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홀 2 - 맨부커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작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2
힐러리 맨틀 지음, 강아름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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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토머스 크롬웰이 어릴 적 어떤 일을 겪었는지, 법률가가 되어 울지 추기경 밑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앤 불린과는 어떻게 관계를 쌓았는지를 보여줬다면 2권에서는 울지 추기경 실각 이후 권력의 중심으로 급부상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울지 추기경의 심복이었으면서도 울지의 실각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헨리의 호감을 샀던 그, 토머스 크롬웰. 그는 이제 헨리왕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권모술수를 부린다. 더불어 개인적인 복수까지.


왕은 수치를 모른다. 몰라야 했다. 왕은 너그럽고 가정적인 멋진 군주이자 남자이길 바랐고 크롬웰은 묵묵히 그의 행간을 살펴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도록 행동했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일도 이뤄지도록 잘 유도하면서 말이다. 앤 불린과 결혼했다고 주장했던 해리 퍼시는 울지 추기경을 체포하러 왔던 이였다. 울지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고 그런 모습을 보이게 한 해리 퍼시에게 크롬웰은 복수했다. 해리 퍼시는 결국 앤과 아무 관계 없다는 서약을 하고 재산과 작위를 빼앗길 처지에 놓인다.


 캐서린 왕비와 헨리 왕을 이혼시키기 위해 크롬웰은 덫을 하나 하나 던졌다. 그 중 하나가 엘리자베스 바턴이었는데, 자신이 천사들과 대화하고 사람의 앞날을 예언하던 여자였다. 성처녀라고 칭송받던 그녀는 결국 크롬웰이 바라던 대로 엑서터 후작부인과 피셔 주교를 끌어들였고 프란체스코회도 엮었다. 하지만 끝내 캐서린은 엮지 않았다.


하지만 클래런스 공작의 딸이자 에드워드 8세의 딸인 마거릿 폴 백작부인이 또 다른 덫에 걸렸다. 캐서린 왕비의 딸인 메리를 위해 자신의 두 아들이 카를 황제를 움직일 음모를 꾸민 일을 크롬웰에게 들킨 것이다. 크롬웰은 수하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앞치마를 입고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식탁에 들락거렸고 대화를 수집했다. 반역이란 올가미에 걸리지 않으려면 조용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크롬웰은 메리 공주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여러모로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앤 불린은 평판이 아주 나빴다. 토머스 크롬웰이 사기꾼에 죽음의 사자 같은 존재라면 앤은 매춘부에 사악한 여자였다. 크롬웰은 앤이 그냥 운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크롬웰 역시 운만 좋으면 된 거였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원하는 것을 거머쥐기 위해 많은 일들을 했으니까. 공들여 누군가를 실각시키고, 누군가의 가정을 깨트리고, 누군가의 꿈을 짓밟았다. 


교황의 관면을 받은 결혼을 무효로 만들기 위해 헨리는 결국 로마 교황과 갈라서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울지 추기경은 실패하여 실각했고, 토머스 모어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실제로 처형장에서 사형집행인에게 수염은 죄가 없다는 농담을 했다고. <유토피아>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토머스 모어는 로마 가톨릭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이단으로 화형에 처했다. 프리스의 죽음은 안타까웠다. 도망칠 기회가 있었음에도 움직이지 않았던 그는 결국 고통스럽게 죽었다. 종교가 무엇이길래 사람을 그렇게 찢고 불에 태웠을까...


이 책을 읽다보면 그 시대 영국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포목동업조합이나 모피동업조합 사람들이 연대하거나 싸우면서 이익을 차지하려는 모습이나 크롬웰이 고리대를 하는 모습에서 상업이 발달하고 시장이 활성화 되어 있다는 점이 보였다. 인쇄술이 발달하여 종교개혁도 불러왔지만 사상의 전파가 엄청나게 빨랐다는 점이 놀라웠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왕을 섬겼던 이들에게 질투를 느끼는 크롬웰이었다. 


 - 지금의 반역법이 제정되던 당시에는 주장을 책이나 전단으로 인쇄해 유통할 수 없었다. 글을 인쇄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는 이미 죽은 자들에게, 지금보다 더디게 흐르던 시대에 왕을 섬겼던 이들에게 순간적인 질투를 느낀다. 요즘은 매수되거나 오염된 정신의 산물이 유럽 전역에 퍼지기까지 딱 한달이면 족하다. (307~308쪽)


이 시대는 무슨 짐승의 시대 같았다. 제인 시모어의 오빠인 에드워드는 자신의 아내를 아버지에게 빼았겼다. 헨리는 자신의 형수와 결혼했다가 이를 무효화 하고 앤과 결혼하려 하고. 심지어 앤이 임신하자 금욕은 하기 싫어 다른 이의 결혼을 훼방놓는다. 크롬웰은 자신의 처형과 관계를 가진다. 그러면서 종교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울프홀은 시모어 가문의 본거지이다. 하지만 제인 시모어나 시모어 가문은 이 책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사실상 앤의 몰락에 기여하는 인물들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어쩌면 앞서 크롬웰이 생각했던 바가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앤은 운만 좋으면 되었다. 앤이든 크롬웰이든 둘 다. 1533년 앤은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토머스 모어가 처형되고 이제 울프홀로 간다. 앤의 몰락이 시작된다.

추기경은 닫힌 문을 맞닥트리면 칭찬부터 했지 - 오 아름답고 순종적인 문이여! 그렇게 속여놓고 문을 여는 거예요. 당신이 딱 그렇습니다, 딱 그래요." 샤퓌는 서퍽 공작의 선물을 잔에 따른다. "하지만 결국에는 차부수고 들어가지요." - P267

별자리가 우릴 만드는 게 아니에요, 버츠 박사. 상황과 필요, 압박 속에서 우리가 하는 선택이 만드는 거지. 미덕도 우리를 만든다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소. 때에 따라선 우리가 가진 악덕도 동원해야 하는 법이거든."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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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5-09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 내용을 보니 당시 영국을 포함한 중세유럽은 정말 짐승들의 시대였네요

꼬마요정 2025-05-09 16:05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짐승들이랍니다. 특히 헨리 8세는 진짜... 앤이랑 결혼하면서 앤의 언니인 메리도 건드리고... 그 외에도 수많은 여자들이랑... 나쁜 놈입니다.
 
캡슐 콜롬비아 몬테블랑코 블렌드 - 5.5g, 10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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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패션후르츠의 상큼함이 입 안 가득 퍼지다가 깔끔한 단맛이 살짝 난다. 목넘김 후에도 약간 침이 고일 만큼 진하게 잘 나온다. 드립보다 편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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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5-04 14: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상큼함을 느껴 보고 싶네요.

꼬마요정 2025-05-04 22:27   좋아요 0 | URL
상큼합니다^^ 커피양이 많아서 진하게 내려오더라구요. 따뜻해지는 계절에 잘 어울립니다.
 
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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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가면 20년 후의 미래가, 서쪽으로 가면 20년 전의 과거가 공존하는 계곡이 있는 마을. 그러면 동쪽 계곡을 넘으면 그곳은 동쪽의 서쪽일테니 중간에 있는 마을의 서쪽이 되고, 서쪽 계곡을 넘으면 중간 마을의 동쪽이 되는 건가. 공간 개념에 한없이 약한 나는 철책과 장소를 설명할 때 조금 헤맸다. 재밌고 특이한 설정이라 생각했다. 시간의 계곡은 결코 넘어서는 안 되지만 특별한 경우에만 넘을 수 있고 '개입'을 막기 위해 철저히 관리됐다.


책 광고 문구 중에 '충분히 애도한 사람만이 안다. 과거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오직 현재라는 것을.' 이란 게 있었다. 하지만 오딜이 충분히 애도한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 오딜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위한 선택을 했다. 오딜은 자기 자신을 제일 사랑한 사람이었다. 


정말로 과거든 미래든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이 책에서는 '애도'하는 사람만이 시간의 경계를 넘을 수 있다. 하지만 애도하는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엄선된 사람들이 짧은 시간 그리워하던 대상을 보고 오는 일이 정말로 남은 이에게 도움이 될까. 그 시간대에 '개입'해선 안 되기에 철저히 얼굴을 가리고 멀리서 바라만 보는 일이 도움이 될까. 만약 그 대상을 구할 수 있다면 개입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어쩌면 오딜은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했기에 그런 결과를 가져온 걸지도 모르겠다. 다른 결말이었다면 더 여운이 남았을까.


덧붙여 오딜을 어떻게 해보려 했던 헌병들 다 벌 받았으면. 개인적인 감정을 공적으로 바꾸어 그녀를 이용하거나 괴롭혔던 놈들 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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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4-28 0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무해 전이라는 게... 지금이 있고 앞날과 지난날로 가는군요 바꾸지 못해도 지난날은 자신이 잘못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앞날은 지금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습니다 슬픔을 가진 사람이 시간을 넘어갈 수 있는가 봅니다 제대로 애도한 사람...


희선

꼬마요정 2025-04-29 15:24   좋아요 0 | URL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일단 자격이 됩니다. 그렇다고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한 모든 사람이 갈 수는 없구요. 저런 세상 자체를 생각한 작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사람의 상상력이란 정말 멋져요! 재밌게 읽었지만 결말이 좀 달랐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어요.
 
달의 뒷면을 걷다 순정만화 X SF 소설 시리즈 3
전혜진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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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xSF소설' 컬래버레이션의 마지막 작품이다. 권교정 작가의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와 전혜진 작가의 만남으로 <달의 뒷면을 걷다>가 탄생했다.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에서 2092년 거대 함선 우주정거장 '디오티마'가 완공된다. 이 이름은 천재 과학자이자 이 우주정거장을 만든 csc(우주철도공사)의 회장인 스카 지니어스와 그의 쌍둥이 형제 루이스 지니어스가 붙인 이름이다. 26년 전 최악의 우주선 사고 때 자신들을 구해 준 존 H. 서얼 선장의 별명 '디오티마'에서 온 것이다. '디오티마'는 달의 뒷면을 보고 싶어했던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지혜로운 인물 또는 휠덜린의 소설에서 휘페리온의 연인이자 조화의 상징이다. 


이 거대 함선 우주정거장 '디오티마'의 역장을 취임한 사람은 스물여섯 살의 나머 준이다. 진화하는 영혼 디오티마의 새로운 육체인 그는 앞선 생에서 존 H. 서얼 선장으로 살았고 2천 년의 세월을 지나온 인물이다.


나는 이 만화를 단행본 1권까지만 봤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은 부역장인 지온이 헐렁해보이는 나머 준이 매일 이 거대한 함선을 둘러본다는 것을 깨닫는 부분이다. 나머 준이 때때로 헐렁하게 보이고 어딘가 모자라 보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정확한 지시를 내리고 이 넓은 정거장을 매일 다 둘러봤다. 그녀가 가진 비밀은 무엇이고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걸까.


전혜진 작가가 되살려 낸 나머 준과 지온은 아주 자그마한 이야기로만 나오지만 반가웠다. 존 H. 서얼의 영혼을 알아봤던 '영혼감별사' 아서 우코의 손자인 라테라사를 자신들이 데리고 있을 수 있었던 이유를 말하는데, 그것은 아주 뒷 이야기. 이 책의 주인공은 바로 아서 우코의 손녀인 디오티마 우코이며 그녀가 달에서 '월인'인 자신의 '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지구의 폐기물 쓰레기장이 되어버린 달의 뒷면은 쓸쓸하다. 지구에서 보이는 쪽이 지구인의 환상을 깨트리지 않도록 각종 공장이나 쓰레기장은 달의 뒷면에 만든 것이다. 애초에 달에서 태어난 디오티마는 몇 안 되는 월인이며, 자신이 태어난 곳이 지구의 부속품처럼 여겨지는 것에 분노했다. 


끝없이 아득하게 펼쳐진 미래를 홀로 걸어야 했던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의 디오티마와 <달의 뒷면을 걷다>에서 디오티마의 이름을 가진 디오티마는 알 수 없는 미래를 응시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2천 년 전 달의 뒷면을 보고 싶었던 디오티마는 지금 달에서 태어나 달의 뒷면을 보는 디오티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어떤 존재라도 다른 존재의 도구로만 여겨지는 것은 잘못된 것일테니.   


이런 연속 기획물이 계속 나오면 좋겠다. 그리고 권교정 작가님이 건강하시면 좋겠다.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는 완결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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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4-26 18: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무슨 잡지에선가 디오타마를 본 기억이 나는데 이 만화 완결되었는지 무척 궁금해 집니다.

꼬마요정 2025-04-26 21:45   좋아요 0 | URL
아직 완결 안 된 걸로 알고 있어요. 작가님 건강이 안 좋다고 하더라구요. 얼른 건강해지시면 좋겠습니다. 그나마 저는 권교정 작가님 단편집 몇 개 가지고 있는데 내용이 참 좋답니다^^
 
기억의 빛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5
마이클 온다치 지음, 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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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는 자기 악보의 특정한 악절들 옆에 schwer(슈베어)라는 단어를 적어 넣었다. '어렵다'는 뜻이다. '무겁다'는 뜻이기도 하다. (44-45쪽)


'슈베어'와 '워라이트(warlight)'는 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듯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너새니얼의 아버지는 싱가포르로 발령이 났다. 아직 십 대인 레이철과 너새니얼을 집에 두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싱가포르로 간다고 했다. 대신 보호자로 '나방'이 그들과 함께 하기로 했는데 부모님이 떠난 집에 '나방'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게 되었다.


'워라이트'는 전쟁 때 도시가 정전된 시간 동안 비상용 차량들을 안내하던 흐릿한 불빛을 의미한다.(105쪽 각주) 독일 폭격기가 영국 하늘에서 폭탄을 떨어트리는 동안 영국은 등화관제를 실시했다. 불빛은 공격 대상이었고 사람들은 불을 꺼야만 했다. 그리고 화약 등을 나르기 위해 밤길을 이용했던 요원들은 아주 희미한 불빛에 의지한 채 달려야 했다. 이는 너새니얼이 자신의 어머니인 로즈의 삶을 추적하는 것과도 비슷했으며 자신의 삶이나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었던 나방, 화살, 올리브, 아서, 애그니스의 삶을 추적하는 것과 비슷했다.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하는 일, 어머니가 하는 일, 그들이 어디 있는지, 나방이나 화살이 무슨 일을 하는지 등등 말이다. 부모가 곁에 없는 동안 너새니얼은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아주 다양한 경험들을 했다. 그리고 애그니스를 만났다.


스파이를 다룬 소설들은 많다. MI6나 CIA, 모사드, KGB 등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뛰어난 능력으로 화려한 액션을 보여주는 이야기들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달랐다. 스파이의 삶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고, 안개에 쌓인 듯 모호했으며, 수많은 상처와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그가 온다면 잉글랜드 남자 같을 것이다...

내 죄는 여러 가지야. 


로즈는 돌아온 뒤 저 두 문장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하던 로즈. 이엉장이 막내 아들이나 체스 천재 이야기를 하던 로즈. 팔에 있던 흉터만이 어쩌면 진짜 그녀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녀 역시 워라이트에 의지한 채 걷고 있었다. 목표는 명확하지만 가는 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길을 잘 안다고 믿지만 어떤 상황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로즈는 레이철과 너새니얼을 구하려 했지만 길은 어긋나 버렸다.


너새니얼은 레이철과 달리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고양이를 잊어버렸던 것처럼 자신을 상처주는 일들을 외면했던 걸지도 몰랐다. 나방과 화살과 올리브가 준 관심과 사랑이 그의 마음을 충족시켜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너새니엘 앞에 있는 '슈베어'들을 치워줬기 때문일지도. 이제 너새니얼은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그 흔적들을 따라가며 자신이 외면한 진실을 깨닫기도 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것인지도. 희미한 불빛을 따라가며 선택하고 슈베어를 만나고 후회하고 다시 선택하고... 가지 못한 길은 늘 마음에 남고 '힘든 일'은 결국 지나가기 마련이고 흐릿한 빛 속에서 아름답던 것이 사실은 무거운 과거라는 사실을 깨닫고야 만다.

말러는 자기 악보의 특정한 악절들 옆에 schwer(슈베어)라는 단어를 적어 넣었다. ‘어렵다‘는 뜻이다. ‘무겁다‘는 뜻이기도 하다. - P44

그가 온다면 잉글랜드 남자 같을 것이다...
"누가 어머니를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만약 내가 알았다면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대체 무슨 끔찍한 짓을 하셨기에요?" 그러면 어머니는 이렇게 답했을 것 같다. "내 죄는 여러 가지야."라고.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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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4-13 2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파이로 사는 건 그렇게 쉬운 게 아닐 듯합니다 그런 사람한테 식구가 있다면 더...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해야 했던 걸지, 어떤 신념이 있어서 한 걸지... 자기 마음을 잘 모르고 하는 것도 있을 것 같습니다


희선

꼬마요정 2025-04-16 23:28   좋아요 1 | URL
너새니얼의 엄마인 로즈가 스파이가 된 건 자아를 찾기 위함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아이를 낳고 집안일을 하며 살기에 로즈는 똑똑하고 야망도 있거든요. 넓은 세상도 보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일을 하고 싶은 건지도요. 박진감 넘치는 그런 스파이물은 아니지만 뭔가 여운이 남는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