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그는 어디서든 《불안의 책》을 보기만 하면 얼른 지나쳐 갔다. 두 사람은 이 사건에 대해 말을 나누지 않았다. 이 일은 둘이 헤어질 때까지 앙금이 남아 있던 온갖 사연 가운데 하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이 굉장한 책이 저한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아세요?" 시몽이스가 책의 가격을 계산기에 찍으며 이어서 말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썼다는 느낌이에요." - P97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프라두의 책에 쓰여 있던 문장 가운데 하나였다.299
그레고리우스는 목록에 사랑이 빠졌다고 말했다. 조르즈의 몸이 뻣뻣해졌다. 잠깐 그는 술이 완전히 깬 듯했다. "아마데우는 사랑을 믿지 않았소.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그 단어를 피했지. 그는 사랑에는 욕망과 만족, 편안함밖에 없다고 말하곤 했소. 이 모두가 헛된 것이라고 했지. 제일 허무한 건 욕망이고 그다음이 만족이며, 누군가에게서 보호를 받는다는 편안한 느낌도 언젠가는 결국 부서지는 것이라고 했소.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힘들어서 우리 감정을 다치지 않고 그 일들을 견디어내기는 힘들다는 것이었소. 그래서 신의가 중요하다고 했지. 그는 신의란 감정이 아니고 의지요 결정이며, 영혼의 견해 표명이라고 말했소. 우연한 만남과 감정을 필연으로 바꾸는 그 무엇이라고, 영혼의 숨결이라고 했지. ‘그저 낮은 숨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영혼의 한 부분이지‘라며. 그는 잘못 생각한 거요. 우리 둘 다 잘못 생각했지. - P305
난 늘 그곳에, 먼 시간의 저편에 있다. 결코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 과거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거나, 그곳에서 출발하며 산다. 이 과거는 단순하고 짧은 일화 형태로 반짝이는 기억이 아니라 현재다. 시간이 몰고 온 수천 가지 변화는, 시간을 초월하는 현재의 이 감각과 비교하면 꿈처럼 덧없고 비현실적이며 환영처럼 우리를 매혹한다. 이 변화들은 고통과 걱정거리를 안고 나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마치 완벽한 자신감과 용기를 지닌 의사라고 믿게 한다. 불안에 떨며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신뢰감은, 그들이 내 앞에 있는 한 나 스스로에게도 이것을 사실로 믿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환자들이 나가자마자 난 소리치고 싶다. 난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학교 계단에 앉아 있는 소년일 뿐이라고, 내가 하얀 가운을 입고 이렇게 거대한 책상 앞에 앉아 환자들에게 충고를 하는 것은 정말 하찮은 일이고 사실은 거짓이라고, 우리가 같잖은 천박함으로 현재라고 부르는 현상에 속지 말라고…………. 우리는 시간상으로만 광범위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단조로운 바퀴 소리가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가면-그 여정이 아무리 짧더라도-우리는 스스로에게 가까이 가고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 P338
"난 가끔 오빠의 영혼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언어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어요." 이야기를 마친 멜로디가 말했다. - P432
"걸인은? 존엄한 걸인이 있을까?" 에사가 물었다. "그의 인생에서 진실로 불가피한 일, 그가 어쩔 수 없는 일이있었다면 아마 가능할 듯싶군요. 그리고 그가 자기 자신의 편에서 있다면, 스스로를 옳다고 여긴다면 말입니다." 스스로의 편에 서는 것도 존엄에 속한다. 그래야 갈릴레오나루터처럼 공개적인 혹평을 품위 있게 극복할 수 있다. 그들뿐만아니라 자신의 죄를 부정하려는 유혹과 맞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 P512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프라두가 했던 질문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 물음이 눈빛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눈빛이란 없고, 읽힐 뿐이다. 눈빛은 언제나 ‘해석된 눈빛‘이다. 해석된 눈빛만이 존재한다. - P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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