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토럴리아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도 힘들고 한국도 힘들고 중국도 힘들고 영국도 힘들고 일본도 힘들고… 안 힘든 곳이 없나보다. ‘목가적’인 이 테마파크는 거짓이지만 진짜이다. 열정적인 종교인인 ‘윙키’는 닐을 힘들게 하지만 본인은 모른다. 닐도 자신의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납량 특집보다 더 무서운 ‘죽은 이모가 돌아 온’ 이야기는 <시오크>다. 학교 폭력이 연상되는 ‘세상에서 퍼포의 끝’은 그냥 끝이다. 화려한 복수? 그런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발사의 불행’은 나이가 들어서도 독립하지 못했다는 거다. ’폭포‘에서 모스를 보니, 그 짧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사람의 머릿속이 얼마나 바쁘게 돌아갈 수 있는지 알게 됐다. 주마등이란 표현이 괜한 게 아니었다.

세상은 ’똥통‘이고, 더럽고 추악하다. 그런데 변비 환자에겐 어떻게 느껴질까… 여든 살 할머니가 브라만 하고 돌아다닌다는 장면에서 굳이 브라를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밤 여행자 1 밤 여행자 1
자오시즈 지음, 이현아 옮김 / 달다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에는 인종이나 나라를 초월하는 인연 혹은 사랑이 있다. 그리고 시간대를 초월하는 사랑도 있다.1930년에 지어진 699번지 아파트는 곡선형 빌딩으로 총 7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시 중심부에 있지만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조용했고 한 세기 동안 전쟁과 변화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아남았다.(p.31/433) 이 699번지 아파트는 기묘하지만 소중한 인연을 이어주는 곳이었다. 2015년에 쭝잉이 사는 곳이기도 하고, 1937년에 성칭랑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1937년 7월 11일, 밤 10시 성칭랑이 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현관 등이 꺼졌다. 2015년 7월 11일, 밤 10시 쭝잉이 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현관 등이 깜박거렸다. 한 세기 동안 변하지 않은 단 하나, 현관 등. 이 등은 1937년 상하이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던 성칭랑을 2015년의 상하이로 데려왔다. 37년 당시 일본은 만주에서 베이징으로 이동해 전쟁 중이었고, 상하이는 조계가 있는 지역조차 전쟁 위험이 감지되던 때였다. 성칭랑은 성씨 가문의 공장을 중국 내륙으로 옮기고자 노력했고, 한 번도 가문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곧은 성격과 책임감으로 일을 추진하던 중이었다. 여전히 가족들은 성칭랑을 믿지 못했고, 오로지 여동생인 성칭후이만 우호적이었다. 


2015년 7월 쭝잉은 의사였으나, 사고로 인해 더 이상 수술을 하지 못했기에 법의관이 되었다. 쭝잉의 부모님은 모두 신시제약의 임원이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 쭝잉의 어머니는 쭝잉의 생일에 사망했고, 2015년 현재 쭝잉의 이복동생과 신시제약의 임원인 싱쉐이(새어머니의 동생)가 터널에서 자동차 사고가 났다. 이 사건은 상하이를 흔들었고, 쭝잉의 사진이 신문에 날 정도였다. 신시제약과 선을 긋고 있던 그녀로서는 난감했으나, 이 사건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사건 중 하나였다. 


이야기는 1937년과 2015년을 교차하며 진행된다. 1937년 상하이 전투가 끔찍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2015년에는 쭝잉의 개인적 건강 문제와 집안 문제가 날실과 씨실이 얽힌 마냥 진행되고 있었다. 밤 10시, 시간을 여행하는 사람은 성칭랑이었고 그와 닿아 있는 사람이나 사물은 같이 시간을 이동했다. 덕분에 쭝잉은 수차례 1937년의 상하이를 방문했고, 성칭랑의 가족들을 만났다. 뜻하지 않게 성칭랑의 형 성칭샹의 다리 절단 수술에 관여했고, 모르는 이의 출산을 도왔으며, 엄마를 잃은 아이들을 맡기까지 했다. 그렇게 조용하지만 단호했던 그녀는 성칭랑의 세상에서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을 남겼다.


성칭랑 역시 자신의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해도 자신의 영역에서 모두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쭝잉에게 의지가 되어 주기도 하고, 자신이 위안을 받기도 했다. 터널 사고와 관련하여 쭝잉의 어머니 사건까지 성칭랑은 자신의 지식을 동원하여 선후관계 및 우선순위를 정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에 비하면 다른 사건들은 작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일본은 베이징에서 텐진을 거쳐 수도인 난징으로 가는 대신, 바다를 통해 바로 상하이를 거쳐 난징으로 가려고 했다. 일본은 국제연맹도 탈퇴했겠다, 상하이가 외국인 조계 지역임에도 국제 사회를 무시하고 폭격을 시도했고, 끝끝내 상하이를 함락한 뒤 난징으로 가 대학살을 감행했다. 그 석 달 가량의 기간이 성칭랑과 쭝잉의 시간이었다. 둘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서로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서로만의 비밀을 공유하며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주고 힘을 보태주고 서로 의지하게 되었으니, 그 아슬아슬한 감정 상태가 너무 위태로워 보였다. 한 발만 내딛으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쭝잉의 동료이자 친구인 쉐쉬안칭이 성칭랑을 의심하여 그를 푸둥 공항에 내려주게 된다. 그 날은 상하이 전투에서 황푸강 우안에 있는 적군을 위협하기 위해 중국 제8 집단군이 푸둥 수비에 나선지 이틀 뒤였다. 복숭아 맛이 나는 입맞춤 뒤 헤어진 두 사람은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쭝 선생 시대의 아파트는 내부가 거의 다 바뀌었고, 이 현관 등 하나만 남아 있더군요."

성칭랑이 한 손으로 신문과 우유병을 든 채로 현관 등을 보면서 말했다.

"저 등이 나의 길을 비추고 쭝 선생의 길도 비춰주니 귀한 인연이네요."

성칭랑이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74/433) - P74

거리 끝에서 서서히 해가 밝아오는 모습은 백 년을 이어온 이곳의 풍경이었다.(30/433) - P30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3-08-22 0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건 좋게 끝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1937년은 그리 좋은 때가 아니었네요 다른 시대에 갔을 때 사람을 도와야 할지 돕지 않아야 할지... 아무것도 못한다면 모를까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할 것 같네요


희선

꼬마요정 2023-08-22 10:00   좋아요 1 | URL
37년은 우리나라도 중국도 다 안 좋은 때였네요. 다른 시대로 가면 심지어 과거로 가게 되면 행동이 조심스러워야할 것 같아요. 그래도 말씀처럼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할 것 같아요.

바람돌이 2023-08-22 0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와 다르게 매우 스펙터클한 내용이네요.

꼬마요정 2023-08-22 10:01   좋아요 0 | URL
뭔가 잔잔하고 이성적인 느낌인데 내용은 전쟁에, 음모에… 재밌습니다. ㅎㅎㅎ
 
다섯 번째 감각
김보영 지음 / 아작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낯익지만 낯선 느낌, 분명 내가 아는 세상인 것 같지만 다른 규칙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분명 지구에서는 중력이 아래에 있기에 '내려가라'는 땅 밑이다. 하지만 <땅 밑에>는 '내려가라'가 하늘을 가리키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밑이 위가 되는 것은 알지 못하겠다. 그래서 처음에는 지구에 커다란 격변이 생겨 물리법칙이 바뀐 것일까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아무리해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인걸까? 어차피 상상 속 세상이라면, 이 곳이 블랙홀 안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지구가 블랙홀 안에 존재하게 되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지구는 지구가 아닐지도 모른다. 해와 달이 없는 지구라니...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역시 놀라운 이야기였다. 지구로부터 온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알지 못하는 별의 존재들이라니. 이 곳은 밤이 없다. 하늘은 늘 빛나고 있어서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는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밤이 없기에,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 기면증이라 불리는, 하루 중 의식을 잃는 시간을 가지는 사람들을 병에 걸린 사람이라 여기는 사람들... 어쩌면 우리는 지구에서 빛과 어둠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축복 받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두워지면 둥근 달이 은은하게 빛을 뿜어내다가 수줍게 작아지면, 별들이 반짝이고 인간들은 그런 별들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거나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그리고 꿈을 꾼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촉각의 경험>과 <다섯 번째 감각>에서 느낄 수 있었다. <촉각의 경험> 속 투자자인 유시헌의 유전자로 클론을 만들었고, 유시헌은 그 클론과 공명하길 원했다. 배양액 속에서 단 한 번도 깨어난 적 없는 클론의 꿈을 보고 싶다고... 클론은 영양 공급과 뇌파 측정을 위해 관들과 연결되어 있으나 어떤 경험도 없기에 꿈을 꾸지 않는다고 연구자들을 말했다. 하지만, 인간은 실로 대단한 존재였다. 배양액 속에서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었다. 그리고 유지헌과의 공명은 일방적이지 않았으며, 삶이란 경험들로 채워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다섯 번째 감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오감이라 부르는 감각이 있다. 시각,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이 다섯 가지 중 청각이 없다면? 소리를 내지만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 소리가 뜻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이야기는 '소리'를 알게 된 이들의 이야기이다. '소리'를 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들이 정상인이고, '소리'를 내거나 듣는 이들이 비정상인 사회에서 '소리', 더 나아가 '노래'를 지키는 이들의 이야기.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란 무엇인지,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우수한 유전자> 역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문명 간의 이야기이다. 키바와 스카이돔. 스카이돔이 문명 사회라고 생각하겠지만, 교차하는 서신과 대화를 보면 어느 쪽이 더 인간답고 수준 높은 사회인지 헷갈린다. 인간성을 잃고 물질로 판단하는 세상에서 자연과 소통하는 세상에 그 물질로 은혜를 베푼다고 여기는 건, 어쩌면 배고픈 소크라테스에게 배부른 돼지가 꿀꿀거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건지도.


<마지막 늑대>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입장에서 많이 흥미롭게 읽었다. 용이 인간을 반려동물로 삼아 키운다면? 그리고 바깥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은 자유로운 인간이 있다면? 광화문을 지나 어딘가로 가다보면 마지막 늑대가 산다고 했다. 집을 탈출한 반려인간은 그 늑대를 찾아 모험을 떠난다. 용은 집 나간 반려인간을 찾는데, 예전에 내가 우리 통통이나 누롱이를 찾을 때처럼 절박해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마 '인간'이라서일까. 하지만 용의 입장에서는 집에서 안락하게 살던 반려동물이 집을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것을 잘 알텐데... 길들여짐이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과연 무엇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콩을 원하는 건 된장이 맛있기 때문이 아닌가.


<스크립터>는 강렬한 이야기이다. 게임 속 세상이 현실인가 아닌가, 게임 속 세상의 유저는 NPC인가 바깥 세상 속 사람이 접속한 존재인가. 가상과 현실의 구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 때 인간이었다가 캐릭터로 남아버린 것일까. 누군가 짜 놓은 대본을 상황별로 읊기만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현실세계의 인간 역시 운명이나 숙명에 매여있는 그저 꼭두각시나 봇일 뿐인가. 진짜 인간인 '나'를 지우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가상의 존재는 정말 가상일 뿐인걸까.


<거울애>는 슬픈 이야기였다. 감정을 뇌가 읽지 못하여 내 감정이 어떤지 알지 못하는 태호와 모든 감정을 받아들이는 극공감러인 소희. 상대의 감정과 나의 감정을 구분하지 못하고 걸러내지 못한 채 받아들여 자신화 하는 소희는 '심안(心眼)'이라 불렸다. 마음을 본다지만, 사실 마음을 느끼고 내 감정으로 출력한다는 것이니까 태호와 소희는 서로 잘 어울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딸을 노리개 삼는 파렴치한이 있는가하면, 남이지만 진심으로 위해주는 사람이 있다. 사랑과 상실을 몰랐던 태호는 소희를 통해 많은 감정을 알게 되고 드디어 그 '미소'를 이해하게 된다.


<노인과 소년>은 깨달음의 이야기이다. 결국 깨달은 자는 어느 곳, 어느 시간에나 있을 수 있는 것이지. 마음을 따라 사는 것은 쉽지 않다. 그 마음 자체가 어떠한 것인지, 무엇을 원하는 건지 정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그리하여 그 마음에 진실하고 충실하게 살았다면 그 삶은 편안하고 행복하지 않았을까. 세상의 모든 부와 권력, 사랑을 다 가지고서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몸에 걸친 옷 한 벌이 전부일지라도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니까. 어느 자리, 어느 시간에 있어도 잔잔한 강물과 같다면 얼마나 평안할까. 때론 넘치고 때론 말라붙어도 그저 그러한 것으로 말이다.


마지막 이야기는 <몽중몽>이다.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꿈 안이나 블랙홀 안이나 무엇이든 가능하지 않나. 무궁무진한 가능성 속에서 빅뱅을 경험하고 모든 시간대와 모든 생명체를 경험하는 것은 꿈이기에 가능할까. 영원히 지나가버린 과거와 깨어날 수 없는 꿈과 같은 현재와 결코 만나지 못할 미래를 딛고, 해라 불러서 해라고 하고 달이라 불러서 달이라 하고, 순간을 영원처럼 영원을 순간처럼 그렇게 모든 것을 기억하는 그 존재는 여몽(如夢)이다. 내가 꾸는 꿈이 내가 꾸는 것인지 나비가 꾸는 것인지, 하룻밤 꿈 속에 일생이 들어있는 그런 이야기. 과거로 갈 수 있다면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 중에 한 명이 장자다. 물론 그의 말을 단 하나라도 알아들을 수 없겠지만. 하긴, 장자는 자신의 말을 알까... 



"인공지능이 아직 제대로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에, 어떤 언어학자가 3만 문장 정도로 사람처럼 대화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었죠. 모든 인공지능 학자들이 비웃었어요. 인간의 대화는 무궁무진하며, 그 변화무쌍함이 우주와 같이 방대하니 결코 그리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요. 하지만 그는 실제로 그런 것을 만들어내었고, 복잡한 다른 인공지능을 제치고 상을 휩쓸었죠. 인공지능 학자들은 매번 착각해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을 만들려면 ‘실제로‘ 사람처럼 생각하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기계가 실제로 생각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아요. 필요한 것은 얼마나 세련되게 속이는가, 얼마나 살아 있는 대사를 읊는가, 얼마나 진짜 같은표정을 짓는가,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가."
"・・・・・・." - P302

"기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오랜 옛날부터 문학가와 배우들은 대사 몇 마디로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인물을 만들 수 있었죠. 어떤 문학가와 배우들은 할 수 없었고요. 화가들은 단 한 장의 그림만으로도 살아서 걸어 나올 듯한 인물을 그릴 수 있었죠. 어떤 화가들은 할 수 없었고요. 어떤 의미에선・・・・・・ 기술의 영역이 아니라 예술과 문학의 영역이라고나 할까요."
(스크립터) - P302

"사람의 대화는 상호작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언제나 일방적이죠 사람의 상상력은 소통이 없는 순간에도 소통을 상상하고논리가 없는 상황에도 논리를 부여하거든요. 선생님처럼 전혀 듣지 않는 사람에게도 지금 저는 혼자 떠들고 있잖아요."
사냥꾼은 발을 멈췄다. 천사도 발을 멈췄다. 사냥꾼의 눈에 깊은 슬픔이 떨어졌다. 그의 눈에 잠긴 슬픔이 너무 짙어 천사는 더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순간 천사는 어떤 위대한 예술가가 그런 표정을 만들어 그에게 주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그 화려한 나무를 만든 사람과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서 외모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거짓의 가능성을 품고 있지 않은가.
"네가 보고 싶은 대로 보일 뿐이야." - P303

- 마음이란 드러나기 마련이야.
연정은 그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눈으로는 생각하는 것을 다 쏟아부으면서, 입만 열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해.
책 속에는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첫장을 펼쳐볼 생각도 하지 않아. 하지만 마음은 몸 안에만 있지 않아. 경계선이 좀 더 바깥에 있지." (거울애) - P338

"네 저번 삶 말이야, 지켜보았는데 정말로 아름답더라고."
"3초간 살았던 것?"
"그래."
명일은 두께가 한 은하계쯤은 되는 내 명부를 뒤적였다.
"네가 몸담았던 그 전자는 말이야, 원래 평균 수명은 0.1초도되지 않아."
나는 잠깐 생각을 더듬어보았다.
"30배나 살았네. 어떻게…… 아, 맞아. 이동 중이었거든. 알잖아. 광속으로 날면 시간이 확장되는 효과가…………"
"그래. 그 전자의 종족은 말이야. 종족이라는 말은 좀 이상하군. 어쨌든, 아득한 세월 동안 0.1초의 시간을 살면서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을지 고민해온 거야. 물론 어떻게하……까지 생각하다가 다들 죽었지만, 그 고뇌의 시간이 무한히 반복되고 축적되며 본능으로 변했어. 전자의 종족은 생존을 위해 광속이동을 하는 본능을 갖게 된 거야! 전자의 작은 질량이라면 작은 에너지로도 충분히 광속에 가깝게 이동할 수 있으니까. - P418

네가 광속이동을 통해 수명을 30배로 늘릴 수 있었던 것은, 네 조상이 겪었던 무한의 시간이 남겨준 고귀한 생존 투쟁의 결과였던거지. 어때,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잖아?"(몽중몽) - P418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3-08-20 0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낮과 밤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지구가 돌아서 그렇군요 낮만 있는 곳은 지구가 돌지 않는지, 아니 행성이 돌지 않는지... 하지만 행성이 돌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기도 하던데... 낮만 있어서 잠을 안 잔다니, 사람은 잠을 자서 그나마 좀 괜찮죠 잠을 자고 뇌를 쉬게 하죠 뇌뿐 아니라 몸도... 가끔 잠에 드는 사람이 있다니, 어떻게 보면 그런 사람이 멀쩡한 걸 텐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정상 비정상 가르는군요 그런 건 없을지도 모를 텐데...


희선

꼬마요정 2023-08-20 10:45   좋아요 2 | URL
저도 왜 저 행성엔 밤이 없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해가 두 개였던가… 그랬던 거 같아요. 사실 과학이 참 어려워서 가끔 그러려니 합니다. 근데 잠 안 자고도 괜찮다는 건 부럽기도 합니다. 정상 비정상 가르는 건 별로지만 다르다는 건 좋은 듯 해요. 다 똑같으면 재미없을 것 같아요.

scott 2023-08-20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보영 작가의 작품은 해외에서 먼저 인정 받을 정도죠
저는 일단 구매만 해놓고는
아직 완독 하진 않았는데

영어판 뒤적여보닌
영어번역문이 훨씬 좋은 ㅎㅎㅎ

꼬마요정 2023-08-20 18:12   좋아요 1 | URL
영어번역문이 더 좋은가요? ㅎㅎ 아무래도 과학 관련해서 영어가 더 표현하기 쉬운건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김보영 작가 <진화신화>가 너무 좋아서 찾아보게 됐어요. 좋아요^^

바람돌이 2023-08-20 2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문학의 소재가 다양해지고 있어서 너무 좋네요. 이 책은 제목만 알고 있던 책이데 요정님 덕분에 킵해둡니다.

꼬마요정 2023-08-20 22:31   좋아요 1 | URL
김보영 작가 좋아요 ㅎㅎㅎ 이 분 책들 좀 보는데, 요즘 정말 소재도 다채롭고 이야기들이 너무 재미있어요. 한국은 소설 발전도 생각보다 빠른 듯 하네요.
 
나의 더블 - 도플갱어 작품선
엘리자베스 개스켈 외 지음, 장용준 옮김 / 고딕서가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플갱어(Doppelgänger)는 독일어로 ‘쌍으로 걸어 다니는 자’란 뜻이다. 보통 신화와 픽션에서 인간과 똑같이 생긴 유령이나 초자연적 존재로 묘사된다. 또한 도플갱어는영어로 ‘더블(double)‘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더블은 ‘제2의자아‘, ‘분신‘, ‘유령‘, ‘쌍둥이‘ 등 여러 가지 함의를 내포하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도플갱어는 죽음이나 불운을 몰고 오는 존재로 여겨진다.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라는 흥미로운 개념인 도플갱어가 이토록 무서운 함의를 지닌 이유는 무엇일까? 나와 똑같이 생긴 또 하나의 자아는 합일된 자아라는 개념을 허무는 자아의 분열을 의미한다. 또 자아가 분열한다는 것은 자기 안의 이질적인 요소들이 무의식의 막을 뚫고 표면으로 떠오름을 뜻한다.  (p.312)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도플갱어 또는 더블은 분신, 유령, 쌍둥이 등을 뜻하며, 그 존재가 자아의 분열을 의미하기에 두렵게 느낀다고 한다. 그것은 즉 인간 본성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인 것이다. 내 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혹은 내가 억눌러 둔 어떤 본성이 드러난다면 얼마나 두려울까. 그래서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클라라 수녀 막달렌>과 에드거 앨런 포의 <윌리엄 윌슨>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마크하임>의 더블들은 그런 두려움이 엿보였다. 하지만 더블이 무조건 두려운 대상만은 아니었다. 또 다른 나로 내가 얻지 못한 것,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거나 이룰 수 있는 존재 혹은 그저 '나'란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조셉 콘래드의 <비밀 동반자>의 레갓이나 아서 코난 도일의 <빨간 머리 연맹>의 클레이가 그러한 경우이다.  


<클라라 수녀 막달렌>에서 브리짓은 카리스마 있고 유능한 하녀였고 딸인 메리에게 집착했으나 메리는 떠났다. 유일한 신분 상승 수단이었던 귀족 기즈번과의 결혼을 통해 메리는 독립했다. 하지만 기즈번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메리는 신분은 상승했으나 딸인 루시를 낳고 죽었다. 브리짓은 메리를 찾아다니다가 결국 메리가 돌아올 곳이라 믿은 콜드홈에 정착했고, 불행히도 나쁜 남자인 기즈번에게 저주를 내린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이라 믿었던 루시의 더블은 그렇게 브리짓에게서 시작해 기즈번을 통과하여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어째서 기즈번이 아니라 루시가 불행해져야 하는가. 루시의 더블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가.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을 상속자를 찾던 변호사인 화자를 통해 드러나는 루시의 모습은 성녀와 마녀로 구분된다. 악의 상징 같은 루시의 더블이 한 잘못은 큰 소리로 웃고, 남자들과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거침없이 걸어다녔을 뿐인데. 브리짓과 메리와 루시의 삼 대는 가부장을 뛰어넘으려다 실패하고, 그 힘은 스스로를 파괴하러 온다. 결국 브리짓은 스스로를 희생하여 온순해짐으로 저주를 풀려고 하지만, 과연 뜻대로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비밀 동반자>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라는 고립된 환경 속에서, 살인자일지도 모르는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선장의 이야기이다. 자신과 동일시 한 나머지 다른 사람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른 나'인 이방인 레갓을 위해 배를 좌초의 위험에 노출시킨다. 선장이 원한 것은 무엇일까. 살인까지 불사하면서 배를 장악할 힘을 원한 것일까? 마치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그렇게 선장은 레갓을 도왔고, 레갓의 모자를 이정표 삼아 배를 돌려나온다. 


<윌리엄 윌슨>은 자신을 따라 하는 이름마저 똑같은 학우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닥터 트랜스비의 학교에서 만난 윌리엄 윌슨은 기묘하게도 자신과 똑같았다. 어느 밤 그의 무방비한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한 윌슨은 그 곳을 떠나 이튼에 입학한다. 무모하고 오만하고 죄의식이 없던 그는 나쁜 짓을 저지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과 똑같은 윌리엄 윌슨이 나타나 자신을 저지하는 것을 알게 된다. 윌리엄 윌슨의 더블은 도리어 악행을 저지하는데, 그는 양심의 또 다른 이름일까,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는 시도일까.


<빨간 머리 연맹>은 워낙에 유명한 이야기이고, 또 더블과 그닥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내용은 다 알고 있었기에, 왜 이 이야기가 여기 나올까 했더니,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홈즈가 클레이를 또 다른 자아로 인식했다고 한다. 홈즈가 클레이를 두고 한 "런던에서 가장 뻔뻔하고 대담무쌍한 범죄자"란 평가는 최고의 찬사이지 않을까라고.


<마크하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떠올리게 한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과정이 마크하임이 골동품점 주인을 살해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그에게 나타난 더블은 누구일까. 거울을 통해 나타난 그는 내면의 양심일까, 천사일까, 악마일까. 인간에겐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한다. 양심은 끊임없이 악을 누르려고 하고, 충동은 순간의 만족을 위해 위험한 행동을 부추긴다. 마크하임이 소환한 그 존재는 누구일까. 어쩌면 더블이 누구냐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블이 무슨 행동을 하게 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마크하임의 더블은 나타나서 그에게 어떻게 행동할지 계속 속삭이지만, 마크하임은 결국 어떻게 행동할지를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도플갱어, 더블이 두려운 이유는 어쩌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객관화해서 보는 것이 제일 어렵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모습도 보이겠지만, 내가 감추고 싶은 모습도 보일테니까. 되고 싶은 나와 억눌려진 나는 다르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공포를 마주하면 두렵고 피하고 싶다. '크툴루'가 두려운 것처럼, 도플갱어도 두렵다. 하지만 또한 정체가 궁금하기도 하다. 저 신비한 존재는 진짜 저주인가, 아니면 숨겨진 또 하나의 본성인가. 


그래서 공포인가.   

이제 행위를 저질렀으니 시간은, 그러니까 희생자에게 닫힌 시간은 살인자에게는 긴박하고 중차대해졌다.(마크하임) - P2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상 - 개정신판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1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 / 북드라망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 최고의 여행기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곳곳에 해학과 역설이 있고, 발전한 기술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며, 은근히 자신감도 있다. 사행길에 연암이 따라간 건 연암에게도 우리에게도 큰 복인 듯 하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3-08-06 17: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암은 제 롤모델 ٩ʕ◕౪◕ʔو

꼬마요정 2023-08-06 18:51   좋아요 1 | URL
연암 너무 멋져요!!

페크pek0501 2023-08-07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암 글, 좋습니다.

꼬마요정 2023-08-08 12:39   좋아요 0 | URL
연암 글은 늘 그냥 ‘호질‘, ‘허생전‘ 등 이렇게 짧은 이야기들만 알았는데 열하일기를 읽으니까 글이 너무 좋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