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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물질적 풍요는 행복을 보장해주는가
도덕을 위한 철학통조림 - 달콤한 맛 1318을 위한 청소년 도서관 철학통조림 2
김용규 지음, 이우일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은 뻔하디 뻔한 도덕 교과서적인 결론으로 내닫는다. 궁금증으로 시작된 딸의 반격은, 이래서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고,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삶을 포기해서는 안되고, 우리는 지나친 쾌락을 추구하며 인생을 살아서도 안되고, 행복은 결국 내 안에 있다는 아빠의 대답으로 이어진다. 그렇담, 이 책은 학교에서 접하는 도덕 교과서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도덕 교과서는 우리가 물질적 가치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도구적 가치보다는 본래적 가치를 추구해야 하며, 약속은 지켜야하고, 교통법규는 준수해야하며, 부모님께는 효도하고, 어른은 공경해야 한다고 말할 뿐, 결론에 도달하는 중간단계에서의 사고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쾌락적으로 살면 왜 안되는가, 밤을 새우며 벗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을 하며 피씨방에서 몇날며칠을 지새우는 것이 왜 나쁜가. 담배를 피우는 건 왜 안되고, 야한동영상을 즐기며 하루하루를 보내는건 왜 안되는가. 어른들은, 선생님들은, 안된다 안된다고만 말한다. 하지만 왜 안되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건, 그들도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물질적 풍요는 행복을 보장해주는가? 물질적 풍요는 반드시 행복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물질적 풍요 없이 행복이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김용규는 이를 피터싱어의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라는 책의, 근 20년간의 미국의  소득증가분과 행복도에 대한 통계자료를 통해 물질적 풍요와 행복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이어 그는 에리히 프롬의 <자기를 찾는 인간>을 통해 우리는 '욕구'와 '욕망'을 구분지어야 하고, '욕구' 그중에서도 생리적 욕구를 채움으로써 만족을 느껴야하지만, 욕망을 채움으로써 쾌락에 빠져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철학사상 쾌락주의는 비관주의로 흐를 수 밖에 없으며, 결국 쾌락은 더 큰 쾌락을 불러옴으로써 삶을 망치게 된다고 말한다. 동시에 물질적 풍요를 의미하는 '어플루언스'라는 개념을 통해서 그것이 빚, 근심, 낭비 등의 증상을 동반하게 됨을, 대표적으로 광고에 의해 우리는 조종당하고 쾌락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결론은 도덕교과서와 다를 바 없지만, 그것이 도출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중간중간 사색의 공간을 넓혀놓음으로써, 각자로 하여금 고민하게 한다. 물질적 풍요는 행복을 보장해주는가, 라는 질문에 김용규는 이와 같은 전개를 통해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지만, 우리는 이 책을 손에서 놓은 후 자기만의 사유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책은 사유의 방식과 그 하나의 예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철학은 홀로 하는 것이다. 내 안의 나와 대화를 시도함으로써, 나에게서 벗어나 나를 관찰함으로써, 자기를 깨달아가는데서 철학은 시작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궁금증과 고민은 모두 나에게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대답 또한 나에게서 얻어낼 수 있다. 무엇인가를 의심하고 궁금해한다는 자체로 일단 자기만의 철학은 시작된다. 남은 것은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만의 결론을 도출하는 것 뿐이다. 이 책이 그 길잡이 역할을 해주리라 믿는다. 1318 청소년들뿐 아니라 삶을 성찰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권하고픈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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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냐 >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좌파는 분열로 망하고 우파는 부패로 망한다




"원래 좌파는 분열로 망하고, 우파는 부패로 망한다잖아.."

얼마전 검찰의 공안 관계자가 저 말을 했을 땐, 전교조 얘기를 나눌 때였다. 최근 연가투쟁 등으로 전교조 지도부가 처할 위기를 언급했는데, 위기는 커녕....현 지도부에 불만이던 과거 위원장파가 득세할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거다.

위기란게 때론 별거 아니구나...아니 실제로는 별거 아니구나...누군가에겐 유리한 국면이구나 했다.
하지만 현실의 비극은 그렇게 간단하게 정치적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영화 주인공 데미안의 운명을 이렇게 쉽게 해석하고 싶지 않다.

영화는 1920년대 아일랜드의 독립투쟁으로부터 출발한다. 평온한 장면은 불과 몇초. 곧바로 무자비한 영국군이 등장, 아일랜드인들이 싸울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삐딱한 말 한마디가 10대 소년의 목숨을 그 어미의 눈 앞에서 영국군의 화풀이감으로 내던진다.

시작부터 충격요법으로 시작된 카메라의 시선은 그 시절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눈을 떼기 어렵다. 무척 피곤한 날이라, '예술영화'에 졸지나 않을까 다소 걱정했지만, 숨가쁜 싸움을 그대로 쫓아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명 대사. "조국이라는 게, 그렇게 할 가치가 있는 거겠죠"
의사의 길도 포기, IRA 게릴라가 된 데미안이 '배신자'로 드러난 동네 소년을 즉결처분하면서 던지는 얘기다.  참혹한 식민지에서 배신이 어디 꼭 선택할 문제일까 싶은 상황이지만, 데미안은 소년을 쏘아죽인다. 소년의 마지막 한마디.  자신을 배신자로 만든 놈 옆에 묻지 말고 양지바른 곳에 묻어달라고. 소박하다고도 말 할 수 없는 마지막 소망이다.

조국이란게 과연 그럴 가치가 있었을까. 평생 악몽처럼 쫓아다닐 부채감.

하지만 영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싸우던 시절이 나았다. 영국 연방으로 남되 아일랜드 자치를 인정하는 정세 변화는 독립군을 분열시킨다. 데미안의 형 테디는 독립투쟁 지도자에서 하루아침에 기득권자가 된다. 지주의 편에 선 '현실주의자'. 데미안은 프롤레타리아의 편에 서서 '기회주의자'가 되어버린 형과 싸우게 된다. 누가 현실적이고 누가 이상주의자인지 중요하지 않다. 형제의 비극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 

조국이란게, 이념이란게 과연 그럴 가치가 있었을까. 감독의 시선은 냉정하다. 굳이 희망을 찾을 이유가 없다. 역사는 반복되고, 좌파도 우파도 스스로 무너진다. 분열이든 부패든 이들이 무너진 뒤에 다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이들이 등장함은 물론이다.


(추가로 붙임.....가을산님 댓글 보고 화들짝 놀라버렸다. 이 영화는 나를 씨니컬하게 만든게 아니라,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작품인데...내 감상은 왜 이 모양이 되버렸을까. '굳이 희망을 찾을 이유가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절망과 비극이 어우러진 역사였지만, 희망을 위해 싸우던 이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섣부른 단정적 어투에 대해 스스로 변명하긴 늦었지만...어우....여전히 역사는 그들의 싸움을 통해 진보함을 믿는다. 부패든 분열이든 그 어떤 진통 속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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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신문사 사회부 회식 대신 이 영화를 감상했다. 사회부가 이런 영화를 본다고 하니...전 문화부장이신 B선배는 "사회부 수준에 뭔 보리밭이냐. 괴물이나 봐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무진장 보고팠던 영화고....메가박스에선 일주일만에 막을 내린 탓에 회사 옆 시네큐브에서 반드시 봐야 했고....나의 '강추'가 통과되자 후배들이 울상을 지었다. 머리아픈 영화란게다. 그리고....정말 다행스럽게도, 극장에서 나온뒤 다들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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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 > 그래 이 작자를 믿는게 아니었어.
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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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랬어야 했다. 파울로 코엘료의 전작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읽었을때를 기억했어야 했다. 그 제목만 끝내주게 멋있고 알맹이는 쥐가 반쯤 파먹은것 같은 책을 사서 읽은다음 '이 작가는 이 책 하나로 나에게서는 땡이로군' 했던 결심을 다시 떠 올렸어야만 했다. 하지만 또 귀가 얇다면 나름 얇은 나는 이 책을 권하는 친구의 감언이설에 홀라당 넘어가서 책을 사고야 말았다. 연금술사가 꽤 히트를 쳤다던데, 11분도 요즘 대박치는 분위긴데 하면서 말이다. 내가 아는 지인이 예전부터 이 책을 사지말라고 말렸건만 왜 나는 사라는 말에 더 귀를 귀울였을까?

아마 내가 리뷰를 쓰면서 별 하나를 주는건 극히 드문 일일 것이다. 만약 그저 재미만 없었다면 나는 별 둘을 주는 자비를 발휘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재미도 없을 뿐더러 새로운 지식을 주지도 않고 거기다 심기까지 건드리는. 책으로써 지닐 수 있는 모든 소양을 비껴간 책이기 때문에 별 하나를 주기로 했다. (할수만 있다면 주황색이 아닌 까맣게 탄 별을 날리고 싶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 책은 한 창녀에 관한 내용이다. 다소 멀쩡했던 그녀가 어이어이 해서 창녀가 되고 그 다음에는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 길이만 좀 짧았다면 하이틴 로맨스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어이없는 책이다. 주인공 마리아는 별 다른 이유도 없이 창녀가 된다. 브라질 처자인 마리아는 어느날 스위스에서 온 스폰서를 만나게 되고 그는 춤과 노래로 돈을 벌게 해 주겠다면서 그녀를 꼬드겨 스위스로 데리고 간다. 하지만 처음 약속과 달리 1년을 뼈빠지게 일해야 겨우 브라질로 돌아갈 표값이나 벌까 말까 한 현실 앞에서 마리아는 갈등을 한다. 그녀는 운좋게 스위스인에게서 약속한 금액을 받아내고 고향으로 돌아갈것인가 아니면 좀 더 남아서 돈을 벌 것인가를 망설인다. 그러다가 어이없게도 고향에 그냥 돌아가면 쪽팔릴꺼라는 생각에 창녀가 되기로 한다. (세상에 쪽팔려서 창녀가 되는 여자가 어디있겠는가?)

이 작가는 창녀라는 직업을 너무도 미화시키고 또 쉽게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창녀는 정말 여자들이 선택하는 마지막 길이다. 도저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무언가 큰 문제나 압박을 받았을 경우 택하게 된다. 그녀처럼 고향에 빈손으로 돌아가는게 쪽팔려서 창녀가 되지는 않는다. 그 정도 이유로 창녀가 되었을것 같으면 여자들의 대부분이 아마 창녀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남자들이 생각하기에는 창녀가 그저 다리를 벌리고 잠깐동안 남자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는 신체 대여업 정도로 생각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실제 그녀들은 몸이 아닌 영혼을 팔거나 갉아먹힌다. 가장 기본적인 자신의 육신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않고 남에게 돈을 받고 빌려준다는 것은 돈을 받고 짐을 져 주거나 노동을 해 주는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어디 지하철에서 엉덩이를 슬쩍 만지는 인간만 만나도 쫒아가서 확 패죽이거나 모멸감에 치가 떨리는 마당에 돈을 받는다고 해서 정당한 땀의 댓가라는 뿌듯한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에 의한 섹스가 아닌 돈을 받고 하는 섹스. 생각만 해도 기분이 더럽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걸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여자들은 어떻겠는가? 그냥 재미삼아 시작해서 밝고 가벼운 마음으로 일을 할것 같은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니다. 물론 그 중에는 그런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일단 이 작가가 너무 가볍게 창녀를 탄생시킨것에 거부감이 느껴졌다.

마리아가 창녀가 되고 부터는 남성의 성적 판타지에 충실한 개가 된다. 몸만 따먹으면 재미 없으니까 소위 그녀는 한차원 더 높은 서비스를 위해 경제에 대해 그리고 정신분석학에 대해 공부를 한다. 이 얼마나 근사한 창녀인가 죽여주게 아름답고 대화도 통화고 유식하기까지 한 그녀. 하지만 단돈 얼마면 내가 그녀를 올라탈수 있다. 대체 어느 남자가 수컷의 이름으로 이 유혹을 거절하겠는가. 파울로 코엘료는 단순히 몸만 파는 창녀에서 뭔가 있어보이는 창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마리아는 심지어 SM을 즐기기까지 하니 더이상 바랄게 뭐가 있겠는가. 색정광이던 변태던 유식한 인간이건 정신적인 문제에 시달리는 남자건 모든 남자를 위해 어머니와 친구와 창녀가 되는 여자. 그런 여자가 마리아이다. 그러나 이 여자 느닷없이 너무너무 괜찮은 예술가 (책에서는 그렇게 그려지지만 내 눈으로 보기에는 별로이기 이를데 없는) 의 사랑을 받게 되고 결국에는 그를 받아들인다. 비록 창녀였지만 가랑이로 남자 하나만 꽉 물면 여자 팔자는 식은죽 먹기랍니다 하는것 같지 않은가?

진짜로 걱정스러운건 이 책을 읽고 혹시나 창녀가 멋진 직업이구나 (남자에게 욕망의 충족과 구원을 동시에 내리는 성스러운 존재) 혹은 창녀가 되어서라도 괜찮은 남자를 만나면 그때부터는 불행 끝 행복 시작이구나 하는 환상을 심어주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세상은 냉정하다. 몸을 파는 것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른 여자들은 자신의 욕망이나 사랑으로 인해 남자와 섹스를 할때 나는 노인이건 청년이건 선택권이 없이 단지 돈을 지불한 남자를 위해 옷을 벗어야 한다. 거기서 좀 철학적인 소리를 하거나 약간 아름답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보통 여자들도 만나기 힘든 근사한 사람을 만나서 결혼에 골인하지는 못한다. 그녀들은 어떤 형태로건 비교적 쉽게 돈을 많이 버는것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마리아처럼 과일 칵테일- 춤 - 섹스 - 많은돈이 다가 아니다. 단지 그걸로 보통 여자들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단 며칠만에 벌 수 있다면 아마 금전적으로 힘든 많은 여자들이 섹스산업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하여간 이 책에 대해 내린 결론은 길고 지루한 하이틴 로맨스이다. 주인공 마리아라는 여자를 보라. 그 여자는 추진력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약간의 허영끼도 있고 늘 들떠서 살고 있다. 고민을 하는 척 하긴 하지만 그건 수박 겉핥기식의 고민이다. 사는데 있어 그녀만큼 고민을 안하고 산다면 세상 편하겠다 싶을 정도이다.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했던 마리아는 진정한 사랑을 만나 오르가즘을 느낀다. 그런데 왜 하필 그 과정 중간이 창녀야 하는지를 나는 알 수가 없다. 언듯보면 그녀는 창녀들이 가장 힘들다는 돈 꼬박꼬박 모으기를 했고 고향에 돌아가서 농장을 할 계획을 세우는 기특한 처녀라고 보일수도 있겠지만 영혼을 팔아먹어서 저금을 한들 농장을 한들 나는 그게 무슨소용일지 궁금하다. 작가는 마지막까지 하이틴 로맨스류 마저 창피해할 결말을 낸 주제에 이 책은 온전히 자기 머리에서만 나온게 아니라 상당한 정도의 픽션이라고 시일 변명을 해 놨다. 치사한 자식. 하이틴 로맨스 작가들도 그따위 변명은 안하겠다.

P.S. 이 책의 광고 문구이다.

걷지말고 춤추듯 살아라! 사랑은 오직 고통을 줄 뿐이라 믿는 브라질 처녀 마리아는 일자리와 모험을 찾아 제네바에 갔다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줄 젊은 화가를 만나는데...성과 사랑이 가져다주는 내면의 빛을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우화.  지랄하고 자빠졌네.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책 팔아먹는 것도 좋지만 이정도면 사기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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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7-11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엘료의 책이 광고가 워낙 되어서 다 좋은 줄 알기 쉬운데 그렇지만은 않은가봐요...

꼬마요정 2006-07-11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읽었는데 정말 별로였거든요~ 플라시보님이랑 생각이 비슷해서 당장 리뷰를 담아왔답니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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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국에서 교과서를 한번이라도 들춰본 사람이라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대한 이야기나 일부 내용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자, 그때 인상이 어떠했는가? 유쾌함, 혹은 웃음, 아니면 역설, 이런 것들을 느껴본 적이 있었는가? 단연코 없었을 것이다. 극히 일부의 내용만 보여주거나 짤막한 촌평을 하는 정도니 <열하일기>는 교과서에 의해 지나간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억될 뿐이다. 물론 재미는커녕 지루한 것으로 말이다.

그러나 고미숙은 <열하일기>가 그렇게 치부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당당하게 열하일기에 빠져있노라고 말한 지은이는 열하일기 속에 중세 시대를 엿볼 수 있는 흔적들은 물론이거니와 웃음과 역설이 무궁무진하게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열하일기는 유쾌한 시공간과도 같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일종의 열하일기 해석 판이라고 할 수 있는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열하일기>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럼 구체적으로 <열하일기>에는 무엇이 있길래 지은이는 그렇게도 찬사를 던지는 것일까? 특히 교과서의 일부 지식 덕분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의 제목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볼 수 없는 많은 이들에게 어떻게 <열하일기>의 가치를 설득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그 의문들에 간단하게 답을 주고 있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을 알 수 있고, 박지원의 생각을 알 수 있으며, 변화하는 시대상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변화하는 시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도 그렇거니와 지금도 많은 이들은 <열하일기>의 가치를 평가 절하한다. 왜인가? 이유는 온갖 가지인데 흥미로운 것은 그 중 대다수가 읽어보지도 않고 시류에 떠도는 말로 비판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현재에도 해당된다. 아주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 아니면 당시의 일반적인 평가를 보고 <열하일기>를 아는 양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알다시피 읽어보지도 않고 평가한다는 것은 위험스러움을 넘어 우매한 결과를 자초한다. 지은이도 그것을 지적하는데 그 과정에서 답은 간단히 나온다. 원래 가치가 있는데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 그렇기에 읽어만 본다면 그 가치를 알 수 있기에 자연스럽게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연암 박지원. 김탁환의 소설 등 문학작품에서 여러 번 등장했던 그는 노론계열이었지만 실학자로 불리며 조선시대 영정조 시대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주인공 중 한명이기도 하다. 출세를 하지 못했다고 알려진 박지원은 사실 집안이 명문가인지라 충분히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허나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과거 시험을 보러 가서 이상한 답안지를 제출하거나 그 후에 왕이 불러도 온갖 핑계를 대며 나가지 않았다.

이러한 행동은 박지원을 이해하는 동시에 <열하일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초가 된다. 박지원은 왜 권력 중심부에 나아가지 않았는가? 박지원은 '형식'적인 것을 싫어했다. 과거의 것을 끌어들여와 논하는 과거시험은 물론이거니와 그 과거시험을 거쳐 형성된 정치인들의 무리, 그리고 그것에서 나타나는 온갖 현상들을 혐오했다. 지은이는 그것과 관련해 박지원이 시 짓기에 인색했던 것도 당시 한시의 형식이 '동아시아 엘리트 집단의 공통 문법이자 문화적 징표'이기에 견디지 못해서 그랬다고 말할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대신에 박지원은 우정을 중시했고 인간을 하나의 벌레와도 같은 존재로 보는 생각 때문에 많은 이들과 어울릴 줄 알았다. 한마디로 고관대작들이 끼리끼리 어울리던 시대에 박지원은 이 사람이든 저 사람이든 마음이 맞으면 웃으며 술한잔 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덕무, 홍대용, 박제가 등 그 유명한 이른바 '연암그룹'도 그렇게 해서 역사의 한 자락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게다.

그런데 이러한 권력의 주변부라는 것, 그리고 많은 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성격 덕분에 박지원은 뜻밖에도 청나라에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된다. 실상 오늘날 <열하일기>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이들 중에는 박지원이 정식으로 사신의 자격을 얻어 중국에 갔다고 여기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박지원은 지인 덕분에, 얼렁뚱땅,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존재로 행렬에 끼게 된다. 요즘 은어로 이야기하면 '꼽사리' 같은 존재인 것이다.

홍대용 같은 이들에게 중국 이야기를 들어서 가슴 한 곳에 부러운 마음이 가득했던 박지원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더군다나 있는 듯 없는 듯 한 존재니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으니 박지원은 중국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행동하는 건 당연하다. 덕분에 소중화 의식에 갇혀있던 조선 사대부들을 비꼬는 것에서 오는 유쾌함, 그들이 비판하는 것을 갖고 역으로 그들을 비판하는 역설까지 한바탕 늘어놓을 수 있게 된다.

본래 박지원이 낀 조선의 사신들이 갈 곳은 열하가 아니었다. 연경(북경)이 본래 목적지였는데 그곳에 가보니 황제가 명목상의 피서로 열하에 있다하여 어쩔 수 없이 멀고 먼 열하까지 가야 했던 것이다. 조선 사신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다시 발길을 재촉하는데 그 가운데서 박지원의 행동은 단연 돋보인다. 악동기질을 발휘해 조선 사실들에게 "황제가 열하에 거동하여 연경이 비어서 몽고 기병 십만 명이 쳐들와 왔다오"라고 말해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드는가 하면 이별하는 하인들을 보며 온갖 폼을 잡고 이별론을 펼치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야 하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 박지원이 보여주는 행동들은 웃음이 가미된 한편의 시트콤 같이 보이기도 한다. 더군다나 무지하다고 깔보던 오랑캐라 하여 청나라 사람들 앞에서 근엄한 포즈 취하던 조선 사신들 사이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걸 생각해보라. 상상만 해도 유쾌하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박지원은 본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기에 자연스럽게 생긴 본 목적, 그것은 무엇이든 알고 더 많이 보고 와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었다. 그래서 박지원은 밤늦게 홀로 돌아다니고 중국의 인사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려 한다. 그 덕분에 <열하일기>에는 그 당시에 볼 수 없었던 내용들, 예컨대 코끼리와 같은 기이한 동물들이나 불교,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과 그것을 대하는 조선 사대부들의 편견과도 같은 고집들이 다양하게 나타난 것이다.

자, 이쯤만 알아도 <열하일기>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지 않은가?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교과서의 <열하일기>에 감춰진 매력을 들춰내는 기회가 된다. 덕분에 매력적인 인물 박지원은 물론이며 당시 사회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으니 어찌 이 기회를 마다하랴. 특히 지은이가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을 비교한, 둘 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서로 만난 적이 없는 동시대의 두 인물을 다룬 보론 '연암과 다산'까지 실려 있으니 어찌 기회가 매력적이지 않을까.

박지원이 코끼리를 보고 놀랐듯이 지루해보였던 그 <열하일기>를 보고도 놀랄 수 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즐거움과 감탄으로 말이다. 자, 백문이불여일견이라, <열하일기>의 진면목을 보자. 다만 그 전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으로 충분한 뜸을 들여 보자. 그러면 열하일기와 박지원에 매료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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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그냥 묻혀버리기엔 아까운 훌륭한 라캉 연구서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 동문선 현대신서 97
베르트랑 오질비 지음, 김석 옮김 / 동문선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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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부터 미국에서 부는 지젝 열풍이 남한에도 고스란히 날아와(이는 너무 당연한 결과지만, 또 너무 진부하고 부끄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이제 국내에서도 라캉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라캉 자신의 저술(곧 책이나 논문)이 한편도(!) 국역되어 있지 않은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참 놀라운 현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는 그만큼 라캉의 저작이 하루빨리, 그리고 신뢰할 수 있게 번역되기를 바라는 여러 독자들의 열망이 크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라캉에 관한 연구의 고전 중 하나로 꼽힐 만한 오질비의 책이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이렇게 사장되어 가는 것은 한 사람의 독자로서 참 아쉬운 일이다. 이는 아마도 오질비가 이 책 이외에는 단행본 저작을 내지 않은 데다 발표한 글들도 매우 적은 편이어서 미국에 별로 소개되지 않았고, 그래서 라캉에 관심이 많으신 여러 연구자들(대개 영미문학 전공자들이고, [아마추어] 정신분석가들이 몇몇 섞여 있는)들 역시 당연히(?) 이름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는 저간의 사정 때문이리라.

오질비는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영미권에도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프랑스의 좌파/구조주의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매우 높이 평가받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고등사범학교에 2002/2003년 학기부터 설치된 [현대 프랑스 철학 연구 센터]에서 그가 알랭 바디우, 이브 뒤루 등과 함께 강좌를 맡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주는 한 사례다. 그리고 그는 올해 나온 발리바르의 책(L'Europe, l'Amerique, la guerre)에서 발리바르와 '우정어린' 논쟁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오질비의 이 책은 그의 철학적 역량을 잘 보여주는 책인데, 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오질비의 책은 소위 정통 라캉주의자인 자크-알랭 밀레류의 해석에서 벗어나 라캉의 정신의학 박사학위 논문에서부터 1949년 라캉이 발표한 [거울 단계] 논문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라캉의 이론을 탐구하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1960년대 말-70년대 초의 소위 마템에 기초한 후기 라캉 중심의 해석과는 상당히 다른 관점이며, 따라서 벌써 영미권에서 정형화되기 시작한 정통 라캉주의적 해석과 다른 관점에서 라캉을 읽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해준다.

2) 하지만 오질비는 단순히 1933-1949년까지의 라캉의 저술에 한정하지 않고, [에크리]만이 아니라 라캉의 후기 저술, 예컨대 [정신분석의 네 가지 기본 개념](1964)의 쟁점들이 어떻게 이 시기의 라캉의 작업 속에 함축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더 나아가 그는 캉귈렘의 과학사 연구나 푸코의 작업과 라캉의 작업을 비교함으로써, 1960년대 구조주의 진영 내부의 지적 쟁점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제공해 주고 있다.

3) 오질비의 문체는 매우 간결하고 명쾌하지만 또 한편으로 상당히 함축적이어서, 적은 분량 안에서 매우 많은 논의내용을 담고 있으며, 내가 보기에 이것들 대부분은 구조주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라캉의 이론, 더 나아가 구조주의 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오질비의 이 책은 필독서라 해도 좋을 것이다. 번역은 전반적으로 무난하고, 공들인 역주도 책을 읽는 데 상당히 도움을 준다. 하지만 두어 군데 오역이 있고, 몇군데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점들은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무책임한 오역과 날림 출판으로 악명높은 출판사에서 이 정도 수준의 번역서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출판사의 책이라면 다시는 사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독자들도 한번 이 책은 믿고 구입해 볼 만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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