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장맛이 그리울 때
“광속에서 인심 나고 장독에서 맛 난다”는 속담이 있지요. 음식 맛은 어머니 손맛이고 어머니 손맛은 바로 장맛입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거나 그리울 때는 어릴 적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또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과 비슷한 음식을 먹게 되면 불현듯 어머니가 간절히 보고 싶어지지요. 그 그리움의 맛이 바로 장맛입니다. 며느리도 모른다는 장맛이지요. 우리 음식이 다른 나라 음식과 차이나는 점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조리 과정에서 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1766년 간행된 ‘중보산림경제’에 “촌야의 사람이 고기를 쉽게 얻지 못해도 여러 가지 좋은 장이 있으면 반찬에 아무런 걱정이 없다”고 기록된 데서 알 수 있듯 장은 영양과 미각의 즐거움을 제공해주는 매우 중요한 먹거리였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보니 장을 담글 때는 택일을 하고 고사를 지내는 일이 다반사였고, 담근 장을 귀신이 먼저 먹지 못하도록 금줄을 치고 장 위에 숯이나 고추를 띄웠습니다. 장 담글 때 여인들은 외출도 삼가야 했고 부부관계도 피해야 했습니다. 심한 경우 입을 창호지로 봉하기도 했지요. 장을 담근 후에는 삼칠일 동안은 상갓집에도 가지 않았고 해산을 했거나 달거리가 있는 여인은 장독대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장맛이 어머니의 손맛인 것은 이렇게 정성을 들여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정성을 먹으며 살았기에 빈한한 상차림도 늘 넉넉함과 따뜻함으로 충만했습니다. 음식은 맛과 영양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정성과 사랑이 훨씬 더 중요한 요소임을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온갖 장은 대대로 내려온 한반도 어머니의 이 속 깊은 정성과 사랑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음식물인 것입니다.
30년 넘게 독일에서 활동해온 화가 송현숙의 장독 그림들을 보노라면 그 옛날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시나브로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옵니다. 그림이라고 해야 달랑 장독 하나 그린 것이 전부이지만, 그 장독으로부터 우리는 힘겨웠던 우리 어머니들의 삶과 가족을 향한 그분들의 애틋한 마음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타국에서 살면서 고이 간직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급속한 세태의 변천으로 오히려 고국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린 옛 감성을, 화가는 이 원형적인 장독에 아름답게 담아놓았습니다.
보여지는 이미지뿐 아니라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송현숙의 그림은 매우 간단합니다. 한 가지 색으로 채색된 화포 위에 몇 번 그은 붓질이 다입니다. 그의 작품 제목이 <9획> 같은 형식으로 돼 있는 것도 그가 얼마나 단순한 절차와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는지 잘 말해줍니다. ‘9획’인 작품은 실제로 아홉 번의 붓질로 완성한 그림입니다. 장독의 형태에 맞춰 붓을 아홉 번 그어 장독의 형상을 표현한 것이지요. 서양화의 재료와 형식을 이용해 그린 그림임에도 동양화의 ‘일필휘지’ 정신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마도 옛날 어머니들이 장을 이런 태도로 담그셨을 겁니다. 따지고 분석하거나 이것저것 재서 장을 담근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누적된 경험과 감각을 바탕으로 명필이 붓을 휘두르듯 맛의 핵심으로 곧장 나아가셨을 겁니다. 거기에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이 정성이었던 거지요.
사실 일필휘지의 근본 태도는 정성입니다. 그냥 붓을 휘두른다고 일필휘지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오랜 경험과 기량의 바탕 위에 정신을 모으고 정성을 다 쏟아 부을 때 붓은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얻습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은 폐부까지 상쾌함을 느끼지요. 잘 묵은 장 맛은 그렇게 우리의 혀를 지나 영혼 속까지 깊고 진정한 만족감을 가져다줍니다. 영혼을 위로해 줍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어머니의 장맛만큼 깊은 위로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요. 세상에 그만한 예술은 없습니다. 어머니의 그 장맛이 그립습니다. 어머니의 그 정성이 고맙습니다.
이처럼 단순한 형식의 작품이지만, 그런 만큼 세상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물의 모양과 형식은 달라도 본질은 같다 하지 않는가. 그의 예술이 그 본질을 드러내는 바, 결국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품어 그리는 예술가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그의 언급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작품이 단순할수록 더 강한 느낌을 준다.”
그처럼 그의 그림은 우리에게 강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깊은 정서적 충족감을 준다. 그 충족감의 강도만큼 매우 의미 있는 작품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의미란 전일적인 관념으로 종착되지 않는 것이라는 앞에서의 언급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그의 작품은 분명 의미 있는 작품이다. 가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 의미 있는 만큼, 그 가치 있는 만큼, 그의 작품은 하나의 명료한 문법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다.
우리가 그의 화포에서 보는 것은 나무막대기나 하얀 천, 기와, 장독 등이다. 그러나 그것만 본다면 그것은 표피적인 바라봄일 것이다. 한 꺼풀 벗겨내고 보면 그의 그림은 순수하고도 추상적인 붓질이다. 나무막대기도, 천도, 기와도, 장독도 모두 붓질에 불과하다. 선 하나를 그으니 그것이 막대기가 됐고, 또 선 하나를 그으니 그것이 천이 됐다. 항아리는 여러 개의 선을 순서대로 돌려 그린 것에 불과하다. 선만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그의 그림은 그래서 페인팅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담스럽다. 비록 페인팅 안료를 사용했을지 모르나 그의 그림은 엄밀히 말해 드로잉이다. 선 그림인 것이다.
이렇게 선으로 모든 것을 처리했으되 그것이 뚜렷하고도 친숙한 공간 이미지를 자아내는 까닭에 우리는 그것을 집이라고도 부르고 항아리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해 재료의 내용과 절차를 감추려 드는 서양의 페인팅과 달리 이미지와 병행해 재료의 내용과 절차를 또렷이 드러내는 그의 ‘드로잉’은 그림이라는 예술이 대상의 표현이기도 하면서 붓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선명히 보여준다. 이를 그는 “붓질과 대상(성)의 양립”이라고 말하는데, 어느 한 쪽에 힘을 실어주지 않고 고루 드러냄으로써 그림의 의미가 이미지에만 있지 않고 재료와 과정에도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런 관념은 곧 회화를 둘러싼 다른 다양한 가치의 양립에 대한 생각들을 유도한다. 그림은 그것이 평면 위에 그려짐에도 (많은 경우) 사실 공간의 재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평면과 입체의 양립이며, 대상을 빌어 화가의 내면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객체와 주체의 양립이며, 사실을 추구하는 경우에도 끝내는 안료의 뒤범벅이라는 사실에서 환영과 물질의 양립이다. 이런 모든 양립 관계를 붓질과 대상(성)의 양립으로 함축해 보여주는 송현숙의 그림은 결국 의미가 눈에 드러나는 곳에 종착되고, 드러나는 것에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이나 보는 이 모두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 자신 본 모습을 만날 때 얻어지는 것임을 확인해 준다. 이와 같은 궁극적인 의미는 현실 세계에서는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보일 뿐이다. 그래서 송현숙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양립의 수수께끼’를 가까이 전해 주고 싶다. 양립은 마치 수평선처럼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 같다.”
사실 우리 존재 자체가 하나의 수평선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수평선. 우리는 경계일 뿐 경계 밖의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그 경계가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포획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도 하나의 이것이거나 저것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경계는 수평선처럼 눈에는 보이되 결코 잡히지 않는 선이다. 우리는 의식과 물질을 가르며, 주체와 객체를 가르며, 영원과 유한을 가르는, 그럼으로써 잇는 하나의 수평선이다. 송현숙의 그림은 그런 우리의 초상화이다.
이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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