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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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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그는 어디서든 《불안의 책》을 보기만 하면 얼른 지나쳐 갔다. 두 사람은 이 사건에 대해 말을 나누지 않았다. 이 일은 둘이 헤어질 때까지 앙금이 남아 있던 온갖 사연 가운데 하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이 굉장한 책이 저한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아세요?"
시몽이스가 책의 가격을 계산기에 찍으며 이어서 말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썼다는 느낌이에요." - P97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프라두의 책에 쓰여 있던 문장 가운데 하나였다.299

그레고리우스는 목록에 사랑이 빠졌다고 말했다. 조르즈의 몸이 뻣뻣해졌다. 잠깐 그는 술이 완전히 깬 듯했다.
"아마데우는 사랑을 믿지 않았소.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그 단어를 피했지. 그는 사랑에는 욕망과 만족, 편안함밖에 없다고 말하곤 했소. 이 모두가 헛된 것이라고 했지. 제일 허무한 건 욕망이고 그다음이 만족이며, 누군가에게서 보호를 받는다는 편안한 느낌도 언젠가는 결국 부서지는 것이라고 했소.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힘들어서 우리 감정을 다치지 않고 그 일들을 견디어내기는 힘들다는 것이었소. 그래서 신의가 중요하다고 했지. 그는 신의란 감정이 아니고 의지요 결정이며, 영혼의 견해 표명이라고 말했소. 우연한 만남과 감정을 필연으로 바꾸는 그 무엇이라고, 영혼의 숨결이라고 했지. ‘그저 낮은 숨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영혼의 한 부분이지‘라며.
그는 잘못 생각한 거요. 우리 둘 다 잘못 생각했지. - P305

난 늘 그곳에, 먼 시간의 저편에 있다. 결코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 과거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거나, 그곳에서 출발하며 산다. 이 과거는 단순하고 짧은 일화 형태로 반짝이는 기억이 아니라 현재다. 시간이 몰고 온 수천 가지 변화는, 시간을 초월하는 현재의 이 감각과 비교하면 꿈처럼 덧없고 비현실적이며 환영처럼 우리를 매혹한다.
이 변화들은 고통과 걱정거리를 안고 나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마치 완벽한 자신감과 용기를 지닌 의사라고 믿게 한다. 불안에 떨며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신뢰감은, 그들이 내 앞에 있는 한 나 스스로에게도 이것을 사실로 믿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환자들이 나가자마자 난 소리치고 싶다. 난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학교 계단에 앉아 있는 소년일 뿐이라고, 내가 하얀 가운을 입고 이렇게 거대한 책상 앞에 앉아 환자들에게 충고를 하는 것은 정말 하찮은 일이고 사실은 거짓이라고, 우리가 같잖은 천박함으로 현재라고 부르는 현상에 속지 말라고………….
우리는 시간상으로만 광범위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단조로운 바퀴 소리가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가면-그 여정이 아무리 짧더라도-우리는 스스로에게 가까이 가고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 P338

"난 가끔 오빠의 영혼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언어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어요."
이야기를 마친 멜로디가 말했다. - P432

"걸인은? 존엄한 걸인이 있을까?"
에사가 물었다.
"그의 인생에서 진실로 불가피한 일, 그가 어쩔 수 없는 일이있었다면 아마 가능할 듯싶군요. 그리고 그가 자기 자신의 편에서 있다면, 스스로를 옳다고 여긴다면 말입니다."
스스로의 편에 서는 것도 존엄에 속한다. 그래야 갈릴레오나루터처럼 공개적인 혹평을 품위 있게 극복할 수 있다. 그들뿐만아니라 자신의 죄를 부정하려는 유혹과 맞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 P512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프라두가 했던 질문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 물음이 눈빛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눈빛이란 없고, 읽힐 뿐이다. 눈빛은 언제나 ‘해석된 눈빛‘이다. 해석된 눈빛만이 존재한다. - P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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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7-29 2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리스본 책 읽었던 시간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문장들이 참 좋았었어요.^^

꼬마요정 2023-07-30 10:13   좋아요 1 | URL
그죠… 아마데우의 삶은 슬픈데 문장들은 참 좋았어요. 누군가를 알아가는 과정이 이와같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ㅎㅎㅎ
 

또한 그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눈 두 개 달리고 팔이 두 개 있으며 다리가 둘 달린 우리들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 기준이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일러줍니다. 다리에 뼈가 없는 사람도, 입에서 불을 뿜어내는 사람도, 지느러미 대신 발이 달린 물고기도, 머리에 뿔이 네 개나 달린 염소도 모두가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세상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일러줍니다. 무지개가 그처럼 눈부시게 찬란한 건 일곱 빛깔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겠지요.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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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미 충분히 다양한 기술과 편의를 경험해 봤다. 더 많은 기능을 요구했던 시대는 경험이 부족했던 시대다. 그런데 지금처럼 경험이 충분해지고 나니 얼아챈 것이다. 중요한 건 본질이고, 그것에 잘 집중하게 만들어주는 서비스가 더 필요하단 사실을 말이다.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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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난폭한 사람이나 악독하고 고집불통인 성직자를 성인으로 만들거나, 단지 우리보다 더 뛰어나다는 이유로 능력 있는 사람을 유령이나 귀신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다오.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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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6-19 15: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중세 시대에 약초 지식이 많은 여성들이 마녀로 몰려서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어요. 마녀사냥이 없었다면 의학의 역사는 달라졌을 거고, 지금쯤 병원에는 여성 의사들이 많았을 거예요.

꼬마요정 2018-06-19 17:25   좋아요 0 | URL
그렇죠. 자신들보다 좀 더 뛰어나고 똑똑할 리 없다고 혹은 자기가 모르는 건 모두 사탄의 짓이라고 생각하는 그 오만함이 수많은 생명을 죽였죠. 무섭습니다ㅜㅜ
 
[eBook] 경희 - 꼭 읽어야 할 한국 대표 소설 8 꼭 읽어야 할 한국 대표 소설 8
나혜석 지음 / 더플래닛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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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입고만 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알아야 사람이에요. 당신 댁처럼 영감 아들 간에 첩이 넷이나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당신도 알지 못한 죄이에요. 그러니까 여편네가 시집가서 시앗(남편의 첩)을 보지 않도록 하는 것도 가르쳐야 하고, 여편네 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합니다.(p.13)

공부를 많이 해야겠어요. 그래야 남에게 존대를 받을 뿐 아니라 저도 사람 노릇을 할 것 같아요. (p.19)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람인 이상에는 못할 것이 없다고 해요, 사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에요. (p.52)

경희도 사람이다. 그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인류의 여성이다.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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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8-06-12 0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대에 여성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느꼈던 좌절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네요. 여성도 사람이라는 그 당연한 인식을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위해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죠. 100년이 더 흐르면 어떤 사회가 되어 있을까요...

꼬마요정 2018-06-12 10:23   좋아요 0 | URL
100년이 더 흘렀을 땐 더 나은 사회가 되어 있으면 좋겠어요.^^
여성으로 태어나서 좌절을 느껴야 하다니.. 무슨 노비로 태어나서 좌절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모든 성이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건 참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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