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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두 개의 초록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67
마종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5월
평점 :
초등학생 시절,
담임 선생님이 시켜서 '고전읽기반'이라는 데를 들어가야 했다.
방학 내내 학교에 나와서 국가에서 발행한 초록색 표지의 책들을 읽었다.
초등 3학년의 교재는 한국 동화, 그리스 로마 신화, 이솝 우화 같은 책들이었는데,
거기서 마해송이라는 이름을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오롯하다.
그의 아들, 마종기는 군의관 시절,
한일 협정 반대 서명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했단다.
그런 연유로 타국 생활을 한 것이 한평생.
그의 시에서 묻어나는
낙타의 길숨한 눈썹을 스치는 서걱거리는 사막 모래 소리나
폭폭한 한숨 소리는 그런 뿌리없는 삶의 회한에서 나온 것이리라... 여긴다.
걷기가 무척 힘들었어.
걸어도 걸어도 잘 가지지 않았어.
젊었던 날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너도 그랬지?
아무도 없어서 그랬을까.
가야 할 곳을 몰라서 그랬을까.
한 사람이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 걸
우린 오랜 후에야 알게 되었지.(고비사막 1, 부분)
살면서 참 그렇게 팍팍하게 걸어온 이의 노래는
촉촉하지 않고 더없이 건조하지만,
읽는 내 마음은 촉촉해진다.
강한 자는 성대가 퇴화한다. 약한 자를 죽여서 먹
어버리는 데 일일이 변명이나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
이다. 독수리는 아예 성대가 없어 울음소리를 들은 자
가 없다. 누구 앞에서나 배가 고프면 아무거나 죽여서
먹여버리면 끝이다. 그래서 말없는 자를 주의해야 한
다. 자신을 감추기 위해 외면하는 차가운 독재자를 조
심해야 한다.(벌레 죽이기, 부분)
이 시를 읽으면서,
그 여자가 떠올랐다.
남자보다 더 잔혹한 그 여자.
성대로 투쟁하고 토론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았던 그 여자.
약한 자를 죽여버렸으므로, 성대가 필요 없는 그 여자.
시끄러운 소리 일일이 듣지 않아도 되고
잔소리에 응답을 안 해도 되는 딴청,
언제부턴가 깊고 은은한 소리만 즐겨 듣는다.
멀리서 오는 깨끗한 울림만 골라서 간직한다.
내 끝이 잘 보이는 오늘 같에는 날에는
언젠가 들어본 저 사려 깊은 음성이
유난히 크게 울리는 사랑스런 내 귀.(나이 든 고막, 부분)
나이 들면서
귀도 늙는다. 금세 반응이 오지 않는 일이 잦다.
그것을 역설적으로 더 사랑스럽다고 하는 마음은,
팍팍한 사막에서 꽃을 발견할 줄 아는 마음이다.
그랬지. 나는 늘 떠나고 싶었다. 가난도 무질서도
싫었고 무리지어 고함치는 획일성도 싫었다. 떠나
고 또 떠나다 보니 여기에 서 있다. 낡고 빈 바닷가,
잡음의 파도 소리를 보내고 산티아고 노인을 기다리
고 싶다. 남은 생명을 한 판에 다 걸고 집채만 한 고
기를 잡았던 헤밍웨이의 어부를 만나고 싶다. 그 쿠
바 나라 노인은 나를 기다리며 감추어둔 회심의 미
소를 그때 보여줄 것이다. 해변에 눕는다. 해변이 천
천히 그림자를 옮기면서 나를 치며 가라고 할 때까
지 계획 없이 떠다니던 내 생을 후회하지 않겠다. 내
가 무리를 떠나온 것은 비열해서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 아직도 말할 수 있다. 노을이 키웨스
트 해변에 피를 흘리고 흘려 모든 바다가 다시 무서
워질 때까지, 그리고 그 바다의 자식들이 몰려나와
신나는 한 판 춤을 즐길 때까지.
마흔 두 개의 섬을 연결한 마흔두 개의 다리를 건
너며 차를 달려 네 시간 만에 도착한 섬. 어느 다리
는 길이가 30리 정도까지 되어 가늘게 흔들리며 망
망 바다에 떠 있어 어지러웠지만, 헤밍웨이는 야자
수밖에 없는 그 마지막 섬에 프랑스 미녀를 데려와
넷째 부인으로 살림을 차리고 말술을 마셨다. 그 중
간에는 사람 열 배 크기의 상어를 잡고 거대 다랑어
를 잡고 아프리카에 가서는 사자와 표범과 코뿔소를
피투성이로 죽이고 종국에는 그 총으로 더 늙기 전
에 미리 죽어버린 남자, 그가 쓴 통 크고 시야 넓은
은유의 글을 읽다가 나도 통 큰 시를 꿈꾸며 모든 의
심과 열등감을 밟고 방을 뛰쳐나온다. 갈 곳은 없지
만 눈을 크게 뜨고 아직은 갈기 사나운 수사자를 꿈
꾸며, 가슴을 펴고 바다같이 넓은 시를 꿈꾸며, 다시
한 번 키웨스트의 헤밍웨이를 꿈꾸며.(헤밍웨이를 꿈꾸며, 전문)
헤밍웨이는 꿈의 상징이다.
그는 생선을 다 뜯기고도 똥폼이 남은 어부 노인처럼,
폼생폼사다.
폼나게 살다가 폼나게 죽었다.
인생은 이슬처럼
잠시 엉긴 물방울과도 같은 것이지만,
또한 그래서 헤밍웨이처럼 마흔두 개의 섬과
마흔두 개의 다리를 건너며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아스라한 눈동자를 꿈꾸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마종기의 나이든 이 시집이
왜 이렇게 공감이 가며 가슴에 착착 안겨드는지...
나이가 같이 들어가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