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에서 하늘 보기 - 황현산의 시 이야기
황현산 지음 / 삼인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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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가난했으나 행복한 가정이었는데,

널 보내니 가난만 남았구나.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오래오래 가슴에 남는 마음아픈 말이다.

 

산문은 이 세계를 쓸고 닦고 수선한다.

그렇게 이 세계를 모시고 저 세계로 간다.

그것은 시의 방법이 아니다.

시가 보기에 쓸고 닦아야 할 삶이 이 세상에는 없다.

시는 이를 갈고 이 세계를 깨뜨려 저 세계를 본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무정하다는 것이다.(271)

 

이 책의 마무리가 이러하다.

시를 필터로 삼아 세상을 읽는 일은 무정하다.

 

산문은 세상을 설명하려 든다.

어떻게든 세상을 포획하려 애쓴다.

시는 이 세계를 깨뜨리는 언어.

무정한 당신을 하염없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는 인간.

 

각 이야기 꼭지의 첫 표지에는 얼룽얼룽 비치는 물빛 그림자 사이로

이야기가 드러내는 핵심 구절들이 적혀 있다.

단 한 페이지 빼고.

그 페이지는 새까만 깜장의 세계다.

황현산의 마음이 아마도... 그렇게 새까맣게 탔을 것이다.

어느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의 노비가 양반 상놈이 없는 세상을 본다면 그것은 벌써 착란이며,

나무 위에 허공이 있으니 그 나무가 꽃을 피워 올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벌써 투시자다.

허공은 모든 것이 가능한 자리이며,

다른 세상이란 저 허공과 같지 않은가.

꽃나무는 여기 있지만 꽃이 필 자리는 저 허공이 아닌가.(39)

 

김탁환의 '허균, 최후의 19일'을 읽고 있다.

그는 착란을 본 사람들 중 하나였다.

허공을 포착하는 투시자.

그들이 시인이다.

 

오늘 새벽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김일성 수령과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면... 아마도 그가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대교가 절단나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외환위기까지 왔던 것은 꼭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3당 합당을 통하여 대통령이 되었기에 할 수 있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김영삼 만큼의 리더십도 없는 자들이 그 지분 나누기에 급급하다.

이렇게 한 시대는 가고 있다.

 

시대가 흐르고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인가.

우물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때로 맑고 때로 어둡다.

 

내일 날씨가 어떠할지...

참으로 예측하기 힘든 소견을 가진 사람이라는 겸허한 표현이지만,

그나마 이런 어른이라도 옆에 있어야 한다.

어른이 없는 세상은 그야말로 두려운 세상이기 때문이다.

 

 

 

고칠 곳...

 

16. '광야'는 3행으로 된 시가 5연으로 짜여 있다.

그리고 각 연은 윗변이 아랫변의 절반쯤 되는 사다리꼴 모양이로 적혔다.

그렇게 연 구분을 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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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정전
최은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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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이야기들은 아프다.

과장과 판타지의 신화적 세계에서 건너오는 중이기도 하고,

현실의 고통을 회피하는 판타지이기도 한데,

거기서 만나는 삶의 모습들은,

통념을 정면으로 들이받는다.

 

아가, 착해진다는 건

입장 바꿔 생각할 줄 알게 된다는 거다.

입장 바꿔 생각할 줄을 알면 말이다.

세상에는 안 되는 일이 없단다.(169)

 

작년 4월 이후,

슬픔을 슬픔이라 이야기하지 못하는,

지옥도가 펼쳐진다.

 

그것을 '헬 조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주체사상을 배워서라나 어쨌다나...

아전인수와 견강부회의 달인들이 세상에 낯을 드러낸다.

 

사회의 <지옥>은

입장 바꿔 생각할 줄 모르는 냉혈한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

그곳이 지옥이다.

그들이 마귀인 셈이다.

 

인간만이 희망일 수도 있으나,

인간만이 마귀일 수 있다.

 

재미있게 읽히고, 손을 놓기 힘들게 하는 소설이지만,

소설을 다 보고도 마음이 놓아지지 않는다.

 

좋은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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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나라 - 제5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이광재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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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4월,

이것은 나라도 아니다...

이런 생각에 잠겨 비통했다.

 

그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 나라의 유구한 권력자들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임을, 다시 확인하게 하는 소설이다.

 

구한말,

민씨 일파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외세와의 야합을 꾀한다.

거기에는 개혁(경장)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개화파도 합세한다.

 

민씨당을 쳐내고 여기 계신 분들이 조정을 장악하는 게

우리가 바라는 일입니다.

일본은 좋은  우방을 얻게 되니 득이요,

조선은 개혁을 단행하게 되니 일거양득이지요.(189)

 

서구적 근대가 반드시 우월하다고 볼 수도 없지만,

그나마 조선이 접한 건 일본에 의해 굴절된 근대의 변종이 아닌가.

따라서 그를 추종하던 세력과 기득권 세력이 친일파가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바로 그들과 그 후손들이 지금 우리의 '갑'이다.

그 '갑'들이 한국사를 국정교과서로 만들겠다고 말하는 세상이다.

역시 그곳이 첫 단추다.(작가의 말, 353)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맥락은 거기서 거기다.

 

이 소설은 재미가 없다.

피끓는 시절의 사람들을 잘 형상화했으면,

읽으면서 피가 끓거나, 사랑 이야기에 아련함도 느낄 수 있는 게 소설인데,

등장 인물은 많으나, 그들이 유기적으로 엮이는 사건도,

또렷이 기억에남는 인물의 형상화도 부족하다.

부분부분 밑줄을 긋는 대목은,

공감은 가지만, 소설에서 읽을 만한 재미는 아니다.

 

꿈을 꾸는 자 앞에서 작은 안락함이란 실로 누더기가 아닌가.(67)

 

아니도, 외롭고 고단하구나.(172)

 

새 세상이 올 것이라고 꿈꾸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새 세상이 오긴 하였으나,

그 세상은 더 넓은 계급사회의 확대이고,

더 험한 전쟁의 심화일 뿐이었다.

꿈을 꾸던자에게 안락함은 누더기로 치부할 수 있는 가치였으나,

그 외롭고 고단한 현실은 보상받을 수 없다.

 

 

백성은 날마다 나라가 망해야 한다고 외친다는데

몽매한 소리가 아니라 그건 곧 좌절과 분노였다.(151)

 

이것은 나라가 아니다! 나라는 없다!

궁을 나가자, 지킬 임금도 없다!

평양으로 가서 왜놈과 싸우자!

왜국을 싸고 돌면 너희도 우리의 적이다!(195)

 

분노하고 돌을 들 때,

가진자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학살을 꿈꾼다.

 

구제 병기와 신식 무기의 싸움은 전쟁이 아니라 학살입니다.(246)

 

꿈꾼자,

다시 어두운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받아먹지 못한 환곡을 갚고, 노상 부역에다 군포는 군포대로 내는 세상으로 다시 가겠느냐?

양반의 족보를 만드는 데 베를 바치고

수령들 처첩까지 수발을 들면서 철마다 끌려가 곤장을 맞을 테냐?

이제는 그렇게 못 살지요.

나도 그렇게 못 한다. 우리는 이미 다른 세상을 살았는데 어찌 돌아간단 말이냐.

목숨은 소중하지만 한 번은 죽는 법이다.(301)

 

독재시대로 돌아가려는 발호가 날마다 전쟁중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못 산다.

 

 

선생님, 저 재를 넘으면 무엇이 있습니까요?

몰라서 묻는 게냐? 우리는 이미 재를 넘었느니라. 게서 보고 겪은 모든 것이 재 너머에 있던 것들이다.

그럼 이제 끝난 것입니까?

아니다, 재는 또 있다.

 

재를 넘는다고 끝은 아니다.

다시 재가 온다.

삶은 그런 것이다.

그렇지만, 또 재를 넘기 위해 힘을 보태야 할 때가 온다.

 

이 소설은 흥겹게 읽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으나,

힘들었다.

작가의 목소리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소설로서의 재미는 적었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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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문학과지성 시인선 473
송재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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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어둠이 서로 물고 있는 지하실 풍경이 텍스트이다.
어둠이라고 적었지만
그건 햇빛이기도 하고 메아리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시선(視線)이기도 하다.
그게 무엇인들,
“검고 깜깜하거나 거무죽죽하며 거무스름하면서
꺼뭇꺼뭇한 얼룩”(「검은 창고」)들이 아닌가,
더 검은색의 언어에 다가서는 일정 일부이다. (시인의 말)

 

본 것이 적은 사람은 해오라기를 기준으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기준으로 학을 위태롭다고 생각한다.

만물은 스스로 괴이할 것이 없는데 내가 공연히 걱정을 하고,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만물을 모함해 댄다.

! 저 까마귀를 보라.

덧없이 검은 깃털이 갑자기 흰빛으로 물들고 다시 녹색으로 반짝이며,

햇빛이 비치자 자주색으로 변했다가 눈이 부시면서 비취색으로 바뀐다.

그러니 내가 푸른 까마귀라 해도 무방하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 해도 무방하다.

그것은 본래 정해진 색이 없는데 우리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심지어는 눈으로 보지도 않고 먼저 마음에 정해 버린다.

! 까마귀를 검은색에 가두어 버리는 것도 그렇더라도,

까마귀를 가지고 천하의 모든 색을 가두어 버리는구나!

까마귀는 과연 검은색이로되, 이른바 푸르고 붉음이 색 가운데의 빛임을 누가 다시 알겠는가!(박지원)

 

정약전은 흑산도라는 이름이 주는 어둡고 처량한 느낌을 매우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玆山魚譜서문에서 흑산이라는 이름은 어둡고 처량하여 매우 두려운 느낌을 주었으므로

집안 사람들은 편지를 쓸 때 항상 흑산을 玆山이라고 쓰곤 했다.

과 같은 뜻이다고 밝히고 있다.

정약전이 검을 현이 겹쳐진 로 읽었는지 으로 읽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흑산도를 현주라고 불렀기 때문에

玆山현산으로 부를 수 있는 가능성, 타당성은 충분한 셈이다.(현산어보를 찾아서)

 

흔히 검은색은 부정적인 개념으로 읽기 쉽다.

그러나 박지원은 까마귀의 검은 빛을 통하여 인간 관념의 한계를 지적하였고,

정약전 역시 흑산도의 부정적 어감을 현산으로 불러

같은 검은빛이지만, 그 깊이를 더한 일이 있다.

 

이 시집에서 여러 차례 읽은 시가 '검은 창고'다.

 

   들판의 창고는 대체로 회색이다 녹색 창고만 해

도 들판과 어울리지 않기에 적재가 쉽지 않다 회색

창고라면 편하겠지만 내가 본 것은 검은 창고, 고산

족(族)의 다랑이논 옆에 있다 반추동물처럼 엎드렸

는데 귀도 눈도 없이 느리기만 하다 먹거리 쟁여놓

은 창고가 아니다 높이와 깊이가 필요한 고산협곡에

서 바람을 선택한 검은색이니까 바람은 쉬이 창고의

기별과 겹친다 내가 원했던 검은색이다 야크의 털이

검은 게 아니라 그 시선이 어둡다 이목구비가 없는

것들에게 검고 깜깜하거나 거무죽죽하며 거무스름

하면서 꺼뭇꺼뭇한 얼룩은 때로 몸이고 생각이다 또

한 검은색은 늙은 손바닥의 색이다 산을 넘어야 하

는 우편낭도 검은색이지만, 유서를 남기는 편지의

감정마저 검은색이다 밤의 결혼식을 보았다면 산과

저녁의 어름은 검은색 청혼을 먼저 지나왔겠다 입을

한껏 벌린 검은 짐승의 하품까지 모두 검은 창고에

보관된 유물이다(검은 창고, 전문)

 

이 검은색은 '깊다'

흔히 만나는 검은빛이지만, 삶과 죽음의 어름을 담당하는

그런 빛이다.

그 검은 빛은 슬프고 한맺힌 빛깔이라기보다는

웅숭깊은 사나이의 우물같은 눈동자를 응시하는 느낌이랄까.

 

내 관심사는 각 인칭들의 시들이 품고 있는 근원적인 욕망의 정체다.

1인칭의 시인이 나를 고백할 때, 그것의 배후에 있는 것은 '나는 이해받고(사랑받고) 싶다'라는 욕망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이해할(사랑할) 수 없는 괴물로 그릴 때에도 그렇다.

2인칭의 시인이 너를 탐구할 때 그가 원하는 것은 '너를 소유하고 싶다'라는 것이다.

너는 나만의 것이 아니지만 내가 인식한 대로의 너는 오직 나만의 너이기 때문이다.

3인칭의 시인이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것은 '세계를 바꾸고 싶다'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비참한 세계를 고발하거나 이상적 세계를 꿈꾸는 작업은 그 욕망의 앞뒷면이다.

1인칭의 시는 나르시시즘으로 흉해질 수 있고,

2인칭의 시는 대상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으며,

3인칭의 시가 긴장을 잃으면 보고서나 망상이 될 수 있으리라.

송재학의 시는

그의 욕망은 내면에 뭔가 중요한 것이 있어 그것을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하는(1인칭 시의) 욕망이 아니라,

내면이 비어있다고 느끼는 갈증때문에 거기에 무언가를 채우려는 욕망이다.

또 그의 욕망은 세계를 바꾸고 싶다는 (3인칭 시의) 욕망이 아니라,

이 세계의 깊이를 다 파악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즉, 그는 본질적으로 2인칭의 시인이고,

그의 시는 대부분 대상(너)에 대한 집요한 탐구의 결과물이다.(신형철의 해설 중)

 

 

<내면의 비어있음의 갈증>을 나타내는,

또 <이 세계의 깊이를 다 파악하고 싶음>을 표상하는 빛으로

그는 <검은색>을 들이민 것이 아닐까?

 

   자기만의 해안선을 가진 사람이 있다 자기만의 고

독이다 해안선이 챙겨두었던 고독과 고독을 대신하

는 리아스식 해안이 뒤엉켰다 잎이 넓은 후박나무

서랍에서 뒹굴던 고독이다 해안의 오래된 비석을 읽

을 때 더듬더듬 끊어지면서도 따라가는 건 돌과 글

의 고독이 닮았기 때문이다 지구의 자전을 따라 해

안선을 걷다가 알기 힘든 옛 글자가 나올 때쯤, 矜恤

(긍휼)이 있고 빈집이 있다 납작한 지붕이 있다면 고

독이 닥딱해진 글자를 삼킨 것이다 먼바다에서 금방

떠내려온 섬이 그 집 앞에 있다(해안선, 전문)

 

그는 세상에 가타부타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신형철의 용어로 3인칭의 시점으로 쓰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아픔을 과장되이 부르짖지도 않는다.

다시 신형철로 1인칭의 시인이 아니다.

 

곧 그는 텅 빈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그의 바람같은 텅 빈 눈에는

세계가 평가되지 않은 상태로 담긴다.

그것이 '자기만의 해안선'일지 모르겠다.

 

거기 알기 힘든 옛글자도 있고

납작하게 불쌍한 빈집이 있고,

먼바다에서 떠내려온 섬처럼,

고독한 사람이 있다.

 

그 고독을,

나의 고독이라고도 하지 않고,

세상 탓으로 고독하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떠내려온 섬,

이 그 집 앞(그 집은 납작한 지붕의 긍휼이 있는 집이다.)에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나는 이 시인의 시가 마음에 착착 와서 감기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나 구름처럼, 눈길에 지나갔고, 머리를 통과했다.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이 그저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좋았다.

 

그게 검은빛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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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상처 - 김훈 기행산문집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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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팔레트 위에서 없었던 색을 빚어내듯이

나는 이미지와 사유가 서로 스며서

태어나는 새로운 언어를 도모하였다.

몸의 호흡과 글의 리듬이 서로 엉기고,

외계의 사물이 내면의 언어에 실려서 빚어지는 새로운 풍경을 나는 그리고 싶었다.

그 모색은 완성이 아니라 흔적으로 여기에 남아 있다.(개정판을 내며 중)

 

김훈의 초기 수필들이다.

여행 다니면서 남긴 글들도 있고,

시론의 형식을 띤 글들도 있다.

이제는 다양한 소설들을 통하여,

'칼의 노래'도 '현의 노래'도 익숙하고,

'젊은 날의 숲'속에서 헤매이던 시간도,

'남한산성'의 굴욕적 시간도

'흑산'의 검은 빛이 '현산'이 되기까지 농익은 작가가 되었지만,

초기의 글들은 그의 직선적인 사변이 잘 담겨 있다.

 

그의 소설들과 '자전거 기행'을 모두 품고 있는 잠재태가 이 책이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하필이면 묵어버린 논이나 밭의 가장자리,

경작할 수 없는 야산의 비탈처럼 버려진 자리만을 골라서 서식한다.

가을이 깊어지고, 습기가 빠져가는 땅이 메말라지면

그 척박한 자리에서 그것들의 삶은 한 해의 마지막 햇볕 아래서 바래어진다.

바래어지는 삶의 고통을 일끌고 그것들은 가벼움을 완성해 낸다.

그것들의 목숨 안에서 무게의 총화가 가벼움이고,

습기의 총화가 메마름이다.

초겨울의 마른 들에서 그것들은 헛것의 투명함과 헛것의 가벼움으로 바람에 흔들린다.

그것들은 빛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바람이 부는 쪽으로, 숙일 수 있는 머리를 끝까지 숙이지만,

그것들의 뿌리는 바람에 불려가지 않는다.

그것들은 바람에 시달리면서, 바래고 사위면서,

그 시달림 속으로 풍화되면서, 생사의 먼지로 퍼지고 번진다.(166)

 

'억새 우거진 보살의 나라'에서 묘사한 억새다.

이 억새를 읽노라니, 이제 나이가 든 김훈의 모습이기도 하고,

이 땅의 민중이기도 하다.

마치 김수영의 '풀'을 확장하여 읽는 느낌인데,

그것이 '운주사'와 어울렸으니, 말이 필요없다.

합장...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없었습니다(서시, 이성복)

 

이성복의 '남해 금산'에 맞대어, 서시를 읊는다.

마지막에 실린 시는 이렇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강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남해 금산, 전문)

 

'한 여자'가 '그 여자'가 되는 과정,

화자가 돌 속의 여자를 만나러 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그 여자 떠나간 자리에,

나 혼자 남은 시.

그를 둘러싼, 푸른 하늘가,

그와 함께한 푸른 바닷물...

 

이것들은 남해 금산에 오른 사람이면 아~ 하고 느낄 문장이다.

'한 여자'와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도 멋지다.

 

한 여자는 살아있는 구체적인 여자로 떠오르기 이전의, 여자의 고통스런 잠재태이다.

'한 여자'는 모든 여자일 수 있지만,

 '그 여자'는 다시 태어나서우리에게 안겨야 한다.(86)

 

한 여자와 그 여자로 두 페이지를 채운 김훈도 굉장하다.

 

저녁 무렵의 바다를 한나절씩 들여다보는 일뿐이었다.

시간과 교접하는 바다는 수많은 색깔로 다만 흘러가고 흘러올 뿐이어서

내 가엾은 친구는

올 여름 내내 기름 물감을 배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택은 곧 배반일 것이었다.

유화를 버리고 수묵화를 해야 할까보다고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름으로 그리기를 버리고 물에 찍어서 그려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아, 그것은 물이냐 기름이냐의 문제가 아닐세."

더위와 매미소리가 한도 없이 남아 있는 여름의 한복판이었다.(73)

 

바다를 그리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멈추지 않는 시간을 잡는 일만큼이나.

그래서, 그것은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삶도 그렇다.

너희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이' 균형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현종'에 주목한다.

 

잠과 각성 사이의 표정처럼

무서운 건 없다

그 모습처럼

참담한 건 없다

모든 '사이'는 무섭다

모든 '사이'는 참담하다(모든 사이는 무섭다, 전문)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 전문)

 

이런 '사이'는 人間의 '사이 간'이기도 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균형은 늘 깨어지기 쉽다.

쨍그랑, 유리가 깨어지듯,

금세 금이 가고 갈라진다.

 

물이냐, 기름이냐의 문제가 아닌 곳.

너희와 우리의 사이가 문제인 곳.

 

그것이 인간 세상인 모양이다.

 

김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초기 그의 문체를 버석거리며 쓸어 보듯 느낄 수 있는 글들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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