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에 기대어 문학의전당 시인선 25
송수권 지음 / 문학의전당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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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 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 물 속에 비쳐옴을 (산문(山門)에 기대어)

 

'산문'은 절집어귀에 있는 문이다.

일주문 같은...

시인은 남동생을 잃고 마음이 무척 헛헛했다 한다.

산문은 이승과 저승, 속세와 절집을 가르는 갈림길이겠다.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진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 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박재삼, 밤바다에서)

그이 시를 읽노라면,

박재삼의 밤바다...가 중첩된다.

 

박재삼은 1950년대의 가난이고, 송수권은 한 20년 뒤의 가난인데,

참 이나라의 가난의 한은 깊다.

 

여러 산 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꾹새가
울음 울어
떼로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智異山下(지리산하)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智異山中(지리산중)
連連(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림 끝에
비로소 한 소리 없는 ()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쪽 남해를 흘러들어
南海群島(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智異山下(지리산하)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細石(세석)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지리산 뻐꾹새, 전문)

 

지리산 뻐꾹새 역시 절창이다.

그 하염없는 눈물이

세석까지 타오르는 시각으로 눈물겹다.

 

푸른 이내를 적시는

방울소리 뚝 끊어지고

어느 강물에 시치미도 흘려 버리고

그린 듯이 하늘 가에

나의 매는 섰어라.(그리움, 전문)

 

절절한 그리움은

기러기든, 매든 하늘 가를 우러르는 눈매에 잡히는 것은 모두 서럽다.

이녘과 뚝, 끊어지는 인연은

푸른 안개 적셔진 온 세상을 서럽게 운다.

 

아이들이 크는 동안은 다 이렇게 귀여운 것인가

꽃밭 하나를 차지하고 꽃을 가꾸는 아이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들이 피워낸 꽃이 비록 작은

분꽃이나 나팔꽃일지라도(情, 부분)

 

딸을 가진 기분은 어떨까?

 

무엇이 마음에 차지 않을 때에는

일부러 개 울음소리를 흉내낸다

아빠가 성난 얼굴을 하면

월,월, 월, 혀를 내둘러 놓고는

냅다 뛴다(정, 부분)

 

이런 귀염상 가득한 딸의 애교를 보면, 어떤 사상도 다 놓아지지 않을까?

 

김수영이 생계를 위해 닭을 기른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인상파 회고전'에서 수영을 만난다.

그리고 삶의 비애를 시로 쓴다.

 

일금 삼십 원을 들고 서서

닭의 밑구멍을 빤히 들여다 보고 서 있는

이젠 이 짓도 그만둘 거라며

두 손 짝짝 털고

무덤 쪽으로 가고 있는 수영의

검은 얼굴... (수영의 닭장, 부분)

 

김용직은 평론에서 송수권과 박재삼을 마주 대본다.

 

재삼은 수권이 심각하게 의식해야할 시인이었다.

그는 이미 50년대에 한국적인 정조를 그 씨날로 할 작품들을 양산해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송수권이 시의 발판으로 삼은

지방의 독특한 말씨, 그 감칠맛이 있는 느낌까지가

교묘하게 수용되어 있었다.

그의 기가 펄럭이는 연대에 시단 진출을 한 것이 송수권.(145)

 

이 시집엔 없으나,

난 그의 '여승'이 참 정겨웁다.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릿대를 든 女僧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 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되돌라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뒤로 나는 女僧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女僧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事物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를 쓴다. (여승, 전문)

 

 

비로소 인간으로서 상대를 인식하기 시작한 무렵,

우연히 만난 여승의 추억은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 같이

시의 가슴을 살포시 젖는 물결 같이>

에서 영랑이 찾던 <시의 가슴>을 경쾌하면서도 진하게 느끼게 한다.

 

남도 가락이 유장한

서편제 풍의 송수권의 시는,

그 배경에 깔린 한과 함께

바닷가 비릿한 사람들의 한을 오롯이 담아내는 시를 쓴 사람이다.

 

지리산 뻐꾹새가

섬진강 줄기따라

울음울며 내리다

남해 다다라

섬 하나에 막혀 솟구친

그런 울음으로 가득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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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향기 2015-04-28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수권 님의 시는 정말... 아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너무 감동이네요!

글샘 2015-05-03 20:57   좋아요 0 | URL
네, 송수권 님 시는 울음이 가득한 소년 시절의 막막함... 그런 걸로 가득하지요.
 
그림자에 불타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66
정현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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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버스 타고

근동 지방을 구불구불 가다가

드넓은 밀밭을 검게 태운

구름 그림자를 보았다

구름 그림자에 타서! 대지는

여기저기 검게 그을려 있었다.

 

2

욕망 - 구름 그림자

마음 - 구름 그림자

- 구름 그림자에

일생은 그을려,

- 구름 그림자

- 구름 그림자

- 구름 그림자에

세계는 검게 그을려-

 

3

그 모든 너울을 걷어낸 뒤의

구름 자체를 나는 좋아하고

그리고

은유로서의 그림자에 불타는 바이오나 - (그림자에 불타다, 전문)

 

구름 그림자 진 검은 밀밭은 불탄 것처럼 보인다.

불태우는 것은 불이나 태양 같은 것이지 그림자라 이름하긴 힘든데,

시인의 눈은 밀밭을 불태운 그림자를 찾아낸다.

그래. 찾기에 따라 불태우는 것들은 반드시 불길만은 아닐 게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 전문)

 

이 짧은 시의 시인,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놓인 심연을,

섬처럼 외로운 개념에 빗대어 두고

실존의 고독을 형상화한 멋진 시다.

 

 

 

그의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은

회복 탄력성을 높이 치는 현대 읊어두어야 하는 시다.

 

구기자차를 잔에 따르고

가라앉은 구기자를 숟가락으로

건져 올리는데

잘츠부르크도 올라오는 게 아닌가!

모차르트를 듣고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구기자를 건져 올리는데

아직 못 가본 그곳도 올라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여

꿈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가족의 우울을 감싸면서

꿈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어제와 오늘의 불행을 감싸면서

꿈이 피어오르는 것이었다.(꿈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전문)

 

구기자차 안에 '잘츠부르크'가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오, 인간은 꿈꿀 때 신이며, 생각할 때는 거지이다 - 휠덜린-

'책상은 살아있다'는 시의 제사로 걸어둔 휠덜린의 시는 명문이다.

인간은 꿈꿀 때, 신과 같은 존재이다

현실을 생각할 때는, 누더기 같은 현실에 좌절하는 존재...

그래서 그는 부화중인 꿈을 사랑하는 시인.

 

책상이 둥지인 듯

부화 중인 꿈이며

또한 좋지 않으가

때로 정신은 경이에 꽂혀

풍부함에 겨워 날아오르기도 하느니,

경이에 꽂혀 그 풍부함으로 날아오르기도 하느니......(책상은 살아있다, 부분)

 

그이 시를 읽노라면

편안한 마음들도 죄스럽지 않다.

그래서 좋다.

 

모든 인사는 시이다.

그것이

반갑고

정답고

맑은 것이라면.

 

실은

시가

세상 일들과

사물과

마음들에

인사를 건네는 것이라면

모든 시는 인사이다.

 

인사 없이는

마음이 없고

뜻도 정다움도 없듯이

시 없이는

뜻하는 바

아무런 눈짓도 없고

맑은 진행도 없다.

세상 일들

꽃피지 않는다.(인사, 전문)

 

그래. 인사를 나누는 마음이나, 시를 나누는 마음이나...

내가 이 시집에서 제일 맘에 드는 시는 이것이었다.

 

어린 시절

뒷산 기슭에서

소리 없이 솟아나던 샘물은

지금도 기억 속에서,

내 동공 속에서,

솟아나고 있어요.

그때와 똑같이

작은 궁륭 모양으로

솟아나고 있어요.

지상의 모든 숨어 있는 샘들을

계시한

그 신비의 샘은

또한 마음을 샘솟게 하는

신비.

어린 시절 뒷산 기슭에서

소리 없이 솟아나던 샘물.

내 마음에 샘솟는,

오 마음이 샘솟는 원천!(샘을 기리는 노래, 전문)

 

내가 다니던 사범대학 건물 뒤편 공터 구석에

샘물이 고이는 샘터가 있었다.

나는 그곳이 참 좋았다.

아늑한 구석진 곳 한적한 곳이...

 

온몸을 깨워

대지는 구르고

시간은 부화하고

장소들은 생생하여

온몸이 샘솟게 해다오.

연애야.

기도와명상

지적 모험들이 으레

무슨 잠인지를 또한 깨운다 한다마는,

연애야

네 속에서 발효하는 명상

네가 조각하는 기도

네가 숨 쉬는 모험만큼은

생생하지 않느니.(연애, 부분)

 

연애할 때만큼

그 장소가, 공기가

주변을 감싸돌던 음악이 기억나는 일은 없다.

먹었던 음식이, 돈까스의 바삭함까지 오랜 시간 남는다.

기도보다

명상보다

더 몰입하기 때문이다.

 

매일 연애하듯 살 수 있다면...

 

모든 순간들은

깊은 산에 숨어 있는

샘물,

마르지 않는 신비는

그걸 듣고

보고

온몸으로 느끼는 영혼을

한없이 조용히 솟는

힘으로

또 다른

상승의 원천으로 만드는

신비.(아, 시간, 부분)

 

신비를 느끼려

사람들은 산을 걷고,

계곡의 샘물을 탐구한다.

그러나, 가끔 지구는

인간을 털어내고 싶다는 듯, 몸부림을 친다.

 

자기의 최상의 말 앞에서는

스스로를 걸어 잠그고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해요.

말은 신선해져야 하니까요.

그게 세계의 비밀입니다.(릴케이 편지 중, 97)

 

최상의 말은

걸어 잠근 고독 속에서

샘물처럼 고여

그런 신선함이 그득하게 우러난 것.

그 말에 공감한다.

 

보통 문지사의 시집 뒤편에는

평론가의 발문이나

시인의 말 같은 것 중,

멋진 구절들이 담긴다.

 

이 시집의 뒤편은

단촐하다.

 

앞에서 노래했으니 이제 입을 다무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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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6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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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에 나온 시집이다.

1952년생이 1981년이었으면, 서른이었겠다.

그 시절엔,

유럽의 68혁명 시기, 금지를 금지하라던 그 시기의 열풍이

이 차가운 반도에도 잠시 몰아쳤을 것이다.

그 무렵,

서울 법대를 다니다가 독일의 슈바벤 골목을 방황하던 전혜린의 그림자가

이 시집에는 남아있는 듯 하다.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삼십 세'가 묻어있는 듯도 하고...

 

이 시집의 첫 시.

<일찌기 나는>의 뒷부분을 참 좋아하던 대학 친구가 있었다.

시를 쓰던 그 친구는,

이 시를 필사하여 들고다니며 감탄하며 읊곤 했다.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찌기 나는, 부분)

 

나도 멋도 모르고 멋지다고 그래 주었다.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니... 캬~

 

그 아이는 그 뒤의 시도 좋아했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개 같은 가을이, 부분)

 

내가 대학을 다니던 그 시절은, 개 같은 시절이었지만(지금도 그건 여전한 나라지만)

매독처럼 지독한 심리적 충격을 동반한 가을은

사람이 살아가야 할 날을 아득하게 만든다.

아직 살아가야 할 날들이 얼마나 아득한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스물 무렵에

나도 강물이 바다가 되는 상상을 한 적 있었다.

이제 바다 언저리에 다 와 가는 모양이지만, 가을은 여전히 개 같고 매독 같다 해도 다르지 않다.

 

이 도회의 더러운 지붕 위에서

여자들과 사내들은

서로의 무덤을 베고 누워

내일이면 후줄근해질 과거를

열심히 빨아 널고 있습니다.(여자들과 사내들, 부분)

 

20대의 사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끊겨지고, 갑작스런 배고픔으로 찾아오는 이별'과도 같은 것이다.

망막이 막막해지도록 눈물도 나고,

외로움이 허연 뇌수를 바래는 시간들로 바람을 맞는다.

내일이면 후줄근해질 과거일 뿐인

오늘의 연애를

서로 죽지 않을 듯이 열심히 빨아대는 것으로

젊은 시절의 여자들과 사내들은,

그런 열기로 가득한 나이로 그린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삼십세)

 

요즘에야 인간 백세 시대가 거짓말이 아니지만, 그 당시엔 60대면 삶이 마무리지어졌다.

서른 살이 가진 의미는 그런 것 아니었을까?

어떻게 살아야할지 아직 모르겠는데, 이제 꺾어지는 느낌이 들 때.

온 몸의 구석구석에서 죽음이 신호탄이 반짝이며 제 자리를 노릴 때,

세상은 그야말로 뻔뻔스럽게도 더럽게 흐르건만,

그래서 김광규의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마냥

젊음의 신선함을 잃어버린 소시민들의 서른 살.

 

그래서 그는 행복한 일상과 항복의 나이로 서른을 읽었고,

철판 깔고 사는 나이라 부끄러움을 생각하는 서른을 느낀다.

 

가장 높은 산맥을 뛰어넘는

키 큰 바람, 바람의 거인(시인 이성복에게, 부분)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던 이성복의 '그날'처럼,

세상은 썩어들어가 시취가 진동하는데도,

아무도 아프지 않아하는 뻔뻔스러운 철판같은 세상을 보며,

그 '항복'에 아파하던 마음으로 이성복에게 시를 썼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내 청춘의 영원한, 전문)

 

청춘은 언제나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노스탤지어에 대한 향수로 가득한 나이다.

특히나 유신 시대에 20대를 살았던 젊음이야,

그것도 독문학을 배운 젊은 여성에게,

세상은 정신 분열로 가는 고샅길에 불과한 것이었을는지도...

 

꿈의 쓰레기더미에 파묻혀,

돼지처럼 살찐 권태 속에 뒹굴며

언제나 내가 돌고 있는 이 원심점,

때때로 튕겨져 나갔다가 다시

튕겨져 들어와 돌고 있는 원심점,

<그것은 슬픔> (청계천 엘레지, 부분)

 

아픔의 시대는

끊임없이 당겨져오는 원심력의 중심인

구심점에 놓인 '슬픔'

 

어째서 내 존재를 알리는 데에는

이 울음의 기호밖에 없을까요?

 

(울며 절뚝 불며 절뚝

이 거리 한 세상을 저어 가나니

가야지,

그리고 나의 사랑은 떨어야지) (부질없는 물음, 부분)

 

1980년대 시집,

그 시대의 사랑은,

눈물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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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창비시선 387
문태준 지음 / 창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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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의 이번 시집 안쪽에

"우리는 가볍게 웃었다'

이렇게 적어 두었다.

 

삶이 가벼워졌다.

굳이 의미를 찾기 힘들단 이야긴지도 모르겠다.

고통스럽다고, 힘들다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징징대는 것보다 나아 보인다.

 

  백화(百花)가 지는 날 마애불을 보고 왔습니다 마애불은

밝은 곳과 어둔 곳의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눈두덩과 눈, 콧

부리와 볼, 입술과 인중, 목과 턱선의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안면의 윤곽이 얇은 미소처럼 넓적하게 퍼져 돌 위에 흐릿

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기도객들은 그 마애불에 곡

식을 바치고 몇번이고 거듭 절을 올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깊은 밤에 홀로 누워 있을 때 마애불이 떠올랐습니다 내 이

마와 눈두덩과 양 볼과 입가에 떠올랐습니다 내 어느 반석

에 마애불이 있는지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온데간

데없이 다만 내 위로 무엇인가 희미하게 쓸려 흘러가는 것

이었습니다 (如是, 전문)

 

여시...는 '여시아문'의 앞부분일까?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부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할 때 쓰는 클리셰인데,

'여시'는 그런 의미를 넌지시 던져준다.

 

그이의 시를 읽으면,

삶이 납죽 엎드린 가자미 같다가도,

슬몃슬몃 헤엄치면서 한 세상을 풍미하는 삶의 의미를 툭, 느끼는 순간을

엿보기라도 하는 듯,

그런 말들이 윤곽으로 남은 미소처럼 느껴진다.

이와 같이...

 

가자미가 나이들어 가나 보다.

'노자'와 비슷해지는 걸 보면...

노자가 제일 좋은 '정치/통치/사랑'은 물과 같은 것이라 했다.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흐르고

더러운 것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사랑도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다.

 

병원 흰 외벽 아래 나무 의자가 몇 개 앉아 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의자도 있고 목발을 짚은 의자도 있다

얼굴이 얼금얼금 얽은 의자는 늦게 와 앉아 있다

조용한 시간도 의자에 앉는다

물뿌리개에선 밝은 볕이 쏟아진다

물뿌리개에선 밝은 볕이 계속 쏟아진다

앉을 데가 마땅치 않아 한켠에 슬그머니 쪼그려 앉아본다(병원 흰 외벽 아래, 전문)

 

매일 시간이 없다고 허덕이던 사람도

병원엘 가면 바쁘다는 소릴 못한다.

시간이 남는 곳이 병원이다.

자기가 아파서 가도 지루할 정도로 대기해야 하고,

병문안 가면 삶의 허망함에 바쁘다는 말 하기 싫고,

장례식장이라도 가면 문상은 잠시고 햇볕을 쬘 시간이 나는 법이다.

의자에 앉는 붕대, 목발, 얽음뱅이, 그리고 시간...

쪼그려 앉아도 쏟아져 내리는 밝은 볕...

평소에 우러르지 못하던 것들을... 병원에 가서야 쏟아지는 밝은 볕을 바라보는 어리석음이여...

 

무엇을 할까

북쪽에

끝에 섰으니

 

12월에 무엇을 할까

긴 투병기 같은

마른 덩굴을 거두어들이는 일 외에

 

꺽인 풀

왜소한 그늘

흩어진 빛

가는 유랑민

 

그러나

새로이 받아든 동그란 씨앗

대지의 자서전(12월의 일, 전문)

 

한 해와 한 해 사이...

'야누스'같은 시간이라 '야뉴어리 January' 라 불렀다던 그 때.

북쪽의 겨울 같고,

끝 간은 시간인데

<새로이 받아든 동그란 씨앗, 대지의 자서전>을 들고 선 사람.

 

인간은 유한해서,

씨앗 하나 대지에 떨구고,

자서전을 마감하는 건가...

 

  그대여, 하얀 눈뭉치를 창가 접시 위에 올려놓고 눈뭉치

가 물이 되어 드러눕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뭉치는 하얗게 몸을 부수었습니다 스스로 부수면서 반

쯤 허물어진 얼굴을 들어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내게 웅얼웅얼 뭐라 말을 했으나 풀어져버렸습니다 나를

가엾게 바라보던 눈초리도 이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한접시 물로 돌아간 그대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이제 내겐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습니다 눈뭉치이며 물의 유골인

나와도 이제 헤어지려 합니다 (조춘 早春, 전문)

 

이른 봄,

눈사람이 녹는다.

녹아서 풀어져 버리고 눈초리도 스러진다.

스스로 지금 눈뭉치이며

장차 물의 유골일 자신을 인식하는 이른 봄.

 

그리하여

아침마다 새로운 정신으로 깨어나려 한다.

 

시간은 꼭 같은 개수의 과일을 나누어주시네

햇볕, 입술 같은 꽃, 바람 같은 새, 밥, 풀잎 같은 잠을

 

나는 매일 아침 샘에 가 한통의 물을 길어오네

물의 평화와 물의 음악과 물의 미소와 물의 맑음을

 

내 앞에는 오늘 내가 고를 수 있는 물건들이 있네

갈림길과 건널목, 1월 혹은 3월 혹은 9월 혹은 눈송이, 첫번째, 분수와 광장, 거울

그리고 당신

 

당신이라는 만남

당신이라는 귀

당신이라는 열쇠(아침을 기리는 노래, 전문)

 

아침에 일어나

또 나에게 주어진 선물을 받은 기분으로

내게 나누어진 과일을 즐기라네.

 

평화

미소

맑은 음악

 

그리고 당신

내 말을 들어주는 귀

나의 하루를 열어주는 열쇠

그것이 의미라 하네...

 

가자미

납죽 엎드려 보이지만

광활한 바닷속을 자유롭게 유영한다.

 

오늘 하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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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7 1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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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 : 소설 필수편(하)
류대성 외 엮음 / 창비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언어영역이 공부가 과하다고 국어영역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내용은 '듣기'가 빠진 것 외에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난이도도 해마다 들쭉날쭉이니 국어 공부를 어찌 해야하는지 아이들에게 알려줄 수도 없다.

 

아이들은 뱃속에서부터 한국어를 들으며 자란다.

그리고 자라면서 접하는 낱말밭이 워낙 다를 수밖에 없어서,

기본 회화를 배우는 능력은 모두 비슷하지만,

문학을 감상하는 능력이나, 고급 어휘와 정보를 소화하는 능력은 개인차가 크게 마련이다.

특히나 한국의 교육은 뒤처진 학생을 챙기는 교육보다는,

앞서나가는 학생들을 알묘조장하는 식의 사교육도 성행하여 줄을 세우는 것 뿐이어서,

국어 영역의 차이를 해소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책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수능과 함께였으니,

이제 한 20년 넘은 것인데,

이제 이런 '작품읽기'들도 문학 교과서 못지않게

좋은 학습 활동들을 싣고 있다.

 

이 시리즈는 창비에서 나온 10권 시리즈로,

시, 소설, 극수필, 고전으로 이뤄져 있다.

각 2권이고 소설만 4권으로 이뤄졌는데,

작품 선정도 좋고 해설과 학습활동도 잘 짜여져 있다.

 

욕심내지 말고,

조금씩, 또는 한 작품씩 틈날 때 읽으면 도움이 된다.

 

한국처럼 근현대사의 사건이 다사다난한 국가도 드물다.

그래서 그 사건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읽기 힘든 소설들도 있다.

 

이 책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같은 소설은 불과 100년도 안된 소설이지만

요즘 아이들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작품이다.

 

동행과 눈길도 플롯을 공부하기 좋은 작품이고,

모래톱이야기와 원미동 시인도 완결성이 높은 작품이다.

 

우리학교 독서토론반 아이들에게 권해주려고 고른 공선옥의 '나는 죽지 않겠다' 역시

짧은 이야기 속에서 많은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가난한 아이 손에 쥐어진 백만 원은 살금살금 녹아서 점점 줄어든다.

줄어드는 눈사람을 원상회복 시켜야한다는 아이의 부담은 점차 커지다가,

결국 죽음에 직면하지만,

안갯속의 대화를 듣다가 안개가 걷히는 배경과 함께

마음의 안개도 걷힌다.

 

나는 죽지 않겠다.

 

해결책은 없다.

삶에서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은 요원하다.

그러나, 그래서, 그럴수록 이런 의지가 필요하고,

이런 위안과 다독거림이 필요하다.

 

중학생 고학년 정도부터 이 세트를 야금야금 읽을 수 있으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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