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폴 프뤼동<말메종의 조세핀> 1805년, 캔버스에 유채, 244x179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그림 속의 여인이 되고 싶을 때 - 조제핀

서양 문명은 산수 중심의 동양화와 달리 인물 중심의 회화를 발달시켰습니다. 그래서 여성을 그린 그림이 많고 그렇게 그려진 여성들 가운데는 우리에게 깊은 인상과 환영을 남긴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나폴레옹 황제의 부인이었던 조제핀도 그런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그녀의 모습을 보노라면 도대체 그녀의 무엇이 나폴레옹 같은 영웅을 사로잡았고 또 뭇사람들의 뇌리에 그녀를 그렇게 매력적인 여성으로 남게 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렇게 뭇 남자들을, 영웅 중의 영웅을 사로잡는 여성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그런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요? 한편으로는 진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삶, 그런 삶이 바로 이런 이들의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 머리 속은 온통 당신 생각뿐이었소. 당신의 모습, 그리고 어젯밤의 멋진 기억은 내 모든 감각을 들뜨게 만들었소.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운 조제핀이여, 당신은 나의 마음에 실로 이상한 마법을 걸었소.”


나폴레옹의 이 편지 글에서 알 수 있듯 조제핀 드 보아르네는 뛰어난 사랑의 전략가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세상을 하직하며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 “조제핀!”이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그는 남자의 마음을 그 뿌리까지 훔칠 줄 아는 수완가였지요. 그녀를 향한 나폴레옹의 열정은 무엇보다 조제핀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가장 밝은 색채로 빛나는데, 조제핀의 원 이름 마리-조제프-로즈 타셰 드 보아르네의 조제프를 여성형인 조제핀으로 고쳐 부른 게 나폴레옹이었다고 합니다.(그 전에는 주로 로즈라는 애칭으로 불렸습니다) 바로 그 이름으로 영원히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남아 있으니 ‘사랑의 여왕’으로서 조제핀의 위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조제핀은 1763년 가난한 귀족 조제프 타셰 드 라 파제리의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열 여섯이 되던 해인 1779년 알렉상드르 비콩트 드 보아르네라는 젊고 부유한 육군 장교와 결혼했습니다. 젊은 날의 이 멋진 출발은 그러나 조제핀에게 행복의 시작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여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도전을 받은 시기이자 생존을 위해 사랑의 전략가로 거듭나는 투쟁의 시기였습니다.


조제핀은 알렉상드르에게 예쁜 딸 둘을 안겨 주었습니다. 하지만 허영심이 강한 알렉상드르는 시간이 흐를수록 조제핀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특히 섬 출신의 촌티 나는 매너와 부족한 교양은 알렉상드르에게 극심한 혐오감을 주었지요. 그래서 알렉상드르는 베르사유궁전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알현할 때도 아내인 조제핀을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철저한 무시와 무관심으로 조제핀의 마음에 시퍼런 멍을 들여놓았지요.


1785년부터 남편과 별거에 들어간 조제핀은 이후 절치부심한 듯 파리 상류층의 관습을 열심히 익혔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혁명군에 가담했던 남편이 자코뱅 파의 공포정치 와중에 1794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그녀 또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같은 해 테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나 감옥에서 풀려 나오면서 사교계의 중심인물로 급부상합니다.


조제핀이 나폴레옹을 만나게 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야심만만한 젊은 장교와 더 이상 촌뜨기가 아닌 사교계의 여왕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봤습니다. 첫 만남 당시 나폴레옹의 나이는 26세, 조제핀은 33세였지요. 조제핀은 그 동안 익힌 사교계의 테크닉을 활용해 밀고 당기기를 거듭함으로써 나폴레옹의 애간장을 다 녹여놓았습니다. 사실 당시 그녀로 인해 애간장을 태운 사람은 나폴레옹뿐이 아니었지요. 혁명 와중에 단두대로 보내질 뻔했던 경험을 통해 조제핀은 자신의 행복과 생존을 보장해줄 강력한 힘을 필요로 했고, 그로 인해 여러 유능한 남자들과의 사이에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 끝에 나폴레옹의 부인이 된 조제핀은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자 이제 그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나폴레옹에게 다시 결혼식을 올리자고 설득했습니다. 과거의 예식은 종교의식이 아니었으니 이번에 종교의식을 필함으로써 자신들의 사랑을 교회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는 논리였지요. 1804년 12월 1일 두 사람의 결혼식 다음날 나폴레옹은 대관식을 가졌습니다. 조제핀은 이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탄탄한 권력의 반석에 오른 듯했습니다. 하지만 조제핀의 무절제한 생활과 나폴레옹에게 아들을 안겨주지 못한 ‘흠결’은 끝내 그녀의 족쇄가 되었지요. 1810년 나폴레옹은 결혼 예식상의 사소한 종교적 미비점을 근거로 조제핀과의 결혼을 무효화했습니다.


말메종 성으로 내쫓긴 조제핀은 나폴레옹의 돈으로 계속 화려한 삶을 이어가다가 나폴레옹 퇴위 뒤 얼마 안 돼(1814년)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피에르 폴 프뤼동이 그린 <황후 조제핀>은 역사책에서 조제핀을 언급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그림입니다. 아직 황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조제핀이 한적하고 쓸쓸한 정원을 배경으로 우아하게 앉아 있습니다.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듯한데, 벌써 나폴레옹과의 이별의 전조를 느껴서일까요, 얼굴에는 우수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습니다. 일단 조제핀이 늘씬하고도 매력적인 님프처럼 그려져 있는 것이 눈길을 끕니다. 성적 매력과 황후로서의 영광, 비극의 색채가 어우러져 묘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배경의 짙고 육중한 나무들은 말없이 둘러서서 이런 조제핀을, 조제핀의 추억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아기를 지키는 어머니처럼 조제핀을 다독이며 푸근히 감싸안아 줍니다. 설령 지나온 삶의 궤적 속에 이런저런 실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용서될 만큼 조제핀은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그림 속 말메종의 숲은 말하는 듯합니다.


이 한적한 숲에서 사색을 하면서 조제핀은 과연 자신의 삶을 어떤 시각으로 돌아보았을까요?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그렇게 얻고 지키려 했던 부와 권세가 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을까요? 조제핀과 대화를 나눴던 저 나무들은 조제핀의 진정한 속마음을 잘 알고 있겠지요.


이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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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레크<화장분> 1887~88년경, 캔버스에 유채, 56x46cm,
암스테르담,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그림 속의 여인이 되고 싶을 때 - 쉬잔 발라동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날 때부터 목구멍에 거미줄을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 생기고 건강할 뿐 아니라 온갖 재능을 다 지닌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본의 아니게 장애를 입어 사회활동 자체가 힘겨운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보람은 그 사람이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에서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에 있다고 하지요. 주어진 환경이 아무리 열악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딛고 나름의 성취를 이룬 사람을 우리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다른 어떤 이의 눈에는 미미하게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쉬잔 발라동(1865-1938)은 그녀 스스로 한 사람의 화가였지만, 화가로서보다는 몽마르트르의 여신으로서 오래 기억되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기억된 것은 출신 배경과 삶이 모두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에 싸여 있었기 때문이지요. 설령 ‘악의 꽃’처럼 여겨졌다 하더라도, 쉬잔은 쓰레기 더미 위에 핀 아름다운 꽃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술의 이름으로 자신의 자존과 영혼을 꿋꿋이 지켜낸 위대한 인간이었습니다.


본 이름이 마리 클레망틴인 쉬잔은 리모주 근방의 한 마을에서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헤어나기 어려운 빈곤 속에서 쉬잔은 10살, 11살 무렵부터 밥벌이를 위해 상점 점원 보조에서부터 공장 노동자, 그네 곡예사 따위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런 일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이 계층의 일부 젊은 여성들이 그랬듯 쉬잔도 모델 일에 나섰습니다. 모델 수입 또한 그리 변변한 것은 못 됐으나 그래도 이런 부수입을 얻는다는 것은 가난한 젊은 여성들에게 적지 않은 행운이었습니다. 쉬잔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 가운데서도 화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모델의 한 사람으로 떠올랐습니다.


쉬잔은 그리 키가 크지 않았습니다. 1m54cm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크고 푸른 눈, 뚜렷한 눈썹 등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얼굴과 그의 누드가 지닌 뛰어난 아름다움은 화가들이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장점이었습니다. 게다가 쉬잔은 화가들의 다양한 요구에 적절히 부응할 줄 아는 모델로서의 타고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흔히 모델은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으면 되는 줄 알지만, 고정된 포즈를 통해 나름의 연기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연기력과 표현력이 요구되는 직업입니다. 쉬잔은 그런 능력이 탁월했고, 그에 따라 보수적인 아카데미 미술가들뿐 아니라 퓌비 드 샤반, 르누아르, 로트레크 같은 당시의 전위예술가 모두가 그녀를 찾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퓌비 드 샤반의 정부가 되는 등 여러 화가들과 숱한 염문을 뿌린 것은 불가피한 운명의 행로였다 하겠습니다.


‘몽마르트르의 연인’ 쉬잔의 애정 전선에 가장 심각한 먹구름이 끼었던 때는 로트레크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을 때였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로트레크와 결혼하고 싶었으나 로트레크는 결혼에 전혀 뜻이 없었지요. 좌절감을 느낀 쉬잔은 거짓 자살 소동을 벌여 그를 압박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환멸을 느낀 로트레크는 쉬잔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쉬잔이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을 얻은 것은 1896년 부유한 은행가 폴 모리스와 결혼하면서부터입니다. 1883년부터 화가들 어깨 너머로 배워 그리던 그림도 결혼 이후 다소 멀리 할 만큼 쉬잔은 한동안 일상의 행복에 푹 빠졌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도 1909년에 깨지게 되는데, 그 파국은 쉬잔의 예술을 위해서는 오히려 다행인 점도 있었습니다. 작품 제작에 몰입할 환경을 조성해 주었기 때문이지요. 특히 아들인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의 친구 앙드레 위테와의 동거는 쉬잔에게 창작의 열정을 뜨겁게 불살라 주었습니다. 위테는 그보다 무려 21살 아래였으므로 쉬잔의 행실은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을 수 없었지요. 사생아이자 알코올 중독자인 아들 위트릴로와 싸잡아 세 사람을 세인들은 ‘저주받은 삼위일체’라고 불렀습니다.


예술가로서 쉬잔의 탁월성은 모델 경험을 통해 회화 예술에 있어 누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소재보다 누드에 관심을 갖고 누드화를 많이 제작했습니다. 위테와는 서로 모델을 서주며 예술적 도움과 영감을 주고받았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널리 알려져 있듯 서양미술사에서 누드화는 성차별적인 이분법의 역사를 유지해왔습니다. ‘화가=남자=옷 입은 사람=사용자’라는 한 축과 ‘모델=여자=옷 벗은 사람=피고용인’이라는 다른 한 축이 비대칭의 이분법적 관계를 형성해온 것이지요. 모델인 쉬잔이 화가인 위테를 벌거벗겨놓고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이 관계의 역전을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쉬잔이 서양 누드화 분야의 주요 화가 가운데 최초의 여성화가로 평가받는 것은 이런 시대적 한계를 초월한 그의 성취 덕분입니다. 미술사적으로뿐 아니라 페미니즘 운동 차원에서도 중요한 선구적 발자취를 남긴 것이지요.


한때의 연인이었던 로트레크가 쉬잔을 모델로 그린 <화장분>은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인 화상 테오가 개인적인 컬렉션으로 구입해 현재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나 얼굴에 그늘이 져 있지만, 예술가다운 강인한 의지와 내적 확신 같은 것이 엿보입니다.


그림을 보면, 쉬잔은 화장을 하는 중이었던 듯합니다. 뭔가 데카당한 인상이 강하게 풍겨 나옵니다. 로트레크와 쉬잔의 근거지였던 몽마르트르는 당시 파리 밤 생활의 중심이었지요. 보헤미안들과 멋쟁이들, 화류계 사람들이 다 이곳으로 집결했습니다. 주말이면 파리의 중산층들이 몽마르트르의 카페를 찾아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렇게 몽마르트르는 성매매와 마약, 알코올 남용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사생아를 낳은(은행가 폴 모리스와 결혼하기 전에 쉬잔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들 위트릴로를 낳았습니다. 위트릴로라는 이름은 스페인 출신의 화가이자 비평가인 미구엘 위트릴로가 쉬잔의 요청에 동의해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쉬잔으로부터 로트레크가 몽마르트르의 이 어두운 그림자를 진하게 보았던 것 같습니다. 더불어 어떤 환경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꿋꿋한 영혼을 함께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일차 대전 직후 한동안 화가로서 널리 인정을 받은 쉬잔은 1938년 빈곤과 세인들의 망각 속에 뇌졸중으로 사망했습니다.


이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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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앨머-테디머 경<사포와 알카이우스> 1881, 캔버스에 유채, 66x122cm,
볼티모어, 월터스 아트 갤러리
 
그림 속의 여인이 되고 싶을 때 - 사포

용모가 빼어나고, 재능도 뛰어나며, 인간적인 매력으로 뭇사람들로부터 상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모든 여성들의 꿈이요 바램일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최고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인 사포(기원전 610년경-580년경)가 그런 여성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Sappho 또는 Psappho로 쓰는 사포는 그리스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 태생입니다. 명망 있는 귀족 집안 출신인 그녀는 역시 안드로스 섬 출신의 부유한 남자 케르콜라스와 결혼했습니다. 사포가 한때 다른 귀족들과 더불어 레스보스 섬에서 추방돼 시칠리아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사실일 것으로 여기지지만, 어쨌든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자신의 고향에서 시를 지으며 지냈습니다.


무척 아름다운 시어로 누대에 걸쳐 칭송을 받았던 사포. 그녀는 아르킬로쿠스와 알카이우스를 제외하면 고대 그리스 시인 중 독자로 하여금 사적인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데 가장 뛰어났던 시인으로 꼽힙니다. 그녀의 시어는 문학적이라기보다는 세속적이었고, 시구는 간결하고도 직접적이면서 회화적이었습니다. 마치 저 하늘 높이 떠서 자신의 사적인 환희와 고통을 비판적으로 내려다보는 것 같은 차분함이 엿보이지만, 그 차분함 속에서도 원초적인 감정의 힘을 결코 잃지 않는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됩니다. 방대한 작품을 쓴 것으로 추정되나, 완전한 형태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시는 28행 짜리 한 편뿐이고, 모두 합해서 700여 행에 이르는 인용이나 단편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녀의 시 주제는 주로 가까운 여성들과의 우정이나 증오 등을 표현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여성 동성애자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이유가 이와 관련이 있지요. 당시 레스보스 섬의 부유층 여성들은 사교 모임을 통해 한가롭고 우아한 여가 문화를 즐기곤 했는데, 특히 시를 짓고 낭송회를 갖는 것이 큰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모임의 주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사포는 남다른 카리스마로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도 예찬자가 찾아올 만큼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 사교 모임이 갖는 성격상 안팎으로 넘쳐나는 사랑과 우정, 질투, 미움, 경쟁의 드라마는 사포에게 중요한 시적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었지요.

사포는 다른 여성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부드러운 흠모에서 열정적인 사랑까지 다채롭게 표현했습니다. 이런 자료들을 오늘에 비해 세세히 살필 수 있었던 고대의 평자들은 사포가 레즈비언이었다고 단언했습니다. 물론 시로 표현한 감정이 단순한 우정을 넘어서는 부분이 있음은 분명해 보이지만, 현존하는 자료만으로 사포와 그녀의 동료들이 본격적인 동성애행위를 했었는지는 명확히 확인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포를 포함해 레스보스 섬 여성들의 이런 문화가 오늘날 레즈비언이라는 말을 낳았다는 사실이지요.


이처럼 레즈비언으로 그려진 사포는 그 시적 재능에 대한 찬미와 더불어 회화에서 매우 낭만적인 미인상으로 표현되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수금을 든 비너스의 이미지 같은 것이 그것이지요. 특히 누드의 경우 수금이 옆에 있어서 그녀인지 알 수 있지 그 모습 자체는 여느 비너스나 님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사포 주제는 이런 낭만적인 미인상보다 투신자살하는 그녀의 모습입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는 바로 그 파괴적인 결말로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신화로 승격시켰습니다. 어떤 예술가라도 뜨거운 심장으로 형상화하지 않을 수 없는 주제로 삶을 마감한 것입니다.


사포가 레우카스 절벽의 ‘연인들의 투신 바위(Lover's leap)’에서 뛰어내린 것은 그렇게 하면 죽지도 않고 상사병도 낫는다는 속설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포는 미틸레네의 선원 파온을 열렬히 사랑했으나 끝내 그 사랑을 이룰 수 없어 투신을 감행했다는 것인데, 이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사포는 상사병의 감정을 잘 알고 있었지요. 다음 시구에 그 감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저는
더 이상 베 짜기를 할 수 없어요
차라리 아프로디테를 탓하세요

그녀처럼 부드럽게

저 소년에 대한 사랑으로 나를 거의 죽게 만들었으니까요

(사포, ‘아무 소용이 없어요’)

<사포와 알카이우스>는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절 영국 화단을 풍미했던 대가 앨머-테디머가 그린 그림입니다. 지중해의 푸른 물결과 소나무가 시원한 배경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당대 최고의 시인인 사포와 알카이우스가 서로 시를 교환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화가의 상상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이처럼 즐겨 시를 나눴다고 합니다. 사포의 주위에는 아리땁고 순수해 보이는 소녀들이 앉아 있는데, 이는 레즈비언으로서 사포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한 화가의 연출이라 하겠습니다. 강독대 위에 턱을 괸 사포는 알카이우스의 시가 얼마나 감동적인지 깊이 매료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네요. 클리스모스라고 하는 고대 그리스 의자에 앉아 있는 알카이우스는 수금, 엄밀히 말해 키타라를 연주하고 있는데, 그 악기에는 음악의 신인 아폴로와 그의 누이 아르테미스가 조각돼 있습니다. 시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이 부드러운 노래처럼 다가오는 그림입니다. 그 정점에 꽃처럼 피어 있는 사포의 모습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이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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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퐁파두르 부인> 1755, 종이에 파스텔, 178x131cm ,
파리, 루브르 박물관
 
그림 속의 여자가 되고 싶을 때 4 - 퐁파두르 부인

의자에 앉은 여인이 악보를 읽다가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화려한 의상과 값비싼 가구, 멋진 실내 장식이 아니더라도 매우 기품이 있고 우아한 여성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우윳빛 피부와 단정한 이목구비, 그윽한 눈길, 지적인 인상이 그녀의 고귀한 신분을 앞장서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림 속의 여인은 그 유명한 퐁파두르 부인입니다.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정부로서 매우 아름다웠고 교양도 풍부했으며 국정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진 인물이지요. 그 명성답게 책과 악보, 그림들에 둘러싸여 지적인 후광을 드러내는 이 여성은 지금 자신을 찾아온 누군가를 반가이 맞이할 태세입니다. 이 여성을 찾아온 사람은 아마도 십중팔구 루이 15세이겠지요.


국사에 바쁜 틈을 내 루이 15세가 그녀를 찾은 것은 단순히 그녀의 성적 매력에 취해 그녀를 한번 더 안아보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부인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왕비의 측근조차 “퐁파두르 부인은 내가 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하나”라고 토로할 만큼 외모가 뛰어났지만, 그보다 그녀의 사려 깊은 마음씨와 교양, 사고의 깊이가 왕의 발걸음이 그녀에게 잦아지도록 한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정부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퐁파두르 부인은 후기에는 왕과 거의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죽는 날까지 왕의 뜨거운 총애를 받았습니다. 왕은 그녀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으니까요.


라 투르가 그린 이 초상화는 바로 왕에 대한 그녀의 진정한 매력이 무엇인지 생생히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여러 연극의 대본을 다 암송했고 악기 클라비코드를 수준급으로 연주했으며 아마추어로서는 뛰어난 그림 실력에 보석을 디자인할 줄 아는 능력도 갖췄고 원예에도 조예가 깊었다니 그녀는 참으로 다재다능한 여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머도 풍부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능력 또한 뛰어났다고 하지요. 화가는 그녀의 그 모든 장점을 다양한 지적, 예술적 소품들로 풍성하면서도 짜임새 있게 표현했습니다.


사실 정부라는 지위는 사람들에게 그리 존경을 받는 지위는 아니지요. 과거 왕과 귀족들의 정부는 설령 퐁파두르 부인처럼 왕의 총애를 받고 공공연히 국정에 간여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교회로부터 공식적인 배우자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첩은 사회적 평판이야 어떻든 우리 문화의 공식적인 규범을 어긴 사람이 아니었지만, 유럽의 정부는 교회의 규범, 곧 유럽 문화의 최고 공식 규범을 어긴 사람이었습니다. 정부와 정부를 둔 사람은 교회에서 고해성사조차 받을 수 없었지요. 그럼에도 왕의 정부라는 위치는 뭇 여성들이 크게 부러워할 만한 위치였고, 더구나 퐁파두르 부인처럼 정부 여러 요직에 자신의 친인척을 심고 외교와 국방에까지 간여할 만한 권력을 갖는다는 것은 그 규범적 비판의 경계를 넘어 엄청난 입신출세를 의미했습니다.


퐁파두르 부인이 그렇게 권력의 정점에 서는 데는 어릴 때의 경험이 큰 작용을 한 것 같습니다. 1721년 파리에서 부유한 상인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금융 사고로 아버지가 파산하는 바람에 가족과 함께 독일로 피신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그녀의 어머니는 아름다운 미모로 부유한 사업가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의 애정을 얻어 온 가족을 파탄의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트루넴은 퐁파두르 부인(어릴 적 이름은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의 가족을 다 먹여 살릴 뿐 아니라 퐁파두르 부인이 훌륭한 지적, 예술적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어머니의 외도로 아버지를 포함해 온 식구가 위기에서 벗어나 계속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경험은 그녀가 후일 결혼을 한 몸임에도 왕의 정부가 되어 영광과 부의 정점을 향하여 물불 가리지 않고 치닫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물론 엄연히 왕비가 존재하므로 그녀는 왕비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히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왕의 이전 정부들이 왕비를 비난하고 싫어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왕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습니다. 왕에게도 왕비에게 잘해줄 것을 누누이 당부하고 왕비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마련해 왕이 직접 가져다주도록 하는 등 많은 배려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왕의 잠자리에 필요한 여성을 직접 주선해 왕에게 자신의 ‘너그러움’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퐁파두르 부인에게 왕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더욱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지요. 마침내 부인이 40대 초반에 결핵으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왕은 그녀의 곁을 결코 떠나지 않으려 했고, 장례식 때는 정식부인이 아니어서 참석할 수 없자 외투와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발코니에 서서 계속 찬바람을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가히 한 시대를 그 정점에서 풍미한 여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 투르의 그림에 나타난 그녀의 그 모든 아름다움과 뛰어난 재주에 대해 경탄하고 부러워하다가도 그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꼭 정부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면 씁쓸한 뒷맛이 남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얻는 부와 권력, 영광이 그리도 단 것이었을까요? 그녀가 만약 오늘날 태어났다면 그렇게 한 남자에 기대 그 모든 걸 추구하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과 도전으로 나름의 성취를 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삶도 결국 시대의 한계가 만들어낸 시대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아무리 뛰어난 여성이라도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기는 어려웠나 봅니다.


이주헌

왕의 정부에서 본 여자들 중 가장 불쌍해 보였고, 가장 행복해 보였으며, 가장 괜찮았던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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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수산나> 1610, 캔버스에 유채, 170x121cm,
포머스펠덴, 바이센슈타인 성
 
그림 속의 여인이 되고 싶을 때  - 수산나

돈도 좋고 권력도 좋지만 명예를 잃는다면 그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으며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 추구가 때로는 불의한 이들에 의해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수산나는 엄청난 위기에서도 자신의 덕과 순결을 지키고 진정한 명예심을 보여준 여성이었습니다.


수산나는 히브리어로 백합이라는 뜻입니다. 널리 알려져 있듯 백합은 순결의 상징이지요. 성서 제2경전(외경)에 등장하는 수산나는 그 이름이 시사하듯 매우 순결하고 정숙한 여인이었습니다.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울 뿐 아니라 신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남편 요아힘은 매우 부유한데다 바빌론에 사는 유대인 가운데 가장 존경을 받는 인물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에 드나들었습니다. 이렇게 수시로 손님이 출입하는 크고 훌륭한 그의 집에는 역시 아름답고 훌륭한 정원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멋진 정원이 가증스런 음모의 현장이 될 줄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요.


부모로부터 모세의 율법에 따른 엄격한 교육을 받은 수산나는 정오가 되어 손님들이 모두 집밖으로 나가면 비로소 정원에 산책을 나가곤 했습니다. 사건이 있던 날도 수산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텅 빈 정원에서 두 명의 하녀와 함께 산책을 했습니다. 그 날 따라 날이 매우 무더웠던 까닭에 수산나는 목욕을 하기로 마음먹고 정원 연못에 몸을 담갔습니다. 두 명의 하녀에게는 올리브 오일과 연고를 가져오라고 시키고 나갈 때 정원 문을 잠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지요. 하지만 정원 안에는 두 명의 노인이 숨어 있었습니다. 재판관인 이들은 그 동안 수산나의 아름다움에 빠져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취해 보고자 하는 욕망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알몸의 수산나 앞에 갑자기 나타난 두 노인은 그녀에게 몸을 허락할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외간 남자와 간통하는 현장을 목격했다고 거짓 신고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 혐의가 인정된다면 죽음을 맞아야 하지만 명예와 순결을 더 중시한 수산나는 비명을 질러 사람들이 현장으로 달려나오게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수산나는 노인들이 자신을 겁탈하는 것을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상황에 대한 설명에는 오히려 노인들이 훨씬 유리한 환경이 돼버렸습니다. 다음날 열린 재판에서 사람들은 수산나의 주장보다는 재판관이자 공동체의 존경받는 원로인 두 노인의 주장에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마침내 수산나에게 사형 평결이 내려졌지요. 가족들의 통곡 속에 수산나가 형장에 끌려가려는 순간 이를 제지하고 나선 사람이 소년 다니엘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두 노인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공박하고는 두 노인에 대한 분리 심문을 허락해달라고 법정에 요구했습니다. 분리 심문에서 다니엘이 두 노인에게 던진 핵심적인 질문은 “수산나의 간통 현장을 어디에서 목격했는가?”였습니다. 한 노인은 “아카시아나무 아래서”라고 대답했고, 다른 한 노인은 “떡갈나무 아래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서로 다른 답변이 나온 것을 들은 유대인들은 두 노인이 수산나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음을 알아채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두 노인은 현장에서 처형됐지요. 순결하고 정의로운 여인 수산나는 이렇게 해서 악의 덫으로부터 빠져 나와 자신과 가족의 명예를 지키게 됩니다.


이탈리아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2)가 17살에 그린 <수산나>는 목욕하는 순간의 수산나에게 두 노인이 갑자기 들이닥쳐 위협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두 노인의 표정이나 제스처는 매우 역겹고 혐오스럽습니다. 겁에 질린 수산나는 두 노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지만 우리가 알 듯 지금 그녀의 상황은 매우 어렵습니다. 노인들의 위협으로 자신의 정조를 잃거나 목숨을 잃는 두 가지의 불행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지요. 무섭고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국 목숨을 포기하는 쪽을 택한 수산나. 여인의 이런 결단이 같은 여성인 화가에게도 큰 아픔과 공감으로 다가온 것 같습니다. 수산나의 고통스런 심리적 상태가 마치 화가 자신의 그것인 양 무척 생생하게 표현돼 있습니다.


의미심장한 일은, 이 그림을 그린 2년 뒤 아르테미시아가 강간 혐의로 한 남자를 법정에 고소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남자의 이름은 타시였고, 그는 그녀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아버지 문하에 들어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고소를 당한 뒤 남자는 뻔뻔스럽게도 자신은 강간은커녕 상호 합의 하에서라도 관계를 가진 적이 없으며, 그녀가 성적으로 매우 방종하고 문란한 까닭에 그녀가 처녀성을 잃었어도 이는 자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과연 그녀가 언제 처녀성을 잃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산파가 그녀의 속을 들여다보기까지 했습니다. 온갖 비방과 중상이 아르테미시아에게 쏟아지는 가운데 7개월이나 계속된 심리. 하지만 그 끝에서 마침내 타시는 유죄가 인정돼 감옥에 갑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자신의 존엄과 명예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겨운 일인가를 생생히 보여준 그림 속의 수산나와 화가 아르테미시아. 비록 예전과 같지는 않다고 하지만, 아직도 차별의 그림자와 여성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이들은 오늘도 자신의 존엄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든 여성들의 영원한 영웅이자 빛이라 하겠습니다.


이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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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5-05-26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번에 새로 나온 이주헌 씨 책인가보네요. ^^ 살까 말까 망설였는데 요정님이 올려주시는 거 보면 되겠네요! ^ㅂ^

꼬마요정 2005-05-26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책이었나요? 저한테 메일로 날아오길래, 너무 멋진 글이랑 그림이라서 여기 올렸었는데...^^ 그랬군요. 앞으로 메일 올 때마다 여기 잽싸게 올려놓을게요~^*^

panda78 2005-05-27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속 여인처럼 살고 싶을 때.

이 책인 거 같아서.. ^^;;

어디 잡지에 연재한 거 묶었다는데요. 아닐지도..; ;;


꼬마요정 2005-05-27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잡지 연재한 것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전문은 아니지 않을까 하네요.. 보이는 족족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