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외계인이 지구를 평평하게 창조하였으니 - SF작가들의 유사과학 앤솔러지
문이소 외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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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과학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이 책 제목처럼 평평한 지구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먼저 방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면 죽는다는 것이 떠올랐다. 어릴 때는 철썩같이 믿어서 방문 열고 선풍기를 틀고 자거나, 방문을 못 열면 선풍기를 끄고 잤다. 덥다고 선풍기를 켜도 엄마가 들어와서 끄고 가기도 했다. 이런 유사과학에 희생된 사람이 바로 나다!!


첫 번째 이야기는 <개벽>이다. 정보라 작가가 문을 열었는데, 유사과학이 과학보다 얼마나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준다. 윤 씨가 개벽(사전적 의미 : 세상이 어지럽게 뒤집힘) 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라고나 할까. 한 사람의 세상을 뒤집기 위해 외계인까지 등장할 일인가 싶다가도, 불안은 그렇게 허무맹랑한 것도 말이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던가. 절박하거나 외롭거나 일확천금을 노리고 공짜를 좋아하면 빠져들기 쉬운 게 도박, 다단계, 사이비 종교일테지. 우리는 이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윤 씨가 외계인을 창조주로 모시는 숯과 소금을 팔아먹는 다단계 단체에 어떻게 빠져들게 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정보라 작가답게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도 꼬집어주고, 인종차별적 발언도 짚어준다. 사실 속이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지, 속는 사람은 죄가 없다. 도박 같은 범죄가 아닌 이상, 다단계나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잃게 되는 것들은 바란 것에 비해 너무 과하다. 전세사기도, 다단계도, 사이비 종교도 모두 없는 사람들 상대로 참으로 나쁜 짓인 거다. 거기다 사이비 종교가 말하는 깨끗함과 더러움은 무엇일까. 그 말도 안 되는 이분법이 세상을 절망으로 가득차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외계인이 지구를 평평하게 만든 건 다 팔아먹기 위해서인게지.


두 번째 이야기는 <소같이 풀을 먹는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이다. 이산화 작가의 이야기로, 많이 웃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를 믿지 않지만, 예수님이 백인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것도 충격일텐데, 장박사가 주장하는 바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까 싶었다. 게다가 그 참신함이라니!! 나 같으면 '처녀수태'에서 '처녀'라는 말을 차라리 젊은 여자로 바꿨을텐데 말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모켈레음벰베'는 마치 '네스 호의 괴물'을 떠오르게 한다. 어릴 때 진짜 네스 호에는 괴물이 산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으니까. 인간의 뇌는 신기하여 어떤 순간에는 생각한 대로 보이게 하는지도 모른다. '물에 뜬 통나무' 하나가 얼마나 많은 존재로 변주되는가. 그리고 강한 신념은 고립도 불사한다. 자신은 순교자라고 믿고 있을테지.


세 번째 이야기는 <유사 기를 불어넣어드립니다>로 최의택 작가의 이야기이다. 공무원 실수로 혜수가 아닌 해수가 되어버린 외계인 김해수. 외계인을 차별하는 큰 도시에서 작은 마을로 내려 온 해수는 우연히 살려 준 복순 씨 덕에 마을에서 적당히 잘 지내게 된다. 인간보다 체온이 높아서인지 팔다리를 주물러 주면 뭔가 기가 불어넣어진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그래서 마을 할머니들이 찾아와서 여기 저기 주물러 달라고 해서 해수가 사는 방은 늘 북적북적하다. 사실은 접촉과 정이 그리웠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리고 저 먼 안양에서 온 젊은 여자와 아이가 해수의 마음을 흔든다. 선천성 근이영양증을 앓아 걷지 못하는 박미서의 아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아이를 돌보는 박미서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돕는답시고 훈수 두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해수도, 박미서도, 아이도 모두 소수이자 이방인이었다. 외계인을 차별하는 세상이니 얼마나 더 많은 차별들이 있을까. 그런 차별들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좀 더 따뜻하게 살 수 있을까, 해수를 응원하게 된다.


네 번째 이야기는 <비합리적 종말점>으로 이하진 작가의 이야기이다. 읽는 내내 곽재식 작가의 <토끼의 아리아>가 생각났다. 거기서도 조사관이 나오는데, 정말 슬픈 사연을 가진 술 마시는 조사관이라고나 할까. <비합리적 종말점>에서는 억 단위의 지구인들이 기생충에 감염되어 죽어나가는 세상에서 정부든 세계기구든 누구든 이 기생충이 어떤 경로로 감염이 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한 역학조사관은 감염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사탕을 주목하고 추적하는데...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맞이하는 결말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가장 일어날 법한 일일지도 모른다. 검증도 없고 윤리의식도 없는 과장 광고에 현혹되지 말자라는 교훈을 얻었으며, 절대로 대가 없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되새긴다.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 뇌 역시 노력하여 얻은 도파민에는 내성도 없지 않은가. 인터넷에서 광고하는 성관련 증진제, 먹기만 해도 살이 빠진다는 다이어트 약물, 머리 좋아지는 약 따위에 흔들리지 말자. 약물로 만든 근육은 심장을 멈추게 하고, 식욕억제제는 호르몬 불균형을 가져오고, 오남용한 비아**는 저승 구경을 쉽게 하게 한다.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를 믿고 사랑하자. 그리고 노력을 비하하지 말고 노력이 남긴 땀방울을 사랑하자. 그 땀방울이 어제의 나보다 훨씬 멋진 나를 만들어줄테니.


다섯 번째 이야기는 <운명의 수레바위는 멈추지 않아>로 유사과학의 대표적 사례인 점성술이 등장하는 전혜진 작가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 유사과학 혹은 사이비 종교 이야기를 빙자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물론 그 사랑을 찾기까지 하율이 잃은 게 너무 크기는 하지만 말이다. 절박함은 때론 이성을 마비시키고, 살고자 하는 일이 이상하게 죽음을 부르는 결과가 되는 비극을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개인의 탓만은 아니다.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덮쳐오면, 가진 것 없는 개인인 우리는 그저 견디고 버틸 뿐이니까. 다 지나갈 것을 믿으면서. 겨울이 지나가면 봄이 오듯이 그렇게 나쁜 일 뒤에 좋은 일이 올 것이라는 믿음은 동앗줄이 되어줄테니. 그렇게 사람은 살아가겠지. 


여섯 번째 이야기는 <엑소더스>로 손지상 작가의 이야기이다. 인간은 언제 행복한가란 질문을 되새김질했다. 인정을 받으면 행복할까, 무리에 속하면 행복할까,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면 행복할까, 남이 정한 잣대를 만족시키면 행복할까. 그렇다면 다르면 행복하지 않을까? 다른 것은 정복해야 할까, 계급은 늘 존재해서 밑에 있는 계급을 착취하는 것이 정당할까, 장애는 왜 하등하다 생각할까. 어머니와 상툼은 정말 이툼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이툼은 이제 진짜 행복해졌을까. 그렇다면 이들은 왜 전쟁과 피를 부르는 신을 섬기는 것일까. 도대체 어디로 탈출할 수 있다는 말일까. 결국은 눈 감고 귀 막은 채로 그렇게 남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하는 걸까. 인간의 환경 파괴로 거대해진 바다코끼리와 두려우면 갈비뼈가 튀어나오는 알비노 펭귄들이 참으로 불쌍하다.


일곱 번째 이야기는 <정기유의 화양연화>로 문이소 작가의 이야기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노래도 있듯이, 불안에 먹히면 서서히 침몰하는 배처럼 끝없는 나락에 있는 것만 같아진다. 그래서 끝없이 안 좋은 생각을 하고, 모든 불행이 나를 덮치는 것만 같아서 종교든 과학이든 유사과학이든 붙드는 것이다. 더 이상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그럴 때 햇빛을 쬐면 좀 도움이 된다고 하던데, 이건 과학이다. 실제로 햇빛은 세로토닌의 분비를 촉진시킨다고 하니 말이다. 요거트를 먹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장이 건강하면 몸이 건강하고, 몸이 건강하면 뭐라도 해낼 의지가 생길테니까. 그러면 어느 순간 걷기라도 할테고 그러다보면 뛸 수 있을테지. 그렇게 불안과 우울에서 빠져나온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내 사주든 성격유형이든 운명이든 그게 아무리 좋고 커다랗다 하더라도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그리고 가능한 인간성은 버리지 말아야겠지, 극한에 몰리더라도 아무리 어려워도. 


여덟 번째 이야기는 <해상도의 문제>로 이주형 작가의 이야기이다. 대기업의 비윤리적이고 무책임한 행태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운 좋게 당첨된 화성 여행권으로 화성을 갈 수 있게 된 수진과 동영. 그들은 팩스 텔레포트라는 방법으로 화성에 갈 것이었다. 팩스는 Formation After eXtinguishment의 약자로 소멸 후 형성이란 뜻을 갖고 있고, 이는 분해 후 재구성이란 말과 같다. 어릴 때 '울트라맨'이란 만화영화를 봤는데, 거기서 딱 이런 식으로 악당이 한 외계인(?)을 사라지게 했다, 나타나게 했다 하면서 협박했었다. 신기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이해가 쉬웠다. 분자 형태로 사람을 분해했다가 다시 재구성하면 그 사람은 분해 전 사람과 같은 사람일까. '테세우스의 배'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성격유형검사, 그것도 최근 수년간 사회생활로 만들어진 성격유형검사 결과를 토대로 인간의 성격이 그 유형에 따라 편향될 수 있을까. 너는 그런 유형이니 그렇게 행동할거라는 말에 휘둘리는 것은 아닐까. 에디슨 사의 행태는 충분히 있음직해서 무서웠고, 진짜 '나'는 무엇일까란 생각이 들었고, 내가 살아가는 동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인 것 같아 신기했다. 그런데 MBTI랑 혈액형별 성격유형은 참 끈질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홉 번째 이야기는 홍준영 작가의 <그토록 단순한 시작으로부터>이다. 시작부터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언급하는데, 소수자이자 이방인이자 철저하게 배척당한 '괴물'과 '메이저 영감'과의 관계는 무엇일까. 동물농장에서 따온 이름으로 살아가는 메이저 영감은 과학자를 가장한 테러리스트이다. 대한민국에서, 돼지열병으로 돼지를 산 채로 묻어버리고 축산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자 한 축산인이 죽은 돼지들을 약물로 일으켜 청와대로 행진하게 했다. 그 후 그는 '메이저 영감'이 되었다. 인터폴이든 FBI든 수배를 당한 그가 갑자기 범국가적 범죄자 추적 비밀결사(N.W.O)에 자수했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든 괴물을 없애기 위해 북극으로 갔다. 메이저 영감은 왜 N.W.O의 앨리스에게 자수했으며 또 어디로 갈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정치'를 하기로 했다는 그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 뒷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이야기였다.


열 번째 이야기는 <유사과학소설작가연맹 탈회의 변>으로 홍지운 작가의 이야기이다. 못생긴 창조주, 인간을 버린 창조주 때문에 유사과학소설을 만들어 사람들을 현혹시켜야 했던 한 작가의 웃지 못할 사과문이며 비장한 연설문이다. 읽다보니 어느 순간 프리메이슨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우리 사회 곳곳에 뿌려진 음모론이 어쩌면 이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고민해봤다.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남는 존재인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를 죽이기도 하지만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도 하는 것이다. 무의식을 덮고, 그럴싸한 의식의 흐름을 믿으면서 비논리도 논리적이라고 우기면서 말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비굴하게 행동하지만 또 누군가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진실을 밝히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유사과학이 비록 사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오랜 시간 인간이 의지해 온 것들도 있고 인간에게 희망을 준 것도 있으며 불안을 잠재워준 것도 있다. 그렇기에 여전히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런 순진하고도 오래된 의지처를 악용해서 사람들을 나락으로 빠트리는 것들은 꼭 벼락 맞았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도 유사과학일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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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10-23 07: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 선풍기 괴담은 도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영향을 미친건지?! 저도 어릴 때 그거 믿었거든요. 진짜 오래간다 ㅋㅋㅋ 요즘 어린 친구들마저 들어봤을지도...

꼬마요정 2023-10-23 16:40   좋아요 1 | URL
선풍기가 나왔을 때부터 믿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전기요금 많이 나온다고 밀폐된 방에서는 못 틀게 한 걸수도 있어요. ㅋㅋㅋㅋ 잘 때 밤새 틀면 전기요금 많이 나오잖아요.(옛날 생각에) 이거슨 완전 도시 괴담 수준이라니까요. 아니, 선풍기 틀고 자면 왜 질식해서 죽냔 말이에요.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 해요!!!!! 아, 너무 흥분했어요. 흠흠

다락방 2023-10-26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꼬마요정 님, 저는 들어본 적도 없는 책들을 정말 많이 읽으시네요! 이 책도 그렇고 호러 픽션 나이트도 그렇고 저는 꼬마요정 님 덕에 이 책들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꼬마요정 2023-10-26 22:50   좋아요 0 | URL
정보라 작가님 덕분에 이 책은 흥미가 생겼었는데, 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요즘 제가 굉장히 관대하고 모든 것에 감탄하고 있어서 지금 읽는 족족 별 다섯이거든요. 일단 지금 제 상태로는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생각들이 너무 좋았어요. 호러, sf 쪽 한국 작가들한테 요즘 푹 빠져 있어서 그런가봐요. 장르 소설은 읽는 사람만 읽잖아요^^

다락방 님께도 좋은 독서가 되면 좋겠는데 ㅎㅎㅎ
 
사기본기 - 개정판 사기 (민음사)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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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는 본기 12편, 표 10편, 서 8편, 세가 30편, 열전 70편 등 총 130편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서이다. 이 책은 중국 전설 시대부터 춘추 전국 시대를 거쳐 한 무제 때까지의 역사를 기전체 형식으로 써 내려간 역사서이다. 사마천 자신이 생각한 역사의 기원을 신화 시대까지 끌어올린 것을 보면, 황제 헌원이 아주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헌원은 덕치로 세상을 다스렸는데, 사마천은 사기 본기에서 덕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헌원은 신화에서는 신묘한 능력을 발휘하고 인간이 아닌 자들을 중용하고 본인 역시 신과 같은 모양이나, 여기서는 한낱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본기 12편 중 1편은 오제 본기이다. 오제란 황제, 전욱, 제곡, 요, 순 등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다섯 제왕이다. 치적으로 보자면 일종의 로마의 오현제 같다고나 할까. 어디에도 유적이나 증거가 없기는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아들이 아닌 현명한 사람을 계승자로 삼았으며 영토를 확장하고 안정시켰고,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도 않았다고 한다. 어차피 사마천도 태사공왈 하면서 남아있는 기록이 있어 적으니, 전부 허황된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못 배운 이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렵다고 한다. 증거가 없으니 이거 진짜야!라고 하기 어렵지만, 춘추전국시대 때 학자들이 적어둔 게 있으니 진짜라고 하고 싶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오제가 토벌하려고 하는 축융이나 공공, 도철, 궁기 등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들은 전설 속의 흉 또는 흉수인데, 인간의 역사 속에 넣어두려니 뭔가 위화감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순 임금의 부인은 신화 속에서는 요 임금의 두 딸로 아황과 여영이란 이름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녀들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으니 서운하기도 하다. 어쨌든 사마천은 이 전설의 오제 시기를 인간의 역사 속으로 편입하면서 시기도 한참을 앞서고 영토도 아주 넓어지게 되었다.


2편은 하 본기이다. 하나라 왕은 우로 시작한다. 우 임금은 치수에 성공한 임금인데, 현대도 마찬가지로 치수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아주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 편 역시 전설 시대의 일이니 아주 재미있다. 우 임금 때부터 구주(九州)의 세계관이 등장한 것 같다. 우 임금은 구주를 다스렸는데, 앞선 오제 시기에는 열 두주 였던 것이 구주로 정착한 것 같다. 


3편은 은 본기이다. 은 왕조는 구체적으로 고증된 왕조다. 이 편은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17대 주왕에 이르기까지 은나라 600여 년의 이야기를 담았다.  '은'이란 지명은 지금의 하남성 안양현의 수둔촌을 말하는데, 실제로 은나라의 도읍지였다고 한다. 


이 편은 은의 시조인 설()의 탄생부터 시작한다. 간적이 알을 삼켜 설을 낳고, 순 임금은 설을  상나라에 봉하고 자씨를 성으로 내렸으며, 설이 죽자 아들 소명이 즉위하고, 소명이 죽자 아들 상토가 즉위하고, 상토가 죽자 아들 창약이 즉위하고, 창약이 죽자 아들 조어가 즉위하고... 이런 식으로 죽고 즉위하고 하다가 주계가 죽어 아들 천을이 즉위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성탕이다. 성탕은 덕을 잃은 하나라 걸왕을 죽이고 은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은의 마지막 왕인 주왕은 덕을 잃고 온갖 폭정을 가한 끝에 주나라 무왕에게 망한다. 사마천은 은 본기에서도 덕으로 다스려야 함을 강조한다.


누가 신묘한 영능으로 태어나고 그의 자손들이 태어나고 죽으면서 공적을 쌓고 결국은 중요한 인물이 태어난다는 식의 이야기는 사마천으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 실제로 고려 왕건이나 태조 이성계를 보면, 이들의 조상을 기술할 때 이런 형식을 따르고 있다.


4편은 주 본기이다. 주나라 800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주시대와 춘추 전국시대를 포함한다. 주로 서주의 역사에 중점을 두었고 평왕이 동천한 이후 각 제후들의 세가도 잘 드러나 있다. 주나라는 후직(요 임금 때 농업의 스승)이 선조인데, 그 때문인지 농업을 중시하고 공유나 고공단보 등의 업적 역시 농업과 관련되어 있다. 주나라의 경우, 앞선 나라들과 달리 남아 있는 기록들이 많기 때문에 사마천은 기록에 입각하여 주나라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주나라는 무왕이 등장하기까지의 시기와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운 이후 257년의 서주 시기와 평왕이 동천한 이후 동주 시기와 원왕 이후의 전국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동주 시기는 춘추 시대, 원왕 이후의 시기는 전국 시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게 주나라 876년의 역사는 덕으로 다스리던 시기에서 힘으로 다스리는 시기로 넘어가며 진(秦)나라에게 천하를 넘겨주게 된다. 


주 본기 마지막은 이러하다. "동주와 서주는 모두 진나라에 편입되고, 주나라는 망하여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p.164) 흥망성쇠란 이토록 허무한 것일까 싶은 문장이었다. 그래서일까, 태사공은 한(漢)나라가 일어나고 나서 90여 년 후 주나라의 후손을 찾아 '주자남군'이란 칭호를 내렸고, 이는 열후와 지위가 같아 비로소 조상의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고 마무리한다. 


5편은 진(秦) 본기이다. 진나라는 전욱제의 후예인 여수가 선조라고 한다. 어쩌면 그렇게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누구인지 족보를 잘 기록하고 간수했는지 신기할 따름이긴 하다. 은 시조인 설이 알에서 태어났고, 주 시조인 기가 거인의 발자국으로 인해 태어난 것과 유사하게도 여수는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을 낳았다. 진 본기도 읽다보면 아주 재미있다.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 진나라 역시 부침이 많았고, 끝까지 살아남았다. 진시황이 진시황이 되기까지 역시 온갖 역경과 고난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진나라 왕 정은 자리에 오른 지 26년 만에 처음으로 천하를 합병하여 서른여섯 개의 군을 만들었으며, 호칭을 시황제라고 했다. 시황제가 죽고 아들 호해가 이세황제가 되었고, 환관 조고가 이세를 죽이고 자영을 자리에 올렸다. 그리고 진나라는 멸망했다.


사기 본기는 신기한 편이 몇 편 있다. 오제 본기도 신기한 편이지만, 진시황 본기가 별도로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 그리고 항우 본기도 있고, 여 태후 본기도 있다. 사마천은 진시황이란 인물을 보다 깊이 파헤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항우의 경우, 사마천은 항우를 영웅으로 본 듯 하다. 본기는 제왕들의 전기인데 여기에 항우를 포함시킨 것은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의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목상 황제는 의제였으나, 항우는 스스로 서초 패왕이 되어 제후를 임명하는 등 실질적 황제였다. 여 태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고조가 죽은 후 여씨 천하를 만들어 실질적 황제 노릇을 했으니까. 이렇게 본다면 사마천이란 사람은 참 재미있는 인물임이 틀림없다.


6편은 진시황 본기이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중앙집권을 이룩한 황제이다. 출신성분이 불분명하고, 어린 나이에 볼모 생활도 하고, 후계 구도 자체에 들지 않았으나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누구보다 권력의 힘을 잘 알았고, 권력을 잘 휘둘렀다.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했고,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했고, 도로를 닦았다. 하지만 아방궁을 짓고 분서갱유를 일으켰으며 가혹한 법치주의를 실시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불로장생에 현혹되었고 마침내는 애써 일군 나라의 기틀을 무너트렸다. 나는 진시황 본기를 보면서 계속 떠오른 사람이 바로 일론 머스크였다. 두 사람이 무언가 성향이 비슷해 보였기 때문인데, 아마 냉혹한 결단력과 추진력, 불로장생이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7편은 항우 본기이다.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킨 인물이며 패왕이었다. 장기에 나오는 초와 한은 항우와 유방의 대결이다. 진나라의 폭정으로 우후죽순 반란이 일어날 때 항우 역시 항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 사람들을 모았다. 뛰어난 장수였으나 생각이 좁았고, 책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의를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길 원했고, 자신의 용맹함을 과신했다. 진나라를 멸망시켰고, 천하를 손에 거머쥘 순간이 눈 앞에 있었으나 유방에게 패했다. 사면초가 이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신화에 보면 순 임금은 눈동자가 둘이었다고 한다. 태사공이 말하기를, 주생(사마천이 알고 지낸 유학자)이 항우 역시 눈동자가 둘이라고 들었다 한다. 아무 세력이 없던 항우가 패왕이 되기까지 순 임금과 같은 천명을 받았으나 스스로를 꾸짖지 아니하고 덕이 아닌 힘으로 모든 것을 제압하려 했기에 천명을 잃은 것일까. 


8편은 고조 본기이다. 고조 본기는 읽다보면 하늘의 뜻이란 게 진짜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유방은 평민 출신의 건달이었다. 항우에게 계속 패했으나 결국 뜻을 이뤘고, 중국이란 나라의 기틀이 되는 한나라를 세웠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렸고, 능력 있고 어진 사람을 적재적소에 썼으며, 쓴소리라도 잘 받아들였다. 하지만 권력욕도 굉장해서 자신의 권력을 넘볼 것 같으면 가차없이 제거했다. 자신이 제일 중요했기에 항우로부터 도망칠 때 부인과 자식을 몇 번이나 마차에서 밀어 떨어트렸고, 여인 2천 명에게 갑옷을 입혀 내보낸 뒤 도망치기도 했다. 여색을 밝혔고, 술 먹고 빚을 지고 거짓말 하고 허세를 부리는 등 건달이 하는 짓은 다 했다. 하지만 하늘의 선택을 받았다. 사마천은 한 고조가 겉으로는 온화하고 너그러우나 속은 좁고 치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또한 그가 세운 한나라가 하, 은, 주의 병폐와 그 병폐를 다스리는 식의 통치의 순환을 이어갔다고 평가했다. 진시황의 진나라가 그 병폐를 다스리지 않고 형법으로 가혹하게 통치했으니, 한나라가 병폐를 계승하기는 했어도 이를 개혁해 백성들을 곤하지 않게 했으니 하늘의 뜻을 이어받았다고 말이다.


9편은 여 태후 본기이다. 사마천은 고조 본기 이후, 한 고조 사후 즉위한 혜제 본기가 아닌 여 태후 본기를 배치했다. 실질적으로 황제 노릇을 한 것은 여 태후라고 본 것이다. 여 태후는 이름은 치이며 고조 유방의 정식 황후이다. 유방이 죽은 후 자신의 아들인 유영이 즉위했는데, 그가 혜제이다. 여 태후는 황로 학설을 신봉하여 도가의 무위를 통치의 근본으로 생각했고 이를 토대로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고 경제 발전을 모색했다. 이는 한나라 이전에 횡행했던 법가의 가혹함을 생각하면 백성들에게는 다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이 공로를 인정했다. 하지만 또한 여 태후의 전횡으로 유씨 일족을 내쫓고 공신들을 모욕해서 쫓아낸 후 여씨 천하를 만든 것은 달갑지 않게 여겼다. 게다가 잔인하기까지 하여 자신의 정적이자 연적이었던 척 부인을 인간돼지로 만들어 구경거리로 전락시켰다. 결국 명분은 유씨에게 있었기에 여 태후 사후 여씨 일족은 몰락하지만, 여 태후란 존재가 결코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한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 한 사람만의 힘으로는 되지 않듯이, 한 고조 유방의 곁에 여 태후가 있었기에 한나라가 설 수 있지 않았을까.

 

10편은 효문 본기이다. 효문제 유항은 유방의 넷째 아들이다. 유방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황제가 된 것은 그에게 덕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사마천은 말한다. 효문제는 주발 등이 여씨들을 평정하고 난 후 황제에 즉위해 23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사마천이 성군이라고 칭송하는 황제로 덕치를 보여 준 황제이다. 황제는 늘 스스로를 부족하다 여겼고 늘 백성을 생각했으며 덕으로 다스리려고 노력했다. 불합리한 법령을 없애려고 했는데, 제나라 태창령 순우공이 죄를 지어 처벌받게 되자 막내딸 제영이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자신이 노비가 되어 아비의 죄를 갚겠으니 아비를 용서해달라고 말이다. 그러자 천자는 교화를 베풀지도 않고 형벌부터 가하니 그 형벌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괴롭고 부도덕한 것인지 안타깝다면서 육형을 없애도록 했다. 제영의 효심은 오늘날 경극의 주제로도 널리 공연될 정도로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 


11편은 효경 본기이다. 효경 본기는 사기 본기 중 가장 짧다. 목록만 있고 내용이 없으며 <한서> 경제기에 의거해 재구성했다는 설도 있다. 위작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으나 위작이 아니라는 증거 역시 없으므로 본기에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12편은 효무 본기이다. 사마천을 궁형에 처한 그 한무제가 효무 본기의 주인공이다. 한(漢)나라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황제 중 한 명이고 업적 또한 어마어마한 황제인데, 이 책을 읽다보면 그 업적은 잘 안 보인다. 눈에 잘 보이는 것은 무제가 불로장생을 위해 계속 신선을 찾아다니는 내용이다.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에게 시호인 '효무'를 붙인다든지, 문장이 처음 60여 자를 제외하면 <봉선서>와 완전히 일치한다든지 하는 점 등 때문에 위작 시비가 있는 편이다. 정말로 사마천은 무제를 폄하하고 그의 업적을 지우고 싶었던 것일까.


무제는 다른 어떤 중국의 제왕보다도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 제후국들이 천자의 관할 아래에 있는 것을 이상적인 세계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진시황이 했던 생각과도 비슷한 듯 한데, 무제는 자신이 이상적인 세계라고 생각했던 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토목 공사나 흉노 원정 등은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다. 화려한 제국을 위해 백성들의 피땀이 동원된 것이다. 또한 마음에 안들면 가족에게까지 가혹하여 무고(巫蠱)의 난 같은 참혹한 일도 일으키면서 한나라가 전한, 후한으로 나뉘고 또다시 중국이 쪼개지는 원인이 되었다. 어떤 학자는 진시황과 한무제가 유사하게 서술되었다는 점을 들어 실제로 사마천이 한무제를 비판하기 위해 이렇게 썼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한다.

  

역사서를 읽다보면 하늘은 절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치가 있어 그 이치에 합당하게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가진 것도 다 버리고 스스로 희생하기까지 하는 반면, 누군가는 가진 것에 더해 더 큰 것을 바라고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킨다. 큰 권력은 베풀지 않고 오히려 주변의 작은 권력까지 빨아들여 결국 혼자만의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진나라가 쇠퇴한 지 오래되자 천하는 흙이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서지듯 했으니, 비록 주공 단의 재주가 있었더라도 다시는 그 간교함을 펼칠 곳이 없을 터이니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버린 자영을(가의와 사마천이) 책망한 것은 잘못된 일이구나! 속세에 전하기로는 진시황은 죄악을 일으키고 호해는 죄악이 극에 이르렀다 하니 일리가 있다. 그런데 다시 자영을 책망하며 진나라의 국토를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른바 시세의 변화를 통찰하지 못한 것이다. (기나라의) 기계가 휴읍을 제나라에 바친 것에 대하여 <춘추>는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나는 <진시황 본기>를 읽다가 자영이 조고를 거열형에 처하는 데에 이르면, 일찍이 그 결단을 탄복하고 그 의지를 애석해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영은 삶과 죽음의 도의를 갖췄다.

-반고의 <전인>에서 - P280

주9) 치사(致師)를 번역한 것인데 치사란 전쟁을 하기에 앞서 소수의 날랜 군사들을 적진에 보내 약을 올리며 싸움을 거는 것을 말한다.

(주 본기 중에서)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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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코퍼필드 1 비꽃 세계 고전문학 16
찰스 디킨스 지음, 김옥수 옮김 / 비꽃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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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막내 동생이 소고기 사 준다고 해서 일요일 점심을 동생들과 함께 먹었다. 나는 소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동생들이 좋아해서 먹으러 갔다. 비싼 음식 사 주고 싶어하는 동생의 마음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말이다. 그러나 역시 나는 0.3인분 먹었고, 동생은 생각보다 밥값이 싸게 나와서 놀랐고, 덕분에 커피까지 막내가 쏘게 되었다. 앗싸!!


'오디오그라피'라는 카페를 가게 됐는데, 거기는 멋진 사장님이 계셨다. 음향기기와 음악을 사랑하시는 분인데, 거기 앰프랑 스피커랑 아주 좋은 것들을 갖추고 계셨고, 일정 시간이 되면 카페 손님들을 지하 청음실로 초대해 두 곡을 들려 주셨다. 나랑 동생들이 갔을 때 들었던 노래는 <헤어질 결심>에 나왔던 '안개'와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었다. 음.... 다들 좋다하니 좋은가보다... 했다. 나는 막귀니까. 그런데 음악을 듣고 난 뒤 사장님 말씀이 참 가슴에 와 닿았다. 그 시절의 음악을 들으면 잠시나마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다고 말이다. '안개'는 내가 살던 시대가 아니니 모르겠지만, '잘못된 만남'은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저 노래는 무용시간 과제였는데, 그 때 얼마나 많이 들었으면 저절로 가사가 튀어나왔다. 


음악도 그 시절을 떠 올리게 하고, 냄새도 어떤 시절을 떠 올리게 한다. 그리고 책도 어떤 기억을 불러온다. 나에게 이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그러했다. 


데이비드는 금요일 자정에 태어났다. 유복자였고 유복하지 못했다. 베시 대고모는 그가 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냥 떠났고, 데이비드는 아름답지만 유약한 어머니와 패거티 유모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어머니가 머드스톤을 만났고, 행복한 시절은 막을 내렸다.


데이비드의 엄마인 클라라가 머드스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그와 결혼하자, 머드스톤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머드스톤은 먼저 자신의 누나를 집으로 들였고, 클라라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머드스톤과 머드스톤 아씨는 클라라의 재산을 모두 가로챘고, 클라라의 아들인 데이비드를 위한 일들을 못하게 했다. 머드스톤은 스스로 데이비드를 가르치려고 했고, 데이비드를 아주 나쁜 아이인 마냥 취급했다. 클라라가 아들을 두둔하려거나 위하려고 하면 나쁘고 못된 아이는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면서 클라라가 마치 아들의 버릇을 나쁘게 만든 것처럼 말했고, 클라라는 늘 자신이 잘못했다 생각했고 데이비드를 지켜주지 못했다. 데이비드 역시 머드스톤과 머드스톤 아씨를 두려워했고, 늘 주눅이 들어있었다. 데이비드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패거티 유모였는데, 머드스톤이 둘이 같이 있는 것을 싫어해서 자주 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머드스톤은 겨우 열 살 정도인 데이비드를 아주 질 나쁜 기숙학교로 보내버렸다. 치사하고 치졸하고 비열한 머드스톤은 데이비드를 포악하고 말 안 듣는 아이로 말했고, 학교에서는 데이비드 등에 '깨무니까 조심하시오'란 벽보를 매달도록 했다. 학교로 가는 길에는 동행하는 어른이 없어서 웨이터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했고, 학교에서도 그저 교장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많이 맞기도 했다. 


머드스톤에게 학대 당해 시름시름 앓다 클라라는 세상을 떠났고, 데이비드는 머드스톤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 '머드스톤&그린비'에서 일하게 되면서 미코버 아저씨네서 살게 되었다. 하숙집 주인인 미코버는 채무자로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마침내 데이비드는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제일 처음 나왔던 베시 고모님에게 가기까지, 데이비드의 시간은 너무 비참하고 안타까웠다. 겨우 열 살짜리가 겪어야 했던 일들이 너무 가혹하여 머드스톤이 증오스러웠지만, 더 안타까운 사실은 당시 어린 아이들이 공장에서 일하고, 길거리에 나앉는 일이 흔했다는 것이다. 찰스 디킨스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썼다. 물론 자신의 다른 책들에도 그 경험들이 녹아 있지만, 이 책만큼 자전적이지는 않다고 한다. 실제로 디킨스는 금요일에 태어났고, 미코버 아저씨는 디킨스의 아버지가 모델이며, 세일럼 기숙학교는 디킨스가 다니던 학교가 모델이고, 머드스톤&그린비에서 일했던 것은 디킨스가 열 두살 때 다니던 공장의 일을 가지고 왔다. 


데이비드가 패거티 유모에게서 은화 열 냥을 빌려 베시 대고모님께 가는 길은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길이었다. 순식간에 열 냥을 강탈당한 뒤 옷을 팔아가며 밥을 먹고, 노숙을 하면서 걸어야 했던 데이비드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 데이비드를 보며 나 역시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데이비드가 하얀 공백으로 가득한 유년기라는 표현을 썼다면, 나는 내 어린 시절을 까맣게 기억한다. 까만 와중에 좋았던 기억, 나빴던 기억들이 드문드문 머릿속에 그려진다. 마치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스테이지와 쉐도우처럼. 냄비 뚜껑부터 라디오까지 다 분해하는 장면이 기억나고, 밥 안 먹어서 발가벗겨진 채 쫓겨난 일이 기억나고, 여섯 살 때 혼자 버스 타고 수영장 가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사람이 많아 못 내려서 다음 정거장에 겨우 내려서 걸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머드스톤이 데이비드에게 했던 것처럼 잘 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식의 말들이었다. 내 성적이 좋은 건 하필 그 시험에 다른 애들이 시험을 못 쳤기 때문이고, 시킨 대로 안 하면 무조건 여상에 가야 할 것이고, 니가 무슨 글을 쓸 수 있냐며 하던 말들 말이다. 무슨 일이든 일단 다 내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 되기에, 어느 순간부터 부모님께 힘든 일이든 좋은 일이든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베시 고모님이 머드스톤에게 퍼붓는 말들이 좋았다. 


"지금 당신이 하는 행동을 보고 당신이 하는 말을 들엇는데 그동안 당신이 어덯게 굴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소, 솔직히 말해서 당신과 대화하는 자체가 이렇게 역겨운데? 그래요, 당신은 처음에 정말 부드럽고 나긋나긋하게 굴었겠지! 불쌍하고 어리석고 순진무구한 아기는 그런 남자를 처음 보고. 참으로 다정하게 행동하며 숭배하는 남자. 남자는 아기 아들을 덮어놓고 예뻐했겠지...... 다정하고 부드럽게! 친아들처럼 보살피겠다고, 그러니 장미정원에서 함께 살자고 했겠지. 그죠? 흥! 어서 나가요, 어서!" (p.344)


"그래서 불쌍하고 귀여운 멍청이를 -이렇게 부르는 걸 하느님, 용서 하소서!- 확실하게 장악한 다음에는 멍청한 여자와 그 아들을 그동안 충분히 학대하지 못한 몫까지 덧붙여서 여자를 훈련하기 시작했겠지, 그죠? 새장에 가둔 불쌍한 새처럼 상처를 주고 당신 가락에 맞춰서 노래하도록 가르치는 식으로 미혹에 빠뜨리며 생명력을 조금씩 앗아갔겠지!" (pp.344-345)


"머드스톤 선생, 당신은 단순한 아기한테 폭군으로 군림하면서 심장을 갈가리 찢어발겼어. 그 애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기였어. 내가 잘 알아. 당신이 그 애를 보기 훨씬 전에 내가 보았거든. 그런데 당신은 그 애가 지닌 치명적인 약점을 이리저리 활용하며 상처를 주어서 죽인 거야. 당신이 그걸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통해서 위안을 느낀 건 사실이야. 당신은 그걸 당신 앞잡이와 함께 최대한 활용했어."(p. 345)


데이비드가 베시 고모님께 오기 전에는 그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 웨이터에게 조롱을 당하고, 학교에서는 가련한 선생님 편을 들어줄 줄도 몰랐고, 이기적이고 거만한 선배를 멋지다고 좋아했다. 교장 선생님은 기분 따라 애들을 학대했고, 하숙집 주인은 채무를 잔뜩 지고는 돈 한 푼 갚지 않으면서 피해자인 척 불쌍한 척 행동했다. 심지어 돈이 없어서 미코버 아저씨는 교도소에 가면서 아내와 아이들을 다 데리고 갔다! 교도소 독방은 월세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나보다. 그나마 패거티 유모 가족이, 특히 사랑스러운 에밀리가 데이비드에게 안식처를 줬는데, 자주 볼 수 없었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사회상은 어째서인지 그리 멀지 않은 때의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은지 신기했다. 불과 5~60년 만에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그 안에 있는 온갖 부조리하고 가혹하고 비참한 일들을 해결하지 못한 것 역시 사실이다. 전쟁이란 참혹한 일부터 시작해서 개발이나 독재 등을 통해 누적된 사회의 아픈 기억들은 여전히 모두의 집단 무의식에 남아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데이비드는 베시 고모님을 만났고, 안식처를 얻었고,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새롭게 가게 된 학교는 점잖은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있었고, 함께 살게 된 위크필드 씨는 좋은 사람이었다. 여전히 어리지만, 그래도 많이 배웠고 풋사랑도 하게 됐다. 이제 데이비드는 열 일곱이 되었고, 세상을 구경할 준비가 되었다.


'고통은 누구보다 훌륭한 스승이다.  

 나는 고통을 겪으면서 인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부러지고 깨졌지만, 훨씬 멋진 모습으로 태어났다.' 라고 찰스 디킨스는 말했다. 


그의 말처럼 나 역시 내가 겪은 고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여전히 용기를 내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은데 말이다. 하지만 또 그 기억 때문에 어떤 일들은 그다지 힘들지 않기도 하다. 어쩌면 찰스 디킨스의 저 말은 이야깃거리가 풍부해졌다라는 것은 아닐까. 나 역시 내가 겪은 일을 이야기 할라치면 아주 많은 말들을 할 수 있을테니까.


우리 사회가 겪은 그 고통들이 우리 개개인을 보다 단단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각자 개인의 몫이기도 하겠지만, 데이비드가 베시 고모님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사회 안전망이 그런 역할을 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자, 이제 데이비드의 다음 이야기를 읽으러 가야겠다. 더 이상 그가 힘들지 않기를, 사랑의 고통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절대로 치사한 사람이 되지 말고, 절대로 거짓말하지 말고, 절대로 잔인하게 굴지 말렴. 세 가지 악덕을 조심해, 트롯, 그럼 나는 너한테 언제나 희망을 품을 거야. - P361

하지만 나는 네가 육체를 단단하게 다진 만큼 정신적으로도 단단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아주 단단하고 훌륭한 사람, 의지가 뚜렷한 사람, 결단성 있는 사람, 단호한 사람. 강인한 사람, 트롯..... 합당한 명분 외에는 누구에게도, 어떤 상황에도 영향을 안 받는 강인한 사람.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이 되길 원해.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렇게 살았더라면 훨씬 좋았을 거야. - P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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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09-29 10: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데이비드 코퍼필드 저는 찍먹 수준으로 권마다 체험판으로 읽었는데 재미있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 디킨스의 글빨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추석연휴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꼬마요정 2023-09-30 00:01   좋아요 2 | URL
정말 디킨스는 글을 잘 쓰는 것 같아요. 1권의 유년 시절이 너무 가슴 아팠는데, 이후의 삶은 또 어떨지 궁금합니다.

서곡 님도 추석 연휴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다락방 2023-09-29 1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너무 읽고 싶네요. 사야겠어요. 불끈!!

꼬마요정 2023-09-30 00:01   좋아요 1 | URL
아아 얼른 사세요!! 그리고 다락방 님의 리뷰를 들려주세요^^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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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자크의 소설을 찍먹한 게 많다. 일단 <나나>는 표지에 이끌려 펼쳤는데, 읽다가 너무 지루해서 덮었다. <골짜기의 백합>은 재미가 없진 않았고 나폴레옹이 또 망친 것 같은 소년의 이야기가 나와 궁금하기도 했는데, 책 정리 하다가 없어졌고 다시 찾았을 때는 선뜻 읽어지지가 않았다. <어둠 속의 사건>도 몇 장 읽다가 꽂아두고, <나귀 가죽>도, <미지의 걸작>도 <13인당 이야기>도 모두 고이 모셔두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웠다. 만약 모든 것이 금지되고, 읽는 자유를 빼앗기고, 미래마저 불투명해진다면, 페터 한트케나 알랭 로브그리예나 조셉 콘래드의 책이라도 얼마나 재미있을까...하고. 그 안에서 다양한 인간군상과 인간성을 볼 수 있을테니까. 그런데 심지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라니. 얼마나 재미있을까. 게다가 중국어는 뜻글자이다 보니 번역하면 책 쪽수가 그닥 많지 않은가 보다. 이 책에 나온 책들 중 <장 크리스토프>를 검색했는데, 1권만 900쪽이던데... 


1966년 어느 날, 마오쩌둥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대혁명이란 사건을 일으킨다. 뭐, 나라를 대변혁하는 운동이라고 하는데, 대약진 운동으로 나라가 엉망이 되어갔기에 환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권력도 지켜야 했고. 그리하여 학교가 문을 닫았고 책들이 불탔고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쫓겨났다. 젊은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보내 가난한 농민들에게 재교육을 받도록 하게 하는 하방운동 또는 재교육으로 불리는 이 일은 현재의 중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데, 이 책의 두 주인공에게도 일어난 일이었다.


나와 뤄는 겨우 열 일곱, 열 여덟이었고 부모님이 의사라는 이유로 완전 시골깡촌으로 재교육 받기 위해 내려오게 된다. 그 곳에는 시계조차 없는, 현대 문명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었고 둘은 촌장 등 농민들의 감시를 받으며 매일 밭을 간다. 그들이 유일하게 해방되는 시간은 도시로 가서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때이다. 그들은 영화를 보고 돌아와 마을 사람들에게 그 영화를 이야기로 들려줘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야기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그들은 마치 세헤라자드가 된 것마냥 이야기를 보고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리고 같이 농촌으로 쫓겨 온 시인의 아들인 '안경잡이'에게 서양고전문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재봉사의 딸인 바느질 처녀가 등장한다. 어째서 그녀에게는 이름을 주지 않았을까? 바느질 처녀는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인데 말이다.  


'안경잡이'는 다시 도시로 돌아가기 위해 민요를 수집해야 하고, 뤄와 나는 그를 도와주는 대가로 소설책 한 권을 빌리기로 한다. 그들이 받은 책은 발자크의 <위르쉴 미루에>이다. 이 책을 읽고 전율하는 두 사람... 나는 이 책의 일부를 겉옷 안감에 필사하고, 뤄는 바느질 처녀를 훌륭한 숙녀로 만들기 위해 책을 읽어주려고 한다.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이념들은 그들의 삶에 겉도는 부유물일지도 모른다. 녹아들지 못하고 그저 겉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런 것 말이다. 뤄가 말라리아에 걸리자 바느질 처녀는 약초를 붙여주고 네 명의 무당을 불렀다. 20세기 분서갱유라 불리는 이런 사건 자체도 말이 안 되는 것이긴 하지만. 젋은 지식인들을 재교육하려고 농촌에 보냈는데, 현실은 무당이 병을 치료하고, 금서인 문학책들이 인간 세상을 알려준다니... 


이야기는 빠르고 재미있게 전개되어 순식간에 다 읽었다. 재미있었고, 웃겼다. 바느질 처녀 덕분에 발자크의 책들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그녀를 그렇게 변모시킨 그 이야기들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죽지 않고 돌고 도는 모양이다. 


읽다보니 궁금한 점이 있었다. 뤄와 내가 민요를 수집하기 위해 재봉사의 옷과 모자를 빌렸는데, 그 때 모자의 색깔이 녹색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녹색 모자나 녹색 머리 장신구는 배우자의 바람을 뜻하는 게 아닌가? 특히 남자가 녹색을 착용하면 오쟁이진 남편이란 말을 듣는데 말이다.


그리고 '나'가 재봉사에게 밤마다 들려주던 <몬테크리스토>의 이야기 중에, 마을 촌장에게 들키기 직전 '백작이 검사의 딸과 막 사랑에 빠지려는 순간'이란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빌포르의 딸인 발렌타인과 사랑에 빠지는 건 모렐의 아들인 막시밀리앙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이야기는 조금씩 비틀려서 전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지금 중국은 젊은이들을 농촌으로 보낸다고 하는데 이제는 농촌에도 현대문물이 가득할테니 이렇게 책을 통해 인생을 배우는 일은 드물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일일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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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9-18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녹색 모자가 그런 뜻이 있었군요?
이 책 제목은 참 많이 들어본 것 같아요.
근데 첫 단원에 열거하신 작가들은 좀 지루한 작가들이에요? 저 작가들의 책도 읽어본 게 없네요?^^;;
요정 님은 늘 느끼지만 정말 다양한 분야의 다독가세요.

꼬마요정 2023-09-21 15:54   좋아요 1 | URL
책 제목 유명하죠? 저도 이제 읽었네요. (근데 전 옌롄커가 더 좋아요^^)
중국 갈 때 녹색 모자는 안 쓰는 게 좋거든요.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페터 한트케는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로 노벨학상을 받았어요. 저는 이 작가의 <어느 작가의 오후>를 읽었는데 음... 무슨 말일까? 그랬죠 ㅋㅋㅋㅋ
알랭 로브그리예 책은 <질투> 하나 읽고 있는데요, 아마 몇 년째 읽고 있기만 해요 ㅋㅋ 도대체 진도가 안 나가서 절반 정도 읽고 그냥 그 페이지입니다. ㅋㅋㅋㅋ
조셉 콘래드는 단편은 좀 나았는데요, <암흑의 핵심>은... 음.. 아실 것 같아요. ㅋㅋㅋ

저는 그냥 이것 저것 궁금한 게 많아서 시도를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아요 ㅎㅎㅎ

책읽는나무 2023-09-21 17:08   좋아요 1 | URL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전 한 권도 읽어보질 못했네요.^^;;
저도 궁금해지는데 언젠간 시도해 볼 시간이 오겠죠.ㅋㅋㅋ
열심히 시도해 봅시다.^^

꼬마요정 2023-09-21 17:50   좋아요 1 | URL
책나무 님이 더 대단하신걸요. 요리도 잘 하시고 ㅎㅎㅎ
우리 함께 열심히 시도해보아요!!!!!
 
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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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TV에서 재밌게 봤던 만화 중 하나가 바로 스머프다. 만화의 정확한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파란색의 스머프들과 가가멜과 아즈라엘은 기억난다. 버섯 모양의 지붕을 가진 집에 사는 스머프들은 파파 스머프의 지휘 아래 평화롭게 살았고, 가끔 가가멜이랑 아즈라엘이 스머프 마을을 괴롭혔던 걸로 기억한다. 그들에게는 계급이 없었고, 연장자인 파파 스머프가 지도자로 마을의 큰 일을 다같이 의논했었다. 이 책을 읽다보니 스머프가 생각났다.


이 이야기의 화자는 딩차오양, 할아버지 딩수이양의 손자이자 딩후이의 아들이자 독살당한 아이이다. 차오양의 할아버지인 딩수이양은 꿈을 사랑하고 염치를 알며 어쩌면 저 커다란 나라에 하나 남은 참회할 줄 아는 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자신의 자리를 잃어가게 된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는, 경제 발전이 가져 온 물질만능주의 혹은 그 욕망이 만들어 낸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중국의 경우, 미국이나 우리나라보다 더 늦은 시기까지 '혈액'을 충당하기 위해서 혈액원이나 병원 등에서는 피를 사곤 했다. '매혈'은 피를 뽑아주고 돈을 벌기 좋은 방법이었다. 중국 정부는 각 성, 현, 마을에 이르기까지 매혈을 장려했고 조용하던 시골 마을들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피를 팔아 기와집을 짓고, 피를 팔아 세탁기를 사고, 피를 팔아 2층집을 짓고, 피를 팔아 길을 닦고, 피를 팔아 고기를 먹고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생활을 이어나갔다. 딩후이는 이런 시기를 잘 이용한 사람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매혈을 하다보니 의료 인력은 부족했고, 딩후이는 자신이 채혈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주삿바늘을 세 명에게 사용했고, 고지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피를 뽑았고, 정부에서 지급하는 돈보다 적게 지급하고 피를 샀다. 그리고 딩후이는 부자가 되었다. 


몇 년 후 열병이 돌았다. 이 열병에 걸린 사람은 금방 죽기도 하고, 한참을 살아있기도 했다. 매혈한 사람 대부분이 걸렸고, 매혈을 하지 않은 사람이 걸리기도 했다. 마을은 뒤숭숭했고, 사람들은 절망했다. 이 열병은 에이즈였다. 마을에서 열병에 걸린 마샹린이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창을 하던 날, 신약은 없다는 말에 마샹린이 죽었고 열병에 걸린 사람들은 딩수이양이 있는 학교에 모여 살게 되었다.


가족들에게 병을 옮길까 걱정하던 사람들은 모두 학교에 모였고, 합의한 양의 곡식을 내고 다같이 지위의 높낮이 없이 생활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은 앞서 이야기 했던 평화로운 스머프 마을 같기도 했다. 그저 모두가 지켜야 할 원칙 몇 개만 있을 뿐, 모두가 자유로웠으니까. 그렇게 처음에는 딩수이양의 지도 아래 천국 같은 생활을 했으나, 삶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다. 사람이 모이면 사회가 만들어진다. 어느 순간 지위가 생기고, 어느 순간 치정이 생기고, 어느 순간 빈부가 생긴다. 누구는 누구를 시기하고, 누구는 누구를 질투하고, 누구는 누구를 더 아끼고, 누구는 누구에게 더 큰 것을 주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딩수이양이 바라던 것처럼 모두가 같은 것을 누리고 다 함께 평안하게 사는 삶은 끝나가고 있었다. 열병이 그들을 뭉치게 했고, 죽어갈 날을 기다리던 그들은 여전히 죽기 전까지 욕망을 버리지 못했다. 


학교의 책상, 의자, 칠판 등 딩수이양이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남겨놓았던 것들은 모두 마을 사람들에게 분배되었고, 학교는 끝났다. 학교는 희망이었고, 미래였다. 이제 미래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피를 팔아 마을은 풍성해졌고, 관을 팔아 마을엔 꽃이 피었다. 딩후이는 시대를 잘 읽었고, 정부의 무관심과 관료주의에 따라 피를 팔고 관을 팔아 큰 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심지어 영혼결혼식까지 주선하여 돈을 챙겼다. 정부는 그저 인민을 통제할 수만 있다면 아무 상관 없는 듯 보였다.


생명도, 의리도, 혈연도, 체면도 모두 돈 앞에서는 그 가치가 작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은 잠시나마 피었다. 링링과 딩량은 열병이 아니었다면 돌팔매질을 당했을 그런 사랑을 했다. 이 책 곳곳마다 인간성이 넘쳐났다. 사랑도 욕심도 모두 인간이 가진 고유한 속성이 아니겠는가.


딩수이양은 아들인 딩후이와 딩량의 잘못에 크게 실망했고, 늘 책임감을 느꼈고, 어떻게든 참회하길 바랐다. 이는 그가 자식들에게 개두(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는 예법)를 시킨 것에서부터 계속 보이지만, 그건 그저 그의 바람이었다...


살해당한 아이의 영혼이 들려주는 이 마을의 이야기는 꿈일까, 생시(生時)일까. 딩수이양의 꿈과 일치하는 사건들과 실제로 흘러가는 이야기들은 비극적이었으며 뉘우침과 반성이 배여이었다. 슬프지만 그렇게 끝이다. 다음 세대는 참회가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가르치는 스승이 없으니 말이다. 그게 어쩌면 가장 큰 비극일지도 모르겠다. 

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피고가 된 후로 저는 법원의 재판 과정을 통해 저의 글쓰기와 <딩씨 마을의 꿈>이라는 책이 중국에서 ‘어떤 죄를 범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사유 끝에 사실은 작가인 제가 비상을 쟁취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 마리 새라는 것을, <딩씨 마을의 꿈>과 저의 글쓰기가 사실은 비상을 쟁취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새의 울음소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딩씨 마을의 꿈>은 현실을 쓴 것인 동시에 꿈을 쓴 것이고, 어둠을 쓴 것인 동시에 빛을 쓴 것이며, 환멸ㅇ르 쓴 것인 동시에 여명을 쓴 것이었습니다. 제가 쓰고자 한 것은 사랑과 위대한 인성이었고, 생명의 연약함과 탐욕의 강대함이었습니다. 인류의 생존과 발전을 둘러싸고 있는 고난을 극복하고 선과 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영혼의 교육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과 내일에 대한 기대와 인성의 가장 후미진 구석에 자리한 욕망의 그 꺼지지 않고 반짝이는 빛이었습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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