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가족 이야기
조주은 지음, 퍼슨웹 기획 / 이가서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1.
사회학이란 모름지기 이래야한다는 흐뭇함을 느낍니다.
<현대 가족 이야기>를 써낸 조주은씨의 말 그대로 옮기자면, '자신의 삶을 통째로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조주은씨는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남편을 만나 울산에 살면서 느낀 일상의 갈등을,
결국 한권의 책으로 써냈습니다.

물론, 여느 현대자동차 노동자의 아내와는 다르게,
대학도 졸업했고 대학원도 다니고 있지만,
그녀가 느끼는 일상의 갈등마저도 다른건 아닙니다.

일주일은 주간 일주일은 야간 노동을 해야하는 남편, 그리고 어린 두 아이와 함께 사원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그녀의 일상은,
그녀와 그녀 가족의 일상이면서, 현대자동차 노동자 가족의 삶 일반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느끼는 갈등은 현대자동차 노동자의 부인이라면 느낄 수 있는 그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갈등을 깊이 고민한 노력의 결과는, 현대자동차 노동자 부인들에게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사회학의 혜택이자 매력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2.
'자신의 삶을 통째로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은 사실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비록, 정도는 다를지라도, 우리는 매일같이 스스로의 삶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어제 하루 갈등을 가지고 있었고,
오늘 하루 고민이 있습니다.
이런 갈등과 고민은 누구에게나 연구대상이고, 우리는 나름대로의 연구 결과를 가지고 이런 갈등을 해결해나가죠.
또 때로는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를 만났을 때, '아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면서 자신의 경험으로 도움을 주기도 하구요.

저는 이런 것들 모두가 사회학을 구성하는 조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자동차에 다니는 남편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 많은 여성들 중에서 조주은이라는 여성에게 특별한 점이 있었다면,
아마 대학 졸업장과 대학원 학생증일진데,
대학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주어지는 학문적 기회들은,
그런 조각들을 조립하는 능력을 좀 더 키워주었을 겁니다.

일상의 조각을 주워모으는 과정 자체는 다를게 없습니다.

3.
사건의 순서를 따지자면,
대학 졸업이 첫번째이고, 결혼이 두번째, 대학원 입학은 세번째입니다.

결혼을 하고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에서 일하는 남편을 따라 울산에서 보냈던 얼마간과 그 속에서 느꼈던 풀어낼 수 없는 갈등이,
그녀가 아이를 들쳐업고 서울로 올라오게 했던 이유였던 셈입니다.

풀어낼 수 없는 갈등이 무엇이었는지, 그녀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남편의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서 연년생 두 아이를 키워야 했다. 그건 상상 밖으로 힘든 일이었다. 남편이 밤샘 야간노동을 마치고 아침에 들어오면, 아침상을 차려주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밤을 샌 남편이 숙면해야했기 때문에.
둘째는 들쳐메고, 첫째는 유모차에 태우고서 하루 종일 화봉동 거리를 쏘다녀야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집에 들어가면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들 때문에 남편이 자고 있는 집으로 들어간다는게 꺼려졌다. 종일 점심도 거른 배를 움켜쥐고 갓난쟁이 두 아이를 업고 밀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하염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 주부를 상상해보라.
그렇게 힘든데도 왜 하루 종일 길거리를 배회해야 했을까? 그게 차라리 나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울며불며 떼쓰는 아이들을 달래 본 적 있는지, 그리고 거기에 밤샘 노동에 지쳐 곯아떨어진 남편도 있었는지. 나는 혹시라도 남편이 깰까 신경이 곤두서고, 차라리 집을 나서는게 당영한 배려이며 내조라고 생각하는 아내이자 엄마였던 것이다.'

'내 안에 갈증이 생겼다. 곧 그 갈증은 갈등이 되었다.
..(중략)..
내 의문과 딜레마에 대해, 그리고 그 의문과 딜레마를 쉽게 이야기할 수도 없는 현실에 대해 강한 궁금증이 계속 일었다. 그리고 어느 날, 스스로 답을 찾겠노라는 다짐도 함께 생겨났다.
..(중략)..
나는 엄마, 아내, 여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다시 탐구해야 했고, 나와 우리를 그토록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시하고 싶었다.'

결국, 그녀는 서울에 올라와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고,
자신의 갈등을 풀어내려했던 그녀의 논문은 이렇게 한편의 책으로 나오게 됩니다.

4.
그 시작은 개인의 갈등에서부터 시작했을지라도,
이것이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를 얻기 위해서는,
한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말 그대로 '사회적'이어야 하는건데,
그 갈등의 원인이 되는 '사회의 구조'가 무엇인지를 밝혀내야하는겁니다.

갈등은 개인적이지만,
갈등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 구조는 일반적이기 때문에,
그 사회적 구조를 밝혀내면 그 혜택은 자신과 비슷한 갈등을 겪는 이들에게 혜택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여튼 그러기위해서는,
우선, 잠시 갈등이 가져다주는 감정에서 벗어나, 좀 더 주위를 둘러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의 경우는,
일주일 단위로 주야간 근무를 하는 남편의 직장,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남편과 전업주부인 자신,
그녀가 거주하는 사원아파트의 주부공동체,
그리고 울산이라는 지역의 특수성, 등등을 돌아보게 되고,
관련한 논문과 자료를 수집하고, 옆집 위집 아줌마들과 인터뷰도 합니다.

여기까지 왔다면,
여기서 한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됩니다.
단순히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가 아니라, '이게 이래서 저건 저렇다'는,
다양한 사회적 조건들간의 '연관관계'를 밝혀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5.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자동차 업계는 대부분 그녀의 남편처럼 일주일씩 주야간으로 일을 합니다.
일주일은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 일주일은 저녁에 출근해서 다음날 아침에 퇴근하는 것이죠.

이런 노동형태가 신체리듬상 전혀 올바르지 않다는 상식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자동차 업계들이 이런 노동형태를 고집하는 이유는, 설비 투자에 들어간 돈을 최대한 회수해야하는 기업의 생리에 있습니다.
자동차 산업과 같이 대규모 제조업일 수록 설비투자에 큰 규모의 자본이 필요하고, 새로운 설비투자가 있기 전까지(즉, 효율성의 측면에서 그 기계를 사용할 수 없게 되기 전까지) 최대한 기계를 돌려서 자동차를 많이 만들어야하는겁니다.
이것이 24시간 쉬지않고 라인을 돌려야하는 이유가 되는거죠.

고용은 기업의 권한인데,
자동차 업계 전체가 이런 노동형태를 가지고 있으니, 개인의 입장에서는 신체리듬을 따질 여지가 없어집니다.

6.
'주야간 노동'과 함께 자동차 업계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는 '시간제 임금'입니다.

현대자동차니 대우자동차와 같은 대공장 노동자들이 5,000만원에 가까운 연봉을 받는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실제, 책에 첨부된 노동자들의 월급명세서를 보면, 적게는 3,000만원에서 4,000만원까지 되어있는데요. 왠만한 대졸자 취업생의 2배 가까이 되는 연봉이네요.

이런 높은 연봉은 시간제 임금 덕분입니다.
머리 속에 떠올려보시면 대충 알겠지만, 자동차와 같이 대규모 제조업의 경우 호황과 불황일 경우 그 손차이가 엄청날 것입니다.

이런 호황과 불황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탄력적인 운영이 필요하죠.
호황일 때는 최대한의 동력을, 불황일 때는 최소한의 동력을 운영하는겁니다.

그런데, 고용이라는게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게 아닌지라 문제가 됩니다. 고용을 하면 임금을 줘야하고, 임금을 주는 것은 자동차를 만들기 때문인데, 팔리지도 않는 자동차를 만들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자동차 업계는 기본급의 비중을 줄이고,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잔업과 특근과 같은 시간제 임금을 광범위하게 도입합니다.
한마디로, 4,000만원이라는 상대적 고임금은, 기본 근무 외에도 매일 2시간씩의 잔업을 하고 휴일 및 공휴일에도 쉬지않고 특근(특별근무)를 해야 받을 수 있는 연봉이라는겁니다.

따라서,
휴일과 공휴일에 쉬고, 아침먹고 출근해서 집에 와서 저녁먹는 사람과,
매일 2시간씩 잔업하고 가끔이든 매번이든 휴일과 공휴일에 특근을 한 사람과는 연봉 차이가 엄청날 수 밖에 없죠.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하루의 여가시간과 휴일을 반납하고 자발적으로(?) 잔업과 특근을 선택하는 이유는,
기본급보다 훨씬 높은 비율의 시간급이 주어지는 매력(마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7.
잔업과 특근이 높은 비율의 시간급을 가지는 근거는 두가지입니다.
(휴일 특근의 경우는 20만원 가까이 된다는군요.)

잔업과 특근이 일반적인 생체리듬을 깨는 노동인 것이 하나요,
(낮에 일하는 것 보다 훨씬 힘들잖아요.)
호황과 불황시 유동적으로 라인을 돌려야하는 기업의 이윤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한 것이 둘입니다.

이 경우 불황이 되면,
낮은 기본급과 높은 시간급으로 이루어진 현대자동차의 상대적 고임금은 실상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잔업과 특근이야 추가적인 성격이 강해서 고용에 필수적이지 않으니,
잔업과 특근을 없애버리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테니까요.

8.
주야간 노동을 하는 남편과 전업주부인 부인, 그리고 두명의 아이로 정형화되어 있는 울산의 가정경제에서,
'주야간 노동'과 '시간제 임금'이라는 두가지 코드를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가족의 생계가 달려있는 가족임금을 벌기 위해서는,
'주야간 노동'과 '시간제 임금'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고,
가족의 생활은 남편의 노동형태에 강하게 종속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야간노동을 하고 돌아온 남편의 숙면을 위해서,
아이를 들쳐업고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현대자동차 노동자 부인들의 갈등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2시간의 잔업을 포함해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남편이 있다는 물질적인 조건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해도,
여성들에게 스스로의 삶의 기회를 박탈하고 남편과 가정에만 종속된 전업주부로 내모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10.
그런데,
여성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적극적인 기회를 박탈당한 갈증과 갈등을,
힘들게 노동하는 남편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자식교육에 대한 욕심으로,
달래고, 대리만족하는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는데에 진정한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이에 반하는 뜻으로는 '미봉책'이라는 것이 있는데,
미봉책은 당장의 문제에만 급히 대응하는 것으로, 해결하지 않은 문제의 원인이 다시금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어서 좋지 못합니다.

밤새 12시간 일하고 지쳐돌아온 남편이 안쓰러워 정성스럽게 밥을 차려줄 수 있고,
남편의 숙면을 위해 아이를 업고 밖으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특근 두번 하면 벌 수 있는 40~50만원의 돈을 위해서, 굳이 아이까지 맡겨놓고 낮은 시급의 유통업이나 서비스업에 직장을 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일하는 남편을 생각해서 자신은 검소한 생활을 하더라도 자식은 생산직 노동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도 있습니다.
전업주부의 힘든 일상을 같은 남편을 가진 옆집 위집 여성들과의 수다로 털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현실적이기에 미봉책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전업주부일 수 밖에 없는 물질적 조건이 되었던,
'가족임금을 전제로 한 남편의 주야간 노동, 시간급 노동'이 변하지 않는 한,
여기에 생계가 달린 가족의 생활형태는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이에 종속될 수 밖에 없을테니까요.

11.
그래서,
조주은씨는 이렇게 꽉 짜여진 틀에서 한발 나아가 '노동시장의 전면적인 재구조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주야간 노동과 시간급 노동이라는 노동형태에 대한 규제를 통해서, 갈등을 풀어낼 수 있는 '물질적인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말대로,
주야간 노동이 없어지고, 시간급 노동이 줄어든다면,
남성 노동자들에게도 가사노동을 분담할 수 있는 시간적 조건'은' 확보될 것입니다.

그런데, '은'에 강조를 두고자 함은, 그것은 말 그대로 '시간이라는 하나의 조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여성들 또한 누구에게 종속된 것이 아닌 평등한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가사노동이 분담되어야 하는데,
단순히 시간의 확보만으로 가사노동의 분담이 이루어질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겁니다.

그녀 역시도 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고,
동시에 가사노동에 대한 남성들의 의식전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12.
사실, 남성들에게 생계비를 전담시키고, 그에 따라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전업주부가 되어 가사노동을 하는 현상은,
남과 여, 여와 남간의 고정되어있는 특수성 때문이 아니라, 근대에 들어오면서 시작된 사회적 역할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근대'를 상징하는 열쇠 중의 하나는 '산업혁명과 제조업'.
대규모 생산설비를 통해 가장 적은 비용으로 대량의 재화를 생산해야 하는 제조업의 생리가,
위와 같은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실제, 제조업 이후에 떠오른 서비스, 금융, IT 분야는 굳이 남성에게 편중할 이유는 많이 없어진 듯 하고,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도 많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은 필연적으로, 여성들을 주체화하고, 남성들의 의식을 변화시킬 것이구요.

13.
그런데 저는 그녀의 문제의식과 해결책이 좀 더 완결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문제의식은,
노동시장의 전면적 재구조화와 여성의 사회적 진출, 그리고 가사노동에 대한 남성의 의식전환,
여기에서 멈추고있는데,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주야간 교대근무나 시간급 임금, 그리고 가족임금과 같은 노동시장의 형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효율을 통한 최대의 이윤이 지상과제인 기업의 생리에서는 그것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그렇다면, '노동시장의 전면적 재구조화' 역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야간에 멈춰있는 기계와 손실액을 계산해야하는 기업의 생리와 맞대면해야 하는 국면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녀의 기획은 여기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네요.

하지만, '노동시장의 전면적 재구조화'라는 결론은 그녀가 가진 문제의식의 줄기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실제 노동시장의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의 풍부한 문제의식을 발견하실 수 있을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
어렵지만 소중한 일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끝으로, 지금까지 얘기한 그녀의 삶의 위치가,
노동자 일반에 있지 않고, 소위 '노동귀족'이라 불리는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이라는 점을 좀 더 염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 위와 같은 노동현실 보다는,
노동시장의 60~70%에 이른다는 비정규직 노동자이 더 일반적일텐데,
이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60~70% 의 임금을 받고, 고용안정이나 여러 복지혜택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으니까요.
정규직 노동자들과 같은 주야근 교대, 잔업, 특근을 하면서도, 가족의 생계비용을 벌기가 빠듯한 것이 이들이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84년 청목 스테디북스 27
조지 오웰 지음 / 청목(청목사)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얼마 전에 조지 오웰의 <1984년>을 읽고 나름대로 흐뭇한 독서후기를 썼었는데, 당췌 찾을 수가 없네요.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었는지 돌아보니 대충 이렇습니다.

1.
제가 <1984년> 바로 이전에 읽었던 책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였는데,
참 기막힌 우연이었다는 점입니다.

중세가 막을 내리고 근대가 시작되죠.
그런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근대에 대한 기대와 함께 쓰여진 것이라면,
조지 오웰의 <1984년>은 사람들의 그런 기대가 회의로 바뀔 시점에서 쓰여진 것이라는겁니다.

신이 모든 것을 규명해주었던 중세에는 없었던 사람의 희망을 표현한 것이 <유토피아>와 같은 유토피아 문학이라면,

이름을 기억하는 것에 약합니다만은,
중세가 막을 내린 후에는, <유토피아> 외에도 많은 유토피아 문학, 그러니까 희망찬 사회에 대한 기대들이 쏟아져나왔었죠.
이런 희망은 1차 세계대전의 무수한 희생 속에서도 꺽이지 않았었는데, 2차 세계대전을 거쳐가면서 꺽이기 시작합니다.

2.
두번째는, <1984년>을 읽는 재미에 대해서입니다.

전체주의를 비판했던 이 책은 굉장히 요긴하게 쓰였던 모양입니다.

80년대 쯤에 출판된 이 헌책의 앞뒤를 덮고있는 그 당시 출판사의 홍보문구를 보면 더욱이 그러합니다.
일당독재, 일상생활에 대한 감시, 노동수용소와 같은 코드들이 강조되고있죠.

그런데, 제가 볼 때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들은 몇가지 더 있습니다.
출판사의 홍보용 코드들 역시나 중요합니다만, 몇가지 더 추가하고 싶은겁니다. 냉전시대의 쓰임새에는 별로 걸맞지 않았을지라도, 꽤 중요하게 느껴졌거든요.

첫번째는, 삼국지의 삼분지계를 떠올리게 하는, 3국의 세계질서.
이 책의 배경은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라는 3국을 기본으로 한다는겁니다.

두번째는, 3국의 경쟁질서와 전쟁과의 관계입니다.
소설에서는 심심하면 한번씩 폭탄이 떨어지는데, 자칫 소홀해질 수 있는 이 폭탄이 가지는 경제적 의미입니다.

세번째는.. 잊어버렸네요. ^^;

그럼, 여러분 나름대로 추가적인 코드들을 찾아 재밌게 읽으시길 바랄께요.
오랜만에 쓴 긴 독서후기를 줄이려니 너무 억울하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토피아 - High Class Book 42 세상을 움직이는 책 34
토머스 모어 지음, 박병진 옮김 / 육문사 / 200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유토피아.
우리는 흔히 `이상향`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만,
원뜻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상향`에는 분명 현실과의 괴리가 있기 때문에,
`이상향`이든 `존재하지 않는 곳`이든 얼추 비슷하긴 합니다만,
또 한편으로, `이상향`에는 현실을 딛고 나아가려는 적극적인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500년 전 사람인 토마스 모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어떠했을까 하는 호기심에 책을 들었습니다만,
한편의 저작을 둘러싼 배경은 더욱 흥미진진하더라구요.

<유토피아>라는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 고전은,
플라톤이 살았던 까마득한 옛날 이후에 다시금 유토피아 문학의 시작점이 되었던 저작입니다.
새로운 시작 이전에는 중세시대가 있었죠.

대충 감이 오시겠지만,
중세는 신에게 인간이 꽉 잡혀있던 시대였습니다. 종교의 영향력이 막강했죠.
신의 말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삶과 삶 이후까지 신에게 믿고 의지하던 때였으므로,
현실의 고통은 합리화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현실의 고통이나 불만, 갈등 따위가 늘 해결되었으므로 이상향을 꿈꿀 필요가 없었죠.
이상향이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중세가 막을 내리고,
현실의 고통과 불만, 갈등을 한번에 해결해주던 신의 말씀 또한 인간의 이성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갈등은 표면화되죠.

유토피아 문학은, 이런 현실의 갈등으로부터 다시 나오게됩니다.

실제, <유토피아>의 토마스 모어는,
1500년대 즈음 남미 본토를 발견한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기행문 <신세계> 에서 그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데, 사실 남미 본토야 오래 전부터 있어왔으니 `새로운 대륙`이란 외지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겠죠.

여튼,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발견한 신대륙, 그리고 거기에서 평화롭게 살고있던 원주민의 생활상은,
르네상스 시절 영국사회의 갈등을 발판 삼아 <유토피아>라는 문학으로 거듭나게 되는겁니다.
일종의 풍자문학이 되는 셈이죠.

1부는 라파엘, 모어, 피터 세 사람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화의 주제는 당시 영국사회에 만연했던 도둑에 대한 무차별적인 사형제도에 대한 각자의 해결책이고,
2부는 얘기를 좀 더 나누기로 한 세 사람이 따로이 자리를 잡고, 라파엘의 유토피아 경험담을 듣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유토피아>의 주된 내용이야, 당연히 라파엘(라파엘은 극중 신대륙을 보고 온 여행자로 설정되어있음)이 신대륙에서 보고 온 사회의 모습이겠죠.
생산수단 공유제와 하루 6시간의 노동과 충분한 여가시간, 민주적인 선거제도와 도덕적인 국민들, 신앙의 자유와 공동 집회를 비롯한 사회 곳곳의 모습은 당시 영국사회를 교묘하게 비꼬면서 이상향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각박해지는 현실에서 현실논리와의 싸워 질 수 밖에 없는 것이 공상입니다.
꿈을 꿀 수는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엔 무모하기 때문에 맥이 빠지는 것이 공상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공상은 소중합니다.
공상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 할 때 나오고, 보다 나은 미래를 꿈꿀 때 나오기 때문입니다.
공상은 멋들어진 결과는 아닐지라도,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실과 지향 - 한 자유주의자의 시각
복거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1월
평점 :
품절


복거일씨의 <현실과 지향 - 한 자유주의자의 시각> 을 읽었습니다.

1. 보수주의 논객을 기다리며
3. 고등 교육에 시장 원리를 도입하는 길
5. 산업 혁명 뒤의 농촌
6. 민주화의 수급 균형
7. 시장 경제 속의 노동조합
8. 사회적 선택과 개인들의 몫

이렇게 8가지 사안에 대해서 '자유주의적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무슨무슨주의라는 하나의 성향을 나타내는 단어를 받아들일 때는,
정치와 경제, 두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오해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정치를 X축으로, 경제를 Y축으로 두고,
다양한 무슨무슨주의의 좌표를 결정해보는 것이죠.

[정치]의 범주에서 보면, 전체주의와 개인주의가 최대값과 최소값이 될 것이고,
[경제]의 범주에서 보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최대값과 최소값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X축과 Y축으로 평면을 나누었을 때 생기는 4가지 면은,
전체주의적 자본주의, 전체주의적 사회주의,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개인주의적 사회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왜 흔히 들어왔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빠져있는데,
민주주의의 경우 객관적이기 보다는 주관적, 이상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뺐습니다.
민주주의는 민(民)이 주인(主)이 되는 것인데, 과연 무엇이 민주주의냐 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결국 우리는 정치와 경제를 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의 경우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갖는 이상적인 사회를 표현하기 때문에 뺐습니다.
<제3물결>을 쓴 앨빈 토플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2물결 사회가 아닌 제3물결 사회인 셈이죠. 개념 자체가 다른겁니다.
흔히들, 구소련, 북한, 중국, 쿠바와 같은 나라들을 '공산주의'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전제하는 것은, 1. 국가 소유의 경제 2.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 인데,
그것에 대한 표현이라면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로 충분합니다.
그 국가들이 이상적인 사회가 아닌 바에야, 공산주의라는 표현은 걸맞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자유주의적 시각'을 표방하고 있는 복거일씨의 경우는, X축은 개인주의 쪽에, Y축은 자본주의 쪽에 위치한 '개인주의적 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서론 격인 <1. 보수주의 논객을 기다리며>를 제외하고 보면,
3. 고등 교육에 시장 원리를 도입하는 길
5. 산업 혁명 뒤의 농촌
6. 민주화의 수급 균형
7. 시장 경제 속의 노동조합
8. 사회적 선택과 개인들의 몫

와 같은 주제들은 거의 그런 시각에서 쓰여져있습니다.
(2, 4번은 민감한 문제이므로 다루지 않겠습니다.)

'개인주의적 자본주의'를 좀 더 풀어보자면,
정치적으로는 전체보다 개인을 중요시하고,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를 철저히 옹호합니다.

이 둘은 은근히 맞닿아있기도 한데,
흔히 시장의 실패를 조정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할 때,
전체보다 개인을 중요시하는 정치적 견해는, 정부가 개인이 주체가 되는 시장경제에 간섭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경제적 견해와 맞물립니다.
정부는 시장의 규칙을 준수하는데에만 주력해달라는 것이죠.

물론, 이런 경제적 문제들 뿐만 아니라,
매춘, 마약, 선거권, 등과 관련해서도 정부가 인위적으로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논리, 즉 개인의 자율에 맞겨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바로 오늘에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요,
대표적인 경우가 분양원가 공개와 관련한 정부 여당의 입장입니다.
경제학을 전공하고 <경제학 카페>라는 책을 써냈던 정부 여당의 한 의원은 '시장친화적 경제정책'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바로 그것이 이런 논리에 입각한 정책입니다.
(여담이지만, 이런 점에서 그 스스로 자신을 지칭하는 '얼치기 경제학도'라는 표현은 그저 대외용 멘트에 불과한 것 같네요.)

높은 분양가라는 [시장의 실패]에 대해서,
분양원가 공개라는 [정부의 개입]은,
선한 의도와는 달리 부작용을 남길 수 있다는 우려였죠.

<경제학 카페> <현실과 지향> 이라는 책을 통해서 비교해 보면,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유시민씨와 복거일씨 두 사람의 견해는 대동소이한 측면이 있습니다.
시장과 정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슷하지만, 매춘, 마약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약간 다릅니다.

차이를 명확히 비교하기엔 <경제학 카페>가 조금 모호하게 쓰여져있는데요,
최근에 초판된 <경제학 카페>와는 다르게 <현실과 지향>의 경우 90년에 초판된 책이라서 조금 거친 감이 있지 않나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마냥 삼천포로 빠져보자면,
이런 주장의 원조격은 <자본주의와 자유>라는 책입니다.
경제학계에서 꽤 유명한 밀턴 프리드먼이라는 사람이 쓴 책이죠. (경제학자 하면, 아담 스미스하고 케인즈밖에 모르시는 분들이라면, 마르크스와 밀턴 프리드먼은 꼭 알아두셔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1960년 쯤에 출판되어 출판업계와 심지어 방송을 휩쓸고, 급기야 노벨 경제학상까지 받았던 책 <자본주의와 자유>.
물론,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현실과 지향>을 읽으면서 대충 그러겠거니 예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피터 카탈라노라는 외국인이 쓴 서평만 읽었는데, '순간에 취기가 돌게하는 독주'라는 표현이 이해가 가더군요.

1960년이면, 스태그플레이션이라 해서 불황 속에서도 물가가 오르는 기이한 현상을 계기로 J.M.케인즈라는 유명한 사람이 한물 가버린 때인데,
이 때부터 밀턴 프리드먼이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우리도 익히 알고있는 '新자유주의'를 유행시키게 됩니다.
실제 밀턴 프리드먼이 나온 시카고대학의 후배들이 각 국 정부의 경제담당 부서를 맞게되고,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 한국은.. 김대중 정부 정도가 이런 경제정책을 시행했었죠. 이쯤되면 대충 감이 잡히시리라 생각합니다.

여튼, <현실과 지향>이라는 책이 대략 이러한 맥락에서 쓰여졌다고 받아들이면 될겁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이런 류의 주장이 주장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 각 국 정부의 경제정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90년에 복거일씨가 주장했든 주장하지 않았든,
04년 우리나라 역시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대로 정부의 규제보다 시장의 힘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구요.

이런 점에서 '순간에 취기가 돌게하는 독주'라는 표현은 다시 한번 의미심장합니다.
정말 그럴싸한 주장과 부정적인 현실의 모습의 모순적인 스크랩.
다시 한번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 앞으로 제가 할 일인 것 같군요.

서론 격인 [1. 보수주의 논객을 기다리며]를 제외하고,
[5. 산업 혁명 뒤의 농촌] [7. 시장 경제 속의 노동조합] 은 그동안 고민해왔던 주제이니 만큼 좀 더 쉽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고,
[3. 고등 교육에 시장 원리를 도입하는 길] [8. 사회적 선택과 개인들의 몫] 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이전 책들을 재차 뒤적여 볼 참입니다.
에구 열심히 좀 해야겠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극 감상법 빛깔있는책들 - 즐거운 생활 192
안치운 지음 / 대원사 / 199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대학 시절 '풍물굿판 기획'이라는 것에 한참 빠져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가한 휴학생인 주제에 이것도 하자 저것도 하자, 학과공부를 하면서 활동해야했던 다른 친구들이 꽤나 귀찮았을겁니다.

시간이 지나, 당시 저에게 그만큼의 에너지를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봤지만,
제 감정에 솔직했던 것 밖에는 기억에 남지 않더군요.
문화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포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때 제 갈등은 이랬습니다.

학교 축제 기간에 공연을 하는데, 저희 공연 다음이 댄스 동아리 공연이었거든요.
그런데 한달 가까이 준비한 공연을 마친 친구들이, 짐 정리도 안한 채로 댄스 동아리 공연으로 달려가는겁니다.

함께 공연한 친구들을 모습을 보면서 참 허탈하더라구요.

물론,
댄스를 좋아하든 풍물을 좋아하든, 아니 댄스 풍물 모두 좋아하든,
충분히 다양할 수 있지만, 그래도 형식이나마 풍물을 우선으로 꼽는다는 친구들인데, 이 친구들에게 풍물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풍물은 달라져야 한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2.
축제 얘기를 좀 더 하자면,
축제의 무대에서는 풍물과 댄스 모두 '무대 위의 공연물'로서 작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무대 위의 공연물'을 준비하는 우리는 그만큼 철저하지 못했죠.
그저 관성적으로 늘 하던 고창지역의 판굿을 압축해서 보여준겁니다.

고민도 준비도 없었던 공연의 결과는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소리든 음악이든 춤이든, 관객에게 볼거리로 승부해야하는 '무대 위의 공연물'로서는 별로 적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죠.

풍물을 흔히 김덕수씨의 '사물놀이'로 알려져있는 '무대 위의 공연물'로 만들던,
아니면 생활 속의 무엇으로 만들던 우리의 선택이었지만,
우리는 고민도 선택도 하지 않았던겁니다.

불만이 여기까지 올라오자,
정기공연을 비롯한 활동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겼고,
결국 저는 한해 더 활동을 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풍물굿'을 고민하고 실험하게 됩니다.

3.
뜬금없이 지난 대학시절을 꺼내는건,
사실, 안치운씨의 <연극 감상법>에 대한 독서후기의 서론이었습니다.

책을 한눈에 읽을 수 있었던건,
책의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은 탓도 있지만,
지난 시절 풍물이라는 문화에 대해서 고민한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는 사람도, 함께 하는 사람도 즐기지 못했던 대학의 풍물판과,
연극 비평가 안치운씨가 얘기하는 연극판의 얘기들은 굉장히 흡사했습니다.

그리고, 풍물판에 대한 고민이 닿았던 끝자락에 연극이 있기도 했구요.

4.
사실 저는, 작년인가 대학로에서 본 한편의 연극이 전부입니다만,
연극은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 남자친구를 쫓아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는 한 친구가, 그 때 즈음엔 학교 연극부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었는데,
그 친구와 함께 술잔을 귀울이며 '인생 별거 있냐'며 흰소리를 해댔었습니다.

연극을 즐기지 않았던 제가 연극을 동경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연극만큼이나 창조적이고 질펀한 문화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형식으로 따지자면 하나에서부터 끝까지 직접 만들 수 있고,
내용으로 따지더라도 모두 자신의 얘기와 갈등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이 연극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연극을 너무 몰랐었죠.)

반면 풍물은 얽매이는 것이 많았죠.
형식으로 보자면, 지역의 판굿이 정형화 된 채로 존재했었고, 그 속에는 단연 가락이며 춤이 담겨있었습니다.
내용으로 보더라도, 풍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락 연주는 늘 표현하기 힘든 무엇으로 따라다녔으니까요.
(풍물도 너무 몰랐습니다.)

여튼, 개강이니, 시험이니, 축제니, 취업이니, 연애니,
대학시절의 일상을 함께하는 갈등들을 풍물답게 표현하고 즐기려는데 한계를 느낀 저는,
결국 그 해 끝자락엔, 연극이 더 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면서 실험을 매듭지었던겁니다.

5.
지금은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만,
그때 풀어내지 못한 갈등들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흔한 풍물판들을 보면서 일말의 아쉬움이 남는겁니다.
이미 정형화 된 판을 멋지게 보여주는 기술들을 늘어나지만,
삶의 냄새가 담긴 그런 판은 왜 그리 보기 힘든지.

사람의 감정이니 갈등이니 정해져있는 것도 아닌데,
예정된 날짜에 하는 '풍물공연'만큼, 왜 하고싶을 때 내키는대로 하는 '풍물판'은 없는지 아쉬움이 남는겁니다.

6.
이런 아쉬움의 한켠으로는, 제 생각이 투정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가 농사가 生業이던 시절을 살고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버스와 지하철, 책상의 컴퓨터와, 공장의 기계들에 익숙한 우리에게, 풍물의 악기란 장농에 넣어두고 수시로 꺼내어 쓸 수 있는 무엇이 분명 아닐겁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연극을 부러워하게 되었습니다.
농사가 생업이던 시절에도, 지금도,
연극은 삶의 표현하는 적절한 수단으로서, 마당에서 무대를 넘나들며 이용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또 현실이 그리 만만치 않은가 봅니다.

7.
<연극 감상법>의 안치운씨 역시도 저와 비슷한 관점으로 연극을 감상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배우, 극단, 극장, 연출, 관객, 등 연극 전반에 관한 내용들을 그저 받아들이는 수준에 그치긴 했지만,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안씨의 관점이 저와 크게 같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죠.

'연극을 직업으로 삼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살아간다는 면에서 다른 어떤 직업과 다르다'고 얘기하고 있고,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의 사회적 갈등을 표현하는 것이 연극의 중요한 요소임과 동시에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진단하는 바와 같이,
오늘날의 연극이 삶의 갈등을 풀어내려는 몸부림으로 사람들과 호흡하지 못하는 것은,
연극을 어려워하고, 연극이 마치 문화의 상위 그룹이나 되는 것인양 생각하는 오늘날의 풍조가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듯,
옛 극장을 회복하여 단절된 극장 문화의 맥을 연결하고, 역사적 현장을 연극 무대로 만들며, 시립 도립 국립 극장 및 도심 속의 극장을 늘리자는 제안이,
연극인의 자성과 관객의 역할을 강조하는 제안이,
얼마만큼의 실효성을 가질지는 의문입니다.

연극의 위기는, 단지 연극만의 위기가 아니라 시대의 위기일테니까요.
문화를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상품이 되어 공급하고 소비하는 시대의 위기에서 한 연극인의 바램은 너무나 소박하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