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모든 선거는 인기투표의 측면이 있다. 잘생긴 사람, 착하게 생긴 사람이 표를 얻어 당선된다.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는 그런 경향이 좀 심하다. 유권자들은 ‘왕’이나 ‘메시아’를 뽑아놓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어한다. 유권자 자신은 5년마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한 표 찍어주면 그만이다. 편하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된다. ‘감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인지 꼼꼼히 살펴야 한다.

공약을 따져보는 데는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첫째, ‘공약’인지, ‘구호’인지 구분해야 한다. “하겠다”는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해야 공약이다. 또 실천을 위한 일정표와 재원 마련 방안을 살펴야 한다. 그냥 ‘말’을 믿어선 안 된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대한민국 747’(7% 성장, 1인당 소득 4만불, 7대 강국)은 구호다. ‘747’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 시스템 재설계, 법질서 준수 등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역시 구호에 불과하다. ‘어떻게’ 그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것인지 실행 방안은 아직 부실하다. 반면, 이 후보의 한반도 대운하는 분명한 공약이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한반도를 관통하는 새로운 ‘물길’이 생긴다. 이 후보는 운하를 만들기 위한 대략의 실행 프로그램과 재원 대책도 설명하고 있다. 타당성은 별도의 문제다.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여러 가지를 내놓고 있지만, 아직 ‘대표 공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4대 불안(주택·일자리·교육·실버) 해소를 위한 가족행복 프로젝트를 제안해 놓고 있지만, 아직 구호에 그치고 있다. 앞으로 내용을 채워 나가겠다고 한다. 문국현 창조한국당(가칭) 예비후보의 ‘일자리’ 정책은 공약이라고 봐야 한다. 그는 △일자리 특별법 제정 △중소기업부 신설 △4조2교대제 도입 등을 세부 정책으로 제안하고 있다.

둘째, 공약이 ‘나’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 주는지 생각해야 한다. 이명박 후보의 자율형 사립고 100개 육성, 대학입시 자율화는 매우 중요한 공약이다. 자율형 사립고 100개는 일반계 사립고교의 약 14%에 해당하는 숫자다. 자율형 사립고에 못 들어가면 서울에 있는 ‘괜찮은’ 대학에 들어갈 수 없다는 얘기다. 학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면 자율형 사립고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모든 초등학생 학부모는 예비 서울대 학부모’라는 말이 있다. 그런가? 기회는 기회일 뿐이다. 공교육 정상화 방안을 먼저 물어야 한다.

이명박 후보와 문국현 후보의 교육 정책은 좋은 비교거리다. 문 후보는 교육기회 균등화 극대화 방안으로 △5세 유아·고교 무상교육 △3불 정책 유지를 기반으로 상향 평준화 △기회균등 선발제 등을 제시했다. 교육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두 후보의 공약이 자기 자식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공약을 뒷받침하고 있는 철학을 살펴야 한다. 철학과 이론은 현실에서 나온 것이다. 무시하면 안 된다. 이명박 후보의 경제관은 신자유주의, 쉽게 말하면 그냥 자유주의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인세 20%로 인하’,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금산 분리(산업자본의 은행업 겸영 금지) 점진적 완화’ 등은 그런 바탕에서 나왔다. 그런 공약이 실천되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생각해 봐야 한다. 재벌 공화국이나 토목 공화국이 되는 것은 아닌지, 양극화가 심해질 것인지, 아닌지 따져야 한다.

정동영 후보의 대북정책 가운데 서울-인천-개성을 연결하는 ‘평화경제복합특구 구상’ 등 각론에는 햇볕 정책, 평화번영 정책의 철학이 녹아 있다. 정 후보와 가까운 한 인사는 “우리 경제는 풀기 어려운 기하 문제와 같다. 그런데 북한이라는 보조선을 이용해 문제를 한번 풀어보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착안이다.

후보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그만이지 공약이 뭐 그리 중요하냐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생각이 ‘묻지마 지지’를 낳는다. 나중에 잘못되면 대통령 탓만 할 것인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권자 노릇을 하기는 쉽지 않다.

성한용 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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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국정원 과거사위는 칼858기 폭파사건이 북한 대남공작 조직의 공작원 김현희·김승일씨에 의해 이뤄졌으며, 안기부가 사건을 사전에 인지·기획·공작했다고 볼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제기된 의혹만 350건인 이 사건 관련 문서 15만여쪽, 관련자 93명을 조사한 결과다.

그러나 과거사위는 안기부가 1987년 당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당 후보에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기 위해 선거 전 김현희씨를 압송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하는 한편, 김씨의 진술만 듣고 서둘러 수사결과를 발표해 의혹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또 이를 위해 내무부·안기부 등 10개 정부기관이 동원됐으며, 김씨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김씨의 사면이 추진됐다는 사실도 밝혔다. 과거사위는 “실체가 명백한 사건도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경우 불필요한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다시는 정치적 중립을 훼손하는 활동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고 국정원에 촉구했다.

과거사위는 안기부 개입 의혹의 주요 근거였던 △김현희 화동사진 △북한 출신 여부 및 행적 △폭약의 종류·양 등을 규명했다. 과거사위는 1972년 평양 남북조절위원회 당시 화동이 김현희라는 사실을 당시 일본 공산당 기관지 평양 특파원으로부터 사진을 전량 확보해 확인했다. 또 안기부가 임의로 추정했던 폭약은 ‘콤포지션’ 계열일 가능성이 높으며, 폭약을 숨긴 라디오가 정상 작동했던 점을 고려할 때 당시 발표된 350g보다 적은 양이 사용됐을 것으로 판단했다.

‘기획 자작극’의 당사자로 지목됐던 안기부는 ‘혐의’를 벗었지만 △블랙박스 등 잔해수거를 통해 사고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점 △김현희씨와 당시 수색을 지휘한 대한항공 사장의 거부로 이들을 면담조차 하지 못한 점은 한계로 지적됐다. 칼858기 폭파사건은 지난 7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에서도 조사 개시 결정이 내려져, 다시 한번 정부 차원의 판단을 남겨놓고 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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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일부만 임의로 편집함)

신군부가 1980년 10월27일 대한불교조계종(조계종)의 스님과 불교 관련 인사 등 153명을 강제연행하고 전국의 사찰.암자 5천731곳을 일제 수색했던 이른바 '10.27 법난' 사건의 진상이 규명됐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는 25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10.27 법난 사건의 전후과정을 보고받았을 가능성이 높고, 법난 사건이 신군부세력에 비우호적인 조계종 월주 총무원장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서 비롯됐다는 사실들을 밝혀냈다.

◇ 월주 총무원장, 신군부와 문화공보부에 밉보여 = 과거사위는 10.27 법난사건이 신군부세력에 비우호적인 조계종 월주 총무원장에 대한 신군부와 문공부의 부정적인 평가에서 시작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월주 스님을 중심으로 한 개운사측에 대해 이념적 측면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문공부는 승려들이 사회민주화세력과 연합해 고질적인 저항세력으로 성장할 우려가 크다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 합수단, 1980년 9월부터 불교계 수사준비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1980년 6월께 '3단계 사회정화계획'을 추진했으며 종교계는 3단계인 10월부터 숙정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특히 국보위의 수사지시를 받은 합동수사단은 9월부터 조계종단을 정화수사 대상으로 결정하고 수사준비에 착수했다.

10월27일 새벽부터 연행대상 69명 가운데 45명이 체포돼 서울 보안사 서빙고분실과 각 지역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으며 혐의 인정을 강요받았다. 이어 당시 맡고있던 직책의 사직도 종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 "군홧발 무자비한 법당 난입" = 당시 연행됐던 활성 스님은 "10월 말께 문경 봉암사로 쳐들어온 군인들은 모든 스님들을 법당 앞으로 모이게 하고 줄을 세웠다. 이 때 조실 스님까지 줄에 세우라고 명령했다. 너무 황망하고 무례한 사건을 당한 후 모든 수좌승들은 분노했다"고 당시 회고를 했다.

수사기관에 연행된 스님들은 무릎을 꿇게 한 상태에서 각목을 집어넣고 무릎 누르기, 새끼 손가락에 볼펜을 끼워놓은 상태에서 조이기, 잠 안재우기, 코와 입에 고춧가루와 빙초산 섞은 물 붓기, 물고문, 전기고문 등 온갖 가혹행위가 자행됐다. 손에 납덩이를 올려놓고 전기를 통하게 하는 전기고문, 군홧발로 밟고 소총 개머리판으로 때리기, 폭언 등도 비일비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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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선조 22년) 10월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1천여명이 처형당하거나 고문받다가 또는 귀양 중에 숨지고 투옥당하거나 노비로 전락했다.

무오·갑자·기묘·을사 4대 사화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 기축옥사는 당시 인구 500만이던 조선 전토를 참화 속에 몰아넣었다. 뒤이은 임진년 왜란조차 기축옥사의 황폐가 부른 재앙이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사태는 참혹했다. 그 중심에 정6품 홍문관 수찬에 올랐던 당대의 귀재 정여립(1546~1589) 모반사건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다산초당)은 바로 정여립 모반사건의 시대적 배경과 연루된 인물들을 종횡으로 추적한다. “조선왕조는 정여립 사건 이후 300년을 더 버텼다. 하지만 영·정조 때 잠깐 불꽃을 피워올렸을 뿐 지리멸렬했다. 그때가 개국한 지 200년이었는데, 한 왕조의 수명은 200년 정도면 족하다는 얘기들이 많다. 그때 차라리 정여립이 반란에 성공했거나 다른 왕조가 시작됐더라면 이후 우리에겐 새 역사가 전개됐을 것이다.” 전주 황토현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서울에 사무실을 둔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대표도 맡고 있는 ‘문화사학자’ 신정일(53)씨. “1980년대 말부터 정여립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으니 20여년간 공부해온 셈이다.”

정여립은 정말 반란을 꾀했을까? 실은 이 기초적인 사실조차 규명돼 있지 않다. 사건조사기록 <기축옥안>은 임진란에 불탔고, 남아 있는 얘기들은 당파에 따라 극단으로 엇갈려 어느쪽이 진실인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정여립은 행적이 모두 말살돼 남들이 전하는 얘기 외에 그가 쓴 문서 하나 남은 게 없다. 유혈낭자했던 그 ‘최대의 역모사건’은 애초부터 시비를 가릴 아무런 물증도 없었다. 동서 ‘붕당’의 파벌전쟁 속에 고변과 음해, 아비규환의 고문과 자백만으로 엮어낸 대숙청극이었다. 그래서 완전한 날조극이라는 주장이 예부터 있었다.

지은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정여립이 모반을 꿈꾸고 준비를 한 것은 사실이다. 50%가 날조된 옥사이고 50%가 정여립의 역모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시인 김지하씨는 정여립을 “(세상 뒤엎기를) 하다 만 사람”이라 평했다.

사건은 발생 초기 선조(1552~1608)마저 거의 뜬소문으로 여길만큼 첩보조차 구체성이 없었다. 조정은 정여립이 붙잡혀 와 자초지종을 고하기만 해도 해소될 별볼일 없는 무고사건 정도로 여겼으나 첫 비밀장계가 뜬 지 닷새 뒤 정여립이 도주했다는 장계가 떴고 곧 다시 그가 자살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가 도망쳐서 자살했다는 것은 곧 실제 반역을 꾀했다는 얘기가 된다.” 지은이는 이를 당시 정권에서 소외돼 있던 서인들이 정권 재탈환을 위해 정여립 일당을 이용한 모략극으로 본다. “기축옥사 최고 지휘관이 정철이었다면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은 송익필이었다.” 토정 이지함이 율곡 이이, 성혼과 더불어 시대의 스승으로 꼽았던 서인 송익필은 조선중기 8대 문장가에 들 정도로 학문이 깊었으나 아버지 송사련이 기묘사화 때 사건을 날조해 좌의정 안당 가문에 멸문지화를 안긴 과거사 때문에 동인의 핵심 제거대상이 됐고 마침내 동인 이발 등이 나서 송익필의 조모가 원래 안씨 가문 노비였던 걸 들춰내 송씨 일가를 모두 노비신분으로 ‘환천’시켜버렸다. 

가문 몰락의 한을 품고 보복의 기회만 노리던 송익필은 낙향한 뒤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에 가까운 반왕조적 대동사상에 빠져 이상사회를 꿈꾸던 정여립의 대동계를 반격의 고리로 활용했다.

신씨는 <동소만록>에 나오는 “정여립이 진안 죽도로 단풍놀이 삼아 놀러 갔는데 선전관과 진안현감이 죽인 후 자결한 것으로 했다”는 기록을 믿는다. 정여립이 고변으로 역모가 들통나자 도망친 것이 아니라 서인 쪽이 미리 심어놓은 진안현감 민인백 등이 단풍놀이 가자며 정여립을 죽도로 유인한 뒤 죽여버리고는 도망치다 자살했다고 보고함으로써 역모사건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건조사 총책임자가 된 서인의 행동대장 정철은 보고가 올라오기도 전에 정여립이 도망갔을 것이라 발설했다. 사전에 다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신씨는 단재 신채호도 “동양의 위인”이라 칭송한 “당대의 인물” 정여립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기록들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얘기가 세월 갈수록 그에겐 더욱 깊게 와 닿는다. 하지만 ‘정여립이 억울하게 당했다’며 그의 누명 벗기기에 골몰하는 역모사건 날조설엔 부정적 자세를 취한다. “그렇게 해서는 영국의 크롬웰보다 50년이나 더 앞선 공화주의자였던 정여립의 진보적 개혁사상을 재조명할 수도 없고, 역사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축기사>에는 정여립이 남겼다는 몇 마디 말이 기록돼 있다.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유비의 촉한이 아니라 조조의)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은 것은 참으로 직필이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유하혜는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는데….” 가히 혁명적이다.

신씨는 “정여립의 대동사상이 허균의 호민론으로, 그리고 다산의 탕무혁명론으로 이어졌으며 근대의 동학사상과 강증산의 화엄적 후천개벽사상, 미륵신앙도 그 줄기로 엮여져 있다”고 본다. 민중은 새 세상을 염원했다.

<한국사의 변혁을 꿈꾼 사람들>, <섬진강 따라걷기>, <다시 쓰는 택리지>, 그리고 이번 책까지 33권의 책을 써낸 신씨는 그 자신이 학위날조로 얼룩진 요즘 세태에 대한 하나의 ‘모반’이요 ‘풍자’처럼 보인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그는 진안 백운초등학교만 졸업했을 뿐 중·고교 모두 검정고시로 넘었고 대학은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옛문서들을 웬만큼 읽어낼 수 있게 된 것도 오직 독학한 덕”이다. “학벌 없어 당한 설움은 말도 못할 정도였다. 이젠 그게 오히려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야말로 학맥 학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통합적으로 쓸 수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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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문국현 신당’이 14일 첫 모습을 드러냈다. 문국현 대선 예비후보는 14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창조한국당(가칭) 창당 발기인대회를 열고, 창당 작업을 본격화했다.

이 행사에는 이계안 의원, 정범구 전 의원, 주애란 생명의 숲 대표, 윤준하 환경운동연합 대표, 이경자 녹색 네트워크 대표, 허상만 전 농림부 장관,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 김용정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김영호 전 산자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 이들을 비롯해 2500명의 지지자들이 몰려 행사는 성황을 이뤘다. 이들은 행사 중간중간에 ‘문국현 대통령’을 연호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창조한국당의 중앙위원 1번을 배정받은 문 후보는 연설에서 “문국현의 등장은 이 혼탁한 대선 판에 ‘사람중심 진짜경제’와 특권층만을 위한 ‘부패한 가짜경제’의 ‘가치논쟁’을 점화시켰다고 저는 자부한다”며 “창조적 전문가와 시민사회가 결합한 국민통합의 정당은 사람의 가치를 모든 분야의 중심에 두고 대한민국을 재창조하는 전진기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후보는 또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청년실업 문제를 거론하며 ‘눈높이를 낮추라’는 훈계를 늘어놓은 적이 있다. 이러한 발상이 가능한 근저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경멸과 무책임이 드리워져 있다”며 “5% 특권층의 눈으로만 사회현상을 파악하는 천민자본주의적 천박성이 문제의 핵심”이라며 이 후보를 비판했다.

그는 또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를 통한 일자리 500만개 창출 △건설부패 등 각종 부패행위 척결을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 △행정고시 폐지와 민간전문가 등용을 통한 정부 재창조 등의 공약도 내놓았다.

창당 작업을 실무적으로 주도한 창조한국 조직위원장 전재경 생명회의 대표는 이날 행사에서 “과거형 정당은 외줄을 즐겨 타지만, 좌우 어느 한 쪽 트랙만을 도는 정당은 곤란하다”며 “미래형 정당은 오른쪽에 있는 시장과 왼쪽에 있는 사회적 약자를 번갈아 보살펴야 한다”며 동참을 호소했다.

문국현 신당의 성패는 문 후보 자신의 힘으로 얼마나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문 후보는 오래 전부터 대통합민주신당 등 범여권의 러브콜을 받아 왔지만, 기존 정치권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며 대선 행보를 해 왔다. 양극화 심화에 책임이 있는 정치세력과는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통합민주신당 의원들도 문 후보의 잠재성은 인정하면서도, 탈당까지 결행하며 그를 위해 ‘제대로’ 돕겠다는 의원은 극히 일부다. 문 후보 쪽은 자체 역량으로 지지율을 높여, 통합신당의 대통령 후보를 압도해 단일 후보가 되겠다는 계산이지만, 아직까지 변화 조짐은 뚜렷하지 않다. 일단 통합신당 경선이 끝난 뒤 단일화 국면에서 문 후보의 지지율 추이가 그의 가능성을 가늠하게 할 것으로 보인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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