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ooni > 천개하고도 하룻밤
아라비안 나이트 1 범우 세계 문예 신서 14
리처드 F.버턴 지음, 김병철 옮김 / 범우사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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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안 나이트를 읽은 것은 고 3 가을이었다. 친구에게서 빌려 본, 조잡한 번역본이었지만 거의 완역본이기도 했다. (나중에 새로 나온 아라비안 나이트 완역을 보니 내가 예전에 본 그 책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정확하게 권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빌려준 친구네 집에 왜 그런 책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애가 자기네 식구들은 누구도 그 책을 단 한 장도 읽지 않았다고 했던 것만은 생각난다. 그런데도 그애는 내게 책을 돌려받는 것을 끝까지 잊지 않았다. 그래서 천일야화가 내게 가장 강하게 남긴 것은 그 책을 실제로―종이책을 손닿는 서가에 꽂아두고 가끔 열어볼 권리를 갖는 상태―소유하고 싶다는 물리적인 아쉬움이었다. 그것은 좀 이상한 느낌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천일야화가 전혀 재미없었던 것이다.

갇힌 공주. 아름다운 왕자. 사랑과 음모. 추한 노파. 수간을 하는 마신들, 정령이 깃든 사물, 왕과 부자. 사막과 섬의 숨겨진 보물. 괴이한 생물들과 마법, 저주. 기괴한 우연과 멋진 행운. 그리고 당연한 듯한 축복과 권선징악의 해피앤딩

그 모든게 지루했다. 괴로울 정도로 지겨웠다. 첫장부터 끝장까지 다. 그런데도 나는 그 책을 다 읽고, 갖고 싶다고까지 생각했다. 그것도 첫권의 첫페이지를 읽으면서부터 그랬다. 갖고 싶었지만 평생을 벌어도 천하루나 되는 아라비아의 밤들을 살만한 돈을 벌 수 없을 것같았다. 혹은 천하루나 되는 밤을 아라비아에서 보낼 여가를 마련할 수 없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읽어두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정석과 맨투맨영문법 밑에다 천일야화를 깔아두고 맹렬하게 읽어댔었다.

그것은 진정한 <결여>의 느낌이었다. 부재했던 것은 종이로서의 책이 아니라, 그 내용으로서의 천 하룻밤을 채워줄 이야기, 그것이었지만.

원래 욕구란 건, 결여이다. 없으니까 구하는 것이고, 있는 것은 욕망되지 않는다. 그래서 있는 것, 진실, 사실로서의 실체가 모자람과 결핍, 욕망의 형태를 결정짓는다. <그것이 아닌> 이라는 의미로. 욕망은 영원한 불만족이며, 끝없는 현실부정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욕망이야말로 훌륭한, 아름다운, 살아있는, 지옥이다. 현실이 있는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현실이 없다는, 일체의 무상을 깨닫게 되면, 욕망이 사라지므로 지옥에서도 벗어난다는 득도의 이야기에 나는 이제 감명받지 않기로 했다.) 

현실. 말하자면 천일야화에서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를 뺀 천하고도 하루의 밤. 그것 말이다. 새까만 사막. 그 끔찍한 평면성. 어둠과 모래만이 끝없이 반복되는 세계. 거기엔 잔혹한 왕이 산다. 배신당해 사랑을 잃고, 세계에 대한 모든 믿음을 상실해 사막처럼 지루해진 왕은, 그런데 슬프게도 발기해 있다. 그는 매일매일 정말 너무나도 확실하게 발기한다. 넌더리가 난다고 하면서도 그는 매일 여자를 원한다. 그야 당연하다. 발기는 신체현상이므로 마음이나, 이성, 의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의 정욕엔 아무런 드라마도 없다. 모래와 바람처럼 그것은 자연이다. 냉혹하고 무덤덤하고, 단순하게 지겹다. 섹스를 하는데 애무도 필요없고, 선물도, 사랑의 시도, 대화도 구애도 약혼과 결혼의 의식도 필요 없다. 왕은 길고도 지루한 밤에 찰나의 오르가즘을 지나쳐 아침이 되면 같이 잔 여자의 더는 필요 없어진 목을 벤다. 목이 베어지는 순간이 지나면 그리고 밤처럼 무료하고 권태로운 낮이 이어진다. 왕의 하루는 밤에는 정액냄새로, 아침의 피비린내로 채워진다. 고독한 왕의 현실이란 더럽고, 추악하고, 무의미한, 권태의 지옥이다.

나는 세헤라자드의 속셈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녀는 천날 하고도 하룻밤 동안 세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왕의 추악하게 실재하는 지옥을 자신의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지옥으로 포장했다. 그녀는 왕의 사막에 보물과 오아시스, 아름다운 처녀와 용감한 청년들을 채워 넣었다. 모래 알갱이에 신의 섭리가, 사막의 밤 저편에 천국의 영광이 있다고 왕을 꼬드겨, 그의 칼을 빼앗았다. 천하고도 하룻밤이 지나서 이야기가 다한 뒤에 그녀는 왕 앞에 아이들을 내놓는다. 이야기가 아이들을 태어날 수 있게 했고,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녀는 왕을 사랑했을까?

그녀의 현실은 이러하다. 남편인 왕은 더할나위없이 교양이 없고―그에겐 그녀에게 들려줄 이야기거리가 없다―, 잔악한 성미에 그녀를 향한 사랑조차 없다. (실제로 왕은 세헤라자드에게는 관심이 없다. 왕이 그녀를 죽이지 않은 것은 그녀의 얼굴이나 목소리, 그녀의 질이나 자궁, 출산의 가능성, 그녀의 인격이나 성격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들려주는, 자신이 구체화시키지 못한 욕망에 부합하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어서였다. 결국 왕은 자신의 욕망만을 욕망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매일 그런 남자와 잔다. 그런 남자의 아이를 낳으면서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  왕이 죽이려고 들면 아무도 그녀를 구해주지 못한다. 그게 세헤라자드의 현실이다. 왕의 섹스와 살인처럼, 그녀의 섹스와 결혼, 임신, 출산에도 아무런 드라마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왕이 그러하듯이 그녀도 지루하게 고독하니까.

이건 마치 DNA의 이중나선 구조같다. 현실이 욕망을 낳고, 욕망이 현실을 지탱한다. 비비꼬인 두 개의 서로 다른 지옥이 스스로를 복제한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현실과 욕망이 뒤섞인 복잡한 지옥이다.

(그런데 도대체 천국은 어디에?)

 

매일매일 밤이 온다. 매일매일 아침이 된다. 어제의 오늘은 내일의 오늘로 이어진다.

천일야화를 읽고 싶진 않은데 달리 무엇을 해야 좋을지 생각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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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클리오 >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은 후라면...
역사의 풍경 - 역사가는 과거를 어떻게 그리는가
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 강규형 옮김 / 에코리브르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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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뒷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서평이 있다.

- 마르크 블로크가 살아있었다면 이 책을 썼을 것이다. /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과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뒤를 잇는 최고의 역사학 입문서! -

사놓은지 꽤 되었고,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이라 읽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리뷰 올리는 시간이 늦어졌다. 저러한 화려한 서평들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다지 이 책에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았었다. 마르크 블로크와 카의 명성을 어쩐지 파는 듯 했고, 요즈음 역사학 관련하여 읽은 책들이 현학적인 나열들 끝에 재미 혹은 지겨움 이외에 아무 것도 남겨주지 않는 것 같은 반복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런 것에 조금 지쳤었나보다.

읽고나서의 느낌은 '최고'의 역사학 입문서인지는 몰라도, 최근의 논의를 반영하였으며 또한 방법론들 사이에서 헤매다가 아무런 실질적 연구업적을 내지 못하는 역사가들과는  달리 실질적인 역사 연구작업을 했던 한 폭넓은 학자의 평생의 사유결과를 보는 듯 했다. 첫 장을 여는 프리드리히의 방랑자 그림이나 셰익스피어 인러브의 기네트 펠트로 이야기를 비롯하여, 역사가가 역사 연구 과정에서 느끼는 호기심과 두려움, 압박감이 골고루 표현되어 공감하면서 함께 웃고, 대단한 필력에 놀라워했다. 저자는 스스로 서문에서 이 책을 <역사를 위한 변명>과 <역사란 무엇인가>의 업데이판의 필요성에 이 책을 저술했다고 밝힌다.

카나 블로크의 작업 위에서 출발하므로, 저자는 역사학에 대해 구구절절히 설명할 필요는 못느낀다. 다만 그들의 의견에 대한 업데이트(인과관계에 대한 재규정, 도덕적 판단에 대한 인식 등)와 최근의 연구경향을 말할 뿐이다.  책 전체에서 저자가 특별히 신경썼다고 느낀 것은 역사가들의 연구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방어하는 것이다. (방어한다고 해서 밀려나는 듯한 소극적 방어는 아니고 오히려 예찬하는 수준이다. )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과학의 최근 연구경향과 비교하여 역사가 과학과 연구방법론이 비슷하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여기서 엄밀하게 여러번 실험을 거쳐 법칙을 만들어내는 물리학 등의 실험실 순수과학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실험할 수 없는, 고생물학, 천문학 등의 학문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방법은 역사학의 방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오히려 최근의 과학에서 밝혀진 성과 - 카오스 이론, 프랙탈(잘 이해는 못했다!) -는 역사학에서는 옛날부터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어도 이미 쓰고 있는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즉, 역사는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은 역사가 과학화되는 것이 아니라, 최근의 경향에서 보건데 과학이 '역사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자연과학과 비슷해진 역사학이지만, 오히려 사회와 인간에 대해 다루는 유사학문인 듯한 사회과학과는 전제부터 다르다고 거리를 둔다. 사회과학의 목적인 일반화와 미래 예측은 역사학에서는 하지 않는 것이며, 미래 예측을 위한 단일한 종속변수의 규정은 실제 인간세계에 적용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사회과학이 기반하고 있는 '(자연)과학'에서조차 한물간 이론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유행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에 대해서도 과격하게 거부하지도 적극적으로 변명하지도 않는다. 다만 담담하게 관찰에 따라 대상이 달라진다고 해서, 그 대상이 실제로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말할 뿐이다. 책에 저술된 범위는 가까이는 역사학의 포스트모더니즘 뿐 아니라, 더 멀리는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최근 연구동향에까지 펼쳐져가고 있다. 그야말로 저자가 대단할 뿐이다.

이 모든 대단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가장 크게 마음에 든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역사의 필요성, 가능성과 한계를 보는 마지막 장 때문이다. 저자는 인식이 유연할 뿐 아니라, 역사가로서의 책임을 인식하고 있다. 또한 현재에 적용되고 있는 대부분의 억압이 그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역사가의 역할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가 역사에 대한 인식이 건전하고,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 특히 역사를 배운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 단지 허황된 탁상공론이나 방법론 수준에 그치지 않는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가장 큰 증거라고 생각한다.

리뷰가 좀 복잡해진 것 같은데, 실제로 <역사의 풍경>은 시작하는 부분을 편안하게 처리하고 있는 것 만큼이나 재미있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물론 중간의 과학이론 부분 설명이 좀 어렵긴 했지만, <역사란 무엇인가> 를 급진적으로 벗어나지 않는 역사학 입문서를 읽어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역자는 이 번역에 여러 사람의 자문을 얻었다고 했으니 많은 신경을 쓰셨겠지만, 읽다보니 도저히 무슨 말인지 맥락을 보아도 해독불가능한 문장이 몇 번 나온다. 그 점이 좀 아쉽고, '이야기'나 '역사', '과거' 등의 단어를 쓸 때에 분명히 같은 단어인 듯해서 확인해보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몇몇 단어들에 대해 필요한 경우에는 원단어를 함께 써줬어도 되었을텐데, 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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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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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얘기, 알고 있었다. 예전에 친구들이 영화 얘기를 할 때 대충 흘려들었는데, 그 아이들의 관심은 과연 이 여자가, 남편이 가짜였던 걸 알고 있었을까 몰랐을까에 쏠려 있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야, 그 여자가 바보냐? 그것도 모르고 살게?" 그리고 다행히(?) 데이비스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인 듯하다. 그녀는 본래 줄거리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숨겨져 있던 베르트랑드를 앞으로 데리고 나온다. 그리하여 베르트랑드는 이제 "남자의 교활함과 간교함에 의해 쉽게 속아넘어가는 여성"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아래서나마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 나가는 여성으로 재구성된다.
  '일반적인' 역사책에서는 볼 수 없는 '기록자' 챕터를 쓴 것도 흥미로웠다. 역사가 객관적일 수 없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가의 관점과 의지가 이야기 서술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리고 덕분에 "잊을 수 없는 판결"이라는 원문을 접해보지는 못했지만 그 책의 관점과 서술 방식을 대강이나마 눈치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장은, 어떤 사실이 기록되는지, 그 사실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은 서술자의 가치관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문제임을 보여 주는 좋은 예였다.
  그러나 정작 읽는 내내 내게 전율을 안겨 주었던 건 베르트랑드가 아니라 나탈리 데이비스였다. 그녀는 아르티가 주민들이 '기장뿐 아니라 밀, 귀리, 포도를 재배하고 소, 염소, 특히 양을 키우며 생활했다.(p.26)'에 넣을 단어 하나를 위해, '곡물과 포도주 역시 현물로 지불되는 임대의 형식으로 거래되거나 또는 르 포사와 파미에 농민들의 구매품으로 거래된다.(p.27)'라는 문장 하나를 위해 며칠씩을 서고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 광경이 눈에 보인다. 50여 쪽에 달하는 후주와 참고문헌도 그 사실을 말해 준다. 이 사람, 미쳤거나 너무 똑똑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리고 둘 중 어떤 것이건, 그녀는 내게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평생 이런 책 한 권만 쓸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T.T)
  하지만 이 책은 또한 역사학계 큰 파장을 불러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과연 이 책이 역사책인가 소설책인가를 놓고 말이다. 역사와 문학의 경계선을 어디에 그을 수 있을까? 과연 가능한 걸까? 아니, 굳이 그어야 하는 걸까? 모든 학문은 궁극에서 만난다는 논리에 기대지 않더라도, '객관적'인 척하는 역사가 역시 사실(事實)을 자기 나름대로 분석해 서술하지 않는가? '글쓴이의 시점'이 기술(記述)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역사와 문학적 글쓰기 사이에 그리 큰 간격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역사학은 역사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구체적인 사료가 근거로 제시된다는 점 외에, 문학과의 차이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책이 '역사'가 아닐 이유가 대체 뭔가?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 권의 책을 떠올렸다. "인간의 힘". 작가 성석제는 '오봉선생 실기'라는 짧은 글을 가지고 '인간의 (의지의) 힘'을 보여주는 장편소설을 한 권 만들어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와 같은 상상력이 아닐까. 성석제가 문학적 상상력으로 한 인간의 생애를 복원해내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이, 우리 또한 역사적 상상력을 가지고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뒷받침할 사료를 찾아 우리 여성의 역사를 복원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그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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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냐 > 해피엔딩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한가지 욕망이 너무 비대해져서, 다른 모든 욕망을 억눌렀단다. 그게 바로 배고픔이었단다. 그리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욕망.

'베를린의 한 여인'이라는 제목은 전혀 눈길을 끌지 못했다. 전쟁 얘기? 뭐 그렇다치자. 그런데, 저자가 '익명의 여인'이다. 어찌보면, 베를린 여인 전체의 기록이다. 그리고 이라크 여인의 기록이다. 다를게 하나 없지 않은가.

우유 몇모금, 죽, 빵 한조각. 하루종일 이 정도면, 배부른 만찬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독한 배고픔이다. 적디적은 음식이 위를 자극만하는 탓이다. 배고픔에 대한 집중도는 엄청나다. 나중에는 몸을 팔아서라도 굶주림을 면하는 일에 모든 사람들이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굶주림 앞에서 아귀가 되는 사람들에게, 폭격 등 다른 공포는 뒤로 밀린다.

부모가 폭경당하고, "장례식을 치른지 3일후 그 집 딸아이가 뜰에서 아직 쓸만한게 있나 파헤쳐보다가, 빗물 통 뒤에서 정말로 제 아빠의 팔 한쪽을 찾아냈다니까요."....이런 이야기는 별로 우습지도 않은 유머랍시고 사람들 입에서 쏟아진다. 바로 옆에서 음식을 다투던 아이가 폭탄 파편에 쓰러져도, 음식만 약탈하는데 성공했다면 성공.

전쟁에서 사람들의 본능은 야수와 닮아간다. 그리고, '여인의 생존본능'은 한차원 다른 얘기다.

책의 저자는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모스크바, 파리, 런던에서 생활했던 엘리트 여성이다. 출판사에서 일했던, 자유로운 지성인이다. 그녀는 말한다.

"선천적으로 우리 여자들은 합리적이고, 현실적이고, 기회주의적이다"라고.

전쟁에서 패한 베를린은 러시아군에게 그대로 상납된다. 침략과 약탈은 기본이고, 때와 장소, 나이를 가리지 않는 여인에 대한 집단강간도 전쟁은 그저 용납한다.

"몇번이나?"라는 말은 전쟁이 완전히 끝난뒤 여인네들의 일상적 질문이 되었다. 한번에 2명, 3명에게 혹은 그 이상에게 당하지 않으면 다행. 이 영민한 여성은 '차라리 늑대를 끌어들이자'고 결심한다. 기왕이면 계급장 높은 놈을 하나만 잘 붙들어도, 이놈 저놈에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다...이 여인의 '늑대'는 몇차례나 바뀌어야 했다. '늑대'가 가져오는 먹거리는 이 여인과 함께 지내던 주민들의 구명줄이었다. '늑대'가 사라지면, 새로운 '늑대'를 만들라는 압박도 심해졌다....가끔, '늑대'가 떠날때, 약간 슬프고, 허탈한 지경에 이른다.

여자들을 피해자들이라고, 희생양이라고 떠들 수 있을까.

꽁무니빼는 독일군을 보면서 여자는 기록한다.

"나는 요즘들어 점점 남자들에 대한 나의 감정이, 아니 모든 여자들의 감정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자들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너무나 가련하고, 무기력하게 보인다"

자신의 아내가 몸을 내주는 걸, 대부분의 남편들은 용인해야 했던 시절이다. 몸만 간신히 뉘일 다락방에 피신한 '처녀'들도 있었다. 물론, 그녀는 그런 은신처로 음식을 가져다줄 가족이 없었던 탓에, 그런 선택도 불가능했지만.

"왜 나는 그토록 도덕적인 체하며, 왜 몸을 파는 직업이 내 체면을 아주 떨어뜨리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그것은 적어도 오래되고 존경할만한 직업활동인데...하지만 내가 일단 도덕적인 면을 완전히 배제한다면, 이러한 직업활동에 빠져들 수 있을까? 내가 그것을 좋아할 수 있을까. 아니야. 결코 그럴 수 없어. 그것은 내 기질에 맞지 않으며,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할 것이며, 내 긍지를 짓밟을 것이다.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너무나도 기쁜 마음으로 그만둘 것이다. 내가 먹을 것을 다시 다른, 더 고상한, 내 긍지에 더 잘 어울리는 수단으로 벌어들일 수만 있다면 말이다."

여인의 정신은 건강하다. 스스로 밝혔듯, 여성들이 더 현실적인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절망'을 얘기하면서도 "내 마음속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애쓴다. 가장 참혹한 시절을 넘기면서 그녀는 이렇게 기록한다.

"어찌보면, 사정은 나에게 유리하다. 나는 젊고 건강하다. 사지도 멀쩡하다. 마치 내가 뛰어나게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진흙탕을 헤쳐나갈 물갈퀴를 가지고 있으며, 내 힘줄이 유달리 유연하고 질긴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독일은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하늘의 태양은 변함이 없다. 내가 일생동안 가진 것이 얼마나 되었던가. 이것으로도 과분하다."

우연히, 이런 기록이 있음을 알게 되고, 책으로 내자고 5년동안 여인을 졸랐던 이는 "이 책에 증오가 나타나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의아하다. 그러나 모든 감정들이 굳어버리는 곳에는 어떤 증오도 더 이상 타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이 올곧은 여인의 감정들이 모두 굳어버린거라 단정할 수 있을까.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그녀의 애인은 이 일기를 본뒤, 헤어지자고 했다지만.

나는  '익명의 여인'의 생명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강인한 그녀는 모든 고통을 딛고, 스스로 예언했듯, 역경을 헤쳐나갔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어쩌면, 해피엔딩을 바라는 헐리웃 감상주의에 물든 탓인지도 모르겠다. 전쟁은 처참하다.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은 것만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 짐승같은 기억을 남긴다. 담담하게, 증오없이 기록했다는 평가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전쟁은 그 어떤 후일담으로도 미화되지 않는다. 이 처참하고 놀라운 일기를 통해 현명하고 용감했던 그녀에 대한 어떤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덧붙여.....

며칠전 이라크 소녀 투라의 일기가 출간됐다....이라크 부르조아의 딸인 그녀는 일기를 통해 영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결국 미국에 유학가는데 성공했다...책을 살펴보던 나는 그 가벼움에도 불구, 전쟁의 체감 공포를 전할만 하다고 판단했지만, 리뷰를 맡겨보려했던 K는 단언했다. 이 책은 미국과 영국 언론의 구미에 딱 맞는 것인데, 참상만 전한다 해도.....한계가 있다고. K가 옳았다. 사담이 무너진 것에 대해 마치 정답같은 얘기를 늘어놓고, 그래도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투라는 '어린 소녀'다. '베를린의 한 여인'의 진정성을 그녀는 토해내지 못했다. 전쟁, 그 자체에 대한 무지막지한 모습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내 욕심은 여전하지만. 전쟁기록은 때로 위험하게 이용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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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짱 2004-09-20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덕분에 좋은 책을 알았습니다. 지금 꼭 읽고 싶은 그런 책입니다. 많이 고단할 때마다 님의 서재에 있는 많은 양식들로 허기진 심신을 달랩니다. 어디서 그리 좋은 글들을 모아오는지 정말 팅커벨에게라도 물어보고 싶군요.^^

꼬마요정 2004-09-20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기저기서 주워온답니다..^^
님께 도움이 되었다하니 정말 기쁘네요~ 힘 내시구, 미모로움과 유머로 다시 알라딘 서재를 장악하셔야지요.. 전 털짱님을 믿어요!!^^*
 
 전출처 : 로렌초의시종 > 무대 위의 신, 무대 아래 인간에게 내려오다

 빠듯한 시간을 쪼개서 파르나소스 산으로 뮤즈 9자매를 찾아갔다. 물론 보다 권위 있는 음악의 신은 아폴론이지만 그에게 음악을 청하기에는 부족함 점이 많기에 일단은 9명의 미녀 선생님들에게 예술의 기본을 전수 받기 위해서였다. 포근한 서늘함을 드러내는 초가을 달빛을 타고 내려오는 곡을 들으니 낯이 익었다. 바로크 시기 작곡가인 파헬벨의 『캐논 D장조』다. 두드리는 악기의 강렬함이 없이 그저 몇 가닥 줄을 따라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그 선율이 언제까지라도 내 귀와 마음을 적셔주겠다는 듯 쉬지 않고 변한다. 3대의 바이올린이 저마다 다른 성부(聲部)로 같은 주제의 선율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연주하는 음악 속에는 그들, 그리스 신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자리할 수 있는 이유가 담겨 있었다. 지상에서의 영속성을 부정할 때가 많지만, 달빛에 실려오는 영원함에의 자신감이 그리 싫지 않다. 그 선율 뒤에 자신들의 무궁(無窮)한 영광을 뽐내는 그리스 신들의 변주곡이 숨어있으니 말이다. 같은 듯 하면서 다르고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선율을 지탱시키는 너무도 정교해서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는 질서는 바로 그리스 신과 인간의 관계, 그 자체를 말하고 있었다.

 하나의 주제 속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변용. 신들의 왕 제우스도 이상적인 남성의 결정체인 아폴론도 그리고 사랑의 기억을 흩뿌리며 날아다니는 에로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분명 올림포스에 머물던 고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숨어있다. 우리가 그들을 찾지 못하고 심지어 그들이 사라졌다고 단정하는 이유도 그들의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재주 탓이다. 때로는 혼란스럽게 보이는 이러한 변신에도 분명 하나의 주제는 있었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라는 주제 말이다. 신으로써의 권능에 상관없이,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 이상의 인간다움을 추구했다. 신이 인간과 같은 모습을 지닌 존재인 이상, 신성(神性)의 소유는 결국 인간에게도 개방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신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강림하는 신들의 모습보다도 그런 신들을 대신해 신들의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인간의 절대성이었다. 페르세우스, 오디세우스, 그리고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영웅 헤라클레스까지 그들이 바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미덕의 극치를 저마다 대표하고 있었다. 인간을 초월해야 할 신들에게 인간의 성품을 부여한 이유는, 결국 인간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신들이 아니라 그 자신뿐이라는 드높은 자부심의 발현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올라오는 인간을 대신해서 그리스의 신들이 땅 위에 현현했기에 중세이래 전 서양을 지배한 기독교 아래서도 인간의 정신은 닫히지 않았으며, 천년의 시간을 보내고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온전히 부활할 수 있었다. 그들이 우리 곁에 있음으로 해서 예술은 외롭지도, 답답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주어진 예술의 자유 속에서 소재의 빈곤에 고민하던 예술가들을 도와준 이는 하늘로 오르는 인간이 아니라 이 지상의 삶과 예술을 즐기는 그리스의 신들이었다. 로마에 있는 바티칸 박물관의 벨베데레 궁에는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순간 이미 고전이 된 미남자의 표상, 아폴론 상이 있다. 항상 지상에 그 시대의 자신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니던 그는, 같은 로마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르네상스 시대의 자신의 분신을 만들었다. 바로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에서 그 마지막 날을 주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뜻밖의 행운으로 찾아간 로마에서 아폴론 상과 최후의 심판을 보았을 때, 책이 들려준 두 절대자의 하나 됨을 수긍할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으로 느꼈다. 천년 동안 하늘에 군림하던 신을 인간에게로 모셔 온 르네상스의 힘과 그 시대를 만들어 간 인간들에게 기꺼이 자신을 빌려준 그리스 신들의 인간미를 말이다.

 구석구석 빛이 들어오는 시대가 되어 버린 이제는 그리스 신들이 머물 환상의 공간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나에게 이 책은 미처 알지 못했던 환상의 신대륙으로 향하는 지도와 같았다. 가벼운 산보를 하듯 찾아간 신대륙에서는 고대에 그랬듯, 저마다 주연이 되는 수많은 연극이 무대에 올려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배우와 각본만은 변치 않는 그 연극과 함께 여름을 보냈다. 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무대 위에 올라간다면 누구라도 배우가 된다. 관객들 역시 이 지상에 신들과 함께 발 딛고 있는 존재이니 말이다. (2001년 여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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