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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 하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평점 :
역사는 흐른다. 쉴새없이 흐르는 물이 멈추기를 잊어버린 것처럼 역사도 멈추기를 거부한다. 역사는 개개인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아니, 기다려야 하는 이유를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역사의 한 단면을 얼려 그것이 멈춰지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과거를 현재의 어머니로 받든다.
철통같은 부계사회에서 여성이 권력을 잡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과거 몇 몇 여인들은 그 일을 해냈다. 말희, 달기, 포사, 서시, 양귀비 등 내노라하는 경국지색들은 그들의 지아비 황제를 요염한 미소와 농염한 자태로 유혹하여 정사를 좌지우지 하였다. 그들에게 돌아간 것은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거친 비난과 돌세례였다. 한고조 유방의 아내 여후나 당고종의 아내 측천무후, 청나라 함풍제의 아내 서태후 등은 지위와 권력이 모두 한 손에 있었던 이들이다. 그들 또한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오명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측천무후 무조다.
정당하게 손에 넣은 권력이란 어떤 것일까. 권력을 얻기 위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이들은 부당하게 권력을 취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모든 왕조의 왕들은 모두 부당한 권력을 얻은 셈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딸을 교살하고 아들을 독살한 측천무후나 자신의 형, 동생들을 죽이고 즉위한 당태종이나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둘을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태종은 배포가 큰 황제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큰 힘을 썼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측천무후는 간교한 계책으로 황제를 홀려 정사를 농단하고, 마음대로 후계자를 갈아치우고, 급기야는 왕조를 찬탈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 둘의 차이는 단지 성별이었다. 측천무후는 지아비 황제가 받아야 했던 모든 비난을 고스란히 자신의 몫으로 감당해야 했다. 거기에 덧붙여 여성이 휘두르는 권력이 못마땅했던 선비들의 욕설도 감당해야 했다. 그녀가 단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유방의 아내 여후가 측천무후나 서태후보다 덜 알려져 있고, 덜 비난받는 이유는 유방이 강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황제 노릇을 나름대로 잘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측천무후나 서태후의 황제들은 둘 다 유약하고 정치 감각이 떨어지는 이들이었다. 덕분에 둘은 정치를 배워야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권력에 중독되어 갔다. 황제들이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녀들은 권력에 다가가면 갈수록 그 황제들이 받았어야 하는 비난까지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차가운 문체, 절제된 시선으로 측천무후의 내면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이 책은 무슨 의도로 쓰여졌는지 알 수가 없다. 누구의 내면인가. 진정으로 측천무후의 내면인가. 이 책에서 역사는 단지 병풍이다. 창문 밖에 있는 바다이다. 있으나 없으나 별반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 듯하다. 측천무후는 고독에 몸부림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이를 악물었다. 복수를 위해서, 영광을 위해서, 더 큰 권력을 위해서 그녀는 더 강해져야 했고, 더 독해져야 했다. 온갖 음모가 난무하는 황실에서 가장 큰 권력에 다가가기 위해 자식을 희생시키는 일은 어느 황실에서나 있어왔던 일이다.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 그것도 근친상간이라는 비난을 받는 터에 권력을 얻기 위해 그녀가 감수했어야 하는 고통들은 결코 없어지거나 작게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손으로 딸을 죽일 때, 그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않는 아들을 죽여야만 했을 때, 자신에게 반기를 든 또 다른 아들을 죽여야만 했을 때,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죽을만치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늘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또한 아주 차가운 시선이었을 것이다.
부자지간만이 경쟁하는 건 아니다. 아무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 곳에서 그녀는 홀로 살아남아야 했다. 그렇기에 자식마저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적들을 제거했다. 이 책에는 그러했던 그녀의 고뇌가 없다. 이 책에서 측천무후가 권력에 다가가는 일들은 평이한 사건의 연속이다. 긴장감도 없다. 누구의 내면을 그린 것인가. 뒷부분으로 갈수록 더 더욱 어이가 없다. 종교에 심취하여, 그녀는 자신이 평생을 걸쳐 이룩해놓은 것들이 한 줌 재가 되는 것을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불교와 도교를 신봉한다고 해서 그가 자비로운 군주였나. 그녀에게 정치와 종교는 별개의 문제였다. 아니, 종교를 정치에 이용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녀가, 그토록 강단있게 적들을 제거하고 정사를 논하던 그녀의 내면이 그렇게 평화롭고 아름답게 그려지다니.. 그건 또 누구의 내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