있다.

내게 프란츠 파농과 사르트르의 글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폭력의 정당성. 식민지 백성에게 폭력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 국가도 국가독점 자본주의국가이며, 세계 질서 속의 신식민지로서 저강도 정책의 경제주의에 따른 내정 간섭을 받는 국가임이 분명하므로, 신제국주의 본국인 미국에 대한 저항과, 군부독재 세력에 대한 반정부 운동은 애국이라는 논리를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너무 착했던 것 같다. 전두환 장군과 함께 출범된 제5공화국의 교과서로 세뇌당한 고교 졸업생인 나로서는 창살에 갇힌 '학우'들의 사진이 <삐라>로 보였고, 대자보를 읽는 것 조차도 식은땀 나던 시절이 있었음을 이제서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프란츠 파농을 이십 년이 지난 지금 읽은 감상은 그야말로 천양지차라 할 수 있다. 공포에 가득차 수 차례 복사본을 거친 흐릿한 프린트물을 읽고(결국은 모닥불 놀이를 하면서 그 프린트들은 태워버렸다. 그 시절엔 엠티촌도 검색을 왔기 때문에) 두려움을 이기려 객기를 부리며 폭음을 하던 스무 살의 나를 가엾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으로 정리할 수 있는 그의 생각은 오늘날도 <하얀 가면>을 뒤집어 쓰고파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의 허위 의식에 대한 날카로운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대중들의 정신병적 심리상태를 천착하던 파농. 식민지 민중치고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던 자 있었을 리 없지만, 그의 의사로서의 업적은 그의 <폭력 예찬론자>로의 착각으로 파묻혀 버린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그는 폭력과 완전한 해체를 주장한다. 식민지에서 새로 문법적으로 만들어진 언어를 <크레올 어>라고 한다. 크레올 어를 쓰는 식민지 민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 혁명과 식민지의 완전한 해체 이외의 답이 있을 수 없지 않을까? 민중을 정치화하는, 그 시절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 논조로 말하자면 <즉자적 민중>을 <대자적 민중>으로 일깨우는 의식화는 <새로운 영혼들을 창조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 과정은 체계적이지 못하고 엉성한 교육과정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로 제3세계에 퍼부은 경고는 아직도 유효하다. 갈수록 기술의 불평등의 골은 깊어지고 고도화하는 현실을 볼 때, <축복받은 대지>를 원주민들로부터 약탈했던 과거를 가진 <대지의 축복받은 자들> 식민주의자들의 손아귀에 세계의 평화는 쥐어져 있는 듯 하다. <팍스 어메리카나>가 그렇고, 백호주의를 자처한 <호주>가 그렇다. <저주받은 자들>의 존재 자체가 그 언어와 함께 날마다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군사 독재 정부가 치사한 밀실의 야합으로 사라져 버린 특이한 정치 구조를 가진 한국이란 나라. 아직도 서울의 가장 땅값 비쌀 만한 곳에는 미군들이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놀이터를 갖고 있는 신제국주의 점령지. 대통령이 국군의 통수권을 가진다는 거짓말을 사회책에서 가르치는 희한한 나라. 국가의 폭력과 역폭력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우리에게 <파농>의 독서는 <미래를 읽는 나침반>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는 식민지 시대, 전쟁 시대, 독재 시대, 지금의 과도기까지... 우리 역사를 구성해 온 굴종과 치욕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우리는 <해방>의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므로...

파농의 글들은 아직도 유효하다.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검은 피부, 하얀 가면> 같은 책들을 읽는 것도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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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 선생, 드디어 인권교육하다
전국사회교사모임 인권교육분과 지음 / 우리교육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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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제목이 개인의 실명(알라딘 내의 실명^^)을 거론해서 당황스러우셨나요? 그러면 무시하고 읽지 마시죠.(라고 말하면, 끝까지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겠죠?)

며칠 전에 해콩 선생님의 서재에서 학생들의 인권에 대한 글을 읽었다. 그리고 해콩 선생님은 학교의 민주화를 위해서 노심초사하시는 훌륭한 선생님이시다. 아직 경력은 많지 않지만, 경력이 짧다고 뭐를 아느냐는 노친네들의 논리는 늘 오류를 범한다. 경력이 길어 지면, 날카롭지 못하다. 날카로움이 무뎌지고 마는 것이다. 매너리즘에 빠져서 문제점들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 긴 경력을 무기삼아 억압에 나선다.

학교 내에서 남교사가 많으면 <여교사회>가, 여교사가 많으면 <남교사회>가 있다. 그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발버둥이리라. 그런데, 내가 본 여교사회의 노친네 중, 상당수는 젊은 여교사를 억압한다. 선배의 이름으로. 이건 완전히 깡패 저리가라다. 남교사회도 마찬가지다.

해콩 선생님의 서재에 간혹 들러 보면, 사설 모의고사를 거부할 권리, 방학중 보충학습을 받지 않을 권리, 야간자율학습을 안 할 권리 같은 말들을 듣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구구절절이 옳은 소리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선 거의 불문율로 굳어져서 쉽게 말 꺼내기 어려운 소재들이다.

나도 십여 년 전에는 여름방학책으로 배를 불리는(이 짓거리는 최근까지 성행했던 것이다.) 교총과, 매일 지시전달만 하는 직원회의, 군대식 제식훈련을 통한 맹목적 투철한 굴종의 정신과 잘난 놈을 위해 못난 놈은 희생해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일깨우는 운동장 조회 등에 문제제기를 했던 적도 있지만, 요즘은 투덜거리고 씨벌거리며 넘어갈 뿐이지, 분노하지 않는다. 그저 지각하는 아이들에게, 수업 시간에 졸고 있는 짜식들에게 화를 버럭버럭 내는 좁쌀영감이 되어 갈 따름이다.

이 책은 작년쯤 도서실에 들어온 책이다. 그런데 내가 도서실에 책 빌리러 갈 때마다, 눈에 띈다.(크기가 커서 잘 보인다.) 거의 선생님들도 빌려가지 않았던 듯, 책은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이런 책을 눈에 불을 켜도 읽었을 내 교사 초년 시절을 떠올리면, 일 년이 되도록 이 책을 알고만 있었던 것은 녹슨 것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해콩 선생님의 글들을 요즘 몇 편 읽다가,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문제로 여기기로 마음을 먹었단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무시하고 넘어갔던 나를 반성한다.

인권. 사람답게 살 권리를 뜻하는 말이다. 내가 사람답게 살지 못할 때 꿈틀거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주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지 못할 때 동지가 되어주자는 말이다.

나는 국어과 교사이지만, 수능 문제 풀이 중심의 수업을 주로 하게 된, 그리고 그걸 능력으로 여기고 사는 한심한 선생이다. 아이들의 사고 능력을 길러 주는 것이 수능에도 유리하단 것을 알지만, 학생 중심의 활동을 능력이 안 되고, 귀찮아서 못하고 있는 선생이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살아선 안된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너무 무기력하다. 전교조는 교육의 희망이 되지 못한지 오래다. 올해 위원장 선거와 지부장 선거에서 1번이 모두 낙선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여긴다. 투쟁 위주의 전교조, 원칙과 교조적인 지도부는 현장에서 유리되어버리는 것이다. 학교에선 모의고사를 쳐야 하는데, 다들 쳐야 한다는데, 전교조는 늘상 거부 방침만 반복하는 녹음기였지 않은가. 밤 열 시까지 자습하고, 아이들은 새벽 한 시, 두 시까지 학원으로 독서실로 나가 돌아다니다가 초주검이 돼서 돌아오는데, 영교시만 겨우 없앤다고 해결책이 생기진 않는다.

학생들의 인권을, 교사들의 인권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주로 워크북 형태로 되어 있어서 학생들의 활동을 안내하는 부분이 상당부분이다. 사실, 처음 책을 접할 때엔, 인권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 했음을 감출 수 없지만, 이 책을 죽 읽고 난 지금은, 인권은 아무 것도 아닌, 관심의 다른 말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주 노동자에 대한 관심, 가사 노동에 대한 관심, 학생과 학교 운영에 대한 관심... 일개 평교사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다. 그러나, 무시하거나, 회피하는 것과, 아무 것도 못 하지만, 동료를 모으고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해결책을 하나씩 모색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고, 큰 일이란 것을 깨닫게 해 준 해콩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리뷰가 이상하지만, 독후감에는 특정 인물에게 편지 형식으로 쓰는 독후감도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해콩 선생님이나 땅콩 선생이나 콩의 일종이었군. 음. 콩과 인권에 대해서 연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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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2-17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샘... 무슨 말을 어떻게 드려야할지.. 오히려 제가 부끄럽습니다. 사설모의고사 때문에 맘고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감독거부 정도에 머무르고 패배감에 젖어 지금은 그냥 받아들이려고 맘 먹은 상태에서 이 글을 보니 너무 부끄럽고..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힘'을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글샘 2004-12-18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일로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는 우리 생활의 전부는 아니거든요. 그 거대한 교육이란 시스템 안에서 우린 작은 프로그램들을 운영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 하드웨어를 쉽게 무너뜨릴 순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할 거 같습니다. 소프트웨어를 조금씩, 조금씩 바꾸려는 깨작거림만 해도 우리에겐 중요한 변화를 줄 수 있고, 아이들에게 큰 변화의 씨앗을 심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

해콩 2004-12-1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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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 우리 구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은 건물은 번듯하니 훌륭하다. 그런데, 실제로 몇 번 가 본 나로서는 아쉬움이 많다. 우선 책이 다양하지 못하고, 너무 낡았다. 지은 지 얼마되지 않은 도서관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일 지 몰라도, 책 없는 도서관을 누가 올까?

소설도 막상 내가 찾는 소설은 별로 없고, 허접한 것들 - 보수동 헌 책방 가면 죽 꽂혀있을 법 한 -로 가득하다. 책 읽는 사람들도 대부분 청년 실업자들이 공부하러 온 듯 하다. 잠시 머리 식히러 와서 책을 보고 있는 듯. 뭔가 아쉬운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십 년 전에 읽었던 책이지만, 지난 번에 '팔레스타인'을 읽으면서 다시 읽고 싶었던 책이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나와 눈이 맞은 '쥐'. 아우슈비츠의 악몽을 객관적으로 적나라하게 잘 그린 책이다.

유태인, 나치, 아우슈비츠... 우월주의, 소각로, 600만명의 살해... 이 모든 것들을 쥐(유태인), 고양이(독일인), 돼지(폴란드인), 개(미국인), 곰(소련인), 사슴(핀란드인) 등으로 의인화시킨 훌륭한 작품이다.

이 책의 이야기는 두 개의 플롯을 마치 기차 철길처럼 나란히 놓는다. 그 철길들은 서로 그만큼의 거리를 두기 때문에 실용적인 것처럼, 두 방향의 이야기가 나선형으로 얽혀 DNA 염기처럼 자연스럽게 조직되어 있다.

우선 아트 슈피겔만과 아버지의 대화가 그 하나이고, 아버지의 수용소 생활이 다른 하나다. 아트의 아버지는 정리하는 습벽이 지나치고, 아끼는 것에 병적이다. 옆에 있는 사람을 들들 볶아서 아주 같이 살기는 지긋지긋한 인물이다. 새 어머니와 살고 있지만, 새 어머니는 매일 을근들근 하며 다투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피곤한 성격은 대화가 전개되면서, 진한 감동으로 이해의 선물을 전한다. 수용소 생활에서 온 이런 습벽들은 지긋지긋하다기 보다, 오히려 눈물겨운 습관들이다.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매일매일을 견뎌온 아버지, 나 하나라도 우선은 목숨을 보전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헤쳐나온 동토의 수용소. 그리고 이 모든 어려움을 같이 이겨낸 아내의 자살로 인한 충격, 심장질환과 당뇨. 이만하면 어떤 습관이라해도 이해해 줄 만 하지 않던가.

인간이 잔인해 지면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를 쥐들의 표정과 동작을 통해서 정말 미묘한 감정까지도 그려내는 작가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볼수록 어쩜 이렇게 쥐를 가지고도 표정, 동작, 가면을 통한 상황 표현이 자유로울 수 있을지... 이러기 위해서 얼마나 숱한 불면의 밤을 보냈을지... 자기 이야기로는 한계가 뻔하므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자연스러움이란...

만화란 여유있는 시간에 즐길 수 있는 오락이란 편견을 일거에 격퇴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고 보니 학교 도서관에 이 책이 없었던 것 같다. 학교에도 꼭 사 두고, 인권이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전쟁은 얼마나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가. 상대주의적 관점은 왜 필요한가를 깨닫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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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2-16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어요. 개인적으로는 [팔레스타인]보다도 더 감명깊게... 2권을 읽지 못하고 1권에서 그만 둔 것이 지금 생각나네요. 2권을 어떻게든 구해서 읽어야겠네요. [부자의 그림일기]만큼이나 찐한 감동을 주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마음이 자주 아픈 것, 좋은 병이죠? 가끔 번거롭기도 하지만.. ^^;

kleinsusun 2004-12-17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도서관에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만화책이니 아이들이 아무래도 더 쉽게 읽을테고...

어렸을 때 "인권"이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밟고 올라서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를, 이 세상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느낄 수 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요?

글샘 2004-12-1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콩님... 감동으로 마음이 아픈 것은 고통이 아니라, 감동과 깨달음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픈 것이 쾌락과도 통하는 면이 있답니다. 쥐 같은 책은 학교 도서관에 사 두도록 추천해 보세요. 팔레스타인도 같이...^^ 우리가 근무한 학교마다 쥐와 팔레스타인을... 좋은 운동이죠?

수선님... 반갑습니다. 어려서부터 비틀리지 않은 시각을, 상대주의적 시각을 가르쳐 주는 것이, 인권은 나의 것을 주장하는 것도 포함하지만, 남의 권리를 인정해 주는 데까지 번져야 한다는 걸 자연스럽게 체득하도록 하는 것이 어렵지만, 아름다운 일임엔 틀림이 없죠. ^^
 
WHY NOT? - 불온한 자유주의자 유시민의 세상 읽기
유시민 지음 / 개마고원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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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된다는 거지? 안 될 거 없잖아. 이런 투의 영어겠다. Why not?


책의 표지엔 불온한 자유주의자 유시민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유시민. 그가 당당히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라운드 티를 입고 국회의사당에 등장했을 때, 저건 오버다라고 많이들 말했다. 왜 안되는데? 국회의원은 신성해서? 그 짜식들이 신성하면, 세상에 신성하지 않을 놈이 누가 있나. 무노동무임금을 적용받지 않는 유일한 직업, 국회의원 놈들에게 신성이란 통할 법이나 한 소리던가. 이제 민노당 의원들이 티코타고, 잠바입고 국회엘 가도 아무도 찍소리 못하는 것들이... 유시민의 Why not?은 통쾌하다.


그는 역사 선생님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그의 베스트 셀러는 거꾸로 읽는 세계사일 것이다.), 선생님 출신인 누이들의 영향으로 교육에도 관심이 많고, 무엇보다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경제에 밝다. 그러나 그는 역사학자도, 교육학자도, 경제학자도 내세우지 않고, 리버럴리스트- 자유주의자를 내세운다.


우리 나라에서 리버럴리스트란 무엇인가. 부정적 의미의 전통에 대한 강한 부정을 뜻한다고 본다. 그 부정적 의미의 전통은 전통 문화라든지, 역사적 전통을 의미하기 보다는 파시즘적 전통, 현대적 민주주의를 외치던 새마을 운동 시대 독재자의 전통에서 말이다. 그 파시즘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몸부림이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파시즘적 전통은 극우다. 물론 그 와중에서 극좌가 인정받던(주사파처럼) 시대도 있었다. 자유주의자는 극우와 극좌를 모두 증오한다. 치우쳐서 자기 주장밖에 못 하는 집단이니깐.


복거일이라는 리버럴을 주창한 인간이 있었다. 그의 헛소리(영어공용어화)가 한참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는 언어학자도 아니고, 그저 소설가 나부랭이었는데 왜 그리들 난리였을까? 우리는 너무 순수 혈통을 소중히 여긴다. 순수한 우리말을 지키는 것, 다 좋다. 그건 일제 시대에 강박적으로 우리 말을 못 쓰도록 만든 데 대한 저항의식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영어를 섞어 쓰는 노래 가사들을 주절거리는 아이들을 모두 감옥에 보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복거일의 주장은 논리적이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의 주장이 힘을 얻을 근거는 자유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난 학교에 청바지를 잘 입고 출근한다. 처음엔 아이들도 신기한 듯이 바라보지만, 이젠 아예 무시한다. 그 먼지구덩이 교실에서(어떤 석사논문에서 교실의 먼지 밀도가 일반 사무실의 35배란 실험결과를 읽은 적이 잇다.) 넥타이 매고 양복 입는 것은 나에게 고문이다. 청바지는 왜 안되는가. 청바지 문제로 관리자들과 여러 번 논쟁을 벌였지만, 그들의 주장은 단 하나다. 교사는 단정해야 한다. 우리가 예전에 만났던 그 폭력적인 교사들이 진정 단정했던가? 수치스러움을 모르던 그 깡패같던 교사들이...


난 교사가 철밥통 신세를 벗어나야 발전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이런 말 하긴 정말 어렵다. 나는 국가공무원이다. 그래서 받는 제약도 많았지만, 요즘은 다들 부러워한다. 교사는 국가직에서 지방직으로, 멀리는 계약직으로 바뀌어야 한다. 지금 우리 나라 현실에서 교사가 계약직이 되면 고용이 가장 불안해지는 과목은 예체능일 것이다. 예체능 교사는 특기적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난 솔직히 1교시부터 체육을 하고 오전 내내 자는 일반계 고교는 세상에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처럼 국어선생이라도 나이가 들고 아이들과 결별의 순간이 온다면 이별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학교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는 교사라면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에 따라 짤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국가의 미래를 짊어진 아이들을 기르는 신성한 교사라는 자리가 철밥통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이 책은 2000년에 쓰여졌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환란, 외환위기의 문제와 진행에 대한 비판으로 적혀있다. 그의 관심사가 경제일 것이니 내겐 재미 없더라도 용서해 준다.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의 이름으로 핍박받고 있는 많은 이들... 불법체류노동자(그들의 올바른 이름은 이주노동자이다.) 소외 문제, 여성문제, 빈곤문제, 동성애자들, 서갑숙처럼 성의 자유를 책으로 폈다가 망한 사람들...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시선을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다. 나도 이제 리버럴리스트, 이 단어를 즐겨쓰고 싶다. 왜 안되냐고 강하게 호소하고, 따지고, 싸워야겠다. 이제 내 나이 서른의 세월은 점점 가고(12월이 벌써 1/5 지났다) 마흔이 되고 있다. 나이 먹은 자들의 전매품인 고지식함, 융통성 없음을 익히고 싶진 않다. 더 리버럴한 40대가 되도록 마음을 굳게 먹어야 겠다. 아이들의 작은 일탈에 잔소리를 퍼붓지 않도록 말이다. 자유스럽지 못한 내 한 마디가 아이의 날개에 작은 균열을 준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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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2-06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님의 리뷰에서 멋진 걸 하나 발견했어요. 음..저보다 연하였군요. 으하하하하...그래도 추천은 제가 젤 먼저 한 거랍니다^^

해콩 2004-12-06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이 잘 하는 멘트 하나를 날리고 싶어지네요...

"쌤~~ 너무 멋있어요~~ㅋㅋ"

그리고 하나 더

"진짜예요~ ㅎㅎ"

글샘 2004-12-06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고맙습니다. 추천도 해 주시고. 여우님보다 두 학번쯤 낮을 걸요. ^^ 알라딘에서 나이가 머 중요한가요, 사람 사는 이야기가 좋은 거죠.

해콩님... 그런 거 우리 반 애들도 맨날 하는 소린데요. ^^ 아이들이 가장 잘 하는 거짓말, 선생님, 사랑해요... 이런 거 속는 줄 알면서도 기분 좋잖아요, 그쵸?

해콩 2004-12-07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요, 사랑한다는 말.. 사실 제가 더 많이 해요. 아이들에게... 아이들도 속는 줄 알면서 기분 좋아할까요? 그런데 가끔은 제가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 억울하거든요.. 억울해요.. ㅠㅠ

글샘 2004-12-07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요, 아이들은 한 번에 선생님 한 분을 사랑할 수 있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마흔 명의 아이를 사랑할 수 없잖아요. 테레사 수녀님도 '한 번에 한 사람씩'이라고 했는데요. 사실 더 억울한 것을 아이들일걸요. 우리가 들풀처럼 보는 그 아이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키높이 해가면서 선생님과 눈맞추려고 하던 존재들인데... 안준철 선생님의 들풀처럼요. ^^

해콩 2004-12-08 0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요. 고집고집..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이들은 늘 저는 '적'으로 보는 듯..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 숙명적으로 건널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ㅠㅠ

글샘 2004-12-11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 교사들은 아이들을 포섭해야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나요? 담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딜레마에서 해방되는 길은, 아이들에게 명확한 길을 보여주는 지도력과,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법을 연구하는 힘의 조화에서 와야할 것 같애요. 아이들은 헷갈려하는 담임을 싫어하지요. 그리고 스트레스 주는 담임은 더 싫어하고. 아이들에게 명확한 건 명확하게, 감정적으론 따뜻하게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건널 수 없는 부분을 건너야 하는 사람을 순교자라고 부르지요. 예수님처럼. 우리가 희생해야할 무엇인지가 필요한 것도 현실인 것 같아요.

해콩 2004-12-16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깊이 스스로를 들여다 보겠습니다.

kleinsusun 2004-12-21 1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대단히 용기있는 분이네요.

스스로가 교사이시면서, 교사가 계약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

정말 신선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사수하려고, 정년퇴직 기한을 늘리려고,

분투하는데.....

유시민이 괜히 싫었었는데,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글샘 2005-01-03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용기있는 사람은 아니고요, 세상이 흘러가야할 방향이 그런 쪽이라면 미리 알고 있는 게 뒤통수 맞지 않는 길이라 생각할 뿐입니다. 분투할 가치가 없는 곳에 힘을 쏟을 만큼 내 인생이 남지 않았단 생각이 든답니다. ^^ 힘을 쏟아 정진할 곳은 따로 있을 듯...

kasen2000 2009-04-16 1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교실이 먼지구덩이면 선생님 자신을 위해서나 아이들을 위해서나 교실을 깨끗하게 만들어보세요. 교육을 위해서 스스로 계약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좀더 일찍 출근해서 청소기 돌리는 것쯤 못하시겠어요? 아니면 그 뛰어난 학급운영 능력으로 아이들 스스로 깨끗한 교실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거나. 1교시부터 체육하고 아이들이 엎어져 잔다면 1교시에 체육하지 않도록 만들어보세요. 왜 그건 분투할 가치가 없나요? 누가 이 글 보면 대한민국의 많은 학교가 1교시부터 체육하고 엎어져 자는 줄 알겠네요. 대부분의 경우 체육은 1교시부터 배정하지 않습니다. 예체능은 교사는 특기적성 교사가 되어야 한다? 스스로 소신 있는 교육자처럼 열변을 토하시는 듯하더니 시험을 위한 주지교과만 죽어라 해야 한다 이건가요?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무슨 케케묵은 소리처럼 들리시겠지요? 교사가 계약직이 되어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매진하면 학교가 학원하고 똑같아지지 않을까요? 세상이 흘러갈 방향이 그쪽이라고 보는 분이라면 더 할말은 없네요.
 
닥터 노먼 베쑨 역사 인물 찾기 1
테드 알렌 지음, 천희상 옮김 / 실천문학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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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노먼 베쑨(Dr. Norman Bethune). 1991년에 실천문학사에서 처음으로 그 분의 전기가 발간되었다. 새파란 나이의 나는 이 책을 밤새워 읽고 울렁이는 가슴을 잠재울 수 없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작년부터 부산시에서 독서인증인지 뭔지를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라고 난리법석이다. 학생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기 전에 책읽을 시간을 주는 게 순서인데... 아무튼 그 계기로 우리 반 학급문고에 새로나온 예쁜 책을 꽂아두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의 독서발표대회 심사때도 이 책의 독후감을 숱하고 읽었다. 우연히 책꽂이에 얹혀 있던 이 책을 어제 집어 들고, 다시 밤 늦게 그분을 읽었다.


여전히 나에게 반성과 분발을 촉구하는 전기였다.


의사였던 그는 폐병을 앓게 되면서 흉부외과 의사로 성공하는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는다. 그러다 성공한 의사의 부와 극빈자들의 가난 사이에서 세계의 진실한 모습을 읽게 된다. 진실이란 종종 명백히 상충된 현실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그의 말처럼, 세계의 모습은 모순덩어리였던 것이다. 그는 스페인 전선으로 건너가 공화파의 편에서 파시스트와 맞서 싸운다. 세계의 모든 모순들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제국주의 일본과 기회주의 장개석과 맞서 싸우고 있는 중국 인민들에게로 날아가 국제주의자로서의 친구가 된다. 백구은 선생이 되어...(중국인들의 명명은 간혹 감탄할 만 하다. 코카콜라를 可口可樂, 입이 즐거울 만한 음료로 부르는 것들. 베쑨을 白求恩, 우리를 구하는 은혜를 베푸는 백인 의사 선생)


그는 진정 의사로서의 길을 걸었던 위인이다. 병을 고치는 작은 의사, 환자를 고치는 중간 의사가 아닌, 사회를 고치는 진정 큰 의사 말이다. 그러나 그는 정지해 있는 의사가 아니었다. 늘 질병과 의술 도구를 연구하는 연구자요, 화가요, 과학자요, 몽상가이며 확고한 신념으로 가득한 사상가였던 그는 죽음의 현장에서 비로소 삶을 이끌어내는 신의 분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그는 지도자의 요건으로 조직력, 지도록, 감독력을 꼽았다. 전체와 세부를 계획하고, 그 계획을 다른 이들에게 납득시키고 지도하며, 계획의 진행을 끊임없이 검토, 시정, 실천에 의한 이론의 수정이 그 내용이며, 지도자는 오로지 일, 일, 일에 투철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일의 노예가 되어 산다는 것은 지도자 이전의 비인간적인 행위로 지탄받을 만 하지만, 전시의 그의 삶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투철함이라 하겠다.


그는 유서에서 유감스럽게도 더 많은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분처럼 세계의 움직임을 정확히 간파했던 이가 마흔 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뜬 것은 아쉬운 일이다. 제국주의자들의 명분은 '국가의 영예를 위한 전쟁'이지만, 속내는 원료와 시장, 이윤이란 것을 명확히 하였다. 지금도 가진자들은 테러와의 전쟁, 폭력과의 전쟁이란 미명으로 침략전쟁, 식민지정복전쟁, 대규모 사업을 벌이고 있다. 가장 유망한 프랜차이즈는 전쟁인 것이다. 그들은 교환보다는 절도가 더 값싸며, 구입보다는 학살이 더 수월함을 알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친절하고 사려깊어 보이는 제국주의자들은, 그들의 이윤이 축소되기만 하면 무자비해지고, 야수적이 되며 망나니처럼 무정한 사람으로 변해 버린다. 그들이 살아있는 한, 이 세상에는 영구적인 평화가 찾아올 수 없다. 그들이 바로 부상을 입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는 지금의 악의 축, 미국을 본다면 적확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그는 단순한 의사의 차원을 넘어선 성인의 도를 실천했다. 불교의 가르침처럼 소유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 도를 이룰 수 있고, 개신교의 가르침처럼 너를 버리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정신, 그것을 실천할 수 있었던 밑바탕이 그의 다음 말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한 개인은 커다란 능력을 가질 수도 있고, 또 아주 작은 능력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無私(무사)정신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모두 민중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내던지는 중요한 인간, 완전한 인간, 덕있는 인간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진정 큰 의사였고, 큰 스승이었다. 그의 삶을 늘 반추하며 삶의 전류가 끊어진 채 살지 않으려는 각오로 몇 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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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4-12-01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친구에게서 생일선물로 받아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글샘님의 리뷰를 보니 그 때의 감동이 떠올라지네요..잘 읽고 갑니다^^

글샘 2004-12-01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이 책은 정말 두꺼운데도 단숨에 읽히는 책이에요. 그만큼 감동적이기 때문일겁니다. 근데, 이 시각에도 안주무시네요^^

책읽어주는보아스 2018-11-13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금번에 읽겠습니다. 좋은 글로 읽고 생각하도록 자극받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