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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사 이래 현세에 이르기까지 공명만한 사람 없고, 역사가 이어지는 영원한 앞날에서도 공명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前無後無諸葛武候)” 이 말은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우고 개국 공신으로서 성의백에 봉해진 유기가 한 말입니다. 자신은 천하를 통일했지만, 제갈공명은 천하를 삼분하는 데 그쳤다고 생각하여 늘 제갈공명을 폄하하던 유기는 천하를 구경하던 중 촉 땅을 들르게 되었는데, 그 때 공명의 신묘함에 감탄하며 이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제갈공명이 활약하던 그 때부터 후세에 이르기까지 그는 뛰어난 지략가이자 공명정대한 재상이며 충직한 신하라는 평이 조금도 허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저 역시 삼국지를 읽으면서, 혹은 중국의 역사책을 읽으며 가장 호감을 가졌던 사람은 바로 제갈공명이었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 무수히 많은 명장들과 책략가들, 군왕들이 영웅으로서 세상을 떠받치려고 했던 그 시대로부터 이름을 남긴 많은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제갈공명(181~234)은 이름은 양이며 자는 공명으로 낭야군 왕도 출신입니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를 따라 형주로 이주한 후 17세 때 숙부와 사별하게 됩니다. 그 후 융중에 초가를 짓고 밭을 갈면서 경전과 사서를 공부하고 벗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자신을 춘추, 전국 시대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과 연나라의 명장 악의에 비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지방의 지식인들은 모두 제갈공명을 당대의 영걸로 보고 때가 오면 언제든지 하늘로 오를 것이라 생각하여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불렀습니다. 공명의 나이 27세, 유비의 나이 47세 때 둘은 역사에 길이 남을 만남을   가집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란 말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그들의 만남은 후에 관우와 장비가 공명에게 반감을 가질 때 유비가 했던 수어지교(水魚之交)와 함께 유명한 고사로 남습니다. 지금도 제갈공명이 살았던 융중에는 많은 고적이 보존되어 있어 ‘융중방’, ‘삼고당’, ‘초려정’, ‘궁경전’ 등의 고적은 지금도 보는 이로 하여금 회고의 정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공명은 유비의 휘하에 들어온 뒤 그가 죽을 때까지 유비를 위해 그의 재능을 아낌없이 쏟아 붓습니다. 그의 활약 하에  거두었던 적벽에서의 대승은 그가 내놓았던 천하삼분지계를 현실로 만들었고, 후에 형주와 촉을 차지할 때나 유비가 황제에 즉위할 때 역시 그는 유비를 충심으로 섬깁니다. 그러나 관우가 죽은 후 광분한 유비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혈육처럼 여기던 관우를 잃었다는 슬픔에 싸인 그를 이기지 못해 오와의 전쟁을 감행하여 실패하고 맙니다. 충격으로 병을 얻은 유비가 죽은 후 이제 촉한의 운명은 공명에게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나라와 화친을 맺은 후 북벌군을 출동시켜 천하를 통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운남 지방에서 만족의 추장 맹획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칠종칠금(七縱七擒)’의 고사가 바로 이 때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공명은 진심으로 항복을 받기 위해 맹획을 사로잡았다 놓아주기를 일곱 번을 하였고, 이에 맹획은 진심으로 공명에게 항복하여 나중에 촉한의 중앙정부에서 어사중승의 벼슬을 지내게 됩니다. 맹획을 토벌하고 회군하던 때 ‘만두’가 생겨나게 됩니다. 227년 제갈공명은 전군을 이끌고 위나라 토벌에 나서며 유선에게 ‘전 출사표’를 올리는데 이 글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는 명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사표를 올린 후 공명은 군대를 한중에 출진시키고 다음해 기산을 공략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속의 대패로 인하여 회군할 수밖에 없었던 공명은 한중으로 돌아와 아끼던 마속의 목을 벱니다(泣斬馬謖). 그 후 공명은 다시 북벌을 시도하여 유선에게 ‘후 출사표’를 올리고 사마의와 대적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장원에서 붉고 긴 꼬리를 그리며 큰 별이 떨어진 후 그는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위세도 당당하게 촉의 진영을 치려던 사마의는 마치 공명이 살아있는 듯한 촉의 태세에 놀라 도망을 칩니다. 이 때 사람들은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도망치게 했다”고 사마의를 비웃었습니다. 공명은 227년부터 234년까지의 7년 동안 6회에 걸쳐 북벌을 감행했다 하여 육출기산이라는 말이 남아있습니다. 이 여러 번에 걸친 싸움에서 공명은 항상 교묘한 계략으로 사마의를 위기일발의 함정에 몰아넣어 숱한 일화를 남겨놓았습니다. 그는 생활에 있어서 검소하여 타의 모범이 되었으며, 정치에 있어서도 공평하여 아끼던 마속을 눈물을 머금고 참하였습니다. 촉한에서는 제갈공명을 정군산에 안장하고 충무후(忠武候)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나관중의 유명한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역시 가장 호평을 남기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제갈공명일 것입니다. 소설이 아닌 진짜 역사에서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물은 제갈공명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 외에도 그 재능을 적재적소에 쓰면서 의리와 명분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겸손하고 검박하였으며 사리가 공정하여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사지 않았으니 그간 귀족들의 전횡과 전쟁으로 인하여 고통 받은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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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고구려와 낙랑의 관계에 얽혀 제대로 피지 못한 그 사랑꽃의 기원은 아마도 한무제 때 그가 설치한 한 4군이겠지요. 중국 한나라의 한무제는 고조선에 굴욕적인 모욕을 안겨 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4군의 설치에 관해서는 중국, 일본, 남한, 북한 모두 입장을 달리 하고 있습니다.) 그는 후에 무제란 시호가 붙을 만큼 군사적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습니다. 한무제는 한의 건국초기부터 골칫거리였던 흉노에 대해 그간 취해왔던 피동적이고 보수적인 방어정책에서 벗어나 그의 집권기간 동안 여러 차례 흉노와 전쟁을 벌이며 흉노를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한고조를 시작으로 혜제와 문제, 경제를 거치며 쌓아온 국력과 무제의 군사적 야심, 명장(위청, 곽거병)의 활약, 흉노의 내부 동요 등은 한무제가 흉노를 누르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간 한나라의 사회경제의 발전을 저해하던 흉노의 영향력은 한무제에 이르러서 배제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한무제는 그 칼날의 방향을 동으로 돌려 고조선을 침략하였고, 남월을 평정하여 9군을 두고, 서남이를 평정하여 5군을 설치하는 등 흉노와의 전쟁 중에도 그의 무공업적을 드날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치세 말기 그는 전쟁을 계속하다가는 진나라처럼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반성을 하고 전쟁을 중단한 뒤 경제 발전에 힘썼습니다.

     한무제는 자신이 죽고 전한이 망하기 전까지를 그의 여운 시대라고 부를 만큼 많은 업적을 세운 황제였습니다. 경제면에서는 화폐 제도를 통일하여 정부가 화폐를 주조하고 소금, 철, 술 등의 전매 제도를 택했습니다. 게다가 한왕조 창업 이래 쌓아 올린 문화적, 경제적 여력을 바탕으로 그동안 취해 오던 무위의 노장사상에서 유위의 정치 체계로 전환하였습니다. 이미 노장사상은 안정기에 들어선 한나라를 지탱하기엔 부족한 면이 많아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무제는 동중서의 사상을 받아들여 독존유술 파출백가(獨尊儒術 罷黜百家)의 방침으로서 유학을 국가의 통치사상으로 만들고 수백 년 동안 계속되어 온 백가쟁명을 그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학은 20세기 초 청나라가 멸망하기까지 중국의 통치사상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무제는 문학예술을 즐겼기에 문학가인 사마상여에게 높은 벼슬을 주는 등 문학예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한무제의 업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한나라 역사상 가장 높이 평가받을 만한 업적을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코 장건과 실크로드일 것입니다. 흉노와의 전쟁을 위해 월지국과 동맹을 맺으려고 했던 한무제는 사자로 장건을 보냅니다. 장건은 월지로 가는 도중 흉노에게 억류되었고, 10년 동안 그곳에서 절치부심 자신의 사명을 다할 궁리를 하다 도망치는 데 성공합니다. 고생 끝에 월지국에 도착한 장건이었지만, 이미 비옥한 토지를 손에 넣고 속국까지 거느리는 월지국의 평화주의, 비동맹 정책으로 그의 군사 동맹 체결의 목적은 무산되고 맙니다. 귀국길에 오른 장건은 또 다시 흉노에 억류되지만, 흉노의 내분을 틈타 무려 13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월지국과의 군사동맹 체결은 실패하였지만, 그의 보고에 의해 한나라는 서역의 정세를 보다 상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긴 억류 생활을 하는 동안 익힌 장건의 지리적 지식 덕분에 그 후 한군은 흉노와의 싸움에서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장건은 열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장건이 죽은 후 한나라의 실정을 몰랐기 때문에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던 오손, 야랑, 대완 등이 자진해서 한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는 등 한나라의 위엄은 널리 서역까지 떨쳤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크로드는 바로 한무제 때 장건이 처음 개척한 것으로 그 의의는 매우 크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한무제가 아무리 큰 업적을 쌓았다 하더라도 그의 치세에 오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만하고 독단적인 성격에 여색을 즐기던 그였기에 그 당시 가장 박식한 역사학자이자 문학가였던 사마천에게 죄를 주어 궁형에 처합니다. 사마천은 당시 사대부의 긍지대로 자살을 하려 했으나 자신의 아버지 사마담의 유고를 지키기 위해 치욕적인 삶을 참고 중국 역사상 첫 통사인 「사기」를 편찬합니다. 한무제는 또한 나이가 들어 미신에 빠졌는데, 그 일로 하여 한무제 치세 무고의 난이 끊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황태자였던 유거 역시 무고의 난에 휩쓸려 죽음을 당합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황제라는 한무제. 그는 한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큰 힘을 썼으며 또한 그 결과를 누리다 죽은 황제입니다. 황제라 하더라도 아무나 지낼 수 없는 봉선을 지냈으며 흉노를 제압하고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국내를 안정시킨 그는 분명 훌륭한 황제라는 평가가 어울린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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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사무쌍(國士無雙)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선비는 둘 일 수 없다는 뜻으로 유방의 밑에 있던 소하가 한신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한신은 회음 사람으로 젊은 시절 끼니조차 제대로 때우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였습니다. 그는 진나라에 대항해 일어선 항우 밑에 들어갔는데, 그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도망쳐 유방 밑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유방 밑에서도 변변찮은 대접을 받다 결국 재수 없는 일에 휘말려 사형을 당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처형당하기 직전 대신 하후영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외쳐 간신히 처형을 면하였고, 하후영은 그를 유방에게 천거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방은 한신을 크게 중용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재상 소하는 그를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방 밑에서도 자신의 큰 뜻을 펼치기 어렵다고 생각한 한신은 자신을 알아 줄 이를 찾아 도망을 쳤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소하는 유방에게 알릴 시간도 없이 한신을 찾으러 따라갔고, 영문을 모르는 신하들은 소하가 도망을 쳤다고 생각하여 유방에게 알렸습니다. 놀라고 화가 난 유방은 이틀 뒤 돌아온 소하를 보며 왜 도망을 쳤는지 꾸짖었고, 소하는 한신을 좇아간 것이며 그는 국사무쌍의 인물이라 중하게 등용하라 말했습니다. 유방은 한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지만 소하의 주청에 그를 대장군으로 삼았고, 결국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는 데 큰 도움을 얻게 됩니다. 한신은 초· 한 전쟁 무렵에는 제왕에 봉해졌으며, 해하에서 항우를 격파하는 등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한나라가 건국되자 초왕에 봉해졌으나 뛰어난 군사적 자질을 가진 그를 두려워한 유방에 의해 회음후로 강등되었고, 후에 다시 모반의 죄를 쓰고 사형 당했습니다. 하지만 한신의 모반에는 여후와 소하의 음모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유능한 장군인 한신이 설마 그의 사인의 아우에게까지 알 수 있도록 모반을 계획하였다는 것이 이상할뿐더러 고변한 자가 그저 사인의 아우라고만 기록되어 있다는 점도 이상합니다. 여후와 소하가 한신 같은 군사적 천재를 경계하여 희박하지만 모반의 죄를 씌워 고조가 없는 사이에 죽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난세에 걸출한 영웅이었던 한신은 여후의 손에 죽게 됩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세 개의 고사성어를 남깁니다. 첫 번째는 앞서 이야기한 국사무쌍이며, 나머지 두 가지는 다다익선(多多益善), 교토사 주구팽(狡兎死 走拘烹) 즉 토사구팽입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그 말을 고스란히 겪었던 한신에 대해 사마천은 이렇게 말합니다.〈젊은 시절 어머니의 장례를 지낼 비용조차 없었던 그였지만, 지금은 높고 넓은 땅에 묘지를 만들어 1만호를 들어설 수 있게 했다. 그런 그가 겸손을 배웠더라면 주공, 소공, 태공의 공훈에 비하였을 것이며 나라의 제사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천하통일 후 반역을 기도해 멸족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신이 혁혁한 공을 세운 뒤 모반죄로 죽었다면, 여후는 유방이 죽은 뒤 그 진가를 드러낸 여인이었습니다. 여걸이었던 그녀는 유방의 조강지처로서 유방이 한나라를 창업할 때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호탕하지만 여자를 좋아했던 유방은 한고조가 된 뒤 여러 후궁들을 거느렸고, 특히 척부인을 총애하였습니다. 여후는 뒷방 신세가 된 꼴이었지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등극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유방이 죽을 때 여후는 승상의 재목에 대해 물어봅니다. 소하 다음에는 조참을, 그 뒤에는 진평과 왕릉에게 승상을 맡기라는 유방의 대답에 여후는 그 뒤에는 어찌 하냐는 질문을 합니다. 유방은 도대체 언제까지 살려고 그러느냐며 입을 다물지만, 사실 그렇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데 승상은 아주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인 만큼 여후는 유방의 말대로 하여 자신이 죽은 뒤까지 자신의 아들인 효혜제가 아무 어려움 없이 나라를 다스리기를 바랬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지요. 여후는 유방이 죽자 개인적인 원한을 철저하게 갚습니다. 우유부단하고 심약하였던 효혜제는 그런 여후를 견디지 못하여 일찍 죽고 맙니다. 여후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효혜제의 서자를 소제로 내세워 여전히 섭정의 자리를 지키며 자신의 일족을 왕으로 봉하고 정권을 손에 움켜쥡니다. 유씨를 섬겼던 여러 신하들은 납작 엎드린 채 여후가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여씨 일족의 권세는 여후로부터 나왔으니 여후가 죽으면 자신들이 여씨 일족을 멸하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후세 사람들은 말합니다. 여후는 악독한 인물이라 자신의 아들을 일찍 죽게 하였으며, 사사로운 원한을 앞세워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여후의 치세는 그리 암담하지 않았습니다. 한고조 유방은 한나라를 건국한 지 8년 만에 세상을 뜨는데, 그것은 곧 새로운 왕조를 발족하는 단계에서 죽은 셈입니다. 뒤를 이은 혜제 역시 일찍 죽었으니 새로운 왕조인 한의 기반을 다진 사람은 유방과 여후 이 두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후는 사사로이 자신의 일족을 위해 유씨 일족을 살해하였으나, 유방이 만들어놓은 예악이나 승상 소하가 정비해놓은 법률 등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며(소규 조수), 한대 초기의 ‘백성에게 휴식을 제공한다’는 국가 정책을 고수하였고 그것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어 역사가들은 당시 상황을 의식은 풍족하고 형벌은 줄어들고 천하는 평온하였다고 평가합니다. 여후는 황제 자리와 왕, 제후들의 자리를 놓고 일종의 집안싸움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씨 일족은 여후와의 권력 다툼에서 패한 것이지요. 여후가 죽은 뒤 다시 유씨 일족이 권력을 잡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자신들을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던 그들은 여후의 업적이나 그녀의 사생활, 그녀의 성격을 철저하게 부정적으로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권력을 잡았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악녀였으니,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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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11-01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여후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묘사한 건 그녀가 남자였기 때문이겠지요...어제 술마시다가 여자들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꼬마요정 2005-11-0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여후가 남자라구요??
아마도 여권이 신장되다보니 기존에 권리를 가지고 있던 남성들이 위기의식을 느끼는 거겠지요..그러니 여자들에게 반감을 가질 수 밖에 더 있나요.. 사실, 있는 자들의 부를 없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면 있는 자들이 반발하는 것처럼, 그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
 

    몇 년 전 개봉했던 장예모의 영화 ‘영웅’은 이제껏 다뤄왔던 진시황의 모습이 아닌 보다 긍정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아주 놀라웠던 것은 모든 진시황의 악행이 ‘파검’이 모래밭에 그렸던 ‘天下’ 그 하나만으로 상쇄되어 버린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미화된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마치 일본이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듯하여, 곧 중국의 중화사상을 극명하게 표출시킨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진시황의 통일정책은 어떠할까요? 교수님의 강의안을 참고하여 몇 가지 알아보았습니다.


   BC 221년은 매우 중요한 해입니다. 상징적으로나마 남아있던 주왕조가 멸망(B.C 256년)하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제나라마저 멸망하여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해이기 때문입니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자신을 황제라 칭하였으며 옛 방식이 아닌 군현제라는 새로운 통치체제를 채택하였습니다. 또한 도량형과 문자, 화폐를 통일, 도로를 정비하는 등 제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방궁, 여산릉, 만리장성 축조와 같이 거대한 토목공사를 추진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그리고 정치사상의 투쟁을 해결한답시고 분서갱유를 일으켰고 천하순행을 통해 불로불사약을 얻고자 발버둥 치며 국고를 낭비하였습니다. 특히 분서갱유는 다분히 역사적 교훈을 주는 사건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정치사상의 투쟁은 일어나는 법입니다. 그러나 사상적인 의견의 대립을 폭력으로 억압하는 것은 올바른 정치가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서의 결과 사상의 통일은커녕 고대문화의 위대한 업적을 파괴하는 문화말살정책이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갱유는 유생들의 육체는 죽였지만 정신적으로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와 진 황실의 통치기반을 약화시켰습니다. 천하통일이라는 명분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목숨보다 소중할까요? 통일 정책을 수행하면서 상살된 사람이 수 천 명일 것이고 토목공사로 희생되거나 갱유로 죽은 사람들만 해도 엄청날 것입니다. 그리고 파괴된 문화의 가치는 어마어마하여 후대의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진시황이 진왕 정이었을 시절 형가의 손에 살해되었더라면 중국역사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중국에는 ‘협’이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들은 대가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알아 준 이에게 스스로 보답하기 위해 행동하였습니다. ‘예양’, ‘섭정’, ‘전광’ 등이 그러한 인물들이었고, 진왕 정을 암살하려 했던 ‘형가’ 역시 ‘협’이었습니다. 사마천은 『사기』의 자객열전에서 그들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형가는 위나라 사람으로 독서와 검술을 좋아해 그 방면의 전문가였으나 알아주는 이가 없어 일자리도 없이 그냥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나라의 유명한 인사들과 폭넓은 교제를 했으며, 연나라의 현자 전광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연나라의 태자가 진왕 정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그를 암살하려고 할 때 전광은 형가를 추천하고 비밀을 지켜달라는 태자의 말에 그러겠다고 대답한 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결을 합니다. 그리고 형가는 진왕 정의 암살을 맡게 됩니다. 계획대로 번어기 장군의 목과 독이 발린 비수가 준비되자 형가는 자신의 일을 도와 줄 사람을 기다리지만, 초조해진 태자의 성화에 진나라로 떠납니다. 진왕 정을 만나 번어기 장군의 목과 연나라의 지도를 내놓으며 거짓 항복을 꾀했던 형가는 진왕 정이 지도를 펼치자 그곳에 숨겨두었던 비수로 그를 찌르려고 하지만 소매만 베어냅니다. 신하들은 허둥대고 진왕은 장검을 뽑지 못하고 계속 도망치다 한 신하가 칼을 등지고 뽑으라는 말에 겨우 칼을 뽑아 형가를 내리칩니다. 여덟 군데가 베인 형가는 웃으며 기둥에 서서 자조하다 진나라 신하들의 칼에 찔려 죽고 맙니다. 암살이 실패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화가 난 진왕 정은 연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후대에서 진시황과 형가의 평가는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폭정필망이라는 말의 대명사격으로 쓰이는 진시황에 비해 형가는 협객이자 의사로서 칭송받습니다. 천하를 통일한 황제와 일개 자객의 평가가 이렇게 다른 까닭은 무엇일까요? 형가는 사람의 도리를 지키고 자신의 행위 준칙대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시황은 그렇지 못했지요. 무릇 위정자일수록 사람의 도리를 지키고 예를 갖춰야 하는 법입니다. 정치는 냉혹하다지만, 진시황이 살던 시대만 하더라도 제자백가가 자신의 사상을 주장하던 때 아닙니까. 패도보다는 왕도를 중시하던 그 시절 진시황은 자신의 큰 야망을 실현시켜 줄 사상은 법가뿐이라고 생각한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상앙은 자신의 법 때문에 죽었고, 이사 역시 인심을 잃고 정쟁에 휘말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진시황 역시 분서갱유를 통해 사상을 통일하려다 나라의 기반을 무너뜨리지요. 어쩌면 진시황은 정말 어리석은 황제일지도 모릅니다. 정치사상들이 넘쳐나던 시기에 그것들을 적절하게 운용할 생각은 못하고 오로지 아집으로 하나만을 고집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 밖에도 폭군들이 자주 하던 거대 토목공사의 시행이라든가, 무리한 도량형의 통일 등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더없이 괴롭혔습니다. 그렇기에 진왕 정을 암살하려 했던 형가의 평가가 더 높아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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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오스 2005-10-09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생의 과제를 3건이나 하신 건가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예전에 본 영화 '영웅'이 떠오르네요^^ (그런데 저는 주나라 멸망을 B.C. 256년으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오랜만에 들렀는데 태클을 걸어서 죄송합니다^^;;)

꼬마요정 2005-10-09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메트리오스님~~ 와~ 반가워요~~^^ 정말 오랜만이네요..그쵸? ^*^ 동생 과제가 매주 있거든요.. 옆에서 하도 도와달라고 성화여서, 타자는 동생이 치고 저는 열심히 읊었죠..^^ 그리고 주나라 멸망은 B.C 256년이 맞습니다. 221년은 사실 제나라가 멸망한 시기이지만... 제가 그 때 헷갈렸거든요... 부끄부끄.. 당장 고칩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중국의 4대 미인이라 하면 왕소군, 서시, 양귀비, 초선이를 일컫습니다. 이들은 모두 고사성어를 남길 만큼 아름답고 유명한 여인들인데 하, 은, 주나라의 멸망과 관련된 세 여인들 또한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왕 때, 말희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말희는 유시씨의 소국에서 보내진 공물이었습니다. 포악하긴 했지만 용기와 지략이 뛰어났던 걸왕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으나 말희를 보자 이성을 잃고 그녀에게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말만을 듣게 된 걸왕은 말희의 뜻을 좇아 주지육림을 만들어 환락을 즐겼으며 그 비용을 대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짜는 바람에 원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또한 충심으로 간언하던 신하들을 참수하여 그 주위에는 간신배들만이 우글거렸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은나라의 탕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였던 하나라는 이렇게 멸망하였습니다.

 

   하나라에 말희가 있었다면 은나라에는 달기가 있었습니다. 중국 3대 기서 중 하나인 『봉신연의』에서는 달기를 은을 멸망시키기 위해 여와가 보낸 요괴라고 할 정도로 미색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달기는 유소씨의 딸로 주왕에게 보내졌는데 달기를 본 주왕은 그녀를 매우 총애하였습니다. 달기 역시 말희 못지않게 환락을 즐기는 여인으로 주지육림을 부활시키고(한층 업그레이드 된 주지육림)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포락지형에 처하였으며 간언하는 신하들을 젓갈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심을 잃은 은나라는 현명한 신하였던 강태공을 둔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하였습니다.

 

   봉건제도로 유명한 주나라에도 어김없이 아리따운 여인 포사가 있었습니다. 포사가 태어나기 전 한 선인은 그녀가 나라를 망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과연 그 예언대로 유왕에게 보내졌습니다. 결코 웃지 않았던 그녀를 웃게 하기 위해 유왕은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았는데, 어느 날 비단 찢는 소리를 들은 포사가 미소 짓자 그 뒤부터 창고에 있는 모든 비단을 그녀 앞에서 찢었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는지 포사가 더 이상 웃지 않아 유왕이 고민하던 차에, 봉화꾼의 실수로 봉화가 올려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봉화를 본 제후들은 주나라 도성에 변이 생긴 줄 알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실수임을 알게 되자 모두 허탈한 심정으로 돌아서는데, 그 모습을 본 포사가 너무나 즐거워하며 웃었습니다. 그 후 유왕은 심심하면 봉화를 올렸고 달려오는 제후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포사가 너무 좋아서 정비까지 내쫓은 유왕은 결국 그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장인이었던 신후가 견융족과 합세하여 주나라를 치자 당황한 유왕은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역사가들은 하나같이 하, 은, 주 멸망의 책임을 아름다운 말희, 달기, 포사에게 돌리지만 사실은 치국에 힘쓰지 않고 주색에 빠져 백성들을 외면한 왕들에게 더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훗날 경국지색이라 불리는 이 여인들은 어쩌면 시대와 남성우월적인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일지도 모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치에 여자가 끼어들면 그녀들은 하나같이 경국지색이니, 팜므파탈이니 하는 오명을 쓰고 모든 잘못의 책임을 뒤집어씁니다. 하지만 역사에서 나라의 멸망과 같은 일의 원인은 그 나라가 지탱해 오며 축척되었던 많은 모순에 의한 결과이지 결코 한 명의 여자 때문은 아니지 않을까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걸왕이나 주왕, 유왕은 자기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고 집안도 엉망이었으며 나라까지 망쳤지만, 그 잘못의 대부분을 여자 탓으로 돌립니다. 그렇다면 빼어난 미인들이 곁에 있으면 모든 나라가 망해야 하겠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치자(治者)는 여자나 남자나 할 것 없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 일을 게을리 하여 나라를 잃었다면 수많은 원인들 중 하나였던 그녀들을 욕할 게 아니라 먼저 다스리는 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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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5-10-02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도 동생의 과제를 해 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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