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를 인양하다 창비시선 391
백무산 지음 / 창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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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를 인양하다...

아, 이 나라를 어쩔꺼나.

이제 '인양'이라는 글자만 봐도 눈시울이 붉어지게 되었으니...

 

  가라앉은 것은 건져올리지 못한다 그것은 항해를 계속하

고있기 때문이다 캄캄한 수심 아래 무거운 정적 속으로 배

는 멈추지 않고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다 아우슈비츠도 731 부대

도 거기서 행한 생체실험으로 얻은 의학 지식으로 수많은

질병을 퇴치하고 죽은 자들보다 더 많은 인류를 구하지 않

았느냐고 공이 7이지 않았느냐고

 

  물에 잠긴 것은 그대로 놔두고 이제 애도도 거두고 정상

사회로 가라고 재촉하고 화를 내고 폭력을 행사하듯이 그

들은 안다 버림받고 가라앉은 것이 정상 사회를 들어올리

는 부력이라는 것을

 

  무엇을 인양하려는가 누구는 그걸 진실이라고 말하고 누

구는 그걸 희망이라고 말하지만 진실을 건져올리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고 희망이 세상을 건제올린 적은 한번도 없다

그것은 희망으로 은폐된 폐허다 인양해야 할 것은 폐허다

 

인간의 폐허다 (인양, 부분)

 

노동해방을 부르짖던 '노해'는 이제 인간 사랑을 외치는 쪽으로 갔다.

무산자 프롤레타리아 편에 섰던 '무산'은 아직 인간의 폐허 곁에 머무는가.

 

뒤집어라 그들의 명령과 지시를

그리고 저 고귀한 지시를 따르라, 승객을 버리고

선장과 노련한 선원들이 첫 구조선으로 달아난 그 시각

선원은 마지막까지 배를 지킨다! 구명조끼를 벗어주고

한명이라도 더 구하려다 끝내 오르지 못한 스물두살

4월을 품은 여자 박지영, 그가 최후의 선장이다

그 푸른 정신을 따르라, 뒤집어진 걸 바로 세우게 하는,

죽음을 뒤집는 4월의 명령을!(세월호 최후의 선장, 부분)

 

세월호 이후, 이 나라는 죽음의 골을 향해 전진중인 것 같다.

아니, 뒷걸음질로 나락을 향해 기어드는 형상이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낯을 쳐들고 뱀혓바닥을 낼름거리는 독사들로 가득하다.

그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도저히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새벽 잠결에 듣는 도마질 소리

놋그릇 부딪는 소리

바가지 물 붓는 소리

마른 감나무 가지에 산까치 짧은 날갯짓 소리

 

감은 눈에 비쳐드는 흰빛

깊은 곳에서 뼈를 적셔오는 흙의 온기

꾸던 꿈과 뒤섞여 흩어지는 바람 소리

 

낡은 놋주발에 김 오른 고봉밥

질그릇 보시기에 고추채 올린 백김치

들기름 내 묵나물 찬에 까만 간장 종지

거뭇거뭇한 놋수저 한 벌

 

문틈에 스며드는 솔가지 타는 연기

옻칠 벗겨진 개다리 소나무 밥상

상을 들이고 가는 감물 들인 옷 내

마당 가득 고여드는 푸른 산기운

 

내가 제사상을 받은 걸까

밤길 더듬어 잔설 밟고 오르던 길

질기게 기억을 물고 따라오던 슬픔들

저 길 밟고 간밤에 나의 여럿이 돌아가고

 

저승에서 맞는 신접살림

말간 동치미 국물 그 신맛의 첫날 같은(지리산 그곳, 전문)

 

지나간 시간들의 체취는 온몸을 간질거린다.

이런 기억들을 품어 주어 감사한다.

그리고 청맹과니가 되어

바라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도록 눈 띄워주는 시의 힘을 일깨워줌에 감사한다.

 

여기서 저기 붉은 깃발 손짓하는 지점까지가

비무장지대다

이로써

우리는 무장지대에서 살아왔다(무장지대, 부분)

 

비무장지대... DMZ

그곳을 마치 무서운 곳처럼 생각하지만,

그렇다. 비무장지대가 아닌 곳.

여기는... 핵무기로 무장한 무장지대인 것이다.

그것을 잊고 살았다.

무섭다.

 

빈집을 보면 사람들이 쑤군거리지

사람 떠난 집은 금방 허물어지거든

멀쩡하다가도 비워두면 곧 기울어지지

그건 말이야 사람이 지독해서야.

 

벽과 바닥을 파먹는 것들

기둥을 물어뜯는 밤의 짐승들

쇠를 갉아 먹는 습한 이빨들

사람 사는 걸 보면 질려 달아나지

사람 사는 일이 모질어서야 그건(빈집, 부분)

 

신선하다.

 

  타이어를 껴입고 배를 깔고 바닥을 기며 구걸하던 걸인

이 비가 오자 벌떡 일어나 멀쩡하게 걸어가는 모습에 어이

없는 배신감을 느낀다지만

 

  상인에게 상술은 문제 삼지 않으면서 걸인에게 동냥의 공

정거래를 요구할 참인가 정치꾼들의 쇼는 전략이라는 건가

 

  머리가 땅에 닿도록 굽신대며 표를 구걸하고 신분을 위

장하고 머슴입네 간을 빼줄 듯이 가난한 자의 발바닥이 되

겠다던 정치인들의 계급 위장은 고상한 전략인가

 

  생존을 위해 직립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들뿐인가

진화를 교란하고 기적을 연출하는 인간들이 그들뿐인가

 

  배를 깔고 바닥을 기다 멀쩡하게 일어나는 기적과 숙였던

고개와 바닥에 깛았던 신분을 벌떡 일으켜 세우고 거만한

지배자가 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도덕적인 기적인가(호모에렉투스, 부분)

 

유추도 이 정도 되면 예술이다.

사기꾼 걸인과

사기 정치인...

걸인을 지탄하는 손가락에 비하면, 정치가에게 향하는 손가락은 조심스럽다.

법은 10,000인 앞에만 평등하기 때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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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자 삶창시선 43
김해자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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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아팠다.

집에 가지 못하는 혼령들에게 주문을 거는 만신의 주절거림 같았기 때문이다.

그 배에 탔던 아이들에게

엄마 목소리로 들려주는 웅얼거림인 것 같아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아팠다.

많이 아팠는데,

아플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더욱 아팠는데,

그 아픔은 새로운 것이 아니어서, 굳은 옹이가 되어가고 있어서,

그리고 아픈 사람과 아파야 할 일은 너무도 많아서...

그 아픈 사람들 곁에 가서 잠시 웅크리고 앉았던 일만으로도,

이미 많이 아픈 시인은,

몸소 위로가 되어주는 시들을 길어 올렸다.

 

한 우주가 사라질 때

오, 천사여

당신 날개는 어디 있었는가(문자를 애도함, 부분)

 

꼭 아이들의 혼령에게 바치는 진혼곡만이 아니라,

강정 마을의 구럼비 바위에게,

밀양 아리랑까지...

마치 스스로가

속이 터져나올듯 울어제치는 '버버리 곡꾼'마냥

언어나 문자로 이루어져 나오지 못하는 마음을 어버버버 거리는 그 심사가 전해진다.

 

살아서 죽음과 포개진 그 여잔 꽃 바치러 세상에 왔네 세상에

노래하러 왔네 맞으러 왔네 대신 울어주러 왔네

어느 해 흰 눈 속에 파묻힌(버버리 곡꾼, 부분)

 

참 착한 시인이다.

착한 사람의 마음에는

짠한 과거도 잊히지 않고 기억되어 남는 법.

그래서 착한 사람은 오래오래 아프다.

 

이상하기도 하죠 스무 해 전에 도망쳐 왔는데

아직도 내가 거기에 있다니

내가 떠나온 그곳에 다른 내가 살고 있다니요

푸른 작업복에 떨어지는 핏방울

아직도 머리채 잡혀 끌려가고 있다니

앞으로 달려온 줄만 알았는데

제자리에 선 뜀박질이었다니요(어진내에 두고온 나, 부분)

 

앞으로 달려온 줄 알았는데... 다시 수십년 전으로 회귀한 세상이라니...

참으로 침통한 시들만 연달은 것이 아니다.

 

제일 첫 시는,

사람의 삶이 그토록 비극적일지라도,

오늘 하루 사는 그 힘을 적는다.

 

가끔 찾아와 물들이는 말이 있다

두레박 만난 우물처럼 빙그레 퍼져나가는 말

전생만큼이나 아득한 옛날 푸른 이파리 위에

붉은 돌 찧어 뿌리고 토끼풀꽃 몇 송이 얹어

머시마가 공손히 차려준 손바닥만한 돌 밥상 앞에서

이뻐, 맛있어, 좋아,

안 먹도도 냠냠 먹던 소꿉장난처럼

덜 자란 풀꽃 붉게 물들이던 말

덩달아 사금파리도 반짝 빛나게 하던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말인 게 다인 말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말

나만 얻어먹고 되돌려주지 못한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붉은 돌에 오소소 새겨진(니가 좋으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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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시인선 54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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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먹으면서 '최선'이라는 말이 싫어졌다.

어차피 태어난 환경에 따라 출발점이 천지차이인 것을, '최선'을 다해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에 있나 싶어서이다.

 

이규리의 이 시집은 삶을 거쳐온 관조의 시선이 짙다.

시집 제목을 누가 붙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런 제목의 시도 없고, 이 시집의 주제로 알맞아 보이지도 않는다.

 

1부.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2부. 빌려온 빛에 지나지 않습니다.

3부. 멀리 있는 것에 관하여서입니다.

 

이런 소제목도 좀 어울리지 않는다.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 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특별한 일, 부분)

 

요즘 뉴스도 보지 않고, 인터넷 기사도 읽지 않으려 애쓴다.

억지로 노출되기도 하지만 눈을 질끈 감는다.

아이들 생일 축하하러 들어간 페이스 북에서 별 더러운 꼴을 다 본다.

도마뱀같은 인간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영화가 있었다. "V"

도마뱀은 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만,

인간들은 타인을 억압하기 위하여 자신을 위장한다.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다.

 

이 시집에서 고대로 베끼고 싶은 시가 한 편 있다.

 

초록 물결 사이 드문드문 비치는 보랏빛 오동꽃 보며

 

라고,

그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상행선 기차, 검진하러 가는 길

 

미친 복사꽃 지나

오동꽃 문드러지는 한나절 타고

짓이긴 꽃물 구성지게 번진 한판 세월

본떠놓은 간, 울긋불긋한 간

한 달에 한 번

꽃잎 같은 년, 다녀간 뒷자리 어지러이

그거 판독하러 가는 길

판판이 기죽는 일

 

내 다 안다

별유천지에 모다 아프다 아프다 하는 것들

저리 붉고 어여쁜 입술들

꽃불에 닿은 자리라는 걸(시 전문)

 

간이 상했나보다.

상행선 기차, 검진가는 길...

그 마음이 어떠할까.

누군가,

초록 물결 사이 드문드문 비치는 보랏빛 오동꽃 보며...

라는 문자를 보내는 사람이 있어,

세상은,

저리 붉고 어여쁜 것이다...

 

차 안에 앉아서 비가 따닥따닥 떨어질 때마다

젖고, 아프고,

결국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삶에 물기를 원했지만 이토록

많은 물은 아니었다

아직 건너오지 못한 한사람

이따금 이렇게 퍼붓듯 비 오실 때

남아서 남아서

막무가내가 된다(많은 물, 부분)

 

비만 봐도

따닥따닥 소리를 들으며

막무가내가 되는 그 마음...

 

한 줄 문틈을 그은 불빛이 빗장 같아

불 켜진 아이 방 앞에 서서

늦은 시각을 벌컥 열지 못하겠다

 

아버지가 그립지만 같이 있고 싶단 뜻은 아니에요

그건 내 말이었다

 

꽃들이 언제 피어야 할지 가지에게 물은 적 없듯이

저 아이의 새벽, 스탠드 불빛은

쓸쓸한 먼길일지 모른다

 

언제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방문 열고 나오는 아침이 있고

그러면 나는 또 짐짓 이마를 짚으며

음, 음, 날씨 얘기나 꺼낼지도 모른다 ( 꽃나무의 미열, 부분)

 

어린 꽃나무는 자라면서 자주 앓는다.

새벽, 쓸쓸한 먼길...

삶의 스산함이 소름끼치게 느껴진다.

 

삶은 이렇게 상처투성이다.

그래서 아프다.

그래도 아프다고 못하고

이렇게 미열이라고 쓴다.

그런 시인이 안쓰럽다.

그게 최선이라고 말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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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0시 5분 문학과지성 시인선 R 9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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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1

 

아픔은 내가 잘 모르는 언어로 말한다.

한참 들어도 감을 못 잡겠다.

가지 잘리고 입을 꽉 다문 나무의 소리 같기도

침묵에서 나오는 소리 같기도 하다.

다시 귀 기울인다.

 

시인의 예민한 귀로도 잘 못 알아듣는 언어가 있다 한다.

세상의 아픔은 귀 기울여 들어도

쉽사리 들리지 않는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별들이 스쿠버 다이빙 수경 밖처럼 어른어른대다 멎었다.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겨울밤 0시 5분, 부분)

 

그래.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겠다.

간절한 사람 곁에서 말이다.

반성한다.

 

이 책은 절판된 것을 다시 펴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각 부의 앞에 쪽지를 넣었다.

그 쪽지는 나름 작가 스스로의 리뷰역할을 하는 시 구절이 된다.

그 쪽지가 첨언이기도 하면서,

또한 방향타이기도 하다.

 

    

이 세상 뜰 때

제일로 잊지 말고 골라잡고 갈 삶의 맛은

무병(無病) 맛이 아니라 앓다가 낫는 맛?

앓지 않고 낫는 병이 혹

이 세상 어디엔가 계시더라도.(삶의 맛, 부분)

 

면역이 떨어지면 자주 앓는다.

조금만 아파도 참 불편하다.

그러다 낫는 날엔 정말 홀가분하다.

지난 주 내내 기침이 났다.

온 나라가 메르스 여파로 흔들대던 때, 기침은 참 민망했다.

언젠가 스르르 낫는 맛, 제일의 맛일지도...

 

쪽지 3

 

처음에는 꽃을 좋아했고, 다음에는 나무를 사랑했다. 그러다

점점 땅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땅은 꽃이나 나무처럼 쉽게 자신

을 드러내지 않는다. 땅에는 형태가 없다. 받쳐주는 힘이 있을

뿐이다. 아파트와 산책길을 덮고 있는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도

열고 땅을 만져보고 싶다.

 

언젠가 밝은 낙엽이 되어 땅에 입 맞추겠지.

 

낙엽이 될 미래가 두렵기보다는,

오히려 기다려지는 심사다.

    

이끄는 발길 따라 조심조심 대웅전 뒤로 돌아가본다.

환하다.

땅바닥에 큰 타원 수놓으며 깔려 있는 저 융단, 저 이끼,

저 색깔!

몸 오싹할 만큼 마음을 쪽 빨아들이는,

그냥 초록도 아니고 빛나는 연초록도 아닌

그 둘을 보태고 뺀 것도 아닌

초록 불길 속에서 막 나온 초록 불길 같은,

슬픔마저 빼앗긴 밝은 슬픔 같은,

이런 색깔이 이 세상 어디엔가 있었구나.(안성 석남사 뒤뜰, 부분)

 

엊그제 읽은 마종기의 시집 제목도 마흔 두 개의 초록이었다.

나이든 이들의 망막에 느껴지는 초록은,

흔한 여느 초록이 아닌가 보다.

이제 막 나온 초록 같은,

밝은 슬픔 같은 초록...

 

 

 

쪽지 4

 

마음을 다스리다 다스리다 슬픔이나 아픔이 사그라지면

기쁨도 냄비의 김처럼 사그라지면

저림이 남을 것이다.

 

통증보다 강렬하지는 않으나,

그 아련한 지속으로 치자면, ‘저림이 더 오랠 것이다.

통증의 지속형이 저림일 듯 싶다.

 

   하루만 석굴 속에서 참선하게 해달라는 내 청을 주지는 받

아들이지 않았다. ‘이곳은 거사 같은 분이 밤을 보낼 곳이 못

됩니다. 젊었을 때부터 돌과 함께 숨을 쉬어본 적이 없는 사

람은 돌 빛에 큰 병 들지요.’

 

손전등 빛 속 바위들의 감촉은 그래도 견딜 만하다고 속삭

였다. ()가 채 들어와 박히기 전 무 생각의 화강암 무늬

!(무굴일기 1, 부분)

 

마이클 코넬리의 로스트 라이트에 보면, 동굴 속에서 캄캄한 속의 빛을 더듬는 이야기가 나온다.

무 이전의 빛,

생각 이전의 무 생각...

 

이 책을 읽는 맛은,

달콤함이나 향긋함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 무미함의 느긋함을 음미하며 읽을 수 있었던 듯 싶다.

재미있는 시집은 아니었으나,

읽는 동안,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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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두 개의 초록 문학과지성 시인선 467
마종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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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시절,

담임 선생님이 시켜서 '고전읽기반'이라는 데를 들어가야 했다.

방학 내내 학교에 나와서 국가에서 발행한 초록색 표지의 책들을 읽었다.

초등 3학년의 교재는 한국 동화, 그리스 로마 신화, 이솝 우화 같은 책들이었는데,

거기서 마해송이라는 이름을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오롯하다.

 

그의 아들, 마종기는 군의관 시절,

한일 협정 반대 서명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했단다.

그런 연유로 타국 생활을 한 것이 한평생.

그의 시에서 묻어나는

낙타의 길숨한 눈썹을 스치는 서걱거리는 사막 모래 소리나

폭폭한 한숨 소리는 그런 뿌리없는 삶의 회한에서 나온 것이리라... 여긴다.

 

걷기가 무척 힘들었어.

걸어도 걸어도 잘 가지지 않았어.

젊었던 날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너도 그랬지?

아무도 없어서 그랬을까.

가야 할 곳을 몰라서 그랬을까.

한 사람이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 걸

우린 오랜 후에야 알게 되었지.(고비사막 1, 부분)

 

살면서 참 그렇게 팍팍하게 걸어온 이의 노래는

촉촉하지 않고 더없이 건조하지만,

읽는 내 마음은 촉촉해진다.

 

  강한 자는 성대가 퇴화한다. 약한 자를 죽여서 먹

어버리는 데 일일이 변명이나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

이다. 독수리는 아예 성대가 없어 울음소리를 들은 자

가 없다. 누구 앞에서나 배가 고프면 아무거나 죽여서

먹여버리면 끝이다. 그래서 말없는 자를 주의해야 한

다. 자신을 감추기 위해 외면하는 차가운 독재자를 조

심해야 한다.(벌레 죽이기, 부분)

 

이 시를 읽으면서,

그 여자가 떠올랐다.

남자보다 더 잔혹한 그 여자.

성대로 투쟁하고 토론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았던 그 여자.

약한 자를 죽여버렸으므로, 성대가 필요 없는 그 여자.

 

시끄러운 소리 일일이 듣지 않아도 되고

잔소리에 응답을 안 해도 되는 딴청,

언제부턴가 깊고 은은한 소리만 즐겨 듣는다.

멀리서 오는 깨끗한 울림만 골라서 간직한다.

내 끝이 잘 보이는 오늘 같에는 날에는

언젠가 들어본 저 사려 깊은 음성이

유난히 크게 울리는 사랑스런 내 귀.(나이 든 고막, 부분)

 

나이 들면서

귀도 늙는다. 금세 반응이 오지 않는 일이 잦다.

그것을 역설적으로 더 사랑스럽다고 하는 마음은,

팍팍한 사막에서 꽃을 발견할 줄 아는 마음이다.

 

   그랬지. 나는 늘 떠나고 싶었다. 가난도 무질서도

싫었고 무리지어 고함치는 획일성도 싫었다. 떠나

고 또 떠나다 보니 여기에 서 있다. 낡고 빈 바닷가,

잡음의 파도 소리를 보내고 산티아고 노인을 기다리

고 싶다. 남은 생명을 한 판에 다 걸고 집채만 한  고

기를 잡았던 헤밍웨이의 어부를 만나고 싶다. 그 쿠

바 나라 노인은 나를 기다리며 감추어둔 회심의 미

소를 그때 보여줄 것이다. 해변에 눕는다. 해변이 천

천히 그림자를 옮기면서 나를 치며 가라고 할 때까

지 계획 없이 떠다니던 내 생을 후회하지 않겠다. 내

가 무리를 떠나온 것은 비열해서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 아직도 말할 수 있다. 노을이 키웨스

트 해변에 피를 흘리고 흘려 모든 바다가 다시 무서

워질 때까지, 그리고 그 바다의 자식들이 몰려나와

신나는 한 판 춤을 즐길 때까지.

 

   마흔 두 개의 섬을 연결한 마흔두 개의 다리를 건

너며 차를 달려 네 시간 만에 도착한 섬. 어느 다리

는 길이가 30리 정도까지 되어 가늘게 흔들리며 망

망 바다에 떠 있어 어지러웠지만, 헤밍웨이는 야자

수밖에 없는 그 마지막 섬에 프랑스 미녀를 데려와

넷째 부인으로 살림을 차리고 말술을 마셨다. 그 중

간에는 사람 열 배 크기의 상어를 잡고 거대 다랑어

를 잡고 아프리카에 가서는 사자와 표범과 코뿔소를

피투성이로 죽이고 종국에는 그 총으로 더 늙기 전

에 미리 죽어버린 남자, 그가 쓴 통 크고 시야 넓은

은유의 글을 읽다가 나도 통 큰 시를 꿈꾸며 모든 의

심과 열등감을 밟고 방을 뛰쳐나온다. 갈 곳은 없지

만 눈을 크게 뜨고 아직은 갈기 사나운 수사자를 꿈

꾸며, 가슴을 펴고 바다같이 넓은 시를 꿈꾸며, 다시

한 번 키웨스트의 헤밍웨이를 꿈꾸며.(헤밍웨이를 꿈꾸며, 전문)

 

헤밍웨이는 꿈의 상징이다.

그는 생선을 다 뜯기고도 똥폼이 남은 어부 노인처럼,

폼생폼사다.

폼나게 살다가 폼나게 죽었다.

 

인생은 이슬처럼

잠시 엉긴 물방울과도 같은 것이지만,

또한 그래서 헤밍웨이처럼 마흔두 개의 섬과

마흔두 개의 다리를 건너며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아스라한 눈동자를 꿈꾸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마종기의 나이든 이 시집이

왜 이렇게 공감이 가며 가슴에 착착 안겨드는지...

나이가 같이 들어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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