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재구성 - 제28회 신동엽창작상 수상작 창비시선 306
안현미 지음 / 창비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

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

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

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와유(臥䢟), 전문)

 

이 시집에서 오래오래 여러 번 읽어보던 시다.

분위기가 오늘 날씨와 맞춤해서인지,

내가 전생에 한지에 시 좀 적고, 국화주 좀 마셔서인지, 이런 것이 좋다.

 

어제 아내가 뜬금없이 "르노와르는 가난하지 않게, 풍족하게 살았을 거 같애.

그림들이 참 따스해~"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검색에 들어가 보니, 역시 그랬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달리 그는 궁핍에 시달리지 않고 일찍부터 넉넉한 생활을 했다 한다.

작품에는 그 사람의 '궁기'가 드러난다.

'근기'가 다 반영된다.

이 사람 글 역시 르노와르보다는 뚤루즈 로트렉 류에 가까울 것인데...

 

당신이 내 절망의 이유이던 때가 있었다

당신이 내 희망의 전부이던 때가 있었다

그 이전 이전엔 당신이 내 아무것도 아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전 이전에도 당신은 당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이후에도 당신은 당신일 것이다

 

시시해서 미치겠는 사랑!(모계, 부분)

 

아무리 뜨거웠던 사랑도,

이전 이전에는 아무 것도 아닌,

그저 당신일 뿐인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한때는 희망의 전부자 절망의 이유였던... 그러나 이제는 거울앞에 서... 시시해서 미치겠는 것이

삶이고 사랑인가...

 

인간 이전에 안현미는 천상 여자다.

 

아마존 사람들은 하루종일 내리는 비를 여자비라고 한다

여자들만이 그렇게 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우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울던 소리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에게서 나던 소리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젖 먹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소리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의 목 메이는 소리(여자비, 전문)

 

인간의 생에 대한 본능은 여자가 더 지극하다.

아마도 몸 속에 아이집을 가지고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탯줄로 먹인 기억이,

그리고 피부를 통해 흘러나오는 천연 자양분인 젖을 먹인 기억이

여자를 삶의 투사로 만든다.

 

여자비

멋진 시다.

 

  어떤 사람들은 어느날 느닷없이 왼손을 잘리고 남은 생

을 오른손잡이로 살아가야 하는 왼손잡이처럼, 자신의 뿌

리를 잘리고 남은 생을 자신의 뿌리 바깥에서만 살아가야

한다(뉴타운 천국, 부분)

 

용산일 것이다. 뉴타운은...

용산 그 땅을 허물고 새집 지으려던 명단에도 <삼성>이 있었다.

당연히 메르스 병원 이름을 감추던 배경에도 그들이 있었다.

불교에서 '반달과 별 셋'은 마음심(心)을 파자한 것인데,

그렇게 소중한 마음 짓밟고 들어선 곳은, 과연 새로운 마을일까?

 

어안렌즈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고 인간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

 

 

나무처럼 거울 하나 서 있다

그 거울 속엔 거울을 닮은 연못 하나 있다

그 연못 속엔 거울처럼 서 있는 나무 하나 있다

그나무 늙은 가지 하나 거울 속으로 뻗고 있다

그 나무 질긴 뿌리 하나 연못 바닥에 이르고 있다

거울 속에도 연못 속에도 나무 속에도 여자는 없는데

여자가 쌓아둔 오래된 미래가

수생식물처럼 자라고 있다

수생식물처럼 부유하고 있다

 

거울처럼 거울이 있다

나무처럼 나무가 있다

연못처럼 연못이 있다

거울 속에도 연못 속에도 나무 속에도 없는 여자가

시간을, 물고기를 , 사각지대를 기르고 있다

수생식물처럼 자라고 있다

수생식물처럼 부유하고 있다

 

 

한 사람은 한 세계다.

그 사람 안에 또 한 세계가 자란다.

거울 저편에서는 방향이 반대인 채로,

연못 저 아래서는 거꾸로 선 채로,

인간의 세계는 자라난다.

 

질기고 단단하게

그러나 부유하면서...

흔들리면서 살아 간다.

 

시집을 읽노라면,

맘에 쏙 드는 시도 있고, 그저 그런 시들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시집을 자주 사는 편이다.

 

삶 역시 그러하듯,

맘에 꼭 드는 날도 사람도 있고,

별로인 날도 사람도 있게 마련이니까.

 

꼭 드는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여겨야 하니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테레사 2015-06-15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안현미 시집을 사서 읽어보고 싶어요..원래 시집은 안사야지 했는데..늘 한개의 시를 보고 샀다가...끝까지 못 읽고 버려 둔 게 부지기수이거든요...물론 그건 제 마음이 시를 받아들이기에...너무 성급하기 때문이란 걸 알지만....^^;

글샘 2015-06-16 14:06   좋아요 1 | URL
저는 소설은 안 사도 시집은 사서 봅니다. 시집 한 권에서 한 편만 건져도 ㅋ 성공이지만요. 말을 벼리고 벼려서 시집을 내는 일에 용기를 주는 일 같아서 사게 됩니다.
 
곰곰 문예중앙시선 8
안현미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여자 곰같다. ㅋ

하긴 우린 웅녀의 후손이니, 모두 곰의 유전자를 한톨만큼씩은 갖고 있겠지.

 

저질러라, 닥치면 겪는다, 긍게 긍갑다...

이런 것이 좌우명이라면... 그 삶이 가난에서 시작해서 무대뽀로 진행되다 고독으로 눈물짓고 있는 것인 줄 알리라.

 

시는 곧 그의 삶인데, 어떤 해설가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안현미의 시세계가 탐색하고자 하는 것은

이성중심주의적인 근대적 주체의 관념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의식으로부터 배제되어 추방된 우리 정신의 또 다른 영역이라는 것이다.(132)

 

이런 시답잖은 씨월렁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까지 넣은 글을 덧붙인 것은, 이 책의 실수다.

거짓말쟁이가 늘 입에 '이거 진짜야'를 붙이고 산다.

 

마지막의 '자전적 산문'은 좋았다.

 

인문계 커트라인보다 높은 성적의 우울하고 못생긴 친구들...(119)

 

로 살았던 열 아홉 청춘.

그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둥의 서울대 교수의 지껄임은 구역질 나는 것일지도...

 

시집의 제목부터 그렇지만...

안현미는 우리말을 '곰곰' 응시한다.

그러다가 우리말은 무슨 말이든 두번 겹치는 '첩어'로 만들면, 새로운 의미가 퐁퐁 샘솟는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의 시는 그리하여 분홍분홍~하지는 않지만,

곰곰... 자분자분하다.

 

그렇다면 시인,

집도 절도 없는 마음 불 꺼도 설움은 꺼지지 않더이다.

 

그렇다면 시인,

빌어먹을 슬픔의 삼투압은 발광의 광합성과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이오.

 

그렇다면 시인,

문 밖이 곧 저승이라고 하더니, 왜 나는 문 안쪽에서도 관에 누워있는 것 같단 말이오.(그렇다면 시인, 부분)

 

시인이 된 '시인 현미'

곰곰 바라보면 텔레비전의 사람들은 모두 가짜임을 알게 된다.

곧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지나간 것이고,

지나고 있는 것이고, 아까 저 거시기 문학평론가의 말마따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든 것은 지나갈 것이다.

 

케이블티비에서 일 년 전에 죽은 사내가

죽음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내의 전생이었다(가령, 부분)

 

'도에 관심있으십니까' 류의 생각을 하다가

이런 시를 만난다.

 

도란

도란

뜰 앞의 잣나무!(나 vs 잣나무, 부분)

 

도란도란 속삭거리는 잣나무이기도 하고,

도란 무엇인가 하는 정의 형식이기도 하고,

중의적이기도 하고, 중첩이기도 하고, ㅋㅋ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기도 하다.

 

 

실패엔 나와 발음이 뭉개진 사내와 어린 창녀 아이의

엉킨 실타래 같은 꿈이 감긴다.

색색깔의 실패!(실패라는 실패)

 

실꾸러미를 실패라고 불렀는데,

요즘엔 뭘 꿰맬 일이 없으니 실패를 만날 일이 드물다.

그러니 실패에 좌절하는지도 모른다.

 

#1

2층 통유리 찻집 '파우'

여자는 사선으로 쓰러지는 비를 바라본다

 

#5

'파우'는 무덤 속

아니,

나의 전생 같다

 

#0

여자는

발굴되지 못한

빗살무늬토기다(빗살무늬토기, 부분)

 

비와

빗살무늬

사선으로 쓰러지는 비와

사선으로 그어진 빗살무늬

그들을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 속엔 가득한 빗살무늬

속은 텅텅 빈...

 

한계와 임계 사이에 언어가 있다

언어는 우울한 물고기 이름이다

이를테면 제대로 실패한 자만이 실패를 싱싱하게 맛볼 수 있다(언어물회, 부분)

 

한계는 막다른 길이다. 더이상 갈 수 없는 곳이다.

임계는 두 영역의 경계선, 가장자리이다.

한계는 임계와 겹칠 때도 있지만, 간혹 한계는 외롭기도 하다.

임계는 늘 둘이지만,

한계는 둘이다가 혼자이기도 하다.

그 사이를 언어가 유영한다.

고독한 언어... 그는 제대로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아는 이에게 포획된다.

곰곰 살피는 이이게...

 

나 오독한다

오! 독한 나(갈대밭에서 읽다, 부분)

 

이런 말도 신선하다.

이 시를 타이핑하다가 실수로 '오덕한다'로 쳤다. ㅋ

오타쿠처럼 뭔가에 몰두하는 일을 '오덕한다'고 가볍게 말한다.

그는 스스로를 '독하다'고 응시하기까지

스스로를 오덕질 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계와

부글거리는 상태가 변화하는 임계와

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한계까지를

오덕질 하다보면,

모든 일이 부질없는 '오독'임을 찾는다.

 

시인 현미다.

 

슬픔은 팡이 팡이 피어오르는 곰팡이꽃러럼 습관적으로 습한 곳만 더듬거렸다

습관적으로 희망하고 반복적으로 절망하는 날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도 여자가 어디로갔는지 묻지 않았다.

물음이란 본디 목마른 여름날 오후의 햇살들처럼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게

이 별책 부록 같은 골목의 불문율이었다(그 해 여름, 부분)

 

팡이 팡이 피어오른다는 말을 찾을 정도로 그는 곰곰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거짓말을 타전하다, 부분)

 

이런 영혼이 담아낸 시들은

고아하지는 않지만

삶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치열하다기보다는

익숙하다.

 

당황스럽게 친숙한 시들...

잘 아는 사람처럼 보이는 시인 현미.

 

 

 

26쪽. 육교... ㅋㅋ 사람다니는 육교가 아니다. 거시기한 육교다. 그런데 '50촉 백열등'이 나온다. 아마 30촉의 착각일 듯.

 

접힌 부분 펼치기 ▼

 

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1126372

 

백열전구를 30, 60촉이라고 불렀는데 60촉은 비싸서 서민들은 30촉을 주로 사용하였다. W(와트)보다 더 친숙하게 사용한 단위인 ''은 촛불 하나의 밝기를 표시하는 것으로 30촉만 해도 예전에는 충분하였다. 우리 삶의 애환이 30촉 백열전구에 담겨졌다. 김종해 시인의 '봄은 느닷없이 온다'라는 시에서 '봄은 화안하다/ 봄이 와서 화안한 까닭을 나는 알고 있다/ 하느님이 하늘에다 전기 스위치를 꽂기 때문이다/ 30촉 밝기의 전구보다 더 밝은 꽃들이/ 이 세상에 일시에 피는 것을 보면~'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따뜻한 추억을 우리들 가슴에 남기고 사라지는 백열전구이다.

 

펼친 부분 접기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앞의 책 보다,에 비하면 좀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하기이므로, 대상들은 현실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같은 50대, 40대가 고도성장기에 살아온 인생에 비하면,

요즘을 살고 있는 청년들은 너무도 천천히 오르는 에스컬레이터의 속도감때문에

오히려 내려가는 것 아닌가 싶을 지경인데,

그런 현실에 대한 이야기는 시의적절하다.

 

그의 이야기의 대부분은 글쓰기에 대한 것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먹고 나서 느끼는 것이,

세상의 통념은 늘 옳은 것은 아니란 것.

 

그처럼 쓰는 사람에게는 나이들어 친구가 그리 필요하지도 않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읽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친구가 된다.

이렇게 읽고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글을 잘 쓰는 것은,

어떤 순간에 인간이 고요하게 자기 서재, 아무도 침입해오지 않는 고요한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대면하고 정직하게 쓴 글에는 늘 힘이 있고 매력이 있어요.(121)

 

기술도 기법도 아니고, 삶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해야 글이 나온단다.

그렇다. 생활 속에서 나온 글이라야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

 

청소년들이 쓸 수 있는 멋진 글은 부모나 선생에게 선뜻 보여줄 수 없는 글들이라고 생각해요.

부모, 학교, 성적인 억압 등을 토로하고 폭로하는 글쓰기의 기쁨.(137)

 

도덕이란 이름으로 이런 것들을 가지치기하는 어른들이 듣는다면 놀랄 일이다.

 

이번에 다시 보니까

오디세우스가 끝없이 기억과 싸우고 있더라고요.

내가 과거에 누구였나를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자기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미래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고...(142)

 

이런 지점에서 가장 기대되는 책은 그의 '읽다'이다.

그가 '보는' 것은 나도 본 것이고,

그가 '말하는' 것은 '작가란 무엇인가'나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에서도 말한 것이다.

그가 '읽은' 것을 보고 싶다.

 

그래서 같은 책이라도 '다시' 읽게 되는 고전들에서 그가 읽어내는 삶의 단면이라든지,

책과 삶의 나란함과 상호 간섭 같은 지점을

읽어내는 재미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모든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현실을 '듣고' 적는다고 이야기한다.

 

듣기는 윤리이기 이전에 작가가 직면한 운명입니다.

자신을 서서히 해체하면서 엄청난 노동을 투입하여 한 세계를 만드는데,

지나고 보면 그것이 결국 받아적기 혹은 '듣기'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통해 뭘 말하려고 했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합니다.

말하려고 한 무언가가 아마 있었겠지만,

쓰는 동안 잊어버렸다,

가 정답일 겁니다.(174)

 

젊은 이들이 좋아한다는 작가, 김영하.

그의 작가론, 작품론, 소설론에 대한 이야기는 제법 재미있다.

술술 읽힌다.

그러나 역시, 그의 '읽다'를 기다리게 된다.

나는 작가쪽보다는 독자쪽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시선 374
안현미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대학다니던 80년대는

서양의 68 시대의 후일담이 넘실거리던 시대였다.

자유와 혁명의 이념 아래서 여성의 문제도 같이 출렁였다.

그래서 여성의 해방은 인간의 해방과 함께가야 하는 과제라는 것을 책에서 배웠다.

 

그러다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해서 살아보니

이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결혼해 보니 어머니도 여자였고, 아내도 여자였다.

당황스러웠지만 난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채, 이십 년이 넘어버렸다.

 

안현미 시집을 읽으면서 '여자'의 일생을 느낀다.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류의 발설이 등장한 것은 요즘 젊은 작가들 이후의 이야기다.

최영미가 말 잘 듣는 컴퓨터, 그 매력적인 존재에게 '컴퓨터와 씹하고 싶다'고 말한 것도

잔치가 끝난, 서른이 발설하기엔 쑥스러운 것이었다.

화끈하긴 하지만,

솔직하긴 하지만,

난 그런 것을 시라고 읽고 싶지 않다.

발랄, 명랑하다고 여기는 이도 있을지 몰라도,

은은, 담백하지는 않다.

난 아무래도 은은, 담백 애정남인 모양이다.

 

안현미의 시를 극찬한 한창훈에 꼴딱 넘어가서 그의 시집 3권을 샀다.

한창훈이 극찬한 내간체를 보았다.

 

  결혼 후 한 계절이 지났습니다 입덧이 시작되었고 제가 믿고 싶었던 행복을 얼음처럼 입에 물고 있습니다 너무 서

둘러 시집왔나 생각해봅니다 입안이 얼얼하고 간혹 어린 엄마였던 언니가 너무 사무칩니다 

 

  삶의 비애를 적확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닐 테지만 나를 보아 너무 서둘지 않아도 나쁘진 않았을 텐데

어리고 영민한 여자가 현모양처가 되기란 동서남북 이 천지간에서 얼마나 얼얼해야 하는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고 싶었던 행복을 얼음처럼 입에 물고 너도 곧 엄마가 되겠구나 무구하게 당도할 누군가의 기원이 되겠구나

여러 계절이 흘렀으나 나는 오늘도 여러 개의 얼음을 사용했고 아무도 몰래 여러 개의 울음을 얼렸지만 그 안에

국화 꽃잎을 넣었더니 하루 종일 이마 위에 국화향이 가득하였다 그 향을 써 보낸다 그저 얼얼하다 삶이(내간체, 전문)

 

여러 번 읽었다.

아름다웠다. 은은하고 담백하였다. 좋았다.

 

강 옆에서 물이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삐아졸라를 들으며 나는 내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

(아버지는 이발사였고 어머니는 재봉사이자 미용사였다, 부분)

 

삶은 그렇게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목숨을 스스로 버리기도 하지만,

삐아졸라를 들으며

무념의 경지가 되어

내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

 

  언젠가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열아홉 혹은 스무살

봄에. 사랑을 시작해도 부동산 투기를 시작해도 외국어 공

부를 시작해도 실패하기 딱 좋은 나이, 실패해도 상관없는

나이, 즉흥적이어서 아름다운 나이, 열아홉 혹은 스무살 봄.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

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히 서로가 서로를 향해

찬송가 불렀지. 찬송가책도 미래도 없이. 누구는 그걸 사랑

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

지. 언젠가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전생 혹은 전쟁 같

았던 그 봄 춘천에.(춘천, 씨놉시스, 부분)

 

서른, 잔치는 끝났을지 몰라도,

기억은 남는 것.

기억은 완벽하지 않지만, 기억이 기록이 되고, 기록이 기다림이 된다는....

에셔에게서 빌려온 무한대...처럼...

그에게 기억은 '나의 힘'이 된다.

 

뜨겁거나 화끈 달아오르기보다는,

담담해서 편안하고 은은해서 오히려 아름답다.

 

'전갈'에서 '아산을 지날 일이 있으면 연락하렴'의 연락과,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사막의 고독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전갈의 뒷모습을 닮았던 선생님'

의 곤충을 떠올리듯,

'이별'을 '이 별'과 환치시키기도 한다.

 

그이 시에서는 이런 여자도 나온다.

 

  결국 공식 속에 모든 사람들의 말을 백 퍼센트 담을 수

있다는 여자가 공모에 당선되었고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

갔으나 결국 눈사람을 만들기 위한 혹독한 추위가 전국적으

로 선포된다 다시 백 퍼센트 겨울 공화국이 시작되고 있다(눈사람의 공식, 부분)

 

여자라고 다 여자가 아니다.

여자보다 더 독한 족속이 있는 법이다.

은은하게 여자의 삶이 겪어온 슬픔을

쓴 소주 한 잔 없이 엮어온 그였지만,

 

마지막 시인의 말은 쓰디 쓰다.

소주 대신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다.

 

  어떤 슬픔은 새벽에 출항하고 어떤 아픔은 영원히 돌아

오지 못한다. 오늘 우리는 겨우 살아 있다. 어쩌면 저주가

가장 쉬운 용서인지도 모르겠다.(시인의 말)

 

새벽 출항,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어떤 아픔.

20140416

이런 것들은 이제 하나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아릿한 아픔과 진한 눈물을 부르는 상징이...

 

장미가 다시 피는 계절

여자의 아픔에 눈물 흘리는

장밋빛 향기가 슬픈 시집을 만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5-05-14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 소개 받으러 들어왔다가 맘 아파서 어쩌지 못하고 앉았습니다.
그러고보면 참 비겁했는지라,
일부러 애써 외면하려 했었는데...
기어이 보고야 말았고,
그래서 가슴에 무언가 얹혀서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하는 하루 하루지만,
제 그것은 호강이고, 사치네요.

글샘 2015-05-20 12:28   좋아요 0 | URL
맘에 얹혀서 올리지도 못하고 내리지도 못하고 사는 게
어쩌면 우리가 세월호를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한창훈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창훈의 '꽃의 나라'를 여러 번 읽었다.

그 이야기는 성장소설이면서도, 광주 학살의 보고서였다.

그의 '홍합'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수필집을 읽노라니, 그런 것들이 다 취재가 아니라 삶의 기록이었다는 것을 알겠다.

생생한 형상화가 가능했던 것이 온몸으로 밀고나온 것이었기 때문이었음을...

 

이 책은 참 재미있다.

시답잖은 수필집들은 그저 그런 이야기를 풀어내기 십상인데,

예를 들면 자연이 아름답다거나, 환경이 중요하다거나,

삶의 작은 일들에서 어떤 것을 생각해 냈다거나...

한창훈의 이야기에는 반드시 아주 '개성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개성적인 인물은 비극적일 경우조차도 개그 드립 작렬이다.

 

좀 우울한 날이라면, 이 책을 들고 비내리는 창가에서

향긋한 커피 한 잔 들고 앉아 읽기를 권한다.

커피 사레 들리지 않도록 조심할 것도...

 

그의 인물들이 개성적이지만 또한 '전형적'인 민중의 삶을 보여준다.

거기다가 남도의 진득한 <변방의 말과 노래>를 담아 낸다.

그러니 그 인물이 개성적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거문도.

절해 고도에서 나서 지금도 거기 산다는 작가.

 

몸 한 조각을 잘라내 정신의 진물로 반죽한 다음 빚어놓은 느낌 -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

적막을 맞대면한다는 것은 혹독한 짓이었다.

하여, 저곳 정리해 다시 육지로 나간 다음,

간혹 이곳을 찾아와도 발보아지지 않았다.(104)

 

스스로의 삶을 돌아볼 때는 저린 팔을 주무르는 마음이 된다.

 

당신이 두고온 것들중 무엇이 가장 그리운가고 몽골에서 유학온 학생에게 물었더니

그녀는 바람이라고 대답했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독한 바람. 극도로 추웠던 바람.

너무너무 지겨웠던 그게 가장 그리운 거란다.

허락한다면 고향에서 한 사흘 그 바람만 맞다 돌아오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이해가 됐다.(109)

 

그 고독하고 사나운 파도 소리로 가득했던 자신의 과거를

마치 무진 기행의 무진처럼, 안개로 가득했던 시절을 돌아보게 하는 고향을 그는 이해한다.

 

한창훈의 문학 수업 이야기는 무대뽀다.

그러다 백석의 '여승'을 맞닥뜨리고 깨닫는다.

 

내가 선생께 배운 것은 글 쓰는 기교가 아니라 삶을 궁리하는 방법이었다.

"예전의 큰 작가들 글을 한번 찾아 읽어보고

하늘의 뜻과 맞닿아 있는 작가의 뜻이 무엇인지 한 일연 고민 좀 해봐."(164)

 

결국 김수영의 말처럼,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글이 아니고서는 글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이다.

박남준에 대해 쓸 때는 애정이 지나치다 못해 철철 넘친다.

 

박남준 시인을 두고 사람들이 칭하기를

풀잎 같고 이슬 같고 바람 같고 수선화 같고

처마끝 빗물 같고 나비 같고 눈물방울 같은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니까 오십 넘도록 홀로 스님처럼 지내며 시와 음악과 새소리, 매화를 동거인으로 두고 살고 있습니다.

삶은 정갈하고 성품은 깨끗하고 몸은 아담하고 버릇은 단순하고

눈매는 깊고 손속은 성실한데다가 시서에 능하고 음주는 탁월하고 가무는 빛나는 가인입죠.(233)

 

안현미를 극구 칭찬하는 대목도 구성지다.

 

슬픔이 많으면 일찌감치 죽어버리거나

살아남았다면 웃는 거 말고는 할 게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듣고 있으면 기분 좋은 데 듣고 나면 공연히 쓸쓸해지는 그녀의 웃음소리는 이를테면

웃음 직전의 침묵, 웃음 직후의 허전함, 그리고 웃지 않을 때의 고단함,

그것들의 총화였다.(256)

 

유용주, 이정록 등속의 술꾼들 이야기는 많이 들었던 것이고,

새롭달 것도 없는데, 그이의 안현미 사랑은 급기야 나를 안현미로 이끌었다.

그의 시집을 주문한다.

 

삶의 비애를 적확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닐 테지만 나를 보아 너무 서둘지 않아도 나쁘진 않았을 텐데

어리고 영민한 여자가 현모양처가 되기란 동서남북 이 천지간에서 얼마나 얼얼해야 하는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고 싶었던 행복을 얼음처럼 입에 물고 너도 곧 엄마가 되겠구나 무구하게 당도할 누군가의 기원이 되겠구나

여러 계절이 흘렀으나 나는 오늘도 여러 개의 얼음을 사용했고 아무도 몰래 여러 개의 울음을 얼렸지만 그 안에

국화 꽃잎을 넣었더니 하루 종일 이마 위에 국화향이 가득하였다 그 향을 써 보낸다 그저 얼얼하다 삶이

(내간체, 부분)

 

여성의 삶은 참 초라하면서도 고단했다.

힘겨우면서도 어쩔 수 없었고 슬프면서도 행복했다.

그것을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고 얼얼하다고 쓴 안현미는

그야말로 자신의 삶을 글로 드러낸 '온몸으로 밀고나간 시인'격인 셈인가?

 

강 옆에서 물이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삐아졸라를 들아며 나는 내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

(아버지는 이발사였고 어머니는 재봉사이자 미용사였다, 부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 것만으로도 책값은 충분한데, 안현미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책깨나 읽는다던 소리는 이제 말아야겠다.

안현미를 모르면서 문학을 가르쳤다고...

뭐, 워낙 시인도 많으니 그렇다 치고... 읽고 볼 일이다.

 

 

고칠 곳...

151. 내 마음은 호수요,식의 직유를 배운 모양이다... 비유라고 하든지 은유라고 해야한다. 직유는 아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5-10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0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0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