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선옥
 
                                                                                                                                  최을영 


"공선옥의 소설은 담론의 영역에서 실종된 사회하층민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한번도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의 상황을 발화하지 못한 존재들이다. 세상을 향해 내던질 말의 내용은 있지만, 그 말하는 방식을 찾을 수 없는 존재들이 공선옥의 소설에는 흔히 등장한다. 공선옥의 소설쓰기가 오늘날의 현실에서 대단히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가 제 목소리를 갖고 있지 못한 이 민중들 혹은 하위주체들의 '아가리'를 대신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의 평론집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새움, 2005)에 실린 공선옥 소설에 대한 평이다. 공선옥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그들의 고통스런 삶, 그리고 그 안에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어미마음(모성)'을 이야기한다. 아니, 이명원의 말처럼 그들의 '아가리'를 대신 열어주고 있다.

등단할 때부터 그는 줄곧 가난하고 소외 받은 이들의 목을 틔워주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공선옥의 펜을 통해 그들을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질릴 만도 하건만 공선옥은 지금껏 그 역할을 자임해 왔다.

2006년 1월 공선옥을 비롯한 소설가·시인 4명과 10명의 사진작가들이 내놓은 인권 사진집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현실문화연구)도 그런 얘기다. 이 책에서 공선옥은 <엄마, 저 오네>와 <촌아, 울지마> 등의 사진에 글을 보탰다.

공선옥은 1991년 {창작과 비평}에 중편 [씨앗불]을 발표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이전에 그의 삶은 신산(辛酸)했다. 공선옥은 1963년 전남 곡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 시절, 공선옥은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글에 목말라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노트에 쓰기도 했고, 벽지로 발라놓은 신문이며 누에를 키우기 위해 가져온 헌 신문지를 샅샅이 읽기도 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너무 슬프고 힘든 일이 많으니까 어떤 통풍구가 심리적으로 필요했거든요. 살고 싶었으니까요. 그것이 바로 글이었던 것 같아요."

1983년 전남대학교 국문학과에 들어간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게다. 그러나 아버지가 키우던 소들이 병들어 죽고 가계가 몰락하자 아버지는 빚을 갚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막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공선옥은 1학년 1학기에 대학을 중퇴하고, 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버스 안내양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버스 안내양으로 구로공단의 공장노동자로 전전하며 생계를 위해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막장과도 같은 현실에서" 살았다. 그 사이 결혼도 했지만 사는 것은 힘들었다. 그런 그에게 글 쓰는 것은 하나의 위안이었고, 우연찮게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무렵 쓴 글로 등단하게 됐다. 공선옥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나 자신이 소설가로 살아가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80년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나에게 광주의 비극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가계의 몰락 앞에서 다니던 대학을 1학년 1학기에 중퇴하고, 버스 안내양으로 시작, 구로공단의 공장노동자로 생계를 영위해야 했던 막장과도 같은 현실에서, 소설쓰기란 내게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이었던 남편의 고통을 뼈아프게 지켜보면서, 광주 이후에도 세상이 아무런 문제없이 너무나 평화롭게 흘러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꼈다. 어느 날, 나는 그것이 소설인지도 모르고, 지나온 내 삶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노트에 적어 내려갔다. 그런데 다 쓰고 보니, 사람들이 그것을 소설이라고 말해주었고, 어찌어찌 하다보니 소설가로 등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1991년의 [씨앗불] 이후 공선옥은 글로 먹고살겠다고 작정하고, 끊임없이 작품을 내놓았다. 그렇게 내놓은 작품이 장편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1993)과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1994), 장편 {시절들}(1996), 소설집 {내 생의 알리바이}(1998), 산문집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2000), 장편 {수수밭으로 오세요}(2001), 소설집 {멋진 한 세상}(2002), 장편 {붉은 포대기}(2003), 산문집 {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2003), 소설집 {유랑가족}(2005), 산문집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2005) 등이다.

이런 작품을 내놓는 사이 공선옥은 1995년에 신동엽 창작기금을 받았고, 2004년에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2005년에는 올해의 예술상을 받았다. 2001년에는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 후보로 추천됐으나 공선옥은 이 상을 거부했다. 그는 후보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글을 쓰게 하는 {조선일보}의 행태를 "상금 5,000만원을 미끼로 작가들을 줄 세우기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기자한테 그랬다. 나 솔직히 돈은 탐난다고. (내가 거부한다고 하면) 비웃을지 몰라도 돈 때문에 떨어지는 감 받아먹으려고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입 떡 벌리고 있긴 싫다. 작가가 작품으로 말했으면 됐지 구구절절이 뭘 더 말하라는 건가."
작가적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는 얘기다. 공선옥이 생각하는 작가는 이런 사람이다.

"작가는 '안다'는 사람들 아닌가. 지금 우리 사회는 질곡에 빠져 있다. 질곡이란 운신이 힘들다는 거다. 그렇게 단칸방에 사는 사람들의 숨통을 조금이라도 터주는 게 작가 역할 아닐까."

* 월간 인물과 사상 2006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2006/02/25 [11:37] ⓒ인물과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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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조선인 > 브랜드 이미지 실추?

인사팀에서 들은 이야기.

회사에서 사회환원사업으로 후원하는 단체중 칠드런세이브가 있다.
칠드런세이브는 주로 아동폭력이나 방임으로 고통받던 아이들을 돌봐주는 곳으로,
결연위탁이나 시설보호를 받기 전의 중간 역할을 한다.
아이들은 직접적인 학대의 희생자인 경우도 있지만,
가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방치된 경우가 많은 편이다.

회사에서는 가정의 달을 맞아 이번에는 특별히 운동화를 선물해주기로 했는데,
워낙 대량구매를 해야 하다 보니 직거래를 위해 공장으로 연락했다가 여기저기 퇴짜를 맞았단다.
화승산업(르까푸, 월드컵, K.swiss), 나이키 등의 유수한 브랜드에서
대량구매의 이유를 묻더니 그런 아이들이 신으면 브랜드 이미지가 실추될 수 있으니,
차라리 현금으로 후원 해줄 수는 있어도 팔 수는 없단다.
하아, 정말 기가 막힌 고급화 전략이다. 고발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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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긴즈부르그 이야기

요즘 당면한 과제 때문에 두통과 무기력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자투리 시간에 읽는 책들이다(일종의 '당의정'이다). 엊그제부터 붙들고 있는, '현대 역사학의 거장 9인의 고백과 대화'를 담은 <탐史>(푸른역사, 2007)가 그런 책이다. 이미 책이 출간되었을 때 소개 페이퍼를 올린 적이 있지만, 불만스런 제목과 포맷에도 불구하고 책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며 내용 또한 알차다. 나는 이 탐할 만한 책을 도서관에서 몇 주 전에 대출해놓고 바로 며칠 전부터야 한두 페이지씩 읽고 있다.

 

 

 

 

아홉 명의 역사학자들 중 가장 먼저 읽고 있는 건 <치즈와 구더기>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카를로 긴즈부르그'이다. "카를로 긴즈부르그(1939년생)는 현재 활동 중인 역사가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그만큼 글을 잘 쓰는 경우를 찾기 힘들며, 게다가 엄청나게 폭넓은 관심사를 따라갈 사람도 거의 없다."(464쪽)는 게 서두이다.

사실 긴즈부르그에 관해서라면, 주경철 교수의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문학과지성사, 1999)에서인가 처음 이름을 접해보고 <치즈와 구더기>(문학과지성사, 2001)도 구입했었지만 아직 읽어보진 않았기 때문에 명성만을 알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눈길을 잡아끈 건 그가 러시아계라는 사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1939년 토리노에 정착한 러시아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아래 사진의 부부가 그의 부모이다). 

"아버지 레오네 긴즈부르그(1909-1944)는 러시아 문학 교수였는데, 카를로가 다섯 살이었던 1944년 파시스트 치하의 감옥에서 죽었다. 반면 어머니 나탈리아 긴즈부르그(1916-1991)는 20세기의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이탈리아 작가들 중 하나가 되었다." 역사가로서 카를로가 풍부한 문학적/문필가적 재능을 어디에서 물려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그의 아버지는 소설가인 어머니의 편집자이기도 했다). 대담 중에 카를로가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아버지 레오네는 고골(리)의 <대장 불(리)바>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했으며, 어머니 나탈리아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권('스완네쪽으로')을 이탈리아어로 옮겼다(대단한 집안 아닌가?!).

호기심에 나는 그의 가계에 대한 뒷조사(?)를 좀 해봤는데, 이유는 긴즈부르그란 이름에서 바로 떠올릴 수 있는 러시아의 유명한 문학자 리디야 긴즈부르그(1902-1990)가 카를로의 인척이 되지 않나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리디야의 저작은 내년쯤에 우리말로 출간될 것이다). 리디야는 카를로의 아버지 레오네보다 46년을 더 살았지만 나이는 7살이 더 많다. 두 사람은 모두 러시아에서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오데사 태생이다(20세기초반에 '오데사 마피아'가 유명했다). 정확한 촌수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모두가 '긴즈부르그 패밀리'에 속했을 거라는 건 미루어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 가계에 속하는지라 카를로는 어린시절 문학에 투신하겠다는 생각을 품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역사학이었으며 일찍부터 학계를 놀라게 할 독창적인 업적들을 내놓게 된다. 그가 27세에 펴낸 첫 저작이 바로 <베난단티>(1966)이다. 우리말로는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길, 2004)라고 옮겨진 책인데, '16세기와 17세기의 마법과 농경의식'이 그 부제이다.

나도 아직 구입하지는 않은 책인데(이번 여름방학에 읽어볼 계획이다) 소개를 잠시 옮겨오면 "미시사 방법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1966년 작을 한국어로 옮긴 책. 널리 알려진 <치즈와 구더기>보다 10년 앞서 발표된 것으로 긴즈부르그 저술세계의 출발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책은 1618년에 일어난 마리아 판초니의 재판을 중심으로, 자생적인 민중문화가 기독교로 대표되는 엘리트 문화의 탄압을 받으면서, 어떻게 '이단'으로 규정되고, 마법으로 동화되어 갔는지를 밝히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대단히 논쟁적이면서 혁신적이라는 평을 얻은 이 데뷔작에 이어서 그를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국제적 유명인사로 만든 것은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세계관에 대한 연구인 <치즈와 구더기>였다."(465쪽) 이 작품을 통해서 긴즈부르그는 '미시사'의 선두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며 그뒤 '미시사'란 이름은 곧 유행의 물결을 타게 된다(긴즈부르그 자신은 미시사와 거시사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시사와 거시사, 사건과 구조를 상호 보완하려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그동안 긴즈부르그는 개척자적인 연구의 많은 부분을 책이 아니라 에세이 형태로 간행해왔다. 이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경우가 <징후들>이라는 그야말로 뒤엉킨 실타래 같은 인상의 이름을 가진 글인데, 무려 13개 국어로 번역된 바 있다."(468쪽)

이에 대해 역자인 곽차섭 교수는 "아마 이제는 적어도 14개 국어라고 해야 할 듯싶다. 왜냐하면 2000년에 한국어로도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곽차섭 엮음, <미시사란 무엇인가>(푸른역사, 2000), 제4장('징후들: 실마리 찾기의 푸리')"라고 주석을 붙였는데, 보충하자면 이 에세이가 포함된 책 <신화, 상징, 징후>(1986)가 지난 2004년에 러시아어로도 번역이 됐으므로 '적어도 15개 국어'라고 해야 할 듯싶다(현재로선 유일하게 러시아아어로 번역된 책이며, 오래전에 모스크바 통신에 적어놓은 바 있지만 데이비드 로웬덜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개마고원, 2006)와 함께 지난 2004년 한 러시아 언론이 뽑은 역사부문 '올해의 책'이었다).

Мифы - эмблемы - приметы. Морфология и история.

1998년 볼로냐에 있는 긴즈부르그의 자택에서 진행된 대담에서 질문자인 '마리아 루시아 팔라레스-버크'가 처음 던진 질문은 "당신의 생각과 관심사를 이해하는 데 출신과 교육의 어떤 측면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470쪽)였다.

긴즈부르그는 "한 개인이 어린애로부터 어른으로 가는 식으로 역사를 일직선적으로 보는 목적론적 접근방법에는 회의적"이라는 단서를 먼저 단 후에 자신의 성장배경에 대해서 자세하게 답한다. 이미 언급한 부분이지만 "내 외할머니를 제외하고는 아버지나 어머니 쪽 모두 유대계입니다. 아버지는 오데사 출신으로 어릴 때 이탈리아로 건너와 토리노에서 성장하여 젊은 시절에 이탈리아 시민이 되었어요. 그는 자신이 러시아 출신이라는 것만큼이나 이탈리아인이라는 것에 대단히 집착했습니다." 아버지의 반파시스트 활동은 그러한 정체성과 연관된 것일 텐데, 그 결말은 감옥에서의 이른 죽음이었다.

해서 소설가인 어머니와 함께 어린시절을 보낸 긴즈부르그의 이런 고백은 자연스럽다. "젊은 시절 나는 어머니처럼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곧 그쪽에 별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어쨌든 나는 지금도 그와 같은 글쓰기에 많은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마치 역사 서술을 향한 열정이 소설을 쓰는 데 대한 열정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죠."(472쪽)

유려한 번역서이지만 강조한 대목은 문맥상 맞지 않는데(역자의 방심이겠다), 긴즈부르그가 결국엔 소설가가 아니라 역사가가 됐으므로 '소설을 쓰는 데 대한 열정'이 '역사 서술을 향한 열정'으로 바뀌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원문도 확인해보니 "...as if my passion for writing fiction was diverted to my passion for historical writing."(187쪽)이라고 돼 있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댐이나 도랑같은 것이라 할까요. 어딘가를 억지로 막아놓으면 옆으로 더 세게 뿜어져 나오니까요. 어떤 것이든 아무리 길을 막아놓아도 결국에는 새로운 길의 일부가 되는 법이지요." 사실 아이들은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 아닌가? 그걸 억지로 막아놓으면 '댐'만 터질 뿐이다!

"화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또 다시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다른 아파트로 이사할 때 그동안 그린 그림 전부를 남겨둔 채 그냥 떠나버렸어요. 하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 역시 내 일부로 되었습니다. 마치 잘못된 행마가 결과적으로 오히려 좋은 행마로 바뀌듯이 말이죠. 나는 미술사가가 되겠다는 생각까지도 한 적이 있습니다만, 결국 나중에 조금은 그것을 이룬 셈이 되었지요."(474쪽)

그렇다는 것은 긴즈부르그가 따로 미술사가로서의 훈련을 받지 않았음에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티치아노, 장 푸케 등 미술과 관련한 여러 편의 글을 썼기 때문이다. 긴즈부르그 왈 "전쟁은 너무 중대한 일이라 장군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고 했다는 클레망소의 말을 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이는 다른 영역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말이라고 봅니다. 미술은 너무 중요한 일이라 미술사가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다는 거지요."(491쪽)

그의 미술 사랑? "난 단순히 그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림을 사랑하죠. 난 정말로 그림을 사랑합니다. 실제로 나는 도서관에서 요청한 책이 올 동안 역사 잡지가 아니라 미술사 잡지를 읽고 있는 경우가 보통이예요.(...) 화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처럼 나에게 중요한 경험이지요. 꽤 오래 전의 일인데요. 루벤스에 무지한 상태에서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느낀 전율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는 새로운 장소, 작은 마을과 교회들을 찾아 이탈리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지요. 그때 난 죽을 때까지도 이탈리아 대부분을 여전히 알지 못할 것이라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 모든 것을 다 보려면 아마 서른 번 정도를 살아야 될 겁니다. 하물며 이탈리아 바깥 세계는 또 어떻겠어요."(491쪽)

해서, 긴즈부르그를 읽는 데만도 수년은 걸릴 것이다. 하물며 다른 저자들은 또 어떻겠는가...

07. 05. 07.

P.S. 본문에서 러시아어로 번역됐다고 한 <신화, 상징, 징후(Miti, emblemi, spie)>('징후'보다는 '실마리'가 더 적합한 번역이겠다)의 영역본은 지난 1992년에 나온 <실마리, 신화, 그리고 역사학의 방법>이다. 서문을 포함하여 248쪽인데, 348쪽 분량인 러시아어본과 대비된다(대조해봐야겠다). 책은 러시아어본이 나왔을 때 이미 10개 국어로 번역된 상태였다. 한국어본은 언제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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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글샘 > 4.3 사건의 진실...

제주의 구석구석을 다니다보면 만나게 되는 역사의 흔적이 있다. 4.3학살사건이다. 1948년 4월3일에 시작된 군인과 경찰이라는 공권력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관광지, 제주도 곳곳이 비극의 공간이었던 4.3학살의 현장이다. 녹색순례 길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9일간이지만 직접 발품을 팔아 제주도 중산간을 비롯한 여러 곳을 살펴보는 일정이라 4.3학살현장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순례단 중에서 20-30대의 젊은층은 4.3이라는 역사에 대해 막연하거나 모르는 경우도 있어서 새롭게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는 계기도 되었다. 녹색순례 7일째, 본격적으로 4.3학살의 현장을 살펴보았다. 유사이래 제주도 최대의 비극이자 아픔의 현장을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전4.3연구소 연구원이었던 제주사람 강태권씨가 생생한 안내를 해주었다.  

▲ 제주는 마을 중심에 정자목(팽나무)을 심고, 집 앞에 난을, 집 뒤편에는 대나무를 심어 키움. 영남동 등 사라진 마을 집터와 마을 중심은 이를 통해 알 수 있음. 영남동 마을을 외롭게 지키는 정자목과, 마을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지석


순례단이 아침에 만난 4.3학살의 현장은 서귀포시 인덕면 광평리였다.  제주에서 행정구역상 가장 높은 해발 고도에 위치한 마을이다. 4.3 사건 때 한림읍, 안덕면, 대정읍 등의 지역주민들이 이곳을 거쳐 한라산으로 피신하였다. 토벌대들도 이곳을 거쳐 진압에 나섰다. 광평리가 왜 주요 길목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이곳의 지형을 알아야 한다. 서귀포 동쪽 지역의 지형은 초원과 같은 형태이지만 서귀포 서부지역은 완전한 밀림지역이기 때문에 이곳이 주요 길목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곳 광평리도 4.3의 아픈 기억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 광평리, 이곳을 통해 한림, 대정, 안덕 주민들이 토벌대를 피해 한라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녹색순례 구간마다 4.3 사건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순례 3일째 지나간 성산일출봉 옆 너른바위를 관치기라 부른다. 4.3 사건 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학살을 당했고, 그래서 무수한 관을 그곳에서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성산 일출봉 옆 너른바위(일명 관치기). 이곳은 4.3 사건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이곳 성산읍에서 무수한 관을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순례 4일째 지난 성읍민속마을 바로 아래인 표선면 가시리의 지미왓 인근의 새가름마을도 그러한 곳이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새가름마을은 가시천 동쪽에 형성되어 신설동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320년 전 오씨가 중심이 되어 만든 마을이다. 20여 가구에 100여명이 조, 메일, 콩 등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면서 평화롭게 살던 마을이었다. 1948년 11월 15일 마을 전체를 군인들이 불질러 없애고 주민들을 표선국민학교에 수용시켰다. 그중 마을 주민 17명이 속칭 버들못 근처에서 처형당하는 등 마을 주민 25명 4.3사건으로 희생당했다. 49년 2월 가시리 현재 마을사무소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돌아와서 새로이 마을을 일으켰다. 새가름에도 2가구가 들어와 옛마을에 생기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으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마을을 떠나면서, 새가름 마을은 영원히 사라졌다. 가시리에 인접한 동백마을 신흥리는 더 큰 피해가 있었다. 4.3학살 때 마을 주민 140여명이 사망하였다.

▲ 4.3 사건 당시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학살당해 마을의 흔적만 남고 사람이 살지 않은 남제주군 표선면 새가름


순례 6일째, 한라산 남쪽을 관통하는 산록도로 근처에도 곳곳이 4.3의 피해현장이다. 탐라대학교와도 그리 멀지 않은 서귀포시 영남마을이 대표적이다. 화전마을이었던 영남마을은 메밀, 조, 콩, 밭벼 등을 심어서 먹고사는, 법 없이도 살아가던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일제 때부터 애국심도 뛰어나 1918년 마을 주민들이 법정사항일운동에 참여하여 6명이 구속되었고 이중 김두삼(당시 25세)은 옥사하였으며, 후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마을도 4.3학살을 피해가지 못했다. 48년 11월 20일 마을주민 60명 가량이 군인에게 학살당했다. 한집안 14명이 몰살을 당하기도 했고, 10세 미만의 어린아이도 18명이 죽었다. 4.3은 양민학살이었기 때문에 노인과 부녀자, 심지어 어린이도 많은 피해를 당했다. 인구비례로 가장 피해가 큰 마을이었던 영남동은 법정 지명만 남은 채, 행정으로는 이미 그 의미가 사라졌다. 이곳도 사라져버린 마을이 된 것이다. 이외에도 4.3의 현장은 제주도 전역에 널려 있다. 관광객들이 무심코 지나가는 현장도 예외는 아니다. 제주공항도 정방폭포도 학살의 현장이었다.

▲ 서귀포시 영남동 마을, 4.3 이전 마을 사람들이 우물로 사용하던 자리. 이제는 연못으로 변해버렸다.


5.10단선을 반대해서 일어난 4.3 학살의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시기는 4.3이 일어난 48년 4월에서 약 6개월이 더 지난 그해 초겨울부터다. 1948년 11월 15일부터 이듬해 1949년 3월까지 중산간지대 마을은 초토화 되었다. 전체 4.3사건의 사망자 중 약 80%가 이 시기에 죽었으며, 70여 개 중산간 마을 중 성읍, 애월읍 정도가 예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4.3학살은 제주도민들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제주의 정체성속에 한의 정서로 뚜렷하게 남아 있다.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속으로 흐르는 정서가 더 뚜렷한지도 모른다. 곳자왈 아래 숨골을 따라 흐르는 지하수처럼 제주의 가슴에 잊혀질 수 없는 정서가 되었다. 4.3의 가장 큰 상처는 저항할 능력이 없는 무고한 양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점이다. 대부분의 제주도 사람들에게 4.3은 비슷하게 인식된다. 국가에 의해서 그것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는 군인과 경찰에 의해서 참혹하게 학살당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육지에서는 이념의 잣대로 다르게 해석할지 몰라도, 적어도 제주도에선 4.3에 대한 1차적인 사건의 규정은 끝났다. 4.3은 이념의 대립이 빚은 결과가 아니다. 육지에서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지만, 적어도 제주에서 4.3은 군인과 경찰이라는 공권력에 의한 무자비하게 진행된 양민학살이었다. 죽어간 자들의 죄라고는 중산간지대의 마을에 살았다는 단 한가지 그 이유뿐이다.

▲ 서귀포시 영남동 마을 사람들이 학살당한 장소 전경


순례단이 오후에 방문한 곳은 동광육거리다. 여섯갈래의 길이 교차하는 제주 서부의 길목이자 교통의 요지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지나가는 곳이다.  지방도를 비롯한 주요도로가 지나는 곳이라 파출소도 있고, 주요소와 식당, 식료품점 등이 있다. 이곳에 4.3학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작은 공동묘지가. 그때 학살당한 주민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가족들이 그 한이라도 풀기 위해 시체가 없는 묘소를 조성한 한 것이다. 4.3학살의 희생자들의 영혼을 쉬게 하는 헛묘이다.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807번지-4에 자리 잡고 있다. 동광리 헛묘는 7기는(2기는 합장묘) 동광리 출신 임문숙일가 9명의 영혼을 수습한 묘지다. 헛묘는 시신을 찾지 못하였을 때, 생전에 입던 옷이나 유품 등을 넣어 만든 분묘이다.



▲ 동광리 마을 초입에 만들어진 4.3 유적지 ‘헛묘’에는 당시 처형당한 동광리 주민 임문숙씨 일가 9명의 영혼을 수습한 7기(2기는 합장묘)의 묘가 있다.  


동광리는 초토화작전이 전개되던 48년 11월 21일 국방경비대 제 9연대에 의해 온 마을이 불태워졌다. 군인들은 마을에 들어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모두 폭도로 간주하여 학살을 자행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인근 큰널궤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곳도 발각되어 또 다시 도주하였으나, 눈에 남긴 발자국때문에 한라산 영실기암 인근에서 볼레오름에 체포되었으며, 서귀포의 수용소에 옮겨져 49년 1월 22일 정방폭포에서 학살되었다. 그 때 동광리 주민들도 40여명 학살되었다. 유족들은 군인들이 무서워 시신을 수습할 엄두를 못내다가 몇 년후에야 비로소 정방폭포에서 죽은 영혼을 달래고 이곳 동광리 초입에 헛묘를 조성한 것이다. 억울한 원혼을 위로하는 듯 헛묘의 비석과 봉분 주변에는 보라색 고깔제비꽃이 피어 있었다. 순례단은  동광리일대의 4.3유적지 곳곳을 샅샅이 살펴보면서 4.3이 제주의 마을공동체와 주민들을 삶을 얼마나 모질게 유린했는가를 생생히 확인했다. 동광리 비극의 정점인 큰널궤라는 굴속으로 직접 기어들어가, 주민들이 군인들의 학살을 피해서 어둠속에서 숨죽였던 현장을 체험하였다.  

▲ 4.3 당시 마을 사람들이 토벌대의 학살을 피해 피난 생활을 했다는 동광리에서 서북쪽으로 2.5km 정도 떨어진 도너리 오름 근처에 위치해있는 큰넓궤(궤:작은 천연동굴).



▲ 4.3 당시의 피난민들의 고난을 체험하기 위해 동광 큰넓궤로 들어서는 순례단원들.




▲ 겨우 사람 하나가 지나기도 힘든 비좁은 동굴 내부에서 순례단은 피난민들이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한 힘들었을 당시 상황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꼈다.


4.3의 현장은 이제 역사의 현장이 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역사적인 재평가도 진행 중이며, 정부에 의한 명예회복도 진행 중이다. 제주4.3사건특별법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직 4.3문제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2008년에는 정부가 지원하고 제주도청이 주관하여 4.3평화공원이 조성된다. 600억 원 가량의 예산을 들여, 죽어간 양민의 영령을 위로하고 4.3학살의 역사적 의미를 인권의 차원에서 정립하자는 취지다.

▲ 4.3 사건 당시 억울하게 죽어간 동광리 마을 사람들의 서글픈 사연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세운 비


4.3에 대한 기록과 자료가 온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다. 인터넷 인프라가 세계최고인 나라답게 4.3에 관한 현장과 주민들의 아픔을 제대로 정리하는 것이 절실하다. 아울러 대한민국의 누구라도 인터넷으로 4.3사건의 전말과 학살의 현장, 관련 유적, 기념추모시설과 추모비, 관련자의 증언 등을 접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4.3평화공원이 중심이 되어서 추진해야 할 일들이다. 항쟁과 폭동이라는 시각도 존재하는 현실이만, 분명한 사실의 기록은 어떤 논리와 이유에서도 미룰 수 없다. 그것을 방해하거나, 저지하는 것은 죽어간 제주양민들에 대한 또 한번의 역사적 학살이자, 4.3의 진실을 가리려는 시도다. 이것은 민족에게 역사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 4.3 사건 당시 토벌대 주둔소로 쓰였던 돌성이 있는 녹하지 오름(알 오름)을 오르는 순례단.

▲ 녹하지 오름(알 오름)에 올라 순례단에게 4.3 사건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설명해주는 강태권(제주도민)씨


해방과 건국의 과정에서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대결과 아픔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무수한 양민들이 사라져갔다. 그 대표적 사례가 제주도 4.3학살의 피해자들이다. 해방 이후 역사는 여전히 뜨거운 논란이다. 하지만 4.3사건처럼 공권력에 의해 무고한 양민 학살이 집단으로 자행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정부는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를 냉정히 기록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우리나라에서 이런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역사의 기록을 위해 청춘을 바친 제주사람 강태권씨  

20년 가까운 세월을 4.3의 아픔과 상처를 두 눈으로 응시한 제주사람이 있다. 작년까지 제주4.3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강태권씨다. 대학 졸업 이후 88년부터 지금까지 4.3의 학살과 피해 현장을 찾아서 답사하며 증언을 채록하고 현장을 기록하였다. 강씨는 중산간을 비롯하여 제주도 전역을 다니면서 피해자들이나 목격자들을 찾아서 이야기를 확인하고 학살의 현장을 발굴하는 연구활동을 전개하였다. 강전연구원은 4.3사건이 제주도 전역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웬만한 중산간 마을은 죄다 다녀본 셈이라한다. 88년에 제주도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제주4.3학살에 대한 역사적 진실 규명과 재평가에 대한 요구가 모아지면서, 제주 4.3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교사, 향토역사연구자 등이 중심되어 연구소가 운영되었다고 한다. 국민의정부 이전까지 어려운 재정 상황 속에도 제주의 한을 끌어안고 역사적 기록으로 후대에게 정확히 남기자는 의지와 소신들이 연구소의 동력으로 이어졌다. 제주 사람 누구에게나 피해갈 수 없는 4.3에 대한 현장의 발굴과 기록이라는 어려운 일들을 지난 20년 묵묵히 수행했고 그 대표적 일꾼 중 한 사람이 강태권 전연구원이다.  

▲ 4.3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청춘을 바친 강태권씨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가장 어려웠을 때가 언제냐는 물음에 “처음에는 말문을 열지 않았다.가슴의 응어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언젠가 중산간 마을에서 한 촌로를 만난자리에서 ‘알랑, 뭣헐띠’라는 말을 들었다. 지금도 그 말이 기억에 남아 있다.” 면서 사연을 전해 주었다. 이 말은 제주방언으로 ‘당신이 알아서 뭐하겠느냐?’라는 의미로 달리 표현하면, ‘알고는 있지만 말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한다. 강연구원은 “그 말이 바로 4.3살을 직접 겪은 분들의 응어리이자 맺힌 한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강태권씨는 지금도 제주의 4.3현장을 방문하거나 답사하는 이들과 함께 4.3역사기행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43현장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책이나 자료를 넘어 직접 현장을 발굴하고 피해자들과 만나서 기록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기에 그와 4.3의 현장을 답사하는 것은 4.3의 실체를 단박에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강태권씨는 “4.3은 학살의 역사이자. 공권력의 무자비한 주민학살에 대한 항쟁의 역사였다. 역사적 재평가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4.3이 온전히 평가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4.3은 통일이 되어야 온전히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라며 4.3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우리 모두의 숙제라고 이야기 했다. 4.3학살은 한국전쟁 다음으로 우리 현대사에 새겨진 가장 큰 상처다. 강태권씨는 그 역사를 그 어떤 학자보다 정면으로 끌어안고 20대에서 40대까지 이어왔다. 역사에 대해 후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 아팠던 역사를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역사를 알리기 위해 제주도 전역을 걷고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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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조선인 > 하드디스크 공간 늘리기

하드디스크는 창고와 같이 많은 프로그램과 데이터들을 저장하는 곳이다. 이 하드디스크의 공간이 부족하면 컴퓨터 속도도 떨어지는등 컴퓨터 사용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맨 처음 컴퓨터를 구입했을 경우는 하드디스크에 많은 공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사용기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그 많던 하드디스크 공간은 만원버스마냥 꽉 차 버리는 경우가 있죠.

용량이 큰 하드디스크로 교체하면 되지만 추가 비용이 들어가므로 필요 없는 파일들을 삭제하여 약간이나마 하드디스크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생각보다 많이 확보할 수 있도 있다.

삭제해도 되는 파일들의 확장자

  • old ▶ 윈도우를 여러번 설치할 경우 시스템에서 발견되는 이전 버전의 파일들
  • chk ▶ 하드 디스크 검사후 발생한 오류를 저장한 파일
  • tmp ▶ 잘 아시다시피 임시파일입니다.
  • hlp ▶ 도움말 파일
  • gid ▶ 도움말 파일인 *.hlp 파일을 열면 생기는 인덱스 파일
  • --- ▶ 윈도우 재설치 생기는 백업(back up)파일
  • bak ▶ 알다시피 back up 파일(위의 백업파일과는 약간 다르죠)
  • fts/ftg ▶ 도움말 파일(*.hlp)과 관련된 파일로 도움말에 내장된 색인 파일


위에 나열된 파일들은 삭제를 해도 무관한 파일들입니다.
삭제 방법은 '
F3' 키나 '윈도우 키'+'F' 키를 누르면 '찾기'창이 나온다.
(또는
'시작'→'찾기'→'파일 또는 폴더'를 클릭)

거기에서 '이름'에다가 삭제하고픈 파일들의 확장자를 적고 '지금찾기'를 클릭 한다.
예를 들어 확장자가 .hlp 파일을 삭제할려면 이름란에다가
*.hlp 라고 적으시고 찾으시면 확장자가 .hlp 인 파일들이 나타날 거예요. 그럼 삭제!

위의 *.hlp라는 말은 확장자가 .hlp인 파일을 말합니다.
확장자가 .bak파일을 삭제할려면 *.bak 라고 적으시면 되겠죠

특히 tmp 파일은 c:\windows\temp에 많이 쌓이는데 탐색기에서 직접 이동하여 전체 삭제하여도 된다. 혹 실행중인 파일일 경우 안 지워지므로 실행중인 프로그램을 모두 종료하고 삭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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