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이 아픈 날 문학과지성 시인선 476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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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오페라에 비유한다면

오늘날의 시는 멋진 아리아가 될 수 없다.

시인이 아직도 무엇인가 읊조린다면

그것은 레시터티브에 불과하다.

하지만 노래와 연기를 연결시키며 오페라를 끌고 가는 레시터티브의 역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판소리에서 아니리르 빼놓을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창으로만 판소리가 될 수 없고,

아리아만 가지고 오페라를 꾸밀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주어진 위치에서 시가 예술로서의 필연적 존재 이유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품위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뒤표지, 시인의 말)

 

멋진 시론이다.

시가 독재자를 벌벌떨게 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대학생들이 허리춤에 끼고 다니며 탐독하던 시대도 지나갔다.

이제 시집은 가난한 시인이

탁발승에게나 건네줄 법한 것으로 추락했다.

 

이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 아래 그럼

말로 절을 짓는

시인이 살고 있단 말인가(고금, 부분)

 

종심소욕불유구... 마음에 따라 하고자 하는대로 해도, 절도를 넘지 않더라는 공자의 말에 따라,

70을 종심으로 부르는데,

이제 일흔을 넘은 그의 글들은 해설을 쓴 이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자꾸 죽음을 기웃거린다.

예측할 수 없던 그때의 앞날이

어느새 슬픈 옛날로 굳어버린 오늘

시간의 긴 흔적 간곳없고

온 세상이 조여드는 듯

마음은 왜 이렇게 답답한지(지나간 앞날, 부분)

 

동숭동과 이화동을 두리번거리던,

그의 젊은 날을 돌아보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나이를 먹어 이제 지나간 앞날이 되었다.

 

김치수 선생의 영전에서 웅얼거린 시

 

우리도 곧 갈 터이니

기다려주게 그대 가 있는 곳

어디인지 아직도 모르지만(그대 가 있는 곳, 부분)

 

지독한 아픔도 잠깐

몸이 어딘가 차갑게 굳어졌다

눈앞의 바깥 세상이 덜컥 닫히고

물속에 가라앉은 노란 조약돌이 보였다

조상의 잔해와 같은 색깔

처음 보는 세상의 안쪽

여기까지 오기에 얼마나 걸렸나(여기까지, 부분)

 

삶의 끄트머리가 가까워오는 지점에서 쓴 시들은

날카롭고 서늘하기보다 다소 안온하다.

 

외지에서 포도주를 너무 마셨나

아니면 그 검은 시간이 나에게도

성큼 다가온 것일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다가오는 시간, 부분)

 

비행기에서 잠시 실신한 뒤 쓴 시와

수술실에서 마취당한 기분을 쓴 시들이다.

 

세상이 온통 길인 것 같지만

걸어 다니기 힘든 나라

진실로 사람이 가야할 길은

길 없는 길 아닌가(길 없는 길, 부분)

 

몽골에서 느낀 이야기다.

삶을 살아보면,

주어진 길을 따라 걸어온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캄캄한 밤과

안갯속을 헤치고 온,

돌아보면, 길이 아니었던 곳을 길삼아 걸어온 것이다.

 

밀려왔다 물러가는 파도 앞에서

통곡하는 수밖에 없는가

*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지금까지 '그렇다' 아닌가.(바다의 통곡, 부분)

 

세월호 앞에서

짐승만도 못한 어른들을 돌아보는

치욕이 통곡으로 남아있는 시도 담겨 있다.

 

나이가 들면 오른손만 아프겠는가.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울음이 타는 가을강처럼,

속이 새까맣게 타는 일이 나이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김광규의 젊은 시들이 발산하던 풋풋함과는 다르지만,

삶을 응시하는 눈빛이 훨씬 누그러졌고,

힘은 쫙 빠졌지만,

돌아보는 힘이 느껴지는 시편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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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시선 394
송경동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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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라는 소설에 이어서,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라는 시집이다.

그것도 무려 송경동이다.

 

당연한 문제 제기도 구속 사유가 되는 시대.

자국의 대통령이 외면한 유족을 교황이나 와서 위로하는 시대.

 

이 시집은

서정시 모음이 아니다.

거리에서 쓰여진 가두시와

숫자로는 '다수'이지만 권리에서는 '소수'여서 슬픈 사람들의

슬픈 노래가 묶여 있다.

 

부디 내가 더 많은 소환장과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의 주인이 되기를

어떤 위대한 시보다

더 넓고 큰 죄 짓기를 마다하지 않기를(시인과 죄수, 부분)

 

상 받는 자리는

제 자리가 아닌 듯 종일 부끄럽다가

벌 받는 자리는 혼자여도

한없이 뿌듯하고 떳떳하다는 시인의 말은,

이 시집의 권두시로 놓을 만 하다.

 

사람들의 생목숨이 수장당했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돌려 말하지 마라

이 구조 전체가 단죄받아야 한다

이 세월호의 항로를 바꾸어야 한다

이 자본의 항로를 바꾸어야 한다(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부분)

 

용산과 쌍차 이후로 이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강정과 밀양을 거치면서 괴물의 거친 입은 닥치는대로 먹어치웠다.

세월호는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일 뿐인 것 같다.

자본의 항로는 시시각각 바뀌고 있다.

더 악착같이

더 쏜살같이

더 끝간데 까지...

 

결국 문장은 몸이고,

문학은 사는 일이라는 것을 이 시집에서는 토로한다.

 

그렇게 날마다 세상의 빈칸 하나씩을 야무지게 쓰고 들어와

밤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자는 옆방 사내는

 

얼마나 단단한 문장인지

얼마나 싱싱하고 유려한 문체인지(문장강화, 부분)

 

글자로 쓰는 일은 부질없다.

힘이 없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살아가며 배우지 말아야 할 말 중 하나는 '절망'일 것이다.(시인의 말)

 

하지 말자...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들은,

곧 현실이 그러하다는 말이다.

가장 좌절스러운 지점의 최첨단에 선 송경동이,

그래도 절망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놓는 시집이다.

 

지상파가 미친 정부의 나팔수가 되어버린 지점에서,

약자들, 숫자는 99%이지만 '소수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좌절할 힘조차 놓아버리는 시점에서,

그는 꾹꾹 눌러 썼다.

절망하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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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3-02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일전에 주문했었습니다...
몸으로 시를 쓰시는 분....

글샘 2016-03-03 13:40   좋아요 1 | URL
그렇죠. 몸으로 시를 쓰는 송경동입니다.
 
시의 정거장 - 장석남의 시라고 하는 징검돌 난다詩방 4
장석남 지음 / 난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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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이 시를 읽고 메모한 것을 엮은 책이다.

시는(문학은) 삶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데, 삶은 짧아서... 시를 읽는 일 역시 잠시 머무는 정거장처럼 스치는 느낌이다.

 

지금 세계는 심판이 사라진 지 오래다.

오프사이드 반칙을 하며 쳐들어오는 공을 그래도 골키퍼는 막아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고독하다.

시인은 모든 강자들이 최후에는 가장 무서워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고독은 피투성이지만 감미롭다.

그 골키퍼의, 시인의 손이 유심의 손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시인의 승리는 고독과 긴장과 평화와 불안이다.

오늘도 나는 신발끈을 조이고

골대 앞으로 가는 자의 그림자를 오래 바라본다.

오늘도 - 제로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서문)

 

골키퍼와 투수는 제로를 지키는 것이 최선인 사람들이다.

점수를 낼 수 없다. 시인이 그러하단다.

그러나, 그 고독 속에서는 긴장과 평화를 감싸안아야 하는 날이 서있다.

 

붉고 실한 열매 꿈꾼 적이 있다

스스로의 무제 못 이겨 떨어지는,

가을의 낙과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성급한 주인은

열매의 열망 기다려주지 않는다

다 익기도 전에 가지를 떠나는

저 불그스레한 얼굴의 열매들

그들이 그렇게 떠나고 가지들은 갑자기

늙어간다 젊고 싱싱한 늦가을 햇살

과원의 슬레이트 지붕이나 달구고 있다(이재무, 과수원)

 

다 익고 나서, 다 익히고 나서 나아가는 것, 일러 과감하다고 한다.

늦된 것만 겨우 서리 아래 여문다. 장하다.(28)

 

 

면도기가 충전이 다 되었다고 녹색등을 깜박이는 동안,

반딧불이가 난생 처음 하늘을 차고 올라 수줍은 후미등을 켜고 구애하는 동안,

대학병원에서 죽어가는 환자가 원망인지 사랑인지 모를 눈빛을 가족에게 지어보이고 있는 동안,

오늘도 세계의 어딘가에선 장착된 토마호크 미사일이 날고

사소한 약속을 지키러 나온 맨해튼 42번가의 사내는

째깍거리는 시계를 자주 보며 공허한 두 손에 피곤한

두 얼굴을 묻는다(동안, 이시영)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시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

정치가는 무엇을 할 것이며 부자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57)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이성부, 부분)

 

봄은 도덕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란 것,

그보다 더 크게, 피투성이 흙투성이로 온다는 것을

이 시는 지난 엄혹한 시대에 보여주었다.(82)

 

은일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을 피하여 숨는다는 말이다.

어디도 세상 아닌 곳은 없으므로 세상을 피할 수는 없다.

은자란 세속적 가치에서 놓여난 자라는 뜻일 것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는 절대 꽃 피고 지는 것 볼 수 없다.

꽃은 피어도 아무에게나 꽃이 아니다.

산에는 꽃이 핀다는 말이 그래서 큰말이다.(소월의 산유화, 94)

 

작은 돌 하나로

잠든 그의 수면을 짐작해보려 한 적이 있다

그는 주름치마처럼 구겨졌으나

금세 제 표정을 다림질했다

팔매질 한 번에

수십 번 나이테가 그려졌으니

그에게도 여러 세상이 지나갔던 거다(수면, 권혁웅)

 

나 자신도 스스로 파문이다.

그러나 그 파문의 근원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세상에 그렇게 내던져졌다.

'당신'은 내 눈동자에서 수없는 파문을 일으키다 사라졌다.

나 또한 그랬으리.

파문의 가장자리, 그게 눈물이다.

사랑 하나에 세상 한 번!

여러 세상이 지나간다. 눈물의 시다.(96)

 

 

시인은 여전히 컹컹거린다

그는 시간의 가시뼈를 잘못 삼켰다

 

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의 뼈를

그러나 시인은 삼켰고

그리고 잘못 삼켰다

 

이 피곤한 컹컹거림을 멈추게 해 다오

이 대열에서 벗어나게 해 다오

 

내 심장에서 고요히,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는 것을

나는 누워

비디오로 보고 싶다

 

그리고 폐광처럼 깊은 잠을

꾸고 싶다(시인, 최승자)

 

어떠한 역사인가. 소화되지 않고 뱉어낼 수도 없는 질식의 시대가 있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내준 폐광이고 싶다는 사랑의 눈금은 얼마나 빛나는가.

시인의 자리를 이토록 치열하게 보여준 시를 나는 보지 못했다.(100)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아지랑이, 조오현)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다.

거짓은 심이 세다. 아주 세다.

세상 모든 명령이 몸뚱이는 부를 수 있을 지 모르나 마음은 얻지 못하는 아지랑이며,

대리석에 꽝꽝 새겨넣은 우스운 묘비명들도 모두 아지랑이다.

그 소식이다.(105)

 

비바람에 휘청거린다.

매우 거세이다.

간혹 보이던

논두락 매던 사람이 멀다.

 

산마루에 우산

받고 지나가는 사람이

느리다.

 

무엇인가 모르게

평화를 가져다 준다.

 

머지 않아 원두막이

보이게 되었다.(원두막, 김종삼)

 

좀 과장이지만,

위의 마티에르 기법('질감')의 산수화의 주인은 어딜 가시었을까(116)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지나치지 않음을 생각한다.
아침 신문도 우울했다.
지나친 속력과
지나친 욕심과
지나친 신념을 바라보며
우울한 아침.
한잔의 차는
지나치지 않음을 생각케한다.
손바닥 그득히 전해오는
지나치지 않은 찻잔이 온기
가까이 다가가야 맡을 수 있는
향기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지나친 세상의 어지러움을 끓여
차 한 잔을 마시며
탁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세상의 빛깔과
어디 한 군데도 모나지 않은
세상살이의 맛을 생각한다.(지나치지 않음에 대하여, 박상천)

대교약졸이라고 했던가,

찻잔의 온기같은 이 담담한 시의 풍경과 진술 속에서 평범함의 위안과 휴식을 구한다.(131)

 

 

 

문을 닫은 지 오랜 상점 본다/ 자정 지나 인적 뜸할 때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인형/ 한때는 옷을 걸치고 있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불현듯 귀기(鬼氣)가 서려오고/ 등에 서늘함이 밀려오는 순간/ 이곳을 처음 열 때의 여자를 기억한다/ 창을 닦고 물을 뿌리고 있었다/ 옷을 걸개에 거느라 허리춤이 드러나 있었다/ 아이도 있었고 커피 잔도 있었다/ 작은 이면도로 작은 생의 고샅길/ 오토바이 한 대 지나가며/ 배기가스를 뿜어대는 유리문 밖/ 어느 먼 기억들이 사는 집이 그럴 것이다/ 어느 일생도 그럴 것이다(폐점, 박주택)

 

 

이면도로의 인생들을 알고 있다. 경사와 매연이 심한 가족사를 모두 처분하고 싶은 인생들을 알고 있다. 불 꺼진 인생들을 알고 있다. 그들의 얼굴의 나라의 얼굴인 줄도 알고 있다. 상점에 환한 불이 켜지는 나라를 꿈꾼다.(139)

 

어딘가서 보았던 시들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 시들에서 새로운 것들을 줍는다.

 

시집을 좀 더 사야겠다.

 

그러면, 얼마간 더 착해질 듯도 싶다.

 

나도 환한 불이 켜지는 그런 나라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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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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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젊은 시절은 민중에 대한 따스한 눈길이 돋보이는 멋진 작가였다.

그의 객지, 삼포가는 길 등이 그러하고, 장편 장길산이 그렇다.

그렇지만 그의 최근작들은 영 힘이 없다.

이 책 역시 그러하다.

 

그의 소설들이 머무는 지점은 늘 과거이며,

현재의 그는 과거의 그 자리를 벗어나려 애쓴 결과이며,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 사이에 기억하고 싶은 추억보다는,

끊어버리고 싶은 회한으로 가득한 인생이라는 인식이 이 책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지난 정권 무렵 그가 보여준 행보는

변절 운운하는 욕을 먹도록 했었는데,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삶의 나침반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과거의 그의 세계를 보는 관점 - 민중에 대한 막연한 신뢰 같은 것을 잃어버린 지금의 관점이 이 소설에 오롯이 드러난다.

 

젊은 세대의 깊은 수렁 같은 현실을 만들고자 과거의 걸음을 걸어온 것은 분명 아니거늘,

분명 우리 세대의 책임 또한 없는 것이 아님을 아는 어른의 목소리는 아니다.

그저, '국제 시장'류의 변명이나 회한을 털어 놓는 정도의 푸념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 흐리멍텅한 민주당을 뛰쳐나온 부산의 조경태가 새누리당에 기어들어갔다.

이십 년도 더 전에 김영삼이 한 일을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사고 속에는 '남자가 죽기 전에 공명을 떨쳐야 한다'는 조선 사대부의 사고방식이 들어있다.

 

세상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

동네의 청소년들은 시간만 지나면 회사원이 되고 아이들을 기르는 세상이 아니다.

덕선이네 동네처럼 서울대도 쑥쑥 들어가고 시험만 치면 고시가 되고,

의사도 되고 스튜어디스도 되는 그런 시대는 벌써 지나가버린 세상인데,

아직도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는 전근대적 사고를 버리지 못한다.

그런 눈으로 현실을 파악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작품이 되기 어렵다.

과거를 싹뚝 잘라버려야 한다.

 

젊었을 때에는 그렇게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진 않았다.

잘못된 것에 저항하는 이들을 이해하면서도 참아야 한다고 다짐하던 자제력을 통하여 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은 일종의 습관적인 체념이 되었고,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차갑게 자신과 주의를 바라보는 습성이 생겨났다.

그것을 성숙한 태도라고 여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에서 한숨 돌리게 되었던 80년대를 거치면서

이 좌절과 체념은 일상이 되었고, 작은 상처에는 굳은살이 박여버렸다.

발가락의 티눈이 계속 불편하다면 어떻게든 뽑아내야 했는데,

이제는 몸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112)

 

이것이 그의 회상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살아 있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을 걸고 젊은이들을 위해 역작을 써줄 수 있는 인물이라면 좋겠다.

그보다 훨씬 아픔을 겪은 후에도 불편한 티눈의 치료에 노력하고 있는

성남시장 이재명처럼 말이다.

 

알려줘야지... 우리는 끝까지 싸우고 있다고('암살' 중, 안옥윤(전지현))

내가 독립이 될줄 알았냐~!독립이 될줄 알았다면 안그랬겠지('암살' 중, 염석진(이정재))

 

세상을 사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비굴하게 굴복하는 삶과 다른 하나는 무릎 꿇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삶.

 

대학 시절 잘 부르던 찬송가 한 구절...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자 힘 주시고 강한자 바르게

추한자 정케 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아래 압박 있는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 주시어 정의가 사나니.(515장)

 

믿음이 없으면 흔들리기 쉽다.

흔들리면 자신의 삶을 방어하게 된다.

 

건축이란 기억을 부수는 게 아니라 그 기억을 밑그림으로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재조직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같은 꿈을 이루어내는 일에 이미 많이 실패해버렸습니다.(97)

 

바르게 살려던 선배 건축가의 마지막 모임.

바르게 살려던 사람을 평하는 한 마디는 싸늘하다.

 

아, 그거 취소된 프로젝트였어.

돈 안 되는 일이 다 그렇지 뭐.(98)

 

돈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의미가 없는 삶이라는 사고.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사람들은 곧, 돈이 되는 일을 이루었다는 것 뿐이다.

이 땅에서 '성취'의 유일한 기준은 '돈'인 셈이다.

그가 양지에 섰을 때를 회고하는 듯한 구절도 있다.

 

양지에 서는 일은 간단하다.

권력을 잡은 축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살피고

똑같은 말이 아니라 유사한 단어를 구사해서 원래 자기도 같은 주장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알린다.

좌절된다 해도 아주 외곽으로 밀리지는 않는데,

순수하고 선량한 의도일 뿐 주류 사회에 해가 되는 사람은 아니라는 전제를 확실히 해두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시시껄렁하고 속물적이기는 하지만,

중산층들은 이를 건전한 식견이라고 굳게 믿는다.(93)

 

그래. 중산층.

사회에서 배웠고 가진 사람들을 중산층으로 일컫는다.

 

한국인의 중산층에 대한 조사에서 이렇게 '돈'만 언급했다는 유명한 기사가 있다.

 

△부채 없이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월급 500만원 이상 △2000cc급 중형 자동차 이상 △예금 1억원 이상 △해외여행 연 1회 이상

 

△외국어 하나 이상 가능하고 △스포츠를 하나 이상 즐기며 △악기를 다룰 줄 알고 △남들과 다른 맛의 요리를 만들 줄 알고 △‘공분’에 의연히 동참할 줄 알고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을 중산층의 기준으로 제시했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도 중산층은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 약자를 도우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고 △정기적으로 받아 보는 비평지가 있어야 한다(프랑스의 조르주 퐁피두 전 대통령, 1969년 공약집에 담았던 ‘삶의 질’에서)

 

세상은 아직도 흐르고 있다.

'인생'에 대한 해답은 늘 그러하다.

인생은 참으로 짧다.

어떻게 살든 참으로 덧없다.

그런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이 점점 나쁜 쪽으로 기울고 있다면,

나만 덧없이 살고 말거나, 자식을 안 남기면 그만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소설'이라면, 적어도 이런 세상을 굳건히 살아나갈 힘을 조금이라도 주려는 무언가를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사람과 세상은 믿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시간이 지난 뒤에 사람들의 욕망은 그런 가치들 가운데 남길 것만 조금 걸러내고 대부분을 자기 위주로 변형시키거나 폐기처분하고, 기억의 다락방에 처박는다.

건물은... 결국 돈과 권력이 결정한다.

그런 것들이 결정한 기억만 형상화되어 오래 남는다.(16)

 

물론 이 소설은 이 남자가 예전의 흐릿한 추억... 그 기억의 다락방에 처박힌 기억과 조우하면서 겪게 되는 당황스러움을 그리지만,

결정적으로 화자의 '돈과 권력'에 대한 신념에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해질 무렵, 황혼에... 이런 신념이나 중얼거리며 늙는 노년이라면, 참 부질없지 않을까?

그나마, 그 신념을 움켜쥐고 든든하게 떵떵거리며 사는 그림이라면 좀 나으련만,

노인이 된 그는 아내와 딸도 미국에 잃어버린 노인 미아가 되어버린다.

 

나는 길 한복판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196)

 

참 쓸쓸하고 추한 마무리다.

이런 것이 한국 노인들의 단면이라면 단면인 셈이어서 참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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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를 찾아라
배혜경 지음 / 수필세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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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는 여간내기가 아니다.

이름만큼 하는 짓도 발랄하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친구들보다 행동반경도 크다.

동서남북 재바르게 구석구석 들쑤시며 다닌다.

앵두는 신명나는 세상을 산다.

풍물가락에 맞추어 그려내는 곡선이 내겐 생의 마땅한 우회로로 보인다.

앵두의 초롱초롱한 눈은 세상의 어느 한 구석도 놓치지 않는다.

 

앵두는 진정한 웰빙족이다.

밤이 되면 아직 놀고 있는 친구들과 조용히 거리를 두고 홀로 잠을 청한다.

고독은 즐길 만한 값진 정서가 아닌가.

아침이면 친구들은 자고 있어도 언제 일어났는지 벌써 가벼운 운동을 하고 있다.

먹는 것에는 그리 매달리지 않는다.

소식으로 만족하고 경쾌하게 꼬리를 돌려 미끄러져 간다.

그래서인지 앵두는 친구들에 비해 몸집이 크게 불어나지 않고 건강하고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본능적인 욕구에 집착하지 않고 과욕하지 않기란 진정한 자유를 구가하는 비결이다.

자유롭지 않음은 아직 버리지 않은 게 많다는 말이다.(67)

 

앵두는 플래티라는 물고기 이름이다.

이 물고기와 작가는 남이 아니다.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는 글들로 가득한데,

오래 매만진 외할머니네 윤기나는 툇마루처럼 그이 글은 반들거린다.

 

험한 세상에 수필은 자칫 시평으로 번지기 쉽다.

그는 애써 세상에 대한 뉴스는 다루지 않는다.

앵두처럼 어항 속에서 발랄함을 누린다.

 

입 안에 물기가 번지며 눈이 열리고 엎드려 있던 감각들이 일렬종대로 일어선다.(44)

 

그의 말들은 반들거린다.

 

구하지 않으니 행복이라는 말도 없고

내치지 않으니 불행이라는 말도 없다.(무비 스님의 신심명 강의 중, 서문)

 

모든 것이 마음 먹기 나름이라는 강의와 달리,

그의 글에는 짠한 마음결이 그대로 묻어난다.

 

난 시장 이층집 옥상에서 바라본 놀보다 더 멋진 풍경은 본 적이 없어.(50)

 

이런 마음결을 채집할 줄 아는 사람이라니...

 

무릇 일은 느닷없이 일어나 휘몰아치듯 덮치곤 한다.(54)

 

이렇게 글을 시작할 줄 아는 솜씨는 굉장하다.

백일장에서 상깨나 탔을 솜씨다.

 

몸피를 키운 해가 제 목구멍을 힘겹게 넘어가고 있다.

세월을 먹는다는 것은 뜨거운 불덩이 하나 꿀꺽 삼키는 일.(126)

 

소설가 박상륭은 아름다움의 어원을 '앓음다움'에서 찾았다.

앓음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 애쓰는 상태를 말하고

괴로움과 고통을 견디고 인내하는 마음의 작용이다.(143)

 

나이의 몸피만큼이나 언어의 깊이도 폭넓어지는 느낌이다.

세상을 늘 똘방똘방 응시해야 하는 앵두같은 눈길이 느껴진다.

 

영화를 몇 번 보았을 듯 싶은 감상문이나,

문학 기행 후기도 수십 번 되썼을 근기가 느껴진다.

부럽다. 한편...

글솜씨와 함께, 그렇게 글에 홈빡 빠질 근기가 부럽다.

허나, 그런 건 부러워한다고 이르기 힘든 경지이니...

 

앞으로도 프레이야 님의 건필을 빈다.

 

 

 

고칠 곳 두어 군데...

이병주 문학관을 '젠 스타일'이라 했는데 한자를 '仙'으로 썼다.

일본어 '젠'은 禪을 일본어식으로 읽은 것이다.

해설에서 박상륭을 박상률로 잘못 쓴 것도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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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1-26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배혜경님 수필집 읽으면서 글 정말 우아하게 잘 쓰신다고 생각했는데, 글샘님이 바로 그걸 말씀해주시네요. 백일장에서 상깨나 탔을 솜씨, 라는 표현에 웃다가, 문득 부러워집니다.

글샘 2016-01-26 15:34   좋아요 0 | URL
남의 이름을 바꾸시다니. ㅋㅋ 맞아요. 참 잘 쓰시죠.

다락방 2016-01-26 15:39   좋아요 0 | URL
앗 ㅋㅋㅋㅋㅋ 말씀 안해주셨으면 잘못된 채로 계속 둘 뻔 했네요 ㅎㅎ 고맙습니다!

2016-01-22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6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